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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올해는 4.3의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6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행사가 열렸다. 대중가수들이 시청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방송국에서도 수천명을 모아 열린 음악회를 공개녹화하였다. 그렇게 60주년을 맞이하는 4.3은 활짝 피어난 벚꽃과 유채꽃들을 배경으로 하여 화려하게 기념되고 있다. 이십여년 전의 사월 벚꽃은 거리에 흩뿌려진 최루가스에 속절없이 져버렸지만 4.3 60주년을 기념하는 2008년에 피어난 벚꽃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낭만을 흩뿌려대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내 눈에는 그 어디에도 4.3은 보이지 않는다.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도, 진상 규명도 없이 단지 '60주년'만 남아있는 것 같다.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4.3은 규명되었고, 희생된 도민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유해발굴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라는 말로 끝맺고 싶지만 2008년 현재, 4.3은 계속되고 있다,라는 말을 내뱉지 않을수가 없다.
당신은 4.3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평을 쓴다며 앉아서 이렇게 에둘러가는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내 마음도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책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4.3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물론 나 역시 4.3을 모른다. 이십여년 전쯤, 부모님께 4.3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모르민 속솜행 이시라'(모르면 잠자코 있어라)는 말 한마디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북에서 거대자본상인의 딸로 자라 아쉬운 것 없이 지내다 48년 제주에 들어와 6.25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갖은 고생을 하셨던 어머니는 4.3에 대해 이야기하기 꺼려했다. 그때만 해도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빨갱이짓이고 간첩죄로 몰릴 수도 있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이북출신의 외가집이 우연찮게도 48년에 입도(入島)하였다는 것이 내게는 섬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는 서북청년단이 떠올라버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4.3에 대해 모른다.
아니, 그래 역사적인 4.3에 대해, 그러니까 4.3의 발단과 과정, 증언, 유적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4.3에 대해 알고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주도 사람들은 가끔 '어디가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멱살잡고 크게 싸우거나 사기치면 안된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한다. 그만큼 서로가 알고보면 먼친척이거나 한다리 건너면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하다는 뜻이다. 제주말로 '괸당'(친인척)으로 밀접한 관계형성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대문도 없이 이웃과 왕래하며 지내던 공동체가 60년전에는 어떠하였겠는가. 온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혈투를 벌일때 제주는 그런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4.3사건으로 인해 수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찰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산사람과 내통했다는 혐의에서 못벗어나 총살당했고, 오로지 살기위해 산중턱의 깊은 동굴에 숨어있다 발각되면 사살당해야만 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겨우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촌사람들에게 소개령을 내려 해안으로 내몰았는데 삶의 터전을 두고 무작정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은 또 빨갱이로 내몰려 죽임을 당했다. 4.3은 말 그대로 제노사이드였던 것이다.
그런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바로 당신의 무관심과 일부 편향주의자들의 역사왜곡으로 4.3의 영령들은 다시 한번 죽임을 당하고,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4.3을 단순히 남로당의 지령으로 인한 빨갱이들의 반란사건으로 규정하는 뉴라이트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새정부 인수위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지금 현재 4.3 위원회 폐지를 유보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여전히 4.3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제주도민을 옭아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백꽃 지다
그저 마음이 답답할뿐이다. 처음, 멋모르고 4.3 유적지 순례를 갔었던 때의 기억이 난다. 큰넓궤라는 곳을 들어가며 두 팔과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깜깜한 동굴 몇미터를 지나면 공터가 나오고,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또 공터가 나오던 그곳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는지. 마을사람 절반 이상이 끌려가면서 띄엄띄엄 신발을 떨어뜨려 행적을 표시해놨기에 살아남은 가족들이 겨우 찾아 먼길을 갔더니 웅덩이 하나에 수십명이 몰살당해 있더라는 산 중턱이 숲길은 또 얼마나 멀고 힘들었는지. 커다란 마을 하나가 완전히 불타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의 수풀은 역사의 아픔을 눌러 세월의 흐름만을 보여줘 얼마나 쓸쓸하던지.
서평을 써보기 위해 책을 뒤적거려보지만 다시 또 마음이 아플뿐이다. 증언들과 함축적으로 표현된 강요배 화백의 그림들이 역사적인 사실 안에 담겨있는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3을 겪지 않고 말로만 전해들은 나조차 이렇게 답답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들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서경식 선생의 추천사를 읽으며 또 한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여든을 넘긴 재일 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지난 해 제주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초대를 받고 단상에 올랐지만 '일본에서 비행기로 제주도에 왔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이 활주로 밑에 얼마나 많은 시신들이 묻혀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것을 생각하면...'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고 한다.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나 역시 그 눈물을 모른다. 4.3의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나는 진정 4.3에 대해 모른다.
"바다 가운데 일 점 산으로 솟은 탐라, 고려 시대 몽골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뒤로 탐라는 육지로부터 끊임없이 수탈을 당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착취와 탄압에 맞서 싸워 온 탐라 사람들의 전통이 바로 4.3 항쟁의 뿌리이다" (13)
4.3은 지역에 한정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삼별초 전투(18), 왜구퇴치(20), 이재수 난(22), 잠녀 반일항쟁(24)의 역사가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방이후 자율적인 사회운동체를 조직하고 교육에 힘썼던 제주도민의 공동체는 4.3의 제노사이드로 무너져갔다. 낮에는 해안으로 밤에는 산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내몰렸던 제주도민의 십분의 일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십년전에 이미 98년에 출판되었던 동백꽃 지다,를 읽었었지만 그 먹먹한 마음이 여전하다.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것을 한 장 한 장 강렬한 그림으로 표현해낸 강요배 화백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동백꽃 지다'의 그림과 증언들은 그냥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거나 4.3에 대한 책들 중 한 권으로 분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4.3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난 후 마음으로 동백꽃 지다를 봐야만 한다. 얼마나 큰 아픔이 있는지, 섬사람들이 육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성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수탈과 침략의 역사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제주동백은 강렬한 빨간색으로 활짝 피어난다. 그리고 활짝 피어 난 후, 사그라질때는 미련없이 툭, 하고 통꽃으로 떨어져버린다. 해산령을 받은 산사람들은 그렇게 동백꽃처럼 툭,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해마다 제주동백은 다시 강렬한 빨간 꽃을 피워낸다. 그처럼 우리는 4.3의 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고, 수탈당하지 않는 민중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하여 진정 평화의 섬,을 이뤄낸다면 미련없이 툭 떨어져 후손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4.3을 모르지만 4.3의 후예로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