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8월 : 제목처럼 ‘진작 할 걸 그랬어’
[진작 할 걸 그랬어](위즈덤하우스) - 김소영


ㅁ 원래 ‘한 주의 책’을 쓰던 곳이었지만 작년 12월부터 쓰지 못했다. 

뭣보다 내가 1주에 1권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버거운 주가 항상 있어서;; 

그래서 더 이상 하지 못했다가, ‘한 달에 한 권은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겨울이 이미 훌쩍 넘긴 여름이 되었을 때.

그래서 한여름인 8월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한 달에 한 권정도야 아무리 바빠도 읽을 수 있는 걸 지난 1년동안 확실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ㅁ 8월에 무슨 책을 고를까 생각하다가, 이처럼 적당한 책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싶었다.

전 아나운서이자, 이제는 책방 주인이신 김소영 작가님(작가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책을 내셨으면 작가님이라고 난 생각한다.)의 책으로 시작한다. 

제목처럼 [진작 할 걸 그랬어]. 나도 진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늦을 때가 정말 늦었다는 한 연예인의 말처럼

정말 늦은 거니까 진작 할 걸... 이라고 후회하는거겠지.

그럼에도 지금 시작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거니까.

ㅁ 한 달, 한 권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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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울 것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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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유롭다가도 자유롭지 못한 삶에 나는 다시 위로를 받는다.
[자유로울 것](예담) - 임경선

ㅁ 임경선 작가님의 [자유로울 것]이란 책은 내가 작가님을 알고 나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이전에 [태도에 관하여]를 읽고나서 ‘아 작가님 참 멋있으시네.’ 라는 산뜻한 기분을 가지고 있던 터라, 두 번째 에세이가 나왔던 17년도 쯤에 구매해서 읽었다. 그 땐 국방의 의무를 하고 있던 때라서, 책을 읽을 때, 엄청 우울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 하는 일들과 수직적인 구조 때문에 정신없을 시기였고, 무엇보다 바깥과의 단절감이 엄청 스트레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심리 속에서 하필 책 제목도 [자유로울 것]이라니. 이 얼마나 필연적인 만남이었는가. 물론 별 의미 없지만, 그 땐 진짜 제목 하나와 작가님의 책이란 이유로 구매했다. 자유롭고 싶어서, 읽었다. 
 책을 읽는다고 내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단지 마음으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몸이 갇혀있으니 생각도 갇혀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만이라도 좀 말랑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읽고나서 조금 나아졌냐고?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약간은 말랑해졌고, 그 후로 약간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그냥 일이 편해진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리고나서 책은 서랍에 꽂혔고, 그 뒤로 손길이 닿지 않았다.

ㅁ 이 책을 다시 꺼냈을 땐, 고작해야 1년 전에 읽었다고 생각했다. 막상 글을 쓰면서 예전에 언제 읽었는지 찾아보니까 진짜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았다. 2년 반. 나는 이 책을 2년 반만에 다시 읽었다. 그래서 첫 만남의 기억을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책에 써둔 메모들을 통해 기억의 조각을 다시 맞췄던 것 뿐이다. 그래도 뭐… 약간 무의식이 반응하듯이, 읽다보니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 땐 그랬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정말 많이 했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시기였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책임과 통제, 자기 규율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험한 대가를 치러야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자유로운 사람으로 남고자 계속 노력하면서 살고 싶다. 
- p. 6 서문 中 -
ㅁ 당시엔 자유롭지 않은 환경이라서 스스로 쪼일 필요가 없었다. 주변이 이미 엄청 쪼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저 말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유를 위해서 스스로 제약을 건다는 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환경이 바뀐 지금, 공감하지 못한다는 메모를 지웠다.(지우려다가 밑에 첨언을 추가했다. ‘아냐 스스로 통제를 해야 자유로운 거더라.’라고) 자유로워서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요즘이라서. 역시 겪어보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이다. 지난번과 다르게 기본적인 환경이 바뀌었고, 내 생각도 바뀐터라 읽는 내내 과거의 나를 엿보는게 참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사람이 2년 반만에 이정도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아직도 같은 생각을 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말이다.  


ㅁ [자유로울 것]이란 책은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두 번째)였다. 사실 제목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고 보면, 작가님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시는구나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 읽을 당시에나, 지금 읽을 때나 이건 비슷한 마음이다. 아마 다음 구절에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유독 오래가는 인간관계를 높이 평가한다. 인내하며 오래 살아낸 노부부의 사랑을 아름답다 하고, 오랜 세월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것을 나무란다. 학창 시절 친구가 점점 불편해지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의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고통스러운 만남을 이어간다. 
p.121
 이런 생각을 난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받아본 적은 굉장히 많았다. 물론 학창시절의 친구 중에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관계는 어디든 존재하니까. 굉장히 불편한데도 만나서 내 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곤 했었다. 이미 끊어진 인연의 끈을 억지로 붙잡는 듯한 기분. 이미 끝나버렸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끊어진 걸 버리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불편했다. 마치 야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작가님도 비슷한 말을 하지만, 나는 작가님과 비슷했다. 처음 읽을 땐, 야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야박함을 둘째 치고 내가 편해야한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게를 다져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게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p.121
 "삶은 나라는 식물에 인연이라 불리는 곤충들이 오고 가는 것이다. 오는 곤충을 다정하게 맞이하고 가는 곤충에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비슷한 느낌인 듯. 이걸 보면서 자유롭다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심적으로 편한 상태? 진정한 자유가 바로 이런 걸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그렇게 메모가 되어있었다.) 그 때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지. 그 땐 정말 갇혀있는게 싫었나 보다.  


ㅁ 이번에 읽을 때, 유독 눈에 띄던 부분은 나이에 관한 이야기와, 예술가(나 작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이에 대한 건지 사실 삶에 대한 건지 헷갈리지만 다음 구절을 보자. 

“나이 먹는 일의 가장 슬픈 점은 더 이상 낙이 없다는 것이야.” 나이 들면 마음이 흔들리거나 설레거나 떨리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감동할 기회도 적어진다. 그나마의 위안은 나이 들어가는 일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p.238
 당시엔 그렇게 막 대단한 문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 이게 왜 이렇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저렇다고 하지만 사실 요즘 저렇다. 그래서 그런가? 위 문장 앞부분에 비슷한 말이 있다. 영화 <45년 후>에 나오는 대사라고 하던데 ‘늙으면 목적의식이 없어져서 싫어’였다. 목적의식. 아마 이게 자꾸 눈에 밟히고 있다. 무엇을 향하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그게 줄어든다. 확실히 지금의 나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게 주변환경이든 여러 이유로든. 처음 읽었을 때보다 내 목적의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ㅁ 예술가, 또는 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요즘 글을 쓰니까 그런 것 같다. 특히 예술가. 사실 그렇게 예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글과 시를 쓰는 이유도 예술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나의 작은 재미를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직업검사를 하나 했다. 여러 분야에 흥미를 측정하는 심리검사였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해봤다. 이런건 보통 학생 때 자주 하니까. 성인이 되면 할 일이 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예술계 흥미가 엄청 높게 나와서 놀랐다. 세부적인 영역의 흥미는 역시 내 전공분야가 제일 높았는데, 예술쪽 흥미가 전반적으로 높게 나왔던 것이다. 특히 글/글쓰기와 시각디자인. 조금 의외였다. 좋아하긴 하지만 이게 내 전공만큼 좋아할 줄은 몰랐다.(두 흥미도의 차이가 고작 2뿐이었다. 이 정도는 그냥 같은 지위의 흥미라고 상담가님이 말하셨다.) 그 뒤로 자꾸 예술쪽에 눈이 갔다. 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책에서 다음 문장이 있었다. 

예술가에게 재능은 존재의 본질 같은 것. 그 재능을 어떻게 다루면서 살아가야 할까. 쳇 베이커처럼 짧고 굵게, 뜨겁고 강렬하게 불사르며 살아가야 할까, 혹은 세이모어 번스타인처럼 가늘고 길게, 겸손하고 마일드하게 살아가야 할까. 
p.250
 짧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쳇 베이커는 영화 <본 투 비 블루>에 등장하는 천재적인 연주가라 화려한 시절을 보내지만 그 부담감으로 결국 마약으로 망가지는 캐릭터였다. 반면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라는 영화의 주인공인데, 그는 한창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인기를 구가하는 시기에 스스로 무대를 벗어나 조용히 후학을 가르치는 삶을 택한다. 이는 비단 예술만이 그런 게 아니다. 재능을 가진 걸 어떻게 펼쳐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과 감당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같은 글 마지막에 작가님도 그렇게 말하신다. 이게 예술이란 단어로 써져있어서 관심이 가졌는데, 다시 곱씹다보니까 그게 아니였던 것 같다. 나도 지금 딱 저 선택의 기로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작가님은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하셨다. ‘예술가는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이다.’(p 249). 문득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ㅁ 막상 다시 읽은 것치곤, 차이는 많지 않았다. 앞에서 쓴 것처럼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참 많이도 다른 생각을 했구나 싶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와 다르게 눈에 띄더 부분이 늘었다는 사실. 공감되었던 부분도 더 많아졌다. 물론 첫 번째 읽은 당시의 상황이 지금과 너무나 달랐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음 미래의 내가 이 책을 세 번째 읽게 될 때, 알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재밌다.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은 똑같았다. 안 그래도 지쳤을 때 책장에서 꺼낸 책이었다. 첫 번째 읽을 때고 그렇게 골랐고, 이번에도 똑같이 위로를 받는구나...

ㅁ 그렇다고 내가 임경선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다. 사실 에세이 말고는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유로울 것]을 두 번째 읽으면서 느낀 건, 작가님의 글은 이런 문체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늘한 포근함’. 일단 이렇게 쓰고 있는데, 사실 적당한 표현을 모르겠다. 작가님은 다른 에세이랑 다르게 완전 말랑말랑(이걸 넘어서면 오글거림이 되는 것 같다.)하지 않다. 약간은 단단해서 서늘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포근함이 느껴진다. 무작정 따뜻한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무튼 이건 지금이나 처음 읽었던 시기에나 똑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더 좋다. 일반적으로 합쳐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오묘하게 섞여 있어서. [태도의 관하여]는 부대 내 도서관의 책으로 읽었는데, 요즘 들어서 구매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자유로울 것]을 읽고나니까 이전 에세이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에세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가 유독 좋아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년 반이라는 시간 사이에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임경선 작가님의 책 [자유로울 것]에서 마주쳤다. 다음엔 어느 시간의 내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만날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는 것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를 만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책에 담긴 작가님의 생각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건 언제나 똑같은 생각이다. 그렇기에 다시 이 책을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자그마한 메모를 남겼다. ‘다음엔 어떤 자유로움을 생각할지 기대하겠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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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 김광현 교수의 건축 수업
김광현 지음 / 뜨인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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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알아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뜨인돌) - 김광현
- 전반부 -

이 책은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나 지금 건축을 배우고 있는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건축의 중요함과 소중함과 근본을 말하는 책이고, 모두를 위해 이 시대가 지어야 할 건축을 말하는 책이다.
- 머리말 中 -
ㅁ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만큼 책이 그 목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아무로 비문학적인 책이라고 해서 이렇게 목적성을 대놓고 보여주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끌렸던 걸지도 모른다. 마치 책이 그냥 ‘날 읽으면 건축이 가르쳐주는 걸 반드시 알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표지조차도 노출콘크리트 이미지로 만들어놔서 그런지 참 거대한 벽 같이 느껴지고 그 두께는 그런 인상을 갖는 데 한 몫 했다.(무려 705페이지였다. 진짜 많이 두껍다.) 살 엄두가 나지도 않았고, 이걸 들고다니면서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주말마다 틈틈히 읽어서 겨우 전반부를 읽었다. 후반부까지 읽고 감상을 쓰기엔 너무 양이 많아질까봐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서 감상을 쓰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앞 내용에서 들었던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았고, 일단 정리가 되지 않아서 이 감상은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기분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ㅁ 저자이신 김광현 작가님은 전문적인 작가는 아니다. 작가님보다는 교수님이 맞다. 건축학계에 오랫동안 몸담으셨던 교수님이다. 교수님이 남기신 건축에 대한 어떤 소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건축학을 전공하신 분이 바라보는 건축학에 대한 이야기랄까. 보통 이런 느낌의 비문학이 많으니까. 한창 건축에 관심이 많아졌던 때라, 왠만한 책들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구매했다. 그게 벌써 올해 초였는데… 살 때만 하더라도 ‘건축이 우리에게 뭘 알려줄까?’ 이게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오랫동안 학계(여길 학계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건축이라는 어떤 분야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에 몸담은 교수님이 바라보는 자신의 분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지 궁금했던 것 같다. 참고로 김광현 교수님은 작년에 퇴임하셨다고 한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분야에 고민을 담게 된다. 그 흔적이 담겨있을 교수님의 건축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ㅁ 가장 위에 인용한 머리말은 책에 대한 목적성을 보다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시대가 지어야할 건축’이라는 게 무엇일까. 우리는 살면서 모든 건축에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다. 최소한 집이라는 건축이 있을 것이며, 거기에 어딜 가든 건축 안에 있거나 건축 주위에서 생활한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없기 때문에 건축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알게 모르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건축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조금 많이 느낀다. 꼭 어떤 유형의 건물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공간만 보더라도 그렇다. 내가 사는 곳만 하더라도 마땅히 쉴만한 곳이 없다. 앉아서 쉴만한 넓은 공터가 없다. 그리고 걷고 싶은 길이 없다. 모두 아스팔트로 된 차도뿐이다. 사방에는 차량, 아니면 오토바이가 돌아다니고, 그런 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사고가 안나는게 다행이라고 본다. 작은 놀이터가 있지만, 주변 건물에 비해 너무 초라해보이고, 그렇다고 주변 건축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느낌들. 좋지 않은 걸 알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이런 환경. 난 ‘이 시대의 건축’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궁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ㅁ 총 10장으로 이뤄진 책은 약간씩 연결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각 장별로 따로 읽더라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아직 5장까지 읽은 것만 보면 그렇다. 다만 약간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쉬운 건 맞다고 생각한다. 각 장별로 살펴보자면, 1장은 ‘건축’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한다. 왜 집을 짓고, 건축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 마디로 ‘건축’을 정의하는 시도라도 보았다. 2장에선 지금 현재 우리가 아는 ‘건축’이 아니라 그 이전의 건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1장과 약간 이어져있는데, 건축이라는 행위의 본질, 근원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우린 건축을 ‘만든다고’ 말하지 않고 ‘짓는다’라고 말하는지 조금 생각해보게 된다. 짓는 것은 하나씩 쌓아 올린다고 본다면, 무엇을 쌓아 올려야하는지 진지하게 고찰해봐야한다. 단지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덮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건물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용되는지, 사용자와 주변 환경이 어떤 것들이 필요로 하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과정. 그게 본질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3장은 건축을 누가 짓는지에 대한 이야기. ‘사회’가 건축을 짓는다는 걸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의 구성원과 요구가 공간의 필요성을 생산하고 그렇게 유형화하는 과정이 바로 건축이라는 것이다. 바로 장의 제목처럼 ‘사회가 만드는 건축’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었다. 4장을 본다면, 사회에서 정확히 어떤 점들이 건축을 짓는 걸까에 대한 대답이다. 바로 시설, 제도, 그리고 공간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여기선 바로 이 부분이 정확히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건축물은 누군가와 함께 쓰기 위해 만들어진다. … 건축의 시설은 사람들이 함께 쓰는 가치를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 건축이란 사람이 모여야만 만들어지는 사회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건축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p. 291
 사람이 모이면 제도가 생기고, 그게 시설을 만들고 결국 공간을 표현하게 된다. 전반부의 마지막이었던 5장은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은 도시’로서 건축을 표현했는데, 모여 살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들이 이루는 공공성, 특히 공공건축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공성이 마치 ‘작은 도시’라고 표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ㅁ 1장에서 5장까지 읽으면서 자꾸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건축은 인문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도, 공학도 아닌 건축 그 자체라는 점이다. 건축을 어떤 분야로 해석하기엔 너무 특이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건축을 짓는 과정에서 공학이 적용되고, 사람들이 이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면모도 엿보인다. 건축의 외관이나 주변환경과 미치는 영향을 본다면 예술적인 면모도 있다. 그런 모든 방향에서 건축을 살필 수 있지만, 그게 건축의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건축을 어느 하나의 분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는 의견. 읽는 내내 그런 관점으로 책을 쓰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건축은 그저 건축이라는 하나의 분야로 봐야한다는 주장은 책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보단 문장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5장을 관통하는 한 가지 내용은 건축은 만들면 다가 아니라는 것. 건축 자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이용하는 사람부터 주변 환경까지, 심지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곳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영향을 주지 않는 건축은 없어서, 우리는 건축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머지 장을 읽다보면 좀 더 뚜렷해질 것 같은 느낌만 있을 뿐이다. 

ㅁ 어떤 책이든 읽다보면 관심가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 주로 내가 관심을 두던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4장에 있던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요즘 한창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먼 옛날, 자기가 선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자기가 학생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교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생님들과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이 나무 밑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이것이 학교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루이스 칸은 말했다.
p. 335
 책은 건축에 관해서 이 인용문을 사용하는데, ‘나무 밑’이란 장소는 아직 건축물 이전이지만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학교라는 건축을 지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르치려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에 공간과 장소를 부여하라는 뜻’(같은 페이지)으로 루이스 칸은 말한 것이다. 이건 건축에서만 국한될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 더 나아가서 ‘교육’이란 본질에 좀 더 집중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본질이라는 게 모든 걸 해결해주지도, 그렇다고 지금 현실과 잘 들어맞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제도와 어떤 정책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 바로 건축이나 아니면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도 적절한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잘 생각해보면 학교의 이미지가 모두 비슷하다는 건, 모든 학교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 사회가 다양성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것저것 정책으로서 점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너무 단편적인 시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차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아직은 많이 아쉬운 게 현실이다. 건축에서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정책, 제도보단 정말 건축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정책, 제도는 사실 일상적으로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즉 현장에 와닿지 않는다. 눈으로 보이는 부분도 없고 일상에서 매일 보는 것도 아니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다. 건축이 바뀌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바뀐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매일 본다. 손에 잡힌다.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오히려 정책 제도보다 더 효과적일지 모르겠다. 

ㅁ 다른 학문들도 비슷하겠지만, 건축은 특히 더 어려운 것 같다. 생각할 부분이 너무 많은 듯한 느낌이랄까? 다른 학문도 못지 않겠지만, 건축은 그 분야에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주변 모든 걸 생각해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괜히 건축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5년을 다니는게 아닌 것 같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특히 사회적인 부분은 더욱 더 말이다. 그럼에도 교수님이 그나마 잘 정리하셔서 그런지 각 장에서 설명하는 지점은 뚜렷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다만 양이 많아서, 포인트가 되는 어떤 내용을 잘 붙잡지 않으면 무슨 내용을 읽는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 제공된 이미지가 있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예시들도 많아서 아쉬웠다. (건축 관련 책을 읽다보면 항상 이 점이 거슬린다. 이미지를 찾아가며 책을 보는 습관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나도 읽다가 중간에 놓쳐서 다시 돌아가 읽었던 적도 많았고, 읽는 내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분명 읽지 않으니만 못하게 될까봐 굉장히 힘들게 읽었다. 아직 5장이나 더 남았는데… 
 학문을 책 하나로 다 설명하려는 것은 어쩌면 말도 안될지 모른다. 건축이라는 학문이, 아니면 실제 건물들이, 장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상호적인 관계. 영향을 받고 주고 하는 그런 관계.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이 공간이나 장소를 포함한 건축일 수 있고, 심리적인 요인일 수 있다. 어쨌든 그런 걸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이 뒷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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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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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래라도 결국, 이야기는 사람들의 감정이기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 김초엽 

ㅁ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란 책을 알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책이 일단 출간된 날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19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처음 선보인 책으로 알고 있는데, 나 역시 그 곳에서 김초엽 작가님과 이 책을 알았다. 그 땐 장강명 작가님의 책을 보려고 갔던 건데, 불쑥 마음에 끌려서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이 책을 구매했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이었고, 제목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대게 나의 충동적 구매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애초에 내가 실망을 잘 안하는 성격이라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책을 만나서, 또 새로운 작가님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ㅁ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이 책은 김초엽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이라는 점, 그리고 작가님의 첫 책이라는 것. 그리고 SF(Science Fiction)라는 장르의 책이라는 점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2018년에 있었던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의 대상과 가작 모두를 차지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가작인 작품이었고, 안에 [관내분실]이란 소설이 바로 대상이었다. 여기서 궁금했던 건, 왜 대상 작품이 아닌 가작 작품을 제목으로 선정했을까 궁금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언젠가 말이다. 그리고 그 때, 이 책이 과학소설인걸 알았다. SF라고 하면 뭔가 스타워즈나 손에 닿지 않을 미래를 생각하기 쉽지만, 난 이 책을 통해서 그런 것만이 SF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모든 작품들에게서 공통된 특징은 바로 엄청 먼 미래임에도 감정적으로 지금 시대외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술적인 미래, 엄청 발달된 과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발달된 시대에도 결국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라서, 지금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무척 재밌다. 과학적인 이야기는 전개를 위해 가미된 조미료같은 기분이랄까. 

ㅁ 예전에는 SF라고 하면 뭔가 조금 소수만이 즐기는 장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판타지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전혀 그런 게 아닌 줄 알면서도, 또 다른 소설처럼 비슷하게 있을 법한 이야기이면서(단지 그 있을 법한 이야기가 미래의 이야기라는 점이겠지.) 난 왜 그렇게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르겠다. 사실 막 찾아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소설중에서 과학소설은 이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는데, 이런 과학소설이라면 대중적으로도 엄청 호응 받을 수 있는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나처럼 과학소설을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김초엽 작가님의 책은 정말로 편견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그런 느낌이다. 해리포터 책이 판타지 책이지만 대중적으로 엄청난 호응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 소설도 충분히 그런 경우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ㅁ 여러 단편소설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건 소설집 제목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과학소설이겠지만, 오히려 지금 시대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저 흐름에 과학적인 요소가 조금 들어있는 지금 시대의 소설. 경제성을 따지는 어떤 거대 조직과 결국 경제적 논리로 틀어져버린 한 사람의 일생이 지금 시대에서 곳곳에서 들리기 때문이었다. 이게 과학소설이라는 점은 간간히 들리는 우주선과 로봇에서 알 수 있지, 결국은 우리네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마 배경이 지금 시대였다면, 씁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회의 불평등을 느끼기엔 너무 약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과학소설이라서 그런 부분보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이 있는 곳에선 결국 비슷한 감정과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p. 181~182
ㅁ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약간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릴 때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영웅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꼭 뒤늦게 알려지고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진실을 알게 될때 느끼는 허탈감이랄까? 아마 그걸 소설 초반의 가윤(주인공이다.)이 느꼈던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가면 결국은 조금 다른 감정으로 끝나지만, 초반에는 그런 점이 무척 끌렸다. 그리고 다 읽을 때쯤엔, 가윤의 영웅이었던 재경의 마지막 선택에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탐구하고 싶은 것들이 사실 그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우린 그 과정에서 잘 깨닫지 않으니까. 결국 확인하고 나서야 깨닫는 감정들이니까. 재경은 그걸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라고 난 생각했다.

ㅁ 마지막으로 대상 작품인 [관내분실]에 대해 말하고 끝내고 싶다. 이걸 읽으면서 난 내 어머니를 생각했다. 딱 지금 내 나이대의 어머니들이 소설에 나온 ‘엄마’의 삶과 많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난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녀관계라서 그런걸까 싶었지만, 아니면 내가 아직 부모라는 입장이 되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어쨌든 그곳에서 난 나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원래 그렇게 되는 게 정상인가 그런 오묘한 마음이 오히려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슬펐다.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하셨는지… 읽는 내내 마음이 영 불편했다. 

ㅁ 소설에 대한 간단한 평들을 남기다보니까, 내가 지금 과학소설을 읽은 게 맞는지 모호해졌다. 결국 쓴 내용들이 스토리에 대한 의견뿐이라는 점에, 소설에 장르가 중요한게 아니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과학적이든 아니면 판타지처럼 아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든, 결국 사람들이 등장하고 관계가 발생하면 그건 시대불문하고 감정의 흐름은 종족이 바뀌지 않는 이상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상이 되려면 애초에 사람이 아니어야 할까. 기존의 우리들의 상식을 벗어나야 할 것 같다. 감정이 소설이고, 과학적이냐, 아니면 말도 안되는 마법같은 것들은 그저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들춰내는 장치?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읽은 과학소설은 나에게 준 것은 바로 감정. 사람들이 만나면 발생하는 어떤 감정이 우리네 세상이고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탐구하고 천착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해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 어디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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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모두가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
[피프티 피플](창비) - 정세랑

ㅁ 이 책의 시작은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이 책이 소개되었고, 내용이 무척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해뒀다가, 이번에 구매해서 읽었다. 제목 그대로 50명, 정확히는 ‘약 50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책이다. 소개되는 다른 책과 다르게 특이했던 건, 그 인물들이 하나의 챕터를 가지고 있고, 그 곳에서 각자 모두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그 점이 몹시 재밌다고 라디오를 들을 당시에 생각했다. 단지 그런 방식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보여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다 읽고 말하자면, 이 책을 안 읽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을 정도로 재밌고 소중한 책이 되었다. 진짜 너무 재밌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로 생각할만한 지점도 엄청나게 많았다.  

ㅁ 재밌는 몇 가지를 먼저 언급하면, 일단 50명이나 되는 주인공들이 다른 곳에선 잠깐 등장하는 조연으로 표현되는게 너무 재밌었다. 어떤 인물과 이런 관계였고,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 마치 소소한 퍼즐을 푸는 기분으로 찾는 재미가 있었다. 주인공의 아내였던 자가, 어느 순간에는 주인공이 되고 그 사람이 우연히 만난 사람이 그 다음 챕터의 주인공이 된다. 보통의 소설은 어떤 정해진 주인공들이 주변의 조연들과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런 점이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차이였으며, 나는 이 부분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이 특정한 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삶이기 때문이었다. 한 점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원이 아니라, 여러 점들이 연결되어 있는 ‘그래프’ 같았다. 난 이것이야말로 세상이라고,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소설들은 하나의 중심으로 그려지는 원 같은 이야기라서, 그 중심에 나를 넣지 못한다면, 약간 심심할 수 있지만, [피프티 피플]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은 그 중 하나는 읽는 사람과 비슷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삶도 비슷하게, 나의 이야기에서 스쳐가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삶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소설이 바로 그 점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피프티 피플]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인 셈이다. 

ㅁ 주인공이 50명쯤 되니까, 그 인물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 재미도 있었다. 나는 대충 5명이 있었고, 그 인물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 인물이 주인공인 시점의 분위기와 상황, 아니면 인물의 심리가 좋았다. 물론 인물 자체가 좋을때도 있지만, 그 주인공에 대한 내용이 그렇게 길지 않아서, 확 좋아할 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점도 [피프티 피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보통은 주인공이 이렇게 많지도 않으니까. 동시에 궁금했던 건, 어떻게 50명의 인물들이 제 각기 다른 성격을 보여주는데, 그걸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걸까 참 놀라웠다. 마치 50명의 삶을 겪어보지 않고서도 가능한 일이라니… 책을 읽으면서 세세한 묘사를 보다가 새삼 작가님의 능력에 감탄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이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p. 392 작가의 말 中
ㅁ 이 소설이 너무 좋았던 것은, 읽다가 문득 느껴지는 삶의 ‘조각’이었다. 이건 요즘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설명이 우선 필요하다. 요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모두가 비슷하지만 그저 살아가는 대로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읽은 [피프티 피플]에서 여러 순간들을 만났다. 가게를 운영하고 문을 닫은 뒤 그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이야기기. 건축을 전공하려는 학생의 이야기. 과거에 인연을 다시 만나고 살짝 설렘을 느낀 젊은 사람의 이야기. 이런 순간들, 장면들에게서 난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앞서 말했던 삶의 ‘조각’이라고 난 말하고 싶다. 내가 느껴보지 못한 ‘조각’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그리고 좋아하는 ‘조각’을 찾는 일이 이번 소설에서 많았던 것 같다.

ㅁ 소설의 특성상 여러 사람의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피프티 피플]의 한 순간을 뽑자면 난 마지막 챕터라고 생각한다. 영화관에 모여있는 장면인데, 그 장면이 난 이 소설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말하듯, 50명이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 없는 소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그저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 위주로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연이 되고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결국 세상에 주인공은 없는 것. 이 소설은 단지 50명이지만, 70억명이란 전 세계 사람들을 압축시켜둔 이야기라고. 만약 누군가 소설을 물어본다면 난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올해 읽은 소설들 중에서 정말 재밌고 빠르게 읽은 책이었다. 시기도 하필 이것저것 뭘 할지 모르는 순간이라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한창 궁금한 시간이라서, 실제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것 같은 50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에게 많은 생각과 감정을 준 것 같다. 정확히 뭘 주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읽기 전과 후로 뭔가 달라진 기분이 든다. 그리고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고 말한 적은 많지만, 동시에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잔잔하면서도 동시에 재밌고, 그리고 따듯한 무언가를 전해주는 소설. [피프티 피플]. 너무 좋고 재밌고 잘 읽었다. 마지막은 가장 좋아했던 문장으로 끝내고싶다. 그 말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런 우연스러운 순간들이 결국 세상이니까 말이다.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 p. 248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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