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캠프 4회] 아파트에 층간소음 문제가 다야? : 아파트공화국 No! 아파트공동체 Yes!! (11/7 저녁 7시30분, 서울시청 9층)

 

서울 곳곳에 마을공동체가 움트고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한데 모여 수다를 떨고, 함께 몸을 부대끼며, ‘따로 또 같이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모든 순간이 지금의 서울을 만듭니다. 서울시(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가 그 다채로운 현장을 공유합니다. 

서울 곳곳의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다과도 즐기는 가을밤 수다에 초대합니다. 

마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어 보는 건 어떠세요? 

(참가신청 : 무료, http://www.wisdo.me/4031)

 

아파트는 애초 공동주택이었습니다. 공간뿐 아니라 삶과 생활을 공유하는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곳이었죠. 그러나 강준만 교수의 표현처럼 지금, 한국 사회의 아파트는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공동’의 것보다 ‘사유(혹은 소유)’의 문제에 더욱 집착합니다. ‘사는(living) 곳’이 아닌 ‘사는(buying) 것’으로 전락한 아파트의 풍경에 자리한 층간소음 문제도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죠. 

 

1979년 전국 주택의 5.2%였던 아파트는 지난해 47%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이사 가고 싶은 주택 유형 1·2위에 ‘고층 아파트(50%)’와 ‘중저층 아파트(13%)’가 올랐습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아파트에 푹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의 삶과 생활을 규정하다시피 하는 아파트에서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파트 공동체는 가능할까요? 

 

 

도봉구 한 아파트에서는 층간소음 문제를 엽서 보내기를 통해 해결하고 있습니다. 편지보내기를 통해 매달 74건이던 층간소음 민원이 21건으로 줄었다고도 하네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을 꺼버린 시대, 아파트를 다시 사유해야 할 이유에는 ‘공동체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도와줄 분들이 여기 있습니다. 

 

● 박해천 (《아파트 게임》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 저자)

디자인 연구자로서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을 통해 한국의 시각 문화를 고찰한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등을 펴냈습니다. 아파트라는 창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경험과 욕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사유합니다. 아파트를 통해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 파크리오맘 (송파구, 임유화)

송파구 파크리오아파트에선 공동체적인 활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육아 정보를 공유하려는 여성들이 ‘파크리오맘’이란 인터넷 카페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어 생활정보 등을 공유하고 다양한 소그룹모임과 아카데미 강좌, 벼룩시장과 자선음악회를 통한 기부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지금의 서울살이에 어떤 의미이며 우리의 생각과 생활이 어떻게 묻어나고 있을까요? 
아파트 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을까요? 
11월 7일(목) 저녁 7시 30분 서울시청 9층 하늘광장에서 
‘[마을캠프] 마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네 번째 시간 <아파트에 층간소음 문제가 다야?>을 통해 확인하세요. 

(참가신청 : 무료, http://www.wisdo.me/4031)

 

※ 사정상 일부 변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전상인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는 한국 사회를 ‘평등 사회’라고 말했습니다. ‘평’은 흙 토(土) 자가 붙은, 즉 아파트 평수를 말할 때의 평(坪)이고요. 등은 같은 한자이지만 반 석차를 말할 때의 등(等)입니다. 한국은 아파트 평수와 자녀 석차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이죠. 그것에 차츰 지쳐가는 우리는 아파트공화국이 아닌 아파트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하면 될지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을 뒤집는 일, 어렵지 않습니다. 사소하게는 계절 꽃을 행인이나 다른 거주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놔두는 것에서도 가능하거든요.  

 

“일반적인 도시 공간의 환경 수준을 아파트 단지와 별 차이 없는 수준으로 개선하는 것도 중차대한 과제다. (…) 동네에 공원을 늘리고 도서관을 늘리는 일, 보육 시설, 노인 복지 시설, 생활 체육 시설을 늘리는 일은 시민 복지를 향상시키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아파트 단지 공화국에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아파트 한국 사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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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2013-11-0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뽀로로 뽀통령이 전하는 아파트 층간소음예방캠페인 사뿐사뿐 콩도 있고 가벼운 발걸음 위층 아래층 모두모두 한마음 기분까지 서로서로 좋아하는 너도좋아 나도좋아 나비처럼 가볍게,뛰지말고 모두함께 걸어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나오는 아파트 층간소음방지에 도움주는 두꺼운 슬리퍼하고 층간 소음 줄여주는 에어 매트도 전부 다 있으며 앞으로 이사를 갈 땐 반드시 두꺼운 슬리퍼를 구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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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인디언 아라파호 족은 이달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거의 한 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요기 베라의 말도 있듯이, 우린 여전히 책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세계를 만난다. 다른 체로키 족에겐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11월에 마음의 산책을 권한다. 책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쉿, 당신에게만 권하는 나의 목록이다. 


1. 커피의 역사


사람은 참 신기하다. 커피를 마신 입에서 와 노래가 나온다.

그래서 커피는 한 편의 문학이다.

쉐호데트 수도원의 염소들이 먹은 붉은 장밋빛 카파나무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었을까. 혹은 개인을 인식하게 됐을까. 커피와 계몽이 같은 뜻으로 쓰인 이유다.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은 단순히 커피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다커피 한 잔, 그 속에 인류의 문명이 있고, 역사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커피의 역사. 따라서 커피의 역사를 마시는 것은 DNA를 통해 상속한 인류의 정신사와 만나는 것이다.

맞다. 커피는 식물의 프로메테우스다. 이성(계몽)과 감성(낭만) 모두를 품고, 끝끝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중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인류의 소망 불씨를 태운다.

야콥은 이 놀라운 불씨의 역사를 향기롭게 부채질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좋은 책과 커피를 곁에 둔다는 건 삶의 축복이다.

이 책을 통해 두 가지 한꺼번에 충족할 수 있다. 책에서 커피향이 난다고, 놀라지 마시라.

야콥이 볶은 커피의 역사가 내는 향일 테니.



2. 셰어하우스

공유는 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집은 돈, 시간, 꿈 등 모든 것을 바꾸어놓고 조절하는,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내 집 마련의 신화'가 지금 한국의 모든 병폐를 기하급수적으로 폭발시킨 장본인인 것은 아닐까. 

셰어하우스는 그런 집에서 '공유'함으로써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함을 알려주는 또 다른 사회 변화의 시발이 될 것이다. 

공간과 사람, 주거와 삶에 대한 성찰은 더 늦기 전에 자유를 시작할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니까. 

부디 세상의 기준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나누고 공유하라!




3. 만화 이슬람 

믿고 보는 김태권이다. 나믿김믿. 

더구나 우리에게 이슬람은 편견으로 똘똘 뭉친 채 전달된 텍스트다. '한 손에 칼, 한 손엔 코란'으로 대변되는 이슬람의 상징적인 말부터가 잘못 됐으니까.   

제대로 이슬람을 이해하고 안다면, 우리의 세계는 분명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김태권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했을 것이다. 







4. 집의 초심, 오두막 이야기

또 집 이야기냐고? 응. 그렇다. 

집이 그만큼 중요하다. 집에 대한 사유나 고민이 적은 것은 그만큼 아파트라는 무게에 짓눌린 것도 하나의 이유이리라. 

당신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회사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다. 먹는 것과 있는 곳이다. 

뭣보다 나카무라 요시후미다. [집을, 순례하다]로 만났던, 일본의 주택전문 건축가. 그가 산기슭 비탈진 곳에 14평 오두막을 짓는 과정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어찌 언급하지 않겠는가. 작은 집, 스몰하우스, 그속에 담긴 넓고 큰 삶. 리틀 빅, 스몰 빅의 이야기다. 

건강한 주거와 삶, 그 원점에 대한 이야기라니, 놓치면 후회한다! 



5. 부수적 피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로 우리의 '불평등 불감증'에 죽비를 때린 지그문트 바우만의 또 다른 불평등 시리즈다. 

'부수적 피해'라는 미국 군사 용어는 얼마나 잔인하고 용렬한 단어인가. 불가피한 민간인 피해라니. 

부수적이라는 말 속에 우리는 불평등의 속살을 본다. 

그 노골적인 불평등 획책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죽비에 우리의 기존 관념은 자꾸 '디스'를 당해야 한다. 

불평등에 무감해지도록 강요당한 자들의 협잡에 우리는 행복도, 삶도 다 뺏길 지경이니까. 

누구의 삶도 '부수적'이지 않다! 당신이나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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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다." 아무렴, 20년 전 하늘이 리버 피닉스라는 청춘을 훌쩍 우리로부터 떼어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욕심쟁이 하늘!


20년이 그렇게 흘렀다. 그날 이후, 

내게 詩월의 마지막 날은 늘 리버 피닉스의 차지였다. 

세상에는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다. 

굳이 이유를 캐물어도 싱긋 웃어주고 말면 그뿐인 것이 있다.


쉬파, 누구는 스물 셋에서 영원한 청춘으로 남는다. 

억울하다. 역시, 억수로 잘 생기고 볼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 영원한 청춘을 그리면서 말이다.


내게 詩월 마지막날의 커피는 그래서, 리버 피닉스다.

리버 피닉스를 그리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커피다.


언제고 詩월의 마지막 날, 당신만을 준비해 놓은 커피 레시피가 있다.

그 커피를 당신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말할 것이다. Stand by me!


그래, 꽃 같은 청춘이다. 시들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피고 마는 꽃.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만에, 아프리카 청춘이도다~ 


안녕, 리버 피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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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이 무색하다. 통렬하고, 신랄하다. 덧붙여 낄낄거리며 웃게 만든다. 우아하게 웃길 줄도 안다. 버트런드 러셀에 대한 새삼스런 감탄이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십여 년 전 유일하게 읽었던 책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인데, 다소 까다로웠다. 얇은 책임에도, 그의 글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런 얄팍한 나의 편견을 깬 것이 인기 없는 에세이. 물론 지금 다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보면, 예전만큼의 까다로움을 겪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입문서로도 이 책은 좋아 보인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가, 능란하고 섬세한 논객이라는 책 뒷면 카피에 백배 공감한다.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국의 많은 사회지도층, 특히 일부 국회의원 나리들의 언어가 떠올랐다. 막말의 향연(?)을 기본 장착해놓고,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하는 언어적 작태와 행동을 일삼는 그들 말이다. ‘지적 쓰레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쓰레기 말종나리들. 이런 말 지껄였다고 인신공격이랍시고 잡아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에이~ 설마???)

 

버트런드 러셀은 아마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 스스로 지껄인 깔때기에 콧방귀를 낄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그는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 재밌는 문장을 보자. “지구가 기나긴 세월에 걸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삼엽충과 나비를 낳아 기른 후에 인류는 네로와 칭기즈칸과 히틀러 같은 인간들을 낳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하지만 이는 짧은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p.41)

 

인류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한다. 진화와 진보를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인류가 지구에 미친 패악과 해악은 또 어쩔 것인가. 러셀은 그런 자만심에 깨몽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읽은 바는 성찰이다. 러셀은 인간에게 말종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다음 그의 말에서 그것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가 언급한 문명인의 조건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고 너그러울 때도 있고, 욕심 때문에 소심해질 때도 있으며, 용감해질 때도 있고 겁에 질려 비굴해질 때도 있다.어떤 이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얻었고, 어떤 이들은 최고의 지성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비상한 감수성에 이끌려 미를 창조했다.문명인이란 자신이 칭찬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할 때 비난하기보다 이해하기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다.”(p.245)

 

재밌다고 해야 할 런지는 모르겠는데, 1950년 첫 출간된 이 책이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오래 묵은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꼭 들어맞는 생생한 지적들이 흘러넘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21세기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라고 특별히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정신적 성숙을 갈망하는 건,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다. 러셀은 그런 사람의 한 명일 것이다. 더불어 유머와 위트까지 겸비한 극소수의 사람.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한국에서 이만한 논객, 여태껏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만 놓고 봐도 러셀의 지적질은 온전하게 타당하다. 자만심 혹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신념의 과잉은 허술한 일반화만 양산하고 있다. 사실 신념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이해타산, 즉 이권에 의한 이합집산에 불과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폭력과 이권이다. 러셀의 말마따나 정부의 헛소리에는 한계가 없다. 가령 국정원. 요원들의 폼 나는 정보 전쟁을 기대했다면 오산이었음을 우리는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 세상에 댓글로 정권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똥꼬나 핥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인간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신경쇠약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사실 여부는 그래서 상관이 없다.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뿐이다. ‘무언가 믿지 않으면 안 되는 동물이다보니, 불충분한 근거만으로도 믿음을 행하고 타인에 대해 낙인을 찍는다.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것이 다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다른 견해를 인정하라는 지당한 말씀이 나부껴도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틀리다(무의식적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세계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일 뿐이다. 러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임에도, 우리는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동물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동물의 숙명이고.

 

특정한 독단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는 당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을 벗어나 다른 집단이 지닌 견해를 알아보는 것이다.만약 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라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도록 하라. 또 당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소속된 신문을 찾아 읽도록 하라. 당신이 보기에 그 사람들과 신문이 미쳤거나 심술궂거나 사악하다면, 당신 역시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p.219)

 

그래서 결심했다. 박씨 정권 혹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다른 집단이 가진 견해를 알아보자.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해보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결심도 해보건만, 글쎄, 나는 수양이 아직 부족한지, 숨구멍과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사고 체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들의 기준과 잣대로만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재단하는 저들의 행태가 아마도 그동안 그나마 어렵게 지켜온 훌륭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 것 같다. 가령 피로 물들이며 매우 힘들게 쟁취했던 민주주의가 그렇고, 일부 삑살이도 있었지만 참교육을 위해 노력했던 전교조 교사들의 노력이 그렇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늘 품고 있는 질문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더 깊고 넓은 탐구와 관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문제는 성찰이며 사유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고, 그 불완전한 믿음을 너무 애지중지한다. 러셀의 말마따나 실질적인 해악 때문이 아닌 우리에게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모든 정신적 위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한 인간이 하는 걱정의 태반은(90% 이상이었던가?)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에 한다고 하지 않던가! 불안을 사서하며 미리 걱정하는 탓에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우스운 존재가 인간이다. 그것도 따지고 들면, 그렇게 주입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배후세력(자본 등)의 교묘한 조정이 따른다. 불확실한 미래의 선을 위해 비교적 명확한 현재의 악을 감내하는 무가치한 뻘짓을 우리는 버젓이 하면서 괴롭고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빌어먹을!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기묘한 혼합물이다. 인간은 밤이 지닌 화려함을, 봄꽃의 부스러질 듯한 아름다움을, 부모가 주는 사람의 부드러움을, 그리고 지적 이해의 황홀함을 느낄 줄 안다. 어쩌다 통찰력이 깃드는 순간이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서로가 지닌 것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을 때 어떤 질서를 따라야 하는지 꿰뚫어 보기도 한다.”(p.276)

 

비록 미국의 일국 체제를 주장한 오류(!)가 있다 한들,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해선 옮긴이가 충분히 설명했다) 이 책의 미덕은 감추기 어렵다. 특히 러셀의 철학 예찬은 지금 자본과 기득권이 주입하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상비약이 될 것이다. 성찰하고 사유할 것. 지금 우리가 잃은 삼평, 즉 평정과 평화, 그리고 평등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뭣보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으로 재미를 보장한다. 물론 일상에서의 실천은 독자 당사자의 몫이겠지만.

 

철학은 비단 수학 및 과학뿐만 아니라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철학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지평을 제공한다.사고의 대상을 넓힘으로써 철학은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해독제를 제공한다. 그리고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예민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을 보여 주는 것, 그것 또한 철학의 임무이다.”(pp.85~86)

 

물론 철학이 지적 발달의 한 단계이지 정신적 성숙과 상통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러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겐 가장 재밌는 챕터였던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에서 보듯, 세상에 지식인이라는 탈을 쓰고 뻘짓 하는 인간들, 쌔고 쌨다. 내가 속한 환경, 조직, 나라 등에 집착하기에 그들은 넓고 멀리 깊게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만하지 않고 불충분한 근거의 믿음을 전부로 여기지 말 것


러셀을 통해 나는 다시 나의 세계를 돌아다본다. 세상이 한 뼘 넓어진 기분이다. 작고 사소하지만, 이 기분을 일상에서 실천적 자세로 전환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다. 뜬금없지만, 전쟁이 없으면 좋겠다. 러셀의 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인간의 사상과 에너지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세대 안에 세계 곳곳의 심각한 빈곤 문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p.105) 


단언컨대, 세상 모든 전쟁은 정부 권력 혹은 자본과의 협잡이 빚어낸 참극이자 정신적·육체적 학살이다. 세상에 성전 따위는 없다! 이건 불충분한 근거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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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매터의 사진에 늘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한 순간에 농축된 감정선 때문이다. 

그 결이 어찌나 섬세하고 농익었는지, 볼 때마다 감탄한다. 



전부를 던져야 사랑을 얻는다!

조던 매터의 사진이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가 잊고 있는 사랑에 대한 어떤 진실. 


안 생겨요?

아무렴, 공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하여. http://www.procope.org/648


내가 품은 사랑에 대한 아이러니는,

인류를 사랑하긴 어렵지 않으나, 한 사람을 사랑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

그래, 그러니까, 사랑이지! 


편협한 내가 사랑하는 몇 되지 않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

사랑하는 이들에게(정재형). 


이 선율, 사랑하는 당신들이 떠오를 때마다 듣는다. 

사랑하는 당신들, 이 선율을 귀에 담을 때마다 떠올린다. 


이 선율과 함께 내가 내린 커피를 사랑하는 당신들과 함께 마신다면, 

내 삶은 그것으로 충분하고 충만하다. 고마워, 내 사랑들...


언젠가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는 당신에게, 

이 곡을 피아노 연주해주고 싶다. 밤9시, 외로운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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