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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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디선가 가깝고도 먼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말처럼 한민족이자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북한에 대해 내가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무지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다양한 사진 자료와 함께 1945년부터 비교적 최근까지의 북한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객관적이고자 하는 저자들의 엄청난 노력과 기술이 엿보인다. 하지만 북한 역사의 객관적 서술이라는 말 자체에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북한사람이 아닌 제3자의 입장인) 보기에는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객관적이라고 보기 힘들 것 같다. 당연히 비판적이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지극히 객관적(?)인 논평만 하고 북한의 입장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업섰던 이유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북한 현대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은 부각시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은 변명을 해 준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책이 객관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주체인 독자인 나도 사실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남한 사회가 해방이후 최근까지도 북한에 대하여 말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해왔고 북한이란 남한을 전복시켜 적화통일만을 노리고 있는 타도해야할 집단으로 인식해왔기 때문에 남한에서 교육받고 자란 나 역시 북한에 객관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자제하고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여 서술한 이 책의 논조를 결국은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권력을 차지한 김일성이 왜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수령중심 체제를 만들었는지(1960년대 북한의 고립무원적인 대내외적 상황때문이라고 한다-p181), 그와 같은 수령제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지(p290), 북한이 최근의 경제, 외교적 위기에 처한 원인과 전망에 대한 서술은 이 책의 목적과 의미를 고려하더라도 좀 많이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을 통하여 북한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 독재국가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북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많이 거두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지만 개괄적인 북한 현대사에 관한 첫 서적이라는 점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사회가 좀 더 개방되고 성숙하여 북한에 대하여도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잣대와 똑같은 잣대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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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3-0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바닥님, 이 책 읽으셨군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출판되자 마자 사서 본 책인데 참 감명깊게 본 책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님의 리뷰를 보니 다시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서평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3-0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몇몇 아쉬움은 있지만 이런 책의 존재 자체의 의미가 큰 것 같아요.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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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에 관한 작가의 후기를 읽고는 나는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무언가 눈물 나도록 벅차거나 감동적인 순간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의 이미지를 그렸는데, 소설에서 나오는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정말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 순간’이 결코 황홀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에 내가 가진 ‘그 순간’에 대한 통념이 작가에 의해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푸훗’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만끽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에피소드는 소설이 아니고서는 그 참맛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나 만화로 그 장면을 연출해서 소설을 읽으면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던 그 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성석제의 단편 소설집을 두 권 읽었는데, 일단 드는 생각은 작가가 맛깔나게 이야기를 잘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술자리에서 무용담처럼 들려줄 법한 이야기 거리를 유치하거나 밋밋하지 않게, 그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푸훗 하는 웃음이 터져 나오게 술술 풀어내는 솜씨가 정말 탁월한 것 같다.


다시 소설의 제목으로 돌아와서 작가후기에 나온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우리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벅찬 감동이나 평생 기억할 만한 일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문구처럼 열심히 일하는 와중의 휴가가 꿀맛 같듯이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있기에 ‘그 순간’이 번쩍이고 황홀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항상 번쩍하는 순간으로 가득하다면 오히려 참 피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돌이켜보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내 인생에 몇몇 그런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런 순간들을 새롭게 마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번쩍하지는 않지만, 번쩍하는 그 순간을 더욱 번쩍하고 황홀하게 해 주는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묵묵히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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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4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2-2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님 말씀대로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독서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번쩍하든 아니든^^ 행복한 주말 되세요~
 

FTA ‘빅딜’ 아닌 ‘쪽박딜’로 간다
[한겨레 2007-02-16 05:09]    

[한겨레] 한국 ‘반덤핑 비합산 조처’ 요구 접어
미국 “자동차·의약품서 의미있는 진전”
농산물 큰폭 양보속 섬유쪽 실익없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 지점으로 성큼 나아갔다. 미국 워싱턴에서 14일(현지시각) 폐막된 7차 협상에서 양쪽 협상단은 나름대로 만족스럽다고 평가했다. 무역구제·자동차·의약품 등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하던 분야에서 타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하다. 불과 한달여 전 서울에서 6차 협상을 끝낸 다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졌다.

이처럼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는 한국 쪽의 무더기 양보다. 이번 7차 협상에서 한국 협상단은 그동안 “총력을 쏟겠다”고 공언해 온 무역구제 분야에서 핵심 요구사항을 접었다. 바로 덤핑 피해 판정 때의 ‘비합산 조처’다. 이는 미국이 중국 등 동남아 국가 제품의 덤핑 피해를 판정하고 반덤핑 관세를 부과할 때 한국산 제품까지 함께 엮어서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요구다. 이는 그동안 미국의 반덤핑 제재에 시달려온 국내 수출업계의 숙원이기도 해 협상단은 자동차·의약품 분야의 미국 요구와 ‘맞교환’(빅딜) 거리로 삼을 정도로 중시해 왔다.

하지만 7차 협상에서 미국이 “법개정 사항”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자 비합산 조처를 포기했다. 대신 자동차와 의약품 분야 협상에서는 미국 협상단은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자동차 분야에선 우리 쪽 협상단이 결국 미국의 요구대로 배기량 기준 자동차세제를 개편하는 안을 냈으며, 미국이 ‘비관세 장벽’이라고 주장해온 기술표준제도도 미국에 유리하게 고치기로 합의했다. 의약품도 약값 산정 때 미국 업체의 의견수렴 절차를 두기로 합의했으며, 신약의 특허권 연장도 원칙적으로 수용했다.

이밖에 6차 때까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농산물 분야 협상에서도 진전의 실마리를 우리 쪽에서 제공했다. 시장개방의 마지노선이자 관세철폐에서 제외됨을 뜻하는 ‘초민감품목’ 수를 235개에서 100여개로 줄인 상태다. 이는 역대 최대 개방폭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맺은 에프티에이에서 농산물 예외품목은 한-칠레 에프티에이가 413개, 한-싱가포르 484개, 한-유럽자유무역연합(EFTA) 956개였다.

반면 농산물과 연계해 우리 쪽에서 공세를 펼쳐온 섬유 협상에서는, 미국이 세차례나 수정안을 냈지만 알맹이가 전혀 없었다. 김종훈 수석대표를 비롯한 우리 쪽 협상단 관계자들은 섬유분야의 미국 수정안에 “너무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한결같이 쏟아냈다.

결국 무역구제-자동차·의약품, 농산물-섬유 등으로 연계된 협상의 결과는 한국으로서는 ‘빅딜’이 아닌 ‘쪽박딜’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워싱턴/송창석 기자 number3@hani.co.kr


김종훈 수석대표
“만족스럽게 보긴 어렵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7차 협상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타결이 임박했다거나 만족스럽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단서를 달았다.

-커틀러 대표가 무역구제에 대해 한국으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았다고 했는데?

=두 수석대표가 논의한 가장 큰 부분이 이것이다. 구체적 내용을 밝히기는 좀 이르다.

-8차 협상은 기존 협상과는 다르게 목요일(3월8일)에 시작하는 이유는 뭔지?

=돌아가면 서로 해야 할 과제가 있다. 새로 입장을 정리하고 다시 만나야 하는데, 월요일인 3월5일에 시작하기에는 양국 모두 준비기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에 조금 늦췄다.

-커틀러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처럼 말하는데….

=상당한 진전 있었다. 그러나 타결이 임박했다거나 만족스럽다고 보긴 어렵다.

-이번 7차 협상을 ‘타결의 시금석’이라고 했는데?

=타결 기반을 잘 조성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협상의 진도를 봐서는 적기 타결도 가능할 것 같다.

-미국이 낸 섬유관세의 철폐안 수준이 어떤지?

=우리 기대에 미흡하다. 대신 미국은 (중국산의 한국을 통한) 우회수출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막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송창석 기자 number3@hani.co.kr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
“자동차분야 굉장히 좋은 논의”

웬디 커틀러 미국 쪽 수석대표는 7차 협상에서 “굉장히 좋은 논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농산물에서는 어려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자동차와 무역구제에 대한 분과는 진전이 없었나?

=자동차는 굉장히 좋은 논의가 있었다. 세제개편뿐 아니라 다양한 비관세조처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김종훈 수석대표가 무역구제에 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는데 굉장히 좋은 안이었고 조심스럽게 살펴볼 예정이다.

-오늘 아침 의회 청문회에서 한 의원이 “한국에서 자라나지 않는 곡물에 대해서도 한국 협상단이 저항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쌀에 대해 진전이 있었는지?

=농업분과 협상은 이번에 강도 높게 진행했다. 다양한 품목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민감한 품목은 아직도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원산지 인정 문제는 논의했는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원산지 분과에서 논의됐는지 모르겠다. 분과장과 얘기해 봐야겠다.

-8차 협상은 어떤 형태로 얼마나 오래 하게 되나?

=협상의 구조나 형식은 논의 중이다. 무역촉진권한(TPA) 마감시한을 고려했을 때 가능한 한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정할 것이다.

송창석 기자 number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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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넷 > ‘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카의 정의는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는 진보한다’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 주도권
미래의 새역사 목표로 과거를 극복 대상 삼는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현재와의 대화 요구하지만
진보가 아닌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
한겨레
»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모습. E.H.카는 역사를 움직이는 건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보고,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고 믿었다.

고전 다시읽기/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누가 나를 역사가로 만든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다. 이 책은 나를 포함한 이 땅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거의 모든 역사학도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고 19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온 몸을 내던졌던 청년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386세대를 키운 것도 바로 이 책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6년 길현모 교수에 의해 처음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이래 서점가에 10여 군데가 넘는 출판사의 판본이 나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테제를 요약하면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역사는 과학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담론이다. 탈근대 역사서술의 집중적인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2개의 거대담론이다. 탈근대에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핵심을 이뤘던 테제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면, 이제는 카의 근대 역사학을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정의가 나와야 한다.

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어떤 식으로 역사의 과학성과 진보를 논증했는지부터 고찰해야 한다.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은 역사라는 말 자체가 과거사건(Geschichte)과 그에 대한 기록(history)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었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단지 그에 관한 흔적으로서 단편적인 사료들만이 존재하는 현재에서 과거 그대로를 재현하는 역사를 어떻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는 결국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면, 역사가의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역사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현재의 역사가는 자신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과거의 사실들만을 역사로서 서술할 뿐이며, 그래서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말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정의는 위의 양극단적인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기 위한 시도였다. 역사가의 과거와의 대화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그가 ‘왜’라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카는 ‘왜’라는 역사가의 질문에는 언제나 ‘어디로’라는 또 다른 질문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마치 마르크스가 “문제 안에는 해답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결국 목적 없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성립하지 않는다면, 카는 그 목적은 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를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수정 보완했다. 과거를 해석하는 목적이 미래의 목표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가 과거 해석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란 실재이고 역사란 그것의 현재적 의미라면, 카는 그 의미와 무의미를 나누는 범주, 곧 역사인식의 패러다임을 진보로 규정했다. 곧 그는 진보를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제”로 설정함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역사’와 ‘진보로서의 역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보를 구체적으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세대가 희생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진보라는 역사의 대의는 중세에서 신의 섭리와 같은 종교적 명분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카는 이처럼 역사의 진보를 하나의 신앙처럼 믿었던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 직면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가 과연 진보인지를 회의하며,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혁명을 통한 사회적 실험을 함으로써 초래됐던 역사의 재앙들을 반성한다. 지난 20세기는 홉스봄의 말대로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가장 큰 믿음을 가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을 맞이했던 ‘극단의 시대’였다. 혁명의 시대로서 근대가 급진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앤서니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을 넘어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역사에 내재한 가능성을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가능성을 믿어야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식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진보란 과거와 현재를 미래의 인질로 삼는 방식으로 하는 역사의 대화이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다.

카는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사실’과 대화한다는 점을 토로했다.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에만 발언권을 주고, 또 발언순서까지를 결정한다면, 과거와 현재사의 평등한 대화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근대 경험론의 시조인 베이컨이 자연이 숨기고 있는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을 통해 자연을 고문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카는 과거와의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는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을 갖고 과거를 문초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 방식은 진보라는 1가지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가지가 있다. 먼저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는 현재보다 과거에 중점을 두는 대화 방식을 지향했다. 니체는 이러한 전통적 역사담론을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로 구분했다. ‘기념비적 역사’란 과거를 현재의 모범으로 삼는 방식이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역사란 생의 교사다”라는 말로,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의 거울(鑑)”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골동품적 역사’란 전통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의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됐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의 시금석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 때문에 골동품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 역사의 담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4가지 대화방식으로 생산 담론을

위의 전통적 역사담론과 다르게 근대 역사담론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 역시 2 가지 대화형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니체가 ‘비판적 역사’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과거를 극복대상으로 삼는 방식으로, ‘과거청산’이라는 역사담론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두 번째는 ‘생성적 역사’다. 비판적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생성하는 것, 곧 새역사 창조다. 이러한 새역사에서 역사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새역사 창조란 미래로서의 역사, 곧 역사의 진보를 요구하는 담론이다.

최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이하 <재인식>)이라는 한권의 책이 우리사회를 역사의 내전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하 <인식>)을 과거로 보고, 2006년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의 재인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화의 방식이 카와 같은 진보를 위한 ‘비판적 역사’가 아니라 반대로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라는 점에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현실의 진보가 이념의 보수화를 낳음으로써,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파로 불렸던 시장경제주의자들이 좌파로 지칭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우파로 불리는 가치의 전도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제는 진보 개념도 더 이상 좌파의 전유물이 되지 않는 탈근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탈근대의 조건 속에서 <인식>에 대한 <재인식>은 필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식>과 <재인식> 사이의 역사논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현상은 우파들이 그 역사논쟁을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인식>과 <재인식> 사이의 역사논쟁은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내전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의 사회적 기억을 합의하고 우리역사의 미래 방향을 정하는 생산적인 담론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1가지 대화 방식이 아니라 4가지 대화 방식이 상호 교차하는 역사담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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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아 교수님과 본가에 드릴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대목이라 그런지 백화점 선물코너는 발 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무엇을 살 지 고민을 하며 선물코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가격에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었다.

사과 10개가 10만원, 잣이랑 호두 한움큼씩 들은 선물 세트가 15만원, 한우 세트는 아예 30-40만원부터 시작했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백화점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매년 명절에 선물을 사러 갈 때마다 속으로는 부아가 치민다. 이것들이 명절이라고 정말 대놓고 바가지를 씌우는구나...라는 생각에 괜히 죄없는 판매원들에게 시비를 걸어보고픈 충동까지 든다.

개인적으로 좀 품질에 걸맞지 않게 비합리적인 가격에 무척 분노하는 편이고, 비싸서 맘에 안들면 안사면 그만이겠지만, 명절에 선물을 하는 풍습(?)에 홀로 반기를 들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싸보이는 선물을 할 수도 없어 남들 하는 풍습에 동참하고 있는 나로서는 명절 바가지에 항상 심기가 불편하다.

10만원대 이상만 보다가 초콜렛 몇개 담긴 선물상자가 3-4만원 하는 것이 싸보였다니 내가 이상한 것인지,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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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2-14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코릿 선물상자의 가격에서도 분노합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2-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초콜렛 선물상자에도 분노했습니다. ^^;; 첨엔 절대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싸보인다 했는데 1,2초 뒤에 역시 분노했습니다. ;;

가넷 2007-02-1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정말 과하네요.;

짱꿀라 2007-02-1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 10개의 십만원 너무 했네요. 진짜루 고가품이네요.

외로운 발바닥 2007-02-1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해마다 명절 때 항상 맘이 정말 안 좋아요...
산타님/ 겉으로 보기엔 3-4만원짜리 마트 선물세트와 별반 차이도 없던데...뭐 인삼을 먹이거나 유기농 재배를 하기는 했을 거라고 믿어는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