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 <검둥이 이야기> 1, 2, 길찾기, 2013

나는 윤필이 <야옹이와 흰둥이>로 데뷔하며 웹툰 세계에 불어넣었던 새롭고 남다른 숨결을 잊을 수가 없다. 재미와 웃음 코드가 대세이던 시절, 윤필은 감동이라는 말로만은 설명되지 않을 어떤 감응을 작품 속에 담고 찾아왔다. 거의 유일하게 비슷한 감응을 선사하던 <신과 함께>의 주호민 작가가 그를 발견하고 트위터에서 추천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야옹이와 흰둥이>에 이어 <흰둥이>로 일하는 사람과 동물들의 삶을 착하면서도 정직한 시선 속에 담았던 그가 이번에는 <검둥이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전 작품들보다 더 진지하고 더 아픈 감응을 촉발하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더 깊고 긴밀해진 그림과 문장의 만남이, 또 이야기의 힘이 독자를 자기도 모르는 새 울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눈물을 닦고 책장 너머로 시선을 돌리면 수많은 검둥이들이 환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던 세계를 만나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검둥이 이야기>의 힘이다. 이 풍성한 만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레이 폭스, <한 사람>, 미메시스, 2013

이 특별한 만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사람>(원제: One soul)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를 감응케 한다. 맨 처음 작품을 펼치면 검은 칸들이 가득 차 있다. 의아함 속에 페이지를 넘기면 펼침면 좌우 18개의 구획된 칸 속에서 흰 점들이 피어난다. 생명이다. 그 각각의 생명이 살아가는 일생이 그 칸 안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되는 18개의 인생을 펼침면 안에서 한 눈에 조망하고, 또 페이지를 넘기며 그 성장사를 목도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을 제공한다. 흡사 나의 전생과 후생을 한 눈에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신이 되어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읽기 경험 자체도 특별하다. 최소 20회를 읽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기존 만화의 문법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읽기의 방식까지 창출해낸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낯설고 다소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낯섦이야 말로 기쁨이며, 그 낯섦을 넘어 작품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이희재, <낮은풍경>, 애니북스, 2013

나는 풍경 바라보기를 즐기지 않는다. 산과 바다가 주는 풍광은 숭고하지만, 내가 보고 겪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네 인간들의 삶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빅이슈>에 연재되고 있는 ‘빅판이 있는 풍경’ 코너는 새로웠다. 자연만이 아닌 사람이 담긴 풍경이어서다. 한국 만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희재 선생님의 풍경화첩, <낮은 풍경>도 그렇다. 자연만이 살아있는 경치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가 살아있는 진짜 풍경이 그의 친숙하고 농익은 붓질 속에 담겨 있다. 그가 동료 원로 만화가들과 함께 미얀마와 중국 심양과 등을 여행하고서 남긴 풍경을 보다 보면 진짜 <꽃보다 할배>가 여기 있었구나 싶기도 하다. 작곡가 윤이상의 생가를 찾아가 남긴 꼭지는 묘하게 민족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국내의 풍경 인사동, 남대문, 부여 등등도 모두 사람과 건축물과 자연이 한데 담겨 인간을 드러낸다. 백미는 역시 촛불(2장)이다. 2008년 촛불의 자리에서 이 60대의 만화가가 포착한 시민들의 밝고 따뜻하며 진지한 표정들은, 실로 뜨겁다. 이 풍경, 이희재가 낮은 데서 그린 이 풍경 속에 발을 디딘 이후로, 나는 더 이상 풍경을 자연을 담는 낱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빅판이 있는 풍경’에서도 이희재 작가의 꼭지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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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윤리위원회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청소년 유해매체지정과 번복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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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El arte de volar) 한국 출간.


간윤 심의에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청소년 유해매체로 결정


도서출판 길찾기, 간윤 결정에 항의 시작. 페이스북 페이지를 거점으로 관련한 비판 글을 꾸준히 게시하고 소식 알림. facebook.com/synctoon


여성가족부에서 심의 결정 고시.(일주일 후 814일 자로 실효 고시)


실효 발생에 앞서 도서출판 길찾기, 심의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서점가에 일시품절 요청.


위키트리 소셜방송 <박경신의 진실리포트>에서 박경신 교수, 박주민 변호사와 함께 청소년유해매체 지정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자가당착 전철 밟나" 주제로 토론.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저자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첫 연대 편지 수신.


실효 발생. 이 날을 기해 재심의 신청.


<한겨레신문>에서 스페인 예술만화, 한국선 청소년 유해물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이후 <프레시안>(817), <에이코믹스>(819), <중앙일보>(823), <주간경향>(92, 인터넷판 830)을 비롯해 후속기사와 칼럼이 이어짐.)


알타리바 작가의 두 번째 연대 편지 수신.


간행물윤리위원회 재심의.


간윤, “청소년 유해간행물이 아닌 것으로 변경 결정 공문 발송.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초판 2쇄 발행. 판매 재개.







출판사 직원으로서, 또 만화 평론가로서 조금 고생은 했지만 결과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2쇄 특별 선물 노트에 포함하고 싶었으나 조금 오버인 것 같아서 뺐던 일지를, 서재에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담아 둡니다.


이 상황과 관련해 에이코믹스에 기고했던 글도 약간 수정해서 옮겨둡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알라디너 분들도 서재를 통해 이 사건을 많이 알려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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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출판사 직원/만화비평가의 고백


(에이코믹스에서 게재한 제목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왜 청소년유해매체가 되었나: 어느 출판사 직원/만화비평가의 고백")




지난 수요일, 드디어 재심 청구를 마무리했다. 이제 약 2주 후에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한국에서 쓴 ‘청소년 유해물’이라는 오명이 벗겨지길 기대한다. 벗겨지지 않으면 긴 싸움이 될 거다. 행정소송도 간다. 그것만도 6개월에서 1년은 걸릴 테니, 내가 길찾기에서 퇴사하기 전에 끝을 못 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1년 예정으로 작년 1월부터 길찾기에서 일했다. 길찾기에서 발행하던 잡지 ‘싱크SYNC’에 만화비평을 기고한 인연을 이어가다, 작년 석사 과정을 끝내고 여유가 생긴 참에 싱크 및 색깔있는책들 업무를 맡기로 하고 월급쟁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비평가가 외도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대학원 공부와 글쓰기를 위해 애초 예정대로 2월까지만 길찾기에서 일할 것이다.

모양새는 좀 우스우나, 일은 즐겁다. 비평가의 눈으로 보아 훌륭한 작품을 알리는 이중 정체성의 그럴싸한 통합을 매 작품마다 즐기고 있다. 입사해 바로 내놓은 <체르노빌의 봄>(엠마늬엘 르파주)과 다음 작품인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모두 그랬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만화가 비빌 구석이 적은 한국 시장에서 초판을 소화했고 좋은 평가를 얻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가장 기쁜 건, 간단히 말해 ‘작품과 독자가 만나는 바로 그 일’에 내가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내 비평과 연구의 관심은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있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좋은 작품이 그 작품의 매력과 가치를 알아보는 눈 밝은 독자에게 읽히는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또 좋은 작품을 접한 독자가 작품의 의미를 포함하고 넘어서는 이해와 깨달음을 이루어내는 만남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조금 오글거리게 표현했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글을 통해 계속해서 살피고 모색하고 싶은 만남들이다. 그런데 이런 만남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라도 묻히기 쉽고 눈 밝은 독자가 좋은 책을 발견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상품으로 유통되는 작품과, 상품으로 작품을 만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소비자-독자들. 때로 비평가는 그 사이에서 둘 사이를 중매해야 한다. 바로 에이코믹스처럼.

그런데 이 일을 ‘글’로만 하기도 어렵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제도적 문제로 인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독자와 만나는 일이 어려워졌다. 나는 글로도 만남을 돕지만,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 그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또 개선할 수 있도록 뛰고 있다. 그냥 비평가였다면 글로 지원하고 응원하는 데서 끝났을지 모르지만, 마침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직원인 까닭에 비평가보다는 조금 더 발로 뛴다. 그리고, 비평가인 까닭에 직원 치고는 회사의 이익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게 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이 사건에서 각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을 강조하며 이 산만한 글의 중심을 잡아볼까 한다. 간단히 말해 ‘청소년 유해매체’라는 낙인과 실질적 효과가 문제다. 18금 영화와 달리 서적은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의 결정과 여성가족부의 고시를 통해 ‘청소년 유해매체’로 유통된다. 이때 그냥 ‘청불’(청소년 구독/관람 불가)이 아니라 ‘청유물’(청소년 유해물)임을 명확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영화의 심의를 전담하고서 최근 3년간 18금 영화는 더 이상 청유물로 여가부의 고시를 받고 있지 않기에 ‘청불’이다. 하지만 만화를 포함한 서적은 ‘청유물’로 고시되면 ’19세 미만 구독 불가’ 표시를 붙임과 함께 ‘청유물’로 유통된다. 포털에서 18금 영화와 19금 도서를 하나씩 검색해 보면 이게 어떤 차이인지 알 수 있다. 18금 영화는 ‘성인만 보는 영화’이지만 19금 도서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도서’라는 것이 명백히, 반복적으로 알려진다.

결국 출판물에서는 청유물이라는 공식적인 낙인이 여러 방식으로 독자와 작품의 만남을 방해하는 실질적인 일들이 (영화보다 더 심하게) 일어난다. 이 사안에 한해 문제를 주체별로 간단히 나누면, 1) 작가 창작에서의 자기검열 효과, 2) 출판 및 유통에서의 곤궁, 3) 독자가 받는 피해까지 크게 세 가지 방향이다. 앞서 밝혔듯 내 이중 정체성의 관심은 2)와 3) 사이에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 다음은 ‘유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불쾌한 느낌을 필두로 해서 시작되는 방해의 목록 일부다.

 

1. 온라인에서 성인 인증을 해야 작품에 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인증 없이는 표지도 보기 어렵고 리뷰에조차 접근하기 어렵다. 성인 인증은 로그인만으로 끝나지 않고 아이핀 인증이나 전화 인증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절차를 다 거치고서야 구매를 할지 말지 검토할 기준이 되는 책의 정보를 볼 수 있다.

2.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청유물’끼리 꽂혀있어야 하며 이 서가는 서점 직원의 감시·감독이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 청소년이 이용할 수 있는 서적과 같이 진열하는 건 불법이다. 대형서점의 경우 검색대에서 청유물 작품이 어디 꽂혀있나 검색하면 청유물이라서 알려줄 수 없다며 직원에게 문의해 보라는 결과가 뜬다. 직접 문의해 본 적은 없으나, ‘민증을 까야’ 하는 상황이 일어난다고 한다.

참고: https://twitter.com/sync_comics/status/368210396437442560

3. 앞뒤 표지 우상단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결코 예쁘지 않은 빨간 딱지를 붙여야 한다.

4.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인 한 어디에서도 광고를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공간이 대체 어디지?

(위 사항들에 대해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가상의 일화들로 정리해 둔 바 있다. 참고:http://goo.gl/bCiU1U)

  

지금까지 나열한 것은 물론 청소년보호법 상 청유물에 대한 청소년의 접근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이는 성인 독자의 접근 역시도 제한한다. 귀찮게 만들고 꺼림칙하게 만들며 민망하게 만들며 알기 어렵게 만든다. 또 우리는 예쁜 책을 가질 권리가 있는데, 이 빨간 딱지가 붙은 책은 예쁠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떳떳이 읽기도 어렵다. 청소년 보호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왜 그것을 위해 성인들이 작품을 훼손당한 채로 만나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광고가 없는데다 서가도 따로 구분되어 있는 책을 무슨 수로 만날 것인가. ‘청유물’로 지정된 대부분의 책들이 게토화 되고 매니아들의 정보망에 기대어 판매되고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청소년을 보호하면서도 성인 독자의 권리를 최소한으로 제한할 대안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현 제도는 정말 괴상하다. 이를테면 결제 과정에서만 성인 인증을 요구해도 된다. 어차피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은 비닐을 뜯고 나서야 볼 수 있다. 표지나 리뷰 등 정보 열람은 자유롭게 하되 그 정보에 유해성이 있다면 방송통신심의위 관련법으로 차단하면 된다. 영화의 경우가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예다.(영화와 포스터, 광고가 구분되어 다른 법의 적용을 받는다.) 어차피 청소년은 구입을 못하므로 표지에 빨간 딱지를 그렇게 드러나게 붙이지 않아도 된다. 서점 직원들이나 원하는 사람이 파악할 수 있도록 ISBN 옆에 작게 표시해도 무방한 일이다. 지금 제안한 대안들에 부작용이 있을까? 오히려 빨간 딱지야말로 ‘이거 야한 책이에요’라고 광고하는 역할을 했던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제 이런 방해를 받는 책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라는 점을 강조해 이야기할 때다. ‘청유물’ 지정을 받지 않았던 첫 3주간, 이 책은 이 책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과 만났다. 그간 조용히 팔려나간 1500부를 만난 분들은,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트위터나 블로그 리뷰 등을 통해 볼 때 대부분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던 분들이다. 또 많은 분들이 평소 그래픽노블을 좋아하거나, 스페인 내전을 비롯 역사적 상황에 관심이 있거나, 혹은 수상 경력 및 추천인들의 면면과 우호적인 입소문을 통해 이 책을 만났다. 하지만 간윤의 결정과 출판사의 대응 방침이 알려진 이후로는 조금 결이 달라졌다. 출판사의 깡을 응원하는 의미로 구입하겠다는 독자도 나타났지만, 야한 장면이 있다는 데 혹한 독자나 품절된다니 일단 사놓겠다는 독자도 등장했다. 이후론 빨간 딱지가 붙을 지도 모르니 미리 딱지 없는 1쇄를 사둬야겠다고 판단한 분도 있는 것 같다. 이 분들과 작품의 만남이 좋게 이어지리라 믿고 싶지만, 뭔가 만남의 순간이 어그러져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색안경을 끼고 작품을 만나게 되는 상황을 간윤이 벌여놓았다. 출판을 진흥하겠다는 간윤이! (촘촘한 방해들로 인해 결국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 분들도 많을 거다. 게다가 항의하는 의미로 출판사가 일시품절까지 걸었으니…) 

현재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재심의를 받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심의라는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 것은 이 책 한 권의 등급일 뿐이다. 이 책이 ‘청유물’ 낙인을 벗어도, 심의의 ‘선’을 약간 뒤흔들 뿐 청유물에 대한 괴상한 제도는 그대로일 것이다. 정말 훌륭한데 심의위원 눈에 유해해 보이는 장면이 포함된 작품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이후에도 등장할 수 있다. 어쩌면 야하고 폭력적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작품이 이미 ‘청유물’ 낙인으로 인해 독자와 널리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작품들의 피해를 막고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이 제도는 고쳐야 한다. 


한국의 독자분들과 작가분들 그리고 단체들의 협조와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제 애정 어린 마음을 전해주세요. 이번 일로 인해 한국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좀 더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저희로서도 소중한 보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자유를 위한 싸움에 불을 지필 수 있게 되어서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주인공 안토니오의 아들이자 작가인 알타리바 씨는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었다. 우리가 ‘자유를 위한 싸움’에 불을 지폈다고 말해주었다. 부끄럽지만, 또 아직 불씨뿐이지만, 확실히 이 싸움은 그냥 출판사가 부리는 꼬장이 아니라 그의 한국 친구들이 ‘표현의 자유’를 두고 벌이는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다.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만화’를 위한 이 싸움에서, 제대로 이기려면 제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이 기회에, 나는 해보려 한다. 또 이 기회에 많은 분들이 이 제도의 문제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문제가 불거진다는 것은 문제 해결과 개선의 필요성을 호출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사안이 심의의 선만이 아니라 제도까지도 문제화 할 수 있다면, 어느 이름 없는 비평가가 출판사 직원 생활을 하다 터진 사건으로 겪었던 고충은 그만큼 온전히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제도적 문제를 고칠 이 기회를 제대로 잡아보고 싶다. 만화를 사랑하는 당신들과 함께.

  

-사족이지만, 덧붙이자면.

누가 어떻게 고쳐야 할까. 만화 연구가 김낙호가 제안했던 대안으로든, 박인하 교수가 제안한 등급 방향으로든, 만화 창작자와 출판인들이 나서서 고쳐야 할 문제다. (김낙호의 안은 주로 웹툰에 대한 것이지만 출간물 만화까지 포함할 수 있음. “업계공통 자율등급제 및 민관 혼합 조정위의 혼합 운용” –http://capcold.net/blog/8365 , http://capcold.net/blog/8211 , 박인하의 글은 출간 만화를 주 대상으로 하며 김낙호의 안과 큰 틀에서 같은 입장. ‘19금’에 대한 문제의식이 선명하다. –http://comixpark.pe.kr/130171499368 , http://comixpark.pe.kr/130173727856 ) 이에 더불어, 비평가는 싸움에 쓸 글을 내놓고 독자도 응원으로 힘을 보태 줄 일이다.

여기까지 얘기한 김에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청법이다. 만화에 관한 한, 이 법의 문제 역시도 작품과 독자의 만남을 무진장 방해하는 폐단이 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화면 매체(즉, 애니메이션과 웹툰이 포함된다)의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아동·청소년 ‘표현물’ 문제 행위까지 포함한 것이 폐단의 가장 큰 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찬휘의 글 http://seochanhwe.com/192653319 과 김낙호의 글 http://capcold.net/blog/9202 을 참고하자.) 아청법은 해당 부분 때문에 거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급의 범죄예방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할 얘기가 많지만 더 정리된 지면을 기약한다.

 

*지금까지 관련해 인용한 글들은 모두 만화 및 미디어 비평가의 글이다. 만화의 미래를 위한 그들의 노력, 그들의 글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준다면 정말 고맙겠다. 이건 만화 비평가 겸 만화 애호가로서 하는 얘기다.

글. 조익상(만화비평가/길찾기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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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제15호

2013년 7월

판형 4×6배판 | 320쪽 | 가격 10,000원

출판사 (주)이미지프레임/길찾기

ISSN 2233-4343 14

주소 경기도 과천시 과천동 용마2로 3

전화 02-3667-2654 / 팩스 02-3667-2655

싱크블로그 http://blog.naver.com/synctoon

이메일 synctoon@naver.com

편집인 이기진

발행인 원종우

[출처] [발간 안내] 싱크15호|작성자 싱크


http://blog.naver.com/synctoon/50175444165



목차

연재만화A

● 망월_5‧18기념재단, 김성재, 변기현

● 해빙기_탁영호

● 굿모닝 예루살렘_기 들릴

● 키워드 역사B화 :당신의 소유물, 노예_오지훈

연재만화B

● 곰선생의 현대문학 명랑 해제-만세전_글 · 이정호/ 그림 · 김경호 :

● 보리 서점_박민선, 선명화 :無

칼럼

● 김낙호의 코미데올로기 -지속에 대하여_김낙호

● SYNC CRITIC -좋은 만화와 ‘좋은 만화’_조익상

● 오독(誤讀)의 탄생 체르노빌의 봄_갱

● SYNC만화경

인터뷰 SYNC View

● 기타등등의 사람들과 맺는 유대- 손규호 작가편 _문er

독립만화극장

● 돌팔醫 허당_무동이 화실

[출처] [발간 안내] 싱크15호|

작성자 싱크


인문만화교양지 싱크 잠정 휴간 및 재창간에 대한 안내 말씀

http://blog.naver.com/synctoon/50175444941

도 함께 읽어주세요.




싱크 만화경



오영진 지음, <어덜트 파크>(창비)

SF 소설가 테드 창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자동차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17세기 작가가 세상에 단 하나 있는 자동차로 예쁜 여자를 구하고 악과 싸우는 이야기를 쓴다면 그것은 판타지다. 하지만 그가 쓴 것이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가지고,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기업이 생기고, 교통체증과 교통사고가 일상이 된 세계라면 그것은 SF다. 오영진의 만화 <어덜트 파크>는 그 사이 어디엔가 있다. 대화가 가능한 로봇이 소수 개발되어 대화를 제공하는 상품이 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이를 제외하면 지금과 다르지 않은 삶이기에, 이 설정이 SF보다 더 핍진한 현실 감각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곧 현실 속에 일어날 법한 일을 보통 사람들의 지친 삶을 중핵으로 하여 그린 풍자가 매섭고 흥미롭다.




루드비코 지음, <인터뷰>(세미콜론)

최근 다음 웹툰에서 <루드비코의 만화영화>와 <만화일기>를 연재하고 있는 루드비코는 원래 서스펜스 추리극을 아주 잘 그리는 작가였다. 그래서 일상툰에서도 독자와 밀당을 잘 하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뷰>는 그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 드디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설명을 하면 할수록 스포일러가 난무하게 되는, 숨겨진 비밀이 많은 작품이라 그 스타일과 구성을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마치 영화 같은 연출 가운데 중첩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모두 복선으로 기능한다. 꽉 짜인 플롯을 따라가다 뒷통수를 여러 번 맞다 보면 루드비코가 왜 “독보적인 스타일”의 신예작가로 불리는 지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거나 서스펜스 스릴러물을 좋아한다면 꼭 찾아볼 것을 권한다.



반 토시오, 테즈카 프로덕션, 아사히 신문사 지음, 김시내 옮김, <테즈카 오사무 이야기 1>(학산문화사)

만화의 신! 테즈카 오사무의 일대기를 만화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전 4권으로 발행되는데, 각권표지는 아톰, 블랙잭, 붓다, 불새 등 그의 대표작 내지와 캐릭터들로 꾸며질 예정이라 한다. 이번에 나온 1편의 표지를 장식한 캐릭터는 아톰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꾸는 때부터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 만화를 그리는 모습이 데즈카 스타일의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칸과 칸의 배치와 연출, 캐릭터의 동작이 데즈카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2권 이후부터 본격적인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로 활동할 그의 이야기가 더욱 기대된다.




<만화의 과거, 현재, 미래 - Comics, the invisible art> 展

청강대학 교내 청강만화역사박물관

2013년 6월 20일~2014년 5월 20일

젊은 만화의 작은 요람으로 기능하고 있는 청강대에서 야심찬 전시회를 기획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만화가의 작품들과 길찾기를 비롯 만화전문 출판사의 대표작을 한데 모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조망하는『만화의 과거, 현재, 미래-COMICS, THE INVISIBLE ART』展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청강만화역사박물관 제13회 기획전으로 마련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었던 만화 속의 다양한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만화의 ‘현재’와 ‘미래’를 각각 만화 출판사와 작품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특히 만화의 미래 섹션은 디지털, 영상화, 새로운 소재, 글로벌, 그리고 예술과 접목을 보여주는 인기 웹툰과 출판만화 작품들로 꾸려 한국 만화의 미래를 예측한다. 청강만화역사박물관장을 겸직하고 있는 청강대 박인하 교수는 “21세기 이후 만화는 교육, 영상, 디지털, 예술 등과 융복합되며 새로운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고 평하며 “이번 전시회는 과거의 유산에서 오늘날 만화의 현황과 미래의 시도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를 비롯, 정철(<본초비담>), 이종범(<닥터 프로스트>), 이종규, 이윤균(<전설의 주먹>) 등 웹툰 플랫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과 미국잡지 <엔 프레스> 연재작 <맥시멈 라이드>의 이나래 작가 등이 전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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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14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어두운 만화들 - 우리집검둥이 이야기

 

1.

 

어린이 장기밀매를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 어둠의 아이들의 작가 양석일이 독자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소설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어둠에 사는 사람은 빛의 세계가 대단히 잘 보입니다. 그러나 빛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어둠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2.

 


사이바라 리에코의 만화 우리집은 독자를 어둠의 세계로 데려간다. 작품 속 우리집을 중심으로 한 어둠의 세계에서는 온갖 어두운 일들이 벌어진다. 살인, 인신매매, 강간, 매매춘, 사기, 마약, 도박... 짧은 단어로 표현하면 너무나 무서운 행위들이다. 그런데 우리집의 어른들이 이런 무서운 행위들을 저지르면서도누군가를 보살피며 살아가는인간적 면모를 보여줄 때, 이 무서운 행위들도 어딘가 사람의 보편성과 닿아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말하자면, 인간은 정말 선하고 악하다. 마치 룸살롱에서 일하는 누나가 섹스를 하고서 사온, 그래서 니타와 잇타에게 정말 맛있고 정말 맛없는케이크처럼 말이다.





한 사람 안에도 착한 인간과 나쁜 인간이 공존한다. 고이치 형은 톨루엔(본드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주성분)을 팔지만 마약은 팔지 않는다. 이 약팔이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일회용휴지를 나누어주지만 여성과 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악을 행할 때에도 선을 지키는 원칙이다. 주인공 니타의 형 잇타는 누나와 동생을 위해 돈을 벌려고 집을 나가 고이치 형과 함께 활동한다. 구역을 관리하고 수익을 내기 위해, 차에 일부러 부딪히고 칼로 사람을 찌른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잘해주기만 한다.





마찬가지로 인류라는 존재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생명을 잉태하는 자와 생명을 죽이는 자가, 환경을 지키려는 자와 환경을 이용해 이윤을 만들어 내려는 자가, 어둠의 세계를 그려서 빛의 세계에만 있는 독자들이 못보던 것을 보게 하려는 작가와 어둠의 세계를 왜곡하고 선정적으로 묘사해서 빛의 세계의 독자들이 그 어둠을 이야기 속에서까지 착취하게 만들려는 작가가 모두 존재한다. 앞서 얘기했듯 심지어 그 둘은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잉태하는 자와 죽이는 자가 같은 한 사람일 때, 잉태의 값은 지워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는 살인자로만 평가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우리집의 미추(美醜)가 엮어내는 감동의 힘이다. 쓰레기로만 바라보던 공간에 꽃도 피어 있고, 지상 최악의 악한으로만 생각했던 이에게도 선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독자가 인지하는 순간,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의 공간적 거리가 짧아진다. 두 세계에 사는 이들이 모두 인간이라는 것이, 그냥 타인이 아니라 동일자인 타인임이 드러난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 타인의 지옥이라는 점에서 나와 타인은 같다. 우리는 지옥으로 만나 서로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 니타처럼, 슬플 때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웃을 수 있다. 어둠을 인정하며.

 



3.

 

(검둥이 이야기관련 스포일러 있음)

 

최근 완결된 웹툰 검둥이 이야기』(이하 검둥이』)는 제목처럼 어둡다. 윤필 작가의 전작 흰둥이, 야옹이와 흰둥이의 세계도 밝지만은 않았건만, 검둥이는 확실히 더 어둡다. 그 세계 속에서 독자들은 돈의 추악함을 본다. 물론 돈은 인류만의 문화다. 아니, 그러고 보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돈의 추악함이 아니다. 투견장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며 이건 모두 돈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던 검둥이는 싸움 막바지에 이르러 철창 밖 사람들을 보며 깨닫는다. “돈이 나쁜 게 아니라, 저 돈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손이 나쁘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 손은 돈을 쥐게 되는 그 순간 악으로 물드는 것일까?


   

 



검둥이의 세계는 흰둥이의 세계와 닿아있다. 검둥이흰둥이의 사이드스토리로서, 흰둥이가 크게 아팠을 때 치료비를 대준 수수께끼의 누군가가 바로 검둥이였다는 점에서 흰둥이이야기와 이어진다. 독자 입장에서 정말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순한 연결점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치료비는 두 세계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검둥이의 주제의식을 선명히 살리며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도 흰둥이의 독자가 검둥이의 세계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치료비는 돈이다. 돈의 용처에 따라 그것은 도박의 판돈이 되기도 하며 치료비가 되기도 한다. 다시 또 돈은 출처에 따라 도박에서 딴 돈이기도 하고 뺏은 돈이기도 하며 노동으로 번 돈이기도 하다. 검둥이의 이 장면에서 그것은 사채업자가 벌어들인 검은 돈이며, 검둥이가 자신의 몸을 담보삼아 빌린 돈이며, 흰둥이의 생명을 살리고 미래의 눈물을 그치게 한 착한 돈이다. 그 치료비의 출처와 용처가 극과 극이기에, “돈을 쥐고 있는 손의 악덕이 다시 한 번 폭로된다.




쥐고 있는것은 출처와 용처와 상관없는 소유욕의 실천이다. 특히 투견 도박에서 그 손은 돈을 더 많이 쥐기 위해서만 쥐는 행위를 잠시 그만둔다. 돈에 대한 소유의 열망, 그것이 돈을 쥐고 있는 손의 악덕이다. 그것은 돈을 더 많이 불리기 위한 용도 외에 다른 용처를 찾지 않는다. 그것은 출처를 상관하지 않는다. 불법성도 비인간성도 동물의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만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가하다. 누군가가 죽어가도 그를 치료하기 위해 돈을 놓지 않는 것이 그 손이다. 그런데 검둥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바로 그런 손을 가진 것만 같은 인물, 사채업자를 따라간다. 이 만화가 정말로 어두운 만화라는 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검둥이가 착하기 위해 악할 수밖에 없는 이 마지막 상황은, “흰둥이가 있는 곳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검둥이의 세계를 아스라이 그려내며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검둥이가 흰둥이의 하모니카를 들으며 방긋 웃을 때 가슴 뭉클했던 독자들은, 검둥이가 바로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서, 사냥꾼의 일을 돕고 투견을 하며 주인의 돈을 벌게 해주듯 사채업자의 일을 돕게 될 것을 가슴 아파한다. 비록 미래처럼 검둥이라고 불러주는 남자이건만,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몸을 팔았던 검둥이가 다시금 흰둥이를 위해 몸을 파는 이 상황은 좀처럼 견디기 어렵다. 이렇게 만화가 끝이 나면서, 검둥이의 어두운 세계는 흰둥이의 조금 더 밝은 세계, 독자가 살고 있는 어둡고도 밝은 세계를 드러내며 이어진다. 어두운 만화로서 그 존재의의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어둠까지도 환히 보이게 하며.

 



4.

 

 

사실 서두에 인용한 양석일 작가의 말에는 한 구절이 더 있었다.

 

이 소설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어둠에 사는 사람은 빛의 세계가 대단히 잘 보입니다. 그러나 빛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어둠의 세계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빛의 세계에 살면서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며 그것을 보려 하지도 않는 이들에게, 양석일 작가는 어둠의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사이바라 리에코는 우리집을 윤필은 검둥이를 보여주었다. 그 세계에는 가난이 가득하고, 사람이 사람과 생명에게 저지르는 폭력이 가득하다. 그 어둠의 기원을 미묘하게 드러내며, 어둠 그 자체로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든다. 물론 빛의 세계에 사는 독자들이 이 작품들에서 이야기만을 보고 그 속에 담긴 어둠을 외면하지는 않았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장치는 외면하는 독자들마저 직면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로 어둠을 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비평은 그저 조금 거들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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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61호](2013.6.1) 책 소개 코너에 재능기부한 글. 책 소개 글 나오고 1달이 지나고서야 실제 책이 출간되었다. ㅜ.ㅜ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KIM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번역,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길찾기)

 

문학과 만화의 경계를 허물고 비상하는 작품을 만났다. 문학과 만화 사이에 어떠한 위계도 설정하지 않고서 말하건대, 만화와 문학이 각각 이룰 수 있는 성취에 최대공약수가 있다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스페인과 유럽에서는 실패와 고통 속에서 살아간 모든 이들에게도 엄연히 존엄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2010년 스페인 문화부 만화작품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수상했다.







스페인어 원제가 <비행의 기술>인 이 만화에는 20세기 스페인과 유럽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날고 싶었으나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인공 안토니오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정권의 폭거 가운데 20대를 보내야 했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끝에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포로생활까지 겪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현실은 여전히 비루했다. 전쟁 속 삶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다면, 전후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에서의 삶은 <, 생존자(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은 채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주인공이지만, 이제는 서로 착취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현실 속에서 비상의 욕망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 이 시대적 우울함과 날아오르고픈 욕망 사이에서는 1만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우리 식민지 시절 이상의 <날개>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이처럼 문학적 향취를 담고 있으면서도 허영만의 <! 한강>과 아트 슈피겔만의 <>와 같은 만화 걸작들의 설득력에 버금가는 놀라운 힘을 느끼게 한다. 만화로는 드물게 대사와 지문의 양이 상당한 편이어서 독자로서는 시작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도 모르게 주인공에게 깊이 이입하고 만다. 90년 동안 낙하한 생애를 그린 이 만화는,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를 함께 낙하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히 실화의 힘이다. 하지만 그 실화를 만화 시나리오로 승화한 이가 바로 그의 아들 안토니오라는 점은 그 실화를 더욱 진솔하고 끈끈하게 만든다. 그림을 그린 KIM의 아버지 역시 프랑코 정권에 희생당했다고 하니, 패배자의 아들들이 만든 이 작품은 마치 부모의 넋을 기리는 제의와도 같다.




   




이처럼 죽기까지 평생 추락과 낙하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날아보려 했던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삶은 아들을 통해 결국 날아올랐다. 스페인 못지않은 격동의 한국 근대를 살아간 우리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 빅판 아저씨들의 삶을 잠시 떠올려 본다. 지금 2013년의 한국이 그분들의 삶의 주름과 이어져 있기에, 젊은 우리 역시도 이 작품에서 묵직한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우리는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두 안토니오가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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