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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미국의 정체성, 즉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밝히면서 그에 관한 어떠한 도전이 있으며 미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오랜 기간 생활한 사촌형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1년 넘게 책장에 내버려 두었다가 최근에 꺼내어 읽게 된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을 처음 접한 것은 그 유명한 ‘문명의 충돌’을 통해서인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전세계를 여러개의 문화권으로 나누고 그러한 문화권간의 충돌로 세계질서를 설명했던 것 같다. 헌팅턴은 일본은 중국과 별개의 독립된 문화권으로 분류하면서 우리나라는 중국 문화권에 포함시켰었는데 일본의 국력과 중화문화권에 속한다고 스스로도 생각해온 우리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 마음이 좀 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문명의 충돌에 대한 비판서로 ‘문명의 공존’이라는 책이 나왔고(이 책도 갖고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조만간 읽어보아야 겠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도 못한 채 헌팅턴이 미국의 일방적인 시각에서 세계질서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어쩌면 매파적인 수준의 논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 후로부터는 헌팅턴의 책을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고, 또 별로 손이 가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우연히 읽고 나니 그가 보수적 논객이라는 사실은 어느정도 확인하였지만, 그를 단순히 미국의 일방주의적 시각을 강요하는 학자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헌팅턴은 자신의 주장을 표면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통계적 조사결과와 함께 슬쩍 드러낼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개념들과 적절한 통계결과 - 통계조사의 결과와 방법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하더라도 - 를 통하여 상당히 설득력을 지닌다.
미국의 정체성 미국의 정체성으로 헌팅턴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가 ‘미국의 신조’라고 불리우는 것 -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근로윤리, 시민권, 정의, 인권 등등 - 에 더해 앵글로-개신교도 문화이다. 사실 그는 신조만으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는 점에서 앵글로-개신교도 문화, 특히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신조’는 우리가 미국에 대하여 떠올리는 소위 긍정적 이미지들이다. 최근 표면적으로까지 노골적이 된 미국의 정책 때문에 - 전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닌 척을 했다 - 미국의 신조에 냉소적인 웃음이 나오고 중국이 발행한 미국인권보고서를 보고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이지만, 적어도 미국이 ‘미국의 신조’ 위에서 건국된 국가이고, 지금도 그러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미국 정부의 행동이 그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신조’가 여전히 미국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또 그래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내가 미국인이라면, 특히 내가 WASP라면 헌팅턴의 주장처럼 앵글로-개신교 문화(특히 단일어로서의 영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민자들에 의하여 흐려지는 것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민’ 자체가 미국의 정체성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과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폭주하여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국민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다면 토종 한국인들인 우리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겠는가? 비록 헌팅턴이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부분이 몇몇 있어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국가인 미국으로서는 앵글로-개신교도 문화, 특히 단일어로서의 영어,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것이 국민들의 힘을 모아 국력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성에 대한 도전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헌팅턴은 하부국가적 정체성의 강화(미국사회 내에 주류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미국보다는 민족 등의 하부집단에 더욱 종속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늘어나는 것) 특히 미국사회의 급격한 히스패닉화, 엘리트들의 대중과 동떨어진 탈국가주의(헌팅턴은 엘리트들이 일반대중과 유리된 채 미국의 국익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부시가 재선된 것을 보면 적어도 일반대중과 진보적 엘리트들이 유리되었다는 그의 지적은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다.) 등을 들고 있다. WASP에 속하지 않는 미국인이라면 한인입양아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정체성 혼란을 느낄 것 같다. 그리하여 무수하게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미국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지표로서 ‘미국인’이 아닌 다른 요소를 우선시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국가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원동력이 되어온 이민과 문화적 다양성이 거대해진 제국의 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 불법이민의 규제, 영어교육의 강화 등 소위 보수적이라는 정책들을 시행할 필요성에 대해 제3자인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단일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일고 있는 국사교과서와 학교교육에서의 편향성을 둘러싼 논쟁과 유사한 상황이 1970년대 무렵부터 미국에서 이미 국가주의와 다문화주의간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영어 문화권과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에서조차 영어공용화 논쟁이 있었는데 정작 본토인 미국에서 영어가 단일어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정체성의 회복 헌팅턴은 정체성 회복의 방안으로서 앵글로-개신교도 문화를 미국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한다. 물론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앵글로-개신교도 문화가 백인이라는 인종적인 색깔을 제거한다면 ‘미국의 신조’와 명백히 구분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에 인용된 것처럼 미국인들이 국가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갖는 것이 민족이나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일체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WASP만으로 미국사회를 이끌어갈 수 없는 이상, WASP가 아닌 미국인들에게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여 국력을 통합하려면 미국정부가 소위 ‘미국의 신조’에 더욱 충실해야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 자유와 평화 등의 깃발아래 미국정부가 국제적으로 행하는 수많은 테러와 학살 등의 잔혹행위에 대하여 헌팅턴 같은 학자나 그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는 듯한 대다수 일반 대중이 침묵하는 한 미국의 신조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미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신조’가 없는 앵글로-개신교도 문화는 너무나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하여 미국에 대해서는 타자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헌팅턴의 주장에 상당부분은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국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종종 생각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너무나도 상충적인 고려요소가 많아 머릿속이 곧 엉켜버리고 말았다. 그 정도로 미국은 책 몇 권 읽은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어느 한 주장이 맞다고 주장하기 힘든 무척 복합적이고 다양한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WASP(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개신교도)가 아닌 나의 사촌형(물론 사촌형은 미국시민권자이고 우리말도 잘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에 더 가깝다)이 전체적으로 보면 WASP의 정체성을 되찾자는 이 책을 내게 선물로 준 역설적인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