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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는 인문, 사회학 쪽 책들을 많이 읽다보니 솔직히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나마 가끔 소설을 읽는다 하여도 베스트셀러 위주의 외국소설을 읽다보니 국내소설을 읽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름도 생소한 우리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사무실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며칠동안 같이 근무하게 된 김모군 때문이었다. 김군의 외모는 흡사 산적과 흡사하고 어깨는 딱 벌어지고 가슴은 바위처럼 두꺼워 나는 그를 처음 보고 필시 체육과 출신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하던 중 그가 문예창작과 출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자신이 창작한 단편소설을 보여주었는데, 문학에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글솜씨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일반인이 쓰는 글과는 달라 보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며칠을 함께 근무하며 소설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소설적인 묘사가 참 뛰어나다면서 그가 문득 내게 추천해준 책이 바로 천운영의 ‘바늘’이었다.


‘바늘’은 9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단편의 느낌은 어느정도 비슷하다. 그 내용은 서로 차이가 있더라도 오랜만에 이런 소설을 접한 내게 작가의 특색 있는 문체가 강하게 인상을 남겨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작가의 문체를 설명하면 이렇다. 비교적 구체적인 서술과 대화가 이어질 때는 별 무리없이 사건의 진행을 좇을 수 있었지만, 별안간 1인칭 화자의 심리서술이 나오면서 실제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혹은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화자 혼자만 생각한 것인지 애매하여 이해하기가 난해하게 되어 버린다. 또한 무언가 작가가 어떤 대상에(예컨대 바늘, 또는 숨 등)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무언가 잘 쓴 소설이라는 것은 느낌이 오는데(특히 직접 체험해 보고 쓴 듯한 이색적인 직업세계의 사실적인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막연히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어서 학창시절에 문학공부를 하면서 참고서에서 해설을 찾아 공부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각종 상을 수상한 역량 있는 작가의 소설집이니 소설이 이상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고 내가 그런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없다는 뜻인데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어 조금은 씁슬한 생각이 들었다. ^^;; 어쩌면 학창시절 이후 10여년간 벌써 머리가 문학과는 동떨어진 빡빡한 현실세계에 맞추어 굳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서평을 쓰려다가 결국은 소설이 난해하여 이해가 잘 안되었다는 넋두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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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시기에 부모를 잃은 나는, 전쟁 후 너나 할 것 없이 몹시도 가난했던 그 시절에, 한참 먹성좋은 소년기를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게 보냈다. 부모를 잃은 외로움이나 무서움보다는 굶주림 때문에 더 외롭고 무서웠다. 오직 한번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 중의 소원이었다. 남의 집살이,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의 급사, 고아원생활, 부잣집 가정교사 등등 해보지 않은 짓이 없이 살면서도 푼돈이 모이면 책을 샀고 밤이면 전기불이 켜져 있는 공동변소에 가서 냄새를 이기며 책을 읽곤 했다. 학교 급사시절 심부름을 다닐 때에는 길을 걸으며 책을 읽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p136)

실제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소위 가난에 대한 '참무리'와 독서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한편으로 지금 내가 정말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음에도 열심히 독서하고 있지 않다는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감옥의 죄수들에게도 저 야만적인 삼청교육대에서와 같은 '순화교육'을 시켰다. '교육'은 언제나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의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게양대에 오른 국기를 향해 일제히 차려 자세로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낭송하게 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p140)

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충성'이라는 문구와 군대에서의 경례구호가 동시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왔던 이 의식의 본질이 - 이 의식의 긍정적 기능이 일부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는 하지만 - 군국주의적 의식의 고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국가'가 '내 나라'로 여겨지고 '국익'이라는 말이 '내 나라의 이익'으로 되려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른바 국익이 나와 내 가족의 안전과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사익과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둘재, 국가의 구성 및 운영 원리가 '민주주의, 정의, 복지, 평화'등 삶의 기본적 가치와 이념 또는 철학에 부합해야 하며, 셋째, 그 국가가 표방, 선전하는 문화 가치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고유한 문화전통 및 생활정서를 존중하고 함양하는 것이어야 한다.(p141)

이 글을 쓴 필자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참 타당한 기준을 제시한 것 같다. 한미 FTA는 위 기준에 비추어 '내 나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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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기 짝이 없는 단순 이론가들의 피비린내나는 행태들과 비교하면 강대국 미국이 이제까지 취해온 태도는 분명 존경받을 만하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호의적이고 책임감 있게 약소국을 대해온 맹주는 세계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미국의 정치에 대해 아무리 비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점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미국의 정치 문명과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의 국부들은 의식적으로 미국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완고한 유럽, 종교 탄압과 내전으로 갈가리 찢긴 왕정 유럽과는 정반대되는 사회, 악의 세계 한가운데 들어선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설정했다. 정착민 대 원주민, 북부 대 남부, 자유로운 미국 대 보수적인 제국주의 권력 등 미국사의 중요한 단계마다 '우리 대 그들'의 도식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력을 기울여 독일 황제와 싸우고 나니, 악마의 자식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다음 상대로 떠올랐다. 미국민들은 이런 경험을 치르며 세계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선'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역사적 과제라고 믿게 되었다. (p33)

비록 최근 미국의 행태에 상당히 비판적인 나이지만, 과거 제국과 비교하면 미국이 상대적으로 점잖다는 저자의 지적은 새로우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리부동한 미국에게 실망을 넘어서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미국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일까?

세계 모든 종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성스러운 말이 언어로 전승되고 있으며 영원한 유효성과 보편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성스러운 말은 그 시대에 엄격히 한정된 상세한 서술과 고도의 일반성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근본주의적 시도는 비극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 이 '본래성'은 예언자가 살고 활동했던 문명적, 사회적 맥락에서 밝혀질 수밖에 없다. 언어의 의미론은 언제나 역사적 배경과 묶여 있다. 의미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세계로부터 풀려날 수 없으며 수백 년 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운반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삶의 세계는 이미 흘러가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재구성은 모두가 불완전하다. 합리적인 논리를 근거로 여러 개의 해석들 가운데 사나에게 많은 점수를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관철은 오로지 신학 외적 수단, 다시 말해서 권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는 폭력적인 분열, 경찰력과 군사력에 의한 신자와 성직자의 분열이 이미 내재해 있다. (p195)

나는 포용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그들이 추종하는 **주의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에게 강요하는 교리 또는 사상이 수천년 전 예언자가 전한 말에 대한 누군가의 주관적 해석이라면 정말 무언가 주객이 한참이나 전도된 느낌이다. 물론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천년이 된 텍스트의 문구에 지나치게 얽매인 해석과 그런 사상의 강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첨단을 걷는 현대에도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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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의 진실

본래 성씨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심한 일을 두고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는 것은 반듯한 지적은 아닐 것이다. 본래의 성씨에 대한 각별한 집착은 어디까지나 가문에의 집착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성씨와는 무관한 일본식 성으로 고쳤다고 해서 그 집안을 친일 가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윤(尹)씨도 아니면서 '이토'로 한다든가 해서 완전히 일본식으로 고친 사례도 많았다. 또 창씨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해서 그 집안을 반일 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친일 행위는 친일 행위대로 부족없이 이행하고 본래의 성씨를 고수한 사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창씨 문제가 당사자의 친일 성향이나 반일 성향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문제의 실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정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순진한 학생이 윤동주 가문의 창씨를 알고 크게 실망하는 것은 당대 상황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p15)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학생들에게 대혁명이 시작된 날 파리 시민이 습격하였던 바스티유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은 대충 얼마나 되리라 생각하느냐고 묻는 상상력 놀이를 시험한 적이 있다....10만명, 5만명, 3만명에서 5천명에 이르는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답변의 공통점은 숫자를 매우 올려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1789년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는데 바스티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은 40명의 스위스 용병과 80명의 퇴역병뿐이었고 감옥안에 수용되어 있는 죄수는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루이16세의 전제정치, 프랑스 대혁명, 분노한 파리 시민들의 공격 등이 상상력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크고 벅차고 엄청난 것이다. 따라서 감옥도 죄수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막연히 추측하게 된다. 그래야 대혁명에 어울리는 규모가 되는 셈이다. 상상력이란 이렇게 기성적인 관념에 의해서 규정되고 예단되게 마련이다. (p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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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기원론 - 식민지 시기와 해방 직후 한반도 내에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면서 좌우익이 대리한 것이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주장. 38선 이나은 우익을 대표하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장악하고 그 이북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장악했다는 상황에 비추어 한국전쟁은 우익과 좌익 사이의 전쟁이고, 그 기원은 식민지 시기 이후로 진행되어온 정치적 갈등과 대립에서 찾아야 한다고 함.(p51)


but ①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은 어느 사회에나,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것이며 정치적 갈등과 충돌은 사회 불안이나 혼란을 조성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정책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면도 큼. ② 당시 정치세력들 사이에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공통분모 - 당시 각 정치세력의 정강 등을 살펴보면 경제정책 등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우익에서도 사회주의적 강령이 많이 나왔음.) 좌익, 우익의 구분이 항상 고정적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음. ex) 조소앙, 이극로 같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비록 납북되기는 하였지만 북한에서 활동을 하였음. - 가 존재함.


외적기원론

1. 전통적 해석 -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주의적 정책이 한국전쟁의 원인임.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꾀하고 있던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의 마오쩌둥과 북한의 김일성이 모의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봄. 이 논리는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소련에서 찾는 것으로 이어짐.


2. 수정주의 -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등장한 견해. 미국이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사회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세계를 수호하는 것이라는 관점의 전통적 해석을 비판하며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하에 제3세계 국가 등에 개입하여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관점에서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입장. 수정주의는 비밀이 해제된 미정부 문서에 의하여 상당한 근거를 지님.


ex)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은 미국인 희생자를 줄이고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략 때문이었고(p64), 일본이 패망하기 전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미국의 제안으로 38선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분단이 이루어 진 것임.


but 수정주의는 제3세계 국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미국의 대외정책 및 국제정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한계를 지님. 중심부세계와 주변부세계를 도식적으로 구별한 것도 문제이고 주변부세계 자체의 주체적 동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


3. 외인론비판

가. 오스트리아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패전국으로서 미국과 소련에게 공동점령 되었음. 그렇지만 국민의 자벌적 의지에 의해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신탁통치 기간 동안 통합된 국민적 힘을 유지하여 독립을 성취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 오스트리아는 1955년 영세 중립을 전제로 점령군이 철수하였고, 이후 냉전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p78)


나. 베트남은 중국의 주변국가로서 프랑스의 식민지배(95년간)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무척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극복했다!


다. 검토

오스트리아와 베트남, 그리고 한국을 비교할 때 남는 문제는 결국 내적인 요인일 수밖에 없다.(p78) 결론적으로 외세(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은 분단과 전쟁의 필요조건이었고, 내부에 그에 호응하는 세력 또는 힘이 충분조건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남베트남 군부는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동조가 없는 외부적인 지원에만 의존하는 정부였기 때문에 결국 몰락했다.)


오스트리아와 베트남과의 비교는 신선했다. 가장 최근에 통일을 이룩한 독일과 오만의 예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분명히 일제침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외부적 요인이 없었더라면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의 발발은 없었겠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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