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상 수상, 조남주 X 알라딘 (Q&A)





출간 이후 독자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특히 2017년 봄 즈음부터 이 책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얘기하기 시작했는데요, 소설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은 흔치 않은 풍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빈틈이 많은 소설입니다. 결말도 분명하지가 않고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다 써놓고도 왠지 완성한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소설 위에 독자 분들의 경험, 분노, 의견, 주장들이 쌓이고 쌓여서 다른 무언가가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많이 생각하고 깨닫고 배우게 되었고요.





수많은 기사 및 자료를 기반으로 한 서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근 가장 주목하신 사건, 혹은 기사가 있었다면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특정한 한 사건 보다는 성범죄에 대한 관대한 처분들이 눈에 띄어 찾아보고 있습니다. 반성했다, 합의했다, 술을 마셨다, 등의 정상참작 사유는 진부할 정도더군요. 고등학생들의 진술서가 증거능력이 없다며 성희롱 교사를 다시 교단에 세우기도 했고, 몰카범의 휴대폰을 시민들이 빼앗아 제출했지만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아 증거로 인정되지 않기도 했어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여중생들에 관한 소설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02년생 (16세입니다) 이지현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3-5권 정도 목록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에 관한 연구』 소녀들의 몸과 성과 생각에 대한 솔직한 책. 공감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엄마는 왜』 엄마를 이해해 달라거나 말 좀 잘 들으라는 게 아니라, 그냥, 엄마들은 이렇다고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곧 헬조선에서 이십 대를 맞을 청소년들이 낙오자도 괴물도 되지 않으면 좋겠어요.

『너에겐 노조가 필요해』 어른들은 왜 ‘남의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만 가르치고 ‘일 한 만큼 대우 받아야 한다’는 걸 가르치지 않을까요?




















도서 출간 이후 많은 독자를 만나셨을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독자와의 만남에 따님과 어머님이 같이 오셨는데, 두 분이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셨을까, 서로 어떤 얘기를 나누셨을까 궁금했고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계속 ‘지영이 언니’라고 칭하면서 언니의 증상이 없어지고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되면 또 다른 마음의 병이 생길 것 같다고, 실제 인물에 대해 말하듯 진심으로 걱정하신 독자 분도 기억이 나고요.





김지영 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단 여러모로 고맙고요(^^). 여전히 저는 김지영 씨가 진짜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른여섯 살이 되었겠구나, 올 연말에는 유치원 추첨에 가야겠구나, 둘째 출산 압박을 받고 있겠구나…… 하지만 여유도 생기고 요령도 생기고 어쩌면 방법을 찾았을 지도 모르겠다, 혼자 안도하기도 합니다.




질문자 : 알라딘 한국소설 담당 MD 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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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존재




어긋난 틈 위에 

똑바로 서서


소설가 조남주







84년생 한국 여성으로서,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관통당해 버렸다. 책을 읽은 25000여 명의 공통 경험일 가능성이 높지만, 화살 따위가 아니라 전차포에 당했다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건 내 이야기야, 숨이 차서 중얼거렸고 언젠가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장편 위주로 활동하는, 출판사 모임엔 잘 나오지 않는 신비스러운 분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만나게 된다 해도 먼 훗날일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래서 편집부에서 ‘쓰는 존재’에 조남주 작가를 초대해 주겠다고 했을 때 덥석 반기고 말았다. 지읒 자쯤에서 예스를 외쳤던 것 같다. 

조남주 작가는 신도림에서 10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신도림역을 지나 구로역으로 살짝 치우쳐, 아파트 단지와 상가 사이에서 만났다. 문득 앞서 출간된 『고마네치를 위하여』에서 옛 신도림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던 부분이 생각났다. 아직 빌딩들이 서기 전, 연탄 공장 풍경이 눈에 그린 듯했다. 


“결혼하고 나서 2년 정도만 다른 동네에서 살았고, 여기서 10년째예요. 예전 이 부근에 대해 썼던 부분은,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서 들었어요. 토박이들이 많아요. 저쪽에 있는 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를 또 저쪽에서 다녔고, 저기는 연탄 공장이었고, 나지막한 동네에서 제일 높았던 건물은 대성학원이었고…… 매일 이야기해 주세요. 그땐 다른 높은 건물이 없어서 안양천에 물 흘러가는 것도 다 보였대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시각적인 건 서울 사진 자료집에서 찾아봤어요.”




실감이 굉장해서 당연히 작가 본인의 경험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소설가들에겐 매번 속고 마는데 속아도 기분이 좋다. 매일 만나는 이들에게서, 작은 열매 따듯이 이야기를 채집했을 것 같아 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쓰는 작업은 어디서 하는지 궁금했다. 


“단골 없이 이 근처의 카페들을 떠돌아요. 익숙해지면 자꾸 딴짓을 하는 성격이라, 매번 다른 곳에 가려고 해요. 집에 있으면 집안일을 해서 집에서는 안 쓰려고 노력하고요. 일단 세탁기 돌려 놓고 글을 쓰자, 해도 세탁기 돌리는 과정조차 사실 단순하지 않잖아요. 그 앞에 여러 단계가 있는 거 해 본 사람은 알죠. 그래서 아침에 딸을 데려다 줄 때 같이 나와요.”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하려니 떨렸다. 2010년대 한국 문학의 흐름에 뚜렷한 분절을 만든, 앞으로도 끝없이 사랑받을 스테디셀러를 쓴,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작가가 앞에 앉아 있었다. 문득 작가 본인은 조금 얼떨떨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중쇄를 처음 찍어 봤거든요. 『귀를 기울이면』은 중쇄를 찍지 못했고,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얼마 전에 세종도서로 선정이 되면서 그 수량만큼 찍긴 했는데 약간 다르잖아요.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이 처음 중쇄되었을 때 중쇄를 찍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굉장히 기뻤어요. 신기했고요. 그런데 벌써 11쇄네요. 한 쇄에 조금도 찍고 한꺼번에 많이도 찍고 했는데 편집부에서 알려 주실 때마다 놀라요.”




『82년생 김지영』이 충격적으로 좋은 소설인 이유는, 다루는 주제도 주제지만 그 주제를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다. 그동안 유사한 주제를 은근하게 녹여 내고 드러낸 작품들은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똑바로 마주 봐 준 적은 이때까지 없었다. 결코 단단한 결심 없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집필 초기부터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는지 궁금했다.


“네, 처음부터 정면을 생각했어요. 2015년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접하고 이제 그래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거든요. 전에는 혼자만 생각하고 바깥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제 겉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어요. 말하고 연대하는 게 가능해졌어요. 제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쓴다 해도 심한 거부 반응이 돌아온다거나, ‘이렇게 말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라고 하지 않을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판단했어요.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적인 은유 없는, 어쩌면 대놓고 멋없게 말하는 소설인지도 몰라요. 멋있게, 아름답게 쓰지는 못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전하고 싶었어요.”




만약 조남주 작가가 곡선으로 에둘렀더라면, 수많은 독자들이 이렇게까지 관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선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작가의 답을 들으며 안도했다.


“그리고 솔직히,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투고할 계획이었기에 곧바로 독자 분들을 염두에 두지는 못했어요. 딱 한 명의 독자, 저 자신만 염두에 두었어요. 독자인 스스로가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소설을 동시대의 독자들이 알아보았다는 게 너무나 멋진 일이다. 거의 어떤 현상에 가깝게 알아보았다. 봄꽃이 개화하기 직전에 내린 비처럼 타이밍이 맞아 들어갔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읽히고 있다고 한다.


“제 책을, 어떤 결정권을 가진 분들이 읽으신다니……. 그동안 정책들이 나올 때마다 전문가들이 왜 이렇게 현실을 모르나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직접 가서 이야기할 기회 같은 건 웬만해서는 주어지지 않잖아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당사자인 제가 지금 한국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소설의 방식으로 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쉽게도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된 이후로도 국책 기관의 실수는 끊이지 않았다. 모두를 경악케 한 행정자치부의 ‘가임기 여성지도’에서 보건사회연구원의 ‘고학력 여성 하향 선택 결혼 유도 정책화’ 발언까지 여성들이 상처받고 분개할 만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조남주 작가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국책 기관에서 그런 황당한 수준의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건, 문제를 인지하는 지점부터 어긋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해요. 저는 교육을 비교적 동등하게 받은 80년대 생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성인기를 보내면서 스스로를 한 아이의 엄마나 누군가를 돌보는 존재로 상정하지 않고 자기 삶을 계속 꿈꾸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이 여성들이 지금 맞닥뜨린 주제가 출산과 육아지요. 돌봄 노동의 착취적인 면을 꿰뚫어 보게 된 80년대 여성들에게 자꾸 미봉책을 들이밀며 아이를 뽑아내려 하니까 사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닐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 80년대 생들의 부모 세대가 나이가 들어 간병이 필요한 시기가 올 거예요.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안에 닥쳐오겠죠. 그때 간병인 수요를 여성들이 책임져 줄 거라고 사회가 기대해도, 과연 출산과 육아를 원치 않았던 이들이 노인 돌봄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까요? 출산율처럼 딱 떨어지는 수치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분명 다른 문제들이 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돌봄 노동, 가사 노동을 지금처럼 여성을 갈아 넣어서 하는 사회는 버티지 못할 거예요. 경제 안에서 보이지 않는, 따져지지 않는 비용을 여성들에게 지우고 사회를 유지하던 사고방식부터 끊어 내야 해요. 지금부터라도 돌봄을 공공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이슈들이 터질 때 얼마나 심각해질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면 또 우리 세대가 노인이 될 테고, 부양해 줄 다음 세대가 없는 노인으로서 맞닥뜨릴 고민들이 기다리고 있겠죠.”




마음이 아득해지는, 그러나 아마 그렇게 되리라 동의할 수밖에 없는 예측이었다. 조남주 작가의 말이 마치 지진 예측기의 진동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말하면서 가장 자주 쓰는 단어는 ‘생각하다’였다. 아마도 작가의 소설은 한 줄기 생각에서 뻗어나가는 어떤 것이 아닐까 한다. 아이디어가 소설로 확장되는 방향마다 풍부한 데이터를 쌓아 형태를 갖추어 가는데, 그 밸런스가 굉장히 독특하다. 자료를 어마어마하게 끌어안으면서도 충분히 녹이고 흡수해 소설의 공기를 잃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 것 같아서 비결을 물었다.  


“평소에 관심 있는 분야의 데이터를 축적해 두는 편이긴 해요. 이번 책 같은 경우는 특히나 무언가가 참 잘 맞아떨어졌어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쓰기 시작한 게 2015년인데, 자료가 때맞춰 폭발적으로 쏟아졌거든요. 물론 그 전에도 2013년 《한겨레 21》의 「전업주부의 종말」 같은 특집 기사를 모아 두긴 했어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여성의 역할에 오래 관심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재작년, 작년 들어 저의 관심사와 사회 보편의 관심사가 겹쳐진 것 같아요.”

하지만 데이터 축적이 끝이 아닐 듯해서, 약간 더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음, 시사 프로그램의 방송 작가로 오래 일하기도 해서 아무래도 자료를 찾고 보고 그중에서 원하는 데이터를 선별해 내는 것에 익숙한 편이긴 해요. 예를 들어, 주부들의 취업 자료를 백분율로 찾아보고 싶으면 통계청에 들어가 봐야겠다, 또 이것과 관련해서 논평과 분석을 찾아보고 싶으면 보건사회연구원에 들어가 봐야겠다…… 하는 식으로요. 데이터와 보도 자료의 언어를 낯설어하지 않아서 소설에 잘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탄탄한 구조에 더해서 작품들에 조남주 작가만의 아주 세밀하고 질감 넘치는 기억이 입혀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이런 게 어떻게 다 기억나지?’ 싶을 정도였다.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 아닐까 싶었고, 유년기나 청소년기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고 싶어졌다. 




“가까운 시기의 기억은 자주 잊어요. 일상을 제대로 못 챙길 정도로요.(웃음) 그런데 이상하게 어렸을 때의 기억은, 오래된 기억들은 생생한 편이에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 사람들한테 우리 어렸을 때 그런 거 있었잖아, 그런 학용품이 유행했었잖아, 그런 놀이 하면서 놀았잖아…… 제가 말하면 다들 놀라더라고요.” 


조남주 작가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11월생이에요. 이제 딸을 키우면서 느끼는데 마흔 무렵의 1년, 2년은 별 차이 없는 것에 비해 아이들의 6개월, 10개월은 상당히 큰 차이더라고요. 그러니 어린 저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언제나 늦된, 늦될 수밖에 없는 아이였구나 싶어요. 저는 놀림을 받거나 누가 속이거나 해도 당하는지 모를 정도로 맹한 아이였어요.(웃음) 청소년기에 스스로의 그런 점을 인지하고 나서는 약간 관찰자처럼 변했던 듯해요. 무덤덤한 관찰자요. 또래들은 예민하고 감정 폭이 크고 자주 격해지고 그러는 데 비해 무덤덤했어요. 주변 친구들도 무덤덤했고요. 결속력 있는 무리 속에서 극적인 감정싸움을 하거나 하는 일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보통 그 나이 때 서로 친밀해지다가 서운해하고 크게 싸우고 그러잖아요. 저랑 제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폭발하는 청소년은 아니었어요. 그보단 폭발하는 쪽을 지켜보는 무리 중의 하나였지요. 아직도 그때의 친구들과 만나요. 여전히 참 다들 무덤덤해요. 여럿이 약속을 잡고 누가 못 오게 되어도 ‘으응, 뭐 못 오는 거지.’ 하고 만나고. 바빠지면 해를 넘기거나 뛰어넘어 만나게 되어도 ‘으응, 만났구나.’ 하고요.”  




대학 시절과 사회에 발을 처음 딛었던 시기도 궁금했다. 그래서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여대를 다녔어요. 대학 때 특별히 여성주의 동아리를 하거나 여성학 과목을 듣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는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제가 들었던 사회학 수업들만 생각해 봐도 가족 사회학, 문화 사회학 안에서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강의를 하셨던 교수님들이 계셨어요. 그렇게 배운 것도 배운 것이지만 여중 여고 여대를 다녔다는 점이 남성에 대응되지 않는 별개의,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서의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후 사회생활, 결혼 생활 하면서 부조화를 느끼게 되지만요. 방송국에서 일할 때는 혼란스러웠어요. 지금 저 피디가 작가들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게 단순히 직위의 문제인가? 그런데 피디는 대다수 남성이고 작가는 또 대다수 여성인데? 판단이 잘 서지 않았어요. 일단 너무 바쁘고 그 한가운데 당장 던져진 상태였으니까요. 가부장제 안에 원치 않게 뛰어든 셈이었죠. 결혼 생활도, 저는 외가 친가 모두 전라남도 저 끝이라 서울 사는 저희가 자주 가지도 못했고 친척들이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거든요. 시댁 명절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남자들은 따뜻한 방에서 제대로 된 밥 먹고, 그 일을 했던 여자들은 난방이 안 되는 마루에서 대충 먹는 그런 상황을 처음 겪었어요.” 




시사 프로그램의 방송 작가에서 소설가로의 변신은 무척 반가운 일이지만, 그러고 보니 그 중간쯤에 논픽션 작가가 있지 않은가? 그 단계를 건너뛰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사회학 전공이지만 국어국문학도 부전공했는데 그때 창작 수업을 듣긴 했어요. 줄곧 글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어했고 방송 작가 일을 할 때는 소설을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아이 낳고 24시간 아이를 보고 있을 때 소설 생각이 났어요. 아이 낳기 열흘 전까지 일했고, 곧바로 복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건이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글을 쓰고 제 생각을 정리하고 외부에 표현하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아무 자료도 없이 방송에 관련된 글을 쓸 수는 없었고, 드라마나 영화 각본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그나마 소설은 제가 읽은 그대로 흉내 내어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첫 장편을 써서 공모전에 보냈는데, 보내 놓고도 결과를 찾아보지 않았어요. 설마 언급이 될 줄은 몰랐던 거죠. 몇 달 지나서야 뒤늦게 찾아보고 심사평에 언급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아, 그럼 내가 쓰는 게 소설이 맞긴 맞구나, 확인한 거예요. 그래서 이게 내 직업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걸 계속 해 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논픽션은…… 음, 기회가 되고 준비가 된다면 취재하고 공부해서 쓰는 논픽션은 써 보고 싶어요. 그런데 저 자신에 대해 쓰는 에세이는 못 쓸 것 같아요.(웃음) 그건 못 하겠어요.” 




조남주 작가가 그즈음 읽었던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왜 태교를 미야베 미유키로 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다고도 말해 주었다. 첫 소설이 바로 최종심에 올라가기는 쉽지 않은데, 어쩌면 소설을 쓰기 전에도 소설가였는지 모르겠다. 출간된 순서는 반대지만 『고마네치를 위하여』가 첫 작품이었고, 『귀를 기울이면』이 두 번째 작품이었다. 두 책 사이엔 다소 긴 공백기가 있고 말이다. 조남주 작가가 『82년생 김지영』을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에 투고하고, 눈 밝은 편집부에서 책을 멋지게 만들어 낸 건 기쁜 일이지만 미묘하게 공백기가 신경 쓰인다. 문학 출판계에서 조남주 작가를 더 일찍 주목했어야 하지 않았나? 문장, 분위기, 주제에 접근하는 각도가 기존과 달라서 미처 보지 못했나? 이토록 근사한 걸 쓰는 작가를 먼저 발견해야 하는데 그런 활기가 떨어진 건 아닐까?


“첫 책으로 장편소설상을 받고 이후 단편을 딱 한 편 발표했어요.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첫 책과 두 번째 책 사이의 5, 6년을 생각할 때 두 번째 책이 늦게 나왔다기보다는 첫 책이 빨리 나온 거라고 봐요. 제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보다 빨리요. 『고마네치를 위하여』를 고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설정을 고쳐야 했는데 그때는 고칠 수가 없었어요.”

작가가 심상하게 말했는데, 마음을 빼앗긴 독자다 보니 ‘이제는 준비가 되었습니다.’처럼 들려서 두근거렸다. 그렇다면 차기작은 언제, 어떤 주제가 될지 힌트만 달라고 부탁해 보았다.


“차기작은 아직 고민하고 있어요. 그 동안은 한 번도 청탁을 받거나, 미리 계약을 하거나 해서 쓴 적이 없다 보니 제가 쓰고 있는 소설의 독자는 언제나 저 자신이었거든요. 스스로 쓰고 싶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겠다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번 책이 나오고 앞의 두 책들보다 독자 분들의 반응이란 걸 볼 기회가 생기면서 고민이 깊어졌어요. 이 코너 제목이 ‘쓰는 존재’잖아요. 그 전에는 제가 쓰는 존재란 걸 거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메인 잡이든 세컨드 잡이든 소설이 저의 직업이란 생각을 못했어요. 사실 결과물이 경제적인 소득으로 이어져야 그런 게 확실해지잖아요. 그래서 소설을 쓰는 게 취미인가? 아르바이트인가?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쓰는 사람으로서 저의 정체성을 고민해 봐야 할 듯해요. 요즘 독자 분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제 책의 독자를 상상해 본 적이 전에도 있긴 했지만, 그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그렸거든요. 서점에서 표지가 예뻐서 책을 집어 든다거나, 서평단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다거나 단순한 상상이었죠. 그러다가 독자 분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 나누게 되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과 경험과 생각들이 보였어요. 책을 읽는 순간도 순간이지만, 그 앞과 뒤에 연속되는 삶이 있잖아요. 제 안에서 독자의 모습이 전과는 달라졌어요. 이제 독자를 떠올리면 각자 자기 안의 균열과 파장을 지닌 생생한 누군가를 그릴 수 있어요. 많은 분들이 저에게 다가와 강렬한 공감을 느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럼에도 한 사람을 바꾸는 결정적인 한 권의 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책과 읽는 사람의 파장이 잘 맞아 들어갈 때, 균열의 섬세한 지점을 건드린다면 생각보다 여파가 클 수 있겠구나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어요. ‘내 질문을 내가 쓸 거야’보다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는 것을요. 앞으로도 책 읽는 사람들의 연약한 지점을 건드릴 수 있는 주제를 고르고 싶어요.”




그렇다면 궁극적으로는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 하는 마음속의 목표 같은 게 생겼는지 물었다. 실루엣이라도.


“메인 잡이 작가인 사람으로 살다가 죽고 싶어요. 지금은 메인 잡이 아이 엄마거든요. 다음, 아니, 다음다음 직업쯤이 작가인 것 같네요. 아이를 지금처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오면 육아가 두 번째 직업이 되고 그때 첫 번째 직업이 글을 쓰는, 소설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어요.”




딸을 위해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다른 인터뷰에서 했던 적이 있다. 작가의 딸이 작가의 직업을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이라, 이제 글도 읽고 책도 읽으니까요. 『82년생 김지영』을 거의 다 읽었어요. 제 책 중에 제일 얇고 글씨도 편했나 봐요. 그전에는 제가 자기를 재우고 노트북 앞에 앉아서 뭔가 쓴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뭔지 잘 몰랐을 거예요. 책이 한참 안 나오기도 했었고요. 엄마 뭐해, 하고 물으면 엄마는 뭔가를 써…… 대답했었어요. 이제 책으로 나왔으니까 엄마가 그때 쓴 게 이거였구나, 아는 거죠. 다 읽고 나서는 성 차별 다음으로 나쁜 건 나이 차별이라 하더라고요. 왜 자기가 일주일에 몇 번 일기를 써야 하는지 어른들이 정하냐고요.”(웃음) 




여성 예술가들이 젠더에 대해 이야기하기만 해도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는 일이 요 몇 년간 적지 않았다. 혹 『82년생 김지영』 때문에 공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걱정했었다.


“쓸 때는 많이 읽히리라 예상하지 않아서 두렵지 않았고, 쓰고 나서는 그렇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펼치는 분들은 소설 독자층이 아니란 걸 알게 되어서 괜찮았어요. 물론 인터넷 서점의 한 줄 평에 굉장히 거부감을 가지고 읽으셨구나, 추측할 수 있는 평 정도는 있었지만 그 범주를 넘어선 공격은 없었어요.”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고, 한층 더 소설 독자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역시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기질은 다르다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조남주 작가는 소설보다 인문 사회 분야 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좋게 읽은 책을 몇 권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장 최근에 재밌게 읽은 책은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 줬어요?』였어요. 중간에 덮지 않고 한 번에 죽 읽었을 정도예요. 그리고 여성주의 필자 분들이 함께 쓰신 책들이 다 좋았는데 특히나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가 좋았어요. 미성년자 의제 강간법에 대한 장을 읽으며 젠더 이슈가 다른 모든 이슈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너무 자주 써서 퇴고할 때 거르고 빼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복잡한’이요. 복잡한 마음, 복잡한 표정, 복잡한 기분……(웃음) 글을 고치며 찾아보기 기능으로 찾으면 어마어마하게 나와요. 대체 왜 그렇게 그 표현을 반복해서 쓰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복잡한 문제를 간명하게 쓰는 작가라서가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다. 복잡한 문제를 간명하게 쓰려면 복잡한 것을 복잡한 대로 이해해야 하는데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그것에 뛰어나기에, 조남주 작가의 무의식에서 그 단어가 자꾸 튀어나오고 마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운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해서 전화번호도 땄다. 은하계의 나선 팔 저쪽에 있는 별을 좋아하듯이, 멀리서 좋아하다가 또 만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녹음기를 끄고 나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어째서일까?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 일부러 점심을 천천히 먹고, 많이 웃었다. 아마 나는 평생 조남주 작가를 따라 읽게 될 것이다. 테이블 너머의 조남주 작가에게 소설을 읽는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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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한 문장을 타고 다른 세상으로 날아 오르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 손보미에게 알라딘 독자가 물었습니다. 손보미 작가가 보내온 답변을 소개합니다.


이벤트 보기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162650





작가님이 힘들고 지쳤을 때 특별히 위로가 되는 책이 있었는지요? 그렇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올리버 색스의 『깨어남』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끔 그냥 아무 장이나 펼쳐서 읽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도 하고 저도 모르게 경탄하거나 미소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작년에는, 루이자 길더의 『얽힘의 시대』에 실린 「붕괴」라는 장을 읽고 갑자기 눈물을 쏟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감정이라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삶의 불가해성을 일깨어주는 책들이 저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저와 동년배의 작가라서 늘 관심 갖고 있는 작가님, 신작이 나와서 반가워요. 손보미 작가님은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붙여주시나요? 궁금해요.

 

제목을 짓는 것은 사실 저도 무척 어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제 데뷔작 「담요」의 원래 제목은 ‘담요의 죽음’이었고, 「폭우」는 원래 ‘중력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에 나올 뻔했습니다. 저는 단순한 제목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작품에서 떠오르는 가장 구체적이고 기억에 남는 단어들로 단순하게 제목을 짓는 걸 좋아합니다. 때때로 좀 촌스럽게 느껴지거나 유치하게 느껴지더라도 그게 좋습니다. 

 



만약에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작가의 길을 걸으실 건지 아니면 어떤 일을 하실 건지 궁금합니다.

 

작가를 하면서 가장 힘들다고 느낄 때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만큼의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아마, 제가 작가가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다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소설을 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쓰시는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기를 바라는지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는 저의 이야기를 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누군가 제 소설을 읽고 단 한 장면, 혹은 단 하나의 문장에 잠시, 아주 잠시라도 멈춰 서준다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나, 작가, 작품은 시시때때로 달라집니다. 세상에 너무 좋은 문장과 소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어떤 것의 경향이 있을 순 있을 겁니다. ‘첫 문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엔 너무 좋은 첫 문장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경향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노인은 지난 84일 동안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과학책이나 외국 영화 또는 외국 드라마도 많이 보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감을 받은 책 이야기는 작가들에게 흔히 듣지만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는 듣기 힘들어요. 손보미 작가에게 아이디어를 준 영화나 드라마는 어떤 건가요?

 

무척 많습니다만, 첫번째로 꼽는다면 jj 에이브럼스 감독의 <로스트>입니다. 어떤 특정한 영감을 받은 걸 넘어서서 과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으며, 서사 속에서 수수께끼가 작동하는 방식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다른 하나만 더 꼽는다면 매튜 와이너의 <매드맨>입니다. 문학보다 훨씬 더 문학적인 장면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감정과 인생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담고 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작가님, 문득 계절에 대해 여쭙고 싶어졌어요. 작가님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님은 어떤 계절을 좋아할지 궁금해지더라구요. 추측이 잘 되지 않았어요. 햇빛이 비치는 수영장의 물이 떠오르는 그런 여름이 떠올랐다가도 또 어느 때는 겨울이 떠올라요. 그게 궁금해요! 작가님의 소설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어떤 계절에 비유할 수 있을지.

 

아, 이 질문이 뭔가 저의 마음을 푹 찔렀어요. 저는, 아마도 겨울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추운 건 정말 싫어하는데,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공기와 코끝이 어는 느낌, 그리고 입김을 좋아합니다. 어디선가에서 잠들어 있던 저를 끄집어내주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거든요. 

 



손보미 작가님이 쓴 글들 중에서 계속 되뇌이는 문장이 있으신지요? 혹은 가장 아끼고 보듬게 되는 문장이나 표현, 주인공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른 작가님의 글 중 탐이 났던 문장도 알고 싶어요. 

 

계속 되뇌는 문장은 거의 없는데, 제가 쓴 「임시교사」의 마지막 문장을 약간 좋아합니다. “잠들기 위해 눈을 감는 건, 생각보다는 언제나 쉬운 일이었다.” 

편혜영 작가님의 「저녁의 구애」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부분에 마라토너가 뛰어오는 부분을 읽고 너무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을 아무 이유도 없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단편소설 「폭우」를 인상 깊게 읽은 독자입니다. 작가에게 기억이라는 두 글자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제게 기억은 그림자 같은 존재이며, 그 속살을 헤집어 보기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작가님에게는 또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도 건강 잘 챙기시고 멋진 소설로 만나뵙기를 바랍니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 저는 대개 많은 것을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혹은 어떤 것을 제멋대로 잘못 기억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런 잘못된 기억이 저에게 힘을 주고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 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를 상기하게 되는 시간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독자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멋진 소설들을 많이 만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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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선보이는 젊은 작가, 배명훈이 알라딘 독자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질문과 답변을 소개합니다.

오늘의 젊은 작가들 배명훈 편 :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159522

 

 

 


예전과 비교할 때 SF소설의 지평이 조금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문단에서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나누어 생각하거나 바라보는 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처럼 장르소설을 두고 ‘예술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이는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몇몇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오롯한 순문학도 오롯한 장르문학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의 장르적 경계는 모호해지고 있고, 언젠가는 경계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작가님께서는 소설의 장르적 경계가 먼 미래에도 유지될 거라고 보시나요? 또 국내 문학계 내 순문학 vs. 장르문학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나 관점 변화가 어떤 방향(더 나은 쪽,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시나요? (ID 뮯)

 

경계는 생각보다 오래 유지될 것 같습니다. “문단”은 균일한 조직체 같은 것은 아니고 경계가 모호한, 꽤 폭넓은 사람들의 활동영역을 가리키는데요, 그 안에는 상징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잡지나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이중 잡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할 지면을 주거나 장르소설을 책으로 내는 활동 측면에서는 경계가 많이 허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발표된 글에 상을 줄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단의 기능 중 창작활동이 일어나는 영역을 보면 경계가 약해지는 현상이 꽤 자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상징권력 쪽은 변화하는 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고요, 보통 권력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거지 자연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실이 소설 같고 소설이 더 현실 같은 요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가 아닌 더 넓고 더 큰 공간을 주 무대로 하여 소설을 쓰고 계신 것 같아요. 가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을 무대로 한 추리소설을 쓰실 생각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ID 지키미)

 

추리소설도 꽤 연습을 했었고, 지금 쓰고 있는 소설 때문에 현실 공간을 공부를 좀 하기도 했고 한데, 지금 당장 현실을 무대로 한 추리소설을 쓰고 있지는 않네요. 자세히 보시면 제가 은근히 추리소설 쪽으로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실 수도 있을 텐데, 네, 제 단편 지면들이 워낙 성격이 다양해서 다 챙겨보기가 어렵기는 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단편집을 내고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엘릭시르에서 나오는 <미스테리아>라는 잡지 창간호에 소설을 실은 적이 있는데, 그 시리즈는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 잡지를 자세히 보시면 몇몇 SF 작가들이 그쪽에서 꽤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논리적인 이야기여서 서로 통하는 거겠지요?


한국 배경으로 범죄소설류를 구상하다보면 턱 걸리는 데가 하나가 있는데요, 다른 나라 작가들도 하는 고민이겠지만, 사건이 밝혀진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야기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보니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더 집어넣게 되는데, 그러면 말 그대로 이야기가 깔끔해지지 않아서 망설여지곤 합니다.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느낌으로 가야 사회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룰 수 있을 텐데, 그쪽은 또 다른 이유에서 취향이 아니어서요.


어느 소설이나 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명료해지려면 추리소설의 배경도 결국 가상세계가 되고 마는 것 같습니다. 사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거 사실 작가 머릿속에 있던 범죄현장이고 트릭이고 단서거든요. 취사선택에 의한 가상세계인데, 그것도 쓰다 보면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거 어차피 내가 방금 심은 단서잖아’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도 평소 SF장르를 좋아해서 관련 책이나 영화 등을 찾아 읽고 보는 편인데 한국 SF는 자주 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한국 SF라는 장르만의 매력이 있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최근 SF의 범주에 관하여 사람들이 SNS에다가 쓴 글을 보았는데, 과학적 소재 못지않게 다른 분야(예를 들면 철학이나 내면 심리, 사회구조 같은)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도 SF라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갈리더라고요. 이에 대해서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또 작가님께서 소설가를 꿈꾸도록 하셨던 결정적인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인물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고 싶네요! (ID 김남영)

 

안녕하세요, 김남영 님. 한국 SF의 매력은 역시 한국 작가가 쓴, 한국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꽤 의미 있는 지점인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미국 SF는 미국인이 인류를 대표해서 고민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이야기거든요. 고전으로 갈수록 콕 집어서 미국이나 영국 국적의 백인 남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많고요. 그런데 2017년의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위화감이 느껴지는 측면이 많답니다. 사실 좀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지요. 한국 작가가 쓴 SF에는 우리 이야기나 우리 관점이 담기게 되기 때문에, “기존 SF와는 달리 한국적인 삶이 반영되어 있다”는 평을 종종 듣게 되는데요, 이건 소소한 차이가 아니고 꽤 결정적인 기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요.


저도 종종 “과학소설 전문가”들이 과학소설의 “과학” 부분에는 자연과학이나 공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인문학도 포함이 된다는 이야기들을 보곤 하는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그런 글을 봤을 때 그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부분을 전혀 못 알아보는 걸 보면, 발언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 자체는 일종의 레토릭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실제로는 맞는 말이니까 마음껏 시도하시면 됩니다. 하드 SF라고 불리는, 자연과학이나 공학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야기만 진정한 SF로 평가받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한데, 그런 의견에 대해 오랫동안 SF 분야에 종사해온 작가, 번역자 등등은 별로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모두가 하드 SF를 써야 할 이유는 전혀 없고, 그냥 광범위해진 SF 월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가 취미여서, 사실 작가가 되게 만든 책을 떠올리기가 불가능하답니다. 그냥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워낙 쉽게 만드셔서 이렇게 된 것 같기도 하네요.

 

 

 


‘예술과 중력 가속도‘ 등 이번 작품을 비롯하여 배명훈 작가님이 전작들(청혼, 첫숨) 등 다수의 글들이 SF적인 서사를 외피로 하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그 기저에 흐르는 내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SF적 서사를 위해서는 상상력과 과학기술적 지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실 작가님의 학력 등의 배경이 막연히 이공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외로 외교학 전공이시더라고요. 특별히 상상력을 개발하고 과학기술적 지식을 얻기 위해 하시는 작가님만의 노력(공부나 취미 등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만 해봅니다만…)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존재론적 철학 등 깊이를 담고 있는 내용들이 많은데, SF 서사에 이러한 의미를 담은 데에는 나름대로 의도하신 바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ID 채윤파파)

 

SF적인 서사를 외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기저로 구분하실 필요는 없고요, SF가 원래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SF 서사에는 원래 존재론적 철학 등 깊이를 담고 있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SF들만 따져도 전부 다 그런 것 같네요.


상상력은 어느 예술에나 필요하겠지만, SF에 어울리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좀 있을 것 같고요,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은, <과학동아>에 실리는 지식 정도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과학기술이 만들어낼 변화를 우리 생활에 연결시켜서 상상하는 능력 같은 건데, 앞뒤가 잘 맞게 논리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연습이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고실험이 잘 돼 있어야겠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안에 독자가 들어갔을 때 별 거리낌 없이 몰입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슬럼프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자신의 작품 중에 다시 한 번 더 써보고 싶은, 그러니까 리메이크 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좋아하는 영화 작품이 있나요? (ID 신민경)

 

슬럼프를 극복하는 비법 같은 게 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울 따름인데, 그 기간을 넘기고 나면 왜 그렇게 고민했나 싶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글이 막히는 것도 글쓰기의 정상적인 단계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소설은 공식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쓰는 형식의 글이 아니어서요, 장편을 쓰면 이런 고통을 좀 덜 겪게 되기는 합니다. 단편 열 편을 쓰면 그런 일을 열 번을 겪어야 하지만 같은 분량의 장편 하나를 쓰면 단편 기준 세 번 정도의 고통만 한 차례 겪으면 되거든요.


썼던 글 다시 쓰기는 잘 안 하지만, <청혼>은 단편이었던 걸 중편으로 완전히 다시 쓴 글입니다. 장편을 리메이크하고 싶지는 않고, 단편은 단행본에 묶이기 전에 대폭 수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리메이크를 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좋아하는 영화는 이것저것 많은데, <스타워즈> 최근 시리즈들을 보니까, 헉 소리가 나게 좋더군요. 그렇게 좋아하는지도 몰랐는데 말이죠.

 



연작소설 타워로 처음 접해 지금까지 쭉 SF 장르로 기억되는 작가님의 자리가 마련되어 좋습니다. 실상 1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SF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초현실이거나 비현실이거나, 그로 인해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접해도 빠져들기 어렵다)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은 거 같고, 더군다나 한국작가의 SF라는 상투적으로 비춰질 만한 고정된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것 같은데(전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게 질문을 하는걸 보니 제가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꾸준히 SF의 길을 걸어오시고 또 걸어가고 계시는 작가님이 말하는 SF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라는 조금은 추상적인 질문을 남겨봅니다. 트위터에서도 작가님의 목소리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독자와의 만남과 같은 행사도 알음알음 떠오르네요. 신작 소설로 다시금 작가님과 마주하는 자리를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ID 동심)

 

SF는 재미의 소스가 다양합니다. 칼 세이건의 <콘택트>라는 소설은 저한테는 앞부분이 엄청 지루했는데요, 전파천문학에 대한 설명이 그야말로 설명의 형식으로 잔뜩 들어있어서요, 과학자분들은 이 부분을 엄청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우주전쟁이나 모험 같은 부분을 좋아하고요, 요즘 제가 소설의 실용적인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에 담겨 있는 공기” 측면에서도 SF는 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에 몰입했을 때, 읽다가 덮어둔 책을 다시 펴 들었을 때 기대하게 되는 공기라는 게 있잖아요. 몰입감이라고 할 수 있겠고. SF의 공기는 뭐랄까, 후덥지근한 날 에어컨이 켜져 있는 공간에 딱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잘 정돈된 공기, 혹은 “conditioned air” 같은 느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의 느낌, 좋은 의미의 합리성에서 오는 편안함, 그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SF적인 글감, 소재들은 주로 어디서 어떤 것을 보고, 혹은 어떤 생각에서 이어져 오는 편인가요? <안녕, 인공존재!>의 ‘조약‘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독자로서 궁금합니다. (ID 이예은)

 

글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몇 년 전에 SF 작가들이 단체로 과학자분들한테서 주입을 받아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보니까 인위적인 주입은 잘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작가들 입장에서는 주입되는 내용보다는 강연을 하고 있는 과학자 자체를 구경하는 데서 더 많은 영감을 얻게 됐으니까요. 말하자면 잘 다듬어진 양질의 소재보다는 오히려 길에서 주운 게 더 가치가 있었던 셈인데, 창작자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직접 골라서 주워 담아야 의미가 있는 거라, 거기에 해당되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귀찮지만 여행을 가거나, 번거롭지만 뭔가를 직접 해 보거나, 되도록 안 하고 싶지만 공부를 하거나.

 

 

 
배명훈 작가님은 글을 쓰실 때에 특이한 습관이 있으신가요? 글이 안 써질 때에 주로 하는 행동은? (ID 영감)

 

특이한 습관이 있을까요? 잠버릇 같은 거라 저 스스로는 자각을 못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 안 써지면, ‘이건 글쓰기의 정상적인 단계야’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괴로워하고요, 큰 창문이 있는 곳으로 일하는 장소를 옮겨 보기도 하고, ‘그래, 오늘은 카페에서 하는 거야’ 하고 짐을 챙겨서 나갔다가 ‘역시 일은 집에서 하는 거지’ 하면서 도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놀아야겠죠. 죄책감이 충분히 쌓이면 인간의 창의성이 발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생각이 난 건데, 글이 안 써질 때 종이를 막 구겨서 바닥에 버리는 일 같은 것도 한번쯤 해 보고 싶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붙들고 있는 건 디지털 파일이라 던질 수가 없고…….
별다른 비법은 없지만, 아무튼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으면 결국은 쓸 수 있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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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어떤 사회 역사적인 그늘에 몸을 담그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가히 황정은 스타일이라고 부를 만한 경지다." (문학평론가 신수정) '황정은 스타일'이라는 설명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소설가 황정은이 알라딘 독자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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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작가축제였는지, ‘나는 왜’ 대학로 행사였는지, 그냥 팟캐스트 방송이었는지(아마 팟캐스트 방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다가 소설로 전향하는 게 비교적 진입장벽도 낮고 그런데, 반대로 소설의 경우는 그게 어렵다고, 뭔가 불공평하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황정은 작가님은 다른 장르의 글쓰기에 도전하고 싶은 계획, 마음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꿀성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데 목 관리 비법이 있다면??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했다면 푸념+ 농담이었을 텐데, 농담이었더라도 부끄럽고요……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소설을 쓰다가 시를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작업을 기준으로 두었을 때의 생각이며, 시는 제가 욕심낼 수 없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시와 산문, 양쪽 모두를 감당하는 작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질투심 때문에, 세상 어딘가에 그들이 있다……는 정도도 모르고 싶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라면……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인 듯합니다.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하고 한없이 얌전한 사람인 것 같다가도 어떤 작품에서 보면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로 그러신가요? 저는 그게 소라와 나나의 모습에 조금씩 담겨 있다고 보는데요. 실제로는 어느 쪽에 좀 더 가까우신지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같은 이유로, 소라의 어떤 면이 제게도 있고, 나나의 어떤 면도 있고요. 소라를 쓸 때는 부끄러웠고 나나를 쓸 때는 즐거웠습니다. 어느 쪽이 더 가까웠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님 말투나 글에서 ‘하였으므로, 으므로’라는 표현이 유독 많이 들립니다. 본인도 인지하고 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한번 단정하게 접히는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을 이미지화할 때는 글쓴이가 떠억 오버랩됩니다. 황정은 작가 책 속의 인물은 더욱 그런 모습으로 제게 다가오고요. 저는 그런 이유로 일상 속 짧은 메모를 남길 때에도 글 속에 나를 들키게 될까봐 주저하다가 생각만 하고는 놓아버리고 말거든요. 작가님 개인적으로 ‘본인을 가장 많이 투사한 작품 속 인물’은 누구일까? 궁금합니다.


독자로서의 저는 글쓴 사람을 드러내는 글에 더 매혹되고는 합니다. 저는 그것을 저자의 성질머리…… 성깔이 잘 느껴지는 글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제가 사랑하는 작가들이 글 속에 자신의 성질머리가…… 자신이 반영되는 것을 주저했다면 저는 그 글들에서 매력을 못 느꼈을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많이 반영된 인물은…… 최근의 소설들 중에선 ‘누가’일 수도 있겠네요.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읽고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큰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황정은 작가님의 소설이 점점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혼자 생각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괜찮다면,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궁금해요. 글을 쓰실 때 음악이 있어야 하는지 궁금해요.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만 요즘은 로이킴이 재작업한 김광석의 ‘너에게’를 반복해 듣고 있습니다. ‘일어나’도 듣습니다. 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도 듣습니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All the things you are도 듣고 f(x)의 ‘NU 예삐오’도 듣습니다. 최근엔 이렇게 다섯 곡만 번갈아 듣고 있습니다. 소설 쓸 때는 음악 듣지 않습니다.




작가님의 데뷔작부터 거의 빠짐없이 읽어온 독자입니다. 초기작에서는 가까이 있는 듯한 혹은, 쓰는 자신에게서 시작한 듯한 인물이 중심이었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멀리 있는 또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듯한 인물을 그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현재 눈길이 가는 ‘인물들’, 조금 돌려 말해주신다면, 그 인물들이 살고 있을 법한 ‘어떠한 세계’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다음 작품은 왠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을 향해 있으실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다음 작품을 재촉하는 질문이 되어버렸네요.


하찮음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최근 자주 경험하고 있는 하찮음에 관해. 그 경험에 관해. 그 심정에 관해. 자신과 남을 자꾸 하찮다고 여기게 만드는 우리의 구조에 관해.

소설을 쓴 초기엔 발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해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했고,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를 뒤흔드는 상황과 인물에 관해 씁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조금씩 타인과의 이야기로 필연적으로 이동해왔지만, 최근의 이 인물들은 제 초기작 인물들보다 저와 더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리뷰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마주본 이후,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책을 읽어야 살아 있는 것만 같던 제게 책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것도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묵묵히 넘기던 책장은 공허함으로 저를 누르고 살아 있지 말라, 이야기합니다. 제게 책으로 돌아갈 길을 알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디 그 무엇도 아닌 책으로, 그 속에서 느꼈던 위로와 희망과 벅찬 설렘을 느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독자인 동시에 작가로서 더 읽고 더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제 경우엔, 무지라는 양상으로 이 사태에 상당한 몫을 보탠 바가 있기 때문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했고, 그것을 알려면 우선 젠더 구조를 공부해야 했으므로, 일단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부터 모아서 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읽은 우에노 지즈코의 말 그대로, 일단은 자신의 혐오를 맞닥뜨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를 견뎌야 하는 일이었지만, 요즘은 전보다 즐겁게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가 전과는 조금 다르게 경험되고 있지만, 저는 이 변화가 꽤 즐겁습니다. 게다가 피해생존자들과 연대자들의 용기와 언어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전 얼떨결에 층간소음 가해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쫓아올라온 사람이 ‘아래층이야 씨발년아’ 같은 욕까지는 안 했지만 큰 당혹과 수모를 뒤집어쓴 느낌이었습니다... 단편 <누가>라는 작품을 쓰시게 된 배경, 자세히 듣고 싶고 또 궁금합니다.


<누가>의 배경은 820-17번지입니다.

이 단편을 쓰게 된 계기는 계간 문학동네 봄호에 이미 짧게 언급했습니다만 이 단편을 쓸 때, 사회 구조가 견고하고 교묘해지면서 구조적 문제를 투명하게 보기가 어렵고, 보았다 해도 그 구조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듯하다는 무력감이 지배적인 사회적 정서일 때, 분노가 인접한 타인들에게, 예컨대 고만고만한 ‘이웃’에게 향하는 경향에 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계급 안에서 피해와 가해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혐오해 못 견디는 경향들에 관해서요.




그동안 쓰신 작품 중에서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나 이렇게 썼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百의 그림자와 야만적인 앨리스씨와 계속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서너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단편들입니다.




작가님 sns같은 거 하실 생각은(당연히 없을 것 같지만 미련이 생겨서 물어보아요...) 없으신지... (너무 좋아하는 작가님인데 소식 듣기가 가뭄에 단비 나는 듯하여 넘나 슬프고... 하지만 그게 작가님의 매력이기도 한 것이지...) 아 그리고 앉으면 척추가 펴진다는 의자 어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도 요즘 허리가 넘 안 좋아져서... 이러나저러나 건강이 최고인 것입니다... 작가님 늘 건강하세요.


SNS로 제 소식을 전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니스툴의 등받이 없는 닐링체어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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