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라는 무겁고도 벅찬 말로 평생을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했고 독일에 유학을 가 박사 학위까지 땄지만, 그의 처소는 교회 예배당이 아니라 세계 곳곳 평화가 부재한 땅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잘 아는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송강호가 평화” 라고.
배우 송강호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송강호 박사’를 줄인 ‘송박’이라는 말로 그를 부릅니다. 더 가까운 이들 중에는 그를 ‘물귀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곁에 있으면 평화를 향한 싸움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나요.
그런 그의 삶과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책 <평화, 아득한 희망을 걷다>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물귀신처럼 끌어당기니까요. 평화를 향한 삶, 타자를 위한 삶의 자리로 말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만듭니다. 송박의 그 삶이 어떤 신학적 신념에서 출발했는지, 또 르완다에서부터 제주 강정까지 ‘개척자들’과 함께한 그의 평화 투쟁이 어떠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가 책 속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또 최근 추석 전까지 181일 동안 제주교도소에서 써 내린 수기들은 나치 독일에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의 ‘옥중서신’만큼이나 진실되고 강력합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이런 물귀신 같은 책은 저도 예수의 복음서 이후 처음이니까요.
(기독교문화교양지 <오늘> 2012. 11~12월호에 실릴 소개글인데, 조금 일찍 책 출간일에 맞춰 공개합니다.)
강정 미디어 전담 미남 둥글이의 영상 - "송강호 박사"
강정 미디어 전담 미남 둥글이의 더 최근 영상 - "송강호 박사 일대기"
작품 제작에 있어 재주 없는 것을,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 암시로 벌충하는 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의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 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 엥겔스, MEL. 1851년.-??쪽
......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 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엥겔스, MEL. 1881년.-??쪽
만약 문학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다. 내가 말하는 '참여'는 바로 이것이다. 문학이 순수나 노래로 환원된다면 그것은 시들어 버린다. 씌어진 문장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메아리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문학이 시대를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다면 한 시대의 문학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 사르트르,『글 쓰기의 목적』, 1960.-??쪽
참여는 (중략) 선전으로 격하되지 않는 한 정치적으로 다 가치적이 된다. - 아도르노, '참여', 뉴레프트 리뷰, 1974.-??쪽
순수예술은 진지한 경우 언제나 사회참여의 형태(아무리 은폐되었을지라도)이며, 하찮은 것일 때 단순한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쪽
실제 사회관계는 글쓰기가 읽혀지는 관계 속에서 뿐 아니라 글쓰기의 실천 자체 속에 깊이 박혀 있다. 다른 방식으로 글쓴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흔히 상이한 사람들에 의해서 상이한 방식으로 상이한 관계 속에서 읽혀지게 마련이다.-??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