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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랜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양철 지붕에 대하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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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몰락하여 가고 있다.
문화의 몰락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전쟁이 문화 몰락의 한 현상인 것이다.
왜 문화 몰락이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문화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철학이 무력하게 되고 그 영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로크, 스미드, 몽테스외외, 칸트 등이 벌인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이성에 바탕을 두고 윤리적인 이상을 구상했다. 그 이상은 철학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서 현실과 대결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철학은 여론의 지도자로서 인간, 사회, 민족, 인류, 문화 등에 관하여 근본적인 사색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가 되자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낙관론적인 셰계관은 엄준한 비판을 받기에 이르고 그 독단론은 무너지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위에 급속한 진보를 수행한 자연과학이 이 이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윤리적인 이상은 그 기반을 이룬 세계관을 잃게 되어 거지처럼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다. 철학은 전과 같은 활기를 잃고 세상에서 소원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원래 철학의 임무라는 것은 이성의 지도자가 되며 감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철학이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의 성과를 체에 걸러서 장차의 세계관을 위한 재료를 모으는 정도의 학문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항에 관하여 사색은 하지만 문화에 관해서만은 사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논리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데 도취하고있었다. 그러므로 그 세계관은 비낙관적이며 비윤리적이다. 그래서 설사 그 세계관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문화의 이상을 쌓아 올리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철학은점차 그 자신의 시대가 문화를 잃은 것조차 모르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문화 몰락의 원인은 철학이 무력하게 되고 사고가 그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뿐이 아니다. 그 원잉ㄴ으로서는 현대의 사회적 경제적인 상황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전체의 진보를 지향하는 이상이 개인에 의해서 생각되고 그것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 이상은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 형성되고 자유인에 의해서 일밙거인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은, 곧 생각하는 사람이며 자유인이 아니면 안된다. 여기에 자유인이란 생존경쟁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사람의 물질적 자유와 정신적인 자유와는 매우 밀접하게결부되어 있으며 자유인이 없는 곳에 문화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이 자유가 상실되어 왔다. 물론 기계문명이 가져온 물질적인 성과는 사람을 자연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한 사람의 수를 줄여갔다. 수공업소의 주민이 전락하여 일군으로 일하지 ㅇ낳으면 안되었다. 또 기업의 거대화는 농촌 사람들을 농지나 자연에서 끌어다가 도시로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농을 하여 도회지에서 부자유한 생활을 강제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신적으로도 큰 타격이 아닐 수없다.

그 다음으로는 정신을 활발치 못하게 한 것으로 과로를 들 수 있다. 현대인은 늘 바쁜 일에 쫒기는 결과 그 정신이 쇠퇴해 버렸다. 사람들은 격심한 근로생활 때문에 외면적인 위안을 요구한다. 교양을 요구하지 않고 오락을 바라게 되었다. 이제 현대인은 진지하게 자기 일을 생각하든지 책을 읽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거나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욱 나쁜 현상은 이들의 심리상태는 매스컴에도 영향을 주었다. 극장이나 신문이나 잡지는 독자에게 아첨하여 점점 그 내용을 저하시키고 잇다. 전에는 정신생활의 전당이었던 문화기관이 이제는 사회에서 정신을 추방하는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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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08-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바이쩌, 생애와 사상. 유풍출판사. 1981년 중판, 정가 1,200원.
다시 꺼내 읽고 있는데... 뜻밖에 세로쓰기다. ㅡㅡ;;
옛날엔 이런 작은 글씨크기의 세로쓰기를 어찌 읽었을까...라는 생각과 눈이 아프다는 생각에 빠져 책에 집중을 못하는 중. ㅠ.ㅠ
 

어느 여름날, 왕진을 나가기 위해 오고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느닷없이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살아남으려고 하는 내 생명은 동시에 살아나가려고 하는 남의 생명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다른 생명(생명이 있는 것)을 존중하는 그야말로 윤리의 근본인 것이다. 따라서 삶을 지키고 이것을 촉진시키는 것은 선이며, 생명을 없애고 이것을 상처내는 것은 악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이와같은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윤리관에 의해서 지배되는 곳에야말로 문화의 근본이 있다. 이와같은 원리의 회복, 이와같은 윤리에 의한 개인이나 사회의 개조, 그것이야말로 문화의 근본이 있다.
시바이쩌는 그렇게 결론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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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아가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땐
너는 많이 야위였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
내가 마지막 너를 만났을땐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

가끔은

시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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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리 2004-08-0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저 아주 좋아하는 데... 그리고 남편의 첫 컬러링이기도 했답니다. 제가 자주 듣고 싶어서요.^^ 노랫말이 아주 좋죠. 노래도 차분하고. 저는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이 부분을 특히 좋아한답니다. 이 노래의 여인은 어쩌면 불치병을 앓고 있나봐요. 왠지 가냘픈 모습이 연상되고 웃고 있다지만 슬픔이 노래말에서 베어나오는 것이 말이지요...

chika 2004-08-0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제가 대학다닐때 생일선물로 '제비꽃' 받고 싶다고 했더니 선배 하나가 서점에 가서 뒤지고 뒤져도 제비꽃책은 발견못했다고 했었지요.. ㅋㅋ 제가 책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책인줄 알았나봐요~ (근데 이 노래... 참 좋아요~ ^^)

미누리 2004-08-0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은 그 선배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네요... 그런 순정은 세월이 갈 수록 경험하기 힘든 것인데.*^^*

chika 2004-08-03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ㅑ ㅋ ㅑ ㅋ ㅑ ~
저희가 유난히 선후배 사이가 좋았거든요. 요즘 애들이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를 알까 몰라요~
 
 전출처 : 글샘 > 나무토막이 된 아이 -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읽어보세요

한 아이가 죽었다. 죽었다기보다는 갑자기 나무토막이 되었다. 특별히 말썽을 부리거나 못된 짓을 일삼는 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모를 기쁘게 해 주는 그런 아이도 아니었다. 언니와는 달리 성적도 시원찮아서 아예 큰 관심을 쏟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걸려 더욱 애절하게 나무토막이 된 아이를 붙잡고 제발 다시 살아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무토막에 두 눈이 생긴 것이다. 가만 보니 죽은 딸아이의 눈과 똑 닮았다. 그 눈으로 무언가 절실하게 말을 걸어온다. 옆집 아이처럼 쌍꺼풀이 진 예쁜 눈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직 나무토막일 뿐이지만 딸아이의 눈을 보자 죽었던 아이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쁜 마음에 밤새도록 눈으로 대화를 나눈다. 딸아이의 눈이 이렇게 예쁜지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부모의 마음은 다시 애가 타기 시작했다.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귀가 있어 이쪽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나무토막에 입이 생기고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말을 한다. 비록 나무토막이지만 딸아이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귓바퀴도 분명 딸아이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 간절함이 다시 하늘에 닿았는지 딸아이의 볼그레한 뺨이 돌아오고 봉긋한 가슴도 생겼다. 배꼽티를 입고 있어서 배꼽도 보였다. 늘 그것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싸움도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왜 배꼽티를 못 입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손이 돌아오고 발도 돌아왔다. 토실토실한 엉덩이도, 허리도 돌아왔다. 이제 나무토막은 없어지고 거기에 온전한 사람이 서 있다. 사랑을 나눌 수 있고 꿈을 꿀 수도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 말이다. 이 놀라운 기적에 부모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를 것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가 않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놀라운 기적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아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아 온다. 여전히 중간 이하의 성적을 받아 온다. 영어나 수학 문제를 푸는 머리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명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다시 살아났는데 이게 무슨 대수냐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의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지닌 몸과 생명의 경이로움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딸아이의 눈과 입술과 귀와 엉덩이와 허리와 손과 발은 더 이상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집 아이에게도 있는 너무도 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류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 옆집 아이에 비하면 딸아이가 초라해 보이기만 한다. 그 초라함이 자신의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딸아이에게 다시 미움이 돌아갔다.

바로 그날 밤, 딸아이가 다시 나무토막으로 돌아가 버렸다. 부모는 통곡을 하다가 가만 꿈에서 깨어난다.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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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학생에게 잘못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옳게 공부를 해야 한다.

교사의 일은 보석 찾기, 아이들 스스로 가슴 깊이 숨겨진 것들을 찾아 내어 그 휘황한 광채에 황홀해하는 모습을 보는 일, 그것은 교사에게 허락된 최고의 보람이자 즐거움이지만 학생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지 앟으면 불가능한 일

아이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죄다.

오늘 꽃이 피지 않았다고 내일도 꽃이 피지 말라는 법은 없다. 생명이 있는 한 따사로운 햇볕과 바람만 있으면 꽃은 피어나게 마련이다.

얼굴이 예쁘거나 성실한 아이를 귀여워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도, 교사라면 교육적 상상력으로 칭찬의 조건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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