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송곳>을 건네는 법

 

혹여 외압에 영영 여기서 뵐 수 없게 될까 걱정했습니다.” 웹툰 <송곳>의 연재가 몇 개월 만에 재개되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송곳>외압을 가할 수 있는이들에게 얼마나 불편할지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외압을 가하는 이들의 힘이 강력하고 또 두렵다는 것 역시 읽힌다. 이처럼 힘 있는 자가 보기에 불편할 내용이 담긴 SNS 게시물에는 이거 이러다 잡혀가는 거 아냐?” 하는 댓글이 종종 달린다. 같은 맥락이지만 위트와 결기가 조금 더 담긴 댓글도 눈에 띈다. “판사님 저는 이 글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론 억압을 드러내는 풍자이고, 한편으론 발언에 지지를 보내는 용감한 연대의 행위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시대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조금은 과한 염려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유의 억압과 탄압은 크게 두려워할 일이 못된다. 실제로 잡혀가는이들은 대개 권력에 반하는 실천을 꾸준히 해왔던 이들이다. 어떤 을 해서 잡혀가는 경우는 그 말이 실천으로서 큰 힘을 가지게 되는 경우, 혹은 그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본보기에 가깝다. 이를 위해 국가의 힘은 명예훼손이니 유언비어니 하는 식의 제압 방식을 선보인다. 하지만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처럼 노동자를 향한 전단지를 뿌렸다고 잡혀가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말에 대한 재갈은 지금 시대에는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워할 일은 우리의 말이 우리 사이로 퍼지지 않는 일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말은 마음 맞는 소수 사이에서만 맴돈다. ‘진보혹은 보수라는 딱지가 붙은 반쪽도 못되는 우리 사이에서, 혹은 문화가 공유되는 각 세대 사이에서, 아니면 성향과 언어가 제각각인 커뮤니티 안에서만 말이 통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말은 대개 정치색없는 따뜻한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귀여운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 말이 경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퍼질 때는 반대와 조롱을 위한 인용일 때가 대부분이다. 이 불통의 구조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말들이 적잖이 힘을 잃고 만다.


많은 화제를 낳으며 드라마로도 방영 중인 <송곳>, 그런 면에서 보면 작품의 힘이 충분히 발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시청률 집계 방식에 허점이 많긴 하지만, 2% 정도의 시청률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현재 웹툰으로 연재 중인 <송곳> 4부의 일간 순위도 28개 작품 중 18위다.(조회순) 일견 잘 나가는 듯 보이고, 잘나갈 이유가 충분한 이 작품이 이처럼 독자-시청자 일부의 사랑만을 받는 것이 나는 무척 불만이다. 이런 상황을 둘러싼 현 사회의 불통 구조가 녹록치 않다 해도, <송곳>은 그것을 뚫어낼 만큼 힘 있는 작품이라고 믿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여, <송곳>을 서로에게 건네는 법을 짧게 정리해 본다. 하고픈 말이 워낙 많은 훌륭한 작품이지만, 지금 많은 이들이 보아두어야 완결 후에 나눌 이야기가 더 풍성해 질테니까.



<송곳>을 건네려면 먼저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에 매혹된 사람만이 건네고 싶어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선결 과제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송곳>을 몇 회만 본다면 모르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가치와 의미가 너무 무겁고 힘겨워서 피하고 싶어질 수는 있다. 그럴 때는 작품 전체보다 부분 부분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를테면, 수두룩한 명대사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가치를 부여하면, 그것이 <송곳>인 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이거다. "지는 건 안 무서워요. 졌을 때 혼자 있는 것이 무섭지. 그냥 옆에 있어요. 그거면 돼요." 삶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이 대사 후로 나는 <송곳>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다음. 그 가치와 의미를 우리에게 낯익은 언어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수인처럼 고지식하게 접근해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를 위한 가장 구고신 소장다운 방법은 <송곳>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의 대사처럼 권력에서 멀수록 권위를 사랑하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권위뿐만이 아니다. 작가나 인물의 외모도, 혹은 쓰면 쓸수록 애매한 문학성이나 재미와 같은 말들도 쓸 수 있으면 쓰는게 답이다. 노벨문학상 받은 작가의 작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도, 지인들이 재미있다는 영화가 보고 싶은 것도 다 인지상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는 최고 권위자중 한 분의 말을 옮긴다. 모 일간지 대학 평가 2위에 빛나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교의 국문학과 교수님께서 SNS에서 하신 말씀이다. “<미생>이 좋았지만 비교할 바 아니라 생각한다. 동어반복적인 한국의 문학상 한둘 쯤은 주옥 같은 대사가 쏟아지는 이 작품에 수여되어야 한다고 본다.” 과연 그렇다.


또 하나, <송곳>의 용법을 알고 그 안에서 써야 한다. 오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주목받기만 하면 바로 오용되고 만다. 키워드 검색이니 뭐니 해서 전혀 관련 없는 데서 송곳’, ‘송곳 이수인’, ‘송곳 결말등의 말들이 등장한다. 질 나쁜 낚시질이다. 하지만 저질 언론만이 이렇게 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송곳> 속 노동탄압이 노무현 정권 때 일어난 일이라며 욕하고, 다른 이들은 <송곳>의 이수인을 보며 원칙주의자노무현이 생각난다고들 말한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품의 한 부분을 활용하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우리 모두를 위한 노동권이라는 작품 전체의 주제가 퇴색되고 만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건네는 일이다. 그냥 보라는 말도 좋지만, 책을 선물하는 건 더 좋겠다. <송곳>이 드라마로 나온 덕에 TV를 같이 보는 일도 건네는 일로 충분히 값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같이 보자고 말 걸 대상과 나의 관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라는 구고신 소장의 말은 참으로 실용적인 진리다. 내가 옳고 <송곳>이 옳다고 해도, 좋지 않으면 안 들린다. 그러니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권하는 게 최선이다. 노동자인 엄마와 아빠에게, 알바생인 동생에게, 신입사원이 된 친구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책을 사주거나, 같이 드라마를 보자고 권해 보는 거다. 그 후의 반응에 따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토론도 해본다면 가장 좋겠다.


빠트린 게 적지 않겠지만 노파심에 이것만큼은 말해둬야겠다. 우리의 건넴은 <송곳>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송곳>을 건넨 이의 노동하는 삶을 위해서이고,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어갈 노동하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다. 송곳을 받아 쥐었다고 모두가 찌르고 다니라는 법은 없다. 내 송곳을 품은 채로, 여분의 송곳을 건네 보자. 그렇게 모두가 송곳을 쥐고 있다면, 노동 탄압은 겁나서라도 못하지 않겠나. 그렇게만 된다면 권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송곳>의 말들이 우리 모두의 사이로 흐르게 하자. 두려움을 안고, 조심스럽게. 송곳을 건넬 때는 손잡이를 상대방 쪽으로 향하게 해야 하니까.


2015.11.5 송고

2015.11.17 <주간경향> 1151호





www.tagxedo.com에서

이 글로 만들어본 단어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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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우리가 함께 진실을 궁리하려면. <빨간약>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를 가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19대 대선이 부정선거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해도 가리기 어려운 주장과 논점이 난무한다. 같은 주장을 하는 쪽이라 해도 그 안에는 음모론에 가까운 목소리와 적절한 문제 제기라 할 목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 어려움과 혼란스러움이 정리된 이상적 상태를 우리는 때로 진실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진실은 달성되기 이전, 추구의 대상으로 호명되는 데서 머무른다. “진실을 규명하라”,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은 진실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지시한다. 특히 어떤 진실을 갈망하는 이가 소수일 때에, 진실은 더 멀고 먼 곳에서만 머문다.


이는 누군가는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의 슬픈 사실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혹자는 진실을 은폐해야 할 필요가 있고, 혹자는 진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지금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기에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이다. 아니, 지금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처해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을 향해 말을 거는 만화책이 나왔다. 부제부터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하여. 제목은 심지어 <빨간약>이다. 제목과 부제가 한데 어우러져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혁명 세력의 수장 모피어스가 파란 알약과 함께 내민 빨간 알약, 그것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된다.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하고, 비로소 자신이 살던 세계가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세계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장면과 그에 이어진 영화의 이야기는 네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내게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의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였다. 세계에 내가 모르는 어떤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의 틈이 열렸고, 따라서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세계에서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관찰하게 되었다. 어쩌면 공부하는 사람이 된 결정적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처럼 강력한 이야기에 기대어 책 제목을 지은 <빨간약> 속 여섯 만화는, 네오에게 작용한 빨간 알약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내게 작용한 그 이야기와 같은 싹을 틔운다. 한국 사회의 진실을 궁리하게 하는 싹을 말이다.


진실의 궁리라는 측면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한수자 작가의 <두 할머니>. 50여년 전에 북한에서 남파되어 남한 땅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두 할머니를 작가가 찾아간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생각과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인터뷰가 아닌 르포 만화답게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표정을 과감히 드러낸다. 그 가운데 제기한 그의 물음은 진실을 향한 첫걸음으로 더할 나위 없다. “그분들 말씀이 허황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만큼 / 우리가 북한의 실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지 않나?” 이렇게 물꼬를 튼 진실에 대한 궁리는 북한을 경유해 작가가 살고 있는 남한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하던 작가는 이제 일상의 현실 속에서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선 이들의 계기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계기는 다시 보기다르게 보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 다르게 보기는 대개 이해 불가능한 만남에서 비롯한다. ‘와는 어떤 사안을 달리 보고 있는 어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다름을 깊이 지각할 때, 혹은 어떤 큰 사건 앞에서 더 이상 가 보던 방식으로는 세계를 보는 일이 불가능해졌을 때, 다시 다르게 보아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아닌 타자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진실의 확인 과정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알기 전의 와 진실을 알고 난 후의 는 다른 존재다. 또 새로 알게 된 사실을 통해 나의 앎을 비추어볼 때에야 진실을 향한 길이 열린다. 한수자 작가는 의문다시 봄과 함께 그 길에 들어서며 독자들에게 같이 걷자고 작품을 통해 손짓한 것이다.



김홍모 작가의 <진짜 간첩>은 또다른 방식으로 손짓한다. <두 할머니>의 두 통일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오래전 남파되었던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씨와 만나서 나눈 대화를 담은 이 작품은, 그 대화를 만화만이 그려낼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한다. 이 독특한 기록의 표정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표정을 최대한 지우는 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눈코입이 없는 얼굴이 말풍선을 통해 말할 때, 독자는 그 얼굴과 말풍선을 함께 본다. 그냥 글과는 달리 얼굴이 있고 보통 만화와는 달리 표정이 없는 얼굴에서 들려오는 말풍선 속 이야기는, 따라서 독자에게 최소한 세 가지 이유로 색다르게 들려온다.


먼저 만화가 뽐낼 수 있는 표정 묘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신뢰감을 준다. 만화 속의 인물이 부드러운 표정이나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오히려 말풍선 속의 말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계몽이나 설득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작가는 그저 이 간첩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들려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또한 지각되면서 독자는 판단의 주체가 된다. 다음으로 독자인 우리의 모름이 중층적으로 밝혀진다. ‘간첩이라던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점을 이 만화의 얼굴은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눈치 챌 때, 우리가 간첩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비로소 의심의 대상이 된다. 또 우리가 그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건조한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될 때, 그 얼굴과 표정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표정 없는 화자와 마찬가지로 표정 없는 청자를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표정을 스스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어떤 표정도 요구되지 않기에 독자는 비로소 말풍선 속의 낯선 주장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기록의 표정은 따라서 독자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을 가둔 사회에 대한 진실을 궁리하게 하는 전권을. 이것이 김홍모 작가의 손짓이다. 마지막에 사진을 매개로 하여 그려진 표정은 작가의 궁리 도중에 스친 하나의 진실을 담아낸 따뜻한 사족일 뿐이다.


더 이야기해야할 작품이 많지만 작품들 모두의 공통점을 부각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여섯 작품의 손짓 방식과 힘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진실을 궁리하는 작가 스스로의 모습을 등장시켜 그 자신의 손을 흔든다. 그리는 이가 작품 속에서 자신을 그리며 그 경험과 생각을 밝히고 나선다는 사실은 의외로 중요하다. 그들은 마치 <매트릭스>의 모피어스처럼, <빨간약>을 들고 <빨간약> 속에 등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과 달리, <빨간약>은 확고한 어떤 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우리의 진실을 함께 궁리하자고 청한다. <빨간약>의 모피어스들은 그들의 진실을 곧바로 말하지 않는다. 다른 진실을 믿고 있거나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 그들 가까이 서서 함께 진실을 궁리할 필요를 제기할 뿐이다.


나는 이 겸손하고 솔직한 말 걸기가 참 좋다. 이들 작가들은 자신도 진실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바로 그것을 망각하고 상대방을 향해 날선 말을 내뱉고 있는 사람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더 흔한 시절에, ‘우리안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무엇을 향해 진실을 함께 궁리해 보자고 말하는 이들의 방식은 참으로 값지다. 고맙고 반갑다. 그리고 참으로 나누고 싶다. ‘우리를 향한 이 섬세한 손짓을.


2015.9.3 송고

2015.9.15 <주간경향> 1143호



2015년 11월 4일 작가와의 대화 안내 포스팅. 사회를 제가 봅니다.

http://blog.aladin.co.kr/literaturer/7886581


빨간약, 김홍모, 한수자, 김수박, 김성희, 권용득, 마영신, 보리,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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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 만화 세미나에서

빨간약 작가와의 만남을 기획했습니다.





[작가와의 만남] 

권용득,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마영신, 한수자와 함께 하는 《빨간약》 복약 설명회


《빨간약》 출간 뒤 석 달이 지났습니다. 

그간 약발은 좀 받으셨는지, 약장수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작가 6명이 총출동한 가운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25명의 독자를 모십니다.

《빨간약》 안팎의 못다한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들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곳: 협동조합 가장자리 옥상 세미나실 (합정역 7번출구에서 걸어서 7분)

 서울시 마포구 성지로 36 (합정동 375-11)

-참가 신청: 구글드라이브 신청 http://goo.gl/forms/MCYkByzBnv


-참석 인원: 25명

-문의: karen@boribook.com (보리출판사) / bords2015@daum.net (가장자리)/ 트위터 @lit_er (만화난장 세미나 이끔이)

-주최: 협동조합 가장자리 (만화난장 세미나 팀), 보리출판사


빨간약, 김수박, 김성희, 마영신, 한수자, 권용득, 김홍모,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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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는 이들이 있다.

 

얼마 전 벌어진 드레스 소동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와는 다르게 보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드레스에서 누군가는 파랑과 검정 무늬를 보고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 무늬를 본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밝혀졌을 때, 다른 자명함은 빛을 잃는다. 바로 내가 본 것()'진실'이라는 믿음의 자명함이 그것이다.

 

전 지구인을 거의 반반으로 가른 드레스 소동은 곧 과학의 언어에 의해 수습된 듯하지만, 사실 이 세계는 좀처럼 수습되지 않을 소동 혹은 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밀양에 송전탑을 건설해야 한다/건설하면 안된다. '종북'이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다/대한민국을 좀먹는 것은 '종북'을 팔아먹는 이들이다 등등. 물론 이런 여러 인식은 어느 한쪽이 대세가 되고 다른 한쪽이 수세에 몰리면서 누군가에게는 이미 끝난 논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어느 논란이고 수세측은 꽤 오랫동안 자신들의 견해를 유지하며 열세의 싸움을 지속하기도 하며, 그 와중에 어느 순간 형세는 뒤바뀔 수도 있다.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야만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세였던가. 제국의 식민지 경영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가. 여성의 정치권과 사회적 권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제한되어 왔던가. 흑인을 노예로, 다른 민족을 한 민족의 착취 대상으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혹은 보조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판치던 세월이 인류의 역사에서 훨씬 더 길었다.

 

앞서 말한 예들은 너무 가깝거나 너무 오래된 이야기일 수 있겠다. 그러니 조금 멀리 있는 지금의 이야기를 해 보자. 화두는 '체르노빌'이다. 무엇이 떠오르는가? 방사능, 공포, 죽음, 폐허... 1986년 원전 폭발 참사 이후로 체르노빌은 우리에게 끔찍한 여러 이미지를 동반하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직접 가보지 못했건만 우리는 그곳에서 죽음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 2008년에 체르노빌에 직접 찾아간 프랑스 만화가 엠마뉘엘 르파주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참상을 그림과 예술로 증언하기로 동료들과 결의하고 체르노빌 방문을 준비하던 그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체르노빌에 대한 책들은 모두 죽음을 말하고, 가족은 방문을 만류하며, 작가 자신도 손이 마비되는 증상을 겪는다. 그곳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의 위험을 직접 보고 그것을 그려서 알리기 위해 결국 체르노빌에 발을 들인다.

 

방문 초기에 그가 본 것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금지구역에 들어서자 인간의 흔적이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황량한 도심 풍경이 그의 앞에 펼쳐진다. 당연하게도 그는 그 장면들을 모두 무채색으로 스케치북에 옮긴다. 하지만 잿빛으로 이어지던 그의 스케치북에 색깔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체르노빌 사람들의 의외로 밝은 표정이 유채색을 입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금지구역의 숲에서, 르파주는 색깔을 발견하고선 너무나 아름다운 총천연색의 그림을 그리고 만다. 그 스스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과 그것이 담긴 스케치북을 보며 그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괴상하고 흉측한 나무와 검은 숲을 상상했다. / 그래서 검은색 파스텔과 어두운 잉크 목탄을 준비했다. / 그런데 찬란한 색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체르노빌이 아닌가!”

 

 

르파주는 그렇게 고뇌하면서도 솔직하게 그렸으며, 그리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그가 본 것에 대해, 그가 보여주게 될 것에 대해. 그렇게 현지에서 그린 그림은 그가 프랑스에 돌아와 그 경험을 전적으로 재구성해 내놓은 작품 󰡔체르노빌의 봄󰡕에 담겼다. 제목부터가 이율배반인 이 작품에서 우리는 체르노빌이 그저 죽음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그림의 증언을 본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 두터운 고뇌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겹겹이 발견된다. 그 일말을 내 식으로 셋 정도만 정리해 본다.

 

하나, 보는 것과 해석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스스로 해석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꽤나 자주 누군가에 의해 이미 해석된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르파주는 열아홉 살의 자신이 처음 TV를 통해 목격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의 인상을 전한다. 그 이야기는 국가가 해석한 이미지를 우리가 본다는 것을 정확히 증언한다. 사고에 대한 소련의 초기 발표는 사망자” “겨우 두 명이었지만, 소련과 냉전 중이던 서방 세계의 관측은 희생자” “수천 명이었다. 또한 원전이 즐비한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프랑스는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다. 이미 발생한 비극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 만들고, 자국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비극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프랑스는 체르노빌 원전을 노후한 것으로, 자국의 원전은 첨단의 것으로 그려냈다.’ 이처럼 해석한 것보게만드는 정치가 우리가 보는 것에 도사리고 있다.

 

. 자신이 본 것을 해석해서 보이게 만드는 누군가는, ‘보여주기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자국중심주의로 점철되어 있던 국가들과 달리 르파주가 체르노빌을 보여줄 때 지킨 윤리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이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연은 인간의 손을 벗어날 때 가장 아름답다는 깨달음이다. 위 그림은 한 공간을 시간을 반영해 그만의 시각으로 보여주면서 이 깨달음을 전달한다. 참사 이전 숲의 과거는 잿빛 도로로, 참사 이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숲이 우거진 지금은 역설적으로 총천연색 자연으로 그려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 자연이 제 빛을 회복했지만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위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방사능 측정기 소리를 비롯한 다양한 장치를 통해 가시화했다. 솔직하게 보여주면서도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라고 요청하는 이 태도는, 국가의 보여주기와는 전혀 다른 윤리에 기대고 있다.

 

마지막. 그가 폐허에서 발견해 윤리적으로 전하는 의 희망은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꾸준히 쌓여온 것이다. 또한 쌓여갈 어떤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란 낙관론이 아니다. 시간은 그저 흘렀을 뿐이고, 인간의 대세에 억눌렸고 결국 원전 폭발로 오염되고 만 수세의 자연은 그 비참에서도 회복해 나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 상식이 된 많은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 동안 수세의 인식이 대세의 인식을 설득해 내고 이겨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을 논쟁적 사안으로 만들고 다시금 전혀 반대로 당연한 인식을 만든 것은, 자신이 본 것을 끝까지 믿고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대세와 '다르게 보던' 이들이다. 르파주도 그들 중 하나다.

 

이제 다시금 가까이 있는 지금을 본다. 후쿠시마를, 더 가까이는 최근 연장운행이 결정된 월성1호기가 있는 전북 김제를 본다. 지금 보여지는 대세는 분명 국가의 해석이다. 일본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는 이들이 있다. 또 달리 보게 만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나도 인간이다"라고 외친 흑인/여성/피식민자와 "너도 인간이구나"라고 새롭게 본 백인/남성/식민자의 합작이 그나마 차별이 덜한 세계를 만든 것처럼, 원자력 발전 문제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이들과 다르게 보는 이들이 원자력 참사가 없는 세계를 향해 걷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르게 보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고, 다른 목소리에 귀를 열어둔 사람들이다. ‘월성의 봄이 언젠가 이율배반의 표현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건다.

 

2015.3.5 송고

2015.3.17 <주간경향> 1117호

 

 

* 이 글 후에 <체르노빌의 봄>으로 쓴 다른 글의 링크도 달아둡니다. 기나긴 글입니다.ㅎㅎ

-> <체르노빌의 봄>이라는 재난만화의 안과 밖, 크리틱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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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맞아도 되는 사람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줄여서 인권위라고 부른다. 국제인권법을 각 국가 안에서 실현하자는 UN의 취지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선 2001년에 출범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권을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기관인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게 중평이다. 이렇게 굳이 설명해야만 할 만큼, 인권위는 그 이름값 하는 의미 있는 활약을 펼친 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의미 있는 부실만 돋보였던 것 같다. 촛불시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5개월 늑장대응, 용산 참사에 대해 인권위가 의견을 제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일방적으로 폐회하면서 불거진 기존 상임위원들의 사퇴 등등.

 

작년과 올해도 인권위의 부실한 활약은 이어졌다. 작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광화문 대로를 걸었던 날, 인권위 소속 조사관 몇 명도 전경의 시민에 대한 인권침해를 감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인권위 조끼를 입은 그들은 너무 적었고 또한 무기력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전경의 무리한 진압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조사관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무력했다. 전경들은 인권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131일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에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집행이 막무가내로 과격하게 진행되어 부상자가 속출한 와중에 인권위 조사관까지 용역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정 주민들은 제 일처럼 지적하고 분노하는데도 인권위에서는 아직껏 별 말이 없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인권위 비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인권위를 무척 좋아한다. 2003<십시일반>, 2006<사이시옷> 등 인권 만화집을 펴내며 한국 만화와 인권 모두에 기여했던 인권위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심을 접어두더라도 이번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인권위 조사관이 용역에게 맞았던 일에는 나도 강정사람들이 그렇듯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2013년에 출간된 세 번째 인권 만화집 <어깨동무>에 실려 있는 만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려 한다. 제목도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맞아도 되는 사람". 네이버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 작품이다.

 

작품은 비교적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노동자들이 당한 참담한 폭력을 보여준다.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업 이름들을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2006년부터 2012년 동안 실제로 있었던 폭력의 상황들이다.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덮쳐온 자동차에 조합원 13명이 크게 다쳤다.” 2010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용역경비업체 직원 차량에 당한 일이다. “경찰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했고, 소화기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참가자 한명이 사망했다.” 2006, 포항건설 노조원 하중근 씨의 죽음이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옥쇄파업에 대한 강경진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내레이션이다.

 

노동권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이처럼 용역과 전경 등에 폭력을 당할 때, 노동권 문제는 인권 문제로 확장된다. 하지만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맞은 사람맞아도 되는 사람이 될 때, 인권은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로 축소되고 만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이렇게 만인이 누릴권리인 인권을 누리지 못해도 되는사람이 여기저기 존재하는 사회, 그것을 겨냥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마 이런 이유들을 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분노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효과도 함께 밝혀두자. 먼저, 언론이 알리지 않아서 몰랐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도 침묵한다.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니까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다. 둘째,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런 일에까지 분노한다면 화낼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때마다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거침없이. 셋째, 당할 짓을 했으니까. 가장 문제적인 경우일 것이다. 최규석 작가가 넘어서고자 하는 인식일 터이고. 그의 설명은 이렇다. “정부와 언론은 끝없이 그들이 맞아도 되는 이유들을 설명하고 우리는 이해당한다.” 그러면서 당할 짓을 만드는 이유의 목록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넷째, 분노해봐야 나만 손해니까. 솔직하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다. '작은 폭력'은 가해자도 작아서 윽박지를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폭력'에 움찔했다간 나도 맞는다. 폭력 자체는 교정되지 않고 나만 폭력의 피해자로 편입된다는 두려움.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침묵한다. 우리의 침묵을 발판 삼아 '거대한 폭력'은 계속된다.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만 더 지목하자. 내 삶을 꾸려가기에 바빠서. 사실 그렇다. 자기 가족이 아닌 이상, 어린이와 여성과 반려동물의 피해에도 우리는 댓글과 인터넷 포스팅 정도로밖에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문제에, 모두가 떠들지도 않는 이슈에, 허구헌날 일어나는 일에, 당할 짓을 한 사람들의 당함에, 후환까지 두려운데 무슨 분노를 한단 말인가. 분노는 표출되지도 끓어오르지도 싹을 틔우지도 않는다. '내 삶'을 꾸려가기 위해 우리는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람들, 그것이 이 만화의 제목이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름이다.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이번에는 인권위 조사관까지도 맞아도 되는 사람의 반열에 올랐다. ‘맞아도 되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도록 활동해야 하는 인권위가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그 스스로 맞아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 이 지독한 패러독스. 인권위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음으로 맞아도 됨을 인준하고 있지만, 오히려 강정 주민들은 조사관이 맞았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맞았다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발화하는 것이야말로 맞은 사람이 맞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말한다. 사실 강정 주민과 활동가들은 세월호·쌍차·용산·밀양 등이 맞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언해왔다. 그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면 정말 그렇다. 인권위 조사위원이라서 맞았다고 호소한 게 아닌 것이다. 또 하나의 패러독스다. 늘 맞는 사람들이 누구도 맞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외치는 이 상황.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맞았다고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이미 여러 대 맞은 사람인 이 상황. 궁금하다. 그들이 우리처럼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할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다시, 우리에게 묻자. 이런 패러독스의 사이에서, 별로 맞아보지 않은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형상 앞에서 분노하고 움직이는 것을 선택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이들 앞에서, ‘인권위가 무력하고 무기력한 오늘날의 인권과 함께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2015.2.12 송고

2015.3.3 <주간경향>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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