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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하는 인간
강웅경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매체의 발달이 가져온 제일 큰 특징은 인간의 오감 중, 시각과 청각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점이 아닐까 싶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TV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흡수는 분명, 두가지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앞에 내세우게 한다.
감각하는 인간의 8편의 논문 중 4편에서 시각이란 용어가 제목안에 들어가 있는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나머지 4편도 시각을 제일 큰 비중으로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책 제목만큼이나 소재가, 지난해에 발간된 모든 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인간이 감각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사유또한 이제는 감각의 위에 서있어 보이진 않는다.
저자들의 시각을 읽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우 즐거웠다. 그들의 시각이 향한 곳을 조금이나마 같이 바라봄으로서, 인식의 폭을 넓혀준 것만은 분명하다.
일단 읽으면서 평소에 의문점으로 남아있던 사항에대한 저자들의 시각은 책 읽는 재미를 더했다.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1830-1904) 가 스탠포드 대학 총장의 요청으로 동물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일을 왜 했는지,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 1864-1901) 같은 화가가 경마장을 자주 찾으며 그림을 그린 이유에대해, 나름대로 곁눈질 해 볼 수 있는 시각을 전해주는 것이었다.(32면)
시각과 색체를 통한 르네상스의 작품 감상은 비록 흑백 사진으로 인해, 시각적 의미전달이 절름발이가 되었을지언정, 텍스트의 의미는 분명 새길만하다.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을만큼 인터넷이 발달했으니, 아쉽지만, 노력해서 찾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항상 소설에대해 분석한 글을 읽을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정말 소설가들은 평론가들이 분석하듯 거기까지 생각해서 글을 썼을까? 라는 점이다. 사실유무를 확인하기위해선 작가를 직접만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게 제일 좋겠지만, 실제로 만났다고 사실을 이야기해줄 작가는 드물것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고정된 텍스트로 읽히기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독자마다 다른 느낌을 주길 바라는, 작품에 있어선 분명 욕심쟁이들이니까. ‘탁류’의 시대를 읽는 시선은 분명 도움이 된다. 식민지에대한 사고는 주석7 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본질에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기엔 시대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읽는 내내 즐거웠다. 왜냐하면, 글속에서 드러난 저자의 시선이 매우 익숙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속에서 또 다른 저자(이득재,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의 시선을 독자인 내가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교감이 저자와 독자 사이 이외에도 제 3자의 시선이 함께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첫 체험이었다.
고대 철학자들에 관한 글을 볼 때면, 2500년 정도의 세월은, 인간의 정신적 진화나 발달이 이루어지기엔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곤 한다. 이 논문은, 두번째 육체적 이미지를 다룬 논문과 함께, 저자들이 요구하는 독자의 교양이 제일 높지 않나 싶다. 이젠 정말 정신병자 화가 자화상의 전형이 되어버린 인물 고흐(Vincent van Gogh, 1853 -1890) 가 아닌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를 다룬 것은 분명 신선하다. 인간의 육체, 병리, 그에 대한 표출이라는 소재자체는 서양의 전통적인 영혼을 집어삼키는 예술의 승화에 대한 분명 좋은 소재임엔 분명하다. 다만 무식한 독자가 감히 조금이나마 느낌을 말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아르또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그의 정신병 치료에 쓰였던 그림이 가지는 의미 분석이 얼마나 실지적으로 유용한지에 관한, 의미 파악이 어렵다는 점이다. 수많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논문이 대부분 플로베르의 작품을 다 읽었다는 사전 전제위에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역시 독자의 무식이다. 좀더 두고 볼 논문이다.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BC 270) 에 대한 논문은, 아르또와는 조금 다르다. 단 13장안에 한 철학자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담아내었기에, 반복적인 독서가 필수불가결이다. 다만 에피쿠로스가 결정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귀가 솔깃 해졌다. 분명히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에 관해, 이책에서 느낀점을 조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에피쿠로스는 순간적 쾌락이 아닌, 지속적인 쾌락을 바란것같다.(글 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것인지 발견치 못한 독자의 착각인지 모르겠기에 단정어법을 피했다),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중요시하는 에피쿠로스의 관점은 분명히, 영혼의 안정을 통한 지속적인 쾌락을 희망한듯하다.
영혼의 안정을 목표로한 에피쿠로스는 감각의 지배아래 ‘인간의 인식’을 두고 싶어했다. 절대적인 초월자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존재다. 또한, 절대적인 초월자의 인정은 윤리적으로 굉장히 골치아픈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인간의 노력 즉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신에의해 결정된 미래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바꿀수는 없다. 사람을 죽였다고 책임을 인간이 질 이유가 없어진다. 이미 신은 미리 그일을 태초부터 알고 있었고, 피조물의 자유의지완 상관없이 사람을 죽이게 운명지어져 있었던 것이니, 피조물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에피쿠로스는 신을 부정함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윤리학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사회는 물질만능의 시대다.(10년전에도 그런말을 귀에 따갑도록 들었지만, 21세기의 현재가 더더욱 물질 만능에 빠져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대의 쾌락은, 어떠한 주제보다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될 위치에 놓여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쾌락을 연장시키려 노력한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돌아보라.
영화(시각,청각), 음악(청각), 음식(미각), 운동(촉각), 향수(후각) 등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화활동은 오감을 통해, 우리의 쾌락을 연장시키는 도구들이다.
다른 감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이상학적 감각이라는 대우를 받고 있는, 시각과 청각은 육체적 쾌감보다 정신적 쾌감을 연장시키는 역활을 한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에대해 어느시대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쾌락에 정신과 몸을 맡기고, 영혼의 안정을 찾을 것인가?
매력적인 화두다. 특히나 현실적인 평안 행복을 종교를 통해 찾으려는 사람들에겐,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가져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제거’와 감각주의적 인식론은 거부감이 없지않아 생길 수 있다.
현재. 인간의 자연을 다루는 솜씨는 너무나 진보해서, 신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일인 창조의 비밀을 분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환경의 파괴는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라는 소재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재난영화 라는 장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영화속 현실이 스크린을 벗어나는 것도 시기의 문제이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논란이 될 차원의 문제는 이미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을 지배하고, 신을 부정하고, 정신과 육체의 두가지 쾌락을 동시에 손아귀에 쥐려하고 있다.
저자가 지금 에피쿠로스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안녕된 삶을 위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겸손과, (독자의 시각에서) 신에 대한 겸손이 필요한 시기임을 에피쿠로스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어서 나머지 세편은 쉽게 읽힌다. 에피쿠로스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를 통해, 육체로 가자고 주장하더니, 마지막 두 편은 실제로 육체를 다루어서 참 쉽다. 물론 쉽다고 해서, 그 시각이 다른 시각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과 남성의 육체를 통한 담론은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아쉬운 것은,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르네상스의 시각’ 이란 논문과 마찬가지로, 그림이 흑백이라는 점이다. 금발머리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는 저자와, 그것을 상상해야하는 독자 사이의 시각적 괴리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외국 대학의 출판사들을 보아도, 대학 출판사가 이익을 내기 어렵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양질의 책을 내지 않는다면, 나서서 출간할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면에서, 지금까지 책을 내온 대학 출판사의 경우. 시각적 이미지가 결여된 활자만으로 이루어진 책들이 주류를 이루어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서투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좀더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서라도, 수익을 위한 책 자체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의미에서 출판사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