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얘기지만, 존재하고 있기에 존재해야 할 이야기. <이제야 언니에게>로 독자를 찾은 최진영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함께 나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강나래














황현진 작가의 발문에 묘사된 몽골여행기가 인상 깊었어요. <이제야 언니에게>가 탄생하기 전 후, 개인 최진영이 어떤 이야기들을 하며 지내셨을지 궁금합니다.


이 책을 쓰기 전 후에도 계속 글을 썼어요. 원고를 쓴 건 올 초였고, 이 글을 넘긴 다음에도 또 다른 마감들이 많이 있어서 또 다른 글을 쓰고 그랬었어요. 몽골 여행을 가기 전에 초교를 교정하고 여행을 갔던 생각이 나요.


제야의 여행이 진영에게로 이어지고, 서울로 돌아온 내가 진영의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내게로 전해지는 긴 여정은 이차원의 세계를 넘어서는 공명이었다. (발문 <끝까지 외우는 사람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 中)




<이제야 언니에게>는 이야기가 단단해서 빠르게 쓸 수 있을 만한 글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었고요.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하루가 궁금합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빨리 끝내는 편이거든요. 장편도 두 달 안에는 끝내는 편이이에요. <이제야 언니에게>도 쓰려고 마음 먹기까지는 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쓰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매일매일 썼어요. 일주일에 하루 쉬고 6일 쓰고요, 오후 시간은 무조건 쓰는 시간으로 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흐트러져서, 의식적으로라도 쓰는 시간을 지키려고 하고 있어요.




이전 작품에서도 학대 상황에 놓인 소녀라든지(<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종말을 맞이한 여성들(<해가 지는 곳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의 고통 등 (<구의 증명>) 참혹한 상황 앞에 놓인 인물들이 많았어요. 극한을 맞닥뜨린 이후, 그 이후의 삶을 대하는 태도, 의지 같은 것들이 읽히는 것 같아요.


제 소설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인물들이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그들이 대처하는 상황과 사건들이 다를 뿐 인물들의 성정은 비슷한 거 같고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것 같아요. 힘든 상황이 있을 때 그냥 당하고 있지는 않는 사람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저에겐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뜨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해가 지는 곳으로> 중)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언니에게> 중)




구성이 눈에 띕니다. 1부의 2008년, 2004년, 2007년, 다시 2008년 7월 14일. 그리고 2부의 2008년에서 2010년, 3부의 2012년에서 2014년, 2017년까지 ‘이제야’의 일기 3부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2008년 7월 14일에 대한 기록은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합니다. 이 일기라는 구성의 특징 때문에 제야 목소리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처음부터 제야의 감정과 거리감을 두기가 어려웠어요. 


이제야라는 인물이 적극적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글을 쓰고 싶었고. 그것에 가장 적당한 형식이 일인칭 시점이고, 일기일 거란 생각을 했어요. 가끔 삼인칭으로 바뀌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제야가 쓸 수 없을 것 같은 부분, 혹은 제야와 제니와 승호가 즐겁게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할 때 삼인칭을 썼어요. 날짜를 계속 쓴 이유는 일기 형식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지나간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2008년 7월 14일이 이제야에게 지나간 일이 아니라 계속 떠오르고 생각나고. 계속 제야의 삶을 죽이고 있고, 간섭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런 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날짜를 쓰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최진영 작가의 전작도 읽으면서 직설적이라 멈추게 되는 문장들이 많았는데요, 이 소설에서도 “승호도 그럴 수 있을까? 힘으로 제압하고 성기를 꺼내서, 그럴 수 있을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어른이 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중략) 나는 승호를 잃었다.” 같은 문장을 읽고 멈추게 되었어요. 이 문장을 읽으며 제야가 무얼 잃었는지가 명확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돌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제야의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인물들이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마음과 상처를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제 평소 성격이기도 하고요, 어디까지가 직설적인 문장인지 제가 그 감각을, 지점을 저는 모르기도 하고요.




범인인 ‘삼촌’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기에 혐의에서 빠져나갑니다. ‘합의서’를 쓸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요. 제야 역시 흔히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피해자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아입니다. 여고생인데,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술도 마셨고, 사건 이후 너무 침착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제야의 말을 믿지 않아요. 예전에 친구인 은비에게도 사람들은 비슷한 얘기를 했었고요. (“그랬지만 사실 오빠들이 나쁜 거잖아. 근데 선생님은 은비든 오빠들이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 같았어.”)


제야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어도 맥주를 마시지 않았어도, 제야가 어른들이 말하는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았어도 그런 말을 들었을 것이고, 제야가 더 큰, 일탈이라고 말해지는 행동을 하는 아이였어도 똑같은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피해자를 어떤 틀에 가두는 말은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피해자한테 하는 말들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소설 뒷부분엔 보면 돈이 없으면 사는 게 힘드니까, 돈이 적당히 있으면 살만하니까, 뭐 이런 식으로 가해자게 변명의 여지를 주기도 해요.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말들이 현실에도 실제로 많으니까요.


제야도 "당숙이 그러기로 마음먹는다면, 오늘이 아니라도 앞으로 마주칠 숱한 날 중 어느 날, 제야는 당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야갸 어떤 성격이었든 가해자가 그러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피해자는 이래야 해, 상처받았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해. 보통 말하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제야의 안에서 7월 14일이 완전히 완료된 사건이 아니지만 제야는 결국 대학도 가고, 남자친구도 사귄 적이 있고, 여행도 해냅니다. 일상이 아예 무너지진 않아요.


이 소설에서 제야가 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는데요. 만약에 그런 부분을 쓰지 않는다면 제야갸 그렇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거 같은 거예요. “네가 우울했으면 우울하지 않게 노력했어야지.” 하는 말들. 그래서 제야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저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피해자를 보는 시선이 가혹하잖아요. “그런 일을 당했으면 골방에 처박혀서 미쳐버리겠지, 너처럼 일상생활을 하고 그럴 순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피해자는 그냥 그렇게, 미쳐버리길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잖아요. 자신의 일상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오히려 의심하는 눈초리. 이런 것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피해자는 더 크게 상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가. 일상을 잘 살아가는 모습조차 비난 받을 여지가 되는가. 가해자는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다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그럴만 하다고 생각하면서 피해자의 삶은 이런 모습이든 저런 모습이든 다 비난의 대상이 되잖아요.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상처는….. 아니었다. 상처에는 완료나 흔적의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기생충처럼, 병균처럼, 생물처럼 산 채로 제야를 간섭했다. 지나간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불쑥 일상에 끼어들어 제야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야 언니에게> 중)




사건의 참혹함보다 그 이후 제야가 살아야 하는 삶의 혼란에 더 마음이 쓰였어요. 엄마에 대한 제야의 복합적인 감정도 그랬고요. 제야는 사건 이후 제니와 승호를 일정 부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야의 혼란이, 자신도 자신의 답을 모르는 상황이 마음이 아팠어요.


소설을 쓰면서 제야한테만 집중을 했고, 그 순간순간들에 제야는 어떨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상황이라면 제야는 저런 복합적인 감정이 들 것 같았어요. 엄마 같은, 가까운 존재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과 굉장히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그렇지만 함께 있으면 힘든 마음과, 그런 게 많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을 거 같더라고요. 꼭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나한테 힘든 일이 있으면 사실 그렇잖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없으면 괴로워하기도 하고, 그 비슷한 감정이 들지 않을까 했어요.


소설 마지막에는 제야가 나는 0이 되기로 했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이 부분에도 비슷한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니와 함께하면 좋긴 좋은데 힘든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자꾸 자기를 탓하게 되는 그런 마음도 제야에겐 있으니까, 제야가 자신의 그런 마음을 온전히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쓰고 싶기도 했고요.


제야는 엄마가 어서 떠나기를 바랐다.

다시는 엄마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가 이곳으로 와서 같이 살기를 바랐다.

엄마와 차를 타고 어딘가로 끝없이 떠나고 싶었다.


(<이제야 언니에게> 중)




제야는 겉으로 보기엔 도드라지는 점이 없는 아이로 묘사가 돼요. 말이 많거나 활달한 편도 아닝고요. 하지만 제야의 내면엔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이 있고, 여러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외국어를 쓰는 나라에 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제야가 이런 캐릭터여서, 겉보다 마음이 훨씬 단단한 사람이어서 사건 이후 제야가 화를 제대로, 정확하게 내는 점이 더 와닿았던 것 같았어요. 제야가 계속 품고 있던 칼처럼요.


제야도 힘들었겠죠. 뭔가 확고해지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굉장히 많은 질문이 많이 있었겠죠. 그날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을 거고, 늘 생각이 나고 곱씹었겠죠. 자기 혐오를 하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제야는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처럼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찾아낸 게 아닐까 해요.


분노와 증오도 있었겠죠. 나한테 다시 그런 일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울면서 사정하지는 않겠다,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번 그런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갖게 된 마음이 있겠죠. 사건이 일어난 후 믿었던 어른들에게 배신당하는 과정도 있었기 때문에, 제야가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런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해요.


누군가 내게 상처 입힌 일에도 내 잘못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타인의 잘못을 실수라고 이해했다.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작가의 말> 중)




강릉 이모는 어떻게 보면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에요. 강릉 이모는 경제적인 상황이라든지 가족 간의 갈등이라든지 육아와 결혼생활 같은 문제에 어느 정도 자유로운, 감정적으로도 제야를 돌볼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모’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오히려 더 조심스러웠다고(제야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를 장면을 쓸 때는 제야의 고통을 묘사할 때만큼이나 주저했다.) 작가의 말에도 쓰셨어요.



현실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제야에게는 이모 같은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물론 현실에서 혼자 싸우고 계시는 분께 박탈감을 주지 않을까, 고민도 많이 들었지만 이모라는 캐릭터를 씀으로써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야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서, 이모가 등장하게 되었죠.




이모와 제야가 함께 등장하는 부분에서 둘이 나누는 문장이 짧은 대화가 좋았어요. 이모는 제야에 대해 훈계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데, 제야를 그대로 두는 부분이 좋게 느껴졌어요.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부분입니다.


실은 내가 담배를 피운다. (중략)

그건…. 저도 피워요.

제야가 말했다. 

가끔 나눠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모가 웃었다. (<이제야 언니에게>


일단 저부터 제야에게 어떤 말을 하기 조심스러웠어요. 이모라면, 제야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입장이니까 이런 말도 상처가 될 것 같고, 저런 말도 상처가 될 것 같고, 주저하는 모습이 제야에게 또 상처가 될 것 같고 이렇게 생각이 깊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야 주변에서 제야를 지켜주는 어른의 모습은 이모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제야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으로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행동 같은 걸로 드러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장면들이 나오게 됐어요. 그런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제야는 이모의 병원으로 찾아가며 <자기 앞의 생>을 읽어요. “’낫지는 않아, 낫지는 않는단다.’를 심각하게 강조하는 것이 내게는 몹시 우스웠다. 마치 낫는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이 아팠어요. 제야가 읽을 법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제야가 어떤 책을 읽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자기 앞의 생>을 쓰게 된 계기는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는데요. 우연히 책장을 보다가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꺼내 보았어요.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이 제야에게 되게 아프게 다가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펼쳤고, 펼친 페이지에서 본 문장이었어요. 이것저것 여러 책 중 고른 게 아니고, 즉흥적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었어요.


제야는 이 소설에서는 소설을,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글을 못 읽는 사람으로 나오는데요. 아마 그래서 제야가 도서관에서 빼보는 책은 인체도감 같은, 과학적 지식이 있는 책을 읽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모는 “부끄럽더라. 어른이면서 어른 아닌 척 살아온 나한테도 실망했고, 어른인 척하면서 어른답지 못한 인간들한테도 많이 실망했어. 부끄러웠어. 정말 부끄럽더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모는 사건 이전까지는 제야와 별 교류가 없었던 사람인데요, 이런 이모에게도 제야와의 만남 이후 변화가 생겨납니다. 어른의 입장에서 소설을 읽다보니 이모의 말에 감정이입이 됐어요. 


제가 그런 어른이니까요.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아요. 저는 나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인데요. 그래서 제 이전 소설에는 어른에 대해서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났었고, 사실 좋은 어른은 잘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까 제가 어른이더라고요. 내가 어른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론 제대로 된 어른을 소설로 쓰지 않는 제가 염치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른인데도 어른이 아니라고 하는 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었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한 생각인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꼈잖아요. 그때부터 의식적으로라도 좋은 어른을 소설에 넣고, 내가 ‘이모’ 같은 사람일 수는 없더라도 쓰는 과정에서 이런 사람을 배우자, 노력을 하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다고 해서 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제야의 마지막 편지에서 제야는 좀 더 어른이 된 자신을 상상해요. 이모도 어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요. 최진영 작가가 생각하는, ‘어른이라면’ 이래야 한다, 혹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다양한 모습이 있겠지만요, 이 소설에서도 피해자한테 자꾸 책임을 묻고 그러잖아요. 자기가 책임을 지려는 어른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이 많았으면 좋겠고, 비겁하지 않은 어른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모’가 어떻게 보면 제가 원하는 어른의 모습인 것 같아요. 훈계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옆에 있어주면서 마음과 정성을 쏟아서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를 대하는 사람.




이 소설엔 나쁜 사람 말고도 좋은 사람들도 아주 많이 등장하는데요, 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중, 최진영 작가가 개인적으로 특히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실은 제니가 안쓰럽고 좋았어요.


사실 저는 이 소설을 쓸 때, 오직 이제야만 생각하면서 썼어요. 제니 캐릭터도 좋고, 이모도 좋고 하지만, 그냥 저는 이제야만 생각하면서 썼던 것 같아요. 다른 캐릭터를 많이 누르면서 쓴 느낌도 있는데요, 소설에서 제야가 더 잘 보이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 읽은 책 중 최진영 작가의 가슴에 유독 남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이 있을까요?


은유 작가님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책을 보면서, 왜 이 사회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가, 그런 생각을 했고, 사회의 부조리가 너무 느껴졌어요. 미성년자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모든 걸 제약하는데, 자기가 하기 싫은 일, 위험한 일은 모두 맡겨두잖아요. 이런 세상을 만든 건 어른들이면서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 이 책임을 다시 피해자에게 돌리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보면서 공감이 많이 됐어요.




제야가 읽었던 <자기 앞의 생>처럼, 이 책 속 등장인물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인물에게 어떤 책을 권할 수 있을까요?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이모에게라든지요.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프리모 레비의 책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독일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대답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른이라면, 자기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말로 상관없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인간이 저지르는 많은 악, 범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곧 신간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쓸 수 있는 만큼 계속 써야겠죠. 이제 곧, 10월 내에 소설집이 나올 거예요. (주 : 인터뷰 이후 <겨울방학>이라는 제목의 소설집도 출간되었습니다) 소설집도 6년 만에 나오게 됐는데요.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쓸 수 있다면 계속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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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나’는, 작가인 오랜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 여자대학 기숙사에서의 한때를 떠올립니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다른 걸 알게 됩니다. 은희경이 쓴 1970년대 여성 기숙사 이야기, 날렵하고 새로운 장편소설로 독자를 찾은 은희경 작가를 만나 끝없이 갱신되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김경영











1977년, 현재의 이야기


오랜만에 장편소설로 독자를 찾았습니다. 출간 이후 약 보름 가량 시일이 지났는데, 출간 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책 출간 이후 인터뷰를 성실하게 했구요. 책 쓴다고 못 만났던 친구들도 좀 만나고. 그래서 인터뷰 하고, 술마시고, 인터뷰 하고, 술마시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웃음)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집필한 소설을 지우는 동안, 은희경 작가가 지워야 한다고 생각한 이야기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이야기의 방향이 궁금합니다.


처음 십여 년 전에 이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자료도 많이 모아놨고요. 또 뭐랄까, 제게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면 원하는 것에 대한 선택적 기억력이 아닐까 싶은데요. 기억을 해내다 보니 이야기에 대한 디테일이 너무 많았어요. 책으로 엮기 위해 연재분 원고를 다시 보면서 그런 디테일을 많이 빼게 됐죠. 


처음에는 청춘의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진행하다 보니 현재에 관한 이야기가 됐어요. ‘현재의 내가 과거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이런 방향으로 가게 되면서 과거의 디테일에 대한 에피소드를 많이 빼게 됐어요.




많이 줄였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인데요, 그럼에도 1977년에 대한 묘사가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인 듯 생생합니다. 장소 등이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곳의 풍경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어요. 은희경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1977년 대학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기억을 하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물론 자료를 찾은 것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제가 그때가 강렬한 시기였기 때문에, 특히 그 시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할 때 실제로 저는 열아홉 살이었는데요. 갓 스무 살, 서울로 와서, 고향과 부모를 떠나서, 지금까지의 미성년의 삶을 떠나서, 내가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가는 독립된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에너지가 많았던 것 같아요. 최초로 자기 자신을 프로그래밍하는 시기여서, 기억력이 집중적으로 그 시기에 몰려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977년에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위대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미팅을 하고, 방학이면 기차를 오래 타고 여행을 가고, 실패하고 틀어지는 모든 과정들이 거시적이거나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어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섬세하게 느껴졌어요.


소소하고 섬세한 기억들을 남기고 싶었어요. 77년이라는 해를 재현하려는 의도보다는 개인들의 내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40년 전을 회상하면 뭔가 유형화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전형이 아닌, 그 사람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내면, 욕망도 있었고 개성도 있었던 고유한 내면을 그리고 싶어서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에피소드가 부딪치는 모습을 그렸어요.




정세랑 작가가 추천사에 남긴 “은희경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국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나와 닮은 목소리를 드디어 만나 그이의 차분하지만 낯설고 독보적인 말에 과녁처럼 관통당하는 일이다.”라는 문장처럼, 1977년의 이야기인데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사십년 전 그 시절은 이랬단다.” 이런 얘기로 쓰고 싶진 않았고요, 보편적인 젊음의 이야기.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현재의 자기 자신의 좌표를 읽는 관점에서의 과거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어요.






기숙사, 사람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9쪽)가 이 소설의 첫 문장인데요, 김유경과 김희진의, 서로의 단점을 알고 있고, 사실은 서로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래 이어진 인간관계가 재미있었어요.


인간은 되게 복잡한 존재잖아요. 선악으로 딱 나눌 수도 없고, 다 섞여있고 그런 존재인데 사람들이 너무 선입견으로 타인을 재단하는 것 같아요. “나 걔하고 지금 알고 지낸 지 십년 됐어”라고 말하면 아 둘이 굉장히 친하구나, 서로 호감을 갖고 있구나 생각하겠죠.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런 다양한 관계, 인간의 다양한 면들에 대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문학작품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김희진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필스너’를 고르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지점부터 ‘은희경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실감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남과 비교해서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패턴에는 이미 익숙했다.” (17쪽) 같은 문장으로 한 사람을 설명하는 부분이 그랬어요. 특히 ‘패턴’이라는 단어는 장편소설로서는 <빛의 과거> 직전의 소설인 <태연한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상투적이지 않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을 포착해서 뒤집어보고, 그걸 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인물에 제가 많이 투영되어 있느냐는 질문도 들어봤는데, 물론 김유경에 많이 들어있지만, 김희진에게도 사실 많이 들어있어요. 특히 현재의 김희진은 소설가이기도 해서 저의 소설가로서의 자아가 많이 들어가있기도 했고요. 남을 끌어내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잘난 체 하는 모습도 제게 있어요. “다 먹어보니까 이게 최고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식으로요. 소설 속 인물 한 명에게만 나를 투영하면 저절로 그 인물 편을 들게 되는데, 여러 인물에 제가 각각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균형을 갖고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김희진 외에도 기숙사 동료들을 몇 가지 에피소드로 묘사하는 부분이 무척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전형들로 보이면서도 각각의 개성이 뚜렷해 보였습니다. 오현수의 섬세한 취향이라든지, 그 섬세한 취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곽주아라든지요. 장단점이 섬세하게 묘사되면서도 한 사람의 개성이 연쇄적으로 다른 사람의 개성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처음에 사람이 너무 많이 나오니까. 이걸 어떻게 구분을 하고. 그 캐릭터를 또 어떻게 해야할지 진짜 고민이 많았어요. 그렇다고 등장인물 수를 줄일 수가 없는 거예요. 각 개인 설명을 너무 많이 하면 늘어지니까. 관계에서 캐릭터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다듬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웃음) 짰었어요.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 소통에 폐를 끼친다."


김유경이 ‘말더듬이’라는 설정이 김유경의 회피적인 성격과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1977년 이후 김유경과 이루어지지 못한 남자친구들이며, 연락이 끊긴 기숙사 동료들은 대체로 김유경 본인의 선택으로 인연이 마무리되진 않았습니다. 첫 연애가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순간마저도 김유경은 적극적이지 않았고요.


일차적으로 말이 어렵다는 건 자기 자신이 소극적이게 되는 조건인 거죠. 제약을 갖는 거니까요. 처음에는 그런 자신의 조건 때문에 상황을 회피하다가, 결국엔 그게 자기 삶의 태도가 되어서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부딪치지 않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그런 삶의 태도를 희진의 소설을 보며 나중에야 돌아보게 된 거죠. 이전까지 알고 있던 자기 자신과는 다른 내 모습.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내가 회피하는 인간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시대의 부당함에 대한 김유경의 기억마저 무척 세밀했어요. 김유경은 여성을 ‘조강지처, 애인, 첩, 식모’로 분류해 품평하는 남학생들이 있는 도시에서 자랐고, ‘정숙, 노력, 순결’이 교훈이던 학교를 나왔습니다. 장소와 풍경에 대한 기억만 세밀한 것이 아니라, 부당하다고 느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시대에 대한 인상도 무척 정확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예전 소설인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면 “원래 세상은 이따위야” 하고 냉소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분리하는 식으로요. 예전엔 그렇게 회피했다면, 이 소설에는 나름의 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옳더라도 상황을 회피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거구나. 나 자신이 소통을 방해한 것이었구나. 그런 반성으로 나아갔다는 게 이 소설을 끝낸 후 작가로서 저에겐 후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처음에 이 소설을 쓸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아까 이야기했듯 시작할 땐 청춘의 이야기였고, 성장과 상실이 있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소설 속에서 김유경이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동안, 김유경이라는 인물이 자기합리화를 하며 상황을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냉소가 실은 많은 부분은 자기합리화, 회피 심리 기제였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의 변화가 이 소설에 있다고 봐요.






이야기의 양면, 내가 보는 빛의 방향


김희진의 소설을 접한 후, 김유경은 자기 버전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기 식의 필터로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지만, 김희진이 묘사한 ‘회피’에 대해 김유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유경이라는 캐릭터가 싫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주인공이라서 그랬을까요? (웃음) 김유경은 이야기 속에서 약자를 자처하고 있는데, 그게 실은 약자로서 주어지는 어떤 위상을 가지려는 회피였죠. 소설 속에서 자기 삶의 한계를 만들어버린 게 자신의 회피심리라는 걸 김유경이 깨닫는 부분이 있어요.


자기 단점을 정직하게 보는 부분이 좋게 보였던 것 같아요.


김유경은 자기 입장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 거고, 희진은 반대 입장에서 보는 거고 그랬겠죠. 그 둘의 이야기가 직접적인 갈등을 일으켰다면 설득력이 더 없을 것 같았어요. 어차피 인생을 보는 눈은 다른 거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가 보는 빛의 방향과 상대방이 보는 빛의 방향은 다른 것이고, 그 차이에서 새로움이 있는 것이니까요.


사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게 거의 결론 격인 것인데요, 김희진의 소설로 이야기가 끝나잖아요. 김유경이 전반적으로 소설을 이끌어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김희진의 소설로 끝난다는 점이 이 이야기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이야기를 존중한다는 느낌이 있을 것 같았어요. 김유경이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김희진을 재단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밉지 않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희진의 ‘나쁜’ 점이 서술되어 있지만 김희진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어요. 과연 김희진 입장에서 김유경은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은 친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김유경이 김희진의 도움을 받은 순간도 있었고요, 오래 친구관계를 이어오면서 김희진의 소설조차 관심이 없었던 건 김유경이 무심했던 게 아닐까 했어요. 직장생활을 하며 김희진에게 추문이 생겼을 때는 김희진의 말대로 김유경이 그를 변호해줬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김유경을 보면서 너만 잘났고, 너만 지적이고 냉소적이고, 너만 멋있게 살면 다냐. 나는 막 부딪치고, 깨지고, 내 욕망대로 살겠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김희진의 방식이 굉장히 다른 사고방식이긴 하죠. 처음에 연재로 썼을 때는, 김희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났을 때 김유경이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인데.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려고 하는 건 저 사람의 삶의 방식인데. 나까지 거기 연루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썼었어요. 이런 생각은 사실 나랑 거리 짓기를 하는 거죠. 처음엔 이런 태도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연재 후 글을 고치면서 이런 태도 자체가 나만 손에 뭔가를 안 묻히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중에 김희진의 ‘너 그때 날 안 도와줬잖아.’ 라는 대사를 넣었어요.


특정 인물의 편을 들지 않고, 그 사건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해요. 이사람 입장에선 이랬겠구나, 저 사람 입장에선 이랬구나 하는 걸 잡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선악이 분명하지 않으니 소설이 밍밍하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 저는 대신 조금 더 섬세하게 파고들려 노력하는 쪽이죠.





내가 과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현재에 어떤 새로움이 생기는지


과거의 이야기가 1977년의 이야기이고, 현재의 이야기가 2017년의 이야기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20대에서 60대는 실은 꽤 시차가 큰데요, 4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 두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특히 현재가 2017년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제일 아쉬운 점은, 십 년 전에 처음에 쓸 때는 오십 대 초반으로 쓰려고 했어요. 근데 이게 십 년이나 미루어지면서, 결국 육십 대 가까이 되어버리니까, 이십 대와 육십 대는 너무 멀더라고요. 오십대로 했어야 했는데, 조금 너무 멀어진 느낌이 들어서 아쉽더라고요. 2017년인 이유는 그 시점이 연재 시점이기 때문이에요. 현재적인 시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아무튼 소설 속 시점이 2017년이므로 주인공은 50대 후반이라는 점. (웃음)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서사라는 점에서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서사 영화 <벌새> 와 함께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90년대에 데뷔한 작가인 은희경 작가가 기억하는 90년대는 어떤 느낌일까요?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 <벌새>와 함께 이야기하는 리뷰를 보았어요. 수동적인 주인공이 아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이지적인 자의식이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았어요. 남성 주인공이, 역사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끄는, 그런 이야기가 70년대에 대한 이야기의 주였던 것 같은데요. 이런 여성 서사를 통해 충분히 사회 이야기며, 그 당시의 억압된 분위기며, 개인이 자신의 고유성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새의 선물>이 95년에 나왔어요. 작가가 어떤 작품을 때의 관점은 쓸 그 당시의 관점일 테고, 90년대의 제가 <새의 선물>을 쓸 때의 관점은 그 당시의 관점이었겠죠. 지금 제가 보는 건 또 다른 관점일 테고요. 그때는 좀 냉소적으로 세상을 봤던 것 같아요. 세상이 안 바뀌니까. 나라도 좀 물러나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세상을 본 것에 대한 반성이 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내가 회피했던 것 때문에 그 문제를 가지고 지금 젊은이들이 아직까지 싸워야 한다는 게요. 그때의 나는 그 방법(냉소)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내 또래 중에는 희진처럼 자기 욕망 구현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도 있고요. 세대간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내 냉소가 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게 달라진 점인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하셨듯 십년 전에도 이 책을 쓰셨고, 계속 너무 오랫동안 쓰셨다고 작가의 말에도 적어주셨는데요. 왜 이렇게 유독 오래 걸렸는지, 그리고 그렇게 오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꼭 완성하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 쓸 때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청춘, 성장 같은 키워드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쓰려고 보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왜 이 이야기를 써야 하나, 이게 잡히지 않았어요. 77년을 재현한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 답을 못 찾았다가, 쓰기 시작할 때쯤 아 이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이 소설은 “내가 과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현재에 어떤 새로움이 생기는지에 관한 얘기야” 생각하고 보니 방향이 잡혔어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소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작가로서 누구나 꼭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저는 유년에 대한 이야기를 <새의 선물>을 쓰면서 썼는데, 유년은 관점을 만드는 시기이지 실천을 하는 시기는 아니잖아요. 독립된 개인으로서 세상을 맞이한 청춘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프로그래밍하는지, 그 얘기를 꼭 쓰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3년 전에 ‘강남역 사건’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등을 접하며 그런 것들이 저를 자극했어요. 내가 왜 2017년에 1977년을 써야 하는지, 그 동기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그때 해결하지 못했고, 실패했던 것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그래서 젊은이들이 싸워야 하는구나. 그렇게 동기가 생겼어요.




그런 의미에서 결말이 특히 좋았습니다. 2017년 이후 2019년까지 우리의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김희진의 소설 속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김유경이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한 빛이었다.’ (339쪽)라고 묘시된 그 ‘빛’을 향해, 1977년에도 가닿지 못한 어떤 것들에 비로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게 되었어요.


소설을 읽고 쓴다는 건 인간을 이해하려는 거니까요. 인간은 다 다른 존재고 고유한 존재인데, 우리는 인간을 유형화해서 생각하고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김유경의 변화를, 마지막에 희진하고 같이, 빛이 모여서 가는 것 같은 장면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누가 진실이다 이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지점이 있고, 같은 방향으로 빛이 흘러간다.


사실 연재 때는 맨 마지막 문장이 없었어요. ‘환한 빛으로’가 마지막 문장이었는데요. 닿으려고 했지만 결국 닿을 수 없었던, 우리가 원한 미래가 오지 않았던 장면으로 끝냈었는데, 희진의 소설을 통해 희진의 인생과 유경의 인생이 모아지는 부분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김희진과의 우정이라든지, , 2017년 이후 김유경의 삶에서 새롭게 생겨날 인간관계라든지,, 이 이야기 이후에도 새로운 인생이 이어질 거라는 점이 좋았어요.


내가 과거를 보는 눈을 바꾸지 않으면 나의 새로움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과거는 완결이 된 게 아니죠. 내가 과거를 보는 눈을 바꾼다는 건 내 맘속에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바꾼다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과거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보는 눈을 바꾸면 과거가 달라질 거예요. 그렇게 과거를 보는 눈을 바꿈으로서 나의 현재에도 새로움이 있는 거죠. 우리가 과거를 다시 보면서 희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그게 내 인생의 새로움이 된다면 희진과의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다를 수 있겠죠. 과거의 빛이 나의 현재를 갱신한다는, 그런 이미지를 주고 싶었어요.





과거의 빛이 나의 현재를 갱신한다는 것


은희경을 읽고 자랄 여성 독자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은희경 작가가 함께 읽고 싶은 젊은 소설가, 특히 여성 소설가가 있다면 이에 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후배 작가들하고 좀 친한 편이라, 한 스무 명은 말해야 안 서운할텐데… (웃음) 최근에는 황정은 작가 소설을 좋게 읽었고요. 김연수 작가의 <시절일기>도 잘 봤어요. 엘리자베트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 라는 소설도 좋았어요. 최근엔 그런 섬세한 소설이 좋더라고요. 섬세하다는 걸 흔히 감정적으로 섬세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섬세함은 정확한 거거든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더 세밀하게 본다는 건데요, 더 세밀하게 본다는 것 자체가 그 고유성을 본다는 거예요. 선입견으로 미리 결정하고 보지 않고, 조금 더 깊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어서, 저는 그런 섬세한 소설이 좋았어요.



















타 매체 인터뷰에서 “지금의 시대가 잘못돼 있다면 당시 시스템에 수긍하고 안주해왔던 제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보았는데요. 은희경을 읽고 자랄 앞으로의 독자에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책에서 바라는 게 뭘까 생각했어요. 물론 재미도 바라고, 새로운 생각도 바라겠지만요. 기사를 보니 리즈 위더스픈이 북클럽을 운영하면서 책을 추천하면서 한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 사람은 내가 책에서 바라는 건 ‘나를 다른 세계로 끌어당기는 우아함’  (기사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16/2019091600206.html )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공감이 갔어요. 우리는 어쨌든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대체 내가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잖아요. 삶의 질, 삶의 만족도, 관계의 만족도라는 측면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방법 중, 이런 기회를 얻기 위한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독서도 있을 수 있죠.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는 인생의 팔십 퍼센트 정도는 이 시스템을 위해 산단 말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이십 퍼센트는 시스템을 벗어난 생각을 위해서, 자기 자율성을 위해 써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영화가 됐든, 여행이 됐든, 친구와의 만남이 됐든. 책이 뭔가 그런, 실용적이지 않은 부분의 가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책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문학 작품의 미적인 구성, 사유를 이끌어가는 나름의 장치, 이런 장치를 알아가는 것이 나의 감수성을, 내가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증진시켜주는 능력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해요. 


운전을 잘하려면 운전하는 방법, 수영을 잘하려면 수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듯, 책에서 재미를 발견하려면 독서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직접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친구관계며 정보를 쫓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스템에 굴복하는 거거든요. 이 시스템이 우리에게 시스템 외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문학작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복잡하고 접근이 어려운데, 문학작품을 꼭 읽어야 되는가?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할만한 거죠. 소설 쓰는 사람도 소설이라는 게 정말 익숙해지지 않아요. 쓸 때마다 늘 신인작가인 것 같고 그래요. 언제까지나 내가 긴장을 느끼고, 뭔가를 걸 수 있는 일은 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벽을 깨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싶다고 하셨더라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벽이 무엇인지, 깨고 싶은 이야기, 작가님의 언어로 듣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하는 게 큰 벽이 되는 것 같아요. 완고함, 경직성, 이런 것들 때문에 세대간, 젠더간 반목이 너무 심해지는 것 같고요.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저쪽 생각을 좀 더 알아보자.’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사건을 보는 게 일차적으로 우리가 깨야 할 벽이 아닐까 해요. 나라는 자연인이 속해있는 집단이 있죠. 나는 여성이고, 60대가 되었고, 기성세대고, 손자가 있는 가정 구조 속에 있고, 이런 여러 가지 나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사건에 반응을 하게 돼요. ‘잠깐만,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하고 나의 일차적인 반응을 계속 업데이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인에게 내 관점을 강요하기 때문에 반목이 고착화되고, 싸우게 되고, 혐오가 생기고, 이기적이게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에도 나쁜 생각이 너무 많았겠고, 졸렬한 생각도 너무 많았겠지만 눈에 안 띄었을 수가 있겠죠. 인터넷을 통해 모든 세력이 발언권을 얻게 되면서 혐오적인 편견,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좋은 말만 보면 작가로서 나 스스로가 균형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저는 뉴스를 보면서 댓글을 많이 보는데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 사회가 너무 품위가 없는 것 같아서 사실 하루 종일 우울할 때도 있어요. 옛날엔 허세라도 부렸는데, 요즘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기 자신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내서 다 보일 뿐이지, 더 나빠진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인간에게 선의가 있고,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잖아요. 작가가 있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면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어요. 저 역시 끊임없이 저를 업데이트 하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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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경애의 마음> 등의 작품을 차곡차곡 쌓으며 독자의 신뢰를 함께 쌓아온 김금희 소설가가 신작 소설집을 발표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읽고 짧은 질문을 건넸습니다.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소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질문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2018년 <경애의 마음>,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나의 사랑, 매기> 세 권의 책으로 독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2019년까지 계속 바쁘셨을 듯한데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올해는 계속해서 단편 작업을 하고 있어요, 계절마다 한 편씩 써내는 강행군인데, 오늘 대체 내가 왜 이런 힘든 일정을 잡았나 고민해보니 이상한 말이지만 단편 쓰기의 괴로움에 대해 잠시 잊었더라고요. 2018년 중반부터 단편 작업을 드물게 하다보니 이 만만치 않은 작업에 대해 간과하고, 단편은 원래 그 무렵 제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기량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장르이니까 그걸 확인하고 해내고 싶은 마음에 청탁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써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평생 살았던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를 왔어요. 그 과정은 지금까지의 저를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상처가 있다면 수습하거나 다음의 숙제로 남겨두는 시간이었어요. 못할 것 같은데 했고 지금은 그 시간을 지나서 적응을 하고 있어요. 





<경애의 마음> 속 '공상수'도 실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이러한 '이상한'사람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의 은수와 사장. '어딘가 다른 중력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체스의 모든 것>의 노아 선배. "김수정이 그동안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이상한 남자는 윤이었다."로 묘사되는 <새 보러 간다>의 윤 같은 사람들. 이 사람들의 '독특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인지 느끼게 합니다.


단편 속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들이 그렇듯 어느 한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의 두 사람도 그러한 면에서 서로 한 번도 마주보지 않는 애정의 감정이라는 축을 온전히 담당하고 있어서 이상하거나 알 수가 없을 것 같은 인상을 남긴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기도 하잖아요. 정확히 알기 전에 사라지고 다시 이어졌다가도 어느새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고요. 그런 경험을 살려서 인물을 불러오고 최대한 알 수 있는 만큼만 세공해서 그려넣고 그 개성이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면 저는 작가로서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니까 소설을 빌려 말한다면 <새 보러 간다>의 김수정이 그랬듯 “나는 아주 이상한 남자를 최근에 만났는데 왜 이상했는지를 오늘은 까먹고 말았다. 그렇게 휘발된 이상함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인데 이상함의 내용은 텅 비어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도다.” 하는 식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소설에서도 수정이 윤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듯이요. 만약 여러분이 이상함을 느끼셨다면 다행히 제가 느낀 의문이 휘발되지 않고 소설에 남았다는 얘기일 것 같아요.


 


소설 속에선 이 '이상한' 사람들에게 품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단순한 특성만으로는 호감이 가는 사람,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의 사장은 호감이 가지 않는 매뉴얼을 지닌 사람인데도,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체스의 모든 것>의 '나'는 노아 선배가 무안을 당하는 상황을 보며  "...선배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상함'을 의식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 이상함에 대해 '편을 들어주는' 이야기가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관점에 따라 누구나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겠지요. 어쩌면 사회에서 집단으로, 어떤 로직을 만들어 개인들을 정상이라는 한편의 방향으로 몰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사회적 규율과 타인들의 평가를 의식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해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이상함에 대한 각자의 사유를 획득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고요. 




위로라는 관점으로, 눈이 머무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상상력만 있다면 불운한 사랑이란 없는 것이었다."(<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 "어쩌면 원래 산다는 것이 그런 걸까.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천체의 무엇인가에까지 계속 빚을 지고 가늠도 못할 잘못들도 하면서 사는 것일까." (<오직 한 사람의 차지>) 같은 문장이, 실패한 사람,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오랜 불행' 같은 것들을 품고 지내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준다고 느꼈어요.


그랬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에요. 일상을 살면서 느끼는 미궁의 순간들, 당혹스럽기도 하고 뭔가 마음을 흔들기도 하는데 도무지 이름 붙일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을 문장으로 옮겨냈을 때 저는 제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무언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오랜 불행'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인데 우리가 살면서 마음에 켜켜이 얹어놓았던 그 감정들을 꺼내어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해명해낼 수 있고 직시할 수 있고 그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그것을 소설의 형식을 가져와 담아낼 수 있는 것이죠. 




소설을 시작할 때 '빡치는' 감정에서 시작하실 때가 있다는 악스트 24호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작가의 말’에는 이 소설을 준비하는 시간을 이런 문장으로 적어주셨어요.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잃어버리거나 비극과 직면했다면 슬프다고 썼다. 어리석었다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용서할 수 없을 듯한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썼다.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이상한' 사람일지라도 좋아할 만한 부분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부당한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게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시게 되었는지, 2019년에 독자의 손에 놓이게 될 이 소설집이 어떤 마음으로 가닿길 바라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신촌에 일이 있어 다니러 갔다가 당인리발전소 근처의 카페에서 이 질문을 읽고 있어요. 신촌의 보도를 걷는데 문득, 십수 년 전 첫 직장을 다닐 때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집과 직장을 잇는 단순한 동선만 오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근처에 홍대라는 근사한 곳이 있는 데도 거기까지 놀러가는 일도 거의 없었죠. 그 바쁜 마음, 타도시에 와서, 혹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좀 위축되어 있던 스물세 살, 일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결기를 지녀야 했던 순간들이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어요. 만약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었다면 그 순간을 놓지 않은 채 완전히 그 안으로 들어가 머물렀겠지요, 하지만 걷는 동안에는 저는 잠깐 그것을 환기하고는 열심히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갔어요. 꼭 제 소설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독자 여러분의 그 내밀한 내면에 파문을 내겠지요,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돌이켜보게 하고. 그건 어떻게 보면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일지도 몰라요. 심지어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그런 시간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이미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읽거나 느끼거나 생각한 뒤에는 환한 밖으로 나와서 씩씩하게 걸을 줄 아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쓰는 저도 그랬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쓰고 읽고 있으니까요.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과 그것에 잠식당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그 감각으로 제 소설들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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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젊은작가상'이 10회째의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대상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인상적인 소설집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을 알린 박상영 작가가 수상했습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출간을 앞두고 박상영 작가를 만나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인터뷰에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 및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줄거리에 관한 이야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상영의 지금


2019년이 벌써 세 달 가까이 지났는데요. 올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제가 올 초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리고 한달동안 미국 뉴욕에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그때 재충전이 너무 잘 됐어요. 진짜 거의 삼 년치를 다 논 거 같아요. 등단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못 쉬고 글을 썼거든요. 너무 휴식이 절실했는데 연초에 쉬어서 그건 참 좋았고. 이제 또 두번째 작품집 낼 때가 다 되고, 운 좋게 상을 받게 되고 불러 주시는 데가 많아서 바빠졌어요. 수업도 나가고 있고요. 삼월 이후로는 단행본 정리도 하고, 한겨레에 에세이도 연재하기 시작했고, 청탁도 있어서, 무진장 바빠질 것 같아요.


두번째 소설집을 준비중이시라고요.


여름 지나서 창비에서 나오게 될 듯해요. 작년에 운 좋게 청탁을 많이 주셔서, 상반기에는 젊은 작가상 활동을 하고, 하반기엔 소설집을 내는 계획입니다.


일년 텀으로 작품집을 내시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그렇죠. 거의 안 내시는데, 작가들도 예전과는 다르게 계절마다 내시고, 그런 분들이 추세인 것 같아요. 세상이 빨라지니까 작가들도 그와 발 맞춰서 왕성하게 생산해야 하지 않나 해요. 아직은 신인이고, 초기니까요. 첫번째 작품집이 제 예상보다 잘 되기는 했지만, 좀 더 대중에게 각인을 시키기 위해서는, 잊혀지지 않게 부지런히, 꾸준히 내고 싶어요. 소설이 됐든, 에세이가 됐든, 단행본을 일이년 주기로 꾸준히 내는 게 사실 목표입니다.






그럼 오늘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문장이 무척 유머러스합니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는> 에서는, “기차는 매일 매시간 돌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같은 문장이 재미있게 읽혔어요. <부산 국제 영화제>의 “언제부터인가 눈물보다 콧물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노화의 징후인가”(<…자이툰 파스타> 106쪽) 같은 장면도 재밌었고요.


말씀해주신 두 상황은 실제로 제가 생각했던 것, 느꼈던 바를 썼어요. 나이 들수록 울면 눈물보다 콧물이 나오고, 코가 막혀서 목소리가 안 나오고 그럴 때가 많더라고요. 또 팀장님이 헛소리할 때면 우리 모든 사원들이 속으로 다 딴생각 하잖아요. 저는 평소에 신랄한 사람이기도 하고, 위기이거나 슬픈 상황일 때 웃음으로 주로 극복하고 회피하는 사람이거든요. 작품에 그런 제 인간됨이 반영되어 드러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는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의 활력이 좋았어요.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인데요.

 

−더 투명한 쪽이 광어입니다.

−네?

−둘 중에 살점이 더 투명한 쪽이 광어다, 생각하면 구별하기 쉬울 거예요. 더 쫄깃한 쪽이 우럭.

−그럼 오늘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맞고 틀려요. 당신이 맛보고 있는 건 우럭, 그러나 그것은 비단 우럭의 맛이 아닙니다. 혓속에 감도는 건 우주의 맛이기도 해요.

−네?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말씀이신지……


‘오늘 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이 대사가 동해에서 실제로 나눈 대화의 일부라고 인터뷰하신 걸 문학동네 봄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보았습니다. 이런 대사가 나오게 된 상황들이 궁금합니다.


주로 남이 했던 재미있는 말들은 메모를 해요. 친구들하고 놀다가 웃긴 얘기 나오면 소설로 써도 되냐고 묻고 에버노트 같은 데에 적어 놔요. 제가 했던 말들은 평소 제 말버릇이라서, 소설로 쓰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플러팅의 장면은 트위터에서 리트윗도 많이 되고 언급도 많이 되더라고요. 제가 실제로 그런 얘길 했던 건 아닌데, 원래 제가 말장난 하는 거 좋아해서 그런 상황을 쓰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보다 말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 (웃음) 말 잘한다는 말은 좀 들었어요. 어릴 적부터도 왜 ‘나대는 애들’이라고 하는, 좀 그런 스타일이었든요. (웃음) 반장하고 앞에 나서서 얘기하는 거 좋아하고. 사실 본래 성형은 내향적인 것 같은데요, 웃기기 좋아하고 무대적인 자아가 좀 있는 것 같아요.


말의 활력 때문에 글을 읽으며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는 그 장면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 발화가 됐던 것들이 아닐지라도, 소설 쓰면서 그렇게 읽히기를 너무 바라면서 쓰거든요. 죽어있는 대화문을 제가 별로 안 좋아해요. 물론 그런 멋있는, 유려한 대화문이 좋을 때가 있는데, 저는 그런 소설보다는 진짜 옆자리에서 떠들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를 항상 바라고 있어서, 그렇게 읽어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 감사합니다.




사랑을 하는 상태에 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화자가 ‘형’을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와 닿았는데, ‘그’의 캐릭터는 “그렇게 숨이 가쁜 채로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그가 한 번도 내 쪽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연유 없는 절망감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같은 문장이 묘사하는 상대방의 모습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어요.

 

저의 독자들, 저의 동료 작가들도 이 소설의 ‘형’ 캐릭터에 대해선 그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인물이 못 그려졌다는 게 아니라 비호감이라고. (웃음) 그걸 의도한 거는 맞거든요. 사람이 워낙 상황에 몰리면, 좋지 않다는 걸 자기가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람과 이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의지하고 빠져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 상황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나한테 좋은 사람 찾기가 저는 되게 어렵기도 하더라고요. (웃음)


첫사랑은 아니지만, 거의 첫사랑과 다름없는 감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첫사랑이 미숙한 이유가, 경험치가 없기 때문도 있지만, 저는 실질적으로 처음으로 맺는 전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부모님과는 어떻게 보면 태어날 때부터 강제적으로 맺게 된 관계인데, 연애 관계는 내 처음과 끝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속성의 관계를, 인간 대 인간으로 전적으로 나를 열게 되는 관계를 처음 선택해서 맺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미숙한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첫사랑의 미숙함 같은 것들을 두 사람 모두에게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은 화자가 사랑한 나이가 많은 ‘그 형’도, 주인공 화자를 어떤 의미에서 이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받아들일 수 없고, 감정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됐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스스로를 가둬온 시간이 길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주 : 박상영 작가의 소설에서는 아래와 같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제제는 단 한순간도 어딘가에 현혹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매일 사랑을 하고 살았는데 꼭 가당치 않은 대상들을 골라 사랑하는 재주가 있었다.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 중)






굳이 부정할 필요도 비관할 필요도 없는


인물들이 노는 것조차 참 열심히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생을 낭비하는 것조차 열심히 하는 인물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 밑바닥엔 허무함 같은 게 읽히는 것 같아요.


그게 제가 느끼는 시대감각, 저희 세대의 감각인 것 같아요. 좀 진부한 말이지만, 다들 ‘무한경쟁’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 한 명도 없잖아요. 이 사회는 열심히 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구조를 이미 갖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이유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지만 다들 열심히는 살아요. 근데,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허무가 오는 것 같아요.


사람에겐 관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루 종일 시달리면서 매일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 그게 권장되어 온 사람들은 쉴 때도 그 관성을 버리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인지 저 역시도 놀 때도 치열하게 노는 편이에요.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술도 정말 끝까지 마시고요. 소설 속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제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삶의 모습과도 되게 닮아 있는 거 같고, 에너지가 많은, 내적 에너지가 많은 저의 모습과도 닮아있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난리치고 연애해도 결국엔 아무 것도 남을 게 없다는 거, 그런 방향성을 애초에 가지지 못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허무감 같은 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허무함과 이어지는 감정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열심히 농담하고 치열하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있었어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는 엄마가 화자에게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라고 말해줘요.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에서는 “너 그러다 죽어. / 너도 죽어. 언젠가.” 라고 서로 대화하기도 하고요. <부산 국제 영화제>의 소라, <햄릿 어떠세요?>의 곰곰의 자살시도도 서술되고 있어요.


맞아요. 그게 작가로서의 제 가치관인 건 거죠 사실은. 저는 실은 좀 그런 비관적인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삶에 회의적이기도 하고요. 윤상이 (노래 <달리기>에서) 노래하기를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 노래가 저한테 위로가 되기도 해요. 지금 이렇게 연료가 끝나가는 것처럼 달리고 있는데, 이게 진짜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사실 많아요. 이렇게 힘든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지, 생각하고 있으면, 어차피 인간은 다 죽는 거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 똑같이 죽는다. 생각하면 그게 되게 위안이 될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건 허무와 함께 오는 필연적인 귀결인 것 같아요. 적극적으로 죽음을 갈망하는 건 아닌데요, 죽음을 끝없이 생각하는 게 현실을 살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자, 지금은 이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서 사실 태도가 비관적으로 보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위로를 하는 맥락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도 있었고요.


남미의 죽음 축제(멕시코 축제 ‘죽은 자의 날’)도 그냥 축제잖아요. 애니메이션 <코코>에도 나오듯이요. 자살, 죽음, 이런 말은 끔찍하고 오지 말아야 될 상황으로 터부시되는 측면들이 좀 있었잖아요. 근데 오히려 그게 저는 생을 더 똑바로 바라보게 해주는 투명한 거울 같은 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굳이 부정할 필요도 비관할 필요도 없는.




굳이 리모와 캐리어를 쓰고, 굳이 파라다이스 호텔을 예약하는 사람들. 브랜드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궁금했습니다. 자이툰 파스타의 ‘왕샤’(왕샤넬의 줄임말로 서술되어 있습니다.)는 샤넬을 쓰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샤넬이니까. 나는 그런 게 좋아. 그냥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거. 다른 걸로 대체될 수 없는 것들.” (<…자이툰 파스타> 156쪽)


삶에 뭔가 중심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 브랜드 같은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브랜드 산업이라는 게, 유일무이하다는 가치를 파는 거잖아요. 사실은 그렇지 않고, 다 똑같은 캐리어고, 호텔이고, 신발인데도요.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면 제대로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니까 그런 데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캐릭터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광고회사를 다녔었고,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기도 해서 브랜드에 대해 많이 알기도 하고, 브랜드 홍보도 어떻게 보면 스토리텔링이라 브랜드 자체에 관심도 많긴 한데요. 저는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별로 안 해봤어요. 브랜드에 대해서는 실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재밌어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주변에도 돈 많이 벌고, 브랜드 좋아하고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런 걸 관찰하는 게 재밌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브랜드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허무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어요. 


허무하죠.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사는 순간, 들고 있는 순간, 그 잠시의 쾌락일 뿐이지, 그게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끊임없이 갱신해주지 않는다는 걸 다 알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또 광고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사고 싶게 만드는 게 ‘개수작’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브랜드의 고급 이미지를 만들고 하는 게 자본주의의 끝이라고 생각해서요. 어떻게 보면 그런 의미에서도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인간이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이렇게’가 중요하고 들렸습니다.) 출근하는 걸 다 싫어하는데도, 하고 있잖아요. 이런 욕망을 창출해내는 게, 구조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수단인 거라고 생각해요. 


부정적으로 보면 되게 허상이고, 나쁘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뭔가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도 사실 삶의 방편 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퇴직한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출퇴근이라는 시스템이 돈을 벌기 위해, 생산성을 위해 만들어진 거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현대사회는 농경사회와는 구조가 다르니까, 직장이 있고 출퇴근을 하도록 해서, 삶에 있어 일상의 리듬을 부여하고, 의미를 만들어주는 게 사실 인간에게 필요한 거구나 싶어요.


글을 쓰면서 제가 하는 질문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소설들을 계속 쓰는 것 같고요. 브랜드에 대한 욕망에 대해 쓰는 것도 역시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상영과 소설 사이의 긴장


전작에서 보았던 에피소드가 비슷하게 나오는 게 재밌었습니다.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사이엔 노래방 리모컨을 훔치는 에피소드가 유사하게 등장하고요. <부산 국제 영화제>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사이에는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엄마의 병간호를 하는 ‘백수’상태인 자식의 서사가 비슷하게 등장해요. 


의도한 게 맞아요. 손보미 작가의 단편에서 <담요>에 나오는 인물이 <애드벌룬>에 나오고 그런 것처럼, 저도 다른 작가들이 쓴 작품이 바통터치를 하듯 연결이 되는 게 독자로서 재밌어 보였고, 작가로서도 소재며 인물을 연결해 활용하는 게 재밌었어요.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쓸 때 병이 걸린 엄마에 대한 전사를 소설 속에 포함을 시켜 놨다가 분량이 너무 늘어나서 전사를 다 들어냈어요. 다른 소설 한 편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적으로 써보자는 생각을 했었고, 설정으로 남겨둔 후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작업에 들어갔죠. 그 전에도 이 이야기에 대한 복선 같은 얘기는 다른 작품에서 했었으니 이번엔 ‘암 투병을 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중요한 주축으로 삼아서,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저희 어머니께서 암투병을 오래 하셨고, 그 일화들이 20대의 저에게는 되게 깊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에 천착한 가정 역시 제가 20대에 겪은 요소의 일부이고요, 기독교적 가치관의 영향권에 항상 놓여 있었고요.


노래방에서 마이크 훔치고, 리모컨 훔치고 이런 에피소드는 노래방을 좋아하고 재밌을 것 같아서 썼어요. <가만한 나날>이라는 소설을 쓴 김세희 작가와 제가 아카데미에서 스물 몇 살에 만나서 합평 모임을 만들었었는데, 그 모임의 이름도 ‘로얄 노래방’ 이었어요. 그 정도로 노래방이라는 공간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적인 공간이잖아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재밌는 요소가 많아서, 쓰는 게 재밌어요. 제 2집에(두번째 소설집) 들어갈 소설들도 전작의 어떤 요소들을 가져온 소설들이 많을 것 같아요. 연작 소설도 포함되어 있고요. 그러니까 많은 기대를… (웃음)


제가 한 인물을 만든 후 잘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고도 길게 하고, 서사도 쭉쭉 뽑아 나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소설이 단편으로는 분량이 넘치고 하네요. 올해부터는 장편 작업을 계속 하면서, 중장편 소설 위주로 계속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하반기에는 책도 낼 계획이고, 장편 연재도 문학동네 카페에서 할 예정입니다.




젊은작가상 수상 소감 중 “이 소설의 특정 장면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그대로 잘라 붙인 것이나 다름없어서 쓰는 동안 꽤 힘겨웠으며.” 라고 말씀하셨어요. (주 : <…자이툰 파스타>에서는 이런 재치있는 대사가 등장합니다. “박감독님은 요즘 뭐하고 사시나요. 네이버에 검색해봐도 펜싱 선수만 나오던데.”) 소설은 픽션이니 가공되는 부분이 많겠지만, 간혹 소설 속 인물이 작가 본인으로 읽힐 법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는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적는 기자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사실 소설은 소설인 거죠. ‘펜싱 선수’ 구절은 사실 웃기려고 쓴거 같아요. 독자들이 소설을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갑자기 진짜인가? 생각하는 순간, 그 긴장감을 되게 좋아해요. 작가와 화자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다 헷갈리는 순간, 그걸 독자로서도 즐거워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에도 그런, ‘사소설’적인 요소가 있어요.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신경숙의 <외딴 방>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 이런 작품들을 좋아해요. 기본적으로 소설을 이렇게 쓰는 게 저는 되게 재미있어요. 의미심장하게 받아 들여지길 바라는 건 아니고요, 소설을 쓸 땐 모니터에 비치는 나를 보며 쓰게 되는데, 내가 그런 나를 웃기려고 하는, 웃기려고 쓰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저를 위해 하는 작업이니까, 저에게 중요했던 시절이나 문제 같은 것들을 소설에 담아내서 쓰고 그러면 조금 해소가 되는, 해소까지는 안 될지라도 그 문제를 그대로 바라보고, 그 상황을 나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트려 놓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완전 잘 만들어진 가짜’라고 느껴지는 작품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요소가 있다면 독자도 이입하기 좋으리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취향에 따라 이런 작법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이 첫 문장, 인물, 장면 등등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그 시작점이 궁금합니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했어요. 모자가 조각공원에 앉아서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올림픽공원의 그 장면이 저에겐 강렬했어요. 다른 작품은 다 달라요. 캐릭터에서 출발한 작품도 있고요. 저는 문장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고, 캐릭터나 장면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캐릭터에서 시작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항상 길게 썼다가 덜어내게 되는 편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기호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우럭 한 점’에서는 상대방을 귀엽게 느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평소에 어떤 사람을, 어떤 상황을 귀엽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다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귀엽다’고 말할 때가 많아요. “걔 어떻게 생겼어?” “귀엽게 생겼어.”이런 식으로요.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라서 그게 귀여운 거죠. 좋은 사람이 머리 안 감고 나오면 그것도 귀여워 보일 때가 있잖아요. 눈꼽 껴 있고 이런 것도 허술해보여서 귀여울 때고 있고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 “저는 그냥 디바를 좋아하는 거예요. 게이들 다 그렇잖아요. 브리트니랑 비욘세 싫어하는 게이가 어딨어.”라는 대사가 나와요. <…자이툰 파스타>에서 왕샤의 플레이 리스트는 ‘듀스와 터보, 소찬휘와 채정안’ 이었어요. 소설 속에도 ‘디바’에 대한 묘사가 나오곤 하는데요, 최근 빠지게 된 ‘디바’가 있을까요.


‘디바’라기보다는 뮤지션이겠지만, 요즘은 백예린 씨를 좋아해요. 15&로 데뷔했을 때도 엄청 좋아했었어요. 기본적으로 제가 일상생활에서도 노래 잘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요. 백예린은 나오는 순간부터 ‘물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작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작곡도 더 잘하고 작사도 너무 잘하는 것 같아요. 이번 앨범도 본인의 100%를 다 보여준 것 같지도 않은데도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백예린을 되게 좋아하고요. 외국 아티스트들, 소위 말하는 솔로 여성 아티스트를, 1위하고 남들 다 좋아하는 그런 아티스트들을 다 좋아해요. 아리아나 그란데 좋아하고요.




넷플릭스 포함, 최근 본 영화/드라마 중 인상 깊었던 작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요즘엔 사실 예전 작품을 많이 돌려보고 있어요. <친절한 금자씨>를 개봉했을 때도 재관, 삼관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요. 주기적으로 보는 영화라서 얼마 전에도 다시 봤는데 또 좋았어요. 넷플릭스에서는 <포즈>라는 드라마와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 또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진짜 재미있게 봐서 여러 번 봤어요. 얼마 전 <원 데이 앳 어 타임>은 캔슬이 결정됐다고 해서 사실 지금 너무 슬픈 상황입니다… 최근 새로 본 영화로는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가 좋았어요. 쿨한 척 하지만 실은 되게 상처받았고, 티내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 그런 온도가 저랑 딱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2019 젊은작가상 이후


작년에도 젊은작가상을 수상해 수상작품집에 작품이 실렸는데요, 올해는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젊은작가상’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1회때부터,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모두 사서 모았어요. 대학생때부터 봤었죠. (김중혁 작가가 대상을 수상한) 1호가 나왔을 때, 대학생 때였는데, 그게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이 나요. 습작생 때도 이런 상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사실 제가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거의 못해서, 작년에 받을 때도 되게 놀랐거든요. 또 작년에 받았으니까 올해 받을 거란 생각은 안 하고 있었죠. 대상에 대해서는 꿈도 못 꿨어요.


제가 받게 되어 너무 기쁜 마음이 크고, 지금까지 수상하신 분들 목록을 보면 대단하신 분들이라 부끄러운 마음도 큰 것 같아요. 같이 수상한 작가들, 저랑 동시대에 쓰고 계신 작가들도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쓰고 계시니까요. 문학이 이것보다 저것이 낫다, 이렇게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상의 시스템에서 제가 선정이 된 거 잖아요. 처음 며칠은 너무 좋다가, 작품집이 나올 때가 되니 사실 걱정이 많이 돼요. 독자들이 ‘왜 이런 게 대상이야’하는 소리를 할까봐 두려운 것도 사실이고요. (웃음) 너무 이른 걱정이긴 하지만, 저 자신의 능력보다 이 상의 크기와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제가 이후 이 상에 걸맞은 작가로 남을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큰 것 같아요. 이제 어떤 걸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 제 소설의 ‘시즌 원’을 정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박소라 연작, 퀴어소설 연작의 연장선상에서 맞닿은 거죠. 작가로서의 퀴어 예술가, 이런 설정들이 모이는 지점이라서, 요즘은 그 이후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두번째 소설집에는 백 퍼센트 퀴어 소설만 들어갈 거 같고요, 그 이후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서사를 워낙 좋아해서 다종, 다양한 얘기를 쓰고 싶어요. 어릴 적 제가 정말 좋아했던 작가가 애거서 크리스티라서, 미스터리, 추리물에도 관심이 많고요. 아직은 더 쓰고 싶은 게 많아서, 실망시켜드릴 일, 기대를 배반할 것 같은 두려움이, 기대감이 사실 있죠.




출간 예정인 올 수상작품집 포함,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렸던 소설 중 인상적인 소설이 있었다면.


황정은 작가의 <상류엔 맹금류>를 좋아해요. 모두가 다 좋아할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함께 출간될 특별판에도 (주 : 수상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7 -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10주년 특별판) 포함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상류엔 맹금류>는 (좋아서) 소름 끼친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어요. 제가 <파씨의 입문>이라는 작품집을 정말 좋아했는데, 그 세계를 딱 정리하면서 그 다음 시점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때 작품들이 정말 소름 끼치게 좋은 것 같아요. <양의 미래>, <상류엔 맹금류> 같은 작품을 진짜 좋아해요.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도 너무 좋았고. 이장욱 작가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도 되게 좋아하고요. 


황정은 작가를 좋아해서, 작가와의 만남을 하실 때도 갔었거든요. 강지희 선생님이(주 : 평론가) 사회를 보셨는데, 제가 이전에 어떤 시상식 뒤풀이에서 강지희 선생님깨 황정은 작가 보신 적 있냐고, 저는 한 번도 못 뵈어서 황정은 작가는 ‘전설의 포켓몬’ 같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강지희 선생님이 제가 그 행사에 온 걸 모르고, 사회를 보시면서 ‘박상영 작가가…’하면서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너무 민망했었어요. (웃음)


작가님을 좋아해서 사인을 받으러 갔었는데요. 되게 멋있으셨어요.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한 세시간을 서있었던 것 같아요. 저만 이렇게 황정은 작가를 깊이 사랑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죠.


















소설의 미래


언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소설, 이야기라는 장르를 되게 좋아했어요. <단추로 끓인 스프> 같은 작품, 계몽사에서 나온 디즈니 문학전집을 거의 외울 때까지 읽었어요. 초등학교 때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봤고, <해리 포터>를 읽으면서 자라난 세대고요. 항상 글쓰기나 책읽기를 워낙 좋아했던 것 같아요. 작가란 직업이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건 고등학교 때 신경숙 작가의 <외딴 방>이라는 소설을 읽었던 때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때 수시준비를 하느라 저도 서울에 와서 혼자 ‘외딴 방’에서 수시 준비를 했는데요, 소설 속 인물이 고향에서 서울로 와서, 차가운 데서 무를 씻고 출퇴근하는 그 상황을 보며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방식의 교감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독자 누군가에게 소설로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이 직업이 되게 멋있는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도 내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대학 다닐 때는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는데도, 아카데미도 다녔었고, 대학문학상에 작품을 내서 상을 받기도 했어요. 대산 대학문학상에 응모도 했었고, 박완서 선생님께서 심사하셨던 계명문학상에서 차선 정도로 뽑혔던 적도 있어서 식사도 같이 하고 그런 경험들이 있는데요. 그런 경험들이 조금씩 저를 작가의 길로 끌어당긴 것 같아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잡지사 다니고, 광고회사 다니고 하면서 고생을 했죠. 글을 매일 쓰고는 있는데, 쓰고 있는 글이 지면, 보도 자료니까, 이런 글이 아닌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지문화원을 다니면서 되게 열심히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요, ‘소설을 더 열심히 공부해봐도 괜찮지 않겠니’ 하는 말을 들어서 힘이 됐죠.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가면서 본격적인 습작의 길로 들어섰는데요, 세희(김세희 소설가)와 일주일에 한번씩 80매씩 소설을 쓰면서 열심히 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소설 쓰기라는 것, 소설 쓰기가 아니면 내 삶의 다른 방편이 없다는 생각을 사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굳혔던 것 같고요. ‘밥벌이의 괴로움’이 소설을 쓰게 한 거죠.(웃음) 




최근 읽은 책. 알라딘 독자에게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을 이미 많이 읽으셨으리라 생각해서, 다른 작품, <나의 사랑, 매기>를 말하고 싶어요. 저에겐 너무 좋은 소설이었어요. 금희누나 문학의 정수라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너무 좋았고요.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도 너무 좋았고요.


소설 외로는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대안적인 가족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어요. 김승섭 작가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도 되게 재미있게 봤어요. 잘 쓴 산문, 한없이 잘 쓴 학술서를 보면 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김승섭 선생님의 글은 사실 사회학 서적에 가깝잖아요. 그런데도 읽다 보면 홀라당 넘어가는, 그런 경지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계속 소설을 쓰며 들춰보는 책은 김찬호 작가의 <모멸감>이라는 책인데요, 얇고 잘 읽히면서도 제가 직장생활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디테일하게 분석해주는 느낌이 드는 책이라, 소설이 막힐 때 한번씩 보면 ‘내가 그때 그런 감정을 느꼈지’ 하고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꾸준히 좋아하는 책입니다.






















올 젊은작가상으로 다시 독자를 찾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독자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항상 이런 답변이 어려운데요.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재밌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예전에 제가 문학을 통해, 소설을 통해 일종의 ‘치유’를 경험했듯이, 누군가 다른 분들도 되게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제 작품을 보고 일말의 가능성을, 소통이나 치유, 위로를 받으실 수 있다면 그걸로 저는 다 된 거 같아요. 작가로서 제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너무 감사해요.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때 인터넷 서점에 달린 댓글인데 ‘곁에 있어 주고 싶은 사람들’ 이라고 적어주신 평이 기억에 남아요. 그 수많은 댓글 중에서 그 얘기가 기억에 엄청 남는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게 그건 거 같아서, 그렇게 말씀해주신 게 너무 감사했어요. 저 역시도 곁에 있어 주고 싶은 사람이고, 독자의 곁에 있고 싶은 그런 소설, 그런 작가가 되고 싶고요. 여러분께도 그런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소설을 제 힘 닿는 데까지 끊임없이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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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 수상 소감



오늘 아침에 요가를 마치고 나서, 수상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7월부터 취리히에 머물고 있는데, 내일부터 한 달가량 취리히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 있을 예정이었다. 인터넷이 없는 그 여행 중에 쓰여질 이 짧은 글은, 이곳 취리히에서 시작하여 여행지의 어디에선가 끝날 것이다.


많은 다른 작가들처럼 나도 작가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그건 번역이다. 창작과 번역은 많이 다르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비슷하여, 어떤 경우 창작은 번역이 되고 번역이 곧 창작이 되기도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략의 규칙이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국의 집에 머물 때는 주로 번역을 하고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 책을 쓴다는 것이다.


며칠 전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작품에는 유난히 여행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아마도 직접적인 이유는, 내가 여행 중일 때 주로 작품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같은 의미이긴 하지만 좀 더 다른 층위에서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인식하는 여성이면서 번역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앞에 많은 경계선을 둔 사람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알지 못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많지 않고,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더욱 적다. 얼마 전 취리히 구시가지의 한 오래된 서점에 갔는데, 여든 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 서점의 여주인이,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주로 얼굴로 기억한다고 말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사람을 이름이나 명칭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들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 편이다. 이름보다 더 매혹적인 말들이 내 기억 속에 있다. 내가 나에게 기억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한 말에, 혹은 내가 쓴 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말은 이야기일까? 이야기가 없는 말, 혹은 말이 없는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며칠 전의 인터뷰에서 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불연속적이고 사건이 여러 층위에서 일어나기도 하여 파편적인 콜라주처럼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야기’에 대해 매우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다. 나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픽션, 즉 스토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이야기를 꾸며내며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아이에게서 지금의 내가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스토리에서, 이야기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야기의 멀리서, 이야기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가 아닌 것에서, 이야기의 목소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야기가 사람의 이름이라면, 이야기의 목소리는 그 사람이 했던 말이다. 나는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이 했던 매혹적인 말은 오래오래 간직한다.”


이틀 전,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 취리히를 떠나 프랑스로 가서 그뤼네발트의 제단화를 보기 위해 콜마르Colmar에 들렀고, 연극제가 열리는 퐁따무송Pont-à-Mousson을 거쳐 독일로 들어왔다. 석양이 내리는 독일 튀링엔의 드넓은 들판을 보기 위해 고속도로가 아닌 시골길을 하루 종일 달리는 중이었다. 수확이 끝난 밀밭 가득 앉아있던 까마귀 떼가 어떤 신호인 듯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었다. 차 안에 틀어놓은 오디오극에서 말이 들려왔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은?”


뷔흐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에 나오는 대사였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 이렇게 변형되어 흘러나왔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며 또한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쓰는 자’라기보다는 점점 더 ‘글의 매개자에 가까워진다고 느낀다. 미래에 어떤 소망이 있다면 오직 그 역할을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어떤 소망이 있다면, 이름이 아니라, 말이 되고 싶다. 지금 내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충분히 멀지 못하고 충분히 없지 못하여,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부족한 목소리에게 단 한명의 독자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과분하고 소중한 영광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단 한 명의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마음은,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2018년 8월 베를린 인근 반들리츠Wandlitz에서

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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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독자 2018-09-05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