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연애론 - 새롭게 쓰는
스탕달 지음, 권지현 옮김 / 삼성출판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문학은 아니 예술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다. 중세시대, 빅토리아 시대, 혹은 조선시대, 지금까지 그 시기마다 '사랑'은 살아 있었으며 재미있게도 사랑의 풍경은 그 시대를 재미있게 조망하곤 한다. 중세시대 기사와 귀부인의 사랑이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 조선시대 양반내의 그것과 지금 우리의 사랑은 절대 같지 않다. 물론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으면서도 다른것, 그래서 그 시기를 잘 투영하는 것으로 사랑과 연애만한 것이 꽤 드문것 또한 사실이다.


스탕달, 그가 남녀 혹은 연애에 관해 말한다.
스탕달이라 하면 <파르마의 수도원>을 꽤나 재미있게 읽어서인지 그의 연애론이 있다는 사실에 꽤 흥미를 느꼈다. <스탕달의 연애론>에서는 사랑의 시작부터 해서 어떤 과정으로 사랑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그 사이에 겪는 남녀의 심리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꽤나 재미있게 써놓았다. <스탕달의 연애론>은 연애를 하는 과정과 심리 상태에 관한 글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은 혹은 연애는 그 당사자들과 함께 그 시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잣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현재형이든 과거형이든 책을 읽으며서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연애론에는 비교적 남녀의 심리에 관한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밑줄을 긋게 되는 부분도 한 둘이 아니었다. 사랑이 어떻게 결정작용을 거치게 되는지, 사랑에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자존심과 질투에 관한 부분도 꽤나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다. 물론 남녀가 비록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내 기준에서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생각되는 부분이 꽤 많다.


외모는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남자가 어떤 못생긴 여자를 만나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여자의 성격이 좋다면 남자는 곧 여자의 외모상 결점을 지워버릴 수 있다. 남자는 여자가  사랑스럽다고 생가할 것이고, 이런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98)

자연스러움이란 이처럼 사랑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필수 조건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울까 걱정할 것도 없다. 자연스러움이란 그저 평상시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도, 멋지게 진실을 변질시켜서도 안 된다. 멋지게 보이려 하면 그렇게 꾸미는 데 정신이 팔려 오히려 일을 망치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정신은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눈빛으로 드러나는 감정에 더 이상 솔직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다.(p.190)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기도 하지만 내용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 이 부분에서 그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부분에서 그 당시의 사회를 매우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스탕달의 경우에는 여성의 교육에 열린 자세를 피력하며 다소 다른 자세를 취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도 부분부분 여성과 사랑이 연결되는 부분에서는 오늘날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대의 변화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당시 사회의 시선까지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거는 기대가 다른만큼, 사랑이 싹트는 이유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남자는 공격적이고 능동적이면 여자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이다. 남자는 언제나 요구하는 쪽에 가깝고 여자는 거절하는 쪽에 서게 된다. 또 남자는 용감하게 나아가고 여자는 수줍게 물러서는 것이 사랑이다.(p.63)


'새롭게 쓰는' 스탕달?
이 책은 <스탕달의 연애론> 앞에 '새롭게 쓰는'이라는 작은 글귀가 덧붙여져 있다. 이 글은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아마도 이 책은 스탕달의 <연애론>을 번역한 글로 보여지고, 스탕달의 연애론을 인용해서 새롭게 쓴 글이 아니란 말이다. 새롭게 쓰는 스탕달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오해려 혼란만 더 가중시킬 뿐이다. 아마 고전을 현대에 다시 읽는다는 느낌을 살리기 위한 글귀 같지만 오히려 어디까지가 스탕달의 글인지 알쏭달쏭하게 하는 것 때문에 꽤 신경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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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 내 차로 떠난 실크로드&타클라마칸 14,000km
오창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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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사막을 꿈꾸고, 여행을 꿈꾼다. 종종 사막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전파를 타곤 하는데, 그들에게는 왜 사막을 걷느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항상 말한다. '사막이 있기 때문에 걷는다'고. 누군가는 죽음, 누군가는 삶에 희망을 보는 사막을 자동차로 지나다닌 사람들의 이야기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훌륭한 여행기란 뭘까

쏟아져 나오는 여행기 간운데 좋은 여행기의 조건은 뭘까를 생각하곤 한다. 여행 과정을 충실하게 정리하면 되는건가? 아니면 여행과정은 잘 생략하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것들을 이야기하면 되는건가? 그것도 아니면 둘은 적절하게 잘 배치해야 하는건가? 사람마다 여행기의 기준은 다르다. 여행루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고 싶어하는 이가 있고, 여행의 감상에 젖고 싶은 이가 있다. 결국 좋은 여행기의 기준은 필요에 따라 나뉘는 것이겠지만, 가능한 정보와 감상이 적절하게 배치된 책이 그 중간쯤은 차지 하지 않을까 싶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는 중국을 38박 39일, 근 40일 동안 자동차에 의지해서 실크로드와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은 주파하는 놀라운 장정의 기록장이다. 기막힌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행은 가희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코스들이다. 도시를 지나 시골길을 지나 사막을 횡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40일의 여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하다. 


여정 자체에 한번 놀라고 나면 그 다음은 여행의 루트를 꼼꼼히 살펴볼 차례이다. 실크로드&타클라마칸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의 주인공은 실크로드와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실크로드를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지나가는 곳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오랜 시간 준비한 여행이니 사전 준비가 꼼꼼했고, 함께 동승한 이들의 지식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것을 벗어나 그 지역의 '현재'를 보여주고자 한다. 과거 실크로드를 지나는 상인들이 넘나들었던 그곳에는 지금도 그들을 맞이하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 또한 여행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책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어서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역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막을 통과하는 부분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막에 대한 동경은 나도 가지고 있었는지 사막을 횡단하는 부분을 읽는 내내 사막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길을 달리는 그들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다만,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전제적으로 여행에 대한 조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일주를 하는 여행의 경우에는 각 장마다 어느 지역을 여행하는지 루트를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는 독자들이 실크로드에 대한 다소 막연한 루트를 머리 속에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배려했어야 한다. 투박하게라고 이 장에서는 어느 지역을 여행하고 있는지를 각 장마다 넣었으면 좀 더 현실감있는 여행이 되고, 좀 더 이해가 잘 되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책을 읽는 내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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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로냐프 강 2부 1 - 이백 년의 약속, 한국환상문학걸작선
이상균 지음 / 제우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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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로냐프 강>의 1부 마지막은 파스크란과 퀸트린이 이냐바뉴의 군대 속으로 돌진하는 장면으로 끝이난다. 그들이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그들은 이나바뉴, 셀큐러스를 지나 끝까지 달려 루우젤 땅, 로냐프 강까지 까지 달리겠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런 그들의 대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로젠다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작가가 원했던걸까. <하얀 로냐프 강> 2부는 파스크란과 퀸트린, 그들이 닿고 싶었던 로냐프강을 끼고 있는 루우젤의 독립 이야기이다. 

물론 1부에서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인물은 전설속의 인물로 등장할 뿐이다. 파스크란은 루우젤의 기사들에게 우상(?)으로 등장하고, 퀸트린은 이냐바뉴의 몰락한 세럿 가문으로 가끔 등장한다. 그들의 오래 전 이야기가 현재의 이야기와 병치되면서, 바람이 머무는 땅 루우젤에서 자신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 다시 한번 시작된다.

루우젤, 그들의 삶에 대처하는 자세
<하얀 로냐프 강> 2부는 이나바뉴에 정복된 루우젤의 평범한 일상, 다양한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루우젤 땅에는 장로라는 이름으로 낮춰졌지만 루우젤 사람들에게는 왕과 왕자인 이가 있다. 그들 주변에는 바스엘드감인 인물도 있고, 그들을 이끌어줄 두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루우젤을 사랑하는 이들과는 다르게, 루우젤에서 벗어나 이나바뉴의 기사가 되기를 꿈꾸는 이도 있다. 그에게 루우젤은 저주받아야 하는 조국이다. 자신에게 지우고 싶은 존재, 딱 그만한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 셋은 어릴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만, 한쪽은 조국인 루우젤을 위해 싸우게 되고, 자신의 조국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이는 이나바뉴의 기사가 되고 싶어한다. 부정할 수 도 없다. 그들은 반드시 전장에서 만나게 될 운명이다. 

전작인 <하얀 로냐프 강> 1부는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시대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풍미를 제대로 살린 소설이었다. 그 안에는 얼굴을 마주보고 칼을 맞대고 싸우는 이들이 있었고, 기사도가 있었고, 적군에 있는 이 마저도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1부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전쟁과 그 안에서 피어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로맨스이다. 1부는 상대적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기사도와 전쟁 자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하얀 로냐프 강> 2부는 3권을 읽고 있는 현재는 1부와는 다르게 기사도와 전쟁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상당히 1부와 비교되는 점인데, 2부에서는 라벨 가문의 망나니(?)가 정치적으로 어떤 열량을 발휘할지, 야망을 가지고 있는 이가 어떻게 그것을 하나씩 실현시키는지는 부각시킨다. 오히려 1부를 읽고 로멘스와 기사도를 기대했다면 2부를 읽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은 차갑다는 것을 곱씹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흘린 눈물과 그를 보며 누군가가 흘린 웃음을 보며 말이다. 

1권에서 가장 초점이 맞는 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들의 자세'이다. 1부에서도 로젠다로가 이나바뉴를 이기지 못할 것은 명약관화였다. 다만, 소설은 그 결말이 뻔히 보이는 전쟁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 2부도 그렇게 될 것이다. 결말까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정치라기 보다는 차가운 현실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일 것이다. 어찌보면 기적을 원한다면 기적을 행하라는 파스크란의 말이 오래도록 울림을 주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겠다는 바스엘드의 말은 그런 현실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인 것이다. 그들에게 꿈이 허왕되다 비웃지마라. 본래 현실은 그런 꿈을 가진 자들이 바꿔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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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연설.문학 비평 알베르 카뮈 전집 18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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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없고 글을 쓸 수 없는 책이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작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는 내게 그런 작가이다. 그의 글은 <이방인>을 시작으로 <시지프 신화>를 거쳐 <최초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게 읽었음에도 그의 글과 그에 대한 글을 쉽게 쓸 수 없다. 책을 읽을 때는 격렬하게 읽지만 막상 언어로 쓰려고 하면 막히는 이 답답함을 난 카뮈에게서 항상 느낀다. 

카뮈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는다
카뮈에 관한한 가장 신뢰하는 번역을 하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진행되는 책세상 문고의 18번째 책이 나왔다. <스웨덴 연설. 문학 비평>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그가 짧막하게 연설한 원고와 당시 문학 비평과 짧막한 인터뉴의 녹취록이 정리되어 있다.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게 카뮈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산문의 장점이다. 소설과 희곡을 읽으면서 잡힐듯 잡히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이러한 산문을 한권 읽으면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건 나뿐일까?

'스웨덴 연설'에서는 1957년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시기의 문학과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특히 오늘날의 문학과 오늘날의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고민은 꽤나 컸다는 것이 많이 포착된다. 작가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를 겪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한다(p.11)는 그의 말은 예술가의 시대의식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예술이 국가 권력에 대해 자유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그는 다소 과격할지도 모르지만 떨져 일어나 싸우거나 항복하거나(p.20)를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술가의 직무 유기에 대한 이야기와 오늘날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이 더 이상 널리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그의 자조는 꽤 웃음을 짓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당시 고민들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2000년대 현재 문학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고민이라는 점이 씁쓸하면서도 재미있다. 

또한 재미있는 부분은 적지만 재미난 인터뷰 녹취 부분이다. 작가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생계문제가 글을 쓰는데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한 때 교사가 되고자 했다는 부분에서는 그와는 다른 견해와 삶을 보여준 미루아먀 겐지가 떠올랐다. 미루아야 겐지는 소설가에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모든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낙향해서 집필활동을 했으니 어쩌면 카뮈와는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자신의 현재에 대한 고민은 꽤나 나에게도 그 고민을 하게했다. 

부끄럽지만 이 책에서 어쩌면 내가 공들여 읽은 부분이 김화영 교수가 쓴 해설 부분이 아닐까 싶다. 문학비평에 대한 부분은 각 문학 작품을 읽어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다소 소화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겠지만, 카뮈는 목소리는 꽤나 많은 해설을 참고해서 읽은 셈이다. 다른 책에서도 그렇지만 김화영 교수의 해설은 꽤나 친절해서 너무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책을 읽고 혼자 머리를 싸매기 보다는 해설을 한번 읽어보면서 카뮈에 대한 부담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으로 삼으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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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0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 2007-09-1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중으로 입금할께요.^0^
+감사합니다. :)
 
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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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으로 살았고 시종일관 유쾌하던 카이사르가 등장한 시대를 지나 그의 양자이자 제정을 연 아우구스투스의 시대가 <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의 내용이다. 4,5권에서는 너무 비대해져 로마가 기존에 공화정으로는 효율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것을 감지한 카이사르가 원수정을 제국에 도입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과정에 초점이 맞춰졌다. 카이사르의 선견지명은 맞았는지, 6권 <로마인 이야기 : 팍스 로마나> 에서 그의 양자로 들어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시대를 '팍스 로마나'로 만들며 화려한 제정시대를 열게 된다.


카이사르 VS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다른 인물을 원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비교하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된다. 이 둘만큼 이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꽤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다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점,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카이사르는 모든 이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일을 시도해야 하는 혁명가에 가까웠다면, 아우구스투스는 혁명이 진행되고 난 후 새로운 틀을 짜는 요컨데 재건축을 담당한 것이다.


물론 둘은 차이점이 꽤나 많지만 사실 둘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차이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달랐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변곡점을 돌아야 하는 카이사르와 변곡점을 지난 제국에 대한 그림을 그려나가는 둘은 엄연히 다른 능력이 요구되었다. 카이사르는 다른 어떤 능력보다 군사적 능력과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이 기막혔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아우구스투스는 제도를 정비하고 시대가 숨고르기를 하고 더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채워넣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가 되면 저자의 말대로 리스트럭쳐(restructure)의 달인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걸까,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걸까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에게 능력으로 발탁된 아우구스투스가 유독 혈연에 칩작하는 모습이 모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곰곰히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들어보면 그는 카이사르에게 발탁이 되었고, 카이사르의 이름을 평생 자신의 이름 앞에 달고 살았고 또한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아버지의 혹은 선조의 이름이 통치에 얼마나 도움이 되며 자신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지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가 장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독 혈연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럼에도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혈연에 대한 그의 집착은 과한 면이 적지 않았던건 분명하다.


또한 6권을 읽으면서 제정에 대한 정의도 새롭게 했는데, 제정이란 황제 혹은 일인자가 통치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권력이 세습되는지와는 사실 관련이 없다. 지금까지 제정이이라는 통치 방식을 권력이 세습되는 정치를 지칭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꽤 큰 놀라운 점이었다. 그런데, 왕정은 임금이 통치하는 방식이고, 제정은 황제가 통치하는 방식이면 둘은 단순히 통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왕정과 제정에 대해 좀 더 분명한 정의를 알아봐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우구스투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지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시대가 혼란할수록 영웅이 등장한 것을 보면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대가 카이사르 같은 변곡점에 맞는 인물을 원했던 것이고, 시대가 아우구스투스 같은 조직을 정비할 수 있는 인물을 원했던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었기 때문에 시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꽤 오래했다.


다음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로마인 이야기 7 : 악명높은 황제들> 이다. 얄궂게도 혈연을 통해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 아우구스투스는 지하에서 후회 막심 할 일이지만, 그의 혈연을 따라간 후손들이 어떻게 로마를 통치했는지를 따라갈 수 있는 꽤나 재미있는 책이니 기대된다. 그리고 항상 어느 정치나 틀을 잡은 초장기를 지나면 위기가 오곤 하니 그것 또한 재미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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