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생각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현상을 분석하려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일단은그 아이디어를 존중해야 합니다. 검증도 없이 그저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감각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남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의욕 없는 게으름뱅이나 하는 짓이에요."
"게으름뱅이라고요?"
기타하라가 물리학자를 노려보았다.
"그렇습니다. 게으름뱅이죠.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늘 점검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담이 큰 일이에요. 그에 비해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건 편안한 일입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게으름뱅이고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 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뉴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나귀를 천시해왔다. 실제로도 당나귀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평소에는 말로 모욕을 가했다. 당나귀는 수레를 끌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삶의 무게를 지탱해왔다. 삶은 자신을 도와준 자에게 감사할 줄모르고 불공평하게 대한다. 연애소설들과 총천연색 영화들에서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삶은, 무미건조한 현실보다는 빛나는 운명들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시골길을 걷는 당나귀보다는 애스컷의 경주마들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삶보다 더 똑똑해서 당나귀의 위엄을 노래할 줄 안다.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따뜻하게 해드린 건 경마장 종마가 아니라 당나귀다. 호메로스는 트로이군의 공격에 맞서 혼자 싸워 아카이아배들을 구했던 아이아스를 당나귀에 비유한다. 무거운 짐과 구타에도 당나귀의 등은 텔라몬의 방패처럼 위대해진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당나귀는 사람들을 돕다가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와도 비교된다. 148


***********

삶은 무미건조한 현실보다는 빛나는 운명들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아니. 근데 이제 무미건조한 현실에서 빛나는 삶을 보게 되기도하니.
좋은것인가 모르겠다만. 새사제의 탄생이 뭐 그리 기쁜일인가 하게 되는 반작용이.
아니. 이건 부작용인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랑 뭔 상관,이었는데. 그래도 딱 잘라 말할수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것도 부인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 무렵 돌다리 아래로 물결무늬를 이루며 세차게 흘러가는 시커먼 다뉴브 강은 지나간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 같다. 현재의강물이 아닌, 이미 사라졌고 또 앞으로 사라질 강물을 말이다. 140



강자들, 즉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고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삶이란 게 녹록지 않듯이, 그녀에게 삶은 녹록치 않았고 현재도 그렇다. 자신의 불확실한 실존을 인식하며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삶은 버겁다. 반면 약자들, 다시 말해 자신의 연약함을드러내며 모든 삶의 무게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지우고 자신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영혼인 것처럼 온갖 응석을 다 부리며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너그럽다. 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뉴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노나 요제프 K처럼, 패배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은 문학으로, 종잇장의 골 속으로 후퇴하고 만다. 그곳에서는 패배의 망령과 놀고, 그것을 교묘히 속이고, 그것을 감시하면서 희롱하거나 떼어놓거나 그것에게 알랑거릴 수 있다. 삶에서 훔쳐내 종이 위에 옮겨지는 덕에 문학은 부재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삶은 여전히 좀더 공허하고 결핍되어간다. 장 파울이 말하길, 작가는 자신이 쓴 것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인식하고 생각한다. 누군가 작가의 종이를 불사른다면 그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못 한다. 수첩 없이 거리를 돌아다닐 때, 작가는 너무나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나라는 자아의 창백한 실루엣이자 복사물이며, 그 대리인이자 부재자 재산관리인 일 뿐이다.
그럼에도 종이는 좋은데, 이 겸손함을 가르치고 자아의 공허함에 눈뜨게 해주니 말이다. 글을 쓰고 난 뒤 30분 후 전차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썼던 것을 전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작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의 공허함을 생각하면서 어떤 이는 각자 공들인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그리고 작가는 수많은 사람 각각에 대해 형제애를 느낄 것이다. 그 자신처럼 선택받은 영혼들이 저마다의 공상 속에서 죽음으로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무를 향해 다같이 몰려가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은 범우주적인 비밀집단, 프리메이슨, 어리석은 비밀결사 본부를 만든다. 장 파울에서부터 무질에 이르는 작가들이 어리석음에 대한 찬가와 에세이를 썼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부족한 글쓰기 능력은 지성의 부족함과 상대성을 발견하게해주며, 형제의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인내하며 길을 갈 수 있도록해준다. 종이는 그 길을 너무 진지하게 가지 마라 가르친다. 싱어보다 카프카와 더 닮은 사람조차도,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성이나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배운다. 머지않아 자식들이 자신의 종이를 마구 흩트리고 종이배나 불쏘시개로 만드는 걸 기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어느정도 인식한 문인은, 글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덕분에 쓴 것들에 대해 열정을 품게 되고,
그 말들이 자신을 앞으로 끌고 나가도록 해서 장 파울 작품의 한 인물처럼 옛 서문 •프로그램 · 광고전단 · 부고 공고 들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이미지와 문장들을 붙잡으면서 떠오르는대로 글을 쓰게 된다. 수첩이 낙서로 가득 차자, 영혼은 더 평온해져 지나가는 시간에 대고 태연하게 휘파람을 분다. 121




되돌이되돌이되돌이.
알듯말듯.
수첩이 낙서로 가득할 날이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뉴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 파울은 현재를 사랑했다. 현재가 아직 미래이거나 이미 과거일때는 기다려지거나 애석해하는 대상이 되지만, 그것이 현재일 때는경멸받고 낭비된다. 이 순수한 현재는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매 순간 현재를 무로 만들어버린다. 현재는 시간의 바깥, 즉 삶의 바깥에만, 기억이나 글쓰기가 보기 드문 무언가를 이뤄낼 때만 존재한다. 소설 『크빈투스 픽슬라인의 생애」에서 말하기를, 연기는 고통스러운 우리들의 실존에서 솟아올라 안티몬 증기처럼 새로운 기쁨의 꽃들로 피어오른다. 그 꽃은 단지 시의 꽃, 혹은 글쓰기가 소진되어가는 이 삶에서 끌어낸 이미지들일 뿐이다. 마음의 형상들을 투영해내는 무無로부터 끌려나온 이 비물질적 공간의 빛은 구체적인 현실에 반사되어, 아늑한 집을 ˝우주의 궁륨 속에 파고든 자그마한 자기집˝으로 바꿔놓는다. 장 파울이 아주 다정히 노래했던 가족 목가는 우주적 차원을 취한다. 부부의 사랑, 집안일, 행복한 하루, 요람과 관 등 가정생활을 노래한 서사시는 무한의 씨실과 날줄에 섞여 짜인다. 시간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리아 부츠의 전기 작가는 ˝우리 실존의 허무함을 느꼈고 그토록 보잘것없는 삶을 경멸하고 누리고 깊이 음미할 것˝을 맹세한다. 1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