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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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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 이른바 돈 많은 부잣집의 자제로 태어나 (경제적) 부족함 없이 살고 있음을 비유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부러움의 의미를 품고 그렇게 이야기한다. 나라고 다를까. 은수저 물고 한 번 태어나봤으면 어떨까. 허구 한 날 노동에 짓눌려 보낸 날이면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 그 말, 참 흉포하다.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구조화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일까. 그렇다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대부분의 우리는 맨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평등에 쉬이 분노하는 것 같지만, 깊은 불평등, 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해선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 우리다. 고작해야 새치기 당할 때 눈을 부라리고 목청을 돋우는 게 고작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보니 불평등은 나름 정교하게 직조된 구조물이다. 인간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입한 협잡의 산물이다. 이 책은 명확하게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부터 불평등하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프레임이 경쟁과 질서였다. 피라미드 구조가 그것을 대변한다. 위로 향할수록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피라미드는 사회적 위계를 구조화했다. 불평등을 감수하도록 만든 셈이다. “반대와 저항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실패에의 투항과 체념의 고통을 견디기 쉽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도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 엄청난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든다. 요컨대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고 심화되는데 이바지한다.”(p.88)

 

삼성의 이건희는 과거에 말했다. 1명의 천재가 1만 명(수치는 정확하지 않다!)을 먹여 살린다. 과격하게 말해서, 소수의 능력자에게 다수가 매달려 뒷받침해주고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라는 계시(?). 소수의 능력자와 다수의 비능력자로 세상을 단순 구획하는 발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것 또한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다


그 결과, 우리가 당면한 것이 격차사회. 인류 역사상 이렇게 격차가 커진 적이 없었다. 책이 수치로 제시한 부분은 놀랍다. 그렇게 경제성장 지상주의로 밀어붙이건만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낙수효과(트리클 다운)는 없다. 빈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져가는 현실이다.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 계몽주의 시대, 더 나아가 헤겔이 살던 시대까지만 해도, 지구상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빈곤한 지역의 두 배 이상인 곳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최고 부국인 카타르의 1인당 소득은 최빈국 짐바브웨의 428배에 이른다.”(p.10)

 

그럼에도 그 불평등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기한다. 책을 읽자니, 우리가 현실적이라는 이름 앞에 얼마나 무릎을 꿇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부정의의에 대한 교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셈이다. 현대판 미신이다.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조장한 주입식 세뇌작업! 그 믿음은 의외로 단단하다. ‘현실성이 없다라는 이름으로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는 능력을 잃게 만들었으니까. 상상하지 못하는 질서에 갇힌 세계의 언어적 표현이 현실감이다. 바우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 장애물들의 저항이 강할수록, 장애물들은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p.41)

 

대중을 쉽게 현혹했던 피와 인종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나치가 공식적인 국가관으로 구현했다면, 불평등은 신자유주의가 공식적인 경제관으로 확립시킨 것이 아닐까.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정당한 근거가 없음에도, 이 허튼소리는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자리매김했다. 인간의 힘으로 맞서거나 바꿀 수 없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가 됐다. 어리석은 일반화다. 악랄한 조작이다. 인류가 전쟁을 피할 수 없고, 억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궤변과 같은 맥락이다.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 맞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단정의 근거에는 인간이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정부가 행동에 나서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는 헛소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불평등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로 정부는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다. 더 나아가 자본의 헛소리 영역은 정부조차 무력하게 만든다. 전쟁이든 불평등이든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릇된 미신이 가져온 부당한 믿음이다.

 

불평등 불감증에 걸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 여럿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질문이 아닐까. 불평등을 이대로 감내한 채 그릇된 미신에 종속돼 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GNP(국민총생산)GDP(국내총생산)의 수치에 배제된 부의 배분 방식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토록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풍요로워졌다는 세상에서 나는 왜 배제됐는가, 물어야 한다. 소수에게만 부가 편중되는데, 나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은 왜 자꾸 떨어지는가, 질문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믿음을. 사람들은 바로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옳은 결론이다. 그리고는 이런 종류의 세상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결론짓는다. 잘못된 결론이다.”(p.47)

 

각종 경제위기 상황에서 더욱 창궐하는 긍정주의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 지긋지긋한 긍정 찬가는 모르핀이다. 불평등에 대한 거짓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긍정의 힘을 설파한다. 불평등 때문에 터질지 모르는 분노의 뇌관을 잠재우기 위함이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되레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기이한 현상


그것을 깨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불평등에 희생당하고 있는 우리의 질문과 성찰이다. ‘슈퍼 갑의 사회를 깨뜨리는 출발은 을의 성찰이다. 바우만은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권한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할 것. 책의 제목처럼 우선 질문하자. 회의하자.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우리의 불평등 불감증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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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풀리지 않을 오해를 안고 무덤에 있는 여자가 있다.

그 오해는 어떻게든 끝끝내 지속될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오늘 커피수업 하면서, 커피 내리면서, 커피 마시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그 오해, 그녀가 하지도 않은 말 때문이다.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그 말, 앙투아네트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거의 모든 것이다.

허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말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를 단두대로 몰아낸 자코뱅당이 자신들의 공포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http://swingboy.net/532


10월 16일은 그녀가 붉은 피를 쏟으며 사라진 날(1793년)이자, 

세계 식량의 날이다. 


재밌는 우연이다. 또 흥미로운 우연이 덧붙여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의 류이치로 교수에 의하면,

앙투아네트는 카페(살롱)문화와 커피 보급에 힘을 쏟았다.  

 

 

이유가 있었다. 커피를 좋아해서라기보다(물론 진짜로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프랑스 귀족층의 커피문화를 이끈 뒤바리 부인(바리 백작 부인) 때문이었다. 앙투아네트, 문화적 소양을 높이 평가받은 뒤바리 부인을 따라잡고 싶었다. 


그러나 카페와 커피 보급에 힘을 쏟은 앙투아네트의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날아왔다. 그 카페에 함께한 계몽 사상가의 연설에 카페 시민, 카페 대중은 절대왕정에 맞서는 시민의식을 키웠다. 


아뿔싸, 그녀의 신분과 지위를 위태롭게 할 자양분을 그녀 스스로 북돋은 것이다! 어쩌랴. 그것이 역사의 운명인 것을. 그녀가 물을 준 커피와 카페는 시민계급 형성에 윤활유가 됐고, 마침내 시민계급이 추동한 혁명은 그녀의 목을 날렸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가 내리고 수업했던 커피는 역사의 쓴물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의 커피. 

갑자기 추워진 가을 날씨는 그녀를 기억하라는 신호였을까. 

식량과 식품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라는 계시였을까.  


여전한, 그리하여 영원히 봉인될 악플에 시달릴 무덤 속 앙투아네트의 눈물은, 또한 여전하며 영원히 구조적 불평등에 시달릴 식량 분배의 문제는 커피를 통해 흘러내린다.  


다시 반복하고 상기해보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하지도 않은 말)에 대한 악성 댓글이 프랑스대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문제가 아닌 부르봉 왕가의 사치와 부패가 곪고 곪아서 터졌다. 1%의 문제였다. 


식량의 문제는 곧 생존이며, 이것은 당면한 현실의 문제로서 저항의 불씨를 지펴야 한다. 1%만 배부른, 99%가 굶주리는 신자유주의·금융자본의 탐욕의 도가니가 인민들의 봉기를 돋는다. 혁명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던 커피는 초거대권력이 된 자본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니, 없을 것이다. 자본은 또 다른 모습으로 세습화될 것이니까.  


나는 오늘 '마리 앙투아네트'의 검은 눈물을 뽑고 마셨다. 

내일(10월 17일)은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더 춥단다. 

식품정의를 생각한다. 좋은 커피, 함께 마시고 싶다. 

바로, 당신과 함께. 가을밤에. http://www.wisdo.me/3796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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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 수업 - 친절하고 재미있는 강의실 밖 건축 이야기 썬 시리즈 1
권선영 글.그림 / 컬처그라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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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수업이다.

책을 보면서 함께 걷고 바라보았다.

아, 눈앞에 건축물이 펼쳐졌고, 그 건축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물론 그것을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에 즉자적으로 감탄하고 놀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 그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당장 볼 수도 없는 것을 내 마음의 눈앞에 끌어들이는 일.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이 지닌 미덕이다.


이런 다정한 책이라니. 덩달아 건축수업을 받은 것 같다.

나도 건축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이며, 건축과 공간이 삶에 깊이 삼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삶을 반영한다. 삶은 건축에 의해 움직인다. 당대의 욕망과 시대정신, 이데올로기, 배경 등을 담는 것이 또한 건축이다. 그러니 건축가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공간을 축조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에겐 ‘건축주’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 좋은 건축을 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진행된 썬의 건축수업은 빤하다. 그런데 그것이 외려 성공적이다.

건축 초보자 혹은 건축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겐 그 빤한 것이 부담도 없고, 가뿐한 마음으로 따라가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샤를 할아버지의 다정한 속삭임이, 직접적으론 건축을 말하지만 곧 삶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썬에게도 좋은 충고이자 위로가 됐겠지만, 훌륭한 건축가의 조건에 대한 샤를 할아버지의 말은 모든 좋은 것을 향한 충고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이 건축도 남들이 시키는 일을 잘하기보다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세상에 펼칠 수 있으면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거란다.”


그리고 편지에서도 그것은 강조된다. “앞으로 주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든, 기죽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렴. 그게 항상 정답이란다. 영웅은 남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길을 떳떳이 가는 사람이야. 너도 네 인생에서 영웅이 되렴.”(p.287) 이 빤하고 흔한 말이 열한 번의 건축수업에 동행한 나에게도 찡한 감정을 안겨줬다.

그 다정한 건축수업이 아녔다면 느끼지 못할 감정이었으리라.


건축이 좋아서 원래의 전공을 때려 치고 파리로 건축을 공부하러 간 썬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고 시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

그러나 현실은 그 열망과 정반대로 향하거나 심지어 짓누르기 일쑤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영웅 서사에서 그건 말도 되지 않는 행위니까.


소박한 영웅 서사를 차용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건축에 대한 거리감을 줄여준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건축이었다면 좀 더 실감나고 더 거리감을 좁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건축후진국 한국에선 흔히 만날 수 없는 건축물에 대한 일러스트까지 곁들인 세심하고 쉬운 접근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내겐 글로만 접했던 현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의 속살을 보여준 점도 고마운 점이다.

특히나 건축적 산책. 그 시적인 공간을 걷고 만지고 싶었다. “‘공간을 산책한다’는 의미로, 미로같이 복잡한 내부구조를 뜻한다. 공간 내부가 한눈에 파악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다닐 때마다 시야가 바뀌는 공간구조이다.”(p.69) 아, 생각의 산책을 유도한다. 공간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만든다면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생각 패턴을 만든다.


그러니 좋은 책은 상상하고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다.

당연히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이 그렇다는 말이다.

《르 코르뷔지에》를 쓴 일본 건축가 도미나가 유즈루의 언급은 그런 면에서 내게 새로운 건축적 사유를 촉구한다. “건축은 공간 예술이지만 회화나 조각과는 달리 한 번에 파악되지 않고 음악처럼 운동에 따라 잇달아 일어나는 시간 예술이다. 시점의 이동과 함께 습득되는 현상이다.”


잊지 않기 위해 쓰자면, 오스마니앙 건물.

내가 아는 공간의 이런 건물이 떠올랐다. 파리 건물 대부분은 오스마니앙 스타일이라고 했다. 1850년대 오스망 시장이 파리의 도시 설계를 새로 하면서 지은 양식인데, 내가 아는 그 공간의 이런 구조가 궁금했었다. 유럽에서 볼 수 있는데 내 주변의 누구도 이것이 어떤 양식인지에 대해서는 몰랐는데, 그 궁금증이 풀렸다. 다 이 책 덕분이다.


한국, 특히 서울에 살면서 가장 큰 불만족의 하나가 미감(미적감수성)이다. 도대체 이 도시엔 그런 미학이 없다. 흉측한 건축(물)이 주는 혐오감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적감수성을 다치게 할 뿐이다. 우리네 삶이 이렇게 강퍅하고 비루한 건 건축에도 분명 책임이 있다.

그저 높고 번듯하게 지으면 다 되는 줄 안다. 랜드마크는 또 어디서 들어서 그렇게 남발해대는지. 중요한 것은 건축과 삶(생활)의 조화다.

주위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가.

“할아버지는 건축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위 환경을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 건물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 잘 안 어울릴 경우 어떤 요소 때문인지, 그 요소가 결국 그 환경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지. 하여간 살펴볼 것들이 많았다.”(p.95)


이 책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는 건축은 곧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는 사람은 물론 방문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갈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썬의 깨달음은 나의 것과 일치하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의 이 말을 새긴 이유다.

“건설의 목적이 건물을 지탱하는 것이라면, 건축의 목적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다. 건축은 조화의 문제이며, 그것은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샤를 할아버지도 덧붙인다. “건축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야.”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분명 적용되는 지점이 있다. 마시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 감동시키는 것. 커피나무를 자라게 하는 대자연과 만물의 순환, 모든 커피노동에 관여하는 노동자들이 빚어낸 육체와 정신의 조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리라.

좋은 건축가의 의도가 빚은 건물에서 맛있는 커피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과 커피의 조화. 얼마나 향기롭고 감동적인가.


그리고 뭣보다 빛. 빛이 절묘한 화음을 연주하는 곳이면 좋겠다.

빛의 사용이 아주 특이하고 흥미롭다는, 르 코르뷔지에가 거의 마지막으로 설계한 건축물이라는 롱샹 성당이 가고 싶어졌다.

샤를 할아버지는 썬을 롱샹 성당에 데리고 가면서 훌륭한 음악회에 데리고 가겠다고 말을 했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빛으로 작곡한 교향곡, 롱샹 성당을 방문한 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공간 역시 빛으로 작곡한 교향곡이 흐르는 곳이면 좋겠다.

커피는 자신 있으니, 그 교향곡만 갖춰지면 된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자, 당신을 초대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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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월 9일. 

Che를 내리는 시간. 

혁명 품은 쿠바 커피. 

46주기를 맞은 나의 리추얼.


詩月은 그렇게 혁명이 스러진 계절이다. 

작정하고 붙잡지 않으면 그만 쉬이 놓치고 마는 계절처럼 혁명도 마찬가지.



그래서 Che는 詩다. 가능성만 영원히 봉인한 채 상상으로만 가능한 詩.

내가 사랑하는 몇 안 되는 남자 체 게바라의 46주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커피를 내리면서 詩를 떠올리는 일. 혁명이 미국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세상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체의 죽음은 이듬해 68혁명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나의 커피에는 그런 시적 상상이 함께 담긴다.  


벤세레모스(venceremos). 

10월 9일 내가 내리는 쿠바 커피의 이름이다. 당연히 내가 붙인 이름이고. 



체 게바라, 편지 말미에 늘 이렇게 썼다. 

조국이 아니라면 죽음을 (Patria o muerte)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Venceremos)

- 사령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Comendero Ernesto Che Guevara)


벤세레모스, 이 스페인어의 뜻은 이렇다. 우리 승리하리라. 

글쎄, 체는 승리를 확신했을까. 확신 여부는 물론 중요하지 않다. 

나는 체가 미국의 패악질이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니 아마도 그 승리,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체는 그럼에도 그렇게 뱉으며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패배를 향한 숭고. 

나는 그 비관적 절망의 정의를 담아 벤세레모스 내려드린다. 혁명의 피 같은 커피를.


벤세레모스는 여러 차례 언급도 했지만,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노래, 세계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잡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1970년 인민연합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 사용됐다. 아옌데는 그러나 1973년 미국의 꼭두각시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로 9월 11일 목숨을 잃었다.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벤세레모스 커피에 역시 혁명의 피가 묻은 이유다. 


詩月엔, 커피와 혁명과 詩가 있다.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운 당신이 있었다. 가능성만 영원히 봉인한 채 상상으로만 가능한 당신이라는 시 詩. 그해 시월에 당신이 왔고, 커피가 왔고, 시가 왔고, 혁명이 갔다. 

나의 영원한 벤세레모스. 밤9시, 당신만을 위해 내린다. 



커피 방앗간


그녀가 빻아 내리는 커피 속에는

굵은 무쇠 바늘 지나간 길이 있다

한 땀씩 건넌 자국 위에는

시린 봄을 건너는 탱자나무 검푸른 가시

칼날 세우는 소리와

봄 사과나무 창으로 드는 바람 소리

사랑을 잃은 여자들의 눈물방울이 맺혀있다

 

매운 시간을 건네는 소리들 소복 스민 커피 호로록

호로록 마시다 보면

겨울 소포 같은 두툼한 누비 바다에

가만히 능선을 넘어가는 발자국 소리와

늦은 자국눈 내리는 소리 비쳐든다


겨우내 살브랑살브랑 낮은 햇살 드나든

이 오지그릇 속에도 봄이 와

곱게 4월의 문을 열어놓는 집

빗살무늬 볕살 비껴 내리는

햇살 좋은 그 집


- 김만수 詩集, <바닷가 부족들>중에서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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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굿 닥터>인데, <배드 닥터>가 됐다. ㅠ.ㅠ

왜? 심장 터져 죽을 뻔 했으니까! 


차윤서(문채원)의 가을밤 고백, 심장이 그만 퍼펑~ 하고 터져 버렸다. 


시온(주원)이는 좋겠다. 그건 '기적'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것, 세상에 그만한 기적은 없다. 


아, 둑흔둑흔 빠담빠담 <굿 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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