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 증거 때문에 나를 믿는다고, 기적과 증거를 보고 나를 믿는다고 예수는 한탄한다. 중요한 것은 기적과 증거가 아니라, 기적과 증거를 가능케 하는 말씀 자체이다.

 

왕의 신하는 병으로 죽어 가는 아들 때문에 가나에 있는 예수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가버나움 자기 집에 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다.

 

왕의 신하는 병을 낫게 할, 기적을 일으킬 예수를 꼭 자기 집으로 모셔 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동행을 거부한다. 대신 말한다. 선언한다. 네 아들은 산다!

 

이제 왕의 신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맞닥뜨렸다. 예수가 한 말 자체를 믿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말 자체를 믿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집으로 모셔 가야 하나?

 

물리적 거리 때문에 아들이 산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직접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에, 왕의 신하는 전적으로 예수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믿음의 본질은 기적이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 준다.

 

 

Virgil Solis, Jesus und der königliche Beamte von Kapernaum (Johannes 4, 46-54), 1534/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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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는 대부분 기적을 통해 신께 영광을 돌린다. 하지만 여기서는 대화를 통해 여인과 마을 사람들이 인식에 이른다.

 

대화를 통해 인종적, 지리적 경계와 구분이 사라지고 본질적인 지식과 깨달음참된 예배(), 신의 본질, 구원자만 남는다.

 

인물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고백의 형태로, 당사자에게 하는 게 다른 복음서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고백이 아닌 진술의 형태로, 당사자가 아닌 처음 증언자인 우물가 여인에게 행해진다.

 

앞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리적 변화는 이제 정신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이 변화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보여 준다.  

 

이틀 동안 마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드러냄과 드러내지 않음. 이 이야기의 한 요소이다.

 

 

Lucas Cranach d.Ä., Christus und die Samariterin am Jakobsbrunnen,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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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든다. , 보라! 여기 내가 전에 했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구원자가 아닐까! 마을 사람들이 물을 요청했던 사람에게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를 마을로 모셔 들였고, 그는 그곳에서 이틀 동안 그들과 먹고 마셨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자기 귀로 직접 들었고, 그의 말을 신뢰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 여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알려 준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알게 되었소. 이분은 정말로 세상의 구원자시오!

 

 

Annibale Carracci(1560-1609), The Samaritan Woman at the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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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 바뀌어, 이제 여인이 물을 달라고 요청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런 물이 있으면, 목마르지 않을 테고 번거롭게 물 길으러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된다.
     
처음 물을 요청했던 사람은 여인에게 그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는 고대 사회의 풍습이다. 여인의 의사(意思)는 남편이 확인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여인에게 증여나 양도를 할 수 있다.
     
여인은 자기를 대변할 법률적 남편이 없다고 말한다. 처음 물을 요청했던 사람은 모든 사정을 꿰고 있는 듯, 여인에게 과거 다섯 남편이 있었고 현재 동거인도 남편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여인은 물을 요청했던 사람이,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예언자임을 직감한다. 여인은 예언자에게 평소 궁금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의 차이를 언급한다.
     
물을 요청했던 사람이 말하길, 장소가 아니라 이제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신은 영이시기에, 영과 진리를 통해서만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인은 구원자가 올 것인데, 그가 와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물을 요청했던 사람이 자신이 그 구원자라고 말한다.
     
     
─Joseph von Hempel, Christus und die Samariterin am Brunnen,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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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시작은, 물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교제 문제로 바꿔 버린 것은 우물가의 여인이었다.

 

물을 요청한 사람은 이를 다시 앎의 문제로 바꾸고, 이 조건이 충족되었더라면 오히려 여인이 자신에게 물을 요청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인은 실제적인 사실을 언급한다. 물을 뜰 도구가 어디에 있느냐? 당신은 물 긷는 도구조차 없지만, 이 우물을 파서 우리에게 물려 준 조상은 바로 야곱이다. 당신은 그런 우리 조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물을 요청한 사람은 두 가지 물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이 우물의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된다.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고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수이다.

 

우물가의 대화는 계속된다.

 

 

Angelika Kauffman, Christus und die Samariterin am Brunnen,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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