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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과 금>, 미완의 성장기

 

1.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라 할 당신에게 청부 살인에 가담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병으로 죽어가는 대기업 회장의 죽음을 몰래조금 앞당기는 일이다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게다가 무죄가 보장되어 있다이 부담 없는 살인의 대가로 당신이 받게 될 돈은 7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발을 들일 것인가뺄 것인가?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은 이처럼 돈과 사람을 저울질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은왕 긴지와 청년백수 모리타다긴지는 탁월한 지략을 지닌 사채업자로그가 지원하는 정치인이 일본 정계의 정점에 앉으면 자신은 경제계의 정점에서 거대기업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다모리타는 긴지가 선택한 파트너이자 후계자로은왕과 함께 활동하며 수련을 쌓아 장래에는 은왕을 넘어서는 금왕이 되려 한다은왕이라 불리는 인물과 금왕이 되려는 인물이 힘을 합쳐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벌이는 돈의 투쟁이 <은과 금>에는 담겨있다. <은과 금>이 담은 투쟁이 돈의 투쟁인 이유는그것이 돈으로 돈을 제압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으로라는 조사에 주목하기 바란다조사가 강변하듯그들에게 돈은 수단이다그리고 목적은 자아실현이다금권(金權)의 최고봉이라는.

 

이처럼 돈을 수단으로 하여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만화적 가정은우리가 현실 속에서 듣는 말들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돈은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등등은 그 현격한 예다돈의 목적 불합치성이 강조되고 있으며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그렇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서는 돈이 수단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돈을 위해 저질러지는 악()들을 우리는 목도해 왔다절도와 사기착취와 해고불법 상속과 분식회계 등등개인 간에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에그리고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적 죄와 도덕적 악은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바로 <은과 금>의 긴지와 모리타도 고리대금업과 사기(도박)로 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돈을 수단으로 한다는 그들은악으로 돈을 추구한다다시 으로그들에게는 악 역시 수단이다따라서 그들의 쟁투는 돈의 쟁투이자 악의 쟁투이다그들은 악으로 돈을 벌고돈으로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이 글의 목표는 바로 이 만화적 도정의 서사를 검토하는 데에 있다.

 

 

2.


서두로 다시 돌아가 당신의 선택을 상기해 보자돈이었나사람이었나발을 들였는가뺐는가모리타는 동일한 제안 앞에서 돈을 선택하지 않았지만발은 들였다이는 사실 긴지의 시험으로모리타가 돈을 사람을 넘어서는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랬기에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 모리타는 긴지의 시험에 합격했다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은 결국 돈에 의해 움직이며 돈을 위해 자기편을 배반할 수 있다반면 모리타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돈보다 사람을 위에 놓고 보는옳은 인간이다.(<그림 1>) 긴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였고모리타야말로 적합한 인물이었다이렇게 모리타는 긴지에게 이끌려 돈과 악의 투쟁에 발을 들였다돈을 수단으로 볼 수 있는 두 인물 긴지와 모리타 듀오는 그렇게 함께 쟁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의 적은 주로 돈을 쥐고 있는 악한 자들이다.

 

 

<그림1> ⓒ후쿠모토 노부유키

 

이런 면에서 긴지와 모리타는 의적을 연상시킨다홍길동과 로빈훗 등의 의적 캐릭터의 방식은 강자에게 강자의 방식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그 현대적 변용으로서 만화 <은과 금>이 채택한 것은 돈의 활용이라는 강자의 방식으로 재벌이라는 강자에 대항하는 것이다하지만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의적과 달리 긴지와 모리타는 약자를 위해 베풀거나 기존 사회의 타자를 위한 이상세계 건립을 꿈꾸지 않는다적어도 드러나게 서술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금권의 최고봉에 오르는 것이다게다가 이들의 방식은 강자들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한 악이다살인만이 제외되었을 뿐강자들의 등을 치는 모습은 통쾌할 만큼 악랄하다이런 면에서 볼 때 이들은 현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악한 주인공의 형상과도 유사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거탑>의 장준혁으로 대표되는 악한 주인공들처럼 파국을 맞이하지는 않는다오히려 긴지와 모리타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끊임없이 승리한다한때 청년백수였던 모리타는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돈과 더 치밀한 악을 활용하는 자로 성장한다.

 

이런 만화의 캐릭터 형상화와 서사 속에서선과 악의 대립구도도 수정된다. <은과 금>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악과 악의 대립이다구체적으로는 인간적 악과 동물적 악의 구도에 가깝다돈과 악을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인간들이 돈과 악을 체화한 동물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은과 금>의 인간과 동물은 같은 자리에 있다긴지와 모리타가 벌이는 투쟁은 만화 속에서 포커마작내기격투 등으로 이루어지는데이 때 주인공과 적대자는 같은 장같은 게임의 룰 안에 있다이 게임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나뉘는 결과를 향해 치닫는다이 게임들은 돈을 걸고 이루어지며돈을 목표로 한다치밀한 악이 돈을 거머쥐기 위해 동원된다적어도 게임의 순간만큼은수단으로서의 돈이라는 인간적 개념은 정신의 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따라서 긴지와 모리타의 인간적 여정의 순간순간은 동물적이다특히 이 게임의 장에 새로이 진입한 인간’ 모리타는시간이 지날수록 동물적인 면에서 성장한다.

 

 

3.


 11권으로 구성된 <은과 금>의 서사가 막바지에 치닫는 10권에 이르러모리타는 은퇴한다그의 은퇴 사유는 악당들과 함께 있다 보면내 인격까지 변해버릴” 것이 두려워서였다그는 금왕이 되려던 자아실현의 꿈을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버려야 했다. <베가본드>(타케히코 이노우에)의 미야모토 무사시가 내려오지 못한 그 죽고 죽이는 나선을 내려온 것이다모리타는 긴지와 그 게임의 세계에서 발을 뺐다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이런 모리타의 발 들여놓음과 발 뺌만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만화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성장소설은주요 인물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해의 갱신을 그 요체로 한다. <은과 금>에서의 모리타의 경우도 발 들여놓음이 금왕이 되어보려는 자아실현의 꿈의 소산이었다면 발 뺌은 인간으로 남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는 면에서 역시 자아에 대한 고민과 닿아있다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간적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자아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다이처럼 <은과 금>을 성장소설의 서사로 이해할 때모리타의 성장은 악운의 레벨 업이 아니라 그가 꿈꾼 자아실현이 인간됨의 포기로 이어진다는 모순을 깨닫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성장이 성장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 성장인 셈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에서 같은 기표가 다른 기의를 지시하듯이앞뒤의 두 성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이들은 돈과 악의 체계 안에서의 성장과 그 체계 밖으로 나가면서 시작되는 성장을 각각 지시한다따라서 시점의 차이에 따라 전후의 기표는 성장과 퇴행으로괴물화와 성장으로 달리 표현될 수 있다그러나 모리타를 바라보는 시점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리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점이 어느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내가 걷고 있는 과정은 어떤 성장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장하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됨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순간을 우리는 꽤나 자주 경험하거나 목도한다긴지와 모리타가 살인만큼은 피하면서 지키려 했던 인간됨이지만그것은 생명을 방어할 뿐 사람 그 자체를 지켜내지는 못하는 것이다그들의 승부는 결국 패자를 만들고 말았다폐인의 모습으로 묘사된 패자와 그 참혹한 모습에 놀라는 모리타가 한 컷에 담긴 <그림2>는 승부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패자=폐인을 만들며 승자가 되거나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자=폐인이 되거나결국 모리타는 승자가 되는 과정을 거듭하며 금왕으로 상징되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다가가는 여정을 중단하고인간이라는 약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그의 선택은 김예슬 선언에 상응하는 것이다그 선택 이후에 대한 의문이 김예슬의 삶에나 그의 삶에나 여전히 맴돌지만.

 

  

<그림 2> ⓒ후쿠모토 노부유키

 

은퇴 후 모리타의 삶에 대해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그것이 성장하면 할수록 비인간적이 되어가는 어두운 세계의 영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과연 어두운 세계에 바깥이란 게 있는가또 설혹 가 완전히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내 밖에 여전히 존재하는 어두운 세계와 그 안에서 자아를 획득하며 잃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래서 긴지는 모리타에게 말한다. “만약 악을 꺾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즉그 이상의 악새로운 악당세대교체다그러니까 자네가 누군가를 구한다거나지켜주고 싶다면차라리 뛰어올라거악(巨惡)으로!” 그리고 그는 그의 길을 계속 간다. “재가 될 때까지.”

 

 

사족당연하게도 선한 자아와 선한 세계를 모두 얻을 길은 요원하다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다하지만 자아를 악에 젖게 만들면서라도 그가 추구하는 세계를 얻으려 하는 긴지의 선택과악한 세계를 그대로 두고 최대한 멀리서 선한 자아를 되찾으려는 모리타의 선택 역시도 미완의 프로젝트이다결국 가장 쉬운 길그리고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은 악한 세계에 맞는 악한 자아를 계발해 나가는 길이 되고 만다.이런 상황 속에서가장 쉬운 길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흑과 백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문제를, ‘나는 얼마나 더 백에 가까운 회색이 될 것인가’ 그리고 검은 세계를 얼마나 더 하얗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환해 버리는 것이 되고 말지 모른다하지만 결국 자아와 세계를 모두 잃지 않을 길은 그 길 뿐이다.

 

 

 

 

 

 

 

 

 

 

 

 

 

 

 

<싱크> 6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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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 5호]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힘없는 판타지


불의한 재벌을 국가()권력이 어떻게 비호하는지를... 눈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하나님 부처님 자연의 신이여 나에게 저 벽을 넘을 수 있는 초능력을....


2차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내려갔던 지인이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부산 영도에 강림한 닭장차형 명박산성 앞에서그것으로 상징되는 넘을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녀는 신들에게 초능력을 바랐다힘없는 사람들이 불의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기댈 것은 결국 초()현실적 힘이다.


그래서 초현실적 세계나 현상을 담은 판타지 장르는 유난히 현실을 전복하려 한다거의 모든 판타지의 내러티브 속에는 바꾸고 싶은 현실과 그 현실을 바꿀 초현실적 힘이 들어서 있다. <홍길동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해리포터>나 <엑스맨>, <반지의 제왕>도 크게 다르지 않다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초현실적 설정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읽을 수 있다재벌 3세 백화점 사장과 부모 잃은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몸이 바뀌는 기적이 필요했던 것이다뒤집어 생각할 때 보이는 것은기적이 아니고서는 계급을 넘어선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높고 두터운 현실의 벽이다이처럼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판타지 이야기 속에는 초현실적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현실이 전제처럼 도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판타지 이야기가 범람하는 오늘날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도저히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가 없다하지만 현실 속에서 기적이 일어날 공산은 없으니 이야기 속에서라도 기적을 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해보려는 것이 판타지의 시도다혹 판타지에 빠지는 것을 잉여나 오타쿠의 길이라 여겨 거부한다면 자기계발에 빠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자기계발을 통해 ’ 현실이야 어떻게든 바꾼다 해도 우리들의 현실은 바뀔 가망이 없다결국 내 입에 풀칠하거나 혼자 떵떵거리면서 우리의 문제에는 눈을 감아 우리를 그들로 치환하는 게 상책이다허나 상책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못마땅하다면? ‘우리로서 연대하면서 어떻게든 현실을 바꾸어 나가거나다시 판타지로 돌아올 밖에.


하지만 판타지에 빠지는 것이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시도보다 저열한 무엇은 아닐 수도 있다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말했듯 애초에 판타지는 현실의 확고부동한 부정성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나아가 때로는 판타지로 인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힘을 얻기도 한다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아침에는 사냥 낮에는 낚시 저녁에는 목축 밤에는 비평을 할 수 있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라그것은 마르크스가 상상 속에서 그린 공산주의의 결과적 장면이지만노동에 찌든 이들에게는 세계를 바꿔야 할 당위로 작동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앞서의 판타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일단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힘이나 의지가 다른 판타지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이 만화의 판타지적 요소들이 현실 즉이야기 속 이승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3부작 중 현재 완료된 두 편 모두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두 세계는 확고한 경계와 법으로 나뉘어 있다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이로 이승에 속한 이는 저승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두 세계를 넘나드는 저승사자들 역시도 사자(死者이송 업무 외에는 이승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규칙 아래 있다이 힘없는 신들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이승의 부조리에 눈 감을 수밖에 없다따라서 이 이야기는 슈퍼히어로물이나 기적적 사건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의 판타지는 될 수 없다하지만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어쩌면 슈퍼히어로물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독자들 안에서 작동한다그리고 그 핵심은 웃기고 울리기에 있다.




웃고 울기


먼저 웃자. <신과 함께>의 웃음은 해학과 풍자에서 발생한다이야기가 웃음을 주는 방식을 논할 때 자주 함께 사용되어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는 해학과 풍자는그 자체로는 웃음과 상관없는 요소를 새로운 맥락 안에 배치하는 것을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는 면에서 유사하다예를 들어 커피숍이나 사대강 사업 자체는 웃기지 않지만이러한 요소들이 저승 안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웃음을 유발한다하지만 그 웃음의 질이나 웃는 독자가 느끼는 감상에는 차이가 있는데이것이 해학과 풍자의 결정적인 차이이다둘은 주체(독자)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기준으로 구분된다해학은 주체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효과를 낸다앞서 든 예처럼커피숍이 저승에 헬벅스(Hellbucks)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웃음을 줌과 동시에 저승에 대한 친숙함을 이끌어낸다독자가 경험적으로 익숙한 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가까이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반면 풍자는 대상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환기하면서 거리를 확인하게 하고 더 멀어지게 한다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독자가 저승중심부를 관통하는 강인 삼도천이 하천 정비사업으로 물줄기가 직강화되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면그는 웃음과 동시에 사대강 사업에 대해 가졌던 비판적 정서를 감각하게 된다결과적으로는 저승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느끼게 될 수 있지만대개는 원래 비판하던 하천 정비사업이 저승까지 망치고 있다는 식의 감상으로 이어지게 될 공산이 높다이 경우 거리가 멀어지는 대상은 사대강 사업이 된다더 극명한 예로불효자를 가두는 한빙지옥이 불효자 급증으로 넘치는 제소자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다는 저승타임즈’ 기사는 불효자와 이승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해학과 풍자는 독자 안에서 어느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는데이 때 대상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신과 함께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해학은 저승이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혹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독자의 거리감을 좁히고풍자는 이승의 부정성을 인식시키며 이승 및 이승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거리감을 넓히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따라서 독자는 만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저승의 자리에서 이승을 바라보게 된다이 말은 독자가 이승보다 저승을 좋아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저승이 독자에게 이승을 바라볼 가상의 공간으로 작용하여이를테면 저승에서 확고하게 적용되는 권선징악과 같은 법칙이 독자에게 내면화된다는 뜻이다그 시선으로 이승을 바라보게 될 때독자는 그들이 바라본 구체적 대상에 따라 다음 댓글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혀 뽑힐 정치인 많겠네” / “나 튜브 타면 어쩌지..” /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처음에는 가벼운 웃음이었던 것이 <신과 함께>의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타자를 바라볼 때는 냉소나 조소로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는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윤리적 태도로 변화한 것이다이것이 <신과 함께>가 만드는 웃음의 힘이다.


이제 울 때다앞서의 웃음은 모험담의 틀을 취했던 <저승편>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반해 울음은 <이승편>의 지배적인 정서다하지만 <저승편>에도 이승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병렬되었는데이 이승 역시 눈물 나게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이는 저승을 이승(=근현대)처럼이승을 저승(=지옥)처럼 그리려고 했다는 작가의 의도와도 부합한다. <이승편>의 눈물을 살피기에 앞서 <저승편안에서 이승을 그린 장면을 먼저 보자.


<그림1> 신과 함께 저승편 65화 ⓒ주호민

 

<그림1>에서 흐느끼고 있는 인물은 죽은 유성연 병장이다그의 죽음과 그 후의 이야기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어쨌든 그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흐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이 장면은그러나 배경을 통해 비애감을 증폭한다지면에 근접한 창문과 전봇대에 기댄 쓰레기봉투를 담은 첫 두 칸미디엄숏 속에 창문을 담은 다음 칸그리고 실루엣으로 처리된 달동네의 풍경 속에서 차사들의 발목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말풍선이 흘러나오는 마지막 칸주거의 지옥(지하와 옥탑방)인 반지하는 거주자의 가난을 표현한다쓰레기봉투도 가난한 자의 삶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창문이다낮은 창문이 반지하임을 증거하듯 여러 칸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이것이야말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 만화를 가장 잘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를 창문이라고 생각해 보자만화의 칸처럼 네모난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온통 가난한 자의 삶이다창문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풍경을 바꿀 수 없다.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적어도 이승을 그릴 때만큼은 한울동이라는 달동네의 풍경을 꾸준히 비춘다창문은 그러나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말풍선까지 통과시킨다보이고 들린다보고 듣는다그래서 눈물이 창문을 통해 흐를 수 있다보이는 이들의 슬픔이 보는 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잠깐만 만화의 중요한 특징을 하나 짚고 넘어가자만화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매체로 자리 잡고또 정서적 이입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카툰화()의 효과가 크다스콧 맥클루드가 <만화의 이해>에서 말했듯독자는 실제에 가깝게 구체적으로 그린 그림일수록 그것을 독립된 특징을 지닌 타자로 인식하며보다 더 단순화한 그림일수록 그것에 독자 스스로 성격을 부여하고 더 쉽게 동일시하게 된다(그는 이것을 탈바가지 효과라고 불렀다). <신과 함께>의 화풍은 한 눈에 보아도 후자에 속하는 경우이다그래서 독자들은 그림 속 인물들을 작품 내에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만나고 경험하는 보통 사람들과 더 쉽게 연결하게 된다때로는 그림 속 인물에 독자 자신에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을 대입하는 일도 일어나며자기 자신과 인물을 동일시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흔히 진실을 보는 창으로 비유되는 다큐멘터리와도 다르다다큐멘터리 속의 삶은 많은 경우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만화 속의 삶은 와 닿아 있는 우리들의 것혹은 적어도 보편일반의 한 부분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그래서 <신과 함께>의 창문을 통해 보는 유성연 병장은 군대에 있는 동생을 떠올리게 하고펑펑 울고 있는 동현이(<그림2>)는 어린 동생이나 조카심지어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으로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그럴 때에 독자가 느끼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공감이다흐르는 것은 농도가 짙은순도 높은 눈물이다.




웃고 우는 만화적 리얼리즘의 판타지

 


<그림2> 신과 함께 이승편 19화 ⓒ주호민

 

독자의 눈물 젖은 공감은 <그림2>의 배경을 통해 통감(痛感)으로 이행한다이 배경은 동현이네를 퇴거시키기 위해 집에 들어온 용역들의 난동이라는 사건을 담고 있다잔뜩 어질러진 가재도구와 쏟아진 장독 그리고 그냥 발자국이 아닌 신발자국은 동현이의 눈물과 커다란 말풍선 소리와 겹쳐져 사건의 잔혹성을 환기한다이 짓밟힌 삶을 만들어 내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승편전반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예를 들어 구청직원들이 철거를 위해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는 철거민 대책의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파트 지어질때까지 어디서 살란 거요아파트를 하루에 지을수는 없잖여.” / “그래서 주거이전비 구백만원을 드리는 겁니다.” / “구백만원으로 집을 구하라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끼고담벼락과 창문에 빨갛게 칠해진 나가라와 자진철거에 고물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동현이 할아버지의 삶과 일주일 만에 발견된 오락실 할아버지의 주검을 겹쳐 연상하고사람도 아닌 가택신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분노한다면이미 그 독자는 통감의 역치를 초과해 버린 것일 테다.


게다가 그 독자는 이미 웃다가 저승의 법칙을 내면화했기에 울면서는 그 법칙으로 지옥 같은 이승의 부정성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더더군다나 <신과 함께>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신들(차사들과 가택신들)이 말이 안되잖아”, “지옥이 따로 없구만”, “내 동생은 어쩌란 말이야!”와 같이 독자의 감상을 대신 표현해 줄 때간섭해서는 안 되는 이승 사건에 결국 간섭할 때독자들은 신들의 통감에 다시 공감한다이것이 만드는 효과는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독자들은 초월적 위치에 있지만 이승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신들의 시선으로 이야기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이 신들처럼독자들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러니 독자 스스로를 이입하고 있던 신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현실에 참여할 때그것이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는 뼈저리다끝까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으려던 철융신이 인간의 삶이 자신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몸을 사리지 않고 사건에 뛰어들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일이 독자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장면용산참사를 상징하는 여섯 명의 사자(死者)를 데리러 재개발 반대 농성장을 향하는 차사들의 저 실루엣(<그림3>)은 <이승편>이 연재되는 내내 타이틀로 제시되었던 것이다그랬기에 아무리 무딘 독자라고 해도 <신과 함께>라는 창문이 그동안 무엇을 비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몰랐다 해도 다른 이들의 댓글을 통해서라도 눈치 챘을 것이고. <신과 함께>가 군데군데 배치했던 힌트들(용역 보스와 시공사 중역의 대화나 경찰과 용역의 공조관계 등)을 캐치한 섬세한 독자라면차사들이 밟고 있는 저 쓰레기더미의 근원까지도 파악했을 것이다그리고 어떤 독자는후경 속의 크레인이 개발의 랜드마크인 동시에 소금꽃의 투쟁처라는 것까지도 연상했을지 모른다이런 독자들이 <신과 함께>로 웃고 울다 탄생한다그것이 이 색다른 판타지의 힘이다.


편편마다 수천 개씩 달린 댓글을 독자에 대한 이해의 자료로 활용했지만 이 글이 상정하는 독자가 얼마나 존재할지 혹은 탄생했을지는 알 수 없다다만 가히 만화적 리얼리즘이라 할 이 판타지가 정말로 힘을 지닌다면그 힘은 독자를 성장하게 하는 힘까지도 포함한 것이어야 할 터다물론 그 힘은 <신과 함께>가 만화와 공론장의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는 웹툰이라는 두 멋진 형식의 힘을 손오공의 원기옥처럼 끌어 모아 쏘았기 때문에 분출되었다힘없는 신들이 쏘아올린 작은 원기옥이 어디까지 날아갈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만약 이승이 조금이나마 더 살만한 곳이 된다면 그것을 이끈 아주 작은 지분은 <신과 함께>에 있을 것이다.



<그림3> 이승편 최종화 ⓒ주호민



 




싱크 5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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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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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 행정관

수신 : 경찰청 홍보담당관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


특히 홈페이지, 블로그 등 온라인을 통한 홍보는 즉각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으므로 온라인 홍보팀에 적극적인 컨텐츠 생산과 타부처와의 공조를 부탁드립니다.

예를 들면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 인터뷰 증거물 사진 등 추가정보 공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사건 해결에 동원된 경찰관, 전경 등의 연인원 수사와 수색에 동원된 전의경의 수기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

 

2009120, 철거민 5명과 경찰 기동대원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 직후, 설 연휴(125~27)를 전후해 이메일로 전달되었다는 BH(청와대) ‘지침공문이다. 최근 개봉해 용산참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있는 영화 <두 개의 문>에서 짧게 다뤄지기도 했던 이 언론플레이 지침은 분명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의 비난과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와는 논외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과연 이러한 전략적 지침이 제출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단적으로 말해 청와대(혹은 5급 행정관)절호의 기회라고까지 말한 데에는 이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 전제되어 있다. 19명을 살인한 유영철 사건과 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라는 2004년의 경험적 증거 외에도 이 예측을 뒷받침할 사례와 근거는 무수히 많다. 또한 실제 사건뿐만 아니라 살인범을 다룬 소설과 영화 등 문화콘텐츠가 수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게다가 그것들은 꾸준히 잘 팔린다. 어떤 생산물은 엄청나게 팔렸다. 영화 <싸이코>, <양들의 침묵>, <살인의 추억>, <추적자> 등을 떠올려 보라.


범죄와 살인은, 특히 연쇄살인마는 그야말로 핫 아이템이다. 나는 연재될 두 글에서 이 핫 아이템을 문화상품이라는 형식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문화상품이 현실과 관계를 맺는 한, 그 속에서 묘사된 살인마 역시 현실과 관계를 주고받는다. 나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텍스트보다 그 텍스트의 왜곡된 거울이라 할 몇몇 문화상품, 특히 웹툰을 통해 현실을 반추하려 한다. 나와 독자에게 어떤 징후가 발견되길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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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에서 범죄가 생산하는 것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철학자가 이념을 생산하고, 시인이 시를 생산하듯, 범죄자는 범죄를 생산한다. 뿐만 아니라 형법과 형법을 가르치는 교수와 그 교수의 법학개론상품까지도 범죄의 파생 생산물이다. 또한 범죄자는 경찰, 재판관, 사형 집행인, 배심원들도 생산한다. 이렇게 생산이라는 말의 발칙한 용법을 생산한 마르크스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범죄는 범죄소설 역시 생산했고 이어서 서스펜스 및 액션 영화와 만화도 생산했다. 이 생산물들이 이 글이 집중할 것들, 가상의 범죄상상된 범죄자를 담고 있는 상품이다. 앞서 밝혔듯 주안점은 문화상품 속의 살인마이며, 이것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이다.


먼저 그것은 관심과 소비자를 생산한다. 이 살인마라는 핫 아이템에 관한 강렬한 관심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내용으로 한 문화상품으로 인해 다시 증폭된다. 때로는 실제의 살인조차 그것의 문화상품을 경유해 알려진다. 근대 최초, 최악의 연쇄살인마로 불리는 잭 더 리퍼를 예로 들어보자. 문화상품이라는 형식이 없었더라면 지금 한국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가 19세기말 영국 런던의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을 알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영제국 런던의 잭 더 리퍼는 만화와 영화로 유통된 <프롬 헬>과 같은 문화상품을 통해 (물론 그 모국의 문화자본-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전세계적이고도 초시간적인 생명력을 얻으며 유사 문화상품과 그에 대한 관심과 소비자를 생산해냈다.


이 생산의 연환 속에서 다시금, 그 관심과 소비자를 얻기 위한 매력적인 살인마와 그 성품 및 장르의 법칙 또한 생산된다. 단순히 팔기 위한 것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어우러지면서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한 예로, ‘잭 더 리퍼를 다룬 이야기의 엄청난 목록들 속에서, 그 지시대상은 세기 어려울 만큼 많다. 이름과 직업, 성격, 살해수법, 동기 등도 엄청나게 다양하며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종의 진화를 거듭해 왔다. <프롬 헬>의 주인공으로 프리메이슨의 일원인 왕실의사 윌리엄 걸 경은 그 중 가장 진화된 캐릭터이다. 고도의 지성과 외과시술 능력, 건축에 대한 깊은 조예, 스스로 신에 이르고자 하는 강한 열망, 그만의 살인철학과 동기는 그 이전의 잭 더 리퍼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불편한 호소력을 그에게 부여했다. 걸을 19세기적 살인마라 한다면, 그를 이은 20세기 말 가장 매력적인 살인마는 한니발 렉터였다. 그는 뛰어난 정신과 의사이며 비범한 기억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서 수형인-범죄자이면서도 탐정-프로파일러의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한다. 게다가 인육마저 즐기는 미식가이기까지 하다. 한니발 렉터가 등장하는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들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뒀으며, 후속 작가들의 추종 속에 연쇄살인범 소설이라는 장르의 대량생산까지 불러왔다.(레너드 카수토,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뮤진트리. 398.) 이런 생산의 연환이 이어지면서, 마침내는 소설 속 살인마를 특정 짓는 성품이 생산되었다.


한니발 렉터에게서 대표적으로 발견되는 그 성품적 특질은 타인에 대한 공감의 부재동료의식의 결핍이다.(카수토, 416.) ‘사이코패스는 그런 성품을 지닌 자를 부르는 말이다. 국내에서는 유영철과 영화 <추격자>를 통해 알려지며 어느새 연쇄살인마를 직접적으로 연상하게 만드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모든 연쇄살인마가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니며, 모든 사이코패스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사이코패스 판정도구를 개발한 로버트 헤어에 따르면 북미에 약 200만 명, 뉴욕에만 약 10만 명의 사이코패스가 존재한다고 한다.(진단명: 사이코패스(바다출판사, 2005. 20.) 이들 중 일부가 살인 등의 중범죄를 행한 자이지만, 법망에 걸려들지 않은 사이코패스는 그보다 더 많다. 하지만 대중들이 사이코패스와 살인마를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만들만큼 대중문화상품에서 만나게 되는 사이코패스들은 대부분 연쇄살인범 집합과의 교집합 안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들은, 이런 합체를 통해 창작자들에게 유용하면서도 매혹적인 주체로 애용되며 상상되어왔다.


너무 간략한 요약이었지만 문화상품의 구성 원리 속에서 살펴보자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는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했다. 물론 영화 <살인의 추억>이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듯이 문화상품이라는 가상은 늘 현실이라는 실재를 참조한다. 문화상품이 그 자체의 생산을 지속하는 와중에도 현실은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하며 문화상품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는 교집합을 포함한 세 집합의 주체들을 문화상품 속에서 만날 때 향유자가 갖게 되는 감각과 감성도 현실을 참조한다. 그것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좀비, 귀신, 유령, 오크나 오거 등의 다른 위험한 상상적 주체들과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다른 점이다. 따라서 그것이 생산해 내는 감각과 감성은 더 현실적이고 또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이제는 더 구체적으로 웹툰을 통해 이 감각/감성을 살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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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이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을 작품 속으로 들여오면서 독자들은 사이코패스의 존재방식과 특성에 대한 정보를 이미지와 서사를 통해 얻게 되었다. 살인의 순간과 함께 사이코패스의 일상과 내면까지도 훔쳐볼 수 있게 되면서 독자들 속에서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해가 생산된다. 앞서 간략히 언급한 공감의 결여와 연대 불가능성 같은 특징들은 살인 순간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주 공간, 생활 방식, 직업적 활동, 다른 인물들과의 대비 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해는 감성과 감각으로 이어질 터, 그것을 자아낼 인물들인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을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만나보자.


강풀의 <이웃사람>(2008)은 이웃에 살고 있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이웃 사람들이 막아내는 과정을 그린 웹툰이다.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좀비까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강풀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살인마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살인마는 이웃들이 공동으로 찾아내고 막아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질 뿐 그가 왜 살인을 밥 먹듯 하게 되었는지, 그의 인간적인 삶은 어떤 것인지 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웃에 살아도 살인마는 이웃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존재다. 이웃들은 서로 돕고, 사이코패스인 이웃은 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차이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연쇄살인마의 연대불가능성은 도드라진다. 정연식의 <더 파이브>(2011)도 살인마는 홀로 행동하며 그에 대항하는 무리는 여럿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구도가 유사하다. 하지만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사법의 틀을 벗어나 사이코패스를 척결하는 서사 형태 가운데 사이코패스 캐릭터는 더 죽어 마땅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동시에 홀로 여럿을 상대할 만큼의 생존 능력과 더불어 사이코패스 주체로서의 호소력도 부여되었다. 이 호소력은, 걸과 렉터의 경우처럼 죽음과 잇닿아 있는 매력으로, 살인마와 그의 살인행위를 둘러싼 심미적 접근에서 비롯한다.


<더 파이브>의 사이코패스 오재욱은 인형을 만드는 예술가다. 인형의 옷과 장신구, 심지어 속옷까지도 직접 만들다 보면 지문이 닳아 없어질 만큼 인형 만드는 작업에 열중한다. 그렇게 탄생한 인형으로 전시회를 하고, 아주 좋은 평가도 받고 있다. “그의 인형들은 네크로필리아 신드롬에 빠진 듯 차가운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며 옷과 머리, 신발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또 다른 하나의 생명체하나같이 전부 살아있는 것 같을 정도다. 이쯤이면 눈치 챘겠지만, 그는 지문이 없어 증거를 남기지 않는 그의 손으로 여성들을 죽이고 인형으로 재탄생시킨다. 피해자의 뼈, , 신발, 장신구를 활용해 소름끼치게 아름다워서 오히려 슬퍼 보이는 인형을 만드는 성공한 인형작가 오재욱은 스스로를 창조주라고 부른다. “더럽혀진 영혼을 순결한 새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는 그의 직업이고 사명이다.


<그림1> ⓒ정연식


<우월한 하루>(팀겟네임, 2009)의 권시우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도 살인을 참혹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능 있고 잘생긴 인물이다. 그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살해한 후 그 현장을 전위적 미술작품으로 전환해 희생자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그 위에 군림한다.(<그림 2>) 


<그림 2> 권시우는 살인작품의 설계도라 할 그림은 자신만 간직하며 

살인작품은 살해 현장에 전시한다ⓒ팀겟네임


살인의 이유도 보다 우월해지기 위해서로 노재욱과 비슷하지만, 권시우는 보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희생자를 짓밟고 우월해진다. 사이코패스는 공감능력이 부족할 뿐 상상력이 없는 것은 아닌데, 특히 권시우의 상상력은 자기가 빼앗아 가는 것을 향해 작동한다.


"원래대로라면 재욱씨와 수연씨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을 테지요. 두 분, 참 예쁘게 사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서로를 많이 아끼고 보듬으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서 청혼하신 거죠? 매일 같이 잠들고, 같이 눈뜨고, 두 사람을 반반씩 닮은 예쁜 아이도 낳고, 때론 울고 웃으며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리라 생각했겠죠?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 그럴 미래는 없어요. 지금껏 당신이 살아왔던 모든 시간과 기억들, 그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행복과 불행까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겁니다. 제가 전부 빼앗을 테니까요." 

<그림 3> ⓒ팀겟네임


이처럼 그는 그의 행위가 타인에게 미칠 결과를 정확히 인지하고 표적의 생명과 시간을 앗아간다. “다른 생명을 어떻게 할지 제 맘대로 선택한다는 그 우월감에서 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서사 속 타인과 독자들이 그들을 인식하는 방식은 창조주혹은 이라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의 자기 인식과는 천양지차다. 살인마들이 그들만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타인에게 더욱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간다. <더 파이브>에서 오재욱에게 살해당하는 조선족 열쇠공 백씨는 죽기 직전, 자신을 창조주라 칭하는 자를 묶어놓지 않으면 연애질도 못할 불쌍한 고자라 참칭한다. ‘변태라는 표현도 여러 작품에서 적잖이 등장한다.(맥락상 변태성욕자의 준말로 읽히는 경우도 있고 정상이 아닌 상태로 읽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자와 변태는 비록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대립항 가운데 후자에 속할지언정 아직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말들이다. 이보다 더 많은 경우, 그들은 인간에 미치지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 3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을 포함하여 많은 웹툰 속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타인에게 인지된다. 오재욱에게 가족을 잃은 고은아는 그를 인간의 법을 적용해선 안되는” “악마로 생각하며, 권시우와 대립하는 살인청부업자 배태진조차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그림 >) 현재 연재 중인 <인간의 숲>(2012, 황준호)에서도 한 등장인물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짐승만도 못하며 우리랑은 달라비인간적인 실험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존재라 강변한다. 황준호의 전작 <악연>(2010)에서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그의 성장과정에서 늘 들었던 괴물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그림 4> 권시우의 답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질 것이다ⓒ팀겟네임


작가의 의도를 떠나, 작품 속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괴물로 표현되는 것은 대중의 감성과 감각을 반영하며, 동시에 구성해 낸다. 구성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괴물인간의 대립항으로 제시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공감과 연대의 대상이라면, ‘괴물은 혐오와 적대의 대상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동일시가, ‘괴물에게는 타자화가 일어난다. 독자나 작품 속 등장인물 는 대부분 인간의 편에 선다. 따라서 에게서 괴물은 분리된다. <그림 4>의 배태진이야말로 그 현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도 역시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는 자신을 사람으로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권시우를 사람 아닌 것으로 바라본다. 배태진은 자아의 내부에 있는 살인하는 괴물은 보지 못하고, 권시우라는 살인하는 괴물만을 보는 것이다.


때로는 독자마저도 배태진과 유사한 오류를 저지르며, 권시우를 혐오한다. 이런 인식에는 배태진과 권시우가 살해하는 이유와 대상의 차이가 의식하기 어렵다 해도 근거로 작용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대상. 배태진의 대상은 살해를 의뢰받은 대상에 국한된다. 대부분의 독자에게 배태진과 같은 살인청부업자는 위험하지 않다. 자신이 의뢰대상이 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시우의 살해대상은 무차별적이다. 이 평등한 살인마의 유형은, 따라서 독자에게도 위험한 존재다. 이 비교에 <더 파이브>의 오재욱을 끌어들여보면 어떨까? 독자의 성별에 따라 권시우와 오재욱 중 더 혐오하는 대상이 갈릴 것인가? 나는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살인마의 인물유형에 따라 위협받는 소집단은 제한되며 독자 스스로가 그 소집단에 해당되지 않을수록 살인마는 악한 존재가 된다. 그 이명제도 역시 참이다.


다음으로 살해의 이유. 이들은 모두 희생자를 어떤 것으로 교환한다. 배태진은 의뢰대상을 죽이고 돈을 받으며, 권시우와 오재욱은 죽이는 행위를 통해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교환에서 더 합리적으로 느껴질 것은 역시나 돈이다. 많은 독자들이 자신들이 돈으로 쾌락을 사기도 한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로, 희생자를 돈으로 교환하지 않고 쾌락으로 교환한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을 더 낯설게 느낀다. 그것은 자신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교환이기 때문이다.

동일시가 불가능할 때 타자화가 일어난다. 타자화는 공감을 철회하게 하고, 공감이 철회한 빈자리에는 혐오가 들어선다.(카수토, 434,) 그렇게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권시우와 오재욱은, 그리고 현실 속의 유영철과 강호순들은 가장혐오할 대상이 된다. 그들은 가 짓지 않을 방식으로, ‘가 포함될 수도 있는 대상을 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죽였기 때문이다.(혐오판단의 공식을 기억해두자. 누가 더 혐오할 대상인지를 밝히는 데 아주 유용하니까. 너무 길면 세 가지를 기억하면 된다. ‘방식’, ‘대상’, ‘이유. 그리고 판단은 공감 여부로 하면 된다. +, 즉 공감 가능한 항목이 많은 쪽이 덜 혐오스럽다. ‘대상의 경우는 부기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한데, ‘가 포함될 수 있는대상일 때 여야 한다는 게 헷갈리기 때문이다. ‘가 포함될 수 있는 대상을 살인하는 건 공감이 어려우므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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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에 실릴 다음 글에서 이 글이 열기만 하고 맺지 못한 사안들을 정리할 것이다. 살인의 심미화가 불러일으키는 도착된 감성을 살필 것이며, ‘괴물에 대한 못 다한 이야기를 새로운 작품들로 이어갈 계획이다. 새로이 등장할 작품 목록을 약간 소개하자면 <살인자o난감>(꼬마비/노마비, 2011), <교수인형>(팀겟네임, 2006), <치즈인더트랩>(순끼, 2012) 등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맺기 위해, 처음 글을 열었던 0으로 돌아가 보자. ‘용산참사군포연쇄살인사건3.에서 행한 대비와 유사하게 비교해 보면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 대비를 위해서는 먼저 두 사건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려내야 한다. ‘군포연쇄살인사건과 달리 용산참사는 가해자를 가리는 데서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다. 영화 <두 개의 문>이 지목하는 가해자는 국가이지만, 그 국가가 법적으로 판결내린 가해자는 철거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가리는 일도 다소 입장이 갈릴 수 있지만, 두 경우 모두를 따져 봐도 죽은 이들은 동일하다. 한 명의 경찰과 다섯 명의 철거민이 죽었다. 후자의 경우, 가해자가 누구냐에 따라 타살이거나 자살이 될 것이다. 가해자가 국가이든 철거민이든, 타살이든 자살이든, 모두 비교해 버리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지금 해보려는 비교는 애초에 BH지침이 초래한 것이며, 이는 두 사건을 함께 언론에 노출시키는 것을 통해 감추려 했던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지시한다. 가해자가 국가판결대로 철거민이었다면 굳이 BH가 감추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해자를 국가로 놓고 비교할 것이다.(가해자를 철거민으로 놓고 해보고 싶은 독자는 스스로 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 국가와 강호순, 둘 가운데 누가 더 악한 가해자인가? 여성들을 노린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강호순의 경우는 이미 오재욱을 통해 판결이 났다. ‘-, (+/-), -’ 가 최대 3, 최소 2개다. 평균 내어 2개 반이라 해두자. 국가는 가 짓지 않을 방식으로(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동원할 수조차 없는 경찰력으로, ()), ‘가 포함될 수 없는 집단인 철거민(+)과 모호한 집단인 경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죽음으로 내몬 이유에 대한 공감여부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25시간 만에 그렇게 급하게 진압작전을 펼쳐야 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론한 <두 개의 문>의 결론이 옳다면, 그 이유는 경찰청장 내정자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경찰청장 취임에 앞서 청와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에 대한 공감여부는 독자의 몫이다. 따라서 -, +(간혹 -), +/- 로 판명된다. - 최대 3, 최소 1개다. 평균을 내 보면 2개다. 웬만해서는 국가보다 강호순이 더 혐오스러운 것으로 판명났다. 따라서 BH 지침은 꽤나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


(부디 이 장난스러운 대비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길 바란다. 노파심에 말해둔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권시우와 오재욱만이 아니라 살인청부업자 배태진도 살인마라는 것을.)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 #2 바로가기: http://story.aladin.co.kr/toon_er/77921?link=http%3A%2F%2Fblog.aladin.co.kr%2Fliteraturer%2F5928334


 




 

  



<싱크 10호>에 기고한 글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 #2 바로가기: http://story.aladin.co.kr/toon_er/77921?link=http%3A%2F%2Fblog.aladin.co.kr%2Fliteraturer%2F5928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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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즈카와 용산과 강정 그리고 재현그 사이 어딘가.


 

1. 강정

 

(전략) 무인도인 범섬과 제주월드컵경기장, 한라산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강정마을은 600여 가구에 1900여 명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

이 지역 주민들은 해군기지 논란을 지켜보다가 지난달 26일 마을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수용>,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7-05-15 03:01:00 기사수정 2009-09-27 08:27:39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건설지역으로 결정된 5년 전 그 날 동아일보가 실은 기사를 보면 지금 강정마을을 뒤덮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깃발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을 총회를 거쳐,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면서 왜 뒤늦게 반대를 외치는가? 이런 의문은 위 기사와 현재의 상황 사이의 모순을 감안할 때 분명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 합리적 의문은 전문시위꾼이라고도 불리는 시민단체’, 혹은 종북좌파세력의 공작에 의해 주민 일부가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거나, 더 심하게는 주민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데 육지에서 날아들어온 외부세력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으로 해소된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지식인 서비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답변이다.

  

<그림1> 박건웅, <안보입니까?> 중 한 컷. http://ppuu21.khan.kr/146

  

그런데 <그림 1>은 이 만장일치” “마을 총회를 달리 그리고 있다. 만화는 마을 총회가 아닌 마을회의라 표현하며, 마을회의“80여명만이모여서 “2시간 만에 졸속으로 결정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음표를 머리 위로 띄운 마을회의건물 밖 사람들도 그렸다. 이 그림과 동아일보기사 사이에 꽤나 큰 거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사실관계로만 따지면 둘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동아일보가 말했듯 마을 총회는 열렸고, 그 회의 결과가 해군기지의 유치를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것으로 나온 것도 사실이다. 단지 그 회의에 모여 만장일치로 결의한 사람의 수가 “1900여 명가운데 단 “80여명만이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림 1>이 추가적으로 제공한 정보로 인해 “80여명만만장일치가 되면서 강정마을 전체가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는 의미는 거부되고 만다. 마을 전체의 민의가 아닌 일부의 민의만이 반영된 결정이었음이 폭로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림 1>동아일보가 아닌 다른 자료들에서는 조금 더 자세한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마을 향약은 주민총회를 하려면 7일간 공고를 하도록 정하고 있으나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 총회는 고작 4일간만 공고를 했다거나(그러니 마을 가 아닌 마을회의인 것), 수시로 하게 되어 있는 안내방송도 몇 차례 하지 않았다거나, 공고된 총회의 내용도 해군기지 관련 건이었다가 정작 회의 때는 해군기지 유치 건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제주에 해군기지가 결정됐다?>, 한겨레21664, 20070614) 이쯤 가면 동아일보마을 총라는 표현으로 담으려 했던 의미, 곧 절차적 정당성까지도 부정되고 만다.

 

이제 마을의 찬성이 마을 사람들 일부만의 찬성임이 드러나고 그 과정까지도 정당하지 못했음이 폭로되니, ‘뒤늦은 반대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제기할 수가 없다. 의문이 정당하지 않으므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었던 외부세력의 개입을 주장할 논리적 개연성도 사라진다. 이런 논리적 선후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이 한겨레21기사의 내용을 주장한 인물이 마을 주민이니 외부세력운운은 기각될 수밖에 없지만.

 

 

2. 산리즈카

 

재현(re-present)된 것은, 재현되기 전의 실재(존재, presence)와 다른 무엇이 되고 만다. 문자든 그림이든,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이든 매체(medium)을 거치는 한 그 변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동아일보기사에서처럼 변이와 함께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재현 과정에서 삽입된다. 마치 영화 <라쇼몽>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처럼, 우리는 말하면서 왜곡한다. 따라서 만약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재현이 얼마나 실재에 가까운가를 확인하는 불가능한 작업이 아니라 재현()을 통해 실재에 최대한 근접하려 노력하는 심판관(<라쇼몽>의 마을 원님)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가 세 가지 재현들을 통해 강정마을의 회의에 담긴 진실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했던 것처럼.

 

일본 산리즈카 마을의 공항건설 저지 투쟁을 담은 만화 <우리마을 이야기>(오제 아키라, 길찾기)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담아낸 재현이다. 그 재현은 진실을 찾는 자에게 진실일 수 있는재현으로서 다가가기 위해 실재를 가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마을 이야기>는 실재와 재현의 차이를 계속해서 그려내는 재현 방식을 통해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권력관계가 뚜렷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림 2>는 재현이 어떻게 실재를 대하는가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소년 뎃페이는 마을 주민으로, 만화 속에서 실재로 가정된 인물이다. 만화 안에서만큼은 뎃페이와 마을주민들이 실재이자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뎃페이를 신문이 날아와 때린다. 그것도 입을 막으며 때린다. 실재의 발화를 막으며 실재의 현실을 재현하는 신문기사 제목은 통계적 수치와 분위기를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다. 수치로만 존재하는 30%의 피폐한 삶과 반대 의지는 삭제한 체로, 현지 분위기가 호전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뎃페이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재현이다. 그에게 공항건설은 기정사실이 아니지만, 신문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뎃페이는 그런 신문을 손에서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1-156~7)

 

<그림 3>에 이르면 실재와 재현 사이의 간극은 더 확연하게 벌어진다. 반대동맹은 공청회에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전했으며, 공청회 후 거리에서 반대 퍼레이드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문기사는 공청회가 무사히마쳤다고만 전할 뿐이다. 이 재현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재현 주체에 따라 無事에 담는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입장에서는 몸싸움이 벌어지거나, 부상자가 나오는 일이 없으면 충분히 무사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 반대주민의 입장에서는 공청회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버린 것 자체만으로도 무사한 일이 아니며, 공청회 전후의 반대활동과 대표의 반대발언이 모두 에 해당할 테지만 말이다. 이런 반대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청회가 무사히 끝났다는 신문의 재현은 17쪽에 걸쳐 그려진 주민들의 공청회 전후 사정을 모조리 삭제해 버리는 허탈하고 폭력적인 일이 되고 만다. 공청회 전에 반대주민들은 공청회를 기대하며 들떴고, 방청석에 반대동맹원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게 된 사실에 분개해 항의했지만, 이런 모든 주민들의 이야기도 재현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1-200)

 

(1-204쪽, 1-206쪽)


1권의 이런 에피소드처럼 마을주민들의 실재와 신문 속의 재현을 대비하는 장면들이 <우리마을 이야기>를 관통한다. 온도 차이는 있다. 초반에 실재와 재현의 간극에 분노하던 인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이용하기까지 한다. 요컨대 자신들이 재현당하는 처지에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현하려 노력한다. 마을신문을 만들고, 선전지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과정들을 그려낸 <우리마을 이야기>는 그 자체가 재현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재현의 폭력성을 재현해내고 있다.

 

산리즈카와 강정은 폭력적인 재현의 피해자라는 면에서 40여 년의 시간과 지리상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가까이 있다. 오히려 먼 것은 실재와 재현 사이의 거리이다. 196~70년대 산리즈카와 2천 년대 강정을 그린 동시대의 재현은 실재와 너무나 멀다. 언론의 보도는 시간적으로 사건과 가깝지만, 그 입장으로 인해 실재를 폭력적으로 재현하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정현 신부의 말대로, 산리즈카와 강정은 너무도 똑같다.” 재현의 폭력에 희생당한다는 면에서까지도.

 

 

너무도 똑같다.

이 만화에서 그려지는 산리즈카 마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나라 제주의 강정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너무도 닮았다. 아니다. 새만금과 부안 핵폐기장, 미군부대에 땅을 내준 평택 대추리에서 서울 용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에 의해 고통받았고 또 지금도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다. - 문정현 신부의 추천사 첫머리

 

  

3. 용산

 

<우리마을 이야기>의 재현 전략이 마을주민인 뎃페이를 중심으로 한 가정된 실재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마을주민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의 폭력적 재현을 비판하며 다른 재현을 도모하기 위해 취해진 선택이었다. <내가 살던 용산>(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보리)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마을 이야기>처럼 신문의 재현을 주민들의 가정된 실재와 부딪히게 만들며 대비하는 방식보다는 그저 철거민들의 삶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실재를 가정하며 언론의 재현과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달리 해 다른 재현을 펼치는 것이다. 크게 보아 이는 산리즈카 마을 농민들의 저항과 언론보도가 매우 긴 시간 동안 이어졌던 데 반해 용산 철거민들의 저항은 단지 용산사태로만 보도되었다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25시간 동안 펼쳐졌고 순식간에 불타올라버렸던 2009120일의 용산사태 직후 재현된 언론보도는 대부분 남일당 망루를 배경으로 한 철거민들의 저항과 특공대의 진압, 그리고 그 모두를 종결시킨 화재 사건만을 다루었다. 반면 <내가 살던 용산>은 철거민 희생자 5인 한 사람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사건 앞뒤로 배치하며, 폭력적 재현을 재맥락화 했다.




재맥락화 한 용산 철거민들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진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희생자들이 망루에 올랐는가하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희생자들이 철거민이 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 사이의 낙차를 통해 그 사실의 배경이 드러나고, 그들이 철거민으로서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과 용역과 경찰력으로부터 당해야 했던 물리적 폭력을 상세히 재현하는 것을 통해 그 불가피함이 설명된다. 언론이, 특히 보수언론이 사건만을 부각하며 외면하려 했던 삶을, <내가 살던 용산>은 용산에 살았던 사람들을 재현하는 것을 통해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었던들 철거민 희생자들은 단지 대테러 임무를 주로 하는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한 테러리스트이며 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 범죄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재맥락화와 더불어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마을 이야기><내가 살던 용산>이 함께, 종결된 줄만 알았고 이미 모든 재현이 마무리된 것만 같았던 대상들의 사연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만화들은 언론보도로 인해 은폐되는 것으로 끝났을지 모를 국가와 사기업의 이미지와 탄압당한 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금 들여다 볼 수 있는 대안적 재현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살던 용산>이 아니었던들, 국가 폭력은 그 가공할 위력을 뽐내며 보통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했을 테지만, 또 사기업의 용역 폭력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을 것이지만, 이 만화 덕에 국가 폭력의 부당성과 사기업 폭력의 치졸함이 부각되어 일반 사람들의 입방아를 탈 가능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서울인권영화제 폐막작이었으며 극장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영화 <두개의 문>테러범으로 판결이 나버린 망루 위 철거민들과 대테러작전을 펼친 경찰특공대의 25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재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그와는 다른 재현을 제공하는 일이며, 재현물을 보는 독자들이 진실에 다가설 숨통을 틔어주는 일이다.


<두 개의 문>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2_doors

 

 

4. 다시 강정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일단락이 나지 않은 강정은 여전히 폭력적 재현 아래 현재진행형이다. 강정에 대한 폭력적 재현의 주체들은, 심지어는 재현하지 않는 폭력까지도 일삼고 있다. 지금 강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는 비재현의 폭력은 강정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진행되어 온 시공사의 불법탈법과 용역의 광포, 공권력의 과잉진압 등을 은폐한다. 강정이 이슈가 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강정에 힘을 보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천부터 차단한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강정 사람들은 사진과 SNS와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강정을 재현해내고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산리즈카가 시대적으로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용산이 공권력의 급작스러운 투입으로 인해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대안을 강정은 누리고 시도하고 있다. 가능성은 열려있는 가운데, ‘만화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강정은 또 하나의 큰 가능성을 껴안고 있다. <우리마을 이야기><내가 살던 용산>이 모두 산리즈카와 용산에 연대한 작가들에 의해 뒤늦게 만화로 재현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강정의 만화적 가능성은 특별하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재현되었던 다른 두 지역과 달리 현재 많은 웹툰 작가들이 강정에 연대하고 있는 것(<그림 6, 7>(<"구럼비 발파 안돼", 만화가들도 화났다>, 머니투데이, 입력 : 2012.03.07 19:13)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도 물론 고무적이지만, 다른 엄청난 강점이 강정에는 있다.

 

<그림 6> 출처: 김한조씨 블로그(http://sanchokim.khan.kr/123)


<그림 7> 출처=강풀씨 트위터(@kangfull74)

 

 

 

바로 강정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만화가가 넷이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 두 명은 이미 프로로 활동했던 만화가와 에니메이터이다. 이들, 고권일과 김민수는 그들이 직접 겪은 일을 각각 만화와 에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하니, 그들의 재현이 선사할 진실이 기대된다. 하루빨리 강정의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어, 투쟁하느라 만화 그릴 여력이 없는 강정 만화인들이 작품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강정에 이미 한쪽 발을 들여놓은 나도, 그 날이 오면, 늘 재현당하기만 하던 실재들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즐거운 일을, 기꺼이 비평해 보리라.

  

 
 

 

 

 

 

 

 

 

 

 

 

 

 

 

























싱크 SYNC 9호 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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