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대담한 장편소설 <N.E.W.>로 독자를 찾은 김사과 작가와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소설을 읽은 후 함께 생각해보기 좋은 답변을 공유합니다. (N.E.W.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 질문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안녕하세요. 현재 뉴욕에 거주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평소에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 작가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일상생활이 궁금합니다.


일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거나 아니면 밖에 나가서 사 먹습니다. 일이 있는 날에는 근처 카페에 가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씁니다.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다른 자잘한 일을 하고 저녁은 가능한 한 집에서 먹습니다.

보통 책을 쓸 때는 몇 달 동안 꾸준히 쓰고 고치고 하는 편이고요 그렇지 않을 때는 일기조차 쓰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그때 메모를 해두는 편입니다.




재벌 2세와 치정이 얽힌 이야기입니다. 흔히 '막장 드라마'라고 말할 만한 이야기인데요, 재미있게 잘 읽히기도 했고요. 기존 김사과의 소설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낯선 부분과 익숙한 부분을 동시에 느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발자크와 헨리 제임스 소설을 즐겨 읽어서 그 영향이 큰데요, 예를 들어 최상층 부자와 밑바닥 가난한 자들이 등장하며 등장인물들이 신분 상승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하고 치정과 배신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등, 그것이 요즘 한국 기준으로 봤을 때 영락 없는 막장드라마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어찌보면 한국의 순수(고급)예술이 현실(세속)의 인간사회를 탐구하는 것을 결벽증적으로 멀리하여 대중예술이 그 역할을 억지로 떠맡은 것이 아닌가 안타깝기도 해요.

















전작 <천국에서>보다 계급의 범주가 더 극으로 벌어진 느낌이 듭니다. 5평 원룸에서 200평 펜트하우스까지. 이 사람들이 '메종드레브'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알고 있으면서도 구별된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도시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다시 말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시로만 몰려들게 되면 양극화는 필연적인 결론인 것 같습니다. ‘메종드레브라는 장소는 그렇게 도시화 하는 세상에 대한 메타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평생 교류할 가망이 적은, '상류층'의 일상에 그들이 참여하는 방법. 소설에서 묘사된 최영주의 유튜브 동영상, 정대철 회장을 둘러싼 소문이 퍼지는데 도움을 주는 휴대폰 메신저, 최영주가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인스타그램 등의 매체가 인상적이었어요.


저를 포함하여 요즘 사람들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을 통해서 타인들의 진짜 삶을 엿볼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완벽한 환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진짜로 살아가는 삶은 인터넷을 떠도는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것이 거듭 지적됩니다. 진짜 삶이 보여지는 이미지와 정반대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요즘은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이미지와 라이프 스타일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상관이 없죠. 만약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공항이나 버스터미널에 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어, 영어 등의 문장 인용이 부분부분 등장하는데, 해석이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모든 문장을 다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 글에서도 뜻보다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중요한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하나를 돕는 캐릭터인 '성공자'가 재미있었습니다. 중독자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 공통점이 있어보였고요, 도박중독이 다른 소비 중독, 권태 중독보다 덜 심각하게 느껴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공자는 도박을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 나았을 파괴적인 열정을 이하나가 정지용과 엮이는 것에 도움을 주는 데 사용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해로운 인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공자가 부추기지만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재미있는 문장이 많습니다. 저는 정지용의 입에서 나온 "나는 미끄러지는 미꾸라지ㅡ 잠시 외로운 미꾸라지" 같은 말장난이 정지용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장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정지용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위험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반대로 귀엽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으면 했어요. 덧붙여 정지용이 영어와 불어, 독어를 할 줄 알고, 랭보나 바이런, 셰익스피어 같은 문학가들을 언급하는데요, 유치한 말장난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언어적 재능이 풍부하다는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어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습니다 최영주와 이하나 사이를 오가는 정지용의 욕망도, 정지용에게서 카드를 받아 소비생활의 끝을 즐기는 이하나의 욕망도 한 단계를 넘어서면 더 이상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음이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그저 꾸준히, 가능한 한 길게 기분이 좋은 상태가 이어지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아주 좋은 일도, 아주 나쁜 일도, 혹은 아주 괴상한 일도 벌일 수 있다. 내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면.”(143) 이 문장이 그래서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욕망은 원래 충족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욕망 그 자체보다는 욕망을 둘러싼 모든 것이 거래 혹은 게임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정지용은 이하나와 최영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한 게임이지요. 이하나는 정지용의 첩이 된 대신 무제한 신용카드를 얻습니다. 최영주는 정지용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아이를 버리고요. 정대철은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습니다.거래들은 전혀 공정하지가 않고, 게임의 룰은 가혹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무정한 신의 관점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끔찍한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 부르기로 할 때 그 인간은 혹은 우리는 우리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다." (264)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이어 나갈 정지용과 최영주는 새로운 인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히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악명 높은 폭군과 악녀의 계보를 잇는 고전적인 인간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대철을 어머니 은미라를 '잡아먹은' 아버지라고 묘사하는 부분 , "하나 씨,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정지용 등, 소설에서 사용된 '먹는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이 단어들이 놓인 자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정지용이 사는 세상은 흠 없이 완벽한 세상입니다. 항상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날 것입니다. 한 사회의 지배계층이 사는 세계의 전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들의 삶은 가장 더러운 것, 피냄새 진동하는 밑바닥 세계가 없다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먹는다는 원초적인 단어, 동물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습니다. 최근 즐겨본 드라마, 요즘 빠져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Thirteen reasons why(한국명: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미드가 재미있었습니다. 미국의 십대들 이야기인데요, 스킨스가십걸을 섞은 데다가 유령 이야기를 가미한 느낌입니다.




이하나에게 책을 한 권 추천한다면 어떤 책을 권할 수 있을까요?


셰익스피어 『겨울이야기』




요즘 읽은 책 중 알라딘 독자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리처드 호프스태더 『미국의 반지성주의』


















오랜만에 장편소설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쓰는 동안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읽는 분들도 즐겁게, 신기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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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고 싱그러운, 여름 같은 소설 <경애의 마음>의 김금희 작가를 만났습니다. '마음'에 대해 함께 나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질문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권벼리, 정리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경애'한다는 것



<경애의 마음> 출간 이후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묻고 싶어요.


<경애의 마음>이 나오고 나서 인터뷰도 좀 있고 행사들도 있고 그래서 사실 아직 뭔가를 계속 진행중인 느낌이고, 확 쉬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아직은 긴장하고 있는 상태예요. 장편이라 확실히 단편집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계속 행사 등이 있어서 아직은 그냥 이 책 안에 있는 느낌이에요.


여행은 도쿄로 다녀왔어요.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 책이 일본에서 봄에 나왔어요. 그게 서점에서 꽂혀있는 걸 보겠다는 생각으로 간 건데 막상 이상하게 도쿄에 가니까 굳이 찾아보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한 이틀은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길을 지나다 중고 악기상 있고, 대학교 있고, 그런 거리에서 대학교 건물에 있는 서점에 들어갔더니 외국문학 책장에 제 책이 있는 거예요. 희열을 느낀 나머지 책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려고 삼십분 넘는 거리를 걸어서 다른 서점에도 또 갔어요. 이 도시가 이제 내 책이 있는 도시가 됐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게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전작 <너무 한낮의 연애>도 제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한낮에 만난 연애는 어쩐지 불가항력이라 도리가 없을 듯해요. 이 소설 속 인물들, 경애와 상수에게 벌어지는 어떤 일들도 불가항력적인 것들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경애가 어렸을 때 자기 닉네임을 ‘피조물’이라고 하잖아요. 피조물은 ‘있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상처들이 우리가 선택해서 생겨난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그 주어진 것을 넘어야 하는게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무게인 것 같아요. 경애와 상수에게 일어나는 일들, 경애가 어렸을 때 부딪치게 되는 상황들도 그렇고요. ‘피조물’이라는 닉네임에도 사실 그런 마음을 담은 거였는데 독자분들이 그렇게 읽어주시면 좋겠죠.


쓰면서 생각을 했어요. 이들의 인생에 주어지는 상처들이 있죠. 내가 원치 않는 상처가 내게 주어졌을 때 그걸 넘어서는 힘을 보여주잖아요. 그런 모습이 실제의 삶과 되게 닮아있는 것 같아요. 대단한 일을 하다 상처 입은 건 아니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로도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경애의 마음>이라는 제목이 작가에게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경애’라는 단어도 이 소설 이후 새로운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듯합니다.


‘경애’라는 제목은 갑자기 떠올랐어요. 이 작품을 시작한 게 2016년이었는데요, 장편을 써야 되고 연재를 해야 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경애’라는 이름이 왔어요. 여자주인공은 경애가 되는 거구나. 이 소설 속 두 주인공을 추슬러서 결국에 둘이 서로의 조력자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게 이 소설의 목표라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의 결을 생각하다 갑자기 팍 떠올랐어요.


계간지에 연재할 때는 제목에 경애(敬愛)라는 한자가 있었어요. 단행본 작업을 하다 디자인상 한자가 들어가면 보기에 나빠서 빠지게 되었는데, 출간 후 인터뷰를 진행하며 만난 기자들이 한자가 없는 게 훨씬 낫다고 하시더라고요.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진대요. 그래서 아 그랬구나. 빠지는 게 더 경애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되는 거였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좋아하는 것을 말하기


독서 후 "재밌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좋아한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사랑하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친구 같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내 주변에 있는 친구 같고. 우리가 사는 모습이 담겨있고, 엄청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고, 일상적인 얘기들이 많잖아요. 물론 소설이고 이야기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진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처음 이 소설의 결말을 구상했을 때는 이 인물들이 이렇게 의지적이지 않았거든요.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인물들에게 의지가 생겨서 경애가 일어선다, 인물들이 도드라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장편은 2년을 넘게 쓰니까요, 그 가운데 작가도 변하고 이야기도 쌓이고 하며 작가가 의도한 대로가 아니더라도 인물이 의지를 가지고 변하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쓰는 저에게도 좋고 책에게도 좋은 일이었던 것 같아요.




상수는 일반적인 남성 사회에서는 적응을 하기 어려운 유형의 사람입니다. 처음 상수라는 인물을 상상했을 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 주변에 있는 남성들과 자기 속내 얘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상수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결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어요. 화장실을 가린다든지 하는 점이요. 남자형제가 있는 가운데 성장했을 때 형에게 받은 고통, 아버지라는 존재에 가지는 부담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제 또래뿐 아니라 저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이런 얘기를 하실 때가 있는데, 이게 한국사회의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상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 면들을 그려 넣었어요. 상수가 도드라지게 특이한 건 맞죠. 그렇지만 상수라는 인물을 해명하면 상수 같은 어떤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상처도 해명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상수의 언어와 경애의 언어가 다른 점도 인상적입니다. 상수는 문어투의 말투를 쓰고, 경애는 욕설도 서슴지 않는 말투를 씁니다. 상수는 실제 사람과의 대화보다는 페이스북 등의 문자로 하는 소통이 더 익숙한 사람일 테고, 경애는 그에 반해 실제 사람과 나누는 말이 익숙한 사람이라는 점도 다를 듯해요.

(주 : 상수는 이런 말투를 씁니다. “박경애 씨, 제가 어떤 사람이나면요.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렇게 규칙을 잘 지켜요. 매뉴얼이 뚜렷하지요.”(54쪽))


둘 다 아웃사이더고 회사에서 내쳐져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과정이 다른 것 같아요. 상수는 개인적인 인물에 가깝죠. 경애는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파업문제라든지 주변과의 관계, 공적인 자리에서의 상처가 있는 친구죠. 이 둘이 성장해온 과정을 생각해봐도 상수는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사적인 맥락에서의 아버지 역할은 충실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랐죠. 반면 경애는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가 할 수 있는 한은 충실하게 역할을 해주셨고요. 이런 다른 성장과정을 거친 남녀가 가질 법한 고립감과 연대감의 차이가 이들이 쓰는 언어를 다르게 하는 것 같아요. 상수도 연대를 추구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경애는 실제 관계에서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상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자기 세상을 만들어서 관계 맺기를 시도해 본 거라고 생각해요.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생각했다.” (71쪽) E, 은총과 연관된 사고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읽으며 화가 났어요. 이 소설에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장면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경애의 투쟁, 경애를 파괴하는 것 같은 산주의 태도 등을 볼 때 그랬어요.


그 장면을 쓰던 순간은 저도 기억이 나요. 스타벅스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사고, 사건에 대한 서술이 분량이 꽤 되는데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나와서 한번에 썼어요. 그때는 경애가 그 사건을 바라보는 분노감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한번에 막 터져 나왔던 것 같아요. 실제 책에 들어간 부분도 처음 쓴 글에서 별로 손대지 않은 상태예요.


제가 인천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는데요, 그 사건(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고)에 대해서는 이십대의 제가 느꼈던 그런 당혹감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말을 하기 어려운, 인간으로서 비참해진 느낌 같은 거였는데, 그 감정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상수가 경애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경애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좋게 읽혔어요. 

(주 : “상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47쪽))


좋은 감정이 들기 시작하면 사람이 수그리게 되잖아요. 자기를 꺾고 맞춰주고 싶고 이런 마음이 들어서 자기 마음이 순해지는 순간이 누구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수가 그런 마음을 가져보는 순간을 생각했어요. 경애와 회식을 하는 상황에도 상수는 자기가 이 팀을 이끌기 위해 경애에게 맞춰준다는 변명을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경애가 자기한텐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거죠. 어렸을 때도 상수가 형에 대해서 형이 안하무인인 인간이 된 건 형에게 중요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형이 그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상수에겐 또 다른 밀침처럼 느껴져서 비참해졌다는 서술이 있고요. 자신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생겨나는 순간, 상수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은 감정이 낯설어서 부인을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독자의 눈에는 몸이 낮춰지고 순해지고 풀어지는 그런 느낌이 보이잖아요.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일하는 풍경의 구체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도미싱의 회사 생활에서부터 베트남 파견 근무까지. 노동으로 돈을 버는 생활의 풍경을 활달하게 그리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주 :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도 그런 ‘의미’랄까, ‘본질’이랄까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84쪽))


일하는 사람들을 작가가 그릴 때, 그들을 일종의 타성에 젖은 사람으로 그리는 걸 볼 때 약간 화가 나요. 제가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 일을 할 때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타성에 젖어있기만 하진 않았어요. 저도 그렇고 모두가 일을 하며 살잖아요. 일을 한다는 건 그 일에 자기 삶을 부어넣는 행위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야기의 전달을 위해 일의 측면을 삭제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해요.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저희 부모님도 일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성실할 이유가 있나?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웃음) 그 노동을 대하는 자세가 진솔했다는 기억이 있어요. 제가 직장생활을 하며 만난 선배들도 기억해보면 노동을 통해 뭔가 이루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다고 저는 기억을 해요. 그런 결이 있는데 없다고 하는 건 기만 같아서 느끼는 대로 쓴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의 질문인데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이 부분이 좋게 읽혔습니다.


저도 약간, 하루를 보내면서도 순간순간 제 마음을 다시 단정하게 하고 노력해야 되는 사람이에요. 그게 잘 되지 않을 때는 실제로 일상부터 파괴되거든요. (소설 속 경애처럼) 안 먹고 안 씻고 하는 건 가장 필수적인 것부터 안 하게 되는 거잖아요. 사람이 자기 무게를 감당 못하는 순간이 올 수 있죠. 실제로 저도 그랬기 때문에 하루하루 어떻게든 일상을 꾸려나가는 게 굉장한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사람들이 ‘내가 되게 열심히 못하고 있네. 나는 왜 이거밖에 안 되지.’ 이렇게 자기 채찍질을 하는 게 안타깝기도 해요. 일을 하고 퇴근해서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그 질서가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상수가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스북 사건 이후 못 씻고 있을 때 경애가 해주는 말 등의 장면을 넣게 되었어요.




피씨통신 동호회, 미투데이 등의 매체에서 페이스북 페이지로 이어지는 동안, 모이는 장소는 달라져도 사람들이 나누고 싶은 마음들은 다 비슷한 결이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경애랑 은총이 ‘번개’를 해서 만나고, 상수와 ‘언죄다’ 회원이 만나고 그런 장면들이 있죠. 이 소설을 쓸 때 문득 이십대들이 ‘번개’를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물 두 살인 친구 동생에게 물어봤는데 모르더라고요. 그게 참 신기했어요. 말은 바뀌는데 온라인 모임이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지는 건 그대로인 점이요. 


처음 만나선 낯선 사람이니까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에서 알게된 사람들도 마음에 들어오면 만나고 싶죠. 궁금하고. 제 인스타그램 친구분 중 몇 년 전에 제 소설의 일부를 캘리그라피로 쓰셔서 올려주셨던 분이 계세요. 그 작품이 너무 예뻐서 제가 먼저 ‘좋아요’를 찍었고, 그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어요. 그분이 얼마 전 도서전에서 사인회를 할 때 처음으로 오셔서 실제로 뵙게 됐어요. 제가 낸 책이 앤솔러지 등을 포함하면 꽤 많은데, 그 책을 다 가지고 오셨어요. 그 책들에 사인을 해드렸고, 너무 반가워하시고 좋아해주시더라고요. 뭘 주고 가셔서 집에 가서 풀어보니 <경애의 마음> 속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문장을 넣어서 그림을 그려주셨더라고요. 인스타로만 연결되어 있던 분을 실제로 잠깐이지만 만나 뵙게 되었고, 그분이 실제로 자기 손길이 닿은 선물을 주고 가시니까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작가로서 응원 받은 게 아니라, 아는 사람으로 응원을 받은 것 같았어요.




이유와 목적이 없이, 단순한 선의로, 사람을 돕는 게 결국 사람이라는 점이 좋았어요. 경애에게 하는 주끼박의 충고가 그랬고요, (“내가 한 이삼일 내로라도 짐 싸서 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못 버텨.” 218쪽)) 김유정이 경애에게 해주는 말이 그랬고요. 헬레나와 경애가 스스로 서로를 돕는 모습 역시 참 좋았습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그런 식의 도움을 주고받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생기잖아요. 굳이 내가 해야 되는 일은 아니었는데 선의로 누군가를 돕게 되는 일이요. 노동이 쉽지 않죠. 일을 같이 해야 하는 사람들과도 경쟁도 있고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고요. 그렇지만 마음이 가서 서로 도와서 이 일이라는 것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저는 팀에는 대부분 여자들만 있고, 상사만 남자인 부서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제가 막내였고, 다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분들이었죠. 실제로 여자 선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을 쓸 때 제가 직장생활에서 받았던 느낌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그려진 것 같아요.


‘주끼박’이라는 사람은 그 사람이 과거에 했던 행동들을 보면 사실 남성 사회에서 요구하는 폭력성을 익힌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남성 중심의 영업자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경애에게 조언을 해줄 때, 경애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고 기존 반도미싱 베트남팀이 ‘아작’났으면 좋겠으면 마음도 있었겠죠. 그래서 그런 애매모호한 충고를 했을 거예요. 경애가 주끼박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가 궁금해서 이런 설정을 넣게 됐어요.




상수가 형이 한 잘못(동급생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 사과하러 가는 장면에서 피해자 엄마의 신발을 볼 때 묘사가 담담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사실 눈물이 났어요.


그 분들이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섬에서 올라오신 상황이잖아요.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꾼 거죠. 그런 선택을 하면서까지 아이를 데리고 이 서울이라는 곳에 정착하려 했는데 굉장한 폭력을 마주한 거잖아요. 마음에 후회와 분노도 있을 것 같았고, 저라면 떠나왔던 고향을 생각하게 될 것 같았어요. 파도가 치는 섬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온기라든지요. 그 어머니에겐 극한의 분노가 느껴지는 상황이었겠죠. 이런 상황에서 그 엄마를 다독이고 싶었어요. 서울에는 바다가 없으니까, 대신 나뭇잎이 파도처럼 발을 쓸어주는 장면을 썼어요. 그런 마음을 느꼈으면 했고요.


(주 : 그러는 동안에도 낮의 그 백홍식당의 어느 장면들은 상수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는데, 가장 뚜렷한 건 배웅하려는지 아니면 상수와 일행이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그 엄마가 식당 앞 보도까지 나와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엄마가 신고 나온 붉은 가죽끈의 샌들 위로 떨어지던 나뭇잎의 어른거리던 그림자들. 그 검정의 그림자들은 발을 덮는 듯도 하고 어둡게 물들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동시에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파도처럼 발을 여러번 쓸어주는 듯했다. (122쪽)




마지막에 상수에게 부장이 전화로 “간곡하게 말하는데 제발 좀 닥쳐”라는 말을 해요. 이 부분이 ‘빵 터질’ 정도로 굉장히 재밌었어요.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까요?


실제로 닥치라고는 말을 못했지만 그러고 싶은 순간은 되게 많잖아요. 그게 그 상사가 한 말이라서 웃긴 것 같아요. 그 상사에게 상수는 처음부터 부담스러운 상황에 만난 사람이었죠. 그 부장님이 인간적인 면이 있는 분이에요. 상수가 사고를 칠 때마다 어쨌든 해결을 해주시잖아요. 회사측의 입장으로 하는 말이긴 했지만, 그 장면에서도 상수에게 과격하면서도 인간적인 충고를 하게 된 것 같아요. 말 앞머리의 ‘간곡하게’라는 예의바름과 ‘닥쳐’ 사이의 간극이 재미있게 보였으면 했어요.




한강에서 오리배를 탈 때 오리배에 ‘파라다이스’라고 써있어요. 그 장면의 아이러니가 인상깊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리배를 왜 한강에 띄울까 띄우는 마음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됐어요. 상업적인 발상이고 사실 촌스러운 발상이죠. 80년대엔 새로운 시설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타는 사람도 얼마 없고요. 그래도 그 시설이 계속 유지된 채로 한강에 떠있다는 건, 사람들의 향수가 들어가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오리배가 어떤 시절을 환기할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유년을 생각할 때, 화나는 부분, 아름답지 못한 순간들도 떠오르겠지만 오리배를 타던 순간 같은 즐거운 순간도 있었을 거잖아요.

 

물론 산주와 오리배를 본 상황 자체는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연인이었기 때문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둘에게 일어나는 기쁨이 있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유년의 어떤 시절을 환기했을 때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고, 씁쓸하기도 하지만 기억에 남는, 그런 순간들이 있듯이요.




‘은총’이 애틋합니다. 사고가 있지 않았다면 은총이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작가가 상상하는 은총은 어떤 사람일지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됐을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소설 뒷부분에 경애가 과거라 은총에 대한 기억이 미화된 게 아닐까, 자신의 슬픔이 포장된 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긴 해요. 그렇지만 경애가 기억하는 은총의 모습이 실제의 그가 맞는 것 같아요.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은총이 아이인데도 가지고 있는 의젓함, 건강함이 있어요. 그게 은총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서 저절로 주어진 것들은 아니거든요. 은총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에 나오듯 아버지가 현재 실직한 상태죠. 은총의 동네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옆 동네인데,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기도 했던 곳이에요. 아이가 건강하지 못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은총은 그런 걸 보듬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기 때문에, 커서도 건강하고 환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읽고 쓰는 마음



인간 김금희로서의 첫 기억이 궁금합니다.


세살 때 기억이 있어요. 제가 문지방에 이렇게 앉아있고 엄마가 부엌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어요. 문지방은 갈색이고 나머지는 청색이었어요. 부엌과 방의 경계에 있는 나, 그게 최초의 기억이에요,




언제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지, 또는 언제 소설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꿈이 종종 바뀌기는 했지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했어요. 소설가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된 건 중학교 때인 것 같아요. 문예반을 하면서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를 많이 읽었는데, 십대 때부터 좋아하던 작가분과 비슷한 시기에 책을 내게 되어서 신기했어요. 이십년 가량 시간이 지난 거거든요. 소설가라는 직업이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직업이구나, 이게 갑자기 의식이 됐어요.


(주 : 최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고양이>가 출간되었습니다.) 




“그런 건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 중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부스러기 같은 기억들인데 가장 오래 남는 기억도 그런 것이었다.”(231페이지) 은총과 경애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문장인데요, 작가가 기억하는 ‘부스러기 같은 기억’ 중 지금 소개할 수 있는 기억이 있을까요?


대학 때 연애했던 사람이 있는데요. 연애하기 직전, 약간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저는 마을버스에 타고 있었고 그 사람은 길을 지나는 걸 봤었어요. 버스가 지나고 그 사람이 지나는데 점퍼에 손을 넣고 노래를 부르며 가고 있더라고요. 그 장면이 지금도 되게 생각이 나요.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차림이 별로 멋있지도 않았어요. 애벌레옷 같았어요. (웃음) 볼록볼록하고 멋없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그 순간 되게 건강해보이고 멋있어보였어요. 자기 세계가 건강하면 저럴 수 있구나 싶은, 건강함이 도드라지던 순간이어서 그 장면은 지금까지도 되게 실감있게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주 : 김금희 작가의 이 ‘부스러기 같은 기억’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소설과 감정의 결이 닿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경애의 마음>에서 독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문장, 단락이 있다면.


교회에서 경애가 호프집 사장님 같은 사람을 쫓아가서 “죄를 지었죠?” 묻고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답을 받는 장면이 있어요. 나가는 문이 어디냐는 그 사람의 질문을 받고 대답으로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순간, 경애의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이 소설에서 경애가 그려지는 거의 마지막 장면이거든요. 완전한 성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로서는 경애가 자기 내부에서의 한계를 넘었다고 할까, 그런 장면이라 같이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에요.


주 : 

“죄를 지었죠?”

그래도 경애는 물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선선히 답했다. 그러자 경애는 더는 물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기타를 다시 어깨에 메며 경애에게 물었다.

“자매님 여기 출구가 어딥니까? 계단으로 올라가면 들어온 문이 나옵니까?”

경애는 치미는 뭔가를 참기 위해 주먹을 쥐고 있다가 풀며 이내 문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남자가 그쪽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346쪽)




소설 이외의 책 중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을까요.


저는 사실 소설을 주로 읽어요. 또 최근에는 작업하느라 무거운 책은 못 읽기도 했고요.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은 <히끄네 집>이에요. ‘히끄’ 계정을 팔로잉하면 매일 아침 고양이 ‘히끄’ 사진을 받을 수 있거든요. 달마다 배경사진을 올려주셔서 지금 제 전화기 배경화면도 ‘히끄’사진으로 되어 있어요.


예전에 읽은 책 중엔 배수아 선생님이 쓰신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이라는 알타이 여행기가 있는데요, 너무 좋았어요. 그 여행의 이국적인 풍경과 선생님이 가진 고유의 리듬이 맞아서 너무 깊으면서도 신비로운 여행기가 되었더라고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알타이 남자는 암소로 자기 재력을 뽐내고, 이런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배수아 월드에 대해 찬양하게 됐어요.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연을 보낼 ‘언니’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지금 읽고 있는 책이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인데요, (주 : 이하 내용엔 <디스코 멜랑코리아>라는 작품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디스코 멜랑코리아>라는 작품의 감동에 대해서 오늘도 생각했어요.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랑에 상심한 사람들이겠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처라는 게 언니한테 사연으로 보낼 때는 솔직해지고 세세해지잖아요. 이 작품을 읽을 때 그렇게 사랑 얘기를 듣는 것 같았어요.


두 남자가 만났는데 거기에서 만난 상대가 ‘나는 몸을 중요하게 생각해’라고 말을 해요. 소설에서 나타난 걸로는 내가 그 사람이 원하는 체형은 아닌 것 같아요. 연애 상황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게 공통된 부분이 있죠. 제가 가슴 아팠던 건, 자기 고향에 이 처음 만나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보낸 뒤 자기 집에 있는 티셔츠를 가져다가 입혀줘요. 연락처 교환도 안 했고 하루로 끝나는 연애인데요. 


제가 <경애의 마음>에서 미싱 회사에 관심을 가진 것도 실은 그 생산물이 옷이라는 점 때문이었어요. 옷이라는 게 자기 일부인 셈이잖아요.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떠나면 이 사랑도 정리가 되죠. 자기 일부와 다름없는 ‘옷’을 주었고, 이별하게 되는 순간 떠나는 이를 보며 “너에게 이 계절을 주고 싶다, 날씨를 주고 싶어, 그건 내가 아는 최고의 선물이고”(120쪽)라고 감정을 토로해요. 이 순간의 감정이 슬픔과 환희가 다 얼룩진 상태라고 생각했고요, 사랑이 가진 밀도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빵빵하게 차오르는 순간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언니는 죄가 없다’에 사연을 보내고 싶은 언니들이 있다면 신간이지만 소설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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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최은영 작가를 만났습니다. 소설처럼 정성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하던 작가의 말을 소개합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최은영이 오다


두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서점에서는 예약판매로 사인본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고객의 열기에 새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실감했는데요. 신간 출간 이후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요?


예약판매를 진행할 때, 사실은 신기했어요. 아마 첫 번째 소설집 읽으신 독자분들이 다시 재구매를 해주신 거겠죠? 다시 이어졌구나 생각을 하니 신기했어요. 신간이 나온 뒤엔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책을 보내드려야 하는 친구들, 아는 사람들 주소록도 정리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번 학기 강의를 해서 성적을 매기는 기간이라 최근에는 성적 매기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평소 최은영 작가의 하루, 하루를 보내는 순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요. 열시쯤 일어나서 운동을 가기도 하고, 운동을 안 가는 날엔 잠을 더 자고, 두시쯤 작업실에 가요. 글을 쓸 때는 밤까지 작업실에 있어요.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글을 쓰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놀면서 인터넷도 하고 그래요. (웃음)




인터뷰를 진행한 오늘(7/4일 낮 최고 기온은 32도였습니다)도 날씨가 굉장히 더운데요, 전작 <쇼코의 미소>의 여름, 산책의 이미지가 근래의 날씨와 특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계절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저는 여름을 좋아하고 겨울을 너무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여름이 되면 살아있다는 게 느껴지고 기분도 좋아지는데,  슬슬 추워지면 정말 우울해지고 힘들고 몸이 아파요. 더위도 별로 안 타고, 겨울엔 좀 아프기도 해서 여름이 훨씬 좋고 기운이 납니다.




최은영 작가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전의 일, 나의 첫 기억이 궁금합니다.


저의 첫 기억은, 조금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정말 아기 때 본 장면인데 좀 ‘저 사람 뭐지?’ 했던 기억이 있어요.




<쇼코의 미소>가 출간되기 전 김연수 작가의 기획으로 낭독회를 진행핬뎐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낭독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최은영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온 독자와의 낭독회의 기억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주 : <쇼코의 미소>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에 이 일화가 등장합니다. 2016년 2월, 소설가 김연수의 기획으로 <우리가 처음 듣는 소설의 밤>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 신인 작가가 어디에서도 공개한 적 없는 단편소설을 그날, 낭독의 형식으로 처음 발표하기로 한 것. 평소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 그가 계속해서 소설을 써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행사를 기획했다는 김연수의 소개가 끝나고, 곧바로 작가의 낭독이 이어졌다. 그날 공개된 작품의 제목은 「씬짜오, 씬짜오」, 신인 작가의 이름은 최은영이다.)


제 작품을 통으로 읽었던 낭독회는 두 번이었던 것 같아요. 김연수 선생님께서 기획하신 낭독회는 그중 첫 낭독회였어요. 그땐 책도 나오기 전이고,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물론 지금도 잘 모르지만 정말 모르던 때고, 그러던 중 선생님께 부탁들 받아서 사실 부담이 되더라고요. 거기 오신 60여명은 저를 아는 사람이 아니고, 선생님을 보러 오신 분들인데, 눈 오는 추운 겨울날, 사람들을 불러서 이상한 소설을 읽어서 미안해지게 될까봐 사실 걱정을 했어요. 이후 행사는 혼자 하는 행사여서 괜찮았어요. 못해도 저만 욕먹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첫 행사는 선배 작가님께서 추천해주셨는데, 선배 작가님께 피해가 될까봐 걱정했던 기억이 있어요.


(주 : 2년 전 일인데 그 날의 날씨, 모인 사람들, 그 사람들을 대하던 내 마음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말씀해주시는 부분을 저는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읽었습니다.)







내게 무해한 사람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곱씹어 보셨을 듯해요. 작가의 말에서도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고요.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고백> 中)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은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사람이라면, 실은 대부분 그 사람이 뭔가를 참고 있을 거라고, 힘든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다른 이에 대해 ‘저 사람은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요.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다른 사람을 무해하다고 판단하는 그러 위치에 있어봤을 것 같아요.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순간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번 소설집 속 일곱 편의 소설에도 대부분 다른 사람한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 같았어요. 악해서도 아니고, 악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작품들을 엮다보니 제목을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정하게 됐습니다.




정말 모르던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는 소설이 있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을 잘 들여다보며 이야기해주는 소설이 있을 텐데요. 이 소설은 후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이 묘사하는 감정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잘 알아채지 못한, 알아채지 않으려 하는 감정들인 듯해요.


세상에 재밌는 게 정말 많잖아요. 드라마도 정말 재미있고 유튜브도 재밌고. 그런데 왜 굳이 소설을, 제 소설 같은 평범한 소설을 읽을까, 하는 생각을 저도 하는데요.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소설을, 저는 사실 재밌어서 읽어요. 예를 들면 영화 같은 다른 매체는 너무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특이한걸 보여줄 순 있지만, 소설만큼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긴 어렵다고 저는 생각해요.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지점을 알아채도록 하는 소설의 역할이 독자로서 제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가장 아프다고 생각했던 부분, 기억 속에 묻어둔 어떤 부분들에 대해 특히 더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모래로 지은 집>이 가장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우리가 어떤 감정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다고 하면,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화를 냈어야 하는데 화를 못 낸 상황이 지나갔다고 하면, 물론 내가 계속 화가 난 상태는 아니지만, 그 화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어떤 걸 잃어버렸던 상황, 슬픈 상황에도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그 감정은 제 안에 남아서, 제가 비록 느끼지 못하더라도 사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작품을 읽은 후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감정을 다시 느낀다면 풀어지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때 그런 일이 있었고,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하며,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야 슬프고 화가 나는 경험을 했던 과거의 나와 더불어 살 수 있으니까요. 일상을 살다보면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으니까, 자기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묻고 잊어버리고 살아야 할 때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병드는 게 아닌가 해요. 그 마음을 돌봐주고 풀어주는 게 소설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글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소설을 왜 쓰는지, 아직 다는 모르겠지만, <쇼코의 미소>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봤을 때 내가 나를 되게, 위로해주려고 썼구나. 나를 위해서 썼구나 생각했어요. 나를 위해서 썼구나. 내가 한 인간관계에서의 실패라든지, 많은 걸 애도하려고 썼구나. 




손길이라는 작품 속 등장인물 혜인에 대해 "혜인이 쟤는 참 유난해. 약하고 예민하고."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설이 이야기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람들의 시절이 이런 시절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작에서도 '선천적으로 눈이나 위가 약한 사람이 있듯이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는 작가의 말을 보며 위로를 받은 독자가 많을 듯해요.


제가 어릴 때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야단맞고 그런 애였기 때문에 예민한 게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예민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요즘 생각하기엔 예민하다는 건 감정이 많다는 뜻인 것 같아요. 감정을 많이 느끼는 건 일종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는 잔인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느끼는 건데, ‘왜 느끼니.’라고 타박하는 건 잔인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한국사회는 학교를 다닐 때부터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이미 스며들어 있잖아요. 그 안에서 정말 인간적인 사람들이, 단순히 잔인한 문화적인 맥락 안에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예민하다고 멸시받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했고요. 더 슬픈 건 그렇게 자신이 예민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약하고, 나약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고, 루저고 그렇게 해석되는 게 슬프다고 생각했어요. 사회가 잔인한 건 비판하지 않으면서 잔인함에 상처받는 사람들을 왜 탓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해요.




이야기의 바깥에서 주인공을 보는 인물들의 자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공무와 모래를 지켜보는 나비의 자리(<모래로 지은 집>), 미주와 진희의 이야기 바깥의 수사 종은의 자리(<고백>) 등이 그렇게 보였어요.


소설은 현실이 아닌 소설이지만, 저는 항상 무서운 느낌이 있어요. 제가 만들어낸 인물들이긴 하지만 그 인물이 저는 아닌 거잖아요. 함부로 재현해서, 함부로 내가 아는 것처럼 써도 되는 걸까? 하는 부분이 항상 걱정이 돼요. 그래서 작품 안에 사람들을 지켜보는 누군가를 항상 넣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위치에서 이 인물을 보는 거니까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생기잖아요. 한계를 설정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것밖에 못 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손길 속 정희와 혜인, 공무에게 가족보다 더 힘이 되어주었을 나비와 모래처럼, 때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의 연대에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라는 말을 정말 협소한 의미로 따지면 남녀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이런 ‘정상가족’이라고 일컬어지는 관계를 말할 수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느슨한 개념의 가족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는 언니가 될 수도 있겠죠. 정말 끝까지 지지해주고 편을 들어주고 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저는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게 평가 절하되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정상가족이 항상 우선이고, 정상가족을 이루지 않는 사람들은 루저고 그런 가치관이 답답하다고 느껴져서, 정상가족을 이루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소설집에 대한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 중 "자신이 누군가를 배반하고 그에게 상처 주었던 순간을 끝내 잊지 않겠다는 의연함" 이라는 문장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 여름> 속 이경은 제가 수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을, 그럼에도 수이가 자신에게 자신의 감정을 과시하지 않았던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사람이 미안한 걸 알아야 한다고 저는 항상 생각해요. 되게 뻔뻔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상처를 줬던 상황보다도 더 많이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건 상처를 준 사람이 자기가 한 행동이 계속 옳다고 생각하면서 피해자를 탓하거나, 아니면 자기는 상처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얘기한다거나,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거나 이런 태도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할 때는 정치인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도 그런 방식이었던 것 같고요.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들, 뻔뻔한 사람들이 당당한 사회에서 살다보니 우리도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상황들에 상처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모래로 지은 집>에서 모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니. 너무 나쁜 사람들을 너무 나쁘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얘기해?” (126쪽) “가해자들도 변할 수 있어? 달라질 수 있어?” (136)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길을 열어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들은 쉽게 용서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소설 속엔 등장합니다.


용서가 되게 좋은 말인 것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아마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용서가 좋은 것이 아니고 누가 용서를 하는지, 누구에게 용서가 강요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는 글이 있었어요. 용서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대부분 좀 약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자신에겐 힘이 없어서 용서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가 강요된다고 생각해요. 당사자가 용서를 마음먹기 전에 “그래도 네가 용서를 좀 해줘야지.” 이렇게 용서를 강요하는 문화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잘못을 하고서도 스스로를 너무 쉽게 용서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요. 


저는 용서라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용서를 할 수 있으려면 나에게 나쁘게 대한 사람이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있었던 일은 있었다고 인정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을 해요.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용서를 해라, 잊어라, 기억해서 뭐하느냐 이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마음이 머무르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작가가 독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 부분이에요.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 애는 나였는데. (<모래로 지은 집> 178쪽)


(주 : 저는 이 문장이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아치디에서 中)>) 







소설가로 말하기


소설 속 인물들은 상황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빠른 가치판단은 때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말을 미루는 사람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최은영 작가에게 최근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일까요.


작가들이 되게 위험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자기가 어떤 일에 대해 되게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읽고 쓰다보면 부정의한 것에 반대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 나는 이 글대로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이야.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항상 조심해야겠다, 확신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해요. 대부분의 경우 저는 단호하게 ‘저는 이래요’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많은 것들이 말하기 어려워요.



언제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지, 또는 언제 소설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꿈으로서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된 건 이십대 후반이었어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제가 소설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공부를 하다보니 제가 하고 싶은 건 창작이라는 걸 나중에 알겠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원래 있었던 마음인데 계속 무시하고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불현듯이 너무 구체적으로 하고 싶어져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소설이 아닌 책 중 좋아하는 책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나는 책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예요. 이후에 쓴 다른 책에도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 글은 특히 직후에 쓴 글이라 구체적인 상황들이 잘 나와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겐 되게 많은, 새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책이었어요.
















최은영과 결이 같은, 최은영이 지나온 시절을 지나고 있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은 상황의 독자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아마도 이십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겠죠? 지금 떠오르는 책은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책이에요.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남았던 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가 나와요. 여자애들은 항상 사랑을 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교육을 받잖아요. 정작 사랑받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건 배우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당신은 당연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사랑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책이라 공감이 갔어요. 이 책을 이십대 때 읽었다면 당당하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했어요. 저는 항상 주눅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조건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이 책을 어릴 때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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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던 올 여름,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이 첫번째로 주목을 받았고, 뒤이어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작가 장강명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박하영


















작가적 '야심'을 말하는 작가


안녕하세요. 어제도 ‘북한 사격’이라는 큰 뉴스가 있었습니다. (주 : 이 인터뷰는 북한 발 포격 뉴스가 세상을 점령했던 8월 21일 금요일 오후 진행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요즘도 이런저런 소식이 많은데요. 장강명 작가라면 이 사건을 소설적으로 분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데뷔작인 <표백>부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으로 표기)까지, 장강명의 소설은 현실을 연상시키는 특정 ‘사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잦은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는 눈이 남다를 것 같아요.


사건기자를 오래 했어요.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에 주로 있었죠. 내근부서나 소프트한 피쳐 기사를 쓰는 곳 말고, 현장기자로 지냈어요. 그래서 훈련이 될 수밖에 없었죠. 사회 트렌드, 관심 가는 사건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주목하는 저널리스트의 태도가 몸에 밴 거죠. 제가 애초에 신문기자가 되기로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싶을 때가 있잖아요. 주변에서 지진이 났는데도 모르고 지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큰 일이 일어나고 세상이 변할 때 제가 중심에 있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기자가 쉽게 되지는 않았어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죠. 최종만 다섯 번 떨어지고 일단 취업을 했어요. 그래도 기자가 되고 싶어서 사표를 내고 나와 지원을 했는데 또 떨어졌고요. 고시원에서 준비를 했는데, 백수로도 지내고 영어 교재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다가 기자가 됐죠. 기자 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했고 나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전업 작가가 된 지금도 신문 기자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이슈를 관심 있게 보고, 활용하려고 해요. 실은 엑셀 마니아라 모든 걸 엑셀로 하는데요, 소설로 쓰고 싶은 아이템을 엑셀로 정리해놓고 관리하고 있어요. 소설의 모티프가 될 만한 뉴스 기사는 링크로 저장해두고요.





이야기의 다양한 스펙트럼도 눈에 띕니다. <표백(2011)>, <뤼미에르 피플(2012)>, <열광금지, 에바로드(2014)>, <호모 도미난스(2014)>, <한국이 싫어서(2015)>,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2015)>, 모두 한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엔 색이 다양합니다. 현재 ‘좀비물’을 연재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독자의 취향은 다양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 다양한 작가들이 장강명의 소설 모두를 좋아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소설들 중 ‘어떤’ 소설만큼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저의 작가적 전략이긴 해요. 결과적으로 독자가 다양해지면 좋겠지만, 독자층을 생각해서 다양한 소설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나중에 정말 ‘큰 걸’ 써야 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운동에 비유하자면, 이 운동은 상체근육용, 이 운동은 하체근육용, 이건 근지구력용 하는 식으로 단련하는 방법이 나뉘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쓰는 데에도 다양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파이터인데,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그라운딩 기술을 쓰든, 타격기술을 쓰든 받아낼 수 있는 종합격투기 선수처럼 소설을 쓸 수 있도록요.


저의 ‘작가적 야심’ 중의 하나가, 죽기 전에 <레 미제라블> 같은, 커다란 주제를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거든요. 십 몇 년 간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록하는,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큰 오페라 같은 소설이요. 정치부 기자로 오래 출입을 했는데, 저 같은 경험이 있는 소설가가 별로 많진 않잖아요. 한국 언론 얘기를 한번 써보고 싶고, 정치 얘기도 한번 써보고 싶어요. 


가까이 가서 정치를 보면 그렇게 추잡하지만은 않거든요. 한국 언론도 그렇고요. 좋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다 결국은 망해가는 그런 장엄한 드라마. (웃음) 지금은 못 쓸 것 같아요. <표백> 전에 쓴 신문사 얘기가 있는데, 너무 못 썼더라고요. 제 글을 먼저 봐주는 아내도 혹평을 했고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써야죠. 


북한이라는 소재로도 소설을 쓰고 싶어요. 북한 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없잖아요.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 하나랑, 그래도 선진국 끄트머리에 있는 나라랑 붙어 있는. 온갖 얘기를 할 수 있겠죠. 탈북자 커뮤니티도 갈등이 많고,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그들을 취재해서 난민의 눈으로 남한사회를 보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 스스로 나라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 ‘한 사회가 붕괴할 때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요. 관련한 강연회가 있으면 열심히 가고 있어요. 고난의 행군이라든지, 북한 얘기, 정치 얘기. 쓰고 싶은 주제가 여러 개 있어요. 


쓰고 싶은 이슈들이 여러 개 있어요. 다만 제가 아직 작가로서 근육이 튼실하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여성 캐릭터도 잘 다루고, 악당 같은 캐릭터도 잘 써보고 싶어요. <한국이 싫어서>를 쓰기 전까지는, 제가 여성 캐릭터를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어요. 전에 쓴 소설의 여성 캐릭터들이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한국이 싫어서>를 쓰고 난 후, 앞으로 저의 성격을 빼닮은-되바라진 여성 캐릭터의 한 전형은 쓸 수 있겠다 생각을 했죠. (알라딘 :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경희’라는 여성 캐릭터는 좋았어요) 그 캐릭터는 편법이었죠. 정확히 그 여자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고, 쇼킹한 설정 한 두 개로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후배랑 연애를 하거나, 머리를 빡빡 밀거나 하는, 그런. 전형적인 것을 살짝만 피해 가서 인물을 만드는 식으로 썼어요. <한국이 싫어서>를 쓸 때는 바짝 기합을 넣고, 캐릭터를 썼어요. 


게임이나 아이돌 산업 등에 대해서도 정말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소재들을 쓰고 싶다는 게 제 작가적 욕심이고요. 그 욕심의 길이 제 앞에 있다고 한다면 아직 반의반도 못 온 것 같아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정말로 튼튼한 정신적 근력, 물리적인 근력이 필요하고. 소설을 쓰기 위한 ‘몸 만들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를 운동선수로 친다면, 아직 9라운드 게임에 서기엔 체급이 안 돼서 3라운드 게임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선수가 아닐까 해요. 큰 소설을 쓰기엔 아직 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 위한 작가적 욕심과 전략을 계속 만들어나가야겠죠.






<한국이 싫어서> 그리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한국이 싫어서>에 관해서 묻고 싶습니다. 제목도, 문제의식도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글은 유쾌하고 희망적으로 읽혔어요. 1인칭 여성화자가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사건들(동양종금 등)을 발랄하게 엮어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이 신선했어요. 같은 ‘청년’에 대한 얘기지만, <표백>과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점도 재밌었고요.


<한국이 싫어서>는 경장편(주 : 원고지 500매 가량 분량의 소설)이라는 민음사 기획 덕분에 나온 소설 같아요. (주: 민음사는 ‘오늘의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로 경장편 소설을 출간하고 있으며, <한국이 싫어서>는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소재나 주제는 이전에도 생각해두었던 거니까, 제안이 오진 않았어도 소설로 쓰긴 썼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딱 원고지 500매라는 분량의 제한 안에서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을 쓰려니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게 있더라고요. 얇고 가벼운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니, 독자가 ‘판타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가 됐어요. 


좋은 시도였던 것 같아요. 은행나무 노벨라(주 : 배명훈 작가의 <가마틀 스타일>을 시작으로 10권이 출간된 한국소설 경장편 시리즈물)도 비슷한 기획이잖아요. 경장편을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써봤는데, 이 소설을 쓴 경험이 있어서 비슷한 500매 가량의 <그믐…>을 쓸 수 있었죠. 작가에게는 자극이 되는 프로젝트였던 것 같아요. 은행나무 노벨라에서 원고 제안을 받았을 때도 경장편을 써본 경험이 도움이 됐어요. 마침 첫 권이 <가마틀 스타일>이기도 했고, SF를 써도 된다고 해주셔서 SF를 썼죠. (주 :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로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6개월 전만 해도 제가 쓴 SF 소설을 출판할 출판사를 찾기 힘들었을 거에요. 출판사에서 내주신다고 하니까 마음을 놓고 썼죠. 저에게도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하고 싶은 작가적인 욕구가 있는데 민음사, 은행나무 같은 출판사에서 받은 원고 의뢰가 좋은 기회가 됐어요. 야구로 치면 트리플A에 해당하는 리그잖아요. 500매라는 한에서 젊은 작가에게 기회를 주는 시리즈 덕이 아닌가 해요.





<뤼미에르 피플>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이야기는 환상적이지만 이야기 자체는 철저하게 현실의 공간, 신촌이라는 곳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그믐>에서도 ‘마포’라는 공간이 중요하게 등장하고요. 환상적인 소재도 거침없이 사용하지만, 이야기의 기저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곳에서 출발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신촌’을 지날 때면 소설이 생각나곤 했어요.


제가 ‘르메이에르’ 오피스텔 13층에 살았어요. 신촌에 살다가 마포구 현석동으로 이사갔고요. (웃음) 환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는 제가 추구하는 지점이에요.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같은 테마를 반복해 쓰면서 ‘쓸 게 없어서 이걸 쓰는 건가’ 하는 느낌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얘기를 제가 좋아하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주제가 명확한, 엄청 현실적인 얘기도 쓰고 싶어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카테고리가 여럿인 거죠. 몽환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몽환적인 얘기일수록 굉장히 현실적인 점이 있어야 몽환성이, 환상성이 더 강조된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묻겠습니다. 세 사람이 각각이 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요. 명확하게 줄거리를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명확함이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읽는 독법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습만화 편집자로 일하는 ‘여자’의 에피소드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요. 작두로 철을 잘라낸 원고가 뒤섞였는데, 뒤섞인 대로 이야기가 읽히는.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서사에 관한 물음으로 읽혔습니다.


<그믐>이라는 소설의 시작 자체가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였어요. 아내가 동창들을 만나고 왔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다른 친구에게 “네가 예전에 누구 왕따 시켰던 거 기억나냐”고 물었대요. 가해범으로 지목 받은 동창은 자기 그런 적 절대 없다고 그랬고요. 둘의 기억이 엇갈리잖아요. 아내가 되게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그 얘기를 해주었는데, 주관적 서사와 객관적 사실의 괴리가 재미있어서 소설 소재로 참 좋다는 생각을 했죠. 거기서 시작을 하다 이 소재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주관적 서사가 없는 사람을 생각했어요.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어 언제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고, 그 사람 관점에서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니 ‘이야기 순서의 앞뒤가 없는 소설’의 원고가 틀어지는 원고도 생각하게 됐어요.





장강명 작가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건설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동아일보에 입사해”라는 저자의 약력 또한 흥미있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이 소설은 세 명의 인물, 세 가지 주제어가 반복되며 마치 건물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자, 여자, 어머니. 세 명의 보람. 세 사람의 키워드 같은 면, 아래 문장 같은 면들이요. 기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셔틀버스와 버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내내 그 문장을 곱씹었다. 단어들만이 순위를 바꾸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제가 의식적으로, 제 전공처럼 글을 쓰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생각하고, 엔지니어처럼 구조를 만드는 게 있긴 한 것 같아요. 그런 방식으로 쓴 소설이 <한국이 싫어서> 였는데, 이 소설은 설계의 결과였던 것 같아요. 제목을 정하고, 제목에 맞는 상황과 주인공 정하고.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줘야 하는 게 있으니 등장인물로 친구들, 동생, 남자친구, 호주에서 만난 애들을 정하고. 서술구조도 왔다 갔다 하게 정하고요.


<그믐…>에서 세 개의 단어가 한 장을 이루는 패턴은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을 했어요. 제가 작업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딱히 나쁜 방식인 것 같지는 않은데, 예술가스러운 방식은 또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지긴 해요. (웃음) ‘캐릭터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 ‘종이 위의 캐릭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하진 않아요. ‘얘는 여기서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호주로 가야 돼.’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죠.


짜놓은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소설을 쓸 때도 있었어요. <뤼미에르 피플>을 쓸 때는 단편 몇 개는 뜬금없이 끝내는 것도 없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썼다고 해서 덜 힘이 들어가거나 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한국이 싫어서>가 나중에 퇴고하면서 더 힘이 들었고, <뤼미에르 피플>이 제가 보기에 구조가 되게 허술해 보인다거나, 긴장감이 없다거나, 이상하게 끝나는 건 또 아닌 것 같았어요. 요리할 때요. 쉐프 중에서도 계량기로, 거의 공학적인 관점에서 요리를 개발하시는 분이 있잖아요. 물리적으로, 분자요리를 하는 것처럼요. 이 요소를 빼고 다른 요소를 넣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믐…>을 쓸 때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전반부랑 후반부 챕터 길이가 좀 다른데요, 후반부 챕터 길이가 좀더 길어요. 3.3.의 구성으로 인물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고, 한 챕터 안에서는 하나의 시공간,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한 챕터 안에서 데이트를 하다 납골당에 갔다 돌아올 때까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납골당 가는 장면과 남자와 여자가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끊고 싶었는데 형식 때문에 붙여두었죠. 문학동네에서 교정을 굉장히 여러 번 봤는데, 어떤 편집자는 거기를 잘랐어요. 한 챕터지만 결이 다르니까요. 그 교정자가 그렇게 본 것도 이해를 하고, 사실은 한 챕터로 들어가기 이상한 얘기라고도 생각했는데, 형식적인 균형감을 맞추기 위해서 붙이고 싶었어요. 나름의 변명으로, 우주알 이야기 원고가 작두로 잘린 부분에 ‘패턴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길어지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넣어두었죠. (웃음)





책의 제목이 독특한데요. 


그믐달이 비치고, 우주알을 타고 오는 이야기를 먼저 쓰고 있었고.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아내에게 들은 동창생 얘기를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 얘기를 쓰게 되면서 합쳐졌어요. 출판사에서는 제목이 너무 길다고 바꾸자고 해서 바꿀 생각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적당한 게 안 나오더라고요. 제목이 좀 길어서 그렇지 저는 좋더라고요.





<그믐…> 에 대한 평 중에 ‘속죄’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조금 좁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해석에 대해선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하는데요. (웃음) 제 소설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믐…>도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두 사람과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한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일도 그렇죠. 제 미래도 언젠가 결정이 될 거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잖아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다 해보고 존엄사를 추구할 것인가,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연장을 하며 끈질기게 살 것인가… <그믐…>에서 남자가 맞닥뜨리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제 소설의 테마인 것은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와 같습니다. 저는 사는 게 사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 살아야 하는지, 살아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서만 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언제나 그대로 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 답은 통째로 긍정하는 거예요. 


<표백>이 세대론에 대한 얘기가 아니지 않듯, <그믐..>도 속죄에 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에서 떨어진 얘기가 아니라는 것, 속죄를 제대로 하려면 과거에 내가 입힌 피해가 현재진행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 나의 가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피해가 현재진행형으로 한 사람에게 벌어지고 있고, 내가 속죄를 하려면 내 가해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점에 관한 얘기를 하고도 싶었어요. 보다 다양한 해석을 독자들이 해주시면 저는 좋고요. (웃음) 그렇지만 제가 소설을 쓰면서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얘기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운명. 그 운명 앞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어린 남녀’ 같은 설정이요. 이 소설은 결국 연애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기도 했습니다.


그 테마에 제가 좀 혹해 있어서, 다른 데도 많이 나옵니다. (웃음) <뤼미에르 피플>의 제일 마지막 단편도 무당이 먼 미래를 보고, 자기가 1999년에 죽는 걸 아는데, 죽기 1년 전에 프랑스 수도사랑 연애를 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로 가는 얘기예요. 예정된 결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죠. <표백>의 세연도 언제 죽어야지 날짜를 정해놓고 실행하는 인물이고요.


SF에서 자주 보는 테마여서 그런 것 같아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외계 언어를 읽다 미래를 보게 되는, 딸의 미래를 보게 되는 이야기였죠. <듄>의 황제도 <그믐...>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왕국과 자신의 아이들을 살리려면 중간에 아내가 죽고 자기가 눈이 멀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죠. 왕인 자신만 살려면 자기가 배신자를 미리 처단하면 되는데, 황제는 사막으로 갑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였죠. SF를 보면서 자주 보던 테마에 제가 혹했고, 저는 저대로 그 테마가 인간의 운명 얘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다 죽잖아요. 결국 이별할 건데 아둥바둥 열심히 살잖아요. 저는 겁이 많아서, 개를 너무 좋아하는데 개를 키우면 결국 개가 죽게 되니까, 그 이별이 너무 싫어서 못 키우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용기를 내 키울 생각이지만요. 아내가 유학을 갈 때도 헤어지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헤어지고, 계속 만나고 했었고, 이런 식의 딜레마를 여러 번 겪기도 했어요.


제 소설에 반복되는 테마들이 있죠. 20대 얘기도 제가 혹해있는 테마고요. 자살도 그렇고요. <그믐…>도 사실상 자살이고, <뤼미에르 피플>의 단편 상당수도 사실 자살이잖아요. 죽을 때, 죽기 직전에 인생을 반복할 때 이 인생을 똑같이 다시 살 생각이 있느냐고, 모든 걸 그대로 반복해야 하는 조건으로 다시 살라고 하면 과연 그렇게 할까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안 돌아간다고 대답을 한대요.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는 거죠. 제가 지금 마흔 살인데, 육십 살이 된 저에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겠느냐,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삶이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긍정하고 싶어요. 제가 현재 겪는 어려움이 있고, 불편함과 두려움도 있고 한데, 총체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을 ‘살만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 비극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쓰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


짧고 정확하고 잘 읽히는, 이야기의 속도감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걸 더 중요하고 생각하는, 그런 문장이요.


문장도 그렇고, 챕터도 그렇고, 제 성격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자 생활 때문인 것도 같고요. 메시지가 선명한 책은 좋아하지 않지만, 단위로, 문장으로 끊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딱 떨어지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직 소설가로서 3라운드 게임을 못 벗어나고 있고요. 9라운드 게임을 해도 중간에 헤매지 않고, 매 챕터를 제가 장악을 하고, 긴장감을 잃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아직 그건 안 되는 것 같아요. 드라마도 연장 방영하면 주인공이 늘어지는 걸 넘어서서 이중인격자가 되고 캐릭터가 붕괴가 되잖아요. 그런 게 없게 쓰고 싶어요.





말씀하신 대로 기자로서 글쓰기를 오래 하셨잖아요. 소설가의 글쓰기는 방식이 다를텐데, 의식적으로 다르게 쓰려고 하시나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표백>이나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지금 보면 고치고 싶은 문장에 되게 많아요. 기자 식 문장이에요. 고유명사를 정확하게 쓰려고 하는 습관이 있었죠. ‘사 마셨다’로 쓰면 되는데, ‘오후 2시 합정역 3번출구 인근 GS25에서 사 마셨다’라고 쓰는 식으로요. 기자 생활을 하며 이런 훈련을 많이 해서 ‘사 마셨다’라고 잘 못 쓰겠더라고요.,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죠. 기자적 글쓰기의 명확한 묘사, 늘어지지 않는 긴장감은 계속 가져가려고 하고요.


전반적으로 단호한 문장을 좋아하는 게 성격의 반영인지, 기자 글쓰기의 반영인지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게, 기자를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자로서 훈련을 받으면서 저 자신도 단호해졌고, 제가 후배를 ‘깰 때’도 단호함을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수습 기간에 ‘사스마리’(주: 경찰 출입 기자)나 ‘하리꼬미’(잠행취재)를 하는 기간도 저는 성격 개조작업인 것 같아요. 20대 후반에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성격이 단호하지 않거든요. 기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면 관찰력도 좋고, 문장력도 좋으니 사실은 글쓰기에 대해서는 가르칠 건 없어요.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하잖아요. 그 순간에 가르칠 건 단호함입니다. 


수습기간에 관찰을 많이 해요. 그리고 그 관찰한 내용을 선임에게 불러줍니다. “지금 경찰이 뭘 어째가지고요, 뭘 어쨌고요, 얘는 얘한테 200만원을 줬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물어보죠.  “걔가 거짓말하는 거야?” 그러면 보통 머뭇거려요. “그건 아니고요.” 그러면 다시 묻죠. “서로 말이 다르잖아. 누구 말이 틀린 거야?” 여기에 바로 답을 하기 어려워요. 단호해지지 못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자기 문장으로 현실을 만드는 순간 현실을 재구성하게 되는 거잖아요. 현실을 규정하려면 성격이 엄청 강해야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기자회견을 봤어요. 이 사람이 자신은 여자친구를 때리지 않았다, 이런 내용을 발표할 때 “모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거짓말로 일관했다”라고 기사를 시작할 수 있죠. 이런 문장을 쓰려면 내가 너의 말을 거짓말로 규정해주마, 하는 단호함과 배짱이 있어야죠. 그 배짱을 몇 달을 잠을 재우지 않고, 혼을 내면서 성격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사건을 규정할 담력이 되지 않으면, 사건 기자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고요.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람의 성격이 바뀌어서 어지간한 일에는 잘 안 흔들리게 돼요.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은 제 주변의 세계를 제가 규정짓는 작업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라고 명명하면 한국이 ‘헬조선’이 되는 거죠. 제가 늘 해오던 작업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두렵진 않았어요. 제 문장은 단호한 문장이고, 세상을 규정지으려는 문장이에요. 제 문장에는 권력의지가 담겨있어요. 어떤 소설들은 멀리서 어떤 풍경을 그리죠. 저는 이런 소설을 보면 아름답지만 권력의지가 없는 문장을 봅니다. 그 문장이 나온 과정도 이해해요. 어떤 아픈 현상이 있을 때 아프게 묘사하고 싶은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그게 저의 의지하고는 매우 달라요. 저는 비극을 현상 그대로 독자에게 번역해서, 언어라는 심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가가 아니에요. 슬픔에 대해서도 넌 슬프고, 넌 비겁하고, 너는 지금 용기가 없는 거다. 이렇게 규정짓고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어요. 기자일 때 성격이 바뀌었고, 성격이 바뀐 결과 이런 문장을 쓰게 됐어요.





<그믐…> 작가의 말에 소설을 쓰는 세 번째 이유가 ‘돈’이라고 하셨죠. 소설을 쓰는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는 뭘까요?


아까 말씀 드린 ‘권력의지’와 비슷합니다. 제게 세계를 규정짓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는 차원을 저는 ‘실존계’라고 부르는데, 실존계에선 제가 너무나 허무주의자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죽을 순 없고, 어쨌든 살아있으니 이유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 실존계를 토대로 그 위에 쌓아 올린 ‘의미계’에서는 초월, 진보, 사랑, 공동체 같은 가치를 삶의 이유로 내세우죠. 무언가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하다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의미계는 사람이 규정하기 나름이니, 그 의미계 안에서는 제가 규정하는 이미지대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잖아요. 소설쓰기가 저를 둘러싼 의미계를, 제가 보기에 더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결국 책이다


독자 통계를 보니, 장강명 소설의 주 독자층은 20대, 30대였어요. 


앞으로 보다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10대 독자, 40대 남자 독자가 좋아할 소설도 쓰고 싶어요. 제 소설의 주 독자층이 20대 30대 여성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이 사람들이 ‘한국문학’, ‘문단문학’의 독자들이라는 생각도 해요. 지금은 40~50대 남자 독자가 좋아할 만한(?) 남북관계에 관한 스릴러를 쓰고 있는데, 여기서 제 소설가로서의 근력부족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상반기에 끝내려 했는데 이제 절반 정도 쓴 상태네요. 10대에게 읽혔으면 하는 웹소설도 쓰고 있고요. 진입장벽이 높은 시장인 것 같아요.


나름의 역발상인데요. 전업작가를 한다고 할 때도 주변에서 엄청 걱정을 했어요. 저도 물론 걱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한국소설이 안 팔린다는 말이 많으니, ‘이렇게 안 팔리니 내가 조금만 팔리면 나에게 관심이 모일 것이다’하는 생각을 했고, 제 생각처럼 됐어요. <한국이 싫어서>가 아주 많이 팔리진 않았어요. 전체 베스트셀러 순위로 봐도 그런데, 정말 가뭄에 콩이 하나 나니까 사람들이 ‘우리 콩 예뻐’하고 호의적으로 봐주는 것을 느낍니다. 신문사의 문학담당기자, 서점, 출판사, 문단 안팎, 출판계 전체가 저를 응원해주는 것 같아요. 10년 전,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죠. 제가 작년에 생각했던 거에요. 내가 조금만 팔면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게 되어 있다고요. 제가 어떤 소설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소설이 영상과 경쟁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많은데요, 영상의 시대에 영상과 경쟁할 수 없으니 서사를 떠나 문장에 치중해야 한다, 이런 논리의 정반대되는 지점을 ‘라노베’(라이트노벨)가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영상이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텍스트라는 게 사람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서스펜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쥬라기 공원>도 참 잘 만든 영화지만, 역시 소설이 더 재미있잖아요. 익룡도 나오고 별거별거 다 나오고요 (웃음) 20대 독자들, 고마운 이십 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책을 선사해야겠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위선적인 것 같고요. 지금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열심히 소설을 써서 농장을 가꾸듯, 씨를 잘 뿌리고 수확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최근의 문단 관련 이슈에 대해 ‘결국 모든 걸 책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다른 업계에서 문단으로 들어오셨을 때 새롭게 보이는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동네 가을호 문단권력 좌담회에 제가 패널로 들어갔어요. 좌담회를 여섯 시간을 했는데, 당이 떨어지더라고요. (웃음) 마지막에 좌담회에 나온 소감을 한마디씩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로 얘기해야지 여기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제가 출판 평론가는 아니니까요. 언론계에 있다 출판계에 왔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언론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소설가처럼 소설을 쓰려고 하지만, 제 마인드, 업계를 보는 관점, 행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기자처럼 생각하고 기자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알라딘에도 인터뷰 요청을 드리고 취재를 하는 것처럼요. (주: 장강명 작가는 알라딘에 집필 중인 논픽션에 관한 자료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제가 일간지 기자였잖아요. 신문기자중에 다른 업계에 간 모든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일간지 기자가 제일 빠르고, 어느 업계로 가나 그보다는 느리다고요. 일간지는 제품 하나를 하루 만에 만드는 거니까, 출판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런 속도의 차이가 처음엔 먼저 느껴졌어요.


사람들이 기자가 되게 큰 갑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제가 기자로 있을 때는 어떤 취재영역에서는 저 자신이 을도 아니고, 갑을병정쯤 되는 영역에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취재를 할 때도 항상 낮추고, 12시까지 의원님 기다리고 했었죠. 저의 글도 정말 난도질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기사를 넘기면 차장이 뜯어 고치고, 부장이 뜯어 고치고 해서 글에 대해서 자존감을 과도하게 갖질 못했죠. 내 글은 항상 누군가 뜯어 고치는 것이라는 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출판계에 오니까 작가의 위치가 약간…황송하더라고요. 대접을 해주시면 물론 감사하지만, 프로토콜이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글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도 편집자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같았고요. 레이먼드 카버의 글을 편집자가 뜯어 고친 게 과연 옳은 일이냐 하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글에 대해서 편집자가 과도하게 발언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듭니다. 제가 11년 동안 글을 ‘뜯어고침’ 당해본 결과 차장, 부장의 지적이 굉장히 예리하게 지적할 때가 많았습니다. 단순한 교정교열이 아니라, 맥락이나 방향을 틀려고 할 때가 있는데요. ‘강명, 이게 아니라 이렇게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서 이런 애랑 인터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조언을 해줄 때, 물론 항상 그 말에 동의하진 않는다고 해도, 열에 세 번 정도는 정말 훌륭한 조언이라고 받아들일 때가 있었어요. 출판사에서는 그런 조언은 못 받아봤던 것 같아요. 제가 원고를 잘 써서 못 받은 걸 수도 있겠지만 (웃음) 사소한 영역은 조언을 받았지만 큰 틀에서, 결말 뒷부분을 완전히 고쳐야 한다든지 그런 조언은 대체로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알라딘 16주년 특별 책자 <끝내주는 책>에서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열렬히 추천해주시기도 했는데, 다른 소설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좋아합니다.





논픽션 작가 중에 좋아하거나 모범으로 생각하는 작가가 있으신지요?


조지 오웰이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정말 좋아하고, 그런 책을 하나 쓰고 싶어요. 정말 문장이 쉽고, 재밌고, <1984>같은 SF도 썼고, 르포르타주도 썼고… 아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 관해서도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을 같이 쓰고 있어요. 남북통일 스릴러와 문학상 관련 논픽션이고요. 소설을 쓰는 게 조금 더 힘들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가 에세이를 쓰는 식으로 쓰고 있어요. 제 작가적 욕심 중에 논픽션이 되게 큽니다. 기자일을 계속하는 느낌이고요.





앞으로도 자주 독자와 만나시게 될 텐데요.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발견한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돈 값 하는 작가, (일동 폭소) 책값이 안 아까운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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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보이 2016-09-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강명만 인터뷰고 다 타계였는데...장강명 타계로 보고 들어옴

억만장자 2017-02-21 15:01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음을 말하는 소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소설집으로 돌아온 은희경 작가를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고독과 소설에 관한 대화를 전합니다. 인터뷰 진행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책에 대한 첫 인상에 대한 말씀을 먼저 나누고 싶어요. 표지와 참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체적인 흰 톤과 푸른색 글씨, 반짝이며 떨어지는 꽃 이미지 같은 것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책을 처음 받으셨을 때 감상이 어떠셨나요?

 

 

, 느낌이 좋아요. 책이 예뻐서 호감을 가질 만한 그런 요소가 있지요. 책이 손에 잘 들어오는 것 같고, 제 얘기를 잘 포장해주는 것 같아요. (웃음)

 

 

 

 

 

트위터에서 예약판매 구매 혜택이던 넘버링 사인본에 관해 감사 인사를 보내는 독자도 있더라고요. 책이 나온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텐데요, 근황을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터뷰도 많이 하고, 방송 출연도 좀 하고 있어요. 다른 책들보다 좀 반겨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전 책들이 조금 낯설고 했는데, <눈송이>는 좀 익숙한가 봐요.

 

삼천 부 사인을 했는데요, 제가 원래 사인을 되게 빨리 해요. 글씨를 빨리 쓰는 편이라서요. 사인회를 할 때 엄마랑 같이 온 꼬마가 와서 와 작가라서 그런가 빨리 쓴다이런 적도 있거든요그래서 하루면 다 쓰겠지 생각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일을 끝마치면 여행계획을 세우는 편이에요. 그 즐거움으로 에너지도 생기고 하니까요. 책 준비를 다 마치고, 엄마가 팔순이시라 엄마 모시고 캄보디아 여행을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떠나는 날까지 사인을 했어요. 덕분에 작가의 말은 캄보디아에 가서 아이패드로 썼어요. (웃음)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때도 일본 여행 계획이 있었는데, 결국 일이 안 끝나서 버스 안에서 교정을 봤어요. 남들이 보면 쉬지 않고 일하는 것 같겠지만 실은 일이 안 끝난 거예요. 그렇게 바쁘게 지냈네요.

 

 

 

 

 

눈송이 연작이라고 이 소설집을 읽을 수 있어요.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개개인의 시간이 느슨하게 얽혀, 멀리서 보면 결국 한 이야기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을 뜨개질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눈송이 연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단 하나의 눈송이> 속 이야기들은 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따로 읽어도 상관은 없어요. 그렇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눈송이라면, 이야기들이 모였을 때 눈발처럼 큰 풍경을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긴 했어요.

 

모든 눈송이가 다르듯, 눈송이처럼 하나하나가 독특한 얘기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각각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풍경으로 펼쳐지도록 제 머릿속에서는 구성을 한 거죠. 짜맞추면서 읽을 필요는 없어요. 쓰는데 자유로우면서도,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어서, 저에게 이 형식이 필요했어요.

 

 

 

 

 

<생각의 일요일들>이라는 첫 산문집도 기쁘게 읽었습니다. 오래간만의 소설집에서 만나는 압축적이고 색이 뚜렷한 문장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작업하면서 이 문장이 유독 마음을 끈다고 담아두신 부분이 있었을까요?

 

 

사실 소설을 쓸 때는, 특별히 문장에 신경을 쓴다기보다는 그때 강렬하게 사로잡힌 것이 대해 집중하다 보면 문장이 떠오르곤 해요. 이 문장이 소설에서 정말 중요하다, 이런 건 별로 없어요. 독자들이 많이 반응을 보이면 이게 괜찮았나?’ 거꾸로 그러기도 하고요. 독자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문장을 좋다고 올려주시기도 하고, 소설에서 뺄까 했는데 좋다고 소개해주시기도 하고요. 이 말은 정말 하고 싶어서 했는데, 독자가 알아봐준다고 하면 역시 반갑고요.

 

이 소설집에서 저는 <T아일랜드…….>에서요,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116)라는 문장을 좋아해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죠. 이번 소설을 따뜻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이 있다면, 이런 연대의 감정 때문이 아닐까 해요. ‘고독의 연대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나만 고독한 게 아니고, 인간의 고독이라는 게 타고난 조건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고독한 사람들끼리의 연대감이 생긴다고 생각을 했어요. 허기나 절망이랄지, 슬픔이랄지, 고독이랄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고, 서로에게 이방인으로서 짧은 호의 같은 것을 베풀 수 있는, 그런 게 연대라고 저는 얘기하고 싶었고, 그래서 독자들이 이 구절을 인상 깊게 보는 것 같아요.

 

(: 제 경우엔 이 문장이 좋았습니다. 엄마는 인생에 대단한 것은 없고 모두가 고독 속에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디기 쉬워진다고 한다<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146>)

 

 

 

 

 

소설의 인물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소설마다 호칭이 달라지지만,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마지막 작품 <금성녀> 즈음엔 어렴풋하게 알 수 있게 돼요. 세례명인 루시아, 안나, 요한으로 칭해지던 이들이 엄마로 지칭되고, 유리, 마리로 지칭되던 소녀들이 할머니, ‘이라는 소년이 완규로 호명되는 식인데요, 이렇듯 조금씩 이들의 호칭을 다르게 서술한 이유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인물들을 각 이야기에서 딱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독립적인 얘기로 쓰기 위해서 호칭을 다르게 했어요. 힌트만 두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일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거잖아요. 연작이지만 연작이 아니게 읽어도 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했고요, 각 소설에서 맡은 역할이 좀 다르니까 같은 인물이라는 걸 강조하지는 않았어요. 개별적인 개인들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었고요.

 

읽는 분들 중엔 뜨개질 이야기(<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는 조금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제가 소설을 쓸 때는 이 소설 속 태현이라는 인물을 <금성녀>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 화자가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신도시라는 공간에서, 화자들은 낯선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프랑스어 회화, 독일 아이들의 동화, 스페인에서 부치는 엽서 같은 것들이요. 실제로 이민을 떠나는 모자도 있고요. 도시-낯섦-떠남이 반복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5년에 작가가 됐는데, 95년에 신도시로 이사를 가서 지금도 계속 살고 있어요. 신혼생활도 신도시에서 시작했고요. 저에게 신도시라는 공간이, 새로 질서를 잡아야 하는 인생의 이미지. 낯선 곳에서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있어요. 신도시에서 18년을 사는 동안에, 편리함을 추구하고, 정이 들만하면 바뀌고, 낡아 버릴 시간도 없이, 계속 새로운 것이 지어지더라고요. 이 공간은 영원히 신도시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겠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게 비극적이거나, 상실인 게 아니고, 그것 역시 인간의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 모두 지금은 뿌리를 내리기보다 떠돌아다니는, 노마드적인 존재잖아요. 신도시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게, 이런 유동적인 이야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고향을 잃었다, 뿌리를 상실했다, 이런 게 아니고 낯선 곳에서 고독하긴 하지만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인상적이었던 부분인데요,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인물들의 자아라는 게 느껴졌어요. “세상에 태어나는 것들은 다 혼자니까. 그 순간 엄마의 뱃속에서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프랑스어 초급과정 > 태아가 하기엔 너무나 조숙한 대사예요. 반면, 일반적으로 할머니로 뭉뚱그려 지칭되는 <금성녀>의 마리 할머니에게도 입맛이나 사람에 대한 명확한 기호외 취향이 있고요.

 

 

맞아요. 제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고 쓰는 것이기도 해요. 모든 인간에게 고유성을 찾아주는 게 문학이 할 일이라는 말에 공감을 해요. 할머니에서 태아까지, 각자의 개별자로서 고유성을 그리고 싶었어요. 가족관계 속에서도 할머니다, 아기다 이런 역할이 주어지잖아요. 저는 그 존재 개인으로서의 고유성을 쓰고 싶었어요.

 

 

 

 

 

<독일아이들만 아는 이야기>라는 소설의 이원이라는 인물은 개성적이면서도 구체적이라 실제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원은 실수가 잦고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에요. 이원의 친구인 유나의 눈에 비친 이원은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욕심이며 자존심 같은 게 없는 친구이지만 사실 자신의 마음 속에는 못 외운 게 아니라 헛갈린 것’, ‘들으나마나 모를 것이어서 안 들은 것처럼 행위의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요.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규정되지 않는 인물이이에요.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사람에 대한 규정된 틀이 있잖아요. 저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규정된 틀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해요. <타인에게 말 걸기> 같은 것을 쓸 때도, 우리가 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에 관해 썼어요.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일 수 있겠죠.

 

이원이라는 인물이 개성적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까요? (웃음) 실은 디테일이 다 제 얘기예요. 실수하고, 망가뜨리고, 사고를 일으키는 모습들. 한때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거라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에 실수하고, 엉뚱한 일을 하는 걸 숨기려고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런 것이 나의 고유성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만 내 나름의 질서가 보편적인 기준하곤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니 달라지더라고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드러내지 않으려고, 실제의 나처럼 엉뚱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둘 때보다 친구도 많이 생기고요 (웃음)

 

이원이라는 인물이 독특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들 모두가 그런 기이한 면을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겠죠. 이해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남을 볼 때 틀에 맞춰 보니까요. 오히려 유나라는 인물이 더 이해하기 쉬운, 상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요, 유나에 비해 이원은 고유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오해하곤 하잖아요. 유나처럼 모두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원이라는 인물을 조금 애정을 가지고 썼어요.

 

 

 

 

 

소설 속 젊은 세대의 떠돎도 인상 깊게 읽었어요. 2002년 월드컵 즈음 학생이었던 세대라면 대략 제 세대이기도 한데요, 독자로서 제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들, 한 세대의 이주, 취업준비, 지루한 직장생활, 군입대 같은 이야기가 서술되어 반가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어떤 세대니까 (은희경 작가는 1959년생입니다) 내 세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를 쓰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내가 어떤 세대다 이런 소속감보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살아있는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와 같이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도 있고, 내 위세대의 이야기도 있겠죠.

 

우리 세대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 모든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요. 자기 삶의 조건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누구를 판단하거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연관관계를 찾는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닌, 지금 세대의 인생, 부모의 인생, 나의 인생이 같이 들어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이야기가 품은 감정에서 한걸음쯤 비껴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이라는 소설에선 길고 아름다웠던 그 여름 날 한 번도 엄마와 같은 편이 되어주지 않아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같은 문장은 무척 마음 아프게 읽히더라고요. 이 소설 속에선 대체로 지나간 시간에 대해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요, 실은 격정적인 사건이었을 텐데,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쓸쓸함 같은 것이 소설 전반에서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부닥쳤던 문제, 휩쓸렸던 문제들. 그 시간들이 지나간 순간 있잖아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문을 닫고 나가려고 하다 다시 돌아볼 때의 내 그림자 같은 것. 소설로 그런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나라는 좁은 세계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확장시킬 수도 있겠죠. 시간을 확장시키면 그 무렵 나에게 중요했던 일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이 소설 속에서는 언젠가 일어났던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관통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지금 이렇게 몰두하고, 혹은 기뻐하고, 고통 받고 있는 것들. 혹은 고독하고 고립되어 있는, 이런 문제들을 시간의 스펙트럼에 넣어보면 조금 더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간에서, 시간에서, 문제에서 떨어트리고 바라보는 것. 그런 분위기를 좀 주고 싶었어요.

 

 

 

 

 

<T 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서, 무명작가의 책을 사는 엄마의 모습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렇듯 더 알려지지 못해 서운한 책이 많을 텐데요, 독자께 정말 읽어보셨으면 하는 작가를 한 명만 소개해주신다면.

 

 

글쎄요. 저도 발굴하고 읽고 그런 독자는 아니고, 알려진 사람 책만 읽는 편이라서요. (웃음요즘 좋아하는 소설가는 미셸 우엘벡이에요. 저는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쓰는 사람에게 매혹되는 유형은 아닌 것 같아요. 나도 무언가를 알고 있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나와 비슷한 생각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 나보다 반 발짝쯤 먼저 갔을 때 열광하는, 그런 타입인 것 같아요. 점점 저도 독서의 폭이 달라지니까요. 예전에는 밀란 쿤데라를 좋게 읽었고, 최근에는 우엘벡을 재미있게 읽고 있고요.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를 하는구나, 이런 작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게 사실이에요.

 

 














 

 


 은희경이라는 장르, 은희경이라는 브랜드를 지닌 소설은 계속될 텐데요, <……단 하나의 눈송이>가 은희경 소설이 라는 길에서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요?

 

 

소설을 시작할 때는 내 문학여정, 전체를 두고 이 작품이 무엇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시작하진 않아요. 쓸 때는 그때그때 질문에 사로잡히고, 최대한 잘 써보자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죠. 책으로 묶어 나오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긴 해요.

 

뭐랄까, 저한테는 두 가지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전 <태연한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약간 극단화되어 나타났죠. 시니컬하고 농담 잘하는 사람, ‘요셉같은 세계가 있고, 정밀하고 사려 깊은, ‘의 세계가 있고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다 써본 게 <태연한 인생>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의 세계가 좀 더 많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태연한 인생>요셉의 세계는 잘 아는 이야기는 아닌데, 흥미를 갖고 있는 세계에요. <……단 하나의 눈송이>는 어떻게 보면 제가 잘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내가 나 자신과 가장 동일시하는 이야기, 내가 잘 아는 이야기니까요.

 

 

 

 

 

<새의 선물> 이후 약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젊은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을 귀띔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 자신을 젊은 작가라고 말하기보다, ‘현재형 작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소설 작가 후기에도 썼듯 (: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간다. 대체로 헤맸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늘 배워왔으나 숙련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탓이고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낯설어지는 까닭이다……) 저는 늘 헤매고, 익숙해지는 게 없고, 배워봐야 쌓이지도 않고 그런 느낌을 받는데, 그게 작가에겐 좋은 재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제겐 아직도 세계가, 다 알아버린 느낌이 아니에요. 항상, 항상 모르겠어요. 질문이 있어요. 그런 질문들이 내 소설이 되는 거겠죠. 늘 저에겐 낯선 시간들이 오기 때문에, 저 자신에겐 낯선 시간들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고민을 하고, 그 고민과 질문이 소설이 되는 거거든요.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겠다, 소설을 계속 쓰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뿐,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겠다, 내가 추구하는 소설은 이것이다, 이런 건 별로 없어요. 다만 내가 살아가면서, 도대체가 익숙해지지 않는 이 세계에서 발견하게 되는 질문들에 대해 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젊게 쓰겠다, 연륜 있게 쓰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애초에 그런 구분이 별로 없어요. 후배 소설가들의 소설을 볼 때도 좋다, 나쁘다 이런 생각보다는 각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나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속 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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