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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자살한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그려내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노숙자 소녀와 천재소녀의 우정을 그린 [길위의 소녀]에 이어서 그녀의 세번째 작품을 읽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라는 제목의 이 책은 언뜩 보면 진짜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이고 이름이 작가 이름과 같아서 더 그럴수도 있겠다. 이런 구성을 한국작품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작품과 비교했을때 이 작품은 얼마나 다를까.
그저 평범해 보이는 두 여자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라 생각했다. 큰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이야기가 전개되어감에 따라 약간은 '미저리'적인 분위기를 자아냄과 동시에 무언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듯도 보이고 마지막 40페이지를 남겨 놓은 지점에 이르러서는 내가 이때까지 읽은 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 멍하니 있게 되었다. 분명 같은 작가의 세 작품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느낌이 너무나도 달라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 델핀. 그녀는 우연히 L이라는 존재를 만나서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다 컸고 남자친구는 따로 있으며 딱히 자신이 꼭 챙겨줘야 할 일이 없는 그녀는 책을 써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기가 힘들어진다. 펜을 잡을 수 없을 뿐더러 컴퓨터의 자판조차도 치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 사실은 단지 그녀와 L 만이 알 뿐. L은 그녀의 일을 대신 처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쓸 일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작게는 메일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작가라면 더욱 많은 쓸 일들이 있을 것이다. 대필작가인 L은 아무런 조건 없이 델핀을 도와주게 되는데 그녀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 즉 픽션을 쓰는 델핀에게 L은 실제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조언한다. 소설은 단지 만들어 낸 이야기임에 틀림없는데 그녀는 왜 이토록 현실성을 고집하는 것일까. 현실적인 것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은 이야기는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사실성을 주장하는 그녀는 델핀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는 한 것일까.
책에 나오는 인생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래, 중요해. 그게 사실인 게 중요해.(88p)
소설가들이 이야기를 구상할 때 어떤 식으로 할까. 주위에서 어떤 소재를 채택하거나 에피소드들을 발견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덧붙여 낼까 아니면 머리속에서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게 될까. 아무리 허구적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야기를 쓰다보면 한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상상력에는 제한이 있으므로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현실적인 이야기가 들어갈 것이고 자신을 비롯한 친구들이나 가족들 조차도 등장인물이 되기도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몰라도 당사자들은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네 인물들은 인생과 관계가 있어야 해.(117p) L이 주장하는 것처럼 극중의 인물들은 작가의 인생과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그것은 아마도 현실이 훨씬 더 멀리 갈 배짱이 있기 때이겠지.(301p) 라고 이야기했던 누군가의 말을 빌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다리를 다치게 된 델핀.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던 L. 그녀는 움직이기 어려운 델핀을 돌봐주기로 하고 그녀들은 델핀의 남자친구 집으로 이동을 해서 그곳에서 살아가게 된다. 델핀은 L이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글을 쓸수가 없는 그녀는 핸드폰을 이용해서 지신이 들었던 그녀의 이야기들을 녹음을 한다.
하나씩 녹음을 하다보니 쪽지가 필요해지고 그것을 계기로 한동안 쓰지 못했던 그녀의 손이 움직이고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기뻐라하며 L에게 알리기보다는 숨긴다. 그녀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을 허락을 받지 않아서일까, 그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껄끄러워서였을까. 그녀가 이 모든 이야기를 숨기는 것은 언제까지일까.
따스하게만 보이던 두 여자간의 우정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미나토 가나에의 [경우]를 생각나게 했다. 질투로 얽힌 친구사이.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중에서 가장 약하게 느껴지는 책이었지만 묘하게도 두 여자가 등장하는 책 표지 또한 비슷한 느낌이다. 델핀을 대신해서 강연까지 갔다온 그녀가 델핀에게 바라는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현실을 주장하던 그녀의 속내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L의 말을 듣고 현실과 겨루기(293p)를 시작한 델핀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그녀들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면서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크로우걸]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런 감정 아니었던가. 델핀과 L. 그녀들은 어떤 존재이였던 것이지?
때때로 혹시 누가 당신 몸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게 아닐까 자문할 때가 있어.(26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