낢이 사는 이야기 시즌3 1 - 참이슬처럼 여린 서른한 살의 나 낢이 사는 이야기
서나래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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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또 '낢'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른 때보다 더 기대가 되었다. 그것은 '참이슬처럼 여린 서른한 살의 나'라는 부제가 딸려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 남자친구와의 만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언제부터 낢의 이야기에 이렇게 관심을 가졌었지? 라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냥 후다닥 책을 펼쳤다. 만화가,라고 통으로 쳐서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지만 그래도 카툰작가의 연애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 충만으로 책을 펼쳐들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오류를 범할 새도 없이 그냥 낢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남의 연애사에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려고 하다가 그냥 낢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진다. 남의 연애이야기만 놀리듯 보려고 했다가 새삼 깨닫는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 '낢이 사는 이야기'인 것이다.

 

'참이슬'처럼 여린 서른한 살의 낢은 연애가 시작된 이야기인 달콤 쌉싸름한 어른의 맛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른의 취향, 어른의 기술이라는 장에서 그녀의 생활이야기와 추억을 통해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그녀는 어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중임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버리게 되는데 낢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어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미 오래전에 지나쳐 온 서른한 살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왠지 아직도 그만큼의 품격을 지닌 어른이 못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제 우연찮게 신부님 한 분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제 은퇴를 생각하며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시는 말씀에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부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안에 신자들에게 말로만 일을 시키는 신부가 아니라 직접 먼저 몸으로 실천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는데, 시골 본당에 계시는 그 신부님은 어느 신자분이 장애우들을 위해 써달라는 헌금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시다가 땅을 구입하셨다고 했다. 금세 써버리게 되는 돈으로 후원하는 게 아니라 땅을 구입하여 나무 묘목을 심어 그 나무가 자라게 될 즈음 또 다른 후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자연치유 캠프를 꿈꾸고 계셨다. 이런 계힉은 일이년이 아니라 일이십년의 계획이 세워져있어야 하는 것인데 은퇴를 앞두신 신부님께서는 본인이 묘목을 심는 것으로 시작을 하면 후배 신부님들이 그 성과를 거두어주리라 믿고 계셨다.

낢의 이야기와 신부님의 이야기는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른'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는 내게는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자세와 더불어 영혼이 없는 빈말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가 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상대방에게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조금씩 부모님이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들...

내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온 서른 한살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이야기 하나하나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물론 낢의 이야기는 심각하고 어렵지 않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재미있어 킬킬 거리고 웃다가 문득, 그런 생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중학생 시절 어른의 세계를 엿보고자 친구들끼리 술까지 사들고 집에 모여들어 '원초적 본능'을 보던 '어른의 세계'에 대한 시도는 시시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문득 낢이 나중에 엄마가 되어 외출 후 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의 아이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야한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 문득, 이런 것이 진정한 '어른의 세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낢의 이야기가 아직도 긴 사색의 여운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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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우르줄라 포츠난스키 지음, 안상임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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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었을 때 제목이 왜 파이브일까가 궁금했었다. 그저 단순히 독일 작가의 독일어로 출판된 책인데 설마 파이브가 영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정말 그 뜻이었다. 아마 독일어로 5가 뭔지는 모르지만, 파이브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의미여서 그냥 단순히 영어로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어쩌면 이 책은 제목대로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듯 해보이지만 의외로 깔끔하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지오캐싱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좌표 보는 것은 커녕 동서남북을 구분하고 지도를 살펴보는 것도 잘 하지 못해서 책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는데 지오캐싱을 전혀 모르더라도 책을 읽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오캐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흥미를 끌고 있는 지오캐싱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GPS를 이용한 보물찾기 같은 게임이다. 그리고 이 책 파이브는 그 지오캐싱을 소재로 잘 구성된 소설인 것이다.

 

어느 방목장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뒤로 손이 묶인 채 절벽 위에서 떨어져 사망한 듯 보이는 사체의 발바닥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문자가 문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베아트리체와 플로린 형사는 그 문신이 의미있는 것인지 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좌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것이 지오캐싱이라는 게임이며 범인이 남긴 하나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첫번째 좌표에서 캐시를 찾은 두 형사는 캐시에 넣어진 범인의 메모에서 다음 스테이지로 가는 좌표를 얻기 위해 범인의 수수께끼같은 메시지를 풀기 시작한다. 수십개의 성가대를 찾아내고 그곳에서 특정한 이름을 가진 성가단원을 찾고 또 그 가운데에서도 손에 점이 있다는 특징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좌표를 얻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캐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캐시통 안에는 잘린 신체의 부위가 담겨져 있고.....

더구나 범인을 추적하는 와중에 형사 베아트리체에게 범인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는데, 그 (혹은 그녀)는 베아트리체만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것인가? 그리고 왜 그런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사건의 개연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끔찍한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하고, 베아트리체는 자꾸만 '만약에'라는 가정이 떠오르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지우려 노력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죄책감이 그 '만약에'라는 것 아닌가. 요즘의 현실에서 더욱 더 그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파이브]가 단지 스릴러 추리 소설이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좀 더 심리적인 사건으로 접근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베아트리체와 범인의 두뇌싸움은 지오캐싱이라는 게임을 통해 보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긴장과 마침내 보물을 찾게 되는 희열이 맞물리는 느낌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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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 제주4·3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금숙, 오멸 원작 / 서해문집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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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 때문에 그 피를 머금고 자란 제주의 노란 유채는 빨갛게 피어났고, 한라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는 더욱 붉어졌고, 지천에 널린 조릿대가 불그스름하게 자라났었다는.

나는 어쩌다보니 제주 4.3 유적지 순례를 다니게 되었었고, 아직 철이 없던 그 당시 큰넓궤 동굴을 들어가면서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넓은 동굴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음에 신기해했을 뿐이었다. 밥 짓는 연기 때문이었다던가... 토벌군에게 발각된 동굴을 빠져나와 바로 앞에 있는 오름을 뛰어 도망가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번 달려보라고 했을 때, 농담처럼 시작된 그 뜀박질은 곧 절망감을 가져왔었다. 그 오름이라는 것이 야트막한 둔덕이었을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탁 트여있어서 어디로 뛰어 달아난다 한들 잡히지 않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처럼 실제로 그 동굴에서 생활하던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잡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영화 [지슬]은 알고 보면 볼수록 더 마음이 죄어드는 영화였다. 품고 있는 내용의 잔혹한 슬픔과는 다르게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지는 영상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동네에 살면서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는 모두 삼춘이 되는 괸당문화를 굳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거지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함께 나누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도, 이념이나 사상과는 상관없이 싸우더라도 뒤돌아서면 서로를 보듬는 이들이었는데.. 그런 공동체를 무참히 깨어버린 이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실 이 책은 제주 4.3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 본다면 저게 무슨 의미인 것일까, 싶은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볼수록 더 마음이 죄어드는 것이란 바로 그런 부분들이다. 그리고 몇몇 장면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물론 별다른 지식없이 본다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겠지만 수묵채색 한 컷에 담겨있는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제주 4.3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는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굳이 자막을 보지 않아도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제주도 사람인 나는 그들의 농담에 커다랗게 웃을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그들의 비참한 죽음 앞에 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4.3을 겪지 않아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세대여서 겁도없이 해마다 4.3이 되면 거리로 나가 진실규명을 위한 시위를 했었던것이 머나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금까지도 4.3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어르신들을 보면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영화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보이는 그래픽노블 지슬은 좀 더 담담하고 애잔하다. 영화가 아름다운 영상미와 제주도 특유의 사투리가 뒤섞여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을 줬다면 이 책은 하얀 여백에 스며든 그림들을 보면서 좀 더 차분히 4.3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그래서 영화를 못 보신 분들에게는 영화를 권해주고 싶고, 영화와 똑같은데 굳이 이 책을 봐야할까 라고 묻는 분들에게도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제주 4.3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상황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한 관객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아픔과 분노가 보복이 아니라 상생이 되어야 함을, 아니 섬사람들은 모두 상생의 치유로 평화의 섬을 만들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같지 않은 이 이야기들이, 이보다 더 가슴아프고 처참하게 짓이겨진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들의 삶의 이야기가 완전히 치유될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수묵이 번져나가듯 조금씩 스며들어 나오면서 한을 풀어내고, 우리 모두의 어루만짐으로 모두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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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페의 어린 시절
장 자크 상뻬 지음, 양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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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대부분의 경우 어른들은 그다지 진지하지 않아요. 당신도 눈치챘을 겁니다! 어른들이 정말로 진지하다면 세상에 그처럼 많은 비극이나 전쟁, 위기, 요컨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안그래요?"(137)

 

며칠동안 울컥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러했을 것이다. 여객선 세월호의 참사는 그 실체를 드러낼수록 이기적인 어른들이 저지른 비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뻬의 이야기처럼 그들이 진지했다면, 진지하게 모든 것을 점검하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뻬의 어린시절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려고 컴퓨터를 켜고 앉았는데 자꾸만 이 엄청난 슬픔이 밀려들어 맘이 편치않다. 어쩌면 내가 어릴 적에 봤던  꼬마 니꼴라의 유쾌하고 밝은 모습과는 대조적인 상뻬의 어린 시절 이야기 때문에 더 마음이 가라앉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 자끄 상뻬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때였나? 어린시절 책 한권 사 읽을 돈이 없어 서점에 갈 일도 없었고 내가 막내라 집에는 이쁜 그림동화책 한 권 없던 그 당시에 총천연색의 아스테릭스와 꼬마 니꼴라는 거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스테릭스는 내가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불어 원서였고 꼬마 니꼴라는 난생 처음 보는 판형에 글자만이 아니라 이쁘고 귀여운 그림들까지 곁들여져 있는 책이었기에 나는 종일 꼬마 니꼴라를 끼고 살았다. 책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질정도로 읽었던 그 책은 이사를 하며 짐정리를 하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지만.

꼬마 니꼴라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열린책들에서 장 자끄 상뻬의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했을 때 미친듯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책에는 온갖 해학과 유머가 담겨있고 귀여운 반전과 냉소가 담겨있고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는 즐거움이 담겨있다. 그냥 쓱쓱 그려댄 연필 선 몇개만 보이는 것 같은데도 어떻게 얼굴 표정 하나까지 다 다르게 묘사를 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되고 그런 세부적인 그림들이 모여 커다란 한 장의 그림을 보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스토리를 순간적으로 깨달아 웃음을 터뜨리게 되면 이미 그의 그림에 빠져들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기보다 오히려 불행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듯한 그의 이야기는 왠지 마음이 아팠다. 허세가 심했던 것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고 허풍과 거짓말이 심했던 것은 불행한 현실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세계를 꿈꾸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를 구입할 돈이 없어 교과서를 준비못했지만 전혀 주눅드는 일 없이 오히려 교과서 따위는 필요없어!라고 외치는 상뻬의 모습은 왠지 그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잘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의 그림과 글에서는 깊은 통찰력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상뻬의 어린 시절은 그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커다랗게 실려있는 수십장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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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난 who
꼬마비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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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이에 모두 꿈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도 꿈을 많이 꾸니까, 이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알 수 없어진 걸 거라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당신은 말을 잃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꿈에서 깨기만 하면 다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꿈에서 깨어나는 것일까. 내 꿈의 바깥에서 당신이 새벽같이 출근하고, 그 다음 새벽에 돌아오는 일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일까. 나는 죄스럽게도, 발칙하게도 가끔씩 두려웠다. 나는 꿈의 이쪽에서 꿈의 저쪽에 있을지 모르는 당신을 위해 매일 그래왔듯 기도했다. 당신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당신이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를" (폴링 인 폴, 229)

 

꼬마비의 '자꾸만꿈만꾸자'를 읽고 난 후 백수린의 '꽃 피는 밤이 오면'을 읽으니 나의 현실은 어떠한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애매한 의식의 경계선 어딘가에서 갑자기, 오늘이 월요일이면 지금 일어나서 출근준비해야하는데 난 지금 뭐하고 있지? 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두려움에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른다고 했으니 잠에서 깨어났다는 말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를 일어나게 한 그 생각이 꿈인지 무의식적으로 잠에서 깨어 내 의식에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는것이다.

꼬마비의 이야기에서 여자는 현실과 꿈의 교차점에서 꿈속을 택한다. 백수린의 이야기에서 그녀는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삶을 택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이렇게 단적으로 구분지어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두 이야기의 대비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두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나는 나 자신의 불안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것이 다 아이러니같지 않은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일까,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현실의 고통이 견디기 힘들어지게 된 것일까. 자꾸만꿈만꾸자,에서 현실과 반대되는 꿈속의 생활을 현실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그 어느곳도 완벽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함에도 그녀가 선택한 세상은 꿈속의 세상이다. 아니, 그녀에게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선망. 남과의 비교라면 모를까 스스로의 삶이 비교되는 삶. 꿈과 현실의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선택하고 싶어요. 영원히 깨어있거나 영원히 잠들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다는 것이 곧 또 다른 나를 죽이는 일이 될 지라도..."(연극이 끝나고 난 who, 74)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두 작가의 단편집에 실려있는 두 개의 각기 다른 단편은 서로 교차되면서 비슷하게 느껴지면서도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왜 나는 자꾸만 두 이야기를 같이 떠올리고 있는 걸까.

어쩌면 지금 나의 현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많은 것들이 떠오를수밖에 없고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과 피하지 말아야하는 현실이 겹쳐지면서 괜히 생각만 많아져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든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그와 그녀처럼 수영을 익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살을 헤치기 위해 두 팔에 힘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폴링 인 폴 248)

 

 

* 꼬마비의 연극이 끝나고 난 who에 수록된 <자꾸만꿈만꾸자>와 백수린의 폴링 인 폴에 수록된 <꽃 피는 밤이 오면>을 읽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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