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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똑똑하다 - 오스본의 만화 미술론 카툰 클래식 13
댄 스터지스.리차드 오스본 지음, 나탈리 터너 그림, 신성림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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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자 가라사대 학자와 군자, 사대부가 인격을 수양하고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위해서는 미술에 열중해야 한다고. 미술은 인격 수양과 경건한 명상의 수단이었다(37)고 한다.
'미술은 똑똑하다'를 통틀어 - 물론 처음 들어본 이름들과 이론들, 들어는 봤지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론들이 가득 들어있음을 감안하고, 공자의 미술에 대한 언급은 생소하면서 참신하고 '미술이 뭐지?'라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런데 잠깐 정말이지 그런 의미를 갖는다면누군가의 말처럼 미술의 이론이 왜 필요하지? 미술에 대한 이론적인 이야기들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듯 목차의 첫번째가 나의 관심을 잡아 끈다. 1장 미술이란 무엇인가의 첫 꼭지. 누구나 나름의 미술 이론이 있다! 

미술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다. 그 옛날 모닥불피워 사냥을 하고 토기를 사용하던 석기시대의 조상들도 실용적이면서 멋을 부린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어 썼고, 건축물도 과학적이면서 조화와 균형, 아름다움을 총괄하여 지어내곤 했다는 것. 내가 아무리 멋을 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멋과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과 생각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나름의 미술에 대한 생각은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대명사라 불리는 비너스의 형상 역시 시대와 문화의 영향에 따라 아름다운 형상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처럼 미술에 대한 그 의미 기준도 달라지는 것일까? 

이 책은 대학신입생들에게 미술에 대한 여러 사상의 전개 과정을 소개하고 미술 제작 관행의 본질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이론들을 접하게 해 주기 위한 리처드 오스본과 댄 스터지스의 강좌 내용이다. 학생들이 미술의 역사를 형성하는 다양한 전통들과 개념들을 익히도록 돕기 위해 '미술' 개념의 전개과정을 역사적으로 개괄하려 노력했으며 동시대의 미술 이론만 알기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갖는 쪽이 낫다는 판단하에 각 시기별로 주요 사상가들과 주된 개념들, 가장 중요한 미술가들을 소개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사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진중하게 책의 내용을 먼저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대략의 흐름을 인지한 후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무작정 펼쳐보기부터 한다. 그런 성급한 경솔함으로 인해 이 책이 말 그대로 '오스본'의 만화 미술론인 줄 알았다. 오스본이라는 학자의 '만화'에 대한 미술론. 좀 어이없고 챙피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오해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의 시작은 그랬지만 책에 집중하고 읽기 시작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 고대부터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의 미술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기쉽게 설명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솔직히 예술서라는 것이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은 너무 솔직하게도 조금 어려운 이론이 나온다 싶으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말풍선으로 미리 달아놓는다. '장담하는데 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어'... 

하지만 그렇게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이 책은 시대의 흐름속에 담겨있는 미술 이론의 논쟁들을 꼼꼼히 다 언급하면서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들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어렵다기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읽을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러니 어찌 최고의 미술입문서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책을 읽기 전에 지금까지 읽었던 예술서와 미술사가 이 책의 간단한 내용들에 담겨있는 깊이를 느끼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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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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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과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것이었다. 내게는 생소하기만한 '강이천'이라는 사람에 대한 연구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 라는 그런 궁금증. 사실 사학자도 아니고 우리의 역사에 유별나게 관심이 많거나 정통해있는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역사 이야기가 재미있고 사회문화적 상상력이 재미있기만한 내게 이 책은 어떤 의미가 될까 하는 호기심어린 궁금증이 있었을 뿐, 18세기 조선후기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상식도 없는 내가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이 그저 단순함으로 책을 펼쳐들고 읽어댔다.

이름없는 불량선비 강이천과 당대 국왕 정조의 문화적 지배권력을 둘러싸고 벌인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이라는 말에 좀 더 현혹되기는 했지만 내가 이 연구서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목차와 내용에서 얼핏 보이는 정감록, 천주교라는 말 때문이었다. 제주 신축교난을 배경으로 한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으면서 국사시간에 어렴풋이 들어봤던 것 같은 정감록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정감록은 조선후기에 저변확대된 천주교와 더불어 조선 사회의 문화적 변동을 이끌었다는 것은 내게 생소하기만한 선비 강이천보다 더 관심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 책은 문학사조로서 소품문, 당시 기성권력을 위협하고 있던 <정감록>을 비롯한 종교, 사회운동, 반체제 문화운동으로 인식되던 천주교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1797년에 일어난 강이천 사건을 파헤친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소한 여러가지 사실을 새로 밝히는 실증적 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그 시대를 움직인 문화담론으로 새롭게 해석한 데 특징이 있다'
솔직히 저자의 강이천 사건 연구의 글을 읽는 동안 완전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객관적이라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도 이미 오랜시간동안 한국천주교회사를 익혀왔고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저자의 천주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쉽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강이천의 사회적 상상력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로 남겨둘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점점 더 궁금해지는 것은 왜 하필 강이천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와 그의 시각으로 당대의 사건을 재구성해보고 있는 것일까,였다.
'1797년의 강이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결코 하나일 수가 없다. 국왕 정조의 입장도 잇고, 그 사건의 주범이라 할 강이천의 관점도 있다. 강이천과 동지관계였던 김건순과 김려 형제도 그들 나름대로 이 사건을 다르게 인식하는 점이 있었을테고, 이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한 주문모 신부 또한 무언가 또 다른 시각이 있었을 것이다. 국왕 정조의 편에 서서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했던 조정 대신들의 입장도 그들 각자가 속한 정파에 따라 상당한 시각차가 없지 않았으리라. 이렇게 하나씩 따지면 그야말로 무수히 많은 관점이 상정된다.....동일한 사건이라도 각자 입장과 처지에 따라 그 사건의 의미와 여파는 천차만별이었다. 역사가인 나는 내가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강이천의 시각에서 1797년의 사건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강이천의 입장을 중시한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내 자신이 그의 행위에서 의미를 느꼈기 때문이다.'(373-379)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배운 우리의 역사는 왕조사중심이었을뿐이었다. 입시경쟁에 밀려 국사책의 온갖 내용을 암기하게 하고 역사적인 사건을 일일이 조사해 노트필기를 숙제로 내주었던 국사선생님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은 왕조사중심의 역사 이야기의 이면에 담겨있는 의미를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시곤 했었다. 역사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그 사실의 기록을 해석하는 여러학자들의 견해를 이야기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고 또한 문화적, 사회적 상상력을 갖고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사회문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하나의 사건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저자 스스로 이 책에서 강이천의 입장을 중시한 것이 객관적인 중요성보다는 그의 행위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역사속의 사건이 사실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또한 중요함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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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일
바르트 무이아르트 지음,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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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 그리고 또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새해 전 날. 단짝친구인 바르트와 베니는 베트예만의 오리를 훔치다 걸리게 되고,  훔쳐낸 오리의 죽음은 바르트의 가족과도 같은 개 엘머의 죽음의 원인이 되어버린다. 단순하게 두 소년의 장난이려니 여겨졌던 그 행동은 그들의 짧은 대화를 통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르트와 베트예만의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춘기 소년들의 장난이 초래한 엉뚱한 삶의 모험에 대한 확장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외로움과 상실감, 불안과 질투, 분노와 폭력이 뒤엉켜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분노, 그것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고 어머니와 동생 마저 빼앗으려는 그 자에 대한 질투와 분노인지 혹은 참을 수 없는 폭력에 대한 것인지 모를 증오가 있다. 순간적인 질투와 증오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이 되어 삶의 어느날에 대한 기록이 되어버린다. 1월 0일은 나의 그런 날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이 다 뒤엉켜버리고 있다. ...... 

짧은 반나절동안의 묘사만으로 그들의 긴 세월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그 기나긴 세월의 깊이를 알지 못하겠다. 아니,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그리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을 짧게 표현했을 때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는 그 누군가의 말에 수긍을 했었지만, 이제는 그 누군가의 말이 틀렸음을 안다. 그 누구도 무난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는다. 각자에게 자신의 삶은 언제나 선택이고 모험인 것이다. 자신의 삶의 길에서 슬픔과 후회, 외로움, 분노와 좌절, 불안을 느껴보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많다. 시간, 기억, 행동, 말...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삶도 그러한 것이다, 라는 말 한마디로 이 이야기를 정리해버릴 수 있을까?   

책을 읽은 시간보다 더 깊은 상념에 빠져버리고 있다. 가족, 사랑, 친구, 우정, 죽음, 폭력, 분노, 외로움, 상실감...
우리는 모두 어느 한순간 1월 0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것일지도. 아니, 지금 내 마음이 1월 0일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내 텅 빈 손과 텅 빈 마음이. 혹은 죽음과 외로움과 상실감과 분노로 가득찬 마음이. 

"높이 올라가는 별 하나를 보았다. 높이, 더 높이. 그러다가 사라졌나 싶더니 별안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신 더 높은 곳에서 터졌다. 별들이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웠다. 수백 개의 별들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헐벗은 나무들도, 농장도, 들판도, 우리들의 얼굴도, 베트예만의 등도, 그리고 오늘 자 신문까지도.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빛은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고, 빛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비춰주고 있었고, 빛은 생각지 못한 아주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 모든 것을 미처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일뿐.  

그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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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1-29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사진이 좀 섬뜩한 저 책, 요즘 많이들 보시네요.

chika 2011-01-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좀 독특하긴 하죠? ^^

책의 판형도 독특해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제목이예요. 원제는 '맨손'의 의미라는데 그것보다 우리말책 제목이 더 맘에 들어요. '맨손'은 본문에 한번 나오는데, 그것도 꽤 의미가 있긴하지만 그래도.
 
<마크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 - 당신을 속여왔던 대중문화 속 주인공들의 엉큼한 비밀, 개정판
마크 슈미트 지음, 김지양 옮김 / 인간희극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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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니 지금도 다시 보게 된다면 열광하면서 보게 되리라 짐작할 수 있는 저패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열심히 보던때가 있었다. 당시 소문으로만 전해듣던 에반게리온을 인터넷 동호회가 조금씩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어찌어찌하다 구하게 되고 만사 제쳐놓고 전편을 다 봤던 기억이 있다. 화질도 별로였고 가끔은 시커먼 화면에 인물들의 움직임이 제대로 안보이기도 했고, 나중에 알았지만 에반게리온이 사도를 먹어치우던 장면도 나는 그저 시커먼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반게리온을 엄청 좋아했다. 내겐 생소한 신화적 은유와 각 인물들의 심리묘사, 어쩌면 소년소녀들의 성장기를 보여주는 최고의 애니라고 생각하며 뒤편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더 심각하게 그 안에 담겨있는 뜻을 파악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에반게리온의 감독이 에반게리온은 그냥 즐기면서 보면 된다,라는 뜻의 말을 했다는 기사를 보고 순간 좀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냥 즐기면 되는데 왜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 라는 물음앞에서 나는 에반게리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흥겹게 랄라라 랄라라~ 노래부르며 재미있게 보던 스머프의 이야기를 접한 것도 그 즈음이었을까? 어디선가 떠돌던 스머프마을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좀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나는 이미 그런 말에 화악 넘어가 미친듯이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공산국가의 이상향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보여주는 초대그리스도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닮아있고,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사유재산을 취하려다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상향은 이상향일뿐이며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이상향에 가까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때문에 그저 흥미롭게 그 글을 읽고 넘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시각이 대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흥미롭게 느낄 수 있는 스머프마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대중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원저자의 의도가 담겨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자신의 사상과 문화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몫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대중문화를 읽는다는 건 옳다 그르다의 차원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문화'적 시각을 읽는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크 슈미트의 글들은 그런면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본적이 없는 섹스앤더시티의 글 같은 경우는 그냥 흘리듯이 읽었지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한국영화를 이야기하며 남북의 관계를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각이다. 사회주의 체제하에 있는 북한에 대한 남한의 원조를 더 싫어하는 건, 우리보다 오히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휴전선을 넘고 누군가는 두만강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와 일가친척없이 반평생을 넘게 살아오신 황해도가 고향인 우리 어머니이다. 간혹 저렇게 굶어죽어가는 사람들 중에 어머니 사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말하며 웃기는 하지만 그 애증의 시간들을 뛰어넘어 무조건 통일을 외치기에는 형제애같은 민족사이의 골이 꽤 깊다. 그러한 것들을 정확히 끄집어내는 마크 슈미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는 '마크 슈미트의' 대중문화 읽기인 것이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때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깊이있게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는 보편성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 안에 유일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대중문화에 담겨있는 뜻은 때로 심각하고 무겁기도 하지만 그 기본적인 문화의 소양은 즐거움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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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 고형욱의 영화음악 오디세이
고형욱 지음 / 사월의책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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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리 문화적인 혜택을 받으며 자라지는 못했다. 지역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자라온 환경의 문제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 영화를 보고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문화적 소양이 내게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한가지 분명한 건 내가 또래의 친구들보다 더 많은 팝음악을 들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한대수라는 가수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친구들에게 정말 멋진 음악을 들려준다고 집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와 그의 노래 테이프를 틀어줬다가 민망하게도 혼자 따당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던 기억도 있을만큼 우리집에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쉽게 접하지 못했던 음악들이 가득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것은 나와 나이차가 좀 나는 오래비의 취향에 따라 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노래를 들었던 것일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던 어린시절, 친구들이 너무 좋다며 떠들어대던 사운드 오브 뮤직이 뭔지 몰라 혼자 바보가 되었던 기억도 있다. 영화니 음악이니하는 그런건 내게 전혀 생소한 것이었고 나는 그저 영화와 음악을 따로 알고 있었을뿐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내게 있어 중고등학교 시절의 영화와 음악은 별개의 것이었고 대부분의 영화는 본 기억이 없지만 대부분의 노래는 즐겨 들었던 기억이 있을뿐이다. 

그런 내게 영화음악이라는 것이 마음을 쳤던 것은 언제였을까. 그건 아마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그 어정쩡한 시기에 친구에게 끌려 처음으로 봤던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영화를 봤을때가 아닐까싶다. 친구와 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것 때문에 조금은 흥분된 기대감(!)으로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그 영화가 그토록 유명한 영화였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당시 제작되어 개봉한 영화도 아니고 이십년도 더 옛날에 제작되었던 영화를 친구는 어떻게해서 보자고 하게 된걸까?
그 영화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만한 영화 '졸업'이었다. 그 영화의 내용과 몇몇 화면들은 확실히 우리에게 충분히 자극적이고 충격적이었지만, 내게 있어 그 영화를 기억할때 가장 충격적인 느낌은 '음악'이었다. 아주 어린 꼬맹이적부터 집에서 늘상 듣던 음악들을 영화속에서 들었을 때의 그 느낌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낯선, 낯설지만 너무나 유쾌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음악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익숙했던 노래들이 영화음악이었구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영화와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니 왠지 영화와 음악에 대한 이해가 더 쉬워졌다. 그리고 영화음악으로서의 매력도, 음악 자체로서의 매력도 넘쳐나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를 다시 뒤적거리며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날 친구들과 모임이 끝나고 비바람이 몰아치던 바닷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친구가 이런 분위기에서 들으면 정말 좋은 음악이라며 우리 모두에게 들려줬던 음악이 있다. 주위는 어둡고 밖은 비바람이 치지만 차 안은 고요히 흐르던 선율에 모두 말없이 음악을 듣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감동하며 보긴 했지만 그 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는데, 들었던 음악이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음악이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날 영화 사운드 트랙을 사기 위해 동네 음반가게를 들렸다. 그런데 영화 개봉 후 몇년이 지난때라 사운드트랙 앨범은 쉽게 찾을 수 없었고 며칠이 지난 후 다시 그 음반가게에 가서 앨범을 찾았더니 가게 쥔장이 음반구하기 어렵냐고 묻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듣던 시디를 꺼내 선물이라며 주는 것이다. 영화도 감동이었고, 친구들과 함께 듣던 영화음악도 감동이었고, 그 음반을 선뜻 선물로 주었던 가게 쥔장도 감동이었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음반가게의 단골이 되었으니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음악은 이래저래 많은 추억을 남겨준 것이다.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에 실려있는 수많은 옛 영화들과 음악은 때로 내 어린시절을 추억하게 하고, 영화를 본 기억은 많지 않지만 음악을 들었던 기억은 남아 내내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책의 부록에 나온 음반은 내 귀를 즐겁게 해 주었지만 듣고 싶은 모든 음악이 없어 왠지 아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음악과 영화 이야기들은 내 삶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책을 잡고 있는 시간동안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제 다 듣지 못했던 다른 영화음악들을 찾아 들으며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만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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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1-1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끝나도 영화음악은 남아있다-참 멋진 말이군요. 저는 영화보다 영화음악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완전 실감나요. 고등학교 시절 한밤에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은 꼭 챙겨들었어요. 닥터지바고의 라라의 테마도 좋았고 라스트 콘스트,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마음을 울리는 곡들이 많았죠...근데 치카님, 영화음악들을 찾아 들으면 즐겁다기 보다는 왠지 쓸쓸해져요. 센치해진다고나 할까? ㅎㅎ

chika 2011-01-20 09:09   좋아요 0 | URL
헤헤,, 다 쓸쓸한 영화음악들이잖아요. 스팅이나 황야의 무법자같은 영화음악은 좀 신나지않아요?
- 물론 저는 한밤중에 쉰들러 리스트를 듣는것도 좋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