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2disc) : 디지팩
박찬욱 감독, 이영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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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이름을 외우는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하나가 박찬욱 감독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특별히 감명깊게 보아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올드보이로 박찬욱 감독이 너무 유명해져서 나또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특정 감독의 필르모그래피를 쫒아 영화를 볼 정도로 열성적이거나 영화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았을 때도 이 영화가 그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씨리즈로서 이영애가 주연을 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배경지식만을 가지고 흥행에도 꽤 성공한 유명 영화를 본다는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복수’다. 그것도 13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아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러한 복수가 성공했는지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금자가 복수에 성공을 했는지, 복수에 성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관객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무척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해서 특이한 방법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다는 것 말고는 과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솔직히 잘 알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의 제작의도가 벌써 공표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적어도 나는 영화를 보고 ‘그럭저럭 볼만하긴 한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인공역의 이영애에 대해서도 박찬욱 감독의 유명세와 함께 이영애 자신의 유명세로 인하여 완벽한 연기변신을 이루어 냈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보았는데, 개인적인 반응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영애가 과연 금자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영애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리고 금자라는 캐릭터와 이영애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금자가 금자로 느껴지기 보다는 이영애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언가 열연을 하고 있기는 한데, 금자라는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다는 느낌이랄까...


그밖에 영화의 구도나 화면이 무척 이뻤다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의 화면이 웅장하고 스펙태클하게 멋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화면은 마치 인테리어 잡지 속의 잘 배열된 소품 또는 잘 꾸며진 실내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쁜 달력 그림 같다고 해야 하나. 한 장면 한 장면 마다 구도나 화면에 무척 신경을 쓴 느낌이다. 그리고 독특한 분위기의 나레이션, 머리에 빛이 나거나 수형자의 인적사항이 재미있게 화면에 제시되는 장면 등은 무척 신선하고 또 맘에 들었다. 

 


색상의 절묘한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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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3-2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비디 패키지는 어떤가요? 흑백판이랑 2disc라고 하던데,
살까 말까 고민중이거든요.

외로운 발바닥 2006-03-2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빌려본 것이라 도움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에궁~
 
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충동구매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그랬겠지만, 반지의 제왕에 버금가는 환타지 대작이라는 나니아 연대기가 영화로 출시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우연히도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출시되기 얼마 전 소설을 다 읽고 영화로 반지의 제왕을 접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또한번 느껴보고 싶었기에, 나는 알라딘을 검색하여 불과 며칠 차이로 할인쿠폰을 놓치고서도 3만원에 육박하는 육중한 무게의 - 혹자는 이 책을 들고 있으면 아령을 하는 기분이라거나 누워서 책을 읽다가 책을 놓치면 부상이 우려된다고도 하였다 - 이 책을 덜컥 구매하고 말았다.


사실 책을 구매하기 전에도 약간 미심쩍은 구석은 있었다. 똑같은 제목의 책이 7권으로 나누어져 동화책으로 출판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니아 연대기가 원래 동화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영화개봉에 맞추어 출판사에서 이른바 ‘성인판’을 낸다고 했을 때는 막연히 어린이 동화책과는 무언가 좀 다르겠지 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 사실 책 자체가 그렇게 비난받을 것은 아니다. 원래 동화책이었으니까. 사실 다른 것을 기대한 내 잘못이고, 그런 심리를 알게 모르게 이용하여 똑같은 내용을 성인판이랍시고 웬만한 법서보다도 두꺼운 분량으로(사실 책이 그렇게 두꺼워진 것은 책의 가격을 높여보려는 출판사의 얄팍한 편집기술에 기인한 바가 크다) 출판한 출판사의 상술에 놀아난 것도 내 잘못이다. - 나니아 연대기는 영락없는 동화책이었다. 그것도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거의 기독교 동화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조금 흥분하여 서두를 시작한 것은 내가 허황된 정보와 기대를 가지고 책을 접했고, 동화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느낄만한 동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에 관해서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니아 연대기 자체만 가지고 평가한다면 동화책으로서는 꽤 훌륭한 책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 교훈적이고 어린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만한 내용들이 동화에 잘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고, 옷장속으로 나니아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로 통할 수 있으며 그 안에 말을 하는 동물들과 요정과 난쟁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


다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에 그 점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편이 좋으리라고 본다. 동심을 잃어버린 내 자신을 탓하며 내 아이가 이 책을 읽을 때까지 잘 간직해 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가 읽기도 전에 책의 두께와 무게 때문에 질려버리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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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3-2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기는 한데, 그 기독교적 색채는 별로...-_-;;;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외로운 발바닥 2006-03-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에피소드 두개쯤 읽었을 때 알았지요. 아이들은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그냥 환타지로 읽지 않을까 해서요 ^^;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CE (2disc)
앤드류 애덤슨 감독, 조지 헨리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반지의 제왕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 후 크게 감동을 받았던 나는 똑같은 기대로 3만원에 육박하는 나니아 연대기 소설을 구입하여 이번 영화에 해당하는 부분만 먼저 읽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실 영화를 본 주위 사람들에게 대충 평을 들은 뒤라 반지의 제왕 정도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계 3대 판타지의 하나로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탄생시킨 계기가 된 톨킨의 절친한 친구인 J.S. 루이스가 쓴 작품을 기본으로 한 영화여서 기대치를 크게 낮추기는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반지의 제왕을 기대한다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판타지와 비교하지 않고 ‘나니아 연대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럭저럭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비록 주인공들이 아이들이고, 등장인물들의 수나 전투의 스케일이 아기자기하여 어른들이 보기에는 좀 싱거울 수 있으나 특수효과는 꽤 볼만하다. 사슴의 다리를 가진 파우누스 툼누스씨나 아슬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거의 어색함을 느낄 수 없다.

 

특히 이 캐릭터가 제일 신기했으나 별 활약은 못한다 -0-

 

그렇지만 본인도 반지의 제왕을 기대하고 보았다가 실망한 관객으로서 아쉬운 점은 좀 지적해야겠다. 무엇보다도 아슬란의 위압감이 소설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못하다고 느껴졌다. 소설에서의 아슬란은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할 정도의 엄청나게 거대하고 온몸에서 빛이 나는 듯한 사자인데 영화에서 아슬란을 보고는 그냥 좀 큰 사자라는 느낌밖에 안들었다.(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원작의 내용상 어쩔 수 없었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이 전투에서 싸우는 장면은 보기에 편하지도, 멋있지도 않았다.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와 초등학생에게 갑옷을 입혀서 갑자기 군대를 이끌게 해서 어쩌자는 건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먼저 본 사촌동생이 내가 책을 읽었다고 하자 한 말이 있다. 그 말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 “형, 주인공들이 꼬마 여자애 빼고는 다 안 멋있어. 혹시 책에도 주인공이 못생겼다는 내용이 나와?”

 

정말 캐스팅에 크게 신경 쓴 것 같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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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6-04-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부족한 거 같어. 애들은 별로 안 이쁘고.. ㅋㅋ

외로운 발바닥 2006-04-1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반지의 제왕같은 감동은 없었다는...너무 어린이들 보는 영화라는 느낌이 강했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미국의 정체성, 즉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밝히면서 그에 관한 어떠한 도전이 있으며 미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오랜 기간 생활한 사촌형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1년 넘게 책장에 내버려 두었다가 최근에 꺼내어 읽게 된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을 처음 접한 것은 그 유명한 ‘문명의 충돌’을 통해서인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전세계를 여러개의 문화권으로 나누고 그러한 문화권간의 충돌로 세계질서를 설명했던 것 같다. 헌팅턴은 일본은 중국과 별개의 독립된 문화권으로 분류하면서 우리나라는 중국 문화권에 포함시켰었는데 일본의 국력과 중화문화권에 속한다고 스스로도 생각해온 우리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 마음이 좀 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문명의 충돌에 대한 비판서로 ‘문명의 공존’이라는 책이 나왔고(이 책도 갖고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조만간 읽어보아야 겠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도 못한 채 헌팅턴이 미국의 일방적인 시각에서 세계질서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어쩌면 매파적인 수준의 논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 후로부터는 헌팅턴의 책을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고, 또 별로 손이 가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우연히 읽고 나니 그가 보수적 논객이라는 사실은 어느정도 확인하였지만, 그를 단순히 미국의 일방주의적 시각을 강요하는 학자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헌팅턴은 자신의 주장을 표면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통계적 조사결과와 함께 슬쩍 드러낼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개념들과 적절한 통계결과 - 통계조사의 결과와 방법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하더라도 - 를 통하여 상당히 설득력을 지닌다.


미국의 정체성 미국의 정체성으로 헌팅턴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가 ‘미국의 신조’라고 불리우는 것 -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근로윤리, 시민권, 정의, 인권 등등 - 에 더해 앵글로-개신교도 문화이다. 사실 그는 신조만으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는 점에서 앵글로-개신교도 문화, 특히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신조’는 우리가 미국에 대하여 떠올리는 소위 긍정적 이미지들이다. 최근 표면적으로까지 노골적이 된 미국의 정책 때문에 - 전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닌 척을 했다 - 미국의 신조에 냉소적인 웃음이 나오고 중국이 발행한 미국인권보고서를 보고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이지만, 적어도 미국이 ‘미국의 신조’ 위에서 건국된 국가이고, 지금도 그러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미국 정부의 행동이 그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신조’가 여전히 미국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또 그래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내가 미국인이라면, 특히 내가 WASP라면 헌팅턴의 주장처럼 앵글로-개신교 문화(특히 단일어로서의 영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민자들에 의하여 흐려지는 것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민’ 자체가 미국의 정체성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과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폭주하여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국민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다면 토종 한국인들인 우리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겠는가? 비록 헌팅턴이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부분이 몇몇 있어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국가인 미국으로서는 앵글로-개신교도 문화, 특히 단일어로서의 영어,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것이 국민들의 힘을 모아 국력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성에 대한 도전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헌팅턴은 하부국가적 정체성의 강화(미국사회 내에 주류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미국보다는 민족 등의 하부집단에 더욱 종속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늘어나는 것) 특히 미국사회의 급격한 히스패닉화, 엘리트들의 대중과 동떨어진 탈국가주의(헌팅턴은 엘리트들이 일반대중과 유리된 채 미국의 국익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부시가 재선된 것을 보면 적어도 일반대중과 진보적 엘리트들이 유리되었다는 그의 지적은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다.) 등을 들고 있다. WASP에 속하지 않는 미국인이라면 한인입양아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정체성 혼란을 느낄 것 같다. 그리하여 무수하게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미국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지표로서 ‘미국인’이 아닌 다른 요소를 우선시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국가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원동력이 되어온 이민과 문화적 다양성이 거대해진 제국의 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 불법이민의 규제, 영어교육의 강화 등 소위 보수적이라는 정책들을 시행할 필요성에 대해 제3자인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단일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일고 있는 국사교과서와 학교교육에서의 편향성을 둘러싼 논쟁과 유사한 상황이 1970년대 무렵부터 미국에서 이미 국가주의와 다문화주의간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영어 문화권과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에서조차 영어공용화 논쟁이 있었는데 정작 본토인 미국에서 영어가 단일어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정체성의 회복 헌팅턴은 정체성 회복의 방안으로서 앵글로-개신교도 문화를 미국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한다. 물론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앵글로-개신교도 문화가 백인이라는 인종적인 색깔을 제거한다면 ‘미국의 신조’와 명백히 구분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에 인용된 것처럼 미국인들이 국가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갖는 것이 민족이나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일체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WASP만으로 미국사회를 이끌어갈 수 없는 이상, WASP가 아닌 미국인들에게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여 국력을 통합하려면 미국정부가 소위 ‘미국의 신조’에 더욱 충실해야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 자유와 평화 등의 깃발아래 미국정부가 국제적으로 행하는 수많은 테러와 학살 등의 잔혹행위에 대하여 헌팅턴 같은 학자나 그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는 듯한 대다수 일반 대중이 침묵하는 한 미국의 신조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미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신조’가 없는 앵글로-개신교도 문화는 너무나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하여 미국에 대해서는 타자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헌팅턴의 주장에 상당부분은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국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종종 생각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너무나도 상충적인 고려요소가 많아 머릿속이 곧 엉켜버리고 말았다. 그 정도로 미국은 책 몇 권 읽은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어느 한 주장이 맞다고 주장하기 힘든 무척 복합적이고 다양한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WASP(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개신교도)가 아닌 나의 사촌형(물론 사촌형은 미국시민권자이고 우리말도 잘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에 더 가깝다)이 전체적으로 보면 WASP의 정체성을 되찾자는 이 책을 내게 선물로 준 역설적인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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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 장동건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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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태극기 휘날리며’는 2004년 ‘실미도’와 함께 처음으로 1,000만 관객 시대를 연 영화다. 관객을 많이 동원했다고 반드시 훌륭한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완전히는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든 전쟁이 비극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지 않은 전쟁이 어디 있을까 만은 어제까지는 동포였던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만든 한국전쟁의 모순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감할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가 잔혹한 북괴군을 쳐부수는 국군을 그린 반공영화의 틀을 벗어난 지가 엊그제는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압축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그린 영화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은 아마도 한국전쟁이 영화의 소재로서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한국전쟁에 관한 이전의 반공영화의 틀을 깨면서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영화를 찍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작비를 많이 사용하여 전쟁에서의 대규모 전투신도 효율적으로 묘사하면서도 - 그런 장면에 관해서는 한국영화를 한단계 발전시키지 않았나 싶다 -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부각시키고 한국전쟁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꿈을 안고 살아가던 의좋은 두 형제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어떻게 변해가고 서로를 오해하고 원망하며 한국군과 북한군을 오가게 되는지, -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반드시 참전용사로 대접받았던 것도 아니고 우리와 상대방인 적이 우리나라가 외국과 전쟁을 할 때처럼 명백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 지금보면 놀랍지 아니한가 - 그리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 실상에 비해서는 잘 묻혀져 있는(?) 보도연맹에 관한 단면 - 역사적 비극의 한 장면을 이제는 고인이 된 이은주가 장식하여 기분이 착잡했다. 부디 고이 잠드시길... - 등을 통하여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우리가 생각했듯이 북한군에 맞서 국군이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이토록 재미도 있고 감동도 주면서 문제의식도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카리스마 넘치는 장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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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03-1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케이블에서 방송한 '태극기 휘날리며' 마지막 부분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영화관에서 볼 때는 그냥 가슴이 찡했을 뿐인데...나도 많이 감정적이 되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