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life style

고려의 국왕이 황제를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대해 자주성과 자부심이 강한 사회였다. 

그리고 불교와 무속의 결합(불교의 역사가 깊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점집에 왜 불교의 만자가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이 신앙생활 및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였다. 그에 따라 사찰이 사회, 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통치이념은 유교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도교적 풍수지리사상도 만연했다. 결국 유교, 불교, 도교에 민간 무속신앙까지 각각의 영역에서 고려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고려는 다원화되고 열린 사회였다.

고려시대에는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으며 고려의 청자, 먹, 비단 등은 당시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공산품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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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시대 (p121 이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일이 불씨가 되었다가 20년 후 수박시합을 하다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치며 모욕을 가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00여년 간의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됨. (1170년~1270년)

1.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이고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왕인 명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했다가 이의방과 채원에게 제거당함.

이의방은 그 후 실권을 잡고 승려 2천여명의 반란을 잔인하게 제압하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정중부의 아들 정균(筠)과 승려 종참에게 살해됨. 그후 정중부 부자가 최고 권력을 잡게됨. 그러나 경대승에게 정중부 일가는 몰살당함.

이의민은 수박의 명수로 그로 인해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된후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잡게 됨. 의종을 수박기술을 이용해 살해하기도 함. 경대승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잠시 숨어 있다가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잡고 세 아들들과 함께 전횡을 부리다가 최충헌에게 제거됨.

2. 경대승

청주출신으로 아버지가 상장군이어서 무관이 됨. 아버지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한 토지를 물려받았으나 군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줌. 호위병 허승, 김광립 등을 끌어들여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쟁취함. 그는 정균이 차지하고 있던 승선 벼슬을 문관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사양하고 100명이 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비를 서게 함. 그들이 머무는 곳을 도방이라 하는데 이전에 중방에서 정치가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도방은 정치기구는 아니었음. 무신세력을 평정한 뒤에는 벼슬 없이 집에서 지냈으나 큰 일이 있을 때는 궁궐에 나와 의사결정에 참여함. 도방의 군사들이 약탈을 하면 자신의 부하라도 서슴없이 제거함. 그렇게 5년을 지내다가 30의 나이에 병사함. 그는 무관이었으나 무신정권을 만들지 않았으며 문무관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을 제거함. 그 방법이 지나치게 과감하긴 하였으나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임금을 능멸하지도 않았으며 축재행각도 하지 않음.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길에 나와 통곡하였다고 함. (무신정권시대 중간에 등장한 인물들 중 유일하게 멋진 인물이다.)

3. 최씨일가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4대 62년)

동생인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음.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세움. 최충수가 왕에게 태자비를 내보내고 자신의 딸을 맞이하라고 강요한 일을 계기로 동생인 최충수와 대립을 하여 결국 최충수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함. 김준거, 박진재 등 많은 사람들이 반란을 꾀하였으나 모두 진압됨. 그는 벼슬을 돈으로 팔고 궁궐처럼 화려한 집에서 몇 천의 종을 거느리며 왕부럽지 않은 절대권력을 누리다가 1219년 71세의 일기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죽음.

최이는 최충헌의 맏아들로서 최충헌의 권력을 승계함. 처음에는 좋은 정치를 펴려고 노력하는 듯 하였으나 곧 격구장을 위해 민가 수백채를 허는 등 만횡을 부림. 몽골이 침략하자 임금을 압박하여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게 함. 몽골에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그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유화책을 주장하지 못함. 몽골침략을 유발한 장본이라 할 수 있음. 강화도로 온 지 17년 만에 죽음.

최항은 최이가 기생으로부터 얻은 큰 아들로 최이가 죽은 뒤에 권력을 물려받음. 몽골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감. 축재와 공포정치를 일삼다가 8년만에 죽음.

최의는 최항이 절의 종에게서 얻은 아들로 최항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권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임연 등이 이끄는 자신의 사병들에게 죽임을 당함. (1258년)

이후 임연 등 무신 잔당들이 권력을 휘둘렀으나 내부 분열을 거듭하다가 몽골의 후신인 원의 간섭과 지배를 받을 때인 1270년 종말을 맞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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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실체 (p115 이하)

묘청의 반란사건의 성격을 두고 사대파와 자주파, 유교파와 불교파,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로 평가하는 사가들이 있음.(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개경세력 vs 서경세력 - 정지상 등 서경관료 또는 신진 관료는 서경 천도를 통해 중앙 정계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고자 했고 이는 개경 세력의 전통적인 권위와 우월의식에 도전한 양상이었음. (이 측면에서는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이라는 평가는 어느정도 타당한 것 같다.)

불교파 vs 유교파 - 묘청으로 대표되는 불교세력과 유학자이자 개경 문벌 출신인 김부식의 유교세력이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불교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지도자는 묘청 한 사람뿐이었음. 절을 짓고 도량을 베푼 일도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특별히 불교적 이념을 내세운 적도 없다. 따라서 불교파와 유교파의 대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런지. (고려시대에 불교가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점을 감안한다면 묘청이 승려였다는 점만으로 불교세력과 유교세력의 대결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고려사회는 신앙과 사회 생활 면에서는 불교가, 국가의 통치와 지배이념,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유교가 지배한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불교보다는 오히려 서경천도을 기도할 때 풍수지리사상이 전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도교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대파와 자주파 - 자주를 내세우는 묘청의 금나라 정벌계획은 군사양성의 준비도 없고 제나라와 협공한다는 표방도 실체가 없는 등 구호만 요란할 뿐 엉성한 점이 많았음. 따라서 칭제건원의 자주성도 어느 정도만 인정할 수 있음. (예전에 어디에선가 묘청의 반란을 자주파의 반란으로 평가하면서 묘청의 난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평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도 수백년 전의 한 사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고 나니 그런 주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사관에 근거하여 단순한 권력쟁탈전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역사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당시 동북아의 실질적 패권자인 금나라를 정벌하려 했다면 금나라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었을 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고려가 외교술로 금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겉으로는 예를 갖추어 금으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은 부분을 읽으면서는 참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벌을 주장한 것은 조선시대에 중국을 지극히 받드는 사대주의와 모순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묘청일파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서경 천도를 실현하여 기성세력을 꺾고 개혁을 추진하는데 목표를 둔 권력 쟁탈이 그 실체임.(by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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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토지제도 (p92이하)

역분전(役分田) - 태조가 940년 실시. 녹읍제의 폐지를 의미. 개인의 품성과 행실의 선악 및 공로에 따라 차등 지급함.(논공행상의 성격을 띔) 자손에게 물려줄 수 없었음.

녹봉제의 시초 - 광종 원년인 949년 공로자를 네 등급으로 가려 쌀 12/15/20/25섬을 정기적으로 지급.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 976년(경종 1년) 실시. 처음 정한 전시과라는 의미. 직관과 산관에게 논밭과 땔나무를 대는 산판을 지급한 제도. 인품에 의한 4색 관복제에 기초하면서 관품에 따른 구분도 반영. 이러한 수조권은 상속불가.

훈전(勳田) - 전시과는 관료 중심으로 실시되었기에 새로 귀순한 세력이나 공신들에게 수조지를 지급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실시. 훈전은 상속가능.

개정전시과 - 998년(목종1년)  시정전시과를 크게 개정. 관직 반열의 상하만을 지급 기준으로 삼음. 무반을 문반보다 낮게 책정.

경정전시과 - 1076년(문종30년) 전시과 정비. 일반 관료와 구분하여 승려와 지사에게 별사전시과라는 수조권 토지를 지급. 향리, 여진의 추장 등 새로운 세력에게도 전시과 지급.

cf. 신라의 토지제도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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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 계승의 역사의식 (p46이하)

이승휴의 제왕운기 -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하였을 때 같은 갈래인 고려로 귀화한 사실을 들어 발해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국가로 봄.

이규보의 동명왕편 - 신라의 시조 혁거세편을 쓰지 않음. 이것은 고려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임.

왕건은 발해를 고려의 친척 국가로 칭하면서 발해를 멸한 거란과는 국교수립 거부. 요가 942년 사신 30여명과 함께 낙타 50마리를 보내며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왕건은 사신일행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함. 이와 같은 왕건의 확고한 의지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고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데에 왕견이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음.(p58-60)

 

과거제 개관 (p74이하)

과거제도는 958년(광종9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실시됨.

진사과(進士科) - 시부(운문)와 시무책(정책을 적어내는 논술고시)을 시험봄.

명경과(明經科) - 주역, 서경, 시경, 춘추 등 기본 유교 경전을 시험봄.

잡과(雜科) - 의술, 지리, 율학, 산학 등을 시험봄.

진사과와 명경과는 대체로 중앙 관직자와 지방 향리의 자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나 후기에는 양인 모두에게 개방되었고 잡과는 처음부터 일반 서민들에게 개방됨. 다만 향, 부곡의 천민들은 잡과에도 응시할 수 없었음. 과거를 실시하는 시기도 매년, 격년, 4년에 한번(고려후기) 등 일정하지 않았음. 무관을 뽑는 과거는 실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등용함.

과거제는 귀족신분에게만 관직이 주어지던 관례를 깨고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는 제도임. 그러나 잡과와 같은 기술직을 천대하고 무과시를 치르지 않아 문무의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등 인재 등용의 한계를 드러냄. 또한 시험과목이 유교 경전 중심이어서 국가 이념의 정신적 역할은 불교가, 정치와 교화는 유교가 담당하는 이원적 통치철학이 만들어지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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