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완생의 길을 걷다


드라마 <미생>의 처음과 마지막은 만화 <미생>과 사뭇 다르다. 요르단 에피소드가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내 눈길을 끈 것은 한결 증폭되어 표현된 미생들의 고생이다. 초반부에서는 인턴 동료 사이에서 고생하는 장그래의 모습이 드라마만의 오리지널 씬들을 통해 다소 과장되지만 그만큼 더 와 닿게 표현되었다. 후반부는 오 차장이 사표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눈에 띈다. 만화에서는 갈 회사가 정해지고 퇴사하지만, 드라마 판에선 달라진 사내 분위기에 마음 고생하다 결국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19국] 만화에서는 타부서 서류 열람을 방해받으며[141수] 불안감을 살짝 느끼는 정도였다면, 드라마의 묘사 속에서 오 차장이 받는 압박은 훨씬 무겁다. 그 압박 속 오 차장은 회사를 그만두는 단 하나의 선택에 내몰린,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미생의 모습이었다.


오 차장이라는 미생은, 구체적으로는 내부 고발자의 상황에 처해 있다. 온전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 중국 무역에서 행해지던 과도한 콴시 관행을 적출한 오 차장과 영업3팀은, 그 이전 박 과장의 리베이트 건을 적발한 일의 연속선상에서 내부 고발자로 완전히 찍히고 만다. 적폐라 할 만한 관행이건만 그로 인해 유지될 수 있었던 대 중국 무역에서의 ‘편안함’이 사라지면서, 다른 팀들은 ‘불편함’을 초래한 오 차장들을 불편해 한다. 따라서 오 차장이 ‘우리’ 회사의 일원인 한은 중국 무역은 어렵다는 것은 회사의 입장일 뿐만 아니라 타 팀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 차장은 회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 죽어나가야만 하는 희생양이 된다. 중국이라는 실리의 신 앞에서 희생양을 바치고서야 원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와 그 안의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지적했던 희생양 제의로 유지되는 사회의 매커니즘이 <미생>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매커니즘이 내부 고발자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도 마찬가지로 희생양이다. 내부 고발자가 우발적인 희생양의 형상이라면, 계약직은 제도적으로 구현된 희생양이다. 2년마다 한 번씩 죽어나감으로써 그 회사의 안정을 도모하고 정규직 사원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인하게 하는 희생양, 그것이 계약직이다. 그런 점에서 <미생>은 영업 3팀을 중심으로 한 희생양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희생양들의 삶을 향한 희망을 그린 것으로 이해되는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그런 희생양들을 만들어내는 회사-사회는 무엇인가를 또한 그 희생양 곁에서 살아가며 나의 완생을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먼저 회사-사회를 묻자. 지금까지 나는 회사(會社)와 사회(社會)를 의도적으로 섞어서 사용했다. 같은 한자로 구성된 이 둘은 개념적으로 분명 다르지만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사회생활의 공간으로 말하며 은연중에 사회를 회사로 대체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며 입단에 실패하고 사회로 나서게 된”[단행본 인물 소개] 장그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비로소 사회에 속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바둑에선 하수가 고수와 마주할 때, 급을 맞춰줍니다. / 그런데... 사회에선, 고수를 상대로 신입사원이 접바둑을 둡니다.”[47수] 이렇듯 사회의 경계는 회사를 중심으로 그어진다. 바둑을 두던 시절에는 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혼동이다.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런 혼동은 언어생활로만 제한될 것도 아니다. “회사 안은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명대사는 “해고는 살인이다”의 완곡어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지옥이다. 회사 밖으로 내쫒긴 이는 사회적으로 죽은 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운데 26명은 정말로 죽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 회사-사회의 포개짐은 그저 언어적인 착각만은 아니며,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삶의 잔혹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향한 고민은 회사에 대한 고민과 뗄 수 없는 문제다. ‘작은 사회’로서의 회사가 ‘큰 사회’를 가리는 이 착시는 오히려 현실적일뿐만 아니라 큰 사회를 제대로 보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무너진 사회를 ‘작은 사회’와 ‘큰 사회’ 모두의 측면에서 또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희생양을 만드는 것으로 유지되는 회사-사회가 드러내는 진실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이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민해 볼 차례다. ‘사회’라는 말로 가려지는 개별 행위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가장 최근의 이슈를 떠올리는 것이 답을 찾는 과정으로 적절하겠다. ‘땅콩 회항’ 사건 후 박창진 사무장이 일부 동료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상황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은 오 차장과 겹쳐진다. 대한항공이라는 작은 사회의 구성원 일부는 박 사무장을 희생하여 자기를 보존하려 한다. 그것이 수직적인 위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를 희생하여 나의 완생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욕망은 지금껏 사회를 유지해 왔던 뒤틀린 사회의 욕망을 잔뜩 끌어안고 있다.


때로 멀리서 보면 보인다. 오 차장을 지켜본 독자/시청자들이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듯이, 실제 인물 박 사무장이 실명과 얼굴과 자리를 내놓고 싸우는 이 싸움에 대해서도 사람들 대부분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작은 사회는 외면하지만 큰 사회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박 사무장은 싸울 힘을 얻는다. 가깝든 멀든, 사회적 지지 없이 그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우리의 작은 사회 안으로 옮겨 놓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를 지지할 수 있는가? 그를 희생하지 않기 위해 내가 희생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는가? 회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희생양을 요구하는지는 않을런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서 초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자. 드라마 <미생> 마지막 화에서 오 차장은 루쉰의 말을 인용한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새 회사를 세우는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희망적인 사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완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의 돌로는 완생을 이룰 수 없다. 작은 바둑판에서조차 완생의 요건인 두 집을 이루려면 적어도 여섯 개의 돌이 필요하다. 완생은, 외롭지 않게 서로를 위로하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유물이다. 개인의 완생이란 없다. 희생양을 만들어 나를 살리려는 생각으로는 완생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우리의 완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길이 완생의 길이다.


그것은 고생길이기도 하다. 희생양의 고생을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생이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사회에서는 사회를 고민해야 하며, 그 고민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몫이다. 내 옆의 미생과 함께 고생길을 스스로 여는 것, 그것이 완생의 길이다. 그러니 완생의 길을 열고 있는 미생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굴뚝 위의 미생과, 박 사무장이라는 미생에게, 내 옆의 누군가에게 고마워하며 걷는다. 완생의 고생길, 지금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 길을.


2015.1.22 송고

2015.2.3 <주간경향> 1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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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방법


아직 영화 <국제시장>을 보지 않았다. 연말연초에 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들린다. 그저 영화의 만듦새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생각나는 만화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란 점에서 닮아 있는 만화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그 중에서도 한 작품의 아버지가 가슴에 박혔다. 어쩌면 내가 만난 가장 특별한 아버지일 ‘안토니오’가 바로 그다.


안토니오는 90세에 요양원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만화는 바로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아버지의 일생을 어린 시절부터 다시 훑어간다. 이런 구성은 그의 삶 곳곳에 그의 자살의 이유가 박혀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안토니오는 스페인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랐다.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8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는 20세에 도시로 탈출하다시피 떠난다. 바로 이듬해 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스페인내전으로 알고 있는 그 전쟁이다. 그 후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이어졌다. 이 전쟁통의 연속을 그린 분량이 이 작품,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금까지 숨겨온) 한글판 제목이 보여주듯 안토니오는 아나키스트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 친구와 동료들의 영향 속에서 뿌리내린 그 사상이 그의 인생 모두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나도 이것을 실감나게 깨달은 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다닌 지 얼마 지나서, 제목 때문에 읽는 사람과 그 탓에 오히려 읽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접하고서였다. 작품의 선택에 어떤 정치적 선이 그어져 있는 셈이다. 그 선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원제(“비행의 기술” 혹은 “비행의 예술”/ El Arte de Volar)를 이야기해 주며 달리 읽힐 여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평론가로서 그 선을 넘어서 대화하기 위해서는 나도 작품을 다시 읽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다. 안토니오가 전쟁 후 스페인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아나키즘에서 변절하는 과정으로 읽혔던 부분이,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읽혔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나눴던 납탄으로 만든 반지를 도저히 낄 수 없게 된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대목부터다. “납탄 반지 이후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반지는 바로 혈육이었다…” 아들을 안고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이의 탄생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사상이나 독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아이의 밝은 미래만을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 이 애만은 내가 걸어온 길을 피하게 하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는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새로운 사상가가 된 것이었다. “신도, 주인도, 국가도 없다!”가 아나키스트의 근본 강령이라면, “오직 자식이 있다!”가 아버지의 근본 강령일 것이다. 그 강령과 함께 안토니오는 전혀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 모순된 삶을 산다. 윗사람을 배신해서 그의 회사를 빼앗고, 빼앗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가정에 소홀해지고, 소홀해진 틈을 타 바람을 피게 되고, 그러면서도 아들의 교육이 걱정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료에게 회사를 빼앗기는 일이 ‘아버지’ 안토니오의 삶을 채운다.


그런데 나는 이 막장 드라마 같은 대목이 너무나 뭉클했다. 물론 묘사와 연출·대사와 내레이션 등 모든 만화의 요소가 탁월하지만, 줄거리로만 놓고 보자면 크게 의미가 와 닿을 것이 없는 삶인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밝혀둘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회고를 바탕으로 직접 스토리를 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의 온갖 치부를 샅샅이 그려낸 이 시기 이 대목은 너무나 뭉클하다. 그렇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그 진정성도 물론 값지지만, 정작 나의 뭉클함은 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은 대상 못지않게 서술자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법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작자는 직접 아버지가 되어 1인칭으로 발화한다. (이 의미는 작품을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렇게 ‘나’로서 고백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보면, 아들과 아버지가 온전히 겹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겹쳐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막장스러운 부분이다. 미화하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치욕스러운 부분을 모두 그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어 그가 던적스럽게 살았던 세계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모순적으로 살아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직접 앓았다. 그것은 곧바로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긍정은 아니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긍정’한 것은, 당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후회였다. 그러면서 가장 ‘부정’한 것은, 아버지를 후회하도록 만든 세계 그 자체였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의 자살을 비행(飛行)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너무나 잘 이해했기에 아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식으로 나타난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부정을 긍정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한 것이다. 아버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안토니오는 그렇게 해방을 경험했다. 그 해방은 아들에 의해 더 명확해졌다. 불편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깊이 껴안고 인정한 스페인과 유럽 독자들(그리고 어쩌면 한국도!) 덕에, 작가는 이런 말까지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정의와 평등, 그리고 사랑과 번영이라는 날개를 가지고 정직하게 날고 싶어 했지만 그 날개는 처참하게 찢겨졌다. 그러나 마침내 오늘날, 그분은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픽션이라는 창공에서 긴 실루엣을 남겼다.” 이처럼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윤리에 기반한 아버지에 대한 ‘위로’와 ‘긍정’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라는 공동의 과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직시’를 통한 ‘해방’은 흔치 않다.


<국제시장>이 ‘아버지 세대를 위한 영화’라는 감독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섞여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그 세대를 위로하는 감독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식 ‘아버지 사상’을 몸으로 살아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우리 아들딸들의 기억과 역사가 영화의 역량과 한계를 넘어 어떻게 이야기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새삼 궁금하다. 우리가 윤리를 외면하지 않고서 아버지 세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2015.1.1 송고

2015.1.13 <주간경향> 1109호



(안토니오 알타리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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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에 한번 <주간경향> '만화로 본 세상' 코너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시작했는데 아직 알라딘서재에는 한편도 옮겨두지 않았네요. 이제 하나씩 옮겨둘까 합니다. 시작은 최근에 오사 게렌발의 <7층>으로 쓴 글입니다.


(지인이 찍어서 보내준 출간본 사진)

(인터넷판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서재 포스팅 버전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폭력의 연애를 끊고 ‘세상 밖’으로 나와라"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지만... 이 제목은 제가 하려던 이야기와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칼럼 제목을 데스크에서 바꾸는 일은 일상다반사라 그러려니 하는데요, 이번 칼럼 제목과 소제목은 좀 많이 이상해서 여기 서재에서라도 제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고 해명을 좀 해둬야겠다 싶네요. 번거로우시더라도 여기 이 글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송고 후에 본문도 약간 수정했습니다.) 글을 좀더 깔끔하게 쓰지 못해 데스크에서 오해한 걸 거예요.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재건의 고된 작업"을 시작해야 할/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희생자들과, 또 '우리'와 나누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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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떠날 곳이 있다.

언젠가 TV에서 가수 김경호가 긴 머리 때문에 겪었던 고충을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여성으로 오인당해 추행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소름 끼쳤겠네’ 정도의 감흥과 함께 웃어넘겼었다.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에서 다른 머리 긴 남성의 성추행 경험담을 읽을 때는 감흥이 전혀 달랐다. 여성으로 오인된 남성이 그런 불쾌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는 것은, 여성들이야말로 그처럼 잦은 성추행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예전과 달리 거기까지 내 생각이 미쳤던 것은 글 자체의 초점이 거기 있었던 덕도 있지만 최근 들어 여성의 경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기회가 늘어나고 있는 데 이유가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메르스 갤러리’ 사태 등등 여성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요즘이다. 그만큼 남성인 내가 낯섦 속에서 얻는 깨달음도 크다.

깨달음은 곧 놀라움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것, 모르고 있던 것이 정말 많았다. 남성인 나의 경험과 대조해보니 더 놀라웠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흔한데 반해, 나는 비슷한 경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택시 기사에게 옷을 왜 그렇게 입었냐고 핀잔을 들어본 경험이 없다. 차를 직접 몰더라도 ‘운전 못하면 집에나 있으라’는 식의 폭언을 들은 적도 없다. 대중교통에서 누가 내 엉덩이를 만져서 소스라쳤던 경험도 없으며, 어두운 골목길에서 성폭행을 당할까봐 무서웠던 적도 없다. 그러니 그런 불쾌한 경험을 하고서, 지인에게 “옷을 그렇게 입으니 그런 일을 당하지” 따위의 헛소리를 듣고 말문이 막힌 적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근 지속적으로 공론화가 이어지고 있는 ‘데이트 폭력’ 사례들에서처럼,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맞아본 적도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게 되었을 뿐, 여성이 경험하는 현실이나 그 감정을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저 모르는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여성도 데이트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란다던 한 피해자 여성의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마침 만화를 조금 더 아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건넬 작품이 있다.

(오사 게렌발, <7층>, 우리나비)


스웨덴 작가 오사 게렌발의 <7층>은 실화다. 작가가 대학 시절 겪었던 고통스런 기억을 담아낸 이 이야기는 폭력에 물든 연애 경험이 어떻게 오사를 바꾸어 가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이 이 고통스러운 연애를 끊을 수 없게 만드는지를 충실하게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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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는 원래 ‘블랙 오사’라고 불릴 만큼 검정색을 좋아하는 여성이었다. 옷도 눈화장도 머리도 모두 까맣게 치장한 오사였지만 학교에서 뭇사람의 환심을 사는 ‘멋진’ 닐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표백되어간다. 그것이 닐이 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둘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닐이 원하는 대로,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오사는 친구들과 점점 더 멀어진다. “이제부터 너와 나만 생각해.” 이 달콤한 사랑의 말이 사실은 독점욕의 발로임을 독자는 금세 지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의 오사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닐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온 자아를 닐의 시선에 가둔 오사는 외양과 정신 모두 더 이상 오사가 아니게 되었다. “넌 변해야 한다고!” 닐이 말했기 때문이다. 검정색과 좋아하던 음반과 추억이 깃든 물건들까지 모두 버리고서, 오사는 닐을 만나기 위해 이전의 자신과 헤어져야 했고 사회에서도 멀어져야만 했다.

“닐은 내가 변하도록 도왔고 그렇게 변해감으로써 나는 마침내 그에게 인정받는 연인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남자친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오사에게, 닐은 더욱더 뒤틀린 사랑을 행사한다. 오사의 자그마한 몸짓 하나, 숨소리 하나가 모두 닐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숨을 한번 쉬었을 뿐인데도 닐은 오사가 그 순간 화면에 등장한 남자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년!” 오사는 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리 내지 않고 숨 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사의 염색한 검은 머리가 자랄수록, 그래서 검지 않은 머리가 더 길어져갈수록 닐의 폭력도 더 심해져만 갔다. “창녀”라는 심한 욕설에 오사가 참지 못하고 발끈하자 드디어 닐은, 오사를, 때렸다.

“규정1: 그가 날 때린다면 그를 떠날 것. 규정2: 그가 날 때린다면 그를 떠날 것.” 오사도 안다. 하지만 떠날 곳이 없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버린 오사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오사는, 오직 생각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사는 그렇게 믿는다. 바깥은 없다. 넌 “역겨워.” 넌 “끔찍해.” 넌 “저속해.” 닐의 말대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 오사와 “왜 자꾸 나를 돌게 해? 날 미치게 만들지 말라고!!!” 말하며 무너져가는 오사의 목을 더 세차게 조르는 닐만이 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오사에겐 그것밖에는 없다. 떠날 곳이란, 없다.

이렇게 끔찍한 연애가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끔찍한 연애가 그만큼 끔찍한 논리와 합리화에 의해 지속되었다면, 단절은 정말 갑작스럽게 기적처럼 비논리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여기까지 읽으며 지금까지 공개된 많은 데이트 폭력의 주인공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이 이별을 선택하기 어려웠던 이유, 공론화를 결심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7층> 안에 빼곡했다. 그들 스스로도 돌아보며 ‘바보 같았다’고 말하듯, ‘사랑’의 폭력 속에서 피해자를 붙잡아버린 주박은 경험해보지 않은 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이것을 나는 <7층>의 서사와 이미지 속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에게 다시금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기적처럼 없다고 생각했던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오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오사가 아버지와 여자 교수님에게 상황을 알리자 그들은 사려 깊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버지는 오사를 구출해 주었고, 교수님은 학교 내에서 닐과 만날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오사에게 병원에 가고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유한다. 의사의 진료도 경찰의 조사도, 이후의 재판도 모두 오사를 제대로 돕는다. 그렇게 일단락이 나고 오사는 샅샅이 흩어진 스스로를 주워 모은다. 재건은 너무나도 어렵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없다고 생각했던 떠날 곳과 함께, 그녀는 재건의 작업들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 작품, <7층>이 그 재건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래야 도처에 널린 닐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하며 갇혀있는 이들에게 바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창문 밖의 신호가 바로 <7층>이다. 뛰어내릴까를 고민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오사는 열어 보인다. 그녀들이, 떠나갈 바깥을.

‘떠날 곳이 있다.’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2015.6.26 송고

2015.7.7 <주간경향> 1133호


(오사 게렌발, <7층>, 우리나비)

(오사 게렌발, <7층>, 우리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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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협동조합 가장자리 세미나실(마포구 성지길 3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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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정보 및 신청: 가장자리 카페 http://goo.gl/l4FSRI


이끔이 : 조익상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만화평론가로 활동 중입니다.

 

 

<<세부계획>>

 

0‘만화난장 세미나’를 시작하며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만화 세미나에 관심을 가진 이유 등을 나누고 자유롭게 세미나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간새로운 제안들로 인해 배가 산으로 가더라도함께 가기에 기쁠 겁니다.

 

1텍스트를 만나기그래픽노블 두 편을 통해 만화를 읽는 몇 가지 모드를 살펴봅니다이끔이가 발제합니다.

- 엠마뉘엘 르파주『체르노빌의 봄』

- 안토니오 알타리바『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2타자를 만나기 1

- 완자『모두에게 완자가』동성애 담론을 중심으로 폭넓게 이야기 나눕니다.

 

3타자를 만나기 2

- 김보통『아만자』암환자/시한부 인생/임박한 죽음이라는 두려운 ‘타자’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4추억 속의 주체화 과정 톺아보기(소년)

- 타케히코 이노우에『슬램덩크』 외 추억의 만화들(세미나원들과 함께 정합니다.)이 어떻게 ‘나’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 보고 토론합니다.

 

5폭력/저항을 직시하기 1

- 오제 아키라『우리마을 이야기』 1~7: 밀양과 강정 등 국가폭력 이슈에 대해 토론합니다.

 

6폭력/저항을 직시하기 2

- 최규석『송곳』노동 이슈에 대해 토론합니다.

 

7추억 속의 주체화 과정 톺아보기(소녀)

- 박희정『호텔 아프리카』천계영『언플러그드 보이』 등 추억의 만화들(세미나원들과 함께 정합니다.)이 어떻게 ‘나’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 보고 토론합니다.

 

8텍스트 다시 보기앞선 세미나에서의 배움을 종합하며 이 시대의 고전인 『미생』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눕니다.

- 윤태호『미생』



시즌 1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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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자와 ''에 대하여



1.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이야기의 중핵으로 끌어안고 있는 만화를 우리는 최근 들어 적잖이 만났다. 죽음에 관하여(시니, 혀노)신과 함께(주호민)라는 걸출한 두 작품이 사후 세계라는 가상을 통해 그것을 다루었다면, 꼬마비의 죽음 3부작(살인자난감, S라인(이상 완결), 미결(미완))은 작품 속 현실에 흥미로운 변주를 가미하여 죽음의 구석구석을 사유해 보도록 이끈다. 황준호의 사이코패스 스릴러(인간의 숲, 악연)나 구아바의 옴니버스 처럼 죽고 죽이는 범죄 사건들을 통해 사람이 만들어내는죽음과 대면하게 하는 작품들도 있다. 여기에 윤태호의 미생-사석 편처럼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의 직장인이 죽임당한 직장인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담긴 작품을 떠올린다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의 리스트는 더 늘어난다.


이렇게 새삼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올 한 해 우리가 적잖은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데에 이유가 있지는 않다. 실은 가장 근래에 완결된 죽음에 관한 만화 아만자를 두고 이야기를 해 보려는 데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그 죽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아만자를 이야기하며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작품의 의미를 짚어내는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앞서 언급한 작품들에도 해당되겠지만,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때로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단 걸 새삼 상기하며, 아만자의 주인공이 살아간 삶과 그의 죽음을 보며 떠올린 글자 과 함께, 이 에세이를 써내려 간다.


Ⓒ김보통

그림 설명 보기▼

  아만자」 64화 아가’(2014.5.5.)는 세월호 참사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가는잃어버린 모든 분들께.” 보내는 작가 김보통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2. 죽음 앞에 선 아만자의 삶

 

제목이 지시하듯 아만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앞서 암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지배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선은 우리의 암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암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는 병이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매년 사망원인통계’(통계청) 1위는 늘 압도적으로 암이다. 나도 주변의 많은 이들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이러니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을 떨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현실의 사정을 리얼하게 반영하듯, 아만자의 암환자 자신에게도 암 선고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그는 4기 위암 환자다. 작품 속에서는 대화를 통해 짧게 분위기만을 제시하지만(3), 위암은 4기일 때 사망률이 95%에 육박한다.(연세대학교 의료원 암센터) 그렇기에 암 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당신은 곧 죽습니다.” 그렇게 얘기해 줬다면 좀 더 실감이 났을까.”(1)


이제 작품 속의 아만자는 죽음을 직면한 채로 살아야만 한다. “짧으면 세 달, 길면 기~하고 농담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저 농담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안다. 선고 이후로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숫자로 환산하는 일이 낯설지 않은, 암환자다. 이렇게 죽음과 잇닿은 삶이란 이전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삶의 모든 요소들이 다르게 지각되고 죽음 앞의 삶에 적용된다. ‘제한된시간에 대한 관념이 정신을 지배하고 병원이 일상의 공간이 되는 것과 같은 명백한 변화와 함께, 언어와 감각 그리고 감성 등 모든 인간적인 부분에서 격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격변의 이모저모는 아만자속에서 두 개의 세계를 통해 표현되고 의미를 만든다작품에서 도드라지는 두 시공간, 곧 일상의 세계인 현실과 모험의 세계인 내면이다. 두 세계가 교차하면서, 아만자는 앞서 언급한 죽음을 다룬 만화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읽기와 이해를 만들어 낸다. 서사의 진행 속에서 두 세계는 번갈아 출현하는데,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각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과 방식 그리고 두 세계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두 세계 가운데 처음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현실 세계다. 암 선고를 받고 가족과 마지막 집밥을 먹고 항암을 하는 등 현실적인 암환자의 일상이 그 속에서 그려진다. 초반부에서 농담과 정보를 버무려 독자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곳도 이곳 현실 세계다. 암환자의 일상은 선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적인 예를 그의 말하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그가 미래 시제로 하는 말은 계획이나 약속이 될 수 없다. ‘못할 것이다의 형태가 아닌 이상, 그것은 농담이거나 거짓말이거나 자조다. 여자친구에게 영국 여행을 들먹이는 순간이 그렇다. 하지만 미래 시제의 말뿐만이 아니다. 그의 갖가지 말이, 행동과 감정과 감각이, 장난이거나 자학이거나 위장이 되고 만다. 병문안 온 친지 앞에서 어른의 위로’(71화 및 여러 화)를 주고받는 것도, 병자성사를 위해 방문한 신부 앞에서 부리는 패악질(89)도 모두 그렇다. 유일하게 진실인 것은 고통의 감각을 표현하는 육체의 신음뿐이다. 이 표정과 비명이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핍진성을 지니고 있다면, 현실의 다른 언행과 감각들 이면의 진실은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바로 내면 세계, 즉 숲이다.

 

Ⓒ김보통

그림 설명 보기▼

 

아만자는 때로 초점화자를 여자친구나 어머니와 아버지 등 가까운 사람으로 바꾸기도 하는데이는 굉장히 적절한 사족이다이렇게 초점화자가 변화되는 부분도 두 세계만큼이나 그마다의 효과를 산출해내는 개별성을 지닌다이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로운 것을 논할 수 있겠지만적절한 사족이 되기 어려우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김철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아쉽지만 생략한다.

 




3. 숲의 알레고리

 

아만자가 초반부에 독자를 끌어들인 힘을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면, 중후반부터의 흡입력은 단연 숲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실 세계의 아만자가 서늘한 농담과 핍진한 고통의 몸짓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갔지만,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대부분 독자의 현실과는 판이한 투병의 기록이 그것만으로 계속해서 보편적으로 흥미롭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은 작품의 현실 속에서 가족이 겪는 (경제적) 고뇌의 일면을 드러내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 현실을 가상으로 지켜보는 독자에게도 역시 (미학적으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보통 작가는 데뷔작이란 게 무색할 만큼, 상당히 사려 깊고도 정교한 방식으로 길면서도 짧게 느껴지는 병의 여정을 그려낸다. 그것을 이룩하는 시공간이 숲으로 불리는 아만자의 내면 세계다.


숲은 모험의 세계다. 병원이나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아만자에게 정신(무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이 세계는 아만자의 분신에 해당하는 상징을 두고 있다. 불쑥 숲 속에 떨어져 모험을 이어가는 이 분신을 일단 순례자라 부르자. 숲 속에서 순례자는 마치 게임에서처럼 퀘스트를 실행해 간다. 그와 함께 독자도 나름의 퀘스트를 수행한다.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작업이 그것이다. 숲이 무엇인지 생경한 이름의 짐승들이 무엇인지 사막이 무엇인지 또 사막의 왕은 무엇인지를, 그것들이 현실 세계의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물으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 퀘스트는 녹록치 않다. 작가도 작품도 거의 힌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독법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상징화를 거부하는 작품의 몸짓은 여러모로 이야기의 흡입력을 키워나간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독자의 충동을 동력으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와 함께 알레고리의 효과를 산출해 내는 것이다.


상징과 알레고리는 유사하지만 상반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수사법이자 독법이다. 섬세하게 설명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는 벤야민의 논의를 빌려 둘의 도드라지는 차이를 총체/파편에서 착목하여 아만자를 읽어나가려 한다. 상징은 의미를 총체화하려는 충동과 관련 깊다. 십자가는 예수가 못박혀 죽은 로마제국의 사형대이지만, 기독교와 엮이면서부터는 기독교의 모든 것에 대한 관념과 지식을 환기하는, 즉 전체와 부분 모두를 지시하()는 기호로 쓰이고 있다. 반면 그리스어 allegoria(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를 어원으로 하는 알레고리는 전체를 상상할 수 없는 파편을 지시한다. 이미 깨어졌으며 그 전체상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잔해가 알레고리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 독법을 통해서 별자리처럼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폐허 속에서 주워 올린 이 파편의 알레고리는 특히 순례자마음을 읽어내는 데 유용하다.


순례자는 사막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찾으라는 비커리의 말대로 사막으로 향한다. 달랑쇠에 따르면, 마음도 순례자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에서 순례자의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과 만날 때마다, 작품은 동시에 아니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현실과 내면이 긴밀히 연관되는 장면이 그려지며, 마음 같은 것들은 두 세계에서 같은 대사를 하기에 그것을 모르지만 직관하는 순례자는 물론 그것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마음 같은 것들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작품은 까만콩이라 불리는 캐릭터를 통해 네 마음이 아니야라고 이르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밝혀지지만, 이 마음 같은 것들은 마음의 조각들이다.


그렇다마음의 조각은 마음이 아니다사막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아마도 마음의 조각들일 테지만무엇도 선명하지 않다어쨌든 마음이 아닌 이 조각들은 마음을 만나는 과정즉 알레고리의 파편과 그 별자리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룬다하지만 여정 마지막까지도 총체로서의 마음을 만났다는 확언은 순례자도 독자도 얻지 못한다마치 단일한 전체인 마음이란 게 존재하는지 묻는 물음처럼혹은 조각들을 만나며 그것이 의 마음이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듯이 침묵만이 크게 울린다아만자는 순례자와 독자에게 아만자의 이름만을 알려주고 모험을 마친다모험이 무엇이었고 숲이 무엇이었는지사막의 뜻과 사막의 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그 알레고리를 해석할 권한은 모두 순례자의 길을 따라나선 독자에게 열려있다누군가 그 열림을 닫아버리지 않는 한독자들의 수만큼 각자의 별자리가 발견될 것이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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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리는 늙고 병들거나심한 고생살이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여자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숲 세계의 가장 원로라 할 존재에게 이런 이름을 붙인 김보통의 작명센스는 확실히 보통은 아니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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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랑쇠는 필자가 아만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몹시 담방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달랑쇠의 농담은 더없이 침착하다.

 




 

4. 아만자와 우리들의 사회상, 혹은 별자리

 

어느 작품이든 그 작품만의 사회과 사회을 담고 있다. 전자가 작품 전반을 통해 포착·표현되는 현실 사회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작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혹은 조금이나마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이다. 그런데 작품 속 사회상은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 아만자속에서도 아만자의 사회상과 김철규의 사회상은 다르다.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그것도 여자친구의 그것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작품의 사회상은 이런 인물들의 사회상과 서사가 표출하는 사회상들의 합 혹은 충돌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지만, 작품의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수의 개별 사회상들이 모두 독자가 지니고 있는 두 사회상과 만난다는 점에 있다. 이 만남이 바로 작품이 현실 사회에 작용하는 과정이다. 만남이 의미 있다면, 독자는 자신의 사회상들을 작품을 통해 수정하고 그가 다시 바라보게 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때의 삶은 작품 속의 사회상을 만나기 전과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아만자와 그 아래 달린 댓글들(로 대표되는 독자 반응)은 그 만남의 과정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텍스트였다. 일단 작품 속에 담긴 사회상들이 개별적으로 또렷하고도 섬세하다. 또한 이 작품이 그 속의 사회상들과 독자의 사회상들이 잘 만나도록 이끄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흡입력과 핍진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독자들의 댓글에서 이는 방증된다.(특히 99화가 풍성하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사회상들을 상세히 논하기보다는 그 만남을 이루는 과정을 일부나마 다룬 것으로 일단 끝을 맺는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상징적 독해의 충동마저도 알레고리의 폐허로 가닿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하는 힘이 이 작품에는 있다. 그렇기에 나의 이해와 독해가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외려 방해가 되지 않기를 새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글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나는 아만자에서 죽음을 지배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선은 우리의 암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썼다. 그리고 그 전에는 이렇게도 썼다.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그 죽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아만자를 이야기하며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작품의 의미를 짚어내는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들을 사회와 그 사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썼다. 또한 죽음에 대한 만화뿐만 아니라, 암에 대한 만화를 최대한 접하고 그 각각의 개별성을 짚어보고서 이 글을 썼다. 썼듯이, 아마도 우리” ‘사회암에 대한 인식죽음과 직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통계도 경험도 진리그런 것이 있다면 보증하지는 않는다. 암을 이야기한 이전의 만화들은 오히려 죽음보다는 삶에 더 큰 방점을 찍어왔던 것도 그런 사회상이 존재하고 상상 가능함을 증명한다. 암환자의 자전적 만화인 오방떡소녀(조수진, 암은 암, 청춘은 청춘으로 출간)암이란다. 이런 젠장(미리엄 엥겔버그)이 보여준 긍정성과 삶에 집중한 사색은 드물고도 소중한 사례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아만자가 암환자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이전의 만화들에서 보려던 지점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는 데 다시금 의미가 있다. 그것은 지배적인 사회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 하는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일이었다. 아만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간 젊은 말기 암환자를 순례자삼아 그린 죽음으로의 모험은, 삶의 개별성만큼이나 소중한 죽음의 개별성을 충분히 이해 가능하도록 그려냈다. 특히 하나의 사막이지만 누구도 대신 걸을 수 없는 나만의 사막으로 제시된 알레고리는, 사막이 곧바로 죽음을 상징한다는 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답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단 한 번은 꼭 찾아온다. 또한 죽음은 각자의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랜 전언은, 모두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며 또 그 죽음을 공통적인 속성으로 껴안고 있는 우리네 삶을, ‘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읽은 사막의 뜻은, 이렇게밖에 말해질 수 없는 지난한 생각들이다.


올 한해 떠나간 이들의 개별적 죽음을, 나와 연결되어 있는 그 죽음을, 파편으로 그러모아 들여다본다. 기억의 부피와 무게만큼 빛나는 그 별자리는 어떤 뜻을 들려주고 있는가. 나에게 우리에게, 또한 이 사회에.


조익상

er라는 필명으로 <인문교양만화잡지 SYNC>에서 만화 비평을 썼다. <빅이슈><에이코믹스>, <BOGO>에 이런저런 만화 관련 글을 기고하면서부터는 실명을 썼다. 이렇듯 뭘 써야 할지 잘 모르는 채로 꾸역꾸역 공부하며 쓴다.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누를 끼치지 않기만을 소망하며.





이 글에서 언급한 작품들(가운데 출판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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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하다보니 서재에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그간 쓴 글들 앞으로 간간이 업데이트할게요.



이 글은 잡지 <BOGO> 5호에 실렸습니다.

인쇄매체에서만 볼 수 있는지라 서재 재개와 함께 가장 먼저 올려둡니다.

마감일과 분량 제한을 맞추느라 허술한 부분이 적잖습니다만, 언젠가 고칠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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