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에서 떠들썩하게 혼인 잔치가 벌어졌다. 신랑은 연회장을 고용하여, 잔치 음식과 포도주를 넉넉하게 준비했다.

 

손님, 먹을 것, 마실 것, 웃음, 음악. 모든 게 풍족하다. 주인은 아낌없이 베풀고, 손님들은 마음껏 즐긴다. 잔치 분위기는 고조되고, 겉으로 보면 모든 게 순조롭다.

 

하지만 속사정이 있었다. 준비한 포도주가 바닥을 드러냈다. 이를 안 것은 손님으로 온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였다.

 

마리아는, 역시 손님으로 온 예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예수는 돌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것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물을 받아 마신 연회장은, 이제야 최상급 포도주가 제공되었다고 신랑을 칭찬한다. 잔치는 아무 문제없이 계속된다.

 

무언가 결핍된다면 잔치가 아니다. 결핍되었다면 그것을 간파하고 채워야 하는 사람은 잔치의 주인이다.

 

이 이야기는 잔치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다. 진정한 주인은 아무도 모르게 결핍을 채우는 분이다.

 

 

파올로 베로네세, 가나의 혼인 잔치, 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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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선생이라 부른다. 근거는 예수의 행동이다. 신의 도움이 없으면 일으킬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예수는 화제의 초점을 자신에게서 니고데모에게로 옮긴다. 너는 신의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너는 신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그게 가능하다.

 

니고데모는 재탄생의 의미를 육체적 출산으로 이해하고, 성인이 모태로 회귀해 다시 태어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예수는 재탄생이란 물과 성령의 도움으로, 인간적으로 태어났던 것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 없다. 예수는 지상의 지식과 천상의 비밀, 신의 사랑과 독생자, 믿음과 심판, 빛과 어둠, 진리와 순종에 관해 니고데모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예수는 그게 독백임을 안다.

 

예수는 니고데모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 모세의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길 외에 달리 없음을 깨닫는다.

 

 

Fritz von Uhde, Christus und Nikodemus, ca.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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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씀은 선언과 동의어이다. 선언은 발화와 더불어 실행된다. 빛이 있으라!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일반적인 말은 약속이다. 약속은 행동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증명되지 않는 약속은 무효의 말이다. 무효의 말은 그 말을 했던 사람과 분리된 말이다.
     
여기에는 그런 행동과 분리가 없다.
 
병이 나았다고 선언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쁜 소식을 전하러 자기에게 달려오는 하인들을 만난다. 하인들은, 죽어가던 아들이 열이 내려 살아난 시각이 어제 오후 1시였다고 진술한다.
     
그때는, 바로 선언이 행해졌던 시각이었다.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선언이다.

 

 

 

수정: 2019. 3. 19.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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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증거 때문에 나를 믿는다고, 기적과 증거를 보고 나를 믿는다고 예수는 한탄한다. 중요한 것은 기적과 증거가 아니라, 기적과 증거를 가능케 하는 말씀 자체이다.

 

왕의 신하는 병으로 죽어 가는 아들 때문에 가나에 있는 예수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가버나움 자기 집에 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다.

 

왕의 신하는 병을 낫게 할, 기적을 일으킬 예수를 꼭 자기 집으로 모셔 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동행을 거부한다. 대신 말한다. 선언한다. 네 아들은 산다!

 

이제 왕의 신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맞닥뜨렸다. 예수가 한 말 자체를 믿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말 자체를 믿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집으로 모셔 가야 하나?

 

물리적 거리 때문에 아들이 산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직접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에, 왕의 신하는 전적으로 예수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믿음의 본질은 기적이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 준다.

 

 

Virgil Solis, Jesus und der königliche Beamte von Kapernaum (Johannes 4, 46-54), 1534/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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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는 대부분 기적을 통해 신께 영광을 돌린다. 하지만 여기서는 대화를 통해 여인과 마을 사람들이 인식에 이른다.

 

대화를 통해 인종적, 지리적 경계와 구분이 사라지고 본질적인 지식과 깨달음참된 예배(), 신의 본질, 구원자만 남는다.

 

인물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고백의 형태로, 당사자에게 하는 게 다른 복음서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고백이 아닌 진술의 형태로, 당사자가 아닌 처음 증언자인 우물가 여인에게 행해진다.

 

앞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리적 변화는 이제 정신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이 변화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보여 준다.  

 

이틀 동안 마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드러냄과 드러내지 않음. 이 이야기의 한 요소이다.

 

 

Lucas Cranach d.Ä., Christus und die Samariterin am Jakobsbrunnen,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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