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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 -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
윤득한 지음, 츠치다 마키 옮김 / 평사리 / 2021년 11월
평점 :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할머니가 민박을 하며 체험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빨간 머리카락은 이 책의 저자인 윤득한 할머니가 아니라 그녀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로마의 민박집 주인이다. 그래서 또 이탈리아에서의 삶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또 첫 에피소드가 끝나고 이야기를 읽어가면서야 이 책에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찌만 미국 시카고 대학의 영화과 입학을 포기하고 재일교포와 결혼하여 53년부터 일본에서 생활한 저자는 평범한 할머니라 하기에는 이력이 화려하다. 70년에 파리와 로마를 여행한 것부터 시작하여 일반인들의 한일교류가 거의 전무하던 시기에 일본에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에는 일본문화를 알리며 경제활동을 했었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일본헌법개정반대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전쟁반대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수많은 이야기에서 가장 부럽고 대단하다고 느낀것은 그녀의 마지막 여행, 아니 팔순이 넘은 나이에 그녀 혼자 떠난 여행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실화냐, 싶을만큼 경이로운 마음으로 보게 된 이야기는 스페인 여행이다. 우연히 티비를 보다가 가우디의 성가족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바로 일정을 알아보고 무작정 스페인으로 떠났다고 한 것이다. 스페인으로 향했다,라는 글을 읽을때까지만 해도 뒤이어 나올 허망한 마음에 대한 대응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특별미사로 집전되었던 그때처럼 완공이 안된 성가족성당에서의 미사는 서품식을 앞두고 있어서 또 한번 특별미사가 있을 예정이고 서품자 가족외에는 초대받지 못하지만 그녀의 사정을 들은 가족이 선뜻 자신의 초대장을 그녀에게 양보해 미사참례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기적같은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걸 느꼈다.
스페인에 가본적이 없는 나는 가끔 내 생애에 성가족성당의 완공을 볼 날이 있으려나..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윤득한 할머니의 글을 읽으며 괜히 내 마음이 더 설레이고 있다.
여행이야기지만 이것이 곧 인생의 이야기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 세계의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시시의 이야기에서는 나의 신앙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윤득한 할머니는 한국인이지만 오랜 세월 일본에서 살며 일본어로 글을 썼고, 쯔치다 마키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오랜 세월 살아 윤득한 할머니의 글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는 것 역시 이 책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나라라도 그곳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다. 되도록 버스나 일반 열차, 지하철을 탔고, 먼 곳으로 이동해야 하면 야간열차의 침대칸을 이용했다. 현지인들의 생활노선에 닿아 있는 교통편을 타고 밖의 풍경을 찬찬히 살피는 것도 행복이었다. 인생이란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으니"(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