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스트라이허(Streicher)의 집은시민뿐만 아니라 하녀도 구성원으로 받아들인슈벵크펠트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546-547)

 

트라이허(Streicher)의 집은시민뿐만 아니라 하녀도 구성원으로 받아들인슈벵크펠트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독일어 원문: Zum Zentrum der schwenckfeldischen Gemeinschaft der Stadt, zu der neben Bürgerinnen und Bürgern auch Mägde gehörten, wurde das Haus der Familie Streicher.

 

Streicher = 슈트라이허

 

인명을 바로잡았다.

 

 

다음 이름도 수정할 것:

 

과거 스트라이허의 집이 있던 자리에(547)

 

과거 트라이허의 집이 있던 자리에

 

아가테 스트라이허(Agathe Streicher)의 주도 아래(547)

 

아가테 트라이허(Agathe Streicher)의 주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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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튀빙겐의 회합에서 양측은 장래에 상호 정죄를 포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곧바로 다음 해에 무력하게 되었다. 슈벵크펠트가 비텐베르크 협약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슈벵크펠트는 적지 않은 울름 시민들이 비텐베르크 사람들과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성만찬 견해를 배반했음을 말하려고 했다.(546)

 

튀빙겐의 회합에서 양측은 장래에 상호 정죄를 포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곧바로 다음 해에 무력하게 되었다. 슈벵크펠트가 비텐베르크 협약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슈벵크펠트는, 비텐베르크 사람들과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성만찬 견해를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울름 시민들의 견해를 대언했던 것이다.

 

독일어 원문: In der Tübinger Konkordie verpflichteten sich dann beide Seiten, in Zukunft auf gegenseitige Verurteilungen zu verzichten. Diese Abmachung wurde bereits im folgenden Jahr hinfällig, als Schwenckfeld die Wittenberger Konkordie heftig kritisierte - womit er nicht wenigen Ulmern aus der Seele sprach, die im Kompromiss mit den Wittenbergern ihre eigene Abendmahlsauffassung verraten sahen.

 

A aus der Seele sprechen = A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를 말해 주다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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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울리히는 1535년 고지 독일 종교개혁자들과 영성주의적인 신학자들을 화해시키려고 튀빙겐에서 대담을 열고 그들을 초대했다. 이러한 사실은 슈벵크펠트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난 갈등이 얼마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었는지를 시사해준다.(546)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울리히는 1535년 고지 독일 종교개혁자들과 영성주의 신학자 화해시키려고 튀빙겐에서 대담을 열고 그들을 초대했다. 이러한 사실은 슈벵크펠트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난 갈등이 얼마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었는지를 시사해준다.

 

독일어 원문: Welche Beachtung Schwenckfeld und dem Konflikt um seine Person zuteil wurde, zeigt sich daran, dass der württembergische Herzog Ulrich 1535 zu einem Kolloquium nach Tübingen einlud, um einen Ausgleich zwischen den oberdeutschen Reformatoren und dem spiritualistischen Theologen zu erreichen.

 

dem spiritualistischen Theologen = 영성주의 신학자 = 슈벵크펠트

 

주의할 것:

 

복수가 아닌 단수.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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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누락

 

슈벵크펠트 주위로 지지자 서클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영적인 교제를 위해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슈벵크펠트는 신앙공동체의 모든 형태를 거부한 프랑크와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프랑크와는 달리 슈벵크펠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적인 그리스도 인식을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546)

 

슈벵크펠트 주위로 지지자 서클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영적인 교제를 위해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슈벵크펠트는 신앙공동체의 모든 형태를 거부한 프랑크와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프랑크와는 달리 슈벵크펠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적인 그리스도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중요하게 여겼다.

 

독일어 원문: [...] bildete sich rasch ein Kreis von Anhängerinnen und Anhängern um ihn, die sich zum geistlichen Austausch trafen. Damit unterschied Schwenckfeld sich deutlich von Franck, der jegliche Form von Glaubensgemeinschaft ablehnte. Anders als dieser hielt Schwenckfeld es für möglich und wichtig, die innere Christuserkenntnis anderen mitzuteilen.

 

빠진 부분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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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누락

 

슈벵크펠트는 1520년대 슐레지엔에서 종교개혁의 확장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성만찬논쟁에서 영혼의 영적인 양식을 강조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츠빙글리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은 슈벵크펠트로 하여금 슐레지엔을 떠나도록 만들었지만, 울름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촉진시켜 주었을 것이다.(545)

 

슈벵크펠트는 1520년대 슐레지엔에서 종교개혁의 확장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종교개혁 내부의 성만찬논쟁에서 영혼의 영적인 양식을 강조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츠빙글리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은 1529 슈벵크펠트로 하여금 슐레지엔을 떠나도록 만들었지만, 울름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촉진시켜 주었을 것이다.

 

독일어 원문: Schwenckfeld hatte in den 1520er Jahren wesentlich zur Verbreitung der Reformation in Schlesien beigetragen. Da er in den innerreformatorischen Auseinandersetzungen über das Abendmahl die geistliche Speisung der Seele betonte, sahen ihn viele zunächst an der Seite Zwinglis. Hatte dies 1529 dazu geführt, dass Schwenckfeld Schlesien verlassen musste, so mag es seiner Aufnahme in Ulm durchaus förderlich gewesen sein [...]

 

빠진 부분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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