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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도 아니고 익힌 것도 아닌 - 우리 문명을 살찌운 거의 모든 발효의 역사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젠가 빵을 좋아하는 친구가 자기는 방부제가 들어간 밀가루를 너무 많이 먹어 죽어도 썩지않을꺼라는 말을 해서 놀랬던 적이 있다. 그런데 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즐겨 먹는 모제품의 햄버거를 장난삼아 보관했는데 십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썩지 않는 음식과 썩어서 곰팡이가 핀 음식 중에 어느 것이 더 해로운 것일까.
날것도 아니고 익힌것도 아닌, 이라는 이 책은 발효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솔직히 전세계의 발효 음식과 음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음식이라기보다는 발효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중점이어서 아주 재미있게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발효,라고 하며 가장 먼저 우리의 장종류가 떠오르는데 그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아 좀 아쉬운것도 있고.
저자는 인간이 발효식품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자연속에서 발효는 시작이 되었고, 좀 더 맛이 좋은 발효식품을 얻기 위해 과일이나 곡류를 재배하며 농사에 동기를 부여하고 품종개량을 한 것이라 주장한다. '농경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 빵이나 술을 즐기게 된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맨 처음 작정하고 키운 것은 개나 말이나 젖소가 아니라 미생물이었다'는 말은 좀 쌩뚱맞은 느낌이었지만 왠지 그럴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전이나 신화, 각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설화 등을 통해 인류문명의 역사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발효음식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몇몇의 지역에서는 생존과도 관련되어 있다. 몽골에서는 어린 아기에게도 마유주를 먹인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혹독한 환경에서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술과 관련해서는 지나친 음주는 해롭다,는 현대의 표어와 마찬가지로 고대에도 그 자체를 마시는 것은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과거에는 여성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디오게네스 신전의 제례는 여성이 주관하며 여성은 술에 물을 타지 않고 그대로 마셔도 된다는 이야기들은 여성을 차별하면서도 그들 없이는 안된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듯해 발효음식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게 되는 인류문명의 역사가 무척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다.
단편적으로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책은 이해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버릴수가 없다. '발효의 역사'라고 하는데 그 전체적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책을 읽으면서 계속 현재의 발효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는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발효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맛있는 발효식품을 만드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그것은 발효의 역사를 모른다고해서 맛있는 발효식품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발효 식품은 인류가 식량 공급과 위생이 열악한 상황에서, 심지어 매우 빈곤한 상황에서 살아남도록 도움을 주었다. 진화는 발효 식품을 먹는 이들이 병을 잘 이겨내고 더 잘 살아남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곱씹어볼수록 우리 고유의 음식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덧붙여 몸에 좋다는 보이차도 찻잎을 삭혀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 최근에 보이차의 효능에 대해 과학적 검증을 했다고 하는데 발효에 대한 이 책을 읽으니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없게 느껴지던 이 책이 읽어나갈수록, 조금 더 알게 될수록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