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러브 레플리카>를 출간한 윤이형 작가에게 독자가 물었습니다.

윤이형 작가의 답을 소개합니다.


2016년 오늘의 젊은 작가들 : 윤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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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2016_author01







윤이형 작가님께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순간은 언제, 어디서, 무엇 또는 누구에 의해서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결심은 여전히 처음 그때의 그것과 같은지도 궁금해요.


직장에 다니며 여러 가지 글 쓰는 일을 10년 정도 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을 하다보니 방향이 정해져 있고 기획에 맞춰야 하는 글 말고 제약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주일에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회사원 말고 ‘나’로 살고 싶어서 어느 문화센터에서 하는 소설창작강의를 들으러 다녔어요. 거기서 숙제로 썼던 글들을 모아 보냈는데 당선이 되어버려서 사실 다짐이고 결심이고 할 겨를도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뒤늦게 어떤 결심 같은 것을 하게 되는데,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발을 들여놓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대해 남은 평생 동안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하는 글쓰기는 그 이전과 어떤 다른 경험을 가져왔는지 궁금합니다. 제게 육아는 내 시간보단 다른 이의 시간을 사는 일이었는데 그 가운데 작가님의 소설쓰기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요?


저 역시 시공간의 제약, 점점 좁아지는 시야,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어려움 같은 것이 크게 다가옵니다. 퀄리티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지만 제가 선택한 삶이라 불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작고 연약한 생명체와 매일 구체적으로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 일은 대단히 소중하고 큰 경험이어서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말하자면 제 글이 부족하다는 생각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씩 마음 놓고 죽고 싶어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엄마라는 신분에 따르는 책임이 있고, 아무리 자괴감이 들어도 삶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으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차단되고 일을 계속할 동력도 생기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주로 언제 어디서 글을 쓰시나요? 특별히 글이 잘 써지는 장소나 분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네 카페에서도 쓰지만 주로 마감이 코앞에 닥친 밤에 집 부엌 테이블에 앉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와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서 혼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조건 감사한 상황이에요.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작가님을 이상으로 삼은 학생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젊은 작가로서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고 계시는데,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본인의 훗날은 어떨 것 같나요? 꿈이란 게 원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잖아요. 작가님이 꿈꾸는 작가님의 미래와 꿈을 알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쓰기를 그만두지 않는 게 첫번째 꿈, 동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두번째 꿈입니다. 세번째 꿈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제가 좋아하는 글쟁이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해 다과회를 열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뜨개질을 하고, 누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또 누구는 신작 발표를 그 자리에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그들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되어 있겠죠. 지금은 각자 바쁘고 힘겨워서 교류조차 할 수 없는 처지지만, 그때가 되면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중히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어요. 그들의 글이 제 젊은 날에 어떤 방식으로 무한한 빛이 되어주었는지를 전하고, 계속 멋진 작품을 써달라고 부탁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저 역시 그때까지 쓰고 있는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죠. 




작가의 길이 무섭지 않나요?


무섭습니다. 하지만 감당할 가치가 있는 무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년 한 해 동안 작가님의 글을 많이 찾아 읽어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이 ‘소재의 다양성’이었습니다. 물론 크게 본다면 과학, 기술, SF적 상상력을 많이 찾아볼 수 있긴 했지만 그것들 외에도 다양한 인물과 소재가 언제나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작가님께서는 평소에 소재에 대한 영감을 어떻게 얻으시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건 없고 그냥 일상을 살면서 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저에게 의미 있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쓸데없어 보일 질문들을 쌓아놓곤 해요. ‘사람에게는 꼭 몸이 있어야 할까’ ‘병을 증오하는 마음을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들요. 현실이 저에게는 제약이나 불편함으로 느껴지는 일이 잦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여기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는데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설리스트에서 “4주의 표지갑은 윤이형 작가의 『러브 레플리카』입니다”라고 발표했는데 표지를 직접 결정하기도 하시는지, 표지에 대한 느낌은 어떠신지요.


이번 소설집 표지에는 ‘하트 모양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만 의견을 냈습니다. 진짜 사랑이라면 그건 하트 모양으로 생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반짝거리고 예쁘장한데 공허하고 인공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느낌의 표지가 나와서 몹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되는지 이야기를 쓰는 중에 바뀌기도 하는지 그리고 글을 처음 시작할 때와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는 어떤 느낌인지도 궁금하네요.


첫 문장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마지막 문장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정해지는데, 쓰고 난 뒤에도, 책이 나온 뒤에도 계속 고치고 싶어서 괴롭습니다. 글을 처음 시작할 때는 ‘어떻게든 가보지 뭐’ 정도의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하는데, 끝을 내면서는 늘 처음 생각과 너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가님은 글을 쓰기 전, 혹은 쓰실 때 하시는 특유의 습관이나 의식(?) 같은 것이 있나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 작가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알고 싶습니다.


진한 커피를 석 잔쯤 연달아 마시면서 안 쓰고 있다는 죄책감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 온갖 잉여스러운 행동을 합니다(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충분히 시간을 낭비했다는 마음이 들어야 쓰고 싶어집니다.  




다음 생으로 이 생의 기억을 한 가지만 가져가야 한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하실 것인가요?


일주일 전부터 이 질문지에 대답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의 기억요. 지금이 불안하지만 좋기도 하고, 특별하고 큰 사건들만 골라내서 의미를 더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그건 왠지 ‘제’ 기억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냥 시간순으로 뚝 잘라서, 특별할 것 없이 사소한 기쁨, 슬픔, 짜증, 후회 같은 것들이 골고루 들어 있는 보통의 일주일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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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민음사, 알라딘, 은행나무 (가나다 순)가 함께 진행한 장강명 소설 리뷰대회의 심사평을 공유합니다. 심사 및 심사평은 문학평론가 강지희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1등

추리닝간죵님

<나의 세계를 증명하는 등식으로써 당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blog.aladin.co.kr/795816154/7794062


  한 작가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소설들 사이에는 질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세 장편 소설의 리뷰를 읽어 내려가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한 권의 장편은 그 작가의 눈으로만 포착되는 주관적인 현실을 정교하게 구축해놓은 하나의 소우주다.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 세계와 만날 때에만 우리는 잠시 겹눈이 된다. 그러니 책장을 덮은 후에 그 작가가 만들어냈던 소우주 속으로 다시 한번 빠져들어가 유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좋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더 매혹시키는 것은 소설의 지평을 딛고 펼쳐지는 겹눈의 공간 속 유일무이한 또다른 소우주에 도달하는 글들이다. 이런 면에서 츄리닝간죵의 <나의 세계를 증명하는 등식으로써 당신>은 압도적이었다. 마지막에 던져진 여자의 질문을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아 소설을 읽는 방향을 바꾸어냈고, 그 의미를 아름다운 방향으로 증폭시키며 ‘존재를 소멸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등식으로써의 기억’이라는 명제를 도출해냈다. 때로 기억한다는 사소한 행위만이 우리의 존재를 지탱시키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일이 된다는 진실을 이보다 더 유려하게 설득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2등 

오규원님<행복의 근원을 묻다> (한국이 싫어서)

http://blog.aladin.co.kr/771489177/7755052


2등 

faust715 님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 (호모도미난스)

http://blog.aladin.co.kr/778649103/7796572


  오규원의 <행복의 근원을 묻다>는 글에서 묻어나는 슬픔의 어조가 인상적인 리뷰였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난 많은 사람들이 최근 ‘헬조선’으로 압축되는 온갖 끔찍한 면면들에 대해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소설이 사회 비평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그러나 날카로워지는 만큼 반드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프리카에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던 한 친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날카로움 대신 동감하는 아픔을 조심스럽게 눌러담는 길을 택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동반되는 끝없는 불안감에 대해 말하고,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여러 방향에서 행복의 길을 찾게 되는 것에 작은 안도감을 표시하는 이 글의 담담함이 소설에 더 깊이 도달하는 또다른 길을 틔워주고 있어 좋았다. faust715의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는 『호모도미난스』에 나타난 힘을 가진 자의 책임감과 정당성에 대해 성찰하는 데 있어, 히어로물 영화의 사례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비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실존적 고민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미성년과 만났을 때 왜 더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섬세하게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3등 

얼룩님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blog.aladin.co.kr/mydewy/7797204


3등 

달문님

<적응하거나 혹은 견디지 못하거나> (한국이 싫어서)

http://blog.aladin.co.kr/dalmoon33/7763029


  얼룩의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선명하게 읽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글이었다. 인물들 안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흐려지는 순간과, 지명에 대한 전승의 검증 과정에서 가짜 이야기가 진짜 기억이 되어버리는 지점의 난감을 겹쳐 읽는 세심함도 눈에 띄었지만, 이를 소설에 국한시키지 않고 때때로 삶 속에 찾아드는 죄의식과 살아갈수록 줄어드는 말로 이어받는 부분의 성찰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늘한 소설 앞에서 처연한 얼굴이 된 자신의 표정을 기술하는 마지막 문단 역시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달문의 <적응하거나 혹은 견디지 못하거나>는 『한국이 싫어서』에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장강명의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한국을 혐오하거나 호주 이민 성공 사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 충실한 ‘선택’이었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설사 그것이 도피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 움직이는 과정에 서린 용기 자체가 결론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다이 시지에 소설과의 대비 역시 흥미로웠다.  



장려:  (필명 가나다 순)

      꼼쥐님 <삶의 원동력이 희망인 이유> 

      돈다돌아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헤브 어 나이스 데이”>

      로렌초의 시종 <속죄를 감당하는 방식> 

      봄밤 <타인을 향한 이해를 비로소,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 <우주 알을 기다리며> 

      용이 <호모도미난스(지배하는 인간)>

      탄산수킬러 <이것이 진짜 ‘자기계발서’다>

      헤르메스 <기억과 윤리> 

      guiness <다음 단계의 인류를 상상하다> 

      hope&joy <서늘한 새벽, 따뜻한 빛을 닮은 그들> 


  소설에 대해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펜을 들어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조금 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오랜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간절함, 거기에 서려 있는 온기 같은 것들이야말로 생을 지탱시키는 것이라 믿기에 많은 리뷰들을 읽는 시간이 고단하기보다 행복했다. 순위를 매겨야만 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글에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진솔함이 서려 있었다고 꼭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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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청소년문고 자료집의 일부를 발췌해 <파란 아이> 속 작가의 더 깊은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창비청소년문학 8

완득이

김려령 장편소설


영화화에 이어 뮤지컬까지! 

60만 독자를 웃기고 울린 

활력만점 도완득의 청춘일기





『완득이』 속 말*말*말


똥주한테 헌금 얼마나 받아먹으셨어요. 나도 나중에 돈 벌면 그만큼낸다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이번 주에 안 죽여주면 나 또 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정윤하가 울었다.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코를 푼 손수건을 반 접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가방에 넣었다. 안 버리고 또 쓸 생각인 모양이다. 생각보다 더러운 애다.



정윤하가 나를 뭐 하러 좋아해. 아이, 자꾸 신경 쓰이네. 하여간 똥주. 오는 길에 보니까 구름이 다 찢어져 있던데. 괜히 우습네. 무슨 구름이 찢어져 있냐. 구름은 원래 뭉쳐 있는 거야. 이히히. 원 투, 원 투 쓰리, 투 원 투, 원 투 원 투, 원 투 쓰리 포. 원 투, 차차차. 쓰리 투, 차차차.



나는 싸움을 싫어한다.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놀리지만 않았다면 싸우지 않았다. 그건 싸움이 아니었다. 상대가 말로 내 가슴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고, 나도 똑같이 말로 건드릴 자신이 없어 손으로 발로 건드렸을 뿐이다. 상처가 아물면 상대는 다시 뛰어다녔지만 나는 가슴에 뜨거운 말이 쌓이고 쌓였다.



“한 번, 한 번이 쪽팔린 거야.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남의 약점 가지고 계속 놀려먹는다만, 그런 놈들은 상대 안 하면 돼. 니가 속에 숨겨놓으려니까, 너 대신 누가 그걸 들추면 상처가 되는 거야. 상처 되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니 입으로 먼저 말해버려.”



“완득이 봐라. 신체조건, 욱하는 성질, 주변 환경, 어디 하나 조폭으로도 모자람이 없다. 낫 놓고 기역 자는 몰라도 낫으로 지를 줄은 아는 천부적인 쌈꾼이 될 것이다. 잘 되면 나 잊지 마라.”





선생님이 읽은 이 책


나도 똥주 같은 선생 되고 싶다


재밌다. 우스워 죽겠다. 만화 보는 기분이다. 아니다. 영화다. 인물들이 살아서 펄떡펄떡 내 앞에 나타난다. 이뻐 죽겠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재미만 아니다. 가슴에 ‘쿵’ 내려앉는 무엇이 있다. 늘 변두리를 떠돌아야 하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과 이들보다 더 아픈 외국인 노동자의 삶, 이들과 함께 신명 나는 판을 벌이는 똥주…… 그러나 우리의 학교에는 똥주가 없다. 아예 존재가 불가능할 것이다. 완득이도 없고 정윤하도 잘 없다. 그렇지만 꿈도 못 꾸나. 그 꿈이 살아나길 바라지도 못하나. 그렇게 바라다 보면 진짜 이런 사람들이 학교에 생겨날지. 그래서 살맛을 찾아갈지.


하지만 현실은 살벌하다. 달라진 교육부가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썩 나타나 점잖게 말한다.

“0교시, 심야 보충, 우열반, 너거 알아서 다 해라. 이름 하여 자율이다.”

이런 썩을 데가 있나. ‘자율 학습’에 속아 묶여 있은 지 십 년에 또 자율이라고? 자율이란 이름으로 경쟁만 시켜 놓으면 알아서들 죽자고 뛰어갈 테니 자기들은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다 이 말이지.

교직 삼십 년. 오매불망 우리 아이들과 살맛 나는 학교 만들고 싶었다. 싸우기도 하고 기도도 했다. 그러나 될 듯하다가는 도루묵이 되고, 다시 살아날 듯하다가는 쓰러지고 말더니, 급기야 이젠 구렁으로 내몰리고 있다. 참담하다. 어디서 힘을 얻나. 이런 중에 완득이를 만났다. 아니 나는 똥주를 더 반갑게 만났다.

쓰는 말투 하는 행동이 어쩜 이렇게 리얼하면서도 멋있냐. 똥주 같은 담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주 사실적이고도 바람직한, 꿈에 그릴 만한 선생 모습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담임들 좀 많았으면 얼마나 세상 밝아졌을까. 작가는 아주 아름다운 선생 하나 탄생시켰다.


나도 똥주 같은 선생 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이미 꼰대 냄새가 난다. 따라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자꾸 근엄해진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러니 될 일도 안 된다.

완득이 같은 제자 하나 만나면 원이 없겠다. 그런데 요새는 다들 스스로 공부 기계가 되겠다고 앞장선다. 아니면 스스로 자기를 죽여 버린다. ‘나 같은 놈이 뭘 해! 대강 살다 가는 거지.’ 이런 식이다. 깡다구가 없다. 아이들은 청춘을 다 바치고 어른들은 등골을 다 바쳐 아등바등했지만 결과가 이렇다. 학교 현장 문제 가운데 가장 큰 일이 이거 아닌가? 그런데 『완득이』에서는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작가에게 부탁한다. 다음에는 0교시에 죽어나는 아이들, 심야 보충에 허덕이는 아이들, 우등반 열등반으로 갈려 신음하는 아이들 다 데리고 나와 한바탕 썰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렇게 짓밟혀도 어떻게 살아나는지. 또 똥주 같은 담임 만나 어떤 힘을 얻는지. 그들에게 바싹 다가서서 그 마음 헤아려 보기 바란다.

이 책, 어른들한테 주자. 어쩌면 어른들이 더 좋아할지 모른다. 자기들이 지나온 고등학생 시절, 잃어버린 청춘을 다시 생각하면서 내 아이한테는 청춘을 돌려주자, 대오 각성할지도 모른다. 선생들 반드시 읽어야 한다. 똥주 같은 담임한테 배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 이 책 읽고 뭐라고 할까? “이런 똥주 같은 담임이 어딨어요. 이건 딴 나라 얘기예요. 이런 꽁이 어딨어.” 이럴까? 이러면서도 똥주를 기다리게 될 거다. 아니면 스스로 똥주로 나설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1920년대 30년대 소설 골라 주며 “여기서 시험 문제 많이 나와. 읽어!” 협박하지 말자. 꼰대들의 인품 잡는 교훈도 제발 그만두자. 어른들 언제 아이들 마음으로 생각해 봤나. 늘 자기 말만 옳았지. 정해진 길만으로 따라가자 윽박질렀지. 이러니 아이들은 죽을 지경이다.

이제 아이들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자기들 세상 얘기에 재미 붙이고 난 뒤 고전을 읽게 되면 옛 어른들 이야기에서 또 다른 맛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아, 옛날 어른들은 우리와 달리 이런 생각을 하였구나.’ 하고 소통하게 될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의 삶을 싹 무시하고 고전만을 들이밀며 “보약이니 먹어.” 하는 식의 독선, 이제 그만두자. 

-부산 양운고 교사 이상석








창비청소년문학 15

나는 죽지 않겠다

공선옥 소설집


씩씩하고 명랑한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소설가 공선옥의 응원!






작가가 말하는 나의 청소년기


얘들아, 방황 좀 해라 


아무리 돌아봐도 내게는 사춘기가 없었다. 나는 사춘기라는 말도 모르고 사춘기를 지났다. 부모는 너무나 먹고살기가 바빴고, 자식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는 생존을 위한 돈을 버는 데 아버지의 모든 역량을 다 바쳤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신경 쓰기에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컸다. (그리고 모든 자식들은 다 저 혼자 컸다고 말한다.) 정말로 나는 나 혼자 큰 것만 같다. 특히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말이다. 


나는 정신적으로 배가 고팠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정신적인 갈급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시골 중학교는 책도 없고 문화적인 그 무엇도 접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선생님들 가운데 한 분이 내게 도시의 집에서 책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책다운 책을 구경했다. 그것은 시인 고은이 쓴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라는 책이었다. 그 이전에 나의 독서 이력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었다. 교과서 이외에 기껏해야 『새농민』 같은 마을회관으로 오는 잡지를 읽은 게 전부였다. 나는 늘 집에 오면 부모님이 일하고 있는 논으로 밭으로 나도 일하러 갔다. 친구들 중의 몇몇이 연애를 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무념무상으로 학교를 다니고 일을 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정말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늘 불안해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 집의 간당간당한 생계가 불안했고, 그다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나의 존재가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늘 침울했던 것 같다. 말도 없이 말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방황했다. 시골 아이가 도시에 오니 적응하기도 힘들뿐더러 집안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나는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뒷골목을 헤매며 돌아다녔다. 책 살 돈이 없어 책도 읽지 못했고, 그때는 이미 하도 책하고는 거리가 멀어져서 책에 대한 갈급증도 잊어 먹어 버렸다.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나는 주변의 껄렁껄렁한 아이들 뒤꽁무니에 붙어서 시내를 배회하고 다녔다. 한번은 그 애들하고 기차를 타고 보성 벌교까지 간 적도 있다. 그 애들이 어쩌다 폭력 사태에 연루되는 통에 나까지 경찰서에도 갔다.


내가 고등학교 때 방황했던 가장 큰 이유는 가난과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다. 우리는 분명히 ‘살인마’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대통령인 것이 나는 참 이상했다. 그리고 세상이 이상했다. 나는 정말로 우리나라 같은 나라가 끔찍하다고 여겼다. 


우리 부모님은 백날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방황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는 건 참으로 암울하고 슬펐다. 중학교 때 나는 내게 책을 가져다준 선생님의 영향으로 곧잘 글을 쓰기도 했다. 거의가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노동에 대한 헌사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사계절에 대한 묘사다. 봄이면 불태운 저수지 둑에서 뽀얀 쑥이 돋아나고 그 쑥을 뜯는 내 마음을 적고, 여름이면 고구마 밭을 매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미루나무 이파리가 팔랑거리는 것이 아름다웠다, 라는 식의 글을 써서 식구들이 돌려 가며 읽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가면서 나는 자연과 노동으로부터 멀어지고 도시의 뒷골목 문화에 빠르게 흡수되어 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내 절친했던 짝이 나중에 광주 운천저수지에 투신했다. 아버지는 진압군 책임자였고 오빠는 시민군이었다. 나는 대학을 가긴 갔지만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아서 학사 경고를 받았고 곧 휴학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한민국에서의 내 정규 학력은 끝났다. 이후에 나는 고속버스 안내양으로도 일하고 잡다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는데, 그러면서 나는 세상과 사람을 배웠다. 내 친구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으며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최초로 하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하는데, 나는 책 한 권 읽지 않고도 대충 인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담배도 뻑뻑 피우면서 인간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핏대를 올렸던 한 시기가 있었다. 어느 한시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때가 없었는데도, 나는 희한하게도 한 번도 진실로 생계를 걱정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걱정은 안 하지만 늘 배가 고팠던 건 사실이다. 중학교 때는 삶의 고달픔을 자연 속에서 위안받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위안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탄이 없으면 냉골에서 이불 뒤집어쓰고서 잘지언정 시골집에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 시기의 경험이란 그 어떤 경험도 다 쓸모가 있는 것 같다. 공부도 그렇거니와 방황도 그렇다. 학교 공부만이 공부는 아니다. 그 시기에는 거리에서의 경험도 얼마든지 공부가 된다. 나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학교에서 배운 공부는 이미 다 까먹어 버렸다. 그러나 거리에서 한 공부는 지금도 생생하다. 보따리에 수세미를 가지고 다니며 팔았던 적도 있다. 나는 그것이 재미있었고, 돈을 벌어 쌀을 사고 동생 운동화를 사 준 게 보람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래서 청소년 시기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왜 그 소중한 청소년 시기에 공부만 하고 있느냐. 아깝다, 아까워. 소설가 공선옥







창비청소년문학 16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장편소설


당신에게도 

되감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까? 

위험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곳,

위저드 베이커리





달콤하고 잔인한 성장소설


책을 덮는 순간 빵이 먹고 싶어졌다. 부욱 찢어 입에 넣는 순간 초콜릿 향이 확 올라오는 빵 오 쇼콜라가 좋다. 혹은 이 사이로 바스라지며 머리가 아찔하도록 설탕의 단맛이 터져 나오는 마카롱도 괜찮다. 야밤 독서의 허기를 달래며 마술까지 부릴 수 있는 케이크 한 조각이라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 문제는 집 근처 빵집들이 밤 10시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다. 책 읽기를 끝낸 시간은 자정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고 조심스레 자판을 두들겼다. Wizardbakery.com.


단아한 웹사이트가 튀어나왔다. 별나지 않게 생긴, 뚫어지게 바라봐도 색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빵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이라. 나이가 들면 사람은 조심스러워진다. 사과하고 싶은 사람을 만들 만큼 경솔한 일도 저지르지 않는다.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마들렌이라. 실연의 상처를 잊게 도와준다고? 사랑에 빠져 본 게 대체 몇 년 전이더라. 도플갱어 피낭시에. 이건 좀 끌렸다. 도플갱어를 대신 회사에 보내고 하루 종일 노닥거리고 싶다. 하지만 정말로 원했던 건 단 하나였다. 타임 리와인더. 달콤한 머랭 쿠키 모양새를 한 이 물건은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되감아 준단다. 


주문으로부터 도착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머랭 쿠키를 입 안에 넣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학 친구였던 그녀는 내가 영국으로 떠나 있는 동안 정신 분열증을 얻었다. 귀국해서 만난 그녀는 얼굴이 핼쑥했다. 겁이 났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어순도 논리도 맞지 않는 횡설수설이다.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면회를 가겠다는 약속도 차일피일 미루었다. 어느 날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는 자살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지금 죽은 그녀가 전화를 걸고 있다. 받아야 한다. 전화 한 통과 면회 한 번으로 그녀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내 손은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살아남은 그녀의 삶을 책임질 만큼 내가 훌륭한 인간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Wizardbakery.com으로 접속했다. 빵도 마술사도 없는 저자의 블로그가 튀어나온다. 방명록에 글을 하나 썼다가 지웠다. “사실 처음 절반은 오락가락했어요. 아동 성폭행과 유아 유기로 가득한 현대 한국의 현실과 마술 쿠키를 파는 마술사라는 판타지가 좀처럼 붙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주인공의 내면은 지나치게 어른스럽습니다. 머랭 쿠키를 먹은 미래와 먹지 않은 미래의 챕터를 따로 분리해서 책을 끝맺은 것은 정말 흥미롭습니다만 작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군들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단 한 번도 책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달콤하고 잔인한 성장소설입니다. P.S. 머랭 쿠키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사실 이 서평은 썼다 지운 방명록의 글 같은 모양새여야만 한다. 하지만 『위저드 베이커리』 앞에서 개인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책은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망치느냐 혹은 그것을 껴안느냐에 대한 선택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독자의 오래된 기억을 환유한다. 달콤한 케이크의 단맛을 기대했다가 질 좋은 효모로 빚은 호밀빵을 목으로 삼킨 기분이다. 

-씨네21 김도훈 기자



작가가 말하는 나의 청소년기


움푹 파인 자리


내게 있어서 청소년기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숟가락으로 시간을 떠내고 남은 빈자리와 같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텅 비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 시간을 살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을지 모른다는 느낌. 그 시간을 잘 살아 견뎠다는 증거가 지금 내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적어도 상중하 세 권 분량인 개인사를 접어 두고, 세상 그 어디보다 닫힌 공간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학교 안에서의 날들만 떠올려 보자면 사뭇 단순하며 전형적인 그림이 나올 것이다. 시험 때 되면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입시를 앞두고서는 대학 커트라인 자료집을 뒤적이며 대부분의 시간은 두발 규제와 교복에 불만을 품으며 보내는. 

아마 그때 학교에 문예 창작반이라는 동아리가 있었다면 좀 더 충실한 시절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주도해서 만든다는 건 꿈도 꿔 보지 못했다. 주도한다는 건 책임지는 것이고, 해가 바뀌어 후배들이 생겼을 경우 돕거나 이끌어 준다는 걸 의미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런 무게 있는 일은 감당이 안 되었다. 


대학 문학 특기생을 만들기 위한 입시 과외가 흔한 요즘과는 달리, 인터넷도 없고 소통의 방식 자체가 부재했던 그때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는 또래를 제한된 공간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선생님들에게 있어서는 ‘공부 안 하는 짓’과 등가 관계를 이루었고, 대학 입시에 올인하는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시간이 많이 남아돎’과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배짱도 별로 없고 활동력도 크지 않은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혼자 읽고 쓰는 일뿐이었다. 


나는 아마도 스프링 유선 공책에 한 자 한 자 샤프로 눌러쓰며 지금 아닌 다른 것만을 꿈꾸었고, 지금 머무는 자리는 내 영혼이 임시로 세낸 쪽방이며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라고 느끼는 감각이 강했던 모양이다. 그 시기는 어서 빨리 벗어 버리고 싶은 매미 허물 같은 것. 그러나 정해진 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내가 조금만 더 삶을 폭넓게 바라볼 용기가 있었다면, 그 시간을 좀 남다르게 채웠을 터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활동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노선을 지지하거나.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 시간을 버릴 생각만 했고, 남들이 다 따라가는 길을 똑같이 밟았다. 머리로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몸은 표준과 상식이라는 그릇에 접어 넣었다. 그 사이에서 불거지는 감정들은 공책에다 한 글자씩 먼지처럼 털어놓았고, 풀리지 않는 실마리는 책 속에서 찾아 위안을 얻으려다 대부분은 더 큰 의문만 남곤 했다. 


그러니까 이건, 사람의 자유와 의지가 오로지 머리카락 길이나 치마 길이 같은 것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어떤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추억’이라는 말은 내가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몇몇 낱말들의 목록에 들어가 있다. 



모든 지나간 시간은 유의미하다는 낭만적인 믿음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실은 이런 질문이 가장 곤혹스럽다. 당신의 청소년기는 어떠했나요? 청소년기에 어떤 추억이 있어서 이런 소설을 썼지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자니, 그런 마음가짐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독자에 대한 배신이나 우롱으로 간주되므로 슬그머니 말을 돌리거나 아낀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시절을 보낸 사람만이, 또는 생사의 기로와 밀접하게 관련된 고통의 기억을 담담하게 풀어 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시절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만일 이름을 붙이기에 편리한 어떤 사건들과 시절을 함께하여 그것들과 울고 웃거나 뒹굴었다면, 그것을 다만 응시하지 않고 거기 뛰어들었다면, 나 자신은 청소년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면서도 묻어 두었든, 기억이 왜곡되거나 지워졌든, 그 시절에 영(0) 하나만을 그렸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며 천천히 알아가고자 한다. 소설이 뭔지 너무나 잘 안다면 소설을 쓸 필요가 없을 거고, 지금 쓰는 행위는 그게 뭔지 알고자 하는 노력이며 그 주어의 정체는 세상을 떠날 때나 되어야 알 듯하다. 그 괄호에 소설 대신 청소년이나 다른 무엇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구병모









창비청소년문학 22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장편소설


잔인한 세상을 그만 등지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때, 

이 책을 꼭 읽어 주세요







작가와 나눈 이야기



『우아한 거짓말』을 쓰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 소설을 쓴 동기가 후기에 나와 있듯이 개인적인 체험이나 주변의 사례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저도 어린 나이에 생을 내려놓으려 한 때가 있었고, 안타깝게도 천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스스로 떠나간 어린 지인도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에도 저는 지인을 한 분 더 잃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셨지만, 그분도 스스로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제 개인적 체험 때문만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고 합니다. 청소년 자살률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고요. 단 한 사람의 자살이라도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살 방지를 위해 많은 선생님들이 일선에서 청소년들에게 이성적 호소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작가인 저는 감성과 무의식에 호소하여 그분들의 교육을 뒷받침하고 싶었습니다. 제발 생을 내려놓지 말라고.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인공 천지는 오랜 시간 자살을 준비하는데 그 과정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합니다. 일관성 있는 그 태도에 혹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두려움과 갈등은 삶에 대한 미련이 교차되는 과정이지요. 하나의 털실 뭉치를 완성한 뒤 또 다른 털실 뭉치를 만드는 과정이 일관성 있는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천지는 자신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 한 장의 유언장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떠났겠지요. 안타깝게도 마지막 털실 뭉치를 만들 때까지 아무도 천지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아무도 천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겁니다. 결국 천지는 떠났지요.



화연이가 천지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 섬뜩합니다. 아이들 간의 이런 괴롭힘의 모습을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그려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천지가 다른 이들에게 봉인된 용서의 편지를 보낼 정도라면 천지는 이미 상처를 견뎌 낼 만한 힘이 있고 자존감이 있는 아이 같은데 이런 아이가 자살을 한다는 설정은 혹시 너무 과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너무 몰라서 섬뜩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자신의 행동의 파장을 생각지 못하고, 현재 위치만 보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지요. 화연의 행동은 제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또, 천지가 용서의 편지를 남긴 것이 과연 상처를 견뎌 낼 힘이 생겼기 때문일까요? 천지는 살면서 많은 용서를 했고 또 배신을 당했습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그런 일이 또 반복될까 봐 겁이 나지는 않았을까요? 용서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용서. 혹은 남은 자들을 위한 용서가 아니라 떠나는 자신을 위한 용서는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천지는 몸이 아니라 영혼이 아픈 아이였습니다. 떠나는 자이기에 가능한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훌훌 털어버리고 가고 싶은 마음. 제가 과거에 그 자리에 있었을 때 그랬거든요. 용서가 꼭 상처를 극복할 힘이 있을 때 하는 걸까요? 용서를 하면 정말 상처가 다 아물까요? 스스로 떠난 많은 아이들이 자존감이 없어서 떠난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지의 자살이 가엾기도 하지만 곱게 보이지도 않는데요. 남은 자를 용서하고 떠난 게 아니라 괴로움을 겪어 보라고 죽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용서했다면 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데요. 이런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질문과 비슷한 독자 서평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용서가 아니라 무서운 복수로 보셔도 좋습니다. 여러 각도로 해석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작품이거든요. 독자마다 다르게 읽어 주셨으면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 인물들도 그러합니다. 천지가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남긴 편지라고도 볼 수 있고, 진정으로 용서했기에 남긴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용서를 했으니 자살하지 않아야 했다는 건 우리의 바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천지가 용서를 해도 주변 사람들이 변하지 않으면, 그 용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행동이 오히려 만만하게 보여 다시 반복됐던 괴롭힘. 천지는 이미 그런 경험을 많이 하고 떠났지요.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떠난 아이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남은 사람들. 누군가 그렇게 아프게 떠났을 때,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얼마나 힘든지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떠난 사람만 아픈 게 아니라 보낸 사람도 많이 아프다는,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우아한 거짓말’이란 무엇일까요? 작가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우아한 거짓말은, 자신은 타격을 입지 않으면서 상대를 가격하는 거짓말입니다. 숨은 의도는 명확하게 각인시키되, 자신은 혹시 모를 구설수에서 빠지는 것이지요. 악의적인 의도는 숨기고 겉으로는 우아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교활한 언어이기도 합니다. ‘예쁘긴 한데, 은근히 촌스러운 면도 있어.’라고 할 경우, 말하는 사람이 꽤 중립적 시선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요. ‘나도 들은 말인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헛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고, ‘혼자 두면 불쌍하잖아.’식의 착한 이미지를 남기고 곁에서 괴롭힐 수도 있지요. 



청소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사는 게 참 녹록지 않습니다. 특히 그 시기에는 어른들이 정한 테두리와 규칙이 왜 그렇게 많은지, 숨 막히게 갑갑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자율이라는 것이 규칙 안에서의 자율이니 선택의 폭도 넓지 않을 것입니다.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지 못한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저는 청소년 여러분들이 저 테두리와 규칙을 넘어 모험을 하길 바랍니다. 모험은 이탈이나 반항과는 다릅니다. 테두리와 규칙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보다 더 나은 길이 있는지를 찾아 철저하게 준비하고 떠나는 게 모험입니다. 방황과 방탕이 다르듯이, 무조건 반항이 아닌 더 나은 자신을 찾기 위한 모험이길 바랍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도 좋고 큰 성과 없이 돌아와도 좋습니다. 시도 자체가 여러분을 발전시켰을 것이며 그리하여 여러분의 가슴과 눈이 더욱 깊어졌을 테니까요. 굳건하게 자신을 믿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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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1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포와 파격, 김사과의 발견 

  
    

김사과 <영이 02> (2010)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책 

   희망 없는 현실, 폭력과 공포가 만연한 사회, 실패와 좌절만이 예정된 이 세계에서, 가능한 것은 분노 외에는 없지 않은가. 그럴 때 이들의 발작적인 폭력과 방향 없는 폭주는 오히려 당연하고 어쩌면 정당하기까지 한 것 아닌가. 김사과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렇게 외친다. 그 날카로운 외침은 우리를 불편하고 두렵게 하지만, 그로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그 강렬하고 저돌적인 에너지가 기쁘고 반갑다. - 창비 편집자 이상술

또 하나,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작가 

  윤이형, <큰 늑대 파랑>, 창비, (2011)

  한 손에는 거침없는 상상력, 다른 한 손에는 현실에 대한 솔직한 고민. 그 조화가, 절묘하고 뭉클하다.
 

 

  

 MD가 읽은 이 책의 결정적 장면 

  <너와 나는 연애를 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뿐이다> 아 뭐 대부분의 연애는 어느정도 범죄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집행유예나 백이십시간 사회봉사명령 정도인 거예요. 하지만 나는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이백삼십육년형 정도를요. 너는 말하겠죠. <우리는 그저 연애를 한 것뿐이다 나는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이 씨발놈아)...> (준희 中)
 


 
  

 

 고맙다, 이 소설을 만났다는 것이 


  
     

황정은 <백의 그림자> (2010)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책 

  한국 문학의 새로운 표정, 황정은 작가의 2010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百의 그림자』  /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로 이른바 ‘황정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는 폭력적인 이 세계에서 그림자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쓸쓸하고 따뜻하고 애잔한 사랑 이야기다. 언어를 통해 서로를 애무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되는, 그저 ‘황정은 특유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환상과 현실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하고 아름다운 연애소설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장 아프고도 의연한 사랑을 말한다. - 민음사 편집자 김소연



또 하나,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작가 

   

  김미월, 여덟 번째 방, 민음사 (2010)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이름, 청춘. 웅숭깊고 따스한 시선으로 우리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김미월 작가의 첫 장편소설
 

 MD가 읽은 이 책의 결정적 장면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115p)
 
 

  

봄, 당신을 설레게 할 한국문학 이 작가! 바로가기

2011년 4월, 한국소설 대표작가를 소개하는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알라딘이 추천하는 이 주의 작가, 편집자가 소개하는 책, MD가 읽은 책 이야기를 남겨둡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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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만의 선택, <위저드 베이커리>를 잇는 또 하나의 매혹 

  
    

구병모 <아가미> (2011)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책 

   20만의 선택 『위저드 베이커리』의 작가 구병모의 신작 장편소설. 죽음과 맞닥뜨린 순간 생(生)을 향한 몸부림으로 물고기의 아가미를 갖게 된 남자 ‘곤’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가혹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아가미』를 읽고 나면 우리는 모두 한때 물고기였다는 것을, 한없이 깊고 넓은 물속을 자유로이 유영하던 그 시절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 자음과모음 편집자 황여정

또 하나,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작가 

  을, 박솔뫼, 자음과모음 (2010)전아리, 팬이야, 노블마인 (2010)  

  어느새 단어도, 문장도, 소설도, 종국에는 나 자신까지도 흔적조차 없이 지워지는 듯한 이상한 마력을 가진 소설!  

  

 

 MD가 읽은 이 책의 결정적 장면 

  아이의 등은 햇빛을 자주 받은 듯 적당히 타고 균형잡혀 있으며 탄력이 넘쳐 보였는데 아이의 견갑골이 움직일 때마다 현란한 빛이 났다. 그 빛은 그녀가 지금 걸고 나온 목걸이에 박힌 보석인지 유리 조각인지 모를 것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햇빛을 얻어 반사해야만 빛나는 구차한 물리적 존재들과 달리, 아이의 등에 돋아난 것은 그 자체가 빛의 절대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토록 청완하고 눈부신 것만 같았다. 그 등을 보면서 그녀는 그 아이가 어디서 왔으며 왜 바깥 세상과 만나지 않고 이리 적적한 곳에 스스로의 몸을 은닉하여 조용히 지내고 있는지, 강하와 아버지는 어째서 이 아이에 대해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은 물빛처럼 깊고 음산한, 조용한 삶의 풍경 

 


  
     

김숨 <간과 쓸개> (2011)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책 

  『간과 쓸개』는 김숨의 두번째 소설집 『침대』 이후 4년 만에 만나는 소설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질적인 재료들이 충돌하면서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편의 콜라주를 보는 듯했던 전작들에서, 작가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방편이 아닌 현실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을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 기괴한 환상들을 교차하여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전달하였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의 그 시선은 현실 세계로 옮겨간다. 죽음과도 같은 삶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필사의 안간힘을 쓰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일상의 이미지로 그려지면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쓸개즙처럼 쓰디쓴 현실의 고통만이 남는 것이다. 여기에 김숨 특유의 차분하고 정제된 문체가 더해져 삶의 어두운 풍경들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 문학과지성사 편집자 김필균


또 하나, 편집자가 추천하는 이 작가 

   

  최제훈, 퀴르발 남작의 성, 문학과지성사 (2010)  

  최제훈의 소설은 재미있다. 독특한 상상력과 이 과정을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능수능란한 재주, 함부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속도감 넘치면서도 탄탄한 문장 그리고 허를 찌르는 위트. 한마디로, 놀라운 신인의 탄생이다.
 

 MD가 읽은 이 책의 결정적 장면 

  설마 했는데, 그 귀뚜라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죽은 귀뚜라미들 속에서 저 홀로 악착같이 살아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살아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하고 징글징글하기만 하였다. (중략) 검정 비닐봉지 속 귀뚜라미들이 전부 살아서는 절박하게 버둥거리고 있는 것만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귀뚜라미들이 뒤엉켜서는 서로의 다리와 더듬이를 질근질근 물어뜯고 있는 것만 같아서. 
 
 

  

봄, 당신을 설레게 할 한국문학 이 작가! 바로가기

2011년 4월, 한국소설 대표작가를 소개하는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알라딘이 추천하는 이 주의 작가, 편집자가 소개하는 책, MD가 읽은 책 이야기를 남겨둡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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