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조직이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최고의 인재들이 많으면 그 조직은 최고의 성과를 낼까?

 

자, 한번 생각해 보자.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최고들의 모임도 아니고 스스로도 최고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 조직은 성공하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또 팀장의 입장에서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으면 리더십이 잘 발휘될까? 그렇지 않다. 물론 최고의 인재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모니, 즉 조화다.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을 보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고 합창단원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유명한 오케스트라인 비엔나 필과 베를린 필을 예로 들어보자. 비엔나 필이 배출한 지휘자를 우리는 거의 모른다.

 

반면 베를린 필의 지휘자 하면 카라얀이 딱 떠오른다. 왜 그럴까? 카라얀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엔나 필은 연주자 한 명 한 명이 세계적인 연주자들이다. 이들은 연주가 있을 때마다 그 연주에 합당한 지휘자를 자신들이 직접 고른다. 비엔나 필의 지휘자는 리더가 아닌것이다. 그런데 비엔나 필 못지않게 실력이 뛰어난 베를린 필의 지휘자는 리더다. 바로 카라얀이 그렇게 만들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표상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지휘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케스트라 그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미복을 입은 카라얀은 오케스트라 바로 앞에 서서 지휘함으로써 지휘자를 오케스트라의 '핵심 인물'로 위상을 높였다. 카라얀은 단원들을 '조화'시켰다. 단원들 각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들이지만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자기의 음색보다는 전체의 조화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베를린 필의 연주는 세계 최고가 되었다.

 

우리 팀의 조직원들이 세계 최고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면 리더십은 애초에 필요 없다. 최고의 자본을 들여 최고의 인재를 모으면 최고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직은 조직의 파워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인재가 모이지 않아도 일류가 된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조직원들도 마찬가지다. 팀에서 눈에 띄어야 훌륭한 팀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좀 능력 있다고 혼자만 튄다면 그 사람은 능력자가 아니라 팀의 방해자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최고의 조직원이다.

 





- 역사 속 9인의 리더에게 배우는 평생 경쟁력, 서른살 리더십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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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나르시스트에 관한, 공주병,왕자병에 관한 나르시스트적 심리라는 글을 포스팅 했었는데요, 약간 다른 견해의 글을 읽게 되서 연달아서 포스팅 합니다^^! 저 역시도 나르시스트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만 떠올랐는데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얼마 전에 중학교를 졸업할 수 없을지도 모를 위기에 빠진 아들에게 공부의 의미를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약속장소로 가니 아들이 벽에 기대어 코난 도일의 책을 읽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에 지닌 책은 너덜너덜 했었다.

 

“코난 도일을 좋아하니?”

 

라고 물었더니 아들은 “뭐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그 책 몇 번 읽었니?”라고 물었더니 의외로 처음 읽는다고 했다. 중고서적을 샀느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가지고 있었더니 어느 샌가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너 말이야. 코난 도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코난 도일을 읽고 있는 네 자신이 좋은 거지?”

 

그러자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아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요?”

“당연히 알지. 나도 똑같거든.”

 

그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코난 도일을 읽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 요컨대 나르시스트인 것이다.

 

내가 나르시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르시스트가 되는 것은 남자에게 중요한 일이다. 사실 나는 매우 태도가 불량한 택시 운전기사를 만나더라도 내릴 때에는 반드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가끔 같이 타고 가는 사람에게 ‘훌륭하시네요’라는 말은 듣는데 아마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내가 감사의 말을 전하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 말이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신이 좋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한다. 아들의 코난 도일과 나의 감사의 말은 같다는 의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 얼마나 멋진 놈인가’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르시스트란 매우 멋있는 것이다. 게다가 나르시스트의 경우 스스로를 바라보기 때문에 남이 보든 말든 그렇게 한다. 나르시스트인 나에게 가장 업무의 진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별로 보잘 것 없는 찻집이다. 보잘 것 없는 찻집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나 자신은 매우 멋있다. 그래서 일이 잘 된다. 바보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찻집이라고 하더라도 고급 호텔의 라운지에서는 그런 기분이 나지 않는다. 왜냐면 고급 호텔의 라운지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열심히 일하는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별 의미가 없다.

 

나르시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커피의 맛도 호사스러운 인테리어도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음식이 맛이 없고, 피곤해 하는 중년 남자들이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는 찻집에 문턱이 닳도록 다니는 이유다. 그 찻집에서는 내가 압도적으로 멋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 도넛의 구멍(야스다 요시오 지음, 정선우 옮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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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화랑을 하는 한 친구는 처음 전시회를 여는 화가들이 성공적으로 데뷔해 모든 작품을 팔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팔리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많이 팔리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성공은 예술적 능력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 친구의 주장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화가에게 세상의 모든 행운이 다 돌아가길 바라지만 동시에 너무 일찍, 너무 쉽게 인정을 받다 보면

 

그들의 예술이 힘들어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엘링 카게,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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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년 나르키소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려고 매일 호숫가를 찾았던 나르키소스는 결국 자기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호수에 빠져 죽고 만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그의 이름을 따서 나르키소스(수선화)라고 불렀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이 전설의 전해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르키소스가 죽고 난 뒤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를 찾았다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정들은 호수에게 “가장 가까이서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을 보았으니 슬퍼할 만하군요”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호수는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라고 반문한다. 자기가 슬픈 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걸 볼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이다.

 

결국 호수도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것이다.

 

 

이것이 비단 신화나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는 나르키소스나 호수처럼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위 ‘공주병, 왕자병’ 환자들이 수두룩하다. 요즘은 이게 욕도 아니다. 병이란 ‘병적 증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것임에도, 공주병, 왕자병은 ‘미남이다. 미녀다. 잘생겼다. 호감이 간다’와 같은 의미로까지 통용된다.

 

집집마다 아이가 많지 않다 보니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키우는 부모들이 많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성장해간다. 때문에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아이처럼 자신 밖에 모르는 ‘어른아이’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이런 이들은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를 해도 항상 자기가 중심이다.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헌신해야 직성이 풀린다. 상대를 이래라 저래라 자기 위주로 몰아간다. 결국 이것에 질린 상대는 떠나버린다. 나르시스트들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상대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정작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물론 자신을 경멸하고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자기애가 강한 게 나을 수도 있다. 적절한 자기애는 높은 자아존중감으로 연결되어 매사에 긍정적인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가 지나쳐 모든 게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환상에 빠질 때다.

 

예를 들어, 이런 부류가 상사라면 아주 피곤하다. 이들은 부하를 부려먹는 사람 정도로 취급하므로 상대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착취한다. 주말에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 “○○씨, 보고서 작성해서 월요일 아침까지 제출하세요”, “지금 당장 회사에 출근해서 A회사에 보낼 상품 기획안을 작성하세요”라는 식이다.

 

 



 

대표적인 유형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미란다 같은 직장상사다. 이런 이들은 ‘나는 상대의 기분을 맞출 필요가 없으며, 상대가 나에게 맞춰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직장생활에서뿐만이 아니라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들은 밀림의 법칙에도 철저해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그래서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끝없이 착취하려고 든다. 의외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회적 성공을 거머쥐는 것도 그 약삭빠름과 잔혹함 때문이 아닐까.

 

 

 

 

심리학에서는 이런 정신적 결함을 ‘나르시스트적 성격장애’ 또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말 그대로 인생의 쓴맛을 좀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좌절과 실망과 상처를 겪어보고, 인간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랑받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보호만 받았던 이 ‘미성숙한 아이’는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 성인의 대인관계에서는 인정받기가 어렵다. 그러니 명품으로 자신을 포장하기에 몰두하거나 특정 종교를 광신적으로 맹신하기도 한다. 무엇인가에 미친 듯이 매달림으로써 자기애를 특정 대상에 투사(Projection: 자기 안의 나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남의 탓으로 돌리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 내가 아닌 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르시스트적 성격이 강한 사람과는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할까? 일단 거리를 두고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상대를 감정적으로 부풀리고 존중하면서 접근해오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크게 호응해주지 말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나아가 내게 이런 성향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내게 숨겨진 열등의식이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원하는 건 ‘숨겨진 어린아이 같은 열등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숙한 한 걸음을 내딛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할 뿐’,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맹목적 믿음부터 버려야 한다.

 

 



지나친 공주병, 왕자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극단적 이기주의로 삭막해질 수도 있다. 이들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 때 비로소 나도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되새김질해야 한다.

 

-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 중에서 -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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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의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비교하지 말라.


세상의 온갖 번뇌 중 절반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남의 옷이 나보다 예쁘면 불쾌하고, 남의 수입이 나보다 많으면 괴롭고, 남의 배경과 인맥이 훌륭하면 시샘하고, 남이 즐거우면 나는 배가 아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길이 있다. 단순하게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남이 걷는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을 살고 있다. 자신의 리듬에 맞춰 길을 걸으면 그만이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혹은 괴롭거나 즐겁거나 모두 저마다의 운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운에 따라 삶을 꾸려나가면 된다.
자신의 길만 생각하면 번뇌는 자연히 절반으로 줄어든다.

 

 

둘째, 스스로 반성하라.


사람은 독립적인 개체이자 서로 연관된 총체이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개인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발전을 부축이거나 혹은 방해하기도 한다. 번뇌 가운데 일부분은 타인 때문에 생긴다.

 

이러한 번뇌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의 본성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 혹은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자신에게 ‘이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당신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라. 자신을 고찰하는 것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화가 났다면 즉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자신도 그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지 생각해보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다만 각자의 운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할 뿐이다. 대부분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행위도 특정한 논리에 따라 고찰해보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결코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어느 마을에 청소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늘 어두운 얼굴로 퉁명스럽게 사람을 대하며 툭하면 말다툼을 벌여 마치 불만 붙이면 터져버릴 폭죽 같았다. 하루는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멋쟁이 아가씨의 새 신발에 쓰레기를 떨어뜨렸다. 아가씨는 불쾌해하며 말했다.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요!” 그런데 뜻밖에도 이 여인이 버럭 성을 냈다.

 

“당신은 눈이 없어요? 내가 여기서 청소하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어째서 비키지 않는 거예요?” 말문이 막힌 아가씨는 화가 나서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와 동네 관리직을 맡고 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마치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 기세에요. 내일 책임자에게 얘기해서 당장 해고해버려요!”


어머니는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내 남편이 이유 없이 나를 버렸다면, 만약 내가 직장을 잃어 청소 일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야 한다면, 만약 내 딸이 병에 걸렸는데도 치료할 돈이 없다면, 나 역시 그녀보다 얼마나 나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구나.”
그 후로 그 청소부 여인에 대한 아가씨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다! 당신이 누군가처럼 처참하지 않은 것은 누군가보다 행운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번뇌하려는가?

 

 

셋째, 진정한 수확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라.


많은 대가를 치르고도 너무 적은 수확을 얻었다고 여기는 것 또한 번뇌를 만드는 큰 원인이다. 당신의 수확이 정말로 적은가? 운명은 당신에게 진정 불공평한가? 당신은 대가와 수확을 명확하게 계산해 보았는가?


20여 년이나 철물점을 운영해온 남자가 있었다. 장사도 줄곧 잘 되었다. 그는 회계 업무에는 문외한이라 장부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수표는 늘 갈색의 큰 편지봉투 안에, 지폐는 담뱃갑 안에, 만기가 된 명세서는 침봉에 꽂아두었다.


어느 날 회계사인 막내아들이 문안차 왔다가 말했다. “아버지, 대체 장부를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비용과 이윤을 계산하셔야죠. 제가 현대적인 관리 시스템으로 도와드리면 어떨까요?”


그가 말했다. “필요 없다! 아들아, 나는 내 나름의 방법이 있단다. 내 아버지는 가난한 농민이셨어. 돌아가실 때 나에게 남겨주신 유산이라고는 바지 한 벌과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지. 훗날 나는 그곳을 떠나 도시로 와서 열심히 일한 끝에 드디어 이 철물점을 갖게 되었단다. 이제 나에겐 아내와 세 아이가 있어. 네 형은 변호사, 네 누나는 에디터, 그리고 너는 회계사가 되었지. 나와 네 엄마는 훌륭한 집에 살고 있고 차도 두 대나 있지. 게다가 나는 여전히 이 철물점의 주인이고, 빚도 한 푼 없단다.” 잠시 쉬었다가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회계 방법은 아주 간단해. 이 모든 것을 더한 것에서 그 바지와 신발만큼을 빼면 나머지가 모두 이윤이란다.”


이 노인의 장부 관리법은 어쩌면 허술하기 짝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족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만큼은 어느 학자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은 이제까지 걸어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출발지에서부터 일정한 속도로 오랫동안 걸어와서 당연히 도착해야 할 위치에 도달했는데, 만족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이미 아주 멀리 와서 지금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번뇌할 것이 무엇인가?

 

 

넷째, 새로운 출발점으로 돌아가라.

 

원점이란 과거의 기점이자 미래의 출발점이다.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 떨어진 바로 그곳은 종점이 될 수도,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나아갈 것인가? 눈앞에 여전히 올라야 할 산이 있고, 그 산을 오를 힘이 남아 있는 한, 당신이 나아가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위를 향해 걸으면 된다.


한 젊은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강에 뛰어들었다. 지나던 사공이 여인을 구하고 물었다.

 

“당신은 아직 젊디젊은데,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단 말이오?”
“저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에게 버림받고, 곧이어 아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무슨 낙으로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여인은 울며 하소연했다.
“2년 전에는 어찌 지냈소?” 사공이 물었다.
“그때는 자유롭고 아무 근심이 없었지요…….” 여인은 옛일을 회상하며 입가에 저도 모를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때 당신에게 남편과 아이가 있었소?”
“물론 없었지요.”
“당신은 그저 운명에 의해 2년 전으로 돌아갔을 뿐이오. 이제 다시 자유롭고 아무 근심 없는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라오.”


배에서 내린 여인은 사공의 배가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을 비비고 보니 모든 것이 한바탕 꿈처럼 아득했다. 그렇게 강가를 떠난 여인은 더 이상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


과거는 반드시 지나간다. 단지 각자의 마음속에서 사라지는 형식만이 다를 뿐이다. 미래는 반드시 다가온다. 단지 미래를 맞이하는 각자의 태도만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SF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미래를 점치는 예언가처럼 마음대로 미래를 계획할 수도 없다. 다만 평온하게 삶의 변화를 맞이할 수는 있다. 그 평온함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모든 것의 원점이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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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리뷰 : 지하철에서 보는 자기계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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