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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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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렉스 / 피에르 르메트르 / 다산책방 (2012)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안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읽는 내내 다음이 궁금해 조바심이 났음에도, 그랬습니다. 물론 책두께가 만만치 않았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도 답은 아닌 듯 합니다. 더 두꺼운 책들도, 몇권 분량의 책들도 한번 꽂히면 쉬임 없이 읽어내곤 했으니까요. 그럼 이 잘 쓰여진, 충분히 장르적이고,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첫째는, 낯선 구조 때문일 겁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의 컨벤션을 여러번에 걸쳐 배반합니다. 가녀리고 수동적인, 꼼짝없는 피해자로 알았던 주인공 알렉스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1막의 끝이 그 첫번째이고, 무지막지한 가해자로 돌변한 알렉스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살인행각이 펼쳐지는 2막이 두번째, 그리고 그런 알렉스가 돌연한 최후를 맞이하는 2막의 끄트머리가 세번째, 그러한 그녀의 기막힌 인생과 그녀의 최후를 둘러싼 충격적 미스터리가 밝혀지는 3막이 마지막 네번째입니다.

 

이러한 반전과 비틀기는 읽는 이들의 몰입도를 극도로 높이는 동시에 신기하게도 일정 정도의 거리두기 효과 또한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알렉스의 처지에 동화되어 가슴을 졸이다가, 알렉스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면 그녀의 납득 불가능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며 저도 모르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저는 내처 읽지 못한 채 잠시 책장을 덮고 숨을 돌리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더랬습니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소설의 더딘 독해속도의 또다른 이유가 흔치않은 캐릭터 때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스라는 캐릭터는 곧 구조 자체라 할 만큼, 낯설면서도 이 소설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를 동정하고 결국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유일한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저를 멈추게 한 것은 알렉스 뿐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독자 편에 서서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또다른 주인공, 카미유 반장 또한 저에게는 그리 쉬운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터무니없이 작은 키는 물론이고, 그의 어둡고 예민한 내면, 범상치않은 성장환경과 여태껏 살아온 인생까지. 알렉스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결코 일반적인 형사반장 캐릭터라 할 수 없는) 그의 '낯선 특별함'에 솔직히 저는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아내를 잃은 상처와 예술가로서는 최고이지만 엄마로써는 빵점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애증 때문에 그는 알렉스 사건을 너무도 더디게 진행시킵니다. 알렉스를 마주할때마다 그의 인생을 좌우한 그녀들이 떠올라 계속 부대끼며 내적으로 침잠할 뿐, 좀체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꼼짝없이 그의 속도를 따라야 할 우리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어서 상처를 딛고, 영민하고 냉철한 민완형사의 면모를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오히려 우리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여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만들고 맙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그렇게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저도 모르게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카미유의 페이스대로 주저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알렉스의 실체를 깨닫고 그녀의 아픔과 뒤늦게나마 마주하는 순간... 알렉스와 카미유 반장에게 흠뻑 동화되고 만 것이지요. 그러니 갈수록 속도는 더디어져만 갔습니다. 카미유가 알렉스를 통해 자신과 마주하고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알렉스의 행동을 이해하고 알렉스의 가엾은 인생을 위무하는 일 또한 머리보다는 마음을 써야하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여러가지 상념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끝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알렉스. 자신의 상처에 허덕이다가 그런 그녀를 살아있을 때 지켜내지 못한 카미유. 그리고 이들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관심과 사랑도 베풀지 않은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까지. 누구를 탓하며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 지 난망해질 뿐 그 어떤 답도 찾아지지 않아...읽는 내내...그리고 읽고 나서도 마음이 더디디 더뎠던 소설, '알렉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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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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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디너 / 헤르만 코흐 / 은행나무 (2012)

 

'디너'를 읽는 내내 올해 초 읽었던 '아들의 방'이라는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범죄에 휘말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중산층 부모의 활약상을 다룬 이 소설은 비슷한 설정의 '디너'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들의 범죄 가담에는 결국 피치 못할 사정이 있고, 주인공인 아이의 아빠는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용감하게 음모를 파헤치고 범죄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르친화적 전개 덕분에 이 소설을 빛나게 해주었던, '아들의 범죄를 알게 된 부모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도덕적 딜레마는 어느 순간 면죄부를 받으며 희미해집니다. (혹은 지극히 올바르고 상식적인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훈훈한 교훈극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결말은 읽는 이들에게 일말의 찜찜함이나 생각할 거리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오락으로써의 이야기의 기능을 다했다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충분히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에도 작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의 한계를 '오락거리'로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디너'는 네덜란드에서 수십만부가 팔렸다는 책 소개글이 밑기지 않을 만큼, 무겁고 진지하게 앞서 말씀드린 도덕적 딜레마에 집중합니다. 제목처럼 불과 몇시간 정도의 저녁식사를 소설적 시간으로 설정했음에도 이야기 전개는 생각보다 훨씬 느리고, 별다른 사건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디너'는 독자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거나, 보여주더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읽는 이들을 당황케 하는 소설입니다. 뭐, 다른 분들을 함께 끌어들일 필요없이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가족들간의 저녁식사에서 폭로되는 엄청난 비밀과 이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간의 치열한 심리전과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긴장감을 기대했지만, 소설은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심지어 메인요리가 나온 이후에도 제가 보고싶어 했던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채 화자이자 주인공인 파울의 캐릭터 묘사에 전력을 다합니다. 메인요리가 나올 때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견 평범해보이는 주인공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 그의 신랄한 말투가 그저 냉소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물을 평가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 또한 타고난 관찰력이나 섬세함 때문이 아니라 병적인 집착 혹은 열등감의 발로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정도 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사건들은 언제 일어나고 언제 설명이 되는 거야 대체?'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는 와인을 마시고 디저트를 먹고 메인요리가 다 식어갈때까지도 내내 뜸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어가는 메인요리 따위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마침내 오고야 맙니다. 제가 기대했던, 음식 따위 식사 따위가 아닌 그 자리에서 품위를 가장한 채 앉아있는 네 인물들의 저열하고 치사한 속살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 말입니다. 내내 딴 소리만 하며 눈치를 보고 있던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 주인공의 형 그리고 형의 아내. 이 네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아들들이 저질렀으나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범죄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대했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몇마디 언쟁으로 그들의 입장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 버리고, 너무 차이가 큰 탓에 특별한 심리전은 그리 필요치 않습니다. 네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누구도 누구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빨리 인정해 버립니다. 문제는 단순해졌습니다. 밝힐 것인가, 숨길 것인가. 애초의 딜레마는 여전하지만 더 잘나고 더 단호한 주인공의 형이 이미 입장을 정리한 이상, 주인공을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싱거워지려는 순간, 저는 비로소 작가가 지금껏 길고 길게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 여지가 없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 작가는 주인공 파울을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교묘하고 철저하게 숨겨왔던 그(파울)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단순히 부모라는 이유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을 그가 하고마는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더욱 충격적이면서도 굉장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엄마라는 이유로 (아들을 위해) 주인공의 선택에 따르는 아내 끌레르의 모습과 보기좋게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 덕분에 이 소설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딜레마를 던져주고 고차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끝을 맺습니다.

 

즉, 작가는 자식을 위해서는 (설령 그것이 비도덕적인 행위일지라도) 무엇이든지 하는 일그러진 부모의 모습을 통해 '절대적인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모라는 인물들의 성격과 됨됨이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들이 단순히 자식을 위해 이같은 비도덕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식의 잘못마저도 감싸고도는 가족이기주의의 진짜 원인은 그러한 비도덕적 자식을 키워낸 부모 또한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비도덕적인 부모를 키워낸 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극적 긴장감과 구조의 완결성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주인공을 그토록 공들여 세밀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파울이 키운 미헬보다, 미헬을 키운 파울을 더욱 더 궁금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울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를 키운 부모, 그가 다닌 학교, 그리고 그가 사는 네덜란드 사회, 나아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 전체. 책을 덮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씁쓸함과 좀체 찾아지지 않는 해답에 마음 한켠이 먹먹해오는 소설, '디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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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끝 단비.

 

이어질 장마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기를,

부디.

 

 

솔로몬 왕의 고뇌 / 에밀 아자르 / 마음산책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하나의 생을 이 두 이름으로 살아냈던 위대한 작가.

그런 그가 기어이 삶을 놓고 죽음과 마주했던 이유가 이 책에는 나와 있는걸까?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 만으로도 어떻게든 찾아 읽어야 할 책.

 

 

내 욕망의 리스트 /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 레드박스

 

복권에 당첨된 부부. 비로소 드러나는 두 사람의 진심과 욕망.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설정이며 이야기지만, 책소개를 보노라니...

이를 가벼운 발단으로 이용해 선정적이고 과장되게 풀어내지 않고, 

철저한 개연성을 바탕으로 주인공들의 심리를 충실하게 따라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뻔한 이야기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충분히 진정성을 획득해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였으면. 

 

 

 

N을 위하여 / 미나토 가나에 / 재인

 

<고백>과 <야행관람차>, 그리고 <왕복서간>에 이은 미나토 가나에의 또다른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감정적으로 극한에 몰린 인간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장기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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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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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세라 워터스 / 열린책들 (2012)

 

언젠가, 더 이상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소설을 읽어내기 쉽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직업상의 이유 때문에 점차 취향마저 플롯도 캐릭터도 뚜렷한 이야기에 끌리게 되었노라고, 변명 아닌 변병을 덧붙이기도 했었지요. 아무래도 90년대부터 지속된 한국소설의 경향 때문에 한국 소설에 국한해서 이런 이야길 했었던 듯 한데, 사실 이는 외국 소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주인공의 내면을 깊이 다룬,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외국소설을 만났을 때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다른 생경한 그네들의 속내를 이해하며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원래의 뜻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큰 번역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할 터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끌림>이라는 소설 또한 읽는 과정이 그리 수월하진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어둡고 지나치게 사변적이어서 읽는 내내 숨이 겨웠습니다. 뭐랄까요, 굳이 훔쳐보고 싶지 않은 남의 일기장을 어떤 공적인 이유(이를테면 용의자를 조사하는 수사관?) 때문에 억지로 살펴보는 뭐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특별할 것 없이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라 생각함에도) 이야기로써는 그리 즐기지않는 소재인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것, 그리고 역시 또 싫어하는 소재인 영매, 즉 초현실적인 무속의 세계를 주요플롯의 매개로 이용한 이야기 전개가 이 소설이 버거웠던 또다른 이유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인들일 뿐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가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을 읽는 내내 철없고 유약한 부잣집 여인네의 배부른 고민을 꾸역꾸역 들어주고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내면과 우리 역사 속 억압받고 차별받은 여인네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당시 영국 여인네들의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저는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들을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감옥 속 여성 죄수들엑 위안을 얻고, 그들을 도피처 삼아 자신의 현실을 극복이 아닌 망각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당시 여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당시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이성이 아닌 동성임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거부하다가 차츰 인정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며 한단계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물론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후반부의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당시 여성들에게 행해진 억압과 차별이 한 여성의 억압받던 욕망을 얼마나 왜곡된 형태로 분출시킬 수 있는지, 그러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이 가져온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역설적으로 건강하고 자유로운 욕망과 감정의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끝내, 이 소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울 수 없고, 결국 공감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을 동정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작가의 의도라면 할말이 없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주인공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며 읽게 되는 이야기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저의 편향된 시선과 협소한 이해심의 한계를 새삼 느끼며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 책, <끌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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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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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전2권) / 돈 윈슬로 / 황금가지 (2012)

 

자, 드디어 <개의 힘>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소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단순히 분량이 길어서 어마어마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솔직히 물리적 분량은 그 장대한 서사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적습니다. 10권쯤 되는 대하소설로 완성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개의 힘>이 다루고 있는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넓이와 깊이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말그대로 시대 그 자체라고, 혹은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거 이거, 안되겠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두서없이 중구난방 생각나는대로 한없이 떠들게 될 거 같습니다. 얼마나 정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하나씩 하나씩 꼭 짚을 것들만 짚으며 이 길고 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그 첫번째는...

 

집중과 생략

 

<개의 힘>이 놀라운 이유는 무수한 인물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엄청난 사건들이 정신없이 연달아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쫓아가기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로 복잡한 플롯의 이야기가 이 정도로 무리없이 잘 읽히다니...기적 혹은 마술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수십명의 인물들의 30년의 세월을 다룬 엄청난 이야기를 두 권 분량으로 감당해내기 위해 중간 중간 무수한 생략을 감행했음에도 이야기는 끊기는 일이 없고, 따로 안내표가 첨부되어 있을 정도로 등장인물이 많지만 이야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른 다음부터는 굳이 안내표에 의지하지 않아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전사(前史)가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효과적인 단순화가 가능했던 것은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솎아내 중요인물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앞서 말했듯 과감한 생략을 통해 보여줄 것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상상할 수 있도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그거야 좋은 이야기의 당연한 조건 아니야?'라며 당연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소설은 도저히 이 정도의 단순화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진짜, 과장을 좀 보태서 표현하자면...작가가 미치거나 신들리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말도 안되는 일을 해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이 엄청난 소설을 너무나 편안하고 쉽게 읽는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트와 아단

 

그 불가능한 단순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물은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아트와 아단처럼 보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 따위를 초장부터 우습게 허물어버리는 우리의 주인공 아트와 흔히 절대 악의 상징처럼 표현해내기 쉽지만 '상대적 선'인 아트보다 인간적이고, 아트보다 유약한 '상대적 악' 아단. 이 둘의 존재로 <개의 힘>은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 (결코 선하지 않은) 신들의 이야기, 즉 신화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인간의 복잡한 모든 내면을 몽땅 간직한, 그렇게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두 기둥이 선과 악, 삶과 죽음, 인간과 신, 이승과 지옥(이 소설에 천국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니까요)을 끊임없이 오가는 덕분에 우리는 한눈 팔 새 없이 이 소설이 그려내는 지옥도의 한복판에 떨어져 이들과 함께 그 처절한 지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앞서 말했듯이 신에 들린 듯 일필휘지로 평생을 걸고 서로를 쫓고 서로에게 쫓기는 이들의 집요한 추격전을 매인플롯 삼아 이 복잡다단한 지옥도를 단순화했던 것입니다.  

 

진짜 주인공

 

그러나 이 소설이 진짜 놀라운 이유는 우리가 당연히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아트와 아단이 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이라는 말이 꼭 맞는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작가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 작가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인물을 주인공이라 부른다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네, 이미 이 소설을 읽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개의 힘>의 진짜 주인공은 칼란과 노라입니다. 분명 이들의 이야기는 서브플롯이고, 이들은 아트와 아단을 보조하는 인물들이지만, 아트와 아단이 인간이 아닌 '신'이기에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진짜 인간 중의 인간인 칼란과 사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마땅히 인간이 느끼고 누려야 할 사랑을 느끼고,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희망을 지닌 유일한 인물들이 바로 칼란과 노라인 것입니다. 작가는 아트와 아단을 통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의 다름 아니라 말해놓고는, 슬그머니 이들을 통해 이 세상이라는 지옥이 그래도 살만하다고, 살아낼 가치가 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말의 긍정이 가능한 것은 후안 신부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희망의 정체

 

그렇습니다. 후안 신부라는 매개가 없었으면 이 거대한 소설은 결코 숨막히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햇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소름끼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마땅히 천사 그 자체여야 할 후안신부조차도 절대 선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바로 <개의 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과 희망의 진짜 얼굴인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 자신의 희망을 구현하기 위해 후안신부가 행하는 절대악과의 협상과 타협, 그리고 그 끝에서 맞이하는 전혀 고결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스스로도 원치않았던 타의에 의한 희생까지. 작가는 후안을 그렇게 희망의 상징이 아닌 절망의 상징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도 희망도 결국 없는 것이냐구요? 끝내 지옥의 구렁텅이로 우리를 몰아넣고 만 것이냐구요?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후안신부라는 존재를 통해 작가는 이 소설을 사실의 세계가 아닌 진실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경지를 보여줍니다.

 

진실과 마주하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까지 타락했고, 이렇게까지 지옥같아? 정말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이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야! 이게 진짜라고? 거짓말! 이건 다 거짓말이야!"

 

작가는 이러한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마치 기다렸다는 듯 후안신부의 죽음으로 거짓말처럼 인간성을 되찾은 칼란과 사라를 본격적으로 부각시키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란, 진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혹자는 이 소설이 현실을 과장하고 오독했다고, 그렇게 우화에 불과하다고 폄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해도 그게 과연 잘못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사실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야기꾼의 책무이고, 좋은 이야기의 조건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개의 힘>이 그리고 있는 한없이 불편한 진실의 세계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불편한 진실의 세계가 편안한 사실의 세계로 변하는 그날까지, 두눈 부릅뜨고 세상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후안신부가 그랬고, 어느 순간부터 아트가 그랬고, 결국에는 칼란과 사라도 따랐듯이. 살아있는 동안, 기꺼이 그 지옥의 고통을 감내할 끈기와 용기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희망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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