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옮겨둡니다. 개인적인 글인데도 toon_sync로 발행한 건 내용 가운데 만화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부분, 좋은 작품들 등 읽어보실만한 게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SYNC와 길찾기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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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 - 나와 만화, 세계 그리고 SYNC



제가 격월간 만화잡지 SYNC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2011년 가을이었어요. 친한 연구자 형의 소개로 만화 평론을 기고하기로 했지요. 당시 저는 2011년 중순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를 읽고서 약간은 뒤늦게 만화와 웹툰의 가능성에 고무되어 있던 차였습니다.


대부분 그렇듯 저도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무척이나 즐겨 보았습니다. 어른이 되고서는 '십시일반'이나 '아기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최규석) 같은 만화를 통해 만화가 사회적인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는 생각도 꽤 일찍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진지한 만화와 그냥 즐기는 만화의 거리가 매우 멀고 이런 작품들을 보는 독자층도 각각 다르다는 착각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신과 함께'를 비롯한 몇몇 웹툰을 통해 이런 착각에서 깨어났습니다. 특히 댓글들을 보며, 만화를 통해 약자의 정서를 공유하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경험이 독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지요. 그런 독자들 앞에서 진지한 만화와 즐기는 만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구분 없이 진지한 주제를 즐기듯이 읽되, 감성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래서 SYNC의 SYNC CRITIC 난에 기고한 첫 글에서는 '신과 함께'를 다루었습니다. 문제의식을 다 담아내진 못했지만 이기진 편집장님이 제 글을 좋게 봐 주셨어요. 그리고 그 후부터 SYNC CRITIC의 고정필진 대우(?)를 받으며 글을 이어갔습니다. (제 글은 여기에서 다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시기였지만 논문보다 이런 글쓰기가 재미있었단 걸 고백합니다. 하지만 국문학과에서 문학과 매체(media)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글을 쓰지도 못했을 거에요. 문학과 만화에는 공통점이 적지 않고, 그 시장-공론장-텍스트의 요소들(역사, 사회, 독자, 작가, 작품 등등)을 사유하는 데 있어 문학 연구와 평론에서 이미 있었던 것들을 비판적으로 차용할 여지도 많거든요. 그때부터 문학을 베이스로 하는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물론 만화 고유의 특성에 대한 이론적 공부도 틈틈이 해나갔습니다. 좋은 작품을 찾아 인터넷과 서점을 헤매기도 했고요. 때마침 대학원 후배가 뉴미디어 팬덤 현상 연구(김다혜, '미디어 팬 소설의 문화상품 활용 방식과 기술적 생산 수단에 대한 연구: 영화 "인셉션"을 중심으로')로 석사 논문을 썼기에 만화(웹툰)로도 못할 게 뭔가 하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지요. 그래도 꽤 많이 썼던 논문이라 크리스마스 논문을 계속 쓰고 박사과정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만화 연구를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관심은 만화밭에 가있었기에 크리스마스 논문은 아주아주 천천히 업데이트되었지요. 

여튼 그렇게 논문을 써야 할 기간 동안 만화 공부와 글쓰기에 더 집중하며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 삶에 충격적이고도 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제주도 강정 구럼비 발파였지요. 전부터 소식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발파가 있던 당일에야 처음 강정을 찾아갔습니다. 여자친구와 당시 교회 분들과 함께 목격한 강정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하지만 강정 사람들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힘찼습니다. 그 불굴의 의기에 감동받고,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히는 국가-자본의 합동 공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만화 글에는 강정의 흔적이 깊이 새겨졌지요. 논문에는 더 집중하지 못했지만, 연구자-비평가로서의 사유는 경험과 함께 더 뻗어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SYNC를 출간하는 출판사 '길찾기'가 강정 마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SYNC에 대한 제 애정도 커져갔어요. 이기진 편집장님은 강정마을과 너무도 닮은 일본 산리즈카 마을을 다룬 '우리마을 이야기'(오제 아키라, 길찾기)를 번역하기도 했으니, 저로서는 SYNC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 후론 제가 SYNC에서 막 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편집위원이 되어 SYNC와 우리마을 이야기 등의 좋은 만화들을 더 많이 읽히게 만들고자 기획도 내놓았습니다. 주호민 작가와 윤필 작가를 만난 바 있는 SYNC_VIEW(만화계 인터뷰)도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던 마음과 잘 알려진 작가분들을 통해 SYNC를 더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마음의 결합이었습니다. 나아가 SYNC가 문학계의 '창비'나 '문학과사회'만큼은 못되어도 '리얼리스트'만큼만이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맘으로 잡지 활동에 더 깊이 빠져들었어요.

 



결국 작년 말 논문이 통과되었고, 마침 길찾기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습니다.


사실 지금부터가 본론이지만, 앞서 맥락을 소개한 만큼 서론보다 짧게 본론을 써 볼게요. 이것이 '기쁜' 이유는 맥락을 통해 쉽게 짚어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잡지를 펴내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거고, 제가 좋아하는 만화를 잔뜩 보며 만화계를 경험할 수 있으니까 기쁘지 않을 리 만무합니다.

'약간 걱정되는' 이유 역시 맥락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저는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같이 공부한 동료들이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번역이나 강의 등 공부와 직결되는 일이 아니고 회사를 다니는 일은 공부에 득이 될 리가 없다는 조언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길찾기에서 맡은 직무가 편집이나 출판기획이 아니라 SYNC와 SYNC의 지향을 담은 단행본들('색깔있는 책'이라는 브랜드를 입히려 합니다)을 널리 알리는, 즉 홍보하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뛰어다니며 책 장사하는 일 같은 인상도 있어요. ^^;

저도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공부 시간이 줄어들 것도 그렇지만, 제가 일을 잘 못할까봐 더 걱정입니다. 제 학부 시절 전공(언론정보학/영문)이 관련분야를 다루고 있고 제 학부 선후배들이 PR 분야에서 많이 활동하긴 하지만, 정작 저는 당시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고 관련 분야에서 활동한 적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적게 벌고 적게 쓰던 제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물건을 파는 상황에 처하다니요. 허허.

하지만 제가 SYNC와 색깔있는 책을 팔면, 상품만이 소비되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생각들 - 환경·평화·인권 등 중요한 가치에 대한 진지한 사유, 페미니즘, 자본·국가 등 근대를 구성하는 형식에 대한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접근 - 이 함께 전해집니다. 미시적으로는 억눌린 자들의 삶, 소외된 목소리가 이야기가 되어 전해집니다. 또 이런 깊은 주제를 만화 속에 잘 담아내려고 고뇌한 창작자의 노고가 독자를 만납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는 아직 더 공부하고 겪어봐야겠지만, 저는 여기에 문학도로서 희망을 겁니다.

또 일 자체가 공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가 제게 원하는 건 단순히 책을 파는 것만이 아니에요. SYNC에 연재되었고 곧 출간될 '봄! 봄! 봄!'(탁영호)는 4.19 혁명을 다루고 있는데요, 저는 이 작품을 알리기 위해 유가족들과 만나고 민족문제연구소 등과 교류하게 될 예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환경을 다룬 작품을 발표할 때는 제가 당적을 두고 있는 녹색당과 연대하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좋은 잡지나 탈핵연대 같은 단체와도 교류하게 되겠지요.

 



이런 재미난 일을 전업활동가보다 약간이나마 더 많은 돈을 받으며 할 수 있다니요! 게다가 주 3일만 일하기로 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도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잘 해야겠지만요.



여러분의 응원과 조언 부탁드립니다. 물론 비판과 질책도 환영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기로 결정하며 '약간 걱정'했던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강정입니다. 강정에는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데, 이제 일을 시작하면 공부할 때보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해서 자주 가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거기서 고생하는 제 친구들이 눈에 밟히지만, 저는 이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면서 강정의 목소리를 퍼지게 하는 게, 공사장 문 앞에서 레미콘을 막는 일보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레미콘을 막는 일은 정말 중요하고도 힘든 일입니다. 제겐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할 각오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항소한 재판 결과(벌금 400만원)에 기가 꺾인 건 아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후방지원을 하겠습니다. SYNC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게 된 강정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 가득이지만, 이렇게라도 제 마음을 전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여러분이 SYNC와 길찾기 출판사를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페이스북 링크 길찾기에서 색깔있는 책으로 분류될 단행본은 다음과 같아요. 훑어보시고 좋아하는 책이 있으시다면 저도 응원해 주시고 SYNC와 길찾기도 응원해 주세요.) 링크로 걸린 페이지에 대한 '좋아요'는 큰 힘이 될 뿐만 아니라 출간될 책들 소식을 여러분이 받아보시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아,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ㅋ 여러분께 개인적으로 정기구독을 부탁드리거나 하는 보험회사 직원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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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찾기의 좋은 만화들


- 박희정,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

           - 모두가 함께 읽는 성희롱 이야기'

- 기 들릴, '굿모닝 예루살렘'


 



- 오제 아키라, '우리마을 이야기'



- 윤필, '야옹이와 흰둥이'




- 김경호, 이정호, 곰선생의 고만해- 고전문학 만화 해제 

/ 현명해 - 현대문학 명작 해제


 



- 전정식, 피부색깔=꿀색 - 한 해외 입양인의 이야기

- 이정익,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

 

  



- 문흥미, 원혜진, 장차현실, 손문상, 정혜용, 신영희, 난나, 정광숙, 권범철; 이어달리기

- 이두호, 최규석 등, 아미띠에 -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만화단편집

- 정경아, 위안부 리포트 1 - 나는 고발한다

  



- 오영진, 남쪽손님 / 빗장열기 - 보통시민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 최규석,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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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_view 윤필]



[sync_view] 인터뷰는 inter-view, 곧 사이에서 보는 것이다. 질문과 답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 그것이 인터뷰가 보여주는 사이의 시계(視界)이다. sync는 바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동사다. 사이에서 연결 짓기. 작가와 작품과 만화계와 독자, 그리고 사회를 서로 연동해 함께 보는 것이 [sync_view]가 지향하는 인터뷰의 형식이다.


<야옹이와 흰둥이> Ⓒ윤필


실직과 온갖 풍파 끝에 야옹이는 방구석에 머리를 들이밀고 웅크렸다. 연필로 그려진 이 깊고 무거운 뒷모습은 독자들을 울렸다. 나도, 독자들도 모두 야옹이처럼 우울해본 적이 있으므로, 이 투박한 그림이 담아낸 감정은 그런 경험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스몄다. 그리고 야옹이가 마침내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와 얼굴을 보여주었을 때, 우리 모두는 위로 받았고 힘을 내었다. 마치 자기 일인 양 뭉클해 하며.

<야옹이와 흰둥이>를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이 그림이 독자들 가운데 만들어낸 효과는 이처럼 요약될 수 있다. 독자마다 경험세계가 다양하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울’이라는 감정에 주목해 일반화 해보면 과정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많은 독자들이 뭉클해하는, ‘힐링 만화’ 모드의 <야옹이와 흰둥이>다. 하지만 ‘우울’을 개인의 감정만이 아닌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감정으로 바라보면, <야옹이와 흰둥이>는 ‘힐링 만화’를 초과하는 그 무엇으로 현상한다. 윤필 작가와 싱크의 대화는 바로 그 초과하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했다.


<야옹이와 흰둥이> Ⓒ윤필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우울로 빠져들고 마는 야옹이. 자신의 고됨도 이유였지만, 아르바이트 동료 언니들과 선량한 영베이커리 사장님의 고통을 목격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야옹이의 우울이 정치적이고도 사회적인 감정인 이유다.



1. 윤필, 인권을 말하다.


sync: 주호민 작가에 이은 두 번째 싱크뷰에 응해주어 감사하다. <야옹이와 흰둥이>(이하 <야옹이와>), <흰둥이>, <낙오여군복귀기>에 이어 카카오톡에 연재중인 <거북아거북아>와 새로 시작한 <검둥이 이야기>까지, 좋은 작품들 잘 보고 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 속에서 <싱크>가 만화 잡지로서는 조금 외로운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인데, 윤필 작가 덕에 덜 외롭다. (웃음)


윤필(이하 윤): 지난 인터뷰 봤는데, 무슨 인문 인터뷰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만화가들이 말을 그렇게 많이 안 하는데, 질문이 심도 있더라. 게다가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분들보다 깊이가 얕아서 걱정이다. (웃음)


sync: 젊은 만화가 중에 가장 개념 있고 깊이 있어서 인터뷰 요청한 거다. (웃음) 일단은 아무래도 싱크가 만화전문지인데다 인문교양을 강조하다보니까, 다른 데서 했던 질문을 쓸 수가 없더라.(*윤필 작가는 《한겨레21》, 《인터뷰 365》, 《민중의 소리》, 《시사IN》 등에서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우리 지향에 맞고 타 매체와 다른 색깔의 질문을 만들다보니 괜히 무거워 보이는 것 같다. 그래도 첫 질문은 좀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고 타 인터뷰와도 겹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만화에서 사회적 주제를 정말 많이 다뤘다. 반차별, 반편견, 혹은 조금 진보적인 이슈들인데, 이를테면 이주노동자, 장애, 반려동물 관련 주제, 위안부 할머니, 경쟁사회, 핵폐기물, 또 에둘러 다루긴 했지만 동성애나 병역 및 집총 문제 등 다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한국에서 지금까지는 시사만화만이 다뤘던, 코믹스로 보면 마이너한 제재까지 끌어안았는데 어떻게 알게 되었고 왜 다루고 있는 건가?


윤: 사실 요즘은 인터넷만 봐도 알 수 있는 건데, 관심이 계속 그쪽으로 간다. 그게 재미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능도 알아야 되고, 스포츠도 알아야 되고, 그런 것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실제로 본인에게 닥치면 아는데, 자기가 겪어야 ‘아, 문제다 문제!’하고. 그러기 전에 (작품을 통해) 알면 조금 바뀌지 않을까 한다.


sync: 《인권오름》이라는 인권신문에서 삽화 봉사를 했고, [서울인권영화제]와 [여성인권영화제] 등에도 홍보대사로 연대한 적이 있다. 만화가들이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알고, 인권 감수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까지 활동한 예는 좀 드문 것 같다.


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내 만화가 무슨 엄청난 고급 예술도 아니고. 책상에 앉아서 그리면 되는 거니까. 재미있다. 영화표도 얻을 수 있고. (웃음) 쉽게 쉽게 가는 게 좋은 것 같다. 


sync: ‘쉽게 쉽게’라고 말하지만 어려워하는 분들이 더 많지 않나 싶다. 김제동 씨처럼 ‘폴리테이너’로 불리는 연예인도 있지만 ‘저는 정치적인 것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며 딱 잘라 거절하는 연예인도 있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김제동에 가까운 만화가 같기도 하다.


윤: 나는 정태춘 씨 방향을 더 선호한다. 김제동 씨는 언변으로 발언하지만 정태춘 같은 분들은 그냥 작품으로 하시는 것 같다. 물론 활동도 많이 하시지만. 작품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면 거리가 안 생겨서 해석의 여지가 없어진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건 이거구나.’가 명확하다. 하지만 작품은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


sync: 동감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김제동 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가까울 텐데, 윤필의 만화는 그래도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볼 수 있는 거고 감동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런 면에서 작품은 정치행위로 환원되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얘기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두 개의 문’ 같은 영화는 보러 가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지 않나. 그러니까 인권영화제에 그림으로 연대하는 것 역시 정치 행위인 셈이다.


윤: 조심해야겠네? (웃음)


sync: 하지만 계속 해 달라. (웃음)


윤: 재미있어서 계속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인권은 정치 이런 거 다 빼고, 그런 거 다 없더라도 도덕책에서도 배우는 거지 않나. 크게 뭐,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sync: 인권은 정치 이전에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부분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연대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테고. 앞서 말한 활동 중에서 《인권오름》 삽화 봉사는 꽤 오래 한 걸로 알고 있다. 조금 자세히 얘기해 달라.


윤: 연대...까지는 아닌 것 같고. 예전에 만화 강좌 다닐 때 알던 분이 거기 계시다. 사실 <야옹이와 흰둥이> 처음 그렸을 때도 인권 만화라 생각하고 한 게 전혀 아니고 그냥 상식적인 만화라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까 조금 (인권 이슈들과) 닿아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권오름》이 그런 얘기들을 다루는 있는 매체인데, 뭔가 좀 봉사를 해야 되지 않나 싶어서 시작했다. (웃음) 《인권오름》 측에서 삽화 일을 제안해 왔고 그냥 일주일에 그림 한두 컷이면 부담스럽지 않으니까 해왔다. 나도 공부가 되니까 좋았는데 한 2년 조금 못 채우고 지금은 하고 있진 않다.


sync: 찾아보니 220호부터 308호까지 했더라. 거의 매주 했을 테니 힘들었겠다.


윤: 그래도 하던 때는 내가 하는 일 중 최우선 순위로 했다. 월요일에 원고 받자마자 원래는 화요일 전까지 보내서 수요일에 업데이트인데, 아무래도 활동가들이 시간을 쪼개어 쓰는 글이다 보니 나에게 글이 늦게 오는 경우가 많았다. 화요일 밤 늦게 오기도 하고. 그러면 받자마자 두 시간 안에 작업해서 보내드리고 그랬다. 그런데 항상 대기하고 그러다 보니 이게 스케줄이 너무 힘들더라. 게다가 사실 그림 그리는 건 두세 시간이면 되는데, 내용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필진이 여러 분이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다 보니, 내가 확실히 이해하는 부분도 있는데 사실 백 프로 이해 못하는 부분들도 있더라. 삽화를 그리려면 그 내용을 백 프로 공감해야 하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공부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잠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깐 쉬기로 했다.


《인권오름》 삽화 Ⓒ윤필


sync: 개인적으로는 강정 관련 이슈에 집중하며 글도 쓰고 있던 터라 《인권오름》에서 딸기 활동가의 글 읽다 그림 발견하고 ‘와, 윤필 작가다!’ 그러면서 좋아했었다.


윤: 강정 쪽 삽화가 제일 어려웠다. 떠돌아다니더라, 내가 그린 그림이. 나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걸 너무 싫어해서 되도록 에둘러 표현하려 하는 편이다. 하지만 강정이라든지 현장에 대한 얘길 할 때는 글 내용 자체가 전투적이어서,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자연 배경을 주로 그리곤 했다. 아, 내가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강정 글이 제일 힘들었다.


sync: 일선에 활동하는 만화가들 중에서는 윤필 작가님이 인권 이슈라든지 반차별 혹은 반편견 주제들을 가장 폭넓게 다뤄왔고, 관련 활동도 해 왔다. 그러다보니까 우리 편이라는 느낌이 있고, 덕분에 외로움도 덜었다. 그런데 앞서 주제에 따라 이해의 폭이 차이가 난다던 말처럼, 같은 편끼리도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전문 영역도 다를 수 있는 것 같다. 《인권오름》 활동하며 느낀 점이나 배운 점들이 뭐가 있나?


윤: 배운 게 많다. 그쪽에서 보내준 자료에서 ‘이런 이슈들이 있구나.’ 하고 알았다. 예전에 몰랐던 사회학적 개념들, 단어들이 새로 생겼다. 원래도 쭉 있었던 이슈겠지만 공론화 되는 과정 속에서 약간 유행도 타는 그 시기에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인권오름》이 그런 것들을 많이 상기시켜줘서 좋았다. 사실 사람들이, 나도 마찬가지지만, 몰라서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매체를 읽으며 계속 같이 알아가고, ‘아, 예전에 이런 게 문젠지도 몰랐는데, 이거 알고 보니까 고쳐야겠네.’ 이런 식의 자극들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얻은 걸 독자들도 같이 느꼈으면 좋겠고.


sync: 배운 걸 만화에 최대한 녹여내고 있나?


윤: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백 프로는 아니고, 그중에서 확신이 없는 것들은 안 그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질문 받다 보니까 ‘행동하는 지성인’ 그런 느낌이 드는데, 사실 나는 아직 인권이라는 말 듣는 것도 부끄럽다. 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 (웃음) 직업이 만화가니까 만화에 그 내용을 좀 넣는 것뿐이다. 아직 행동하는 게 없어서. 그냥 화장실 깨끗하게 쓰고 그 정도 수준인 것 같다.


sync: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한 건 아닌지?


윤: 나는 정말 ‘잘 모르는구나’ 생각한다. 그래서 행동에 더디다. 대학교 1학년 때 등록금 투쟁하는 데 뭣도 모르고 끌려갔는데, 갑자기 본관에 계란을 던지란다. 그래서 ‘왜 던지지?’ 그러면서 재밌으니까 일단 던지면서도, ‘던지는 건 좋은데 저걸 나중에 누가 치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뜻이 맞든 틀리든, 나중에 보니까 계란이 썩어서 냄새 나고 청소하는 분들이 그걸 치우는 걸 보면서 내가 한 행동이 잘못됐단 생각이 들더라. 그걸 계기로 앞으로는 하더라도 알고 해야겠다는 맘이 들었다. 아직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인권오름》 같은 진보 매체를 보면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아직 잘 아는 게 없어서. 만화 그리면서도 그런 부분을 공부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정리가 되면 언젠가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sync: <흰둥이>에서 자선에 대비되는 ‘나눔’을 소개한 적이 있다. 행동이라는 말이 무거우면 나눔은 어떨까? 지금 하고 있는 작품 활동은 나눔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윤: 아닌 것 같다. 그런 나눔까지 하려면, 본인에게 있는 걸 나눠줘야 하는 건데. 글쎄, 이건 내 직업이고 아직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파이가 커지거나 조금 더 구체화되면 그때에서야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 지금은 그냥 내가 먹고 살려고 하는 거니까.(웃음)


<흰둥이> Ⓒ윤필



그는 과하게 느껴질 만큼 겸손했고,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하는 일로 칭찬받는 걸 부끄러워했다. 어딘가 딴 세상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눔’에서 그의 정서를 이해할 힌트를 찾았지만, 그와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또다른 중요한 정서가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온몸을 던져 행동하는 이들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과거 광주나 386 세대의 학생운동 등을 떠올리며, 또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만큼의 열정과 고뇌를 안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할 때 갖게 되는 부끄러움. 그들만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만화로, 나는 글로 부끄러움을 모면해보려 애쓰는 게 아닐까. 이 시대에 사라져가는 가치인 ‘진정성’에 닿아있는 정서를 그에게서 발견한 것만 같다.




2. 윤필, 별과 삶을 그리다.


sync: 같은 편을 만난 반가움에 작품 바깥 이야기만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웃음) 이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최근 <검둥이 이야기>(이하 <검둥이>)를 시작했다. 이야기도 새롭고 예전 작품들에서 소화했던 사회적 이슈 말고도 새로운 게 담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짧게 소개해 달라.


이 부분은 <검둥이> 웹툰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출간된 SYNC에 실린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글에 스포일러가 있는 건 곤란할 것 같아서 잠시 닫아둡니다. 이후 내용이 충분히 진행되면 다시 열겠습니다. ▼

 

아직 멀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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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 하드보일드 버전도 기대된다. 초반 반응도 좋은 것 같고.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직접 작품을 보고 싶다. <검둥이> 직전에는 <흰둥이> 시즌 2를 했고, 그 전에는 <낙오여군복귀기>(이하 <복귀기>)를 연재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도 처음이었고, 컬러 작업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여군 설정 때문에 오해도 좀 샀다. 


윤: 덕분에 예고편부터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 오해가 좀 풀리니까 댓글도 줄었다. (웃음)


sync: 그런 면을 포함해서, <복귀기>는 평론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툰라디오에서도 비유와 상징이 풍부한 작품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고. 그런데 평론하는 사람이 과문한 탓인지 비유는 많이 보이는데, 두드러지는 상징은 하나 정도밖에 안 보이더라. (웃음)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다.


윤: 사실 상징은 그게 전부다. (웃음)


sync: 더 못 찾아서 자책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웃음) 이 별밤은, 생애주기의 비유인 행군 과정에서 한눈을 팔게 만들어 낙오하게 하고, 복귀하는 길을 알려주고,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상징이다. 특히 복귀 바로 직전에 반혜경 일병이 바라본 밤하늘은 그림부터가 정성이 가득 들어갔더라. 


윤: 채색해 준 모과 작가가 잘 그려줬다.


<낙오여군복귀기> Ⓒ윤필

반드시 웹툰 스크롤로 내려 볼 것. -> 낙오여군복귀기 12화



sync: 박민규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삼미>)이 생각나기도 했다.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실패를 경험한 주인공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삼천포로 빠지는 걸 설득력 있게 묘사한 소설인데, <복귀기> 읽다가 별에 한눈팔다 낙오하는 장면에서 그 소설 속 좋아하는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친선야구 중에 진루하다가 베이스 주변에 핀 들꽃을 보고선 뛰는 것 그만 두고 한눈을 쭉 파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소설은 계속 삼천포로 빠지는 것, 그러니까 이전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 복귀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복귀기>의 한눈 팔기는 다르다. 한눈을 팔아 낙오하며, 낙오자의 시선으로 길 위의 풍경과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경험을 안은 채로 ‘복귀’한다. 그 복귀에 독자들이 힘을 얻는 것 같더라. 그 쪽이 <삼미>보다 현실적이기도 하고. 나는 낙오한 그 상태에서 행군을 계속하며 접하는 사람과 풍경이 더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생각하지만, 낙오의 경험을 안고 복귀한 사람의 삶은 아무래도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다.


윤: 들꽃에 한눈 파는 장면은 기억이 안 나지만, <삼미>는 나도 참 좋게 읽었다. 반혜경 일병은 낙오한 경험을 가지고, 또 그 길을 홀로 걸으며 마주쳤던 온갖 것들, 했던 생각 같은 걸 복귀해서도 잊지 않을 거다. 독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sync: <복귀기>에서 군 시스템으로 무한경쟁에 대한 피로를 이야기했다. 확실히 ‘현실이 힘겹다’, ‘현실이 비판할 만한 부분들이 있다’라는 부분은 <흰둥이> 시리즈를 비롯해 작품 속에서 작가님이 잘 짚어내고 있다고 본다. 그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대변해 준다는 느낌이다. <복귀기>에서도 그들이 계속 그 힘든 삶 속에서도 견디면서 뚜벅뚜벅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는 게 낙오한 반 일병의 단독 행군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를테면 김난도 교수가 ‘아파야 청춘이다’라고 하는 방식과 비교해볼 측면도 있다. 아픈 걸 인정하면서 ‘아픈 거 다 견뎌내!’라고 얘기하는 방식과 분명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아픈 거 인정하면서 ‘그래도 끝까지 걸어가야지’, 라고 하면서 힘을 내게 북돋아주는 방식이니까 어떻게 보면 좀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체제의 변화라든지 ‘이거 잘못 됐으니까 이걸 바꿔야지!’가 아니라 잘못된 상황 속에서도 ‘나는 꿈을 찾아가겠어’라는 방식, 한번 짚어보고 싶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윤: 대안이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 우리가 앞으로 뭘 해야 되죠?’라고 물어볼 때, 나도 모르는 거다. 그렇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서로 말 한마디나 작은 태도, 살아가면서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힘들 때 비싼 밥 먹여주는 것보다 자판기 커피라도 마시면서 ‘야, 너 잘 될 거야’하는 말 한마디가 더 힘이 나는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내 깜냥으로는 아직 딱 그 정도 수준인 것 같다.


sync: 이정도로 균형 잡힌 모양으로 그리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김난도 교수의 예를 자극적으로 끌고 왔지만, 그 책 논리와 작가님 작품의 논리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독자들이 비슷하게 가지고 와서 감명을 받는 것 같아 보여서 그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윤: 뭐, 그래도 좋은 거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얘기들은 만드는 사람조차도 잘 모르니까 같이 논의했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런 생각이 있다’ 하는 걸 서로 많이 얘기를 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싱크와 얘기하는 것도 그런 것 같고.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데 시대가 너무 바쁘게 돌아가니까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이런 식의 문답이라도. 나는 말씀하신 부분이 독자들 사이에서 ‘너 그 만화 봤어? 이런 거 어떻게 생각해?’ 식으로 대화를 촉발하는 방향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흰둥이> 강의실 청소라도 좀 덜 힘들게) 최소한 자기 먹은 자리는 깨끗이 치우겠지. 그 정돈 거 같다, 내 그림이.



<흰둥이> Ⓒ윤필


sync: 다시 말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매우 의미 있는 거라 본다. <흰둥이> 시리즈는 동물을 통해 거부감 없이 감정이입이 일어나게 하고, ‘자기 먹은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효과가 실제로 일어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는 ‘문제를 깨달아 고뇌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싸움에 나서는 이들’(김낙호)을 그릴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 묻는 입장에서 생각해도 굉장히 어려운 작업일 것 같다. 《인권오름》 사람들처럼 실제 활동하는 인물들을 만화 속에서 실화가 아닌 이상은 그려내기가 어려운 한계가 있는 것도 같고. 이런 것들을 그려보려고 고민해 본 적은 없나?


윤: 인권만화를 좋아한다. <십시일반>, <사이시옷> 이런 걸 군대 있을 때 봤는데, 최규석 작가님도 좋아한다. 그런 만화들이 지금까지 십 년 넘게 이어져 오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건, 표현의 한계가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 주제들을 이미 이해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감동적이고 좋은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거부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너무 센 이야기를 하거나 해서. 동물이라서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작가가 더 세게 나오면) ‘이건 내 일 아닌데?’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난 이거보다 바쁜 일이 있어’ 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걸 작은 사례로 스스로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정도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매우 보람 있다. 댓글 보면 초등학생들이 (웃음) “이제 안 그럴 거예요. 울었어요.” 하는데, 이러면 진짜 뿌듯하더라. 한 명이 바뀌었으니까 이제 주변 애들 몇 명이 바뀌고 계속 바뀌겠구나 하면서.


sync: 맞다. 아예 몰라서 실수하던 사람들, 특히 어린 친구들에게 아주 좋은 영향일 거다.


윤: 환경 때문에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친구들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친구들은 아예 그런 환경이 아닐 수도 있다.


sync: 그런 경우에는 작품을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서?


윤: 그렇다. 재벌 손자라든가 이런 친구들은 알 수가 없지 않나. 그런 친구들이 보고 바뀌면 정말 더 좋은 거다. “할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그러고. (다같이 웃음) 그런 걸 노리고... (웃음)




그에게 이것저것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걸 물었다.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이런 것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요청으로 들릴 정도로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가 ‘우리 편’이라는 데서 출발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그에게 부담을 지운 것만 같다. 그의 이야기, 그의 만화는 지금 이 모습으로 꽉 짜여있고, 옹골차다. 독자들에게도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잘 다가가고 있다. 싱크의 질문들은, 주마가편 같은 의미가 아니라 그냥 토로나 푸념에 가까웠다. 내가 풀지 못하는 난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공감해 줄 이에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눈 이야기가 부쩍 길어졌지만,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다. 만화 그 자체에 대한 윤필의 생각, 또 그가 읽은 좋은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청했다.




3. 윤필, 만화를 말하다.


sync: 앞서 얘기했듯, 반 일병을 한눈 팔게 한 별은 꿈이라고 할 만한 상징인데, 만화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화가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길에서 벗어나 꿔야 하는 꿈일 수 있고, 또 결국 계속 추구하다 보면 인정받는 길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인정받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꿈꾸다보니 인정받는. 윤필 작가에게, 만화는 뭔가? 달리 말해 왜 다른 게 아닌 만화를 하는가?


윤: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내가 만화를 보면서 위안을 많이 받아서다. 내가 힘들고 슬플 때 만화를 보면 힘이 나더라. 


sync: 복귀에 늦었을지도 몰라 안타까워하는 반 일병을 위로해 준 그 별무리처럼?


윤: 그럴 수 있다. 내가 느꼈던 걸 다른 사람도 느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다. 내리사랑 같은... 편집장은 책을 만들고, 평론가는 글을 쓰고, 저마다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sync: 그렇긴 한데, 나는 만화가 정말 신기하다. 언어만 다루다보니까 도상 기호를 다루는, 그림 언어를 통해 말하는 영역이, 내가 못하는 영역이니까 그런 것 같다. 윤필 작가가 보기에 만화가 어떤 특별한 부분이 있다면, 뭘까?


윤: 음... 재미있다. 내가 접하기 쉬우니까. 왠지 공부하는 느낌이 안 들지 않나.


sync: 만화 보는 건 역시 노는 느낌이긴 하다.


윤: 그래도 나는 <맹꽁이서당> 보면서 역사 공부 많이 했다. 그리고 어려운 단어들도 알게 되고. 책을 원래 좀 좋아했는데 일본만화 보면 철학적인 만화도 있지 않나. 보면서 간접 경험도 하고. 어렵지 않게 배우는, 그런 게 좋은 것 같다.


sync: 윤필 만화를 보면서도 책 보는 것만큼, 그보다 더 많이 배우게 된다.


윤: 내 만화는 글이 별로 없는데.


sync: 의성어가 많다. 그리고 활자가 크다. (웃음)


윤: 아주 알아보기 쉽게 하려고 일부러 크게 했다. 그러다가 <복귀기>할 때 엄청 크게 들어갔다. 디자인 뭐 이런 거 필요 없고 알아보기 쉬우라고. 눈 안 좋은 분들이 있으니까.


sync: 그러니까, 그런 걸 배려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부분도 배웠다.


윤: 드러내지 않고 했는데, 좋다는 사람도 있고 ‘아, 글씨가 이게 뭐냐고.’ 이런 사람도 있고. (웃음) 어쩌면 나 편하려고 그렇게 한 걸 수도 있다. (웃음)


sync: 아, 그렇게 하면 대사가 많아 보이는 효과? (웃음/휴지) 이제 마지막 순서다. 이 시대 만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만화 세 편을 추천받고 싶다. 앞으로는 싱크뷰의 고정 순서로 할까 생각하고 있다. 배움이 있는 만화도 좋고, 평소 좋아하는 만화를 소개해 줘도 좋다.


윤: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생각) 지금 생각나는 건, 최근 걸 말씀드리면, 윤태호 작가님의 <미생>, 나는 연재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너무 재미있더라. 만날 댓글 남기고 그랬다. “너무 재미있어요!” 이렇게.


sync: 그 댓글 알아보고 독자들이 댓글 많이 달 것 같다.


윤: 왜 여기서 원고는 안 하고 뭐하냐고. (웃음) 그거 보고 또 제 만화 보시는 분들도 있고. 윤태호 작가님도 나한테 한 번 남겨주셨다. 파지 줍는 할머니 나오는 데에 웃기려고 ‘미생면’ 넣었더니 고맙다고. 이거 진짜 있으면 좋겠다고. <미생>이 <시마과장>보다 나은 것 같다. <시마과장>은 안 풀리면 다 여자로 풀어서 이게 뭐야 그랬는데. (웃음) 그래서 그건 판타지구나 했고, <미생>은 판타지가 덜한, 살아가는 얘기다.


sync: <미생>은 나도 무척 좋아한다. 워낙 훌륭하고 유명하니까, 다음 작품 소개로 넘어가자. (웃음)

 

윤: <도토리의 집>도 좋다. <머나먼 갑자원>으로 유명한 야마모토 오사무 작품인데, 눈물샘을 정말 제대로 자극한다. ‘인간 삶이 얼마나 슬픈가, 그러니 우리 한번 함께 해봅시다,’ 이런 메시지가 명확하다. 총 7권 가운데 6권과 7권은 기관 만드는 이야기만 쭉 나온다. 그런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식이든 사회가 바뀌는 거니까. 우리나라 <도가니>도 비슷할 텐데, 작품성을 떠나 효과가 일어난 게 중요한 것 같다.


sync: 그 작품을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나는 작가님이 <개를 기르다> 추천하실 줄 알았다. 전에 웹툰 라디오에서도 작가님이 짧게 소개해서 읽어봤는데 참 좋더라. 나이든 반려견의 죽음을 그린 게 아주, 깊더라. 흰둥이도 나이를 먹을 텐데. 흰둥이의 죽음도 염두에 두고 있나 갑자기 궁금하다.


윤: 흰둥이는 죽이면 안 될 것 같다. (웃음) <야옹이와 흰둥이>는 마무리 했지만 앞으로도 <흰둥이>는 계속 연재할 거다.


sync: 연재가 계속 이어져서 흰둥이가 스누피처럼 장수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책 추천 하다 한눈을 팔았다. (웃음) 다시 돌아와서, <도토리의 집> 추천 감사한다. 꼭 읽어보겠다. 마지막 작품은 뭔가.


윤: <십시일반>이다. 이거 보면서 만화에서 이런 걸 그려도 되는 거구나, 처음 깨달았다. 여럿이 모여서 기획을 한 게 참 좋았다.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sync: <십시일반> 이후에 나온 비슷한 기획들은 어떤가?


윤: 워낙 그런 만화들을 좋아해서 다 사봤고, 늘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십시일반>만 한 임팩트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이런 만화들을 정말 좋아해서 그런 만큼 기대가 컸던 것 같다. 더 잘하면 좋을 텐데 하고.


sync: 맞다. 좋으니까 아쉬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시일반> 이후로 이 작품만큼은 그래도 특별한 성취를 이뤘다 하는 개별 작품이 있을 것 같다.


윤: <사람 사는 이야기>에서 최규석 작가님 게 좋았다. 1호에 실린 <24일 차>, 삼화고속 이야기. 조금 다르게 (표현을) 하셨다. 그리고 저희 선생님이라서가 아니라, 이경석 작가님의 <단돈 5만원>이 정말 좋았다. 철거 알바의 추억담이다. <내가 살던 용산>에서 앙꼬 작가의 작품도 담담하게 그려낸 게 무척 좋았고.


sync: 지금까지 추천해 주신 작품들이 <미생> 외에는 아주 유명하지는 않은 만큼,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 작가님 작품을 봐도 일반 독자들의 감성이나 이해를 잘 캐치하는 느낌이라, 르뽀 만화나 인권주제를 다른 작품들 중에도 잘 받아들여질 만한 작품을 고르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만화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도 있을 것 같다.


윤: 이렇게 생각한다. 주제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담으려면 한도 없다. 한정된 텍스트 속에서 너무 많은 걸 말하는 것보다는, 독자가 더 알고 싶게 만드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럴 수 있도록 건드려주는,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 더 좋은 것 같다. 나도 그러려고 하고. (웃음)






윤필 작가와 나눈 만화 대화는 만화 덕후들의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메시지를 담은 만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주제를 건드리기도 했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에게 물었다. 만화로 어떤 세상을 꿈꾸느냐고. 돌아온 답은 단행본 작가의 말에도 썼던 것과 같은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고 어떤 책임감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를 다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윤필의 만화를 보며 ‘옛날엔 그랬구나. 당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서로 잡아먹으려 안달이고, 또 그걸 바꾸기 위해 치열했을까.’ 하는 감상이 더 당연해지는 세상이 오길 싱크 역시 바란다. 꿈일지라도, 이런 꿈이라면 얼마든지 한눈을 팔고만 싶다. 더불어 윤필의 만화가 그런 세상을 더 가깝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두 번째 싱크뷰를 마친다.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에서.



다음 그림은 윤필 작가님이 보내온 새해 인사입니다. :)

윤필 작가님 블로그에서 더 큰 그림을 다운받으실 수 있어요.




윤필 작가의 만화들


단행본 출간작

 

 


웹툰 연재작


- 검둥이 이야기: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8733


- 낙오여군 복귀기: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4743


- 거북아 거북아: http://mcomic.mt.co.kr/kakaotalk/?nOrder=view&nStatus=&nViewSeq=8046&nPage=3




윤필 작가 추천만화



  


  

 

 




이 인터뷰는 싱크 SYNC 1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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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싱크 12호가 나왔습니다.

 

편집장님이 정리한 싱크 12호 소개와 함께 SYNC 만화경으로 먼저 인사드립니다. :)

 

, 새해맞이 인사도 더불어 드려야죠.

 

새해엔,,, 부디 잘 버티소서!


P.S. 다음 [toon-sync] 연재는 윤필 작가 인터뷰입니다. 두둥두둥!

 

 




 

  

 

격월간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인문만화교양지 SYNC 

제12호 발간!!

[출처] SYNC 제12호 발간 안내|작성자 싱크

 

 

인문, 역사, 철학, 교양, 시사 분야를 망라하는

국내 유일무이의 만화교양지

다양한 시선과 풍부한 이야기, 주옥같은 지식을

탐하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인문만화교양지 

 

SYNC

제12호

2012년 12월

판형 4×6배판 | 328쪽 | 가격 10,000원

출판사 (주)이미지프레임/길찾기

ISSN 2233-4343 12

주소 경기도 과천시 과천동 용마2로 3

전화 02-3667-2654 / 팩스 02-3667-2655

싱크블로그 http://blog.naver.com/synctoon

이메일 synctoon@naver.com

편집인 이기진

발행인 원종우 


 

-한 시대를 쥐었다 폈다 한 독재자의 2세가 대통령으로 탄생한 아이러니의 시대의 도래. 현대사에 대한 관심과 성찰이 더욱 더 절실하게 되었다. 5.16 쿠데타의 시대적 상황과 맥락을 집중 조명하는 <해빙기>, 군부독재시절의 65년 한일협정에 대해 날카로운 해석과 비판을 던지는 <‘위안부리포트>SYNC가 지속적으로 우리사회에 던지는 뜨거운 화두이다.


-지난 호부터 시작해 호평을 받고 있는 새 코너, <독립만화극장>. 이번 호에서는 동시대인의 공감 주머니를 자극하는 작가 권용득의 <영원히 안녕>을 소개한다.


-만화 작품 못지않게 점점 풍성해지고 다채롭게 진화하고 있는 칼럼들도 눈여겨 볼 만 하다. SYNC는 비평 코너 SYNC CRITIC과 작품 소개 코너인 이 만화를 보라’, 최근 출간 작품과 만화계 동향을 담은 만화경만화와 매체와 사회를 유기적으로 고찰하는 연구 칼럼 만화, 미디어 그리고 사회등의 고정 칼럼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인기 웹툰 작가와의 속깊은 대화, Sync_view 이번 호의 주인공은 야옹이와 흰둥이 아빠 윤필 작가다. 담백하고도 짙은 호소력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윤필 작가의 영혼을 느껴 보시라.

 

누군가에게는 노래 제목 그대로 힐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번엔 특히 그 누군가에게, 우리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에게 SYNC표 힐링, 따끈따끈한 12, 두 손 모아 드리고 싶다.

 



목차


연재만화A

해빙기_탁영호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_안토니오 알타리바,

굿모닝 예루살렘_기 들릴

위안부리포트_정경아

나이테기행-마라톤 나무2_안승희

키워드 역사B:당신의 소유물, 노예_오지훈

연재만화B

빗장열기-보통시민 오씨의 북한체류기_오영진

곰선생의 현대문학 명랑 해제-할머니의 죽음_· 이정호/ 그림 · 김경호 :

보리 서점_박민선, 선명화 :

칼럼

김낙호의 코미데올로기-음모론에 대하여

SYNC CRITIC-우리 동네는 지금 전쟁중입니다_

이 만화를 보라 -불편하고 행복하게_편집부

만화, 미디어 그리고 사회 -시사만화의 등장과 주변의 풍경들_이기진

SYNC만화경

인터뷰 SYNC View

윤필, 진실을 전하는 진심의 만화가_er

독립만화극장

영원히 안녕_권용득






SYNC 만화경



<도련님의 시대 1>(세미콜론)

세키카와 나쓰오 글다니구치 지로 그림오주원 옮김


일어 문고판으로 처음 접하고서, ‘우리도 이런 작품이 있어야 하는데생각했던 작품이 번역되었다. 배경이 일본 메이지 후반기(1900년대)인 데다 그 시대 낯선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 읽기가 녹록치 않을 거란 우려와 함께 책을 펼쳤다. 기우였다. 원서에는 없는 각주를 달아 국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번역도 깔끔하다.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행인의 작가 유명한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行人)이 작품 제목을 필명으로 삼기도 했다)가 주인공이다. 그가 대표작 도련님을 쓰게 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쓸쓸하고도 활기찬 일본 근대의 시대전환기 풍경을 포착했다. <개를 기르다>, <열네 살> 등으로 품격을 증명한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도 살아있다. 모리 오가이를 비롯한 다른 작가를 그린 시리즈(5) 중 첫 권이다. 사족이겠지만, 언젠가는 이광수나 이상, 백석 등 우리 작가가 이만큼 양질의 만화로 그려지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기타맨 1>(길찾기)

손규호


네이버에서 연재하고 있는 <기타맨>은 웹 미디어의 매력을 잘 살린 작품이다. 두서없는 특별편이 깨알 같은 재미를 줄 때도 있고, 가끔은 창작음악이 흐르기도 하고, 유명한 노래 가사에 그림을 곁들여 음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세로스크롤 속에 적절하게 배치된 컷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최근 출간된 단행본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웹툰 출간작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페이지마다 인쇄만화의 다채로운 컷 구성이 펼쳐진다. (단행본 출간을 염두에 두고 웹툰 컷을 배치했던 <미생>과 견줄만 하다.) 무엇보다 손에 만져지는 실제 물건인 까닭에, 선물하기 좋다. 가족과 학교로 대표되는 공동체가 의문의 물음표와 공포의 느낌표 속에 갇혀 있는 시대를 특유의 판타지로 어루만지고 있는 내용인 만큼 더더욱 그렇다. 가족에게, 아끼는 친구에게 선물하고픈, 소통과 조화(하모니)의 음표로 가득한 만화다.



<이백오 상담소> (새만화책)

소복이


몹시 이상한 만화다. 한겨레 판에 연재되었던 이 만화는, 상담이라는 상냥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은 퉁명하기 이를 데 없다. 상담 내용은 돌려 말하는 법 없이 직설적이고 매 에피소드는 짧고 간결해서 서운할 정도인 데다 이야기의 끝도 갑작스럽다. 그런데 이런 퉁명함은 너무도 낯익고 친숙해서 결국 빠져들고 만다. 츤데레도 아닌 이 퉁명한 매력에 끌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 퉁명함이 오래된 친구나 가족에게만 허락된 태도여서인 것 같다. 그래서 이백오 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냥 나 그대로’ ‘함께존재할 수 있다. 이 만화도 그냥 이 만화 그대로 나를 대한다. 꾸미거나 친한 척 하지 않고 속을 다 보여주는 만화이기에, 마음껏 함께 찌질하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다. 서른을 넘은 철든 싱글이라면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소복이의 상담은, <결혼해도 똑같네><어쿠스틱 라이프>가 대세인 일상만화 생태계에서 단연 희귀생물라 할 만하다.




김낙호 블로그_capcold님의 블로그님


본지에도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만화연구가 김낙호는 진짜배기 만화통이다. 그런 만큼 그의 글 창고인 블로그 ‘capcold님의 블로그님(capcold.net/blog/)’에는 만화에 대해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 산적해 있다. 한번 들어가면 1시간은 후딱 지나가는 이곳은 만화 애호가와 새내기 만화 연구가의 놀이터이자 공부방이라 할 만하다. 김낙호가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을 죄다 돈 한 푼 내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글은 만화에만 그치지 않고 미디어 및 문화의 전 영역을 총망라하며, 정치경제 이슈 및 그 외 등등을 모조리 섭렵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만한 오지랖을 펼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더불어, 그가 트위터에서 던진 촌철살인의 140자도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온갖 현안과 시사 상식 등도 접할 수 있다. (필자는 그가 소개한 3D 프린터의 미래세계에 깜짝 놀라 몇 시간을 빠져 있기도 했다.) 매년 말 게재되는 연례행사 ‘capcold 세계만화대상은 또 어떤가. 만화 평론이라는 활동이 양질의 재미있는 만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위해서도 의미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글마다 링크가 아주 잘 달려 있어서 보고 싶은 작품은 바로 찾아가 볼 수 있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쯤 되고 보면, 만화라는 문화예술이 탄생시킨 한국의 첫 르네상스맨 김낙호의 블로그에 당장 달려가 볼 일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를 무한클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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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화상 심사위원이기도 하신 박인하 교수(@comixpark) 트윗에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식입니다.


속보. 2012오늘의 우리만화상 5작품 선정. 윤태호 '미생', 앙꼬 '나쁜친구', 홍연식 '불편하고 행복하게', 김성재/김병진 '용병 마루한', 최민호 '텃밭' 자세한 리뷰는 추후에. ㅎㅎ

아직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홈페이지 공지(클릭하시면 열립니다. 총평을 보실 수 있어요) 외에 기사로는 올라온 게 없는듯 하군요. <오늘의 우리만화상>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주관으로 올해를 대표하는 우리만화를 선정하는 상이고요. 시상식은 보통 11월 3일 만화의 날에 치러졌습니다. 아마 올해도 그렇겠지요?


작년 수상작은 꼬마비·노마비 작가의 <살인자ㅇ난감>, 조주희 작가의 <키친>, 박건웅 작가의 <노근리 이야기>, 한혜연 작가의 <기묘한 생물학>, 이재헌·홍기우 작가의 <야뇌 백동수> 등 다섯 작품입니다.


작년 수상작이나 올해 수상작이나, 저도 다 읽지는 못했는데 아직 만화평론가로서 갈 길이 멀다는 걸 실감합니다. 더 열심히 읽고 써야죠. ^^;;


읽고 쓰기 가운데 '읽기'를 위해 작년과 올해 수상작을 갈무리해 둡니다. 만화가와 만화를 사랑하는 좋은 눈들이 선정한 작품들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박스세트가 있거나 단권인 작품은 하나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첫권과 출간된 마지막 권을 올려둘게요.






2011년 수상작




 

 



 






2012년 수상작


  


 

  


 




수상작들을 모아보니 한국 만화 생태계가 다양하고 의미깊은 방향으로 조성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다가오는 11월 3일 만화의 날에는 집에 박혀 이 만화들을 모조리 섭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근데 아마 안될거야...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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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 10호]에 게재한 1편에 이은 2편입니다.


1편: http://blog.aladin.co.kr/literaturer/5901624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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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나는 제목 그대로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에 대해 논해왔다. 앞글에서 그 생산물로 지목한 것은, 일종의 착시와 착각이었다. 한정해 말한다면 그 생산물은 진짜 큰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는 일 바로 그것이다. 물론 강호순은 실재하며, 그가 벌인 범행 역시도 문제이다. 하지만 강호순이 용산참사와 같은 시기에 (BH의 의도에 의해) 미디어 속에서 활개를 치게 되는 바로 그 때, 용산참사를 만들어낸 그 누군가는 숨을 곳을 얻는다. 정치적인 상황을 더 명백히 밝히자면 살인청부업자 배태진이 연쇄살인마 권시우를 사람이 아닌 것으로 묘사하며 비난하듯, 더 크고 많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강호순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숨기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이라는 점이 앞선 글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핵심이었다.


그 핵심을 그대로 껴안고서 뒤이어지는 글을 시작하기 위해 상상된이라는 단어에 대해 부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상상되었다는 말은 그 자체로 그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재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그것이 구성되었고 그려졌음을 의미한다. ‘상상된(imagined)’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심상(心想), 묘사 등으로 번역되는 이미지(image)이다. 심상 이전의 물적 이미지는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그림으로 된 것이든 문자로 된 것이든, 어떤 묘사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그 묘사가 심상으로 화한 것이, 독자-대중의 상상(imaginary)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은 마치 실체인 것처럼 착각된다. 잘 알려진 우화대로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질 때, 그 장님의 머릿속에서 코끼리가 나무 등걸과 같은 것으로 착각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시에, 착각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다른 상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 때 이미지는 단지 시선을 붙들어 맬 뿐이지만, 누구든 이 이미지를 계속해서 응시하게 되는 한 유사한 다른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며 따라서 다른 상상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앞을 가리고 있다. 마치 배태진이 권시우와 그의 살인 행위를 보느라 자기 자신의 살인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현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강호순에 대한 기사가 연일 미디어를 장식하며 대중들이 그것에만 시선을 쏟게 될 때, 용산참사는 보이지 않고 공권력이 살인범일 수 있다는 상상 역시 불가능하다.


두 번째 글이 시도하는 것은, 이런 착시와 착각을 만들어내는 이미지, 즉 웹툰과 문화상품 속 상상된 살인마를 보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살인마를 보는 일이다.

 

 

 

11

괴물을 보고 싶을 때면,

창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 조니 에크

(스테판 오드기, <괴물>에서 재인용) 


문화상품 속 살인행위 및 살인마의 심미화야말로 착시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과정이다. , 문화상품 속에서 이것은 강호순 사건 관련 뉴스를 유포해 이러한 착시효과를 의도한 BH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아닌 작품()의 유포에 의해 벌어지는 효과이다.


계속해서 응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문화상품의 존속과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문화상품은, 특히 상상된 살인마를 그려내는 문화상품은 매력적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매력은 살인마 캐릭터를 심미적 대상으로 그려내고 살인 과정을 심미화하는 데서 부여된다. 역설적이게도 살인마와 살인 과정이 심미화되면 될수록 독자의 혐오는 증폭되는데, 이는 그 아름다움이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행위의 잔인성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그림 1-1> ⓒ팀겟네임


<그림 1-2> ⓒ팀겟네임



 한편으로는, 살인마의 일상과 그 소유물들이 심미화된 퍼즐 조각으로 제시되면서 독자는 그 퍼즐 조각들을 살인 행위에 맞추어 조립하는 역할을 떠안게 된다. 이를테면, 오재욱이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의 가죽 케이스도, 권시우가 잠을 자는 침대도 모두 살인마라는 그들의 정체성과 관계된 사물로 이해된다. 가죽 핸드폰 케이스는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피해자 여성의 살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소품이 일절 없는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권시우의 침대는 기분 나쁜 새끼라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그림 1>) 미적인 것을 구성하는 가정 중 하나인 통일성이 살인마의 일상을 살인 행위와 연결 짓는 규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을 바라보는 응시 자체는 관음증이라는 도착적 감성과도 닿아있다. 작품 전체가 살인마의 삶을 분절적으로 바라보는 관음증적 응시이기도 하지만, 특히 살인 행위의 장면이 아닌 일상에 대한 응시는 살인마를 그의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삶까지도 바라보며 어떤 뒤틀린 이해를 도모한다는 면에서 더욱 도착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호순 검거 후 그의 삶 가운데 살인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단서와 풍경까지도 사진기사화 되고 일상이 낱낱이 밝혀졌던 것을 상기할 수도 있다. 많은 증언에 의하면 그는 성실한 젊은이였고, 담배를 피우지 말고 오래 살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치밀하고 계획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과 개를 안고 있는 사진 등은 그의 범죄와 연결되며 완전히 다른 기이하고 괴이한 느낌과 이해(“기분 나쁜 새끼”)로 전환된다.)


<그림 2> ⓒ순끼


이렇게 심미화된 응시는, 그 대상에 대한 집중을 강화하고 시야를 제한하여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응시는 이러한 효과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마임이 밝혀진 인물이 괴물로 인지됨과 동시에 그의 일상이 그 괴물성을 지지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과정에서 괴물성을 잠시 배제해 볼 때, 그 응시가 드러내는 것은 그도 사람이다라는 당연한 명제이다. 이는 <치즈 인 더 트랩>(순끼, 2012)이 창조한 새로운 사이코패스 유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지적 지성과 유려한 외모에 재력과 원만한 성격까지 갖춘 완벽남 유정은, 홍설과 독자가 그에 대한 호감과 의심을 오가게 만드는 인물이다. 특히 <그림2>는 유정에 대한 호감을 자아내면서 의심을 무너뜨리는데, 이는 앞서 제시한 여러 엄친아적 요소와 달리 그의 평범함이 자아내는 효과다. 타인과 자신의 교감(사진)에 대한 응시에서 웃음을 머금는 그의 인간다운 평범함은 일차적으로 독자의 그에 대한 동일시를 형성하며 이후에 만들어낼 의심과 반전의 교두보가 된다. 인물에 대한 이와 같은 반응은 <그림 1>의 배태진이 보여주는 반응과는 정반대이다. (이 작품은 이 글의 주제에 수렴되지 않는 독특한 면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길게 논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유정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유년 시절의 스케치와 최근 연재분의 폭력적 응징 씬을 통해 괴물성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점, 그럼에도 독자와 홍설은 아직 그에 대한 인간적 호감을 거두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다른 지면을 기약한다.)


다른 웹툰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아도 유사한 지점이 포착된다. <교수인형>(팀겟네임, 2006), <살인자난감>(꼬마비/노마비, 2011)의 주인공들은 살인마이지만 독자는 그에게서 공감을 철회하고 혐오로 태도를 전환하기가 쉽지 않다. (스포일러 )



<그림 3> ⓒ팀겟네임


먼저 <교수인형>은 서스펜스 장르의 단골 아이템인 이중인격 및 형사=범인 공식과 영화 <올드보이>(박찬욱)의 최면요법 등을 서사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웹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4인방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물인 주태일을 통해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종반부에서 그가 냉혹한 어린 살인마 붉은 KKK’(이하 KKK)였던 과거에 맞닥뜨리게 된다. 태일은 S대생으로 상당한 지적 수준을 소유했으면서도 동시에 털털하고 허술한 인간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그를 서사 속에서 관찰해온 독자들은, 동일시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가 KKK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어지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과거 KKK 일당의 피해자였던 김민수가 그들을 죽이려 할 때, KKK와 태일을 분리하여 괴물 KKK가 아닌 인간 태일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태일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할 때 가장 극적으로 질문된다.(<그림 3>) 민수의 대사에서 드러나듯, 태일이 자신을 괴물이라 승인하는 순간 그가 인간이라는 점이 강력하게 인식된다. 뉘우치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괴물이자 인간인 존재, 혹은 한때 괴물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존재에게 죽음을 선고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답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답을 해야 하는 독자 그 자신이 인간이라는 동일성 안에 태일과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림 4> <살인자난감>은 우리가 스스로를 처단할 수 있는가 하는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꼬마비,앙마비


<살인자난감>(이하 <난감>)은 서사 전개의 순서와 설정이 <교수인형>과 정반대다. <난감>은 평범한 인물인 이탕이 미드 <덱스터>의 주인공처럼 살인마를 죽이는 살인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시간 순서를 따라 그려나간다. 뭐 하나 잘 하는 것 없는 편의점 알바생 이탕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지만, 알고 보니 자신이 죽인 자가 죽어 마땅한 살인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그는 자신이 잘 하는 것-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살인마를 감지해 내어 죽이는 일이라고 믿게 된다. 경찰 기록을 조회해서 자신이 죽여도 되는 살인마를 찾아내 죽이며 자신의 살인욕구를 해갈하는 덱스터와는 달리, 이탕은 누군가를 죽이고 보면 그 대상이 살인마임이 드러나며 개인적 욕구가 아닌 뒤틀린 사회적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 정의감과 사명감이 개인적 공명심(功名心)의 다른 이름임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탕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인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의 평범한 과거와 살인 대상의 특이성을 지속적으로 응시해온 독자로서는, 작가에 의해 배심원으로 초청받고서도 이탕을 심판하기가 쉽지 않다. 강호순에게 당연히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부르짖고, 아동 성추행범에게도 화학적 거세로는 부족하다며 사형을 요구하는 독자라면 이탕을 숨은 영웅으로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인 마당에는 더더욱 그렇다. 다시 더더욱, 그런 독자일수록 살인마 이탕과 내면적으로 동일한 괴물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괴물만이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01=10 ?

 

잡담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잡담을 하고, 빈둥거리고 싶은 사람은 빈둥거렸지. 남의 시선만 끌지 않으면 되었으니까.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노래를 불렀어. 용기를 내기 위해 특별한 노래를 고를 필요는 없었어. 라디오에서 나오는 애국적인 노래라든지, 투치 족을 욕하거나 조롱하는 노래 같은 건 안 불렀지. 굳이 용기를 북돋울 노래가 필요한 건 아니었거든.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전통 가요 같은 걸 불렀어. 행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거야. 그러다 늪지에 이르면 무작정 땅을 판 뒤에, 멈추라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릴 때까지 사람을 죽였어.


- 투치족 민간인을 학살하고 복역 중인 후투 족 군인

칼의 계절(장 하츠펠트, 2003.)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여러 유형의 상상된 살인마들을 만나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만나볼 유형은 바로 이런 작품을 창조하는 작가가 살인마인 경우이다. <인터뷰>(루드비코, 2010)<멜로홀릭>(팀겟네임, 2011) 등의 작품들은 살인을 그리는 작가가 더 리얼한 묘사를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 과정과 피해자의 반응,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황을 그려내는 것을 그려낸다. 다시 말해 살인을 그리는 작가가 그 작가적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이 작품들 속에 내재된 살인마=작가의 논리이다. 살인마와 살인행위를 심미화 하는 양식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설정이야말로 내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두 가지 테제를 명징하게 뒷받침하는 예이다.


<그림 5> 우발적으로 첫 살인을 범한 평범한 이탕과 연쇄살인마가 된 이탕

ⓒ꼬마비,앙마비


먼저는 앞서의 많은 작품들 속 살인마들을 응시하며 포착한 바대로, 인간과 괴물은 분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괴물은 평범한 인간의 다른 모습이다.(테제1) 이러한 점은 설혹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괴물의 내면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죽여야 할 대상이라고 판결 내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변한다. 괴물에 대한 교과서라 할 괴물(스테판 오드기, 시공사)의 마지막 챕터 <오늘날의 괴물>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 사이코패스 살인범영화: 괴물은 우리 가운데 있다를 소챕터로 하여 인간 안의 괴물을 고찰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드러내듯이,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해 우리에게 건네주는 또 다른 생산물은, 그것이 우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더 중요한 다음 테제로 가는 다리를 놓는다.


괴물에서 <오늘날의 괴물>의 이어지는 소챕터인 대량 학살: 인간의 비인간성의 한 대목을 옮긴다. “크메르 정권의 킬링필드, 르완다 대학살, 소련의 굴락, 나치스의 대량 학살 강제수용소는 모두 평범한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정에서 국가공권력에 대항한 죄로 재판정에 선 문규현 신부도 최후진술에서 검찰과 경찰을 지목하며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나치 아우슈비츠 교도소장으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1급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자신은 죄가 없노라고 강변했습니다. 자신은 단지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습니다. 자신을 구조와 체제의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악의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다리를 통해 걸어가 만날 다음 테제는 바로 인간이 악의 집행자가 되는 원리이다. 이는 작가=살인마와 같이 자신을 구조와 체제의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주체까지도 껴안는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가장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할 때, 누군가 죽어나가는 일이 일어난다.(테제2) 사람이자 직업인이어야 할 주체가, 사람이길 포기하고 직업인으로만 그 정체성을 분할해 활동할 때 괴물은 만들어지고 그 괴물은 본인을 포함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데올로기(ideology)가 정체성(identity)이 되는 순간부터 이드(id)라는 이름의 괴물이 깨어나 살인이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이고 쾌락원칙에 속한 이드는 끝없는 충족을 요구한다. 이 때 이드를 깨어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은 민족, 국가 등 익히 알려진 신념 체계와 함께 기업의 이익, 직업적 성공, 예술적 성취, 단체의 존속 등을 모두 포괄한다. 달리 말해 이데올로기는 개인 안에서 작용하는 전체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활동 속에서 개인은 전체 속의 개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된 살인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응시에 의해 뚫어진 살인마 뒤편에 서 있는 것은 전체로서 실재하는 살인마들이다. 우리는 눈을 돌리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상된 살인마를 통해서 이 실재하는 살인마들을 보는 데까지 도달했다. 지금 여기, 2012년의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장 지목하고 싶은 실재하는 살인마는 공권력과 자본이다. 앞선 글에서 나는 용산참사로 대표되는 살인현장의 공권력을 상상된 살인마와 더불어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이번 글에서는 본문을 통해 상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자본을 그렇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윤태호


<미생>(윤태호)의 한 장면과 함께 길었던 글을 마무리하자.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부제로 未生을 뜻풀이하는 이 만화에는 이 글의 제재인 상상된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대척점에 있는 글자인 까닭에 장그래로 대표되는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이미 죽은 자의 분향소에 찾아간 이 장면은 생과 사가, 또 그 경계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그러나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의 목표를 훌쩍 넘어서는 지점이기에, 좌상단의 문구에 주목하기로 하자. 해고는 살인이다 이 말대로, 이 영정은 살해당한 자의 초상이다. 그렇다면 살인범은 누구인가?

 



 

*변명 혹은 앙망문 - ‘상상된 살인마를 그린 작품들로 인해 독자들이 진짜 살인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효과를 밝히는 것이 앞선 글의 핵심이었다고 이번 글 서두에서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상상된 살인마를 그린 웹툰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데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나쁘거나 무용한 작품이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 문화상품 속에서 이것은 강호순 사건 관련 뉴스를 유포해 이러한 착시효과를 의도한 BH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아닌 작품()의 유포에 의해 벌어지는 효과이다.”라고 밝혔듯 그 효과는 작가의 의도와도 상관없으며, 작품 자체의 가치와도 거리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룬 작품들은 예외 없이 극적 완성도가 뛰어나고 즐거운 형식 실험을 담은 이 장르의 보석 같은 작품들입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웹툰 작가들이 어떤 사회적 지향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며 재미있고도 의미 있는 작품을 추구했으면 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이 쪽이 더 어려운 요구이긴 합니다만.) 비평은 작품이 나온 사후에 그 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논할 수 있으되, 작가는 그것을 참고한다 하더라도 엄격한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 글로 인해 작가적 상상력이 침해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독자 분들께는 조금 더 간곡하게, 작가님들이 힘들게 만든 작품을 조금 더 뚫어져라 응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다보면 어떤 작품이라 해도, 설혹 그것이 정말 쓰레기 같은 창작물이라 해도, 거기에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사회가 늘 포함되어 있으니,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만화 비평을 하며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것을’ ‘재미있게그리고 읽고 나눌 수 있는 만화 세상입니다. 서투른 글이나마 쓰며 돕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찰진 독해를 앙망仰望합니다.


 


  


 


 


루드비코, <인터뷰> 단행본이 출간되었는데 알라딘에는 없네요.

웹툰으로 꼭 보시길.


 


 


   

자본이라는 싸이코패스를 확인할 수 있는 쌍용자동차 문제와 관련한 책들



[SYNC 11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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