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재처럼 살아요 - 효재 에세이
이효재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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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놓인 손수건 한 장에 담긴 아름다움과 정성이 보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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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엄마 - 거의 행복한 어느 가족 이야기
무리엘 비야누에바 페라르나우 지음, 배상희 옮김 / 낭기열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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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에서도 그랬고, 직장에서는 더 그랬고. 다들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듯 해 보였고,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맘껏 지르며 사는듯해 그 기분에 당하는 심정이 배배꼬였었다. 나 역시 내 기분에 이것저것 쑤셔보다가 꽃미남에게나 빠져볼까.. 싶은 생각에 일본에서 상영되었던 '아름다운 그대에게'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휙휙 지나가는데, 여차저차한 사정이 있어 남학교에 들어간 여학생이 있었고 그(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동급생 친구는 사랑에 빠지면서 고민이 시작된다. - 물론 드라마의 주제가 단순히 그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주제 역시 드라마 얘기가 아니며, 친구가 '그녀'인줄 모르고 사랑에 빠진 남학생의 고민이 순간적으로 이 책을 연상시켰기에 슬며시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그의 고민은 동성 친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고민은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까지 이어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학교에는 누가 가야되나?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우리의 아이는 누구에게 아빠라고 부르고 누구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라는 고민에서 상상의 나래가 확 꺽인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애를 낳을수가 없잖아!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어이없는 한마디를 외치며 그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조금 멀리 돌아가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엉뚱한 이유로 보기 시작한 꽃미남들의 유치찬란한 드라마를 보다가 '가족'에 대한 생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왜 우리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 구성원을 '엄마, 아빠, 나'가 기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걸까? 라는 의문과 함께.

이쯤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두 엄마'는 낳아주신 엄마와 길러주신 엄마의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흔히 레즈비언이라 일컬어지는 동성애자인 엄마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짐작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이야기라거나 동성간의 사랑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두 엄마'는 말 그대로 두명의 엄마와 함께 사는 거의 행복한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뿐이다.
사실 제도적인 문제나 문화적으로, 가장 크게는 종교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은 당대 시대의 시대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시선을 달리 해봐야 하는 것 역시 문화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필요한다고 보기에 이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책 '두 엄마'는 스페인에서 동성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2005년을 시점으로 그 해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두 엄마와 엄마들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엄마의 생물학적 딸과, 한 엄마의 입양된 딸과 두 엄마가 한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데 그들 가족에게 비정상적이라거나 뭔가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다. 서문에 밝힌 저자의 이야기처럼 '변해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이지 동성애자인 엄마들이나 아빠들이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동의를 할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는다면 말이다. - 어쩌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혹은 입양되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 틀에 박힌 가족 구성원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 거꾸로 읽어도 상관이 없다지만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권하고 싶다. 왜 그들이 합법적인 제도에 얽매여야 하는지, 그것이 그들이 이룬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왜 거의 행복한 느낌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지... 더 집중하게 되고 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으니까.

자전적인 이야기를 쓴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 짧고 얄팍한 책이 문학적으로도 흥미롭게 쓰여졌고, 내용으로도 감동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그냥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는데 도움이 될뿐이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으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지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 사회가 소외시켜버리고 있는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 가족이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되기까지의 글을 읽으며 괜히 마음이 짠해지고 감동이 느껴져 간혹 슬며시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었다.

문득 라일락 피면(창비)에 실린 오진원의 단편이 생각난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 믿었던 얼굴이 상처로 변할 때, 그 얼굴을 보며 울기보다 살짝 윙크를 보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라일락 피면 중 오진원의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154)는 말은 지금 내 곁을 되돌아볼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나의 평가와 편견은 그들을 공격하는 무기일뿐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겨보게 되는 것이다.
소외되거나 불행해지는 가족이 없게 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아니 변해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우리의 인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모두가 해봐야겠기에 이 책을 권한다.
틀에박힌 제도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각하게 된 '가족'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고 행복해야 할 진짜 가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면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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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05-1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는지 혼자 울컥울컥 하는일이 잦아요 -_-
이 책 읽으면서도 유난히 그랬다는...

chika 2008-05-1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그냥 담담히 써내려간 글인데 왜 그리도 눈과 마음이 짠..해져버리는지...
(이미 나이를 먹어버려서 더 그랬을지도...? ;;;;;)
 
마씨 집안 자녀교육기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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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마씨 집안 자녀 교육기를 읽다보니 교육과 체벌에도 집안마다 각기 특색이 있음을 생각해내고 혼자 웃었더랬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한때의 치기로 반항하던 작은 아들을 무릎꿇여 앉히고 '착실히 모범생으로 공부를 하겠느냐, 하기 싫은 공부 때려치우고 자퇴를 하겠느냐'를 선택하게 하셨었고 내가 아는 후배의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른 외아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셨던 강력계 형사의 본분을 다 하시는 분이셨다. 그걸 직분에 충실하신 분이라고 존경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리라.

그러면 3대에 걸쳐 따귀를 쳐 대는 것이 버릇인 마씨 집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마씨 집안 자녀 교육기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실려있는 네개의 중편소설 중 한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돈 받고 술을 마시는, 이른바 술상무가 직업인 마쥔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아내에게도 차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최고 드렁커의 위치도 후배에게 뒤흔들릴 지경이다. 그런 그에게 '인생'은 무엇일까?

다른 두 작품, 1934년의 도망과 양귀비의 꿈은 풍양나무 마을에 사는 천씨 가문의 족보를 설명해주는 연작이다. 대지주의 몰락과 공산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중국, 아편에 찌들어 무너져가는 중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인하게 살아남고자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이며,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역사의 거대한 파도를 헤어나와 살아가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혼한 남자는 이혼지침서의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쑤퉁의 살짝 뒤틀린 해학이 결혼한 남자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하게 사실적이라는 느낌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양보의 태도에 질려 그의 아내는 집을 나가버리고 친구의 여자친구는 그를 유혹하고 뜬금없이 나타난 방문객에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사기꾼으로 몰리며 얻어맞는 결혼한 남자 양보의 이야기는 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래 물론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언제나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니지만(367) 쑤퉁이 그려내고 있는 그의 인물들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속에 휩쓸려 가 익사해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359)했다고 하지만 쑤퉁이 그려내는 인물들의 답답하고 숨막힐 것 같은 집착의 모습과 맹목적인 사랑은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맹목적인 삶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되어버린다. 쑤퉁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쑤퉁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그가 인간에 대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에 대해 지독하게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역사와 설화가 사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끌어가고, 웃음과 해학속에서 인간적인 깊은 슬픔이 배어나오고 고통과 절망속에서 또 삶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쑤퉁이라는 이야기꾼의 글은 꽤 읽은 편이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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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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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4.3의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6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행사가 열렸다. 대중가수들이 시청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방송국에서도 수천명을 모아 열린 음악회를 공개녹화하였다. 그렇게 60주년을 맞이하는 4.3은 활짝 피어난 벚꽃과 유채꽃들을 배경으로 하여 화려하게 기념되고 있다. 이십여년 전의 사월 벚꽃은 거리에 흩뿌려진 최루가스에 속절없이 져버렸지만 4.3 60주년을 기념하는 2008년에 피어난 벚꽃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낭만을 흩뿌려대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내 눈에는 그 어디에도 4.3은 보이지 않는다.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도, 진상 규명도 없이 단지 '60주년'만 남아있는 것 같다.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4.3은 규명되었고, 희생된 도민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유해발굴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라는 말로 끝맺고 싶지만 2008년 현재, 4.3은 계속되고 있다,라는 말을 내뱉지 않을수가 없다.

당신은 4.3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평을 쓴다며 앉아서 이렇게 에둘러가는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내 마음도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책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4.3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물론 나 역시 4.3을 모른다. 이십여년 전쯤, 부모님께 4.3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모르민 속솜행 이시라'(모르면 잠자코 있어라)는 말 한마디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북에서 거대자본상인의 딸로 자라 아쉬운 것 없이 지내다 48년 제주에 들어와 6.25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갖은 고생을 하셨던 어머니는 4.3에 대해 이야기하기 꺼려했다. 그때만 해도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빨갱이짓이고 간첩죄로 몰릴 수도 있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이북출신의 외가집이 우연찮게도 48년에 입도(入島)하였다는 것이 내게는 섬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는 서북청년단이 떠올라버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4.3에 대해 모른다.
아니, 그래 역사적인 4.3에 대해, 그러니까 4.3의 발단과 과정, 증언, 유적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4.3에 대해 알고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주도 사람들은 가끔 '어디가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멱살잡고 크게 싸우거나 사기치면 안된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한다. 그만큼 서로가 알고보면 먼친척이거나 한다리 건너면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하다는 뜻이다. 제주말로 '괸당'(친인척)으로 밀접한 관계형성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대문도 없이 이웃과 왕래하며 지내던 공동체가 60년전에는 어떠하였겠는가. 온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혈투를 벌일때 제주는 그런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4.3사건으로 인해 수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찰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산사람과 내통했다는 혐의에서 못벗어나 총살당했고, 오로지 살기위해 산중턱의 깊은 동굴에 숨어있다 발각되면 사살당해야만 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겨우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촌사람들에게 소개령을 내려 해안으로 내몰았는데 삶의 터전을 두고 무작정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은 또 빨갱이로 내몰려 죽임을 당했다. 4.3은 말 그대로 제노사이드였던 것이다.

그런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바로 당신의 무관심과 일부 편향주의자들의 역사왜곡으로 4.3의 영령들은 다시 한번 죽임을 당하고,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4.3을 단순히 남로당의 지령으로 인한 빨갱이들의 반란사건으로 규정하는 뉴라이트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새정부 인수위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지금 현재 4.3 위원회 폐지를 유보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여전히 4.3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제주도민을 옭아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백꽃 지다

그저 마음이 답답할뿐이다. 처음, 멋모르고 4.3 유적지 순례를 갔었던 때의 기억이 난다. 큰넓궤라는 곳을 들어가며 두 팔과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깜깜한 동굴 몇미터를 지나면 공터가 나오고,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또 공터가 나오던 그곳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는지. 마을사람 절반 이상이 끌려가면서 띄엄띄엄 신발을 떨어뜨려 행적을 표시해놨기에 살아남은 가족들이 겨우 찾아 먼길을 갔더니 웅덩이 하나에 수십명이 몰살당해 있더라는 산 중턱이 숲길은 또 얼마나 멀고 힘들었는지. 커다란 마을 하나가 완전히 불타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의 수풀은 역사의 아픔을 눌러 세월의 흐름만을 보여줘 얼마나 쓸쓸하던지.
서평을 써보기 위해 책을 뒤적거려보지만 다시 또 마음이 아플뿐이다. 증언들과 함축적으로 표현된 강요배 화백의 그림들이 역사적인 사실 안에 담겨있는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3을 겪지 않고 말로만 전해들은 나조차 이렇게 답답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들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서경식 선생의 추천사를 읽으며 또 한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여든을 넘긴 재일 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지난 해 제주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초대를 받고 단상에 올랐지만 '일본에서 비행기로 제주도에 왔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이 활주로 밑에 얼마나 많은 시신들이 묻혀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것을 생각하면...'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고 한다.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나 역시 그 눈물을 모른다. 4.3의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나는 진정 4.3에 대해 모른다.

"바다 가운데 일 점 산으로 솟은 탐라, 고려 시대 몽골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뒤로 탐라는 육지로부터 끊임없이 수탈을 당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착취와 탄압에 맞서 싸워 온 탐라 사람들의 전통이 바로 4.3 항쟁의 뿌리이다" (13)
4.3은 지역에 한정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삼별초 전투(18), 왜구퇴치(20), 이재수 난(22), 잠녀 반일항쟁(24)의 역사가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방이후 자율적인 사회운동체를 조직하고 교육에 힘썼던 제주도민의 공동체는 4.3의 제노사이드로 무너져갔다. 낮에는 해안으로 밤에는 산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내몰렸던 제주도민의 십분의 일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십년전에 이미 98년에 출판되었던 동백꽃 지다,를 읽었었지만 그 먹먹한 마음이 여전하다.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것을 한 장 한 장 강렬한 그림으로 표현해낸 강요배 화백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동백꽃 지다'의 그림과 증언들은 그냥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거나 4.3에 대한 책들 중 한 권으로 분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4.3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난 후 마음으로 동백꽃 지다를 봐야만 한다. 얼마나 큰 아픔이 있는지, 섬사람들이 육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성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수탈과 침략의 역사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제주동백은 강렬한 빨간색으로 활짝 피어난다. 그리고 활짝 피어 난 후, 사그라질때는 미련없이 툭, 하고 통꽃으로 떨어져버린다. 해산령을 받은 산사람들은 그렇게 동백꽃처럼 툭,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해마다 제주동백은 다시 강렬한 빨간 꽃을 피워낸다. 그처럼 우리는 4.3의 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고, 수탈당하지 않는 민중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하여 진정 평화의 섬,을 이뤄낸다면 미련없이 툭 떨어져 후손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4.3을 모르지만 4.3의 후예로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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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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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우리의 인식의 장으로 들어오는 즉시 낯선 책이 아니게 되며,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그 책을 꿈꾸거나 그것에 대한 토론을 하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호기심과 교양을 갖춘 사람은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한 번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일련의 이미지와 인상들을 떠올리게 되며, 이 이미지와 인상들은 일반교양이 책들 전체에 부여하는 표상의 도움을 받아 곧 최초의 견해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책을 그런식으로 극히 일과적으로 만났을 뿐 영원히 그 책을 펼쳐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독서자에게 그 만남은 진정으로 그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볼 때 처음 만나는 순간 곧바로 낯선 책이라는 지위를 잃게 되지 않는 책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33)

이 책을 열심히 읽고 난 후 리뷰라는 걸 쓰려고 하니 우습게도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고도 이 책에 대해 주구장창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뭐 주구장창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책에 대해 나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털어놓으며 소박한 잡담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꺼라는 얘기다.
사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독서가들 역시 이 책의 제목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슬쩍 보기만 해도 책을 읽은 나보다 더 유창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이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또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의 진면목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말하기 기술에 대한 책이 아니라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움베르토 에코의 평처럼 온갖 읽기 방식의 창조적 국면에 주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혹은 그의 희곡작품을 읽기 쉽게 문어체로 변형한 작품을 읽었거나 실제 연출된 극작품으로 봤거나 영화로 봤거나 그외 기타등등으로 접해본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그 누구나 햄릿의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독백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 한문장의 독백을 시작으로 우리는 햄릿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햄릿을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우리 모두는. - 누가 딴지를 걸지 모르니 '거의' 모두라고 해야할까?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햄릿'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또하나의 재미있는 - 특히 내게 해당되는 것이 많아서 - 문제제기는 책을 읽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그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지? 이 책에 그것이 나왔던가? 아니, 문제제기는 있었던가?
자, 과연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쩌면 내 글이 책을 읽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말장난같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런 문제제기들이 상당히 새롭게 느껴졌고 재미있다. (물론 '난 이 책을 읽지 않고도 생각했던 것들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리뷰를 너무 엉성하게 못쓰고 있다거나 혹은 그 모든 것을 이 책은 포함하여 서술하고 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글 읽기와 창조적인 글읽기, 읽어야 할 책 100권만큼이나 읽지 말아야 할 100권의 선택 역시 중요하다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한가지 웃긴 얘기를 덧붙이자면, 내가 쓴 리뷰를 누군가 '책을 읽지도 않고 제목과 목차만 보고 리뷰를 쓰는' 파렴치한(!)으로 단정했던,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때 나의 내공정도면 책표지만 보고도 리뷰를 쓸 수 있지 않냐는 댓글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걸 보면 이미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읽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내공을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책을 읽은 나보다 책을 읽지 않은 자가 나의 리뷰에 대해 그런 추측성 판단을 했던 걸 보면 독서가와 비독서가의 창조적 글쓰기를 비교할 때, 비독서가의 창작력이 아주 훌륭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진실한 글쓰기라는 것과는 별개다.
글을 쓰고나니 또 애매해지네. 책을 읽느냐, 마느냐... 결론은 뭐, 내 편할대로! 다만 우리 모두 '교양'머시기와는 상관없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내 편할대로 '리뷰'가 아니라 '페이퍼'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램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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