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를 출간한 정용준 작가에게 독자가 물었습니다.

정용준 작가의 답을 소개합니다.


2016년 오늘의 젊은 작가들 : 정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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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2016_author02









독자는 소설을 왜 읽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최근에 읽은 소설중 소유하고 싶은 문장은 무엇입니까?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각각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미가 단순한 의미의 ‘funny’는 아닙니다. ‘소설적인 재미’는 독자마다 혹은 소설을 정의하는 각자의 방식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도 소설을 억지로 읽어주지 않습니다. 그 말은 소설은 스스로 재미있지 않으면, 매력적이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저는 소설을 사람이라고 여기고 읽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망, 정신과 취향이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소망, 그와 함께 어울리며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이 소설을 읽고 싶게 만듭니다. 


최근에 읽은 소설중 소유하고 싶은 문장은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중 한 문장입니다. “사랑하죠, 오늘도.” 아....... 좋았어요.  




소설을 언제 처음 써보셨나요? 학부를 러시아어과를 나왔는데 어떻게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는지, 부모님의 반대가 있으셨는지, 소설가가 된후로 부모님의 반응이 어떠셨는지 소설을 쓰겠다는 계기가 있으셨는지, 그리고 그 글쓰는 재능을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은 스물여섯에 처음 써봤습니다. 정말 끝내주게 형편없는 소설이었는데 그것을 알기 전까진 행복했어요. 태어나서 뭔가를 창작해본 첫 경험이었기 때문이죠. 러시아어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흥미와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소설은 달랐습니다. 계속 쓰고 싶었고 더 잘 쓰고 싶었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문학 수업을 듣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부모님이 딱히 반대는 하지 않으셨지만 결코 환영하지도 않으셨어요. 다만 좀 걱정하셨습니다. 지금은 좋아하십니다. 글쓰는 재능이 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계속하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 그 곁에 가고 싶다. 이런 이상한 기분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소설을 계속 썼던 것 같아요. 욕망과 호기심. 이게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죠.   




읽으셨던 소설 중, 혹시 꼭 한번은 이와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소설이 있으신가요? 


그런 소설은 너무 많아서 그 수를 셀 수조차 없습니다.  




독자들이 작가님 소설을 통해 무엇을 얻었으면 하는지? 궁금하네요.


뭔가를 얻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물론 제 소설을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소설은 즉각적으로 응용하거나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실용적인 글은 아닙니다. 하지만 독서가 끝나고 남는 감각이나 정체불명의 느낌 같은 것은 있겠죠. 그것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원하기는 재미있었으면 합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 사람의 사유와 감각의 일부가 되길 바랍니다. 마치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듯, 뭔가를 만지고 손끝이 영원히 기억하는 감각처럼, 그렇게 남았으면 합니다.    




집필하는 과정 속에서 슬럼프가 오면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궁금해요.


‘슬럼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그냥 다 슬럼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글쓰기는 한 번도 편하게 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슬럼프가 오는 그 자체를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면서 나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넘어갈 수조차 없이 강하게 올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땐 목욕탕에 갑니다. 온탕에 앉아 아아…… 하고 있으면 어째서인지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지인에게 책 선물할 때 꼭 포함하는 작가가 있는지요? 


사람에 따라 선물하는 책도 달라집니다. 저는 책을 일종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서로 잘 맞을지 생각하곤 합니다. 때문에 책을 선물하거나 추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워요. 읽으면 무조건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선물하는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고 어떤 감각을 선물해주고 싶을 땐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나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가 있다면 꼭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선물해요.




지금까지 작가나 지인들의 서재를 많이 방문해보셨을텐데요, 그중 가장 인상에 남았던 서재와 그 이유도 알고 싶습니다.


이준규 시인의 서재입니다. 그 앞에 앉아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종종 이 책 저 책 뽑아 펼쳐 보이며 책을 소개해주거나 그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때론 책을 선물로 주곤 했는데 나중엔 책을 줬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저는 시치미를 떼고 그 책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서재 앞에 아이처럼 웅크리고 잠들곤 했는데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은 그에게 선물 받은 책과 함께 저에게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작가님과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용기의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소설을 쓰는 것은, 소설을 읽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멋진 일은 아니지만 꽤 근사한 일입니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은 아니고 그것이 직업으로서도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만 소설을 쓰며 사는 삶은 그 어떤 방식의 삶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소설을 쓰며 사는 이 삶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아! 그리고 소설은 쓰면 쓸수록 늡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좋아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읽으세요.




작가님도 `말더듬증`이 있으시다고 어느 글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여러 작품에서도 `말더듬` 이 등장 하는구나 하고 느꼈는데요. 저도 말을 더듬는데 작가님은 말이 안 나올 때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네. 말을 더듬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었는데 지금까지도 더듬어요. 물론 어릴 때처럼 많이, 항상, 더듬지는 않습니다. 살면서 대처법을 터득했어요. 말을 더듬는 사람들은 자신이 말을 더듬을 줄 압니다. 주로 첫음절이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땐 첫음절을 길게 빼서 발음하거나 단어 자체를 바꾸는 방법도 있습니다. 가령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려고 했는데 더듬을 것 같으면 ‘마더’라고 살짝 바꿔서 말하거나 문장을 도치시켜 첫 문장을 바꾸는 방법도 있습니다. ‘오늘 학교에 갔어요’를 ‘학교에 갔어요, 오늘’ 이런 식으로 말이죠. 지금은 이런 방법으로 말을 더듬는 것을 많이 감추고 삽니다. 하지만 말할 때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힘들어요. 그래서 가족들 앞에서는 많이 더듬습니다. 그들은 말을 더듬어도 놀리지 않기 때문에 더듬어도 그냥 하고픈 말을 합니다.     




창작자에게 있어 작품을 만드는 소재는 그가 가지고 있는 관심의 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재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요즘 제 관심을 끄는 것은 잠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물들의 긴 잠. 동물로 따지면 동면 같은 것이에요. 그리고 바다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 그곳에 사는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이런 생각하면서 반쯤은 멍하게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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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7회 젊은작가상의 대상을 김금희 작가가 수상했습니다. 김금희 작가와 정영수 작가가 소설에 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자유롭게 틀을 넘나드는 대화를 소개합니다. | 문학동네 출판사 제공












우리는 때때로 즐겁고 

매일 슬프고 늘 화가 나

―그러니까 우리는 ‘해방의 글쓰기’를 하는 게 어떻겠니?



정영수 




아무래도 이 인터뷰는 망한 것 같다. 내가 어쩌다 이 인터뷰를 맡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금희 선배와 길고 긴 대화를 나눈 후 ‘특별히 재미난’ 인터뷰 글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어서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노트북 앞에 붙박여 앉아 있게 되었을까…… 시간을 거슬러오른다…… 이 일의 시작은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날, 마침 항공기의 앞바퀴가 인천의 안개 자욱한 활주로에 닿았을 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쓰면 있어 보이겠지.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이다. 그 전화에서 들려온 한 여인의 목소리는 “영수씨 있잖아요, 그러니까 올해 젊은작가상……”이라며 말을 시작했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그 상을 받게 되었다는 줄로 알고 아주 짧은 순간 애써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번에 대상을 수상한 김금희 작가의 인터뷰를 맡아달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젊은작가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아니, 대체 내가 왜…… 그 인터뷰는 전통적으로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콘셉트가 달라졌나…… 그러니까 전년도 수상자가 아니라 내년도 수상자가 올해 수상자를 인터뷰하는 것으로…… 예상표절과 같은 원리인 것인가…… 양자역학 같은 건가……라는 미친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아무튼 지면이 지면이니만큼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나도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금희 선배가 인터뷰어로 나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선배와 만나자마자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한 사정이 있었고 ○○○○하고 ○○○○하고 ○○○○한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왠지 내가 인터뷰 글을 재미있게 잘 쓸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듣고 싶은 말만 들어버렸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재미있게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버리고 말았는데 그러니 이 글이 이상해진다면 어느 정도 금희 선배 탓도 있는 셈이다.




나는 선배와 이른바 ‘트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실제 만남에서 나눈 대화보다 트위터에서 나눈 대화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를 ‘금희님’이라고 부르고 그녀는 나를 ‘수수님’(내 트위터 닉네임이다)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녀와 실제 세계(?)에서도 몇 번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여서 심도 깊은 대화는 거의 나눠보지 못했고 서로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정도의 피상적인 대화만 나눴을 뿐이다. 그러나 트위터에서는 위트 있는 멘션과 웃짤과 귀여운 동물짤과 ‘마음’을 주고받는 이른바 ‘트절친’(내가 방금 만든 말이다)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생각해보면 인터뷰를 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그래서 수요일 저녁, 서교동 모 일본풍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와 닭다리살톳파스타를 나눠 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의 서두에서 이 인터뷰가 망한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그녀와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던 나머지 내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질문들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쩌다가 글쓰기라는 이 쾌락적이면서 고통스러운 주이상스적 숙명에 빠져들게 되었나, 또 당신은 어쩌다가 「너무 한낮의 연애」를 쓰게 되었으며 그것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무엇인가, 젊은작가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과연 젊은작가상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정영수의 소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매우 필수적이며 중요한 질문들 말이다. 나는 능숙한 인터뷰어가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인터뷰이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끌었는데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식사시간 동안 이곳에는 쓸 수 없는 정말로 쓸데없고 사적인 이야기만 잔뜩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는 그동안 그녀에 대해 꽤나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겉보기만큼(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소설만큼?) 부드럽고 유순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녀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온정 어린 시선과 깊은 관심, 유머러스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문체 같은 걸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그녀는 자기는 늘 화를 품고 있으며 매우 공격적이며 누구에게라도 적개심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거기다가 감정 기복도 심해서 사실상 조울증 말기에 가까운 정신 상태로 살아가고 있단다. 나는 나 또한 그랬기 때문에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었고 우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이 분노의 근원과 분출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다 지나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적개심과 파토스를 소설로 해방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고 나는 그녀에게 홍대입구역 인근에 있는 친절한 정신과의원을 추천해주었다. 선배는 이미 한약을 많이 먹어보았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왠지 그녀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이 있는데 양방을 믿는 사람과 한방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철저히 양방을 신봉하며 선배는 철저히까지는 모르겠으나 한방의 보다 내밀하며 근본적인 접근 방식을 믿는 듯했다. 선배의 소설 또한 양방보다는 한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막 포스트모던하고 그런 스타일은 또 아니니까……). 나는 여전히 현대 의학의 신속하고 강력한 힘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그녀의 길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소설 이야기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주로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몇 줄 위에 언급한 바 있는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배에게 등단 직후의 글쓰기와 지금의 그것 사이에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그 ‘해방’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이야기부터 하기로 하자. 그녀는 말했다. 한마디로…… 소설을 막 쓰게 됐어. 무슨 뜻인지…… 알지? 나는 선배에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무슨 뜻인지 아마도…… 알겠지…… 여하간 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인터뷰의 제목대로,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때때로 즐겁지만 자주 슬프며 늘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쓰려고 앉으면 뭔가 정갈하고…… 품격 있고…… 절제되었으며…… 미학적으로 탁월하면서도…… 웅숭깊은…… 소설만 쓰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라는 게 결론이었다(몰라, 되는대로 막 말해버리자). 나도 막 흐트러지고 품격 없고 무절제하고 음험하면서도 파토스 넘치고 되바라지고 발칙하면서도 위험한 소설을 쓰고 싶다! 하지만 나의 동방적으로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성정이 그렇게 하지를 못하게 나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해방시키고 싶어, 라고 내가 말하자 선배는 마치 민중-권력-쟁취-투쟁, 같은 구호식으로 해방! 해방! 하고 외치며 나를 독려해주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내가 선배에게 물었다. 뭔데? 나는 굳이 가방에서 「너무 한낮의 연애」의 복사본을 꺼내 그중 한 부분을 짚어 보였다. 미리 밑줄을 그어둔 구절이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그래, 쓰나미, 쓰나미, 실연의 쓰나미!” ……그러니까…… 이런 문장을 쓰는 게…… 해방이라는 거라면…… 선배…… 난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아…… 그거…… 해방…… 금희 선배는 말했다. 맞아, 그게 해방이야. 그게 와야 돼. 쓰나미, 쓰나미, 해방의 쓰나미!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합정역 메세나폴리스 쪽으로 향했고, 지하에 아주 넓은 공간이 있는, 새로 생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알고 보니 우리는 일본풍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와 닭다리살톳파스타를 앞에 두고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기품 있는 카페에 와서 김이 뽀얗게 피어나는 레몬티와 향기로운 피스타치오 마카롱을 앞에 두고 앉으니 본격적으로 우리의 고품격 문학 이야기가 시작된 것을 보면 말이다. 정말로 고품격……이었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든 나는 곧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금희 선배의 두번째 소설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문학동네에서 제공한 자료를 살펴보면 2014년과 2015년 두 해 사이에 단편소설을 아홉 편 발표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선배의 말을 들어보니 실제로는 열 편을 발표했단다. 나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재고가 많은가봐? 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내가 말이야…… 없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재고야…… 라고 대답했다. 이게 바로 해방의 힘인가? 해방의…… 발표의 쓰나미! 선배는 물론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들지 않는 것도 있는데 대체로는 발표하고 나면 다들 이번에도 망했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나? 하고 내게 말했는데 나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배도 정말 망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1990년대(계속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녀는 이 나라 문학의 벨 에포크가 바로 그 시기였다고 여기는 듯했다) 자신을 전율케 했던 작품들에 비하면 자신의 발표작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는 겸손의 말이었다. 나는 그 시절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금희 선배의 소설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해, 라고 생각만 했는지 진짜로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질문을 이어가 그렇다면 「너무 한낮의 연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심 대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묻지는 않았고 다른 소설에 비해 특히 더 나은 것 같으냐는 질문을 했다. 선배는 사실 자신은 「세실리아」에 더 마음이 간다고 했다. 「세실리아」는 「너무 한낮의 연애」를 발표하기 두 계절 전에 발표한 단편인데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소설가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간 소설에 애정을 준달까? 나도 그런 의미에서 내가 최근에 발표한 「하나의 미래」에 제일 애정이 간다고 말했다. 선배는 인터뷰하다 말고 왜 뜬금없이 네 소설 얘기니? 라고 하지 않고 다정한 말투로 그 소설을 읽었으며 심지어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자기는 그 소설이 재미있으면서도 슬펐다고 했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나는 확실히 기억했을뿐더러 심지어 여기에 쓰고 말아버렸다……). 그래서 나도 「세실리아」를 읽고 슬펐다고 했던가 안 했던가, 그래서 너도 울고 나도 울고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던가 안 되었던가. 아무튼 나는 「너무 한낮의 연애」를 발표 직후 읽었다. 『21세기문학』 2015년 가을호에 실렸는데 누군가가 먼저 읽고 좋다고 내게도 읽어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읽고 나서 정말로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내 마음에 든 부분은 양희가 필용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것도 그다지 적절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타이밍에 “나 선배 사랑하는데”라고 무심하게 말한 부분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필용은 양희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마치 그 말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매일 그녀에게 ‘지금도 사랑함’을 재확인하고 양희는 매일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수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지극히도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선배에게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딱히 영업 비밀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순순히 말해주었는데 어느 날 자신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나 김금희씨 소설 좋아하는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미 그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었을 테지만 자신에게는 묘한 울림이 남았단다.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것이…… 호감의 표현인 것은 같은데 뭔가 시원치도 않고……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평론가였던 것 같다는데, 나는 그가 지금도 금희 선배의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궁금해졌다. 나중에 어떻게든 정체를 밝혀낸 뒤 만나서 물어봤는데 소설 속 양희처럼 “아, 금희씨 나 안 해요, 사랑”이라고 대답하면 재미있겠지, 킬킬킬, 하고 혼자 좋아해버리는 것이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흘러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기에 나는 마무리 느낌으로 선배의 소설관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면이 지면이니만큼 이 정도 거시적인 질문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선배에게 우리가 하는 일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던져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대체로 이것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늘 궁금해하고야 만다. 마음 같아서는 소설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의 정체를 물어보고 다니고 싶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소설관을 열심히 실토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금희 선배가 말하는 자리이니 그녀의 답을 듣기로 한다…… 선배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사명감을 품고 있고 소설이라는 매체에도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출판시장이 아주 오래전에 비하면 찌부러지긴 했지만(그녀의 표현이다) 소설은 여전히 적은 돈으로 가장 빨리,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쓴다는 행위가 자신에게 내적 성찰과 해방감을 가져다줌은 물론(오늘의 테마는 누가 뭐라 해도 ‘해방’인 것이다!) 읽는 이에게도 쾌감과 함께 깊은 사유의 온기를 전해주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이렇게 말한 금희 선배는 꽤 잘 살고 있는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런 일을 매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마지막으로 두 질문만 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카페 종업원이 와서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 넓은 카페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준비한 질문지의 마지막에 적어둔 추상적이면서도 거창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선배가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고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을 때 다시 종업원이 찾아와서 더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다고 했다. 하긴 우리가 얼마나 거시적인 대화를 나누든 그들도 퇴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퇴근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정이 다 된 시간, 밤거리로 나왔다. 어쨌든 우리는 집으로 가야 하므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건널목 앞에 서서 파란불이 두 번 켜지는 동안 또다시 매우 사적이며 음험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가야 하는 길을 갔다. 못다 한 거시적인 이야기는 내년에 다시 만나서 했으면 좋겠다고, 여운을 남기며. 예상표절적으로…… 아니면 양자역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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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솜 2016-05-08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인지 막걸린지 하다가도 금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글.
 


신작 <러브 레플리카>를 출간한 윤이형 작가에게 독자가 물었습니다.

윤이형 작가의 답을 소개합니다.


2016년 오늘의 젊은 작가들 : 윤이형

지난 이벤트 보기

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2016_author01







윤이형 작가님께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순간은 언제, 어디서, 무엇 또는 누구에 의해서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결심은 여전히 처음 그때의 그것과 같은지도 궁금해요.


직장에 다니며 여러 가지 글 쓰는 일을 10년 정도 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을 하다보니 방향이 정해져 있고 기획에 맞춰야 하는 글 말고 제약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주일에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회사원 말고 ‘나’로 살고 싶어서 어느 문화센터에서 하는 소설창작강의를 들으러 다녔어요. 거기서 숙제로 썼던 글들을 모아 보냈는데 당선이 되어버려서 사실 다짐이고 결심이고 할 겨를도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뒤늦게 어떤 결심 같은 것을 하게 되는데,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발을 들여놓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대해 남은 평생 동안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하는 글쓰기는 그 이전과 어떤 다른 경험을 가져왔는지 궁금합니다. 제게 육아는 내 시간보단 다른 이의 시간을 사는 일이었는데 그 가운데 작가님의 소설쓰기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요?


저 역시 시공간의 제약, 점점 좁아지는 시야,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어려움 같은 것이 크게 다가옵니다. 퀄리티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지만 제가 선택한 삶이라 불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작고 연약한 생명체와 매일 구체적으로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 일은 대단히 소중하고 큰 경험이어서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말하자면 제 글이 부족하다는 생각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씩 마음 놓고 죽고 싶어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엄마라는 신분에 따르는 책임이 있고, 아무리 자괴감이 들어도 삶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으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차단되고 일을 계속할 동력도 생기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주로 언제 어디서 글을 쓰시나요? 특별히 글이 잘 써지는 장소나 분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네 카페에서도 쓰지만 주로 마감이 코앞에 닥친 밤에 집 부엌 테이블에 앉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와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서 혼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조건 감사한 상황이에요.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작가님을 이상으로 삼은 학생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젊은 작가로서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고 계시는데,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본인의 훗날은 어떨 것 같나요? 꿈이란 게 원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잖아요. 작가님이 꿈꾸는 작가님의 미래와 꿈을 알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쓰기를 그만두지 않는 게 첫번째 꿈, 동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두번째 꿈입니다. 세번째 꿈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제가 좋아하는 글쟁이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해 다과회를 열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뜨개질을 하고, 누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또 누구는 신작 발표를 그 자리에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그들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되어 있겠죠. 지금은 각자 바쁘고 힘겨워서 교류조차 할 수 없는 처지지만, 그때가 되면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중히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어요. 그들의 글이 제 젊은 날에 어떤 방식으로 무한한 빛이 되어주었는지를 전하고, 계속 멋진 작품을 써달라고 부탁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저 역시 그때까지 쓰고 있는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죠. 




작가의 길이 무섭지 않나요?


무섭습니다. 하지만 감당할 가치가 있는 무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년 한 해 동안 작가님의 글을 많이 찾아 읽어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이 ‘소재의 다양성’이었습니다. 물론 크게 본다면 과학, 기술, SF적 상상력을 많이 찾아볼 수 있긴 했지만 그것들 외에도 다양한 인물과 소재가 언제나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작가님께서는 평소에 소재에 대한 영감을 어떻게 얻으시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건 없고 그냥 일상을 살면서 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저에게 의미 있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쓸데없어 보일 질문들을 쌓아놓곤 해요. ‘사람에게는 꼭 몸이 있어야 할까’ ‘병을 증오하는 마음을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들요. 현실이 저에게는 제약이나 불편함으로 느껴지는 일이 잦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여기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는데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설리스트에서 “4주의 표지갑은 윤이형 작가의 『러브 레플리카』입니다”라고 발표했는데 표지를 직접 결정하기도 하시는지, 표지에 대한 느낌은 어떠신지요.


이번 소설집 표지에는 ‘하트 모양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만 의견을 냈습니다. 진짜 사랑이라면 그건 하트 모양으로 생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반짝거리고 예쁘장한데 공허하고 인공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느낌의 표지가 나와서 몹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되는지 이야기를 쓰는 중에 바뀌기도 하는지 그리고 글을 처음 시작할 때와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는 어떤 느낌인지도 궁금하네요.


첫 문장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마지막 문장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정해지는데, 쓰고 난 뒤에도, 책이 나온 뒤에도 계속 고치고 싶어서 괴롭습니다. 글을 처음 시작할 때는 ‘어떻게든 가보지 뭐’ 정도의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하는데, 끝을 내면서는 늘 처음 생각과 너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가님은 글을 쓰기 전, 혹은 쓰실 때 하시는 특유의 습관이나 의식(?) 같은 것이 있나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 작가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알고 싶습니다.


진한 커피를 석 잔쯤 연달아 마시면서 안 쓰고 있다는 죄책감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 온갖 잉여스러운 행동을 합니다(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충분히 시간을 낭비했다는 마음이 들어야 쓰고 싶어집니다.  




다음 생으로 이 생의 기억을 한 가지만 가져가야 한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하실 것인가요?


일주일 전부터 이 질문지에 대답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의 기억요. 지금이 불안하지만 좋기도 하고, 특별하고 큰 사건들만 골라내서 의미를 더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그건 왠지 ‘제’ 기억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냥 시간순으로 뚝 잘라서, 특별할 것 없이 사소한 기쁨, 슬픔, 짜증, 후회 같은 것들이 골고루 들어 있는 보통의 일주일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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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민음사, 알라딘, 은행나무 (가나다 순)가 함께 진행한 장강명 소설 리뷰대회의 심사평을 공유합니다. 심사 및 심사평은 문학평론가 강지희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1등

추리닝간죵님

<나의 세계를 증명하는 등식으로써 당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blog.aladin.co.kr/795816154/7794062


  한 작가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소설들 사이에는 질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세 장편 소설의 리뷰를 읽어 내려가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한 권의 장편은 그 작가의 눈으로만 포착되는 주관적인 현실을 정교하게 구축해놓은 하나의 소우주다.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 세계와 만날 때에만 우리는 잠시 겹눈이 된다. 그러니 책장을 덮은 후에 그 작가가 만들어냈던 소우주 속으로 다시 한번 빠져들어가 유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좋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더 매혹시키는 것은 소설의 지평을 딛고 펼쳐지는 겹눈의 공간 속 유일무이한 또다른 소우주에 도달하는 글들이다. 이런 면에서 츄리닝간죵의 <나의 세계를 증명하는 등식으로써 당신>은 압도적이었다. 마지막에 던져진 여자의 질문을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아 소설을 읽는 방향을 바꾸어냈고, 그 의미를 아름다운 방향으로 증폭시키며 ‘존재를 소멸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등식으로써의 기억’이라는 명제를 도출해냈다. 때로 기억한다는 사소한 행위만이 우리의 존재를 지탱시키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일이 된다는 진실을 이보다 더 유려하게 설득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2등 

오규원님<행복의 근원을 묻다> (한국이 싫어서)

http://blog.aladin.co.kr/771489177/7755052


2등 

faust715 님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 (호모도미난스)

http://blog.aladin.co.kr/778649103/7796572


  오규원의 <행복의 근원을 묻다>는 글에서 묻어나는 슬픔의 어조가 인상적인 리뷰였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난 많은 사람들이 최근 ‘헬조선’으로 압축되는 온갖 끔찍한 면면들에 대해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소설이 사회 비평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그러나 날카로워지는 만큼 반드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프리카에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던 한 친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날카로움 대신 동감하는 아픔을 조심스럽게 눌러담는 길을 택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동반되는 끝없는 불안감에 대해 말하고,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여러 방향에서 행복의 길을 찾게 되는 것에 작은 안도감을 표시하는 이 글의 담담함이 소설에 더 깊이 도달하는 또다른 길을 틔워주고 있어 좋았다. faust715의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는 『호모도미난스』에 나타난 힘을 가진 자의 책임감과 정당성에 대해 성찰하는 데 있어, 히어로물 영화의 사례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비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실존적 고민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미성년과 만났을 때 왜 더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섬세하게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3등 

얼룩님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blog.aladin.co.kr/mydewy/7797204


3등 

달문님

<적응하거나 혹은 견디지 못하거나> (한국이 싫어서)

http://blog.aladin.co.kr/dalmoon33/7763029


  얼룩의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선명하게 읽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글이었다. 인물들 안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흐려지는 순간과, 지명에 대한 전승의 검증 과정에서 가짜 이야기가 진짜 기억이 되어버리는 지점의 난감을 겹쳐 읽는 세심함도 눈에 띄었지만, 이를 소설에 국한시키지 않고 때때로 삶 속에 찾아드는 죄의식과 살아갈수록 줄어드는 말로 이어받는 부분의 성찰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늘한 소설 앞에서 처연한 얼굴이 된 자신의 표정을 기술하는 마지막 문단 역시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달문의 <적응하거나 혹은 견디지 못하거나>는 『한국이 싫어서』에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장강명의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한국을 혐오하거나 호주 이민 성공 사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 충실한 ‘선택’이었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설사 그것이 도피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 움직이는 과정에 서린 용기 자체가 결론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다이 시지에 소설과의 대비 역시 흥미로웠다.  



장려:  (필명 가나다 순)

      꼼쥐님 <삶의 원동력이 희망인 이유> 

      돈다돌아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헤브 어 나이스 데이”>

      로렌초의 시종 <속죄를 감당하는 방식> 

      봄밤 <타인을 향한 이해를 비로소,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 <우주 알을 기다리며> 

      용이 <호모도미난스(지배하는 인간)>

      탄산수킬러 <이것이 진짜 ‘자기계발서’다>

      헤르메스 <기억과 윤리> 

      guiness <다음 단계의 인류를 상상하다> 

      hope&joy <서늘한 새벽, 따뜻한 빛을 닮은 그들> 


  소설에 대해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펜을 들어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조금 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오랜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간절함, 거기에 서려 있는 온기 같은 것들이야말로 생을 지탱시키는 것이라 믿기에 많은 리뷰들을 읽는 시간이 고단하기보다 행복했다. 순위를 매겨야만 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글에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진솔함이 서려 있었다고 꼭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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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던 올 여름,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이 첫번째로 주목을 받았고, 뒤이어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작가 장강명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박하영


















작가적 '야심'을 말하는 작가


안녕하세요. 어제도 ‘북한 사격’이라는 큰 뉴스가 있었습니다. (주 : 이 인터뷰는 북한 발 포격 뉴스가 세상을 점령했던 8월 21일 금요일 오후 진행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요즘도 이런저런 소식이 많은데요. 장강명 작가라면 이 사건을 소설적으로 분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데뷔작인 <표백>부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으로 표기)까지, 장강명의 소설은 현실을 연상시키는 특정 ‘사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잦은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는 눈이 남다를 것 같아요.


사건기자를 오래 했어요.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에 주로 있었죠. 내근부서나 소프트한 피쳐 기사를 쓰는 곳 말고, 현장기자로 지냈어요. 그래서 훈련이 될 수밖에 없었죠. 사회 트렌드, 관심 가는 사건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주목하는 저널리스트의 태도가 몸에 밴 거죠. 제가 애초에 신문기자가 되기로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싶을 때가 있잖아요. 주변에서 지진이 났는데도 모르고 지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큰 일이 일어나고 세상이 변할 때 제가 중심에 있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기자가 쉽게 되지는 않았어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죠. 최종만 다섯 번 떨어지고 일단 취업을 했어요. 그래도 기자가 되고 싶어서 사표를 내고 나와 지원을 했는데 또 떨어졌고요. 고시원에서 준비를 했는데, 백수로도 지내고 영어 교재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다가 기자가 됐죠. 기자 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했고 나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전업 작가가 된 지금도 신문 기자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이슈를 관심 있게 보고, 활용하려고 해요. 실은 엑셀 마니아라 모든 걸 엑셀로 하는데요, 소설로 쓰고 싶은 아이템을 엑셀로 정리해놓고 관리하고 있어요. 소설의 모티프가 될 만한 뉴스 기사는 링크로 저장해두고요.





이야기의 다양한 스펙트럼도 눈에 띕니다. <표백(2011)>, <뤼미에르 피플(2012)>, <열광금지, 에바로드(2014)>, <호모 도미난스(2014)>, <한국이 싫어서(2015)>,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2015)>, 모두 한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엔 색이 다양합니다. 현재 ‘좀비물’을 연재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독자의 취향은 다양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 다양한 작가들이 장강명의 소설 모두를 좋아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소설들 중 ‘어떤’ 소설만큼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저의 작가적 전략이긴 해요. 결과적으로 독자가 다양해지면 좋겠지만, 독자층을 생각해서 다양한 소설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나중에 정말 ‘큰 걸’ 써야 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운동에 비유하자면, 이 운동은 상체근육용, 이 운동은 하체근육용, 이건 근지구력용 하는 식으로 단련하는 방법이 나뉘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쓰는 데에도 다양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파이터인데,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그라운딩 기술을 쓰든, 타격기술을 쓰든 받아낼 수 있는 종합격투기 선수처럼 소설을 쓸 수 있도록요.


저의 ‘작가적 야심’ 중의 하나가, 죽기 전에 <레 미제라블> 같은, 커다란 주제를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거든요. 십 몇 년 간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록하는,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큰 오페라 같은 소설이요. 정치부 기자로 오래 출입을 했는데, 저 같은 경험이 있는 소설가가 별로 많진 않잖아요. 한국 언론 얘기를 한번 써보고 싶고, 정치 얘기도 한번 써보고 싶어요. 


가까이 가서 정치를 보면 그렇게 추잡하지만은 않거든요. 한국 언론도 그렇고요. 좋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다 결국은 망해가는 그런 장엄한 드라마. (웃음) 지금은 못 쓸 것 같아요. <표백> 전에 쓴 신문사 얘기가 있는데, 너무 못 썼더라고요. 제 글을 먼저 봐주는 아내도 혹평을 했고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써야죠. 


북한이라는 소재로도 소설을 쓰고 싶어요. 북한 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없잖아요.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 하나랑, 그래도 선진국 끄트머리에 있는 나라랑 붙어 있는. 온갖 얘기를 할 수 있겠죠. 탈북자 커뮤니티도 갈등이 많고,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그들을 취재해서 난민의 눈으로 남한사회를 보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 스스로 나라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 ‘한 사회가 붕괴할 때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요. 관련한 강연회가 있으면 열심히 가고 있어요. 고난의 행군이라든지, 북한 얘기, 정치 얘기. 쓰고 싶은 주제가 여러 개 있어요. 


쓰고 싶은 이슈들이 여러 개 있어요. 다만 제가 아직 작가로서 근육이 튼실하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여성 캐릭터도 잘 다루고, 악당 같은 캐릭터도 잘 써보고 싶어요. <한국이 싫어서>를 쓰기 전까지는, 제가 여성 캐릭터를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어요. 전에 쓴 소설의 여성 캐릭터들이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한국이 싫어서>를 쓰고 난 후, 앞으로 저의 성격을 빼닮은-되바라진 여성 캐릭터의 한 전형은 쓸 수 있겠다 생각을 했죠. (알라딘 :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경희’라는 여성 캐릭터는 좋았어요) 그 캐릭터는 편법이었죠. 정확히 그 여자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고, 쇼킹한 설정 한 두 개로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후배랑 연애를 하거나, 머리를 빡빡 밀거나 하는, 그런. 전형적인 것을 살짝만 피해 가서 인물을 만드는 식으로 썼어요. <한국이 싫어서>를 쓸 때는 바짝 기합을 넣고, 캐릭터를 썼어요. 


게임이나 아이돌 산업 등에 대해서도 정말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소재들을 쓰고 싶다는 게 제 작가적 욕심이고요. 그 욕심의 길이 제 앞에 있다고 한다면 아직 반의반도 못 온 것 같아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정말로 튼튼한 정신적 근력, 물리적인 근력이 필요하고. 소설을 쓰기 위한 ‘몸 만들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를 운동선수로 친다면, 아직 9라운드 게임에 서기엔 체급이 안 돼서 3라운드 게임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선수가 아닐까 해요. 큰 소설을 쓰기엔 아직 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 위한 작가적 욕심과 전략을 계속 만들어나가야겠죠.






<한국이 싫어서> 그리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한국이 싫어서>에 관해서 묻고 싶습니다. 제목도, 문제의식도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글은 유쾌하고 희망적으로 읽혔어요. 1인칭 여성화자가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사건들(동양종금 등)을 발랄하게 엮어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이 신선했어요. 같은 ‘청년’에 대한 얘기지만, <표백>과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점도 재밌었고요.


<한국이 싫어서>는 경장편(주 : 원고지 500매 가량 분량의 소설)이라는 민음사 기획 덕분에 나온 소설 같아요. (주: 민음사는 ‘오늘의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로 경장편 소설을 출간하고 있으며, <한국이 싫어서>는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소재나 주제는 이전에도 생각해두었던 거니까, 제안이 오진 않았어도 소설로 쓰긴 썼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딱 원고지 500매라는 분량의 제한 안에서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을 쓰려니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게 있더라고요. 얇고 가벼운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니, 독자가 ‘판타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가 됐어요. 


좋은 시도였던 것 같아요. 은행나무 노벨라(주 : 배명훈 작가의 <가마틀 스타일>을 시작으로 10권이 출간된 한국소설 경장편 시리즈물)도 비슷한 기획이잖아요. 경장편을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써봤는데, 이 소설을 쓴 경험이 있어서 비슷한 500매 가량의 <그믐…>을 쓸 수 있었죠. 작가에게는 자극이 되는 프로젝트였던 것 같아요. 은행나무 노벨라에서 원고 제안을 받았을 때도 경장편을 써본 경험이 도움이 됐어요. 마침 첫 권이 <가마틀 스타일>이기도 했고, SF를 써도 된다고 해주셔서 SF를 썼죠. (주 :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로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6개월 전만 해도 제가 쓴 SF 소설을 출판할 출판사를 찾기 힘들었을 거에요. 출판사에서 내주신다고 하니까 마음을 놓고 썼죠. 저에게도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하고 싶은 작가적인 욕구가 있는데 민음사, 은행나무 같은 출판사에서 받은 원고 의뢰가 좋은 기회가 됐어요. 야구로 치면 트리플A에 해당하는 리그잖아요. 500매라는 한에서 젊은 작가에게 기회를 주는 시리즈 덕이 아닌가 해요.





<뤼미에르 피플>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이야기는 환상적이지만 이야기 자체는 철저하게 현실의 공간, 신촌이라는 곳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그믐>에서도 ‘마포’라는 공간이 중요하게 등장하고요. 환상적인 소재도 거침없이 사용하지만, 이야기의 기저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곳에서 출발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신촌’을 지날 때면 소설이 생각나곤 했어요.


제가 ‘르메이에르’ 오피스텔 13층에 살았어요. 신촌에 살다가 마포구 현석동으로 이사갔고요. (웃음) 환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는 제가 추구하는 지점이에요.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같은 테마를 반복해 쓰면서 ‘쓸 게 없어서 이걸 쓰는 건가’ 하는 느낌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얘기를 제가 좋아하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주제가 명확한, 엄청 현실적인 얘기도 쓰고 싶어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카테고리가 여럿인 거죠. 몽환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몽환적인 얘기일수록 굉장히 현실적인 점이 있어야 몽환성이, 환상성이 더 강조된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묻겠습니다. 세 사람이 각각이 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요. 명확하게 줄거리를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명확함이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읽는 독법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습만화 편집자로 일하는 ‘여자’의 에피소드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요. 작두로 철을 잘라낸 원고가 뒤섞였는데, 뒤섞인 대로 이야기가 읽히는.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서사에 관한 물음으로 읽혔습니다.


<그믐>이라는 소설의 시작 자체가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였어요. 아내가 동창들을 만나고 왔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다른 친구에게 “네가 예전에 누구 왕따 시켰던 거 기억나냐”고 물었대요. 가해범으로 지목 받은 동창은 자기 그런 적 절대 없다고 그랬고요. 둘의 기억이 엇갈리잖아요. 아내가 되게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그 얘기를 해주었는데, 주관적 서사와 객관적 사실의 괴리가 재미있어서 소설 소재로 참 좋다는 생각을 했죠. 거기서 시작을 하다 이 소재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주관적 서사가 없는 사람을 생각했어요.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어 언제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고, 그 사람 관점에서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니 ‘이야기 순서의 앞뒤가 없는 소설’의 원고가 틀어지는 원고도 생각하게 됐어요.





장강명 작가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건설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동아일보에 입사해”라는 저자의 약력 또한 흥미있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이 소설은 세 명의 인물, 세 가지 주제어가 반복되며 마치 건물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자, 여자, 어머니. 세 명의 보람. 세 사람의 키워드 같은 면, 아래 문장 같은 면들이요. 기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셔틀버스와 버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내내 그 문장을 곱씹었다. 단어들만이 순위를 바꾸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제가 의식적으로, 제 전공처럼 글을 쓰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생각하고, 엔지니어처럼 구조를 만드는 게 있긴 한 것 같아요. 그런 방식으로 쓴 소설이 <한국이 싫어서> 였는데, 이 소설은 설계의 결과였던 것 같아요. 제목을 정하고, 제목에 맞는 상황과 주인공 정하고.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줘야 하는 게 있으니 등장인물로 친구들, 동생, 남자친구, 호주에서 만난 애들을 정하고. 서술구조도 왔다 갔다 하게 정하고요.


<그믐…>에서 세 개의 단어가 한 장을 이루는 패턴은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을 했어요. 제가 작업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딱히 나쁜 방식인 것 같지는 않은데, 예술가스러운 방식은 또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지긴 해요. (웃음) ‘캐릭터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 ‘종이 위의 캐릭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하진 않아요. ‘얘는 여기서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호주로 가야 돼.’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죠.


짜놓은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소설을 쓸 때도 있었어요. <뤼미에르 피플>을 쓸 때는 단편 몇 개는 뜬금없이 끝내는 것도 없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썼다고 해서 덜 힘이 들어가거나 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한국이 싫어서>가 나중에 퇴고하면서 더 힘이 들었고, <뤼미에르 피플>이 제가 보기에 구조가 되게 허술해 보인다거나, 긴장감이 없다거나, 이상하게 끝나는 건 또 아닌 것 같았어요. 요리할 때요. 쉐프 중에서도 계량기로, 거의 공학적인 관점에서 요리를 개발하시는 분이 있잖아요. 물리적으로, 분자요리를 하는 것처럼요. 이 요소를 빼고 다른 요소를 넣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믐…>을 쓸 때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전반부랑 후반부 챕터 길이가 좀 다른데요, 후반부 챕터 길이가 좀더 길어요. 3.3.의 구성으로 인물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고, 한 챕터 안에서는 하나의 시공간,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한 챕터 안에서 데이트를 하다 납골당에 갔다 돌아올 때까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납골당 가는 장면과 남자와 여자가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끊고 싶었는데 형식 때문에 붙여두었죠. 문학동네에서 교정을 굉장히 여러 번 봤는데, 어떤 편집자는 거기를 잘랐어요. 한 챕터지만 결이 다르니까요. 그 교정자가 그렇게 본 것도 이해를 하고, 사실은 한 챕터로 들어가기 이상한 얘기라고도 생각했는데, 형식적인 균형감을 맞추기 위해서 붙이고 싶었어요. 나름의 변명으로, 우주알 이야기 원고가 작두로 잘린 부분에 ‘패턴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길어지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넣어두었죠. (웃음)





책의 제목이 독특한데요. 


그믐달이 비치고, 우주알을 타고 오는 이야기를 먼저 쓰고 있었고.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아내에게 들은 동창생 얘기를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 얘기를 쓰게 되면서 합쳐졌어요. 출판사에서는 제목이 너무 길다고 바꾸자고 해서 바꿀 생각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적당한 게 안 나오더라고요. 제목이 좀 길어서 그렇지 저는 좋더라고요.





<그믐…> 에 대한 평 중에 ‘속죄’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조금 좁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해석에 대해선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하는데요. (웃음) 제 소설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믐…>도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두 사람과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한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일도 그렇죠. 제 미래도 언젠가 결정이 될 거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잖아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다 해보고 존엄사를 추구할 것인가,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연장을 하며 끈질기게 살 것인가… <그믐…>에서 남자가 맞닥뜨리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제 소설의 테마인 것은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와 같습니다. 저는 사는 게 사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 살아야 하는지, 살아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서만 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언제나 그대로 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 답은 통째로 긍정하는 거예요. 


<표백>이 세대론에 대한 얘기가 아니지 않듯, <그믐..>도 속죄에 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에서 떨어진 얘기가 아니라는 것, 속죄를 제대로 하려면 과거에 내가 입힌 피해가 현재진행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 나의 가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피해가 현재진행형으로 한 사람에게 벌어지고 있고, 내가 속죄를 하려면 내 가해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점에 관한 얘기를 하고도 싶었어요. 보다 다양한 해석을 독자들이 해주시면 저는 좋고요. (웃음) 그렇지만 제가 소설을 쓰면서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얘기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운명. 그 운명 앞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어린 남녀’ 같은 설정이요. 이 소설은 결국 연애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기도 했습니다.


그 테마에 제가 좀 혹해 있어서, 다른 데도 많이 나옵니다. (웃음) <뤼미에르 피플>의 제일 마지막 단편도 무당이 먼 미래를 보고, 자기가 1999년에 죽는 걸 아는데, 죽기 1년 전에 프랑스 수도사랑 연애를 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로 가는 얘기예요. 예정된 결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죠. <표백>의 세연도 언제 죽어야지 날짜를 정해놓고 실행하는 인물이고요.


SF에서 자주 보는 테마여서 그런 것 같아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외계 언어를 읽다 미래를 보게 되는, 딸의 미래를 보게 되는 이야기였죠. <듄>의 황제도 <그믐...>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왕국과 자신의 아이들을 살리려면 중간에 아내가 죽고 자기가 눈이 멀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죠. 왕인 자신만 살려면 자기가 배신자를 미리 처단하면 되는데, 황제는 사막으로 갑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였죠. SF를 보면서 자주 보던 테마에 제가 혹했고, 저는 저대로 그 테마가 인간의 운명 얘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다 죽잖아요. 결국 이별할 건데 아둥바둥 열심히 살잖아요. 저는 겁이 많아서, 개를 너무 좋아하는데 개를 키우면 결국 개가 죽게 되니까, 그 이별이 너무 싫어서 못 키우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용기를 내 키울 생각이지만요. 아내가 유학을 갈 때도 헤어지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헤어지고, 계속 만나고 했었고, 이런 식의 딜레마를 여러 번 겪기도 했어요.


제 소설에 반복되는 테마들이 있죠. 20대 얘기도 제가 혹해있는 테마고요. 자살도 그렇고요. <그믐…>도 사실상 자살이고, <뤼미에르 피플>의 단편 상당수도 사실 자살이잖아요. 죽을 때, 죽기 직전에 인생을 반복할 때 이 인생을 똑같이 다시 살 생각이 있느냐고, 모든 걸 그대로 반복해야 하는 조건으로 다시 살라고 하면 과연 그렇게 할까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안 돌아간다고 대답을 한대요.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는 거죠. 제가 지금 마흔 살인데, 육십 살이 된 저에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겠느냐,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삶이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긍정하고 싶어요. 제가 현재 겪는 어려움이 있고, 불편함과 두려움도 있고 한데, 총체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을 ‘살만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 비극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쓰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


짧고 정확하고 잘 읽히는, 이야기의 속도감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걸 더 중요하고 생각하는, 그런 문장이요.


문장도 그렇고, 챕터도 그렇고, 제 성격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자 생활 때문인 것도 같고요. 메시지가 선명한 책은 좋아하지 않지만, 단위로, 문장으로 끊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딱 떨어지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직 소설가로서 3라운드 게임을 못 벗어나고 있고요. 9라운드 게임을 해도 중간에 헤매지 않고, 매 챕터를 제가 장악을 하고, 긴장감을 잃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아직 그건 안 되는 것 같아요. 드라마도 연장 방영하면 주인공이 늘어지는 걸 넘어서서 이중인격자가 되고 캐릭터가 붕괴가 되잖아요. 그런 게 없게 쓰고 싶어요.





말씀하신 대로 기자로서 글쓰기를 오래 하셨잖아요. 소설가의 글쓰기는 방식이 다를텐데, 의식적으로 다르게 쓰려고 하시나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표백>이나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지금 보면 고치고 싶은 문장에 되게 많아요. 기자 식 문장이에요. 고유명사를 정확하게 쓰려고 하는 습관이 있었죠. ‘사 마셨다’로 쓰면 되는데, ‘오후 2시 합정역 3번출구 인근 GS25에서 사 마셨다’라고 쓰는 식으로요. 기자 생활을 하며 이런 훈련을 많이 해서 ‘사 마셨다’라고 잘 못 쓰겠더라고요.,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죠. 기자적 글쓰기의 명확한 묘사, 늘어지지 않는 긴장감은 계속 가져가려고 하고요.


전반적으로 단호한 문장을 좋아하는 게 성격의 반영인지, 기자 글쓰기의 반영인지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게, 기자를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자로서 훈련을 받으면서 저 자신도 단호해졌고, 제가 후배를 ‘깰 때’도 단호함을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수습 기간에 ‘사스마리’(주: 경찰 출입 기자)나 ‘하리꼬미’(잠행취재)를 하는 기간도 저는 성격 개조작업인 것 같아요. 20대 후반에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성격이 단호하지 않거든요. 기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면 관찰력도 좋고, 문장력도 좋으니 사실은 글쓰기에 대해서는 가르칠 건 없어요.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하잖아요. 그 순간에 가르칠 건 단호함입니다. 


수습기간에 관찰을 많이 해요. 그리고 그 관찰한 내용을 선임에게 불러줍니다. “지금 경찰이 뭘 어째가지고요, 뭘 어쨌고요, 얘는 얘한테 200만원을 줬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물어보죠.  “걔가 거짓말하는 거야?” 그러면 보통 머뭇거려요. “그건 아니고요.” 그러면 다시 묻죠. “서로 말이 다르잖아. 누구 말이 틀린 거야?” 여기에 바로 답을 하기 어려워요. 단호해지지 못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자기 문장으로 현실을 만드는 순간 현실을 재구성하게 되는 거잖아요. 현실을 규정하려면 성격이 엄청 강해야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기자회견을 봤어요. 이 사람이 자신은 여자친구를 때리지 않았다, 이런 내용을 발표할 때 “모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거짓말로 일관했다”라고 기사를 시작할 수 있죠. 이런 문장을 쓰려면 내가 너의 말을 거짓말로 규정해주마, 하는 단호함과 배짱이 있어야죠. 그 배짱을 몇 달을 잠을 재우지 않고, 혼을 내면서 성격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사건을 규정할 담력이 되지 않으면, 사건 기자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고요.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람의 성격이 바뀌어서 어지간한 일에는 잘 안 흔들리게 돼요.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은 제 주변의 세계를 제가 규정짓는 작업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라고 명명하면 한국이 ‘헬조선’이 되는 거죠. 제가 늘 해오던 작업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두렵진 않았어요. 제 문장은 단호한 문장이고, 세상을 규정지으려는 문장이에요. 제 문장에는 권력의지가 담겨있어요. 어떤 소설들은 멀리서 어떤 풍경을 그리죠. 저는 이런 소설을 보면 아름답지만 권력의지가 없는 문장을 봅니다. 그 문장이 나온 과정도 이해해요. 어떤 아픈 현상이 있을 때 아프게 묘사하고 싶은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그게 저의 의지하고는 매우 달라요. 저는 비극을 현상 그대로 독자에게 번역해서, 언어라는 심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가가 아니에요. 슬픔에 대해서도 넌 슬프고, 넌 비겁하고, 너는 지금 용기가 없는 거다. 이렇게 규정짓고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어요. 기자일 때 성격이 바뀌었고, 성격이 바뀐 결과 이런 문장을 쓰게 됐어요.





<그믐…> 작가의 말에 소설을 쓰는 세 번째 이유가 ‘돈’이라고 하셨죠. 소설을 쓰는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는 뭘까요?


아까 말씀 드린 ‘권력의지’와 비슷합니다. 제게 세계를 규정짓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는 차원을 저는 ‘실존계’라고 부르는데, 실존계에선 제가 너무나 허무주의자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죽을 순 없고, 어쨌든 살아있으니 이유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 실존계를 토대로 그 위에 쌓아 올린 ‘의미계’에서는 초월, 진보, 사랑, 공동체 같은 가치를 삶의 이유로 내세우죠. 무언가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하다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의미계는 사람이 규정하기 나름이니, 그 의미계 안에서는 제가 규정하는 이미지대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잖아요. 소설쓰기가 저를 둘러싼 의미계를, 제가 보기에 더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결국 책이다


독자 통계를 보니, 장강명 소설의 주 독자층은 20대, 30대였어요. 


앞으로 보다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10대 독자, 40대 남자 독자가 좋아할 소설도 쓰고 싶어요. 제 소설의 주 독자층이 20대 30대 여성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이 사람들이 ‘한국문학’, ‘문단문학’의 독자들이라는 생각도 해요. 지금은 40~50대 남자 독자가 좋아할 만한(?) 남북관계에 관한 스릴러를 쓰고 있는데, 여기서 제 소설가로서의 근력부족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상반기에 끝내려 했는데 이제 절반 정도 쓴 상태네요. 10대에게 읽혔으면 하는 웹소설도 쓰고 있고요. 진입장벽이 높은 시장인 것 같아요.


나름의 역발상인데요. 전업작가를 한다고 할 때도 주변에서 엄청 걱정을 했어요. 저도 물론 걱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한국소설이 안 팔린다는 말이 많으니, ‘이렇게 안 팔리니 내가 조금만 팔리면 나에게 관심이 모일 것이다’하는 생각을 했고, 제 생각처럼 됐어요. <한국이 싫어서>가 아주 많이 팔리진 않았어요. 전체 베스트셀러 순위로 봐도 그런데, 정말 가뭄에 콩이 하나 나니까 사람들이 ‘우리 콩 예뻐’하고 호의적으로 봐주는 것을 느낍니다. 신문사의 문학담당기자, 서점, 출판사, 문단 안팎, 출판계 전체가 저를 응원해주는 것 같아요. 10년 전,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죠. 제가 작년에 생각했던 거에요. 내가 조금만 팔면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게 되어 있다고요. 제가 어떤 소설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소설이 영상과 경쟁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많은데요, 영상의 시대에 영상과 경쟁할 수 없으니 서사를 떠나 문장에 치중해야 한다, 이런 논리의 정반대되는 지점을 ‘라노베’(라이트노벨)가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영상이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텍스트라는 게 사람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서스펜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쥬라기 공원>도 참 잘 만든 영화지만, 역시 소설이 더 재미있잖아요. 익룡도 나오고 별거별거 다 나오고요 (웃음) 20대 독자들, 고마운 이십 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책을 선사해야겠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위선적인 것 같고요. 지금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열심히 소설을 써서 농장을 가꾸듯, 씨를 잘 뿌리고 수확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최근의 문단 관련 이슈에 대해 ‘결국 모든 걸 책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다른 업계에서 문단으로 들어오셨을 때 새롭게 보이는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동네 가을호 문단권력 좌담회에 제가 패널로 들어갔어요. 좌담회를 여섯 시간을 했는데, 당이 떨어지더라고요. (웃음) 마지막에 좌담회에 나온 소감을 한마디씩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로 얘기해야지 여기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제가 출판 평론가는 아니니까요. 언론계에 있다 출판계에 왔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언론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소설가처럼 소설을 쓰려고 하지만, 제 마인드, 업계를 보는 관점, 행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기자처럼 생각하고 기자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알라딘에도 인터뷰 요청을 드리고 취재를 하는 것처럼요. (주: 장강명 작가는 알라딘에 집필 중인 논픽션에 관한 자료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제가 일간지 기자였잖아요. 신문기자중에 다른 업계에 간 모든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일간지 기자가 제일 빠르고, 어느 업계로 가나 그보다는 느리다고요. 일간지는 제품 하나를 하루 만에 만드는 거니까, 출판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런 속도의 차이가 처음엔 먼저 느껴졌어요.


사람들이 기자가 되게 큰 갑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제가 기자로 있을 때는 어떤 취재영역에서는 저 자신이 을도 아니고, 갑을병정쯤 되는 영역에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취재를 할 때도 항상 낮추고, 12시까지 의원님 기다리고 했었죠. 저의 글도 정말 난도질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기사를 넘기면 차장이 뜯어 고치고, 부장이 뜯어 고치고 해서 글에 대해서 자존감을 과도하게 갖질 못했죠. 내 글은 항상 누군가 뜯어 고치는 것이라는 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출판계에 오니까 작가의 위치가 약간…황송하더라고요. 대접을 해주시면 물론 감사하지만, 프로토콜이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글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도 편집자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같았고요. 레이먼드 카버의 글을 편집자가 뜯어 고친 게 과연 옳은 일이냐 하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글에 대해서 편집자가 과도하게 발언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듭니다. 제가 11년 동안 글을 ‘뜯어고침’ 당해본 결과 차장, 부장의 지적이 굉장히 예리하게 지적할 때가 많았습니다. 단순한 교정교열이 아니라, 맥락이나 방향을 틀려고 할 때가 있는데요. ‘강명, 이게 아니라 이렇게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서 이런 애랑 인터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조언을 해줄 때, 물론 항상 그 말에 동의하진 않는다고 해도, 열에 세 번 정도는 정말 훌륭한 조언이라고 받아들일 때가 있었어요. 출판사에서는 그런 조언은 못 받아봤던 것 같아요. 제가 원고를 잘 써서 못 받은 걸 수도 있겠지만 (웃음) 사소한 영역은 조언을 받았지만 큰 틀에서, 결말 뒷부분을 완전히 고쳐야 한다든지 그런 조언은 대체로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알라딘 16주년 특별 책자 <끝내주는 책>에서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열렬히 추천해주시기도 했는데, 다른 소설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좋아합니다.





논픽션 작가 중에 좋아하거나 모범으로 생각하는 작가가 있으신지요?


조지 오웰이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정말 좋아하고, 그런 책을 하나 쓰고 싶어요. 정말 문장이 쉽고, 재밌고, <1984>같은 SF도 썼고, 르포르타주도 썼고… 아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 관해서도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을 같이 쓰고 있어요. 남북통일 스릴러와 문학상 관련 논픽션이고요. 소설을 쓰는 게 조금 더 힘들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가 에세이를 쓰는 식으로 쓰고 있어요. 제 작가적 욕심 중에 논픽션이 되게 큽니다. 기자일을 계속하는 느낌이고요.





앞으로도 자주 독자와 만나시게 될 텐데요.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발견한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돈 값 하는 작가, (일동 폭소) 책값이 안 아까운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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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보이 2016-09-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강명만 인터뷰고 다 타계였는데...장강명 타계로 보고 들어옴

억만장자 2017-02-21 15:01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