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폴에 관한 이야기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아는 만큼의 폴에 관한 이야기, 이것이 폴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인가 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을 폴에게서 배웠다. 폴 자신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 일 없노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나는 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저멀리 바다 건너, 나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대륙의 한복판에서 한여자의 남편이 되겠다고 서약하고 있을 폴.
폴링 인 폴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폴에게 빠진 나의 이야기.
어렸을 때 나는 이상한 나라의폴에게 빠졌어, 따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개구쟁이 짓을 하던 폴이라는 녀석은 내가 형같다며 끊임없이 놀려대고 장난을 쳐 댔었는데 학창시절 버섯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나는, 만화속에서도 결국은 폴에게 패배하고 마는 버섯돌이처럼 늘 폴에게 당하고만 마는 현실을 살고 있었다는 것. 여기서 내가 사랑한 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두 개의 폴링 인 폴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뭐가 다를까, 라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폴 - 소설 속 폴은 유리코를 사랑하고 이상한 나라의 폴은 니나를 사랑하는데 소설 속 화자인 나는 폴링인 폴을 이야기하고 있고 현실 속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과 조우하며 그 사람을 다 안다는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메며 살아아고 있음'을 새삼 현실에서 자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말이나 영어나 사랑에 '빠지다'라는 걸 생각하면서 이건 사랑이야기야! 라는 작은 외침을 시작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지만 첫마디부터 어딘가 해피엔딩은 아닐꺼라는 것을 예감하게 되는데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랑에 빠진 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사랑이라는 것은 연인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랑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서로를 향한 소통이 있어야 하는 것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었는지.
그래서 폴이 사랑하는 유리코는 서툰 한국어로 폴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폴의 아버지는 유리코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말하며 그녀를 밀어내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었을까.
백가흠 작가의 단편 '안녕, 오마르 입니다'를 읽다보면 폴링 인 폴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 든다.
영국에서 만나 함께 여행을 하고 결국 그리움에 수진을 찾아 한국으로 온 오마르의 이야기 속에서 오마르는 여전히 수진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진의 한국말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표현과 방식이 일방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니 정말 궁금해진다. 폴링 인... 결국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일까.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나를 뿌리치며 집을 나섰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나간 문이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제야 정말, 나는 이곳에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얼른 그녀를 찾으러 나갔습니다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습니다. 오마르의 수진은 어디로 간 걸까요"(안녕, 오마르입니다. 백가흠)
오마르는 수진을 찾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까? 백수린 작가는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아름다운 엔딩을 갖고 있지 않은 법이니까'(85)라고 말하지만 폴을 바라보며 또 다른 진심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눈앞이 온통 아시아인들뿐이라 너무 놀랐어요. 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폴이 그를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람들 틈에 섞여 더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87)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폴링 인 폴'을 떠올려본다.
둘의 사랑이 커져가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고독했는지만을 기억할 뿐"(68)이고 폴을 잃고 있음을 실감할뿐((81)인 나는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을 느끼며(86) 폴을 떠나보낸다. 그러니 그녀가 폴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떠올리는 폴의 모습을 다시 기억해본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되겠다고 서약하고 있을 폴"
짧은 단편 하나를 읽으며 여전히 사랑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가득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