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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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 탄탄대로의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먹고살 게 없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건 절규지 폭동이 아니다.” 

혁명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의 선택이다. 참다참다 못해, 견디다견디다 못해,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귀결이다. 또한 그것은 말 그대로 절규다. 폭동이라는 말로 가치 전복을 시켜선 안 된다. 그것은 살기 위한 것이지, 어떤 이권이나 권력 교체를 위한 목적이 개입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도, “혁명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혁명은 좀 시끌벅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석훈 박사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처음 대하고선, 그 제목이 왠지 조심스러운 듯해서 뭔가 석연찮았다. 하지만, 읽어가면 마냥 그렇지 않다. 제목 뒤에는 '시작되었다'라는 말이 생략됐다는 것부터, '혁명'이라는 레토릭을 좀더 넓힐 것을 요구한다. 혁명을 좁게 가두어선, 안 된다!

그렇다. 잔혹하고 엄한 시대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사회에서 최고의 경구가 된 어처구니 없는 시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진 않지만, 행복의 조건으로서 돈의 힘을 절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 도저히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시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라. 열 이면 여덟아홉은 지금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알면서도 그들은 묵묵히 참고 걸어간다. 스스로를 억누르고 시선을 회피하면서. 그것이 또한 일상화된 시대다. 괴로운 시대다.   

이상했다. 아직은 견딜 만 하다는 건지. 우석훈 박사는 임계치를 지났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얘길하지! 어느덧 20대 전문가로 낙인(?)이 찍힌 그는 학원강사들의 삶에서 이 책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들은 이른바 '루저'들의 세계다. 사교육을 책임진다는 수사는 그저 사기를 북돋기 위한 알랑방귀다. 스스로도 안다. 이미 나락은 진행되고 있음을. 스타 강사? 억대 강사? 그건 돈에 미친 놈들이 만들어낸 착취적 수사다.     

20대들은 철저히 꼰대들의 울타리에 감금됐다. 누구도 그들을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조차도. 꼰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펙 늘리기에만 몰두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그것은 자아실현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광대가 됐을 뿐이다. 

우 박사는 '혁명'을 일단 입에 올리라고 말한다. 혁명은 울림이, 에너지가 큰 단어다. 어머니나사랑과 같이. 물론 그것을 과거 군사놀이를 통해 구현하라는 것, 아니다. 20대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을 통해 혁명을 꿈꾸란다. “움츠리고 웅크려 있는 20대들에게, 특히, 대학생들에게,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생동감을 돌려주고 싶다. 아, 걱정 마시라. 혁명하라는 거 아니다. 군사놀이 하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혁명가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혁명이 일어난다면, 내가 정말로 혁명의 일원이 된다면 따위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 보는 건 어떠냐고 말하는 것이다.”(p.35) 그리곤 그 일례는 코코 샤넬. 20세기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샤넬처럼 문화혁명자가 돼라! 

말하자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혁명의 레시피를 제언한 책이다. 그 레시피를 택하건 택하지 않건 그것은 자유다. 젊은 세대들을 사육하고 훈육하고 싶어하는 꼰대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선택이다. 하지만 20대의 그 선택은 중요하다. 앞선 꼰대들이 잘못 빚어낸 이 사회의 고통 부담자로서, 앞으로 다른 사회를,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그들이다. 20대.  

“이들은 외롭다. 그 이유도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수업이나 책을 통해서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말해 줄 수가 없다. 그건 존재론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은 경쟁과 평가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닌 다른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p.54)   

과연 혁명이 가능할까, 의심하기보다 혁명의 일원으로 꿈꾸는 것이 더 행복한 일임을. 20대가 꿈꾸면 다른 세상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 책은 조심스레 권한다. 혁명이라는 말에 쫄지 말고, 혁명의 레시피를 만든다면, 우리는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이 책은 20대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냥 그렇지 않다. 우정과 환대의 마음으로 함께 꾼다면, 혁명은 충분히 가능하다.  

조한혜정 교수가 ‘이 시대의 수다쟁이, 언어의 연금술사’인 우박과 함께 꾸는 꿈처럼 말이다. “나와 우박이 맺은 ‘우정’의 품앗이가 ‘환대’의 두레 마을로 둔갑하는 꿈, 청년들이 맺은 무수한 품앗이와 두레 공동체들이 돈의 순환 체계가 지배하는 사회를 무력화하는 ‘개벽의 새벽’을 상상해 본다. ‘우박과 그 아이들’을 통해 혁명이라는 불씨를 선물 받은 친구들, 그들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들은 이들이 함께 춤추는 꿈을 꾼다. 부모가 돈이 없다고 해서 세 탕의 알바를 뛰어야 하고 수업시간에 졸아야 하는 일이 없는 세상, 남자도 여자도 모두 돌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세상, 하고 싶은 일로 돈도 벌고 사회에 좋은 일도 하는 20대 사회적 기업가들로 세상의 빛깔이 달라져 버린 날을 상상한다. 누림, 멈춤, 마을, 환대 등의 주문을 외우면서, 경쟁과 가시적 성과라는 주술에서 벗어나 정의와 아름다움의 세상을 발견한 이들이 사보타지의 신체를 바꾸어 내면서 새벽을 맞이하는 모습을 꿈꾼다.” (p.17 ‘추천글’ 중에서)

나는 혁명한다, 고로 존재한다. 혁명을 꿈꾸는 당신과 나, 우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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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나의 한살매
백기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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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젊은이, 백기완 선생님은 요즘 세상에 대해 일갈하신다. “요즘 벗나래(세상), 그 돌아가는 꼴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이것도 사람 사는 벗나래든가?’ 그런 휫딱(착각)이 들 때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이명박이가 앞장서 뻔한 거짓을 참으로 바꾸고, 또 참짜 참은 아예 죽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땅불쑥하니(특히) 갈마(역사)라는 걸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저희들 마음대로 갈마를 거짓꾸리고 있음을 본다.”(p.190)

백 선생님의 지금-여기에 대한 현실인식은 명확하시다. 지금의 현실은 늙은 젊은이의 철학과 당최 조응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정반대다. 백 선생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아들딸을 키울 때 이르시던 새김말(좌우명)은 이렇다. “모두가 어려운 때 제 배지(배)만 부르고 제 등만 따스고자 하면 키가 안 크니라.”(p.13) 아니, 말로는 서민을 내세우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이른바 가진 자들의 이익과 이권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지금에, 시대착오적인 생각 아닌가!

하지만, 백 선생님은 그 가치를 절대 놓을 생각이 없으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정말이지 단호하시다. 그것이 한 순간의 치기로 만들어진 개똥철학이 아니라, 일생을 관통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절대적 신념체계임을 알 수 있다. 너도 나도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그것을 위해 필요한 불쌈(혁명). 과거의 물리적 투쟁보다는 문화예술을 통해 만들어야 할 불쌈. 

책은 우리말로만 되어 있다. 읽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눈에 익지 않은 것들이 많은 탓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새롭게 알게 된 우리말을 입에서 곱씹어 보고, 기억에 저장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름 의미있었기 때문이다. 책 읽기의 새로운 경험이다. 나는 순 우리말만 쓰기보다는 외래어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우리 언어의 외연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순 우리말로 외연을 확장하는 것도 괜찮았으니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 기억도 있다. 백범 일지는 봐도, 누군가 백범 선생을 만난 기억이라고 내뱉은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뵌 백범 선생’이라는 소제목으로 풀어놓은 이야기는 백범의 아우라와 포스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을 떠올려도 매칭이 되는 이야기.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세상을 늘 맨몸뚱이 하나로 부딪혀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재야 민주화운동의 투사로서 겪은 고초 등은 시대의 야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대의 야만은 방법을 달리해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우리를 옥 죄는 것이 지금 시대다. 백 선생님 또한 이 시대에 대한 분명하게 일갈하지 않으셨는가 말이다.   

하지만, 젊은 날 백 선생님의 기백을 보자면 그냥 불끈불끈 힘이 솟기도 한다.  “그렇다, 나도 내 뼈를 갉아 애나무로 삼고, 내 피땀을 뽑아 거름으로 삼으며 온통 불을 지른, 젊은 한때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런 젊은 날에 마주해 요만큼도 뉘우침 따위는 안 한다. 도리어 모이면 으르고 뽑아대고 뜨거운 것이 빛나던, 그런 젊은 날의 눈물이 있었다. 이 새끼들아.”(p.142) 

백 선생님의 시(詩) 중에 「젊은 날」이라는 시가 있다.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돈벌이에 미친 자는 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자식이라 하고/ 다만 통일논의가 나래를 펴면/ 환장해서 날뛰다 밤이 내려/ 춥고 떨리면 찾아가던 곳/…” 읽을 때마다 뜨거움이 불끈 솟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백 선생님은 그렇게 시대를 밝힌 시인이었고, 시대를 저항한 투사였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말을 잊지 못하겠다. “자기 등만 따스면 썩습니다.”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가 선생님 혼자의 꿈이 아니어야 한다. 이 책은 시대의 야만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그것에 맞서 우리는 계속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을 추동한다. 턱없이 없는 사람들 것을 뺏어대는 놈이 여전히 존재하고, 누군가는 주리고 깨지고 쫓겨난다. 이 어찌 내 처지가 아니라고 외면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백 선생님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봐, 용이 죽어라 하고 썩은 또랑에 엎드리는 까닭을 알아? 어떡하든 구슬을 하나 얻어 하늘로 올라가자는 거라고. 하늘에선 또 무엇을 하자는 건지 알아? 아무것도 해온 것이 없으니 돈장사, 땅장사, 사람장사, 사랑장사, 거짓장사, 됫싸게는(심지어는) 미국 놈 앞잡이 해먹기, 그것으로 거저먹자는 것이다. 그러니 용에 마주한 사랑 따위는 때려치우고 우리 지렁이 사랑을 하자구. 지렁이는 땅을 기고 사는 것 같애도 말이야, 힘이 있어 임마. 무슨 힘인 줄 알아. 온몸으로 땅을 갈아엎어 땅을 살리는 사랑의 힘이 있거든.”(p.144)

나는 다짐한다. 나를 비롯해서 시대의 야만에 억압받는 이들이 부디 버티고 견디길. 그러기 위해서 힘을 보태야 함을. 사람 사는 벗나래(세상)가 아닐지라도 어영차 버티고 살아남아 노나메기를 꿈꾸기. “제아무리 굶더라도, 제아무리 됫싼 매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딘 고비를 어영차 버텨내고 살아남기만 하면 사람은 더없이 착하고 어진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이 벗나래(세상)엔 나쁜 치들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도막에 한술 닿은 끈매(인연)는 달구름(세월)이 가고 또 가도 끊기질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게 아닐까.”(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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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백기완, 한겨레출판사
    from Finding Neverland 2009-12-25 12:58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백기완 선생의 이름 석자를 알 게 된 것은 역시 대선 때문이었는데, 하도 어려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출마 때 그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92년 대선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고, 민중이니 민족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나는 십 수년 그를 잊고 살았다. 웹서핑 중에 몇 번 그의 이름을 만났을 법한데 별 뜻없이 지나쳤으리라. 요즘 이십 대 중에 그를 기억하거나 관심을 둘 사람이 몇..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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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아마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푼크툼'이 회화 보기에서 차용될 줄이야. 그것도 21세기, 자신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말이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이번에는 미학과 미술사를 넘어, 회화보기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했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을 회화에도 적용해서 말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최근 그의 처지와 맞물려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브뤼헐은 당대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대운하를 반대한 전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게 풍자의 대상은 서민이라고 비껴가질 않았다. 진 교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반인이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는다. <디 워>논쟁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다.  

그런 진 교수가 스스로 꽂혔다며, 열 두 작품을 언급했다.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도 있다. 어떻든간에《교수대 위의 까치》를 관통하는 개념은 푼크툼이다. 즉,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감각.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도 없는, 작품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피사체가 있는 사진에서만 쓰이던 개념인데, 그 개념을 완화했다는 것이 진 교수의 설명이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진 교수가 언급한 열 두 작품은 이전에 우리에게 주입된 회화를 보는 방법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낯설게 보기다. 표준적인 작품 해설에 의한 미술사 보기가 아닌, 내 마음에 꽂히는 '삘'로 작품 마주대하기. 표준적인 작품 읽기가 아니어서일까. 책은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의외로 미술보기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더구나, 타의에 의해 교단에서 쫓겨난 그의 처지와 맞물려, 책에 나온 작품들이 (잘리지 않았다면) 강의실에서 얘기될 것들이었다고 하니, 마지막 강의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책에 대한 집중도 또한 높아진다. (교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이 아이러니.  

책은 곳곳에서 찔러댄다. 회화를 보는 시선이 하나가 아니며, 미술사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의 시선을 빌려서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범례적으로 보여준달까. 경계를 넘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방법이 앞으로 회화를 만나면, 나만의 푼크툼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란 기대를 하게 한다.   

'사라진 주체'라는 테마로 진행된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의 <자화상>이 메타 회화를 언급한다는 대목에선 17세기 화가들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봤다. 이 작품, 희한하게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현실과 비현실, 더 나아간 비현실이 함께 등장하는데, 현실과 비현실은 위치를 바꾼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이고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셈이다.   

이것은 그렇다고,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란다.그럼에도 굼프를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은 보들리아르가 언급한 시뮬라크르(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일찌감치 다룬 셈이다. 화가의 정체성을 넘어 회화의 정체성을 다룬 진화의 단계.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여러모로 진 교수의 범례적 회화읽기는 곳곳에서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림 보기가 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답이 있어야 안심을 하는 제도권 교육의 폐해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답 하나만 좇아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 푼크툼은 그것만큼 중요한, 새롭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답을 푸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임을.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는,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때문이었다.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진 교수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만든 굼프의 <자화상>. 

세상을 보는, 세상을 사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다. 푼크툼으로 인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안겨준 책 읽기의 행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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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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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총기 난사를 했던 사건. 그 비극 앞에 어이 없게도, 그가 한국인이라서 국가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던 주장도 있었다. 비극 앞에 있거나 그 사건으로 경악한 많은 미국인들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단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그를 제대로 보듬지 못한 사회가 문제가 됐을 뿐.   

그런 것으로 따지자면, 지구상의 남자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 없어져야 할 족속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악과 폐해의 당사자는 거의 남자들이다. 그렇게 따지자니, 우습긴 한데, 그만큼 남자들은 늘 문제를 일으킨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그런 남자들의 심리를 보여준다. 왜 그들은 좋지도 않다는술을 입으로, 위로, 간으로 퍼붓는 것일까.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을까. “한국 성인 남자는 여가의 절반을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술을 깨우는 데 사용한다.” 한국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재미를 모른다. 아니, 어떻게해야 재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혼자 있는 법도 모른다. 그래도 꼴에는 강한 척 해야 '가오'가 선다.  

제목부터 자극적인 이 책은, 술술술 읽힌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그것이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혹은 그 남자를 지겨워하거나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도 이해도를 높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재미와 감탄을 모르고 살아가는 남자들을 위한 처방전 혹은 그런 남자들을 알고 싶은 여자들의 참고서이다. 

무엇보다 저자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내 이야기'가 살갑다. 오밀조밀 궁시렁궁시렁 신변잡기에 불과한 그 이야기가 왠지 살갑다. 시시콜콜하지만, 수다의 힘은 의외로 세다. 여자들의 것이라고 치부했던 수다는 의외로 많고 큰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도 술보다는 수다다. 저자의 수다가 살가운 것도, 저자가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도 책 속의 다종다기한 수다 덕분이다.  

사실 지금은 우울한 시대다. 20대부터 벌써 재테크에 미치라고 설파하고, 어떻게든 스펙을 좀더 높이 쌓아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알랑방귀를 낀다. 30대라고 다르진 않다. 현실이라는 이유로 부동산, 재테크, 육아 얘기만 나부낀다. 자신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 내 고유의 서사를 지운 삶인 셈이다. 어떡하면 재미가 있는지 모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미덕은 무엇보다 '감탄하기'의 중요성을 알려준 점이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아니다. 감탄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다”(p.283) “누가 나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우리는 감탄하려 산다.”(p.293)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 대한, 작고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라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고, 정서적 경험이 풍부할수록 타인과의 관계도 유려해진다.

감탄할 줄 아는 것은 재미의 다른 말이다. 재미가 없으니 정치인 욕이나 하고, 폭탄주 돌려서 취하고 빨리 망가지는 거다. 많은 남자들은 그런 퇴행적 온정주의에 사로잡힌 노예들이다. 일 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술까지 힘들게 마시는 소아병적 퇴행. 그럼에도 알코올이 힘을 발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책은 남자들에게 익숙지 않은 정서적 공유도 강조한다. 아내에게든 자식에게든 친구에게든 뭐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공유하면 살 길이 열린다.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표현도 그런 얘기를 터 놓음으로써 치유 받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책은 알려준다. 사회적 지위? 기똥찬 집과 차?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당연히 여겨지는 어느 회사의 부장, 사장, 교수와 같은 내 사회적 지위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 본질과 상관없는 것들이다”(p.100)  

그러면서 저자는 커밍아웃한다. “생각해보라! 도대체 언제까지 사장할 것인가. 언제까지 교수일 것인가. 나는 어느 대학의 교수나 어느 위원회의 위원장이 아니다. 나는 슈베르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 내 노래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고, 아내의 관심이 조금만 식어도 쓸쓸해하고, 하늘거리는 주름치마에 가슴 설레어 한다. 그게 진짜 나다.”(p.100) 아내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마냥 침울해지는 소심한 남자!

다시 말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는 모두 남자의 문제다. 가족에서 더 이상 남자(남편)는 필요없게 됐다. 기러기 아빠가 이를 대표하지 않나. 남자들은 돈'만' 버는 기계다. 그래놓고선 고작 하는 위안이 가족을 위해,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 참으로 불쌍한 족속이 아닌가.  

저자의 남자 다독이기는 별다른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심리적 파장은 크다. 나도 그렇지만 아마도 이 땅의 남자들이 너무 획일적으로 길들여진 탓일 게다. 아니,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사회적 문제도 많은데, 일일이 남자들 심리를 파고들 건 뭐야,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는 다른 문제도 면밀하고 정교하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남자들의 문화심리를 다뤘는데, 한편으로 (남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 재미있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허섭하게 야동틱한 이야기말고 생동감 있는 에로틱한 수컷의 향기를 풍기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그렇게 되면 감탄도 절로 나올 것이며,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간을 이겨낸 모든 것은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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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 지음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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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인디 레이블의 악전고투의 순간, 고생바가지를 다룬 글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건, 뭐 염장질이라고 봐야겠다. 그러니까,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이런 거다. 뭐라도 재미난 것을 하면서, 명예와 명성을 얻고, 돈까지 벌게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쏜가.

물론, 약간 부러움에서 비롯한 언급이었지만, 붕가붕가레코드(이하 붕가붕가)는, 책을 보면 그렇다. 놀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잘 논다.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들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 가능하도록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과장해서 이렇게 잘 노는 애들은 국민들의 정서함양을 위해서라도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제대로, 잘 놉시다'라는 콘셉트의 공익광고라도 만들어 그들을 출연시키고 싶을 정도다.  

붕가붕가는 그렇다. 인디신의 거성, ‘장기하와 얼굴들’을 통해 익숙해진 레이블이다. 책이 나올만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출판사라고 그들을 놓칠리가 있나. 책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가 쏠쏠하다. 대학교에서 음악 좀 해보겠다고 '깝치던' 청춘들이, 혈혈단신 음악판에 뛰어들어 좌충우돌, 종횡무진, 엎치락뒤치락 흥망성쇠(?)를 겪은 기록.  

점차 나아지고 있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붕가붕가의 성장사를 보자면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어떻게 버텼을까, 용하기도 하고. 더구나 그들은 잡탕이다. 뚜렷하게 섞이지도 않고, 하나로 관통할만한 음악세계도 없다. 그러나 단 하나, 재미있어야 할 것. 아하, 책은 그들의 음악과 다르지 않다.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게 용케도 어울려 있다. 이것이 바로 붕가붕가의 음악세계다. 물론 생판 다르다면 이렇게 섞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음악에 아교 구실을 하는 몇 가지는 분명히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작업을 좋아하고 있다. 따로 또 같은 것이 붕가붕가레코드의 노래들이다.”(p.215)    

놀기를 잘 해야 조화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는 나로선, 약간 뻥을 튀기자면, 붕가붕가 멤버들이 놀 줄 모르는 이 사회에 균형추를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그렇잖나. 우리는 너무 못 논다. 노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도 그렇고, 노는 것을 금기시 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했다. 근면성실이 아니면 죄악으로 몰아버리는 이 근엄한 풍조. 미친 게지. 못 놀아서 지금 이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게야!  

그런 면에서 장기하의 공연에 대한 철학(!)은 선명하다. 그 선명한 철학은 역시 놀 줄 알기 때문에 고안할 수 있는 거다. '음악은 듣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엄숙한 풍조에서 이런 생각은 나올 수가없다. “장기하의 얘기처럼 음반이 들려주는 것이라면 공연은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붕가붕가레코드가 처음 공연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가져온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아주 괜찮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럴싸하다‘고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관객에게 음반을 들을 때와는 다른 경험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p.250)

붕가붕가의 모토 또한 놀 줄 아는 자가 가져야할 덕목이 아닐까. “혼자 힘으로 사랑하자 + 혼자 힘으로 살아가자 = 혼자 힘으로 사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는 법을 배우거나 익히지 못하니, 악성 패거리문화가 생기고 힘 자랑이나 하게 된 거다. 혼자서 노는 법도 중요하다. 혼자 놀다가 재미 맞으면 둥둥 서로 손을 맞잡는 거고!  

그래서 장기하와 얼굴들로 제대로 뜬 그들의 차후 행보가 마음을 잡았다. 그들에게도 아마 야심이나 야망 따윈 없으리라. 나를 움직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야망 없음.' “온전하게 우리 힘으로 해낸 게 아닌 만큼, ‘장기하와 얼굴들’에 의존하지 말자. 다른 팀들에게 그 수준의 성공을 기대하는 건 애초에 그만두자. 당분간 초라한 자취방에 살더라도 자기 힘으로 관객을 모아나가자. 남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다른 문을 두드려보자. 아니면, 아예 벽을 뚫고 문을 하나 새로 내자.”(p.83)  

지금 대한민국의 음악시장, 아니 예능인들을 만들어내는 주류의 방식은 이런 거다. 소속의 하나가 제대로 떴다치면, 어디 줄을 대서 새끼를 자꾸 키워 세력을 확산시켜볼까, 공산품을 만드는 일에 전력해볼까. 포트폴리오 짠답시고, 비슷비슷한 애들로 돌려막기나 하는 거다. 고작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돈 벌 궁리에만 매몰된 주류의 방식에 비해 그들의 철학은 깔끔하다. 어디 뭐, 더 재미있는 일 없나.

이것이 붕가붕가를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 중요한 요인은 아닐까. 많고 적음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놀 줄 아는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가 만드는 노래를 괜찮다고 들어주는 누군가가 지금은 한줌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적지 않은 숫자가 될 것이라는 바람. 취미로 음악 하는 대학생들이 한 줌 모여 있는 동아리 주제에 스스로 회사라고 주장하며 음악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나선 자뻑의 바탕에는 나름 이런 꿈이 있었다. 일단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이런 의미에서 김 기조는 붕가붕가레코드의 모토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자’로 정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위라는 붕가붕가의 의미에 목매달고 있던 곰사장은 이를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붕가붕가는 ‘혼자 힘으로 사랑하자’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붕가붕가레코드는, 시작했다.”(pp.54~55)

엄숙한 이들이 들으면 뜨악해 할 이름을, 버젓이 자신들의 레이블 이름으로 단 배짱도 재미있다. “‘붕가붕가 중창단’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2000년에 내 여자친구의 친구 되는 사람 자취방에 놀러갔다가 ‘붕가붕가’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 단어가 애완동물의 자위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오, 발음 좋네. 뜻 좋네. 붕가붕가 좋네. 우리의 자기 충족적이고 관객 의존적이지 않은 자발적 아방가르드 문화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어인 것 같아."”(P.30)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을 단순히 인터넷상의 무의미한 유희로 치부하지 않는다. “주류 대중음악(일반적인 섹스)과 기존 인디음악(자위)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중지향적 인디음악’이라는 조금은 모순적인 우리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붕가붕가다.”(p.53)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연결 지을 줄 알만큼 그들은 똑똑(?)하다.   

지금은 놀 줄 아는 것이 혁명이다. 세상을 무력으로 전복하는 것은 과거지사. D.H.로렌스 시선집 《제대로 된 혁명》은 이리 말하고 있지 않은가.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 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책을 놓고 보자면, 붕가붕가의 행보는 획일이 아닌 깨는 것이었다.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것이었다. 웃고 즐겼으며 너무 진지하지도 않았다. 뭐든 재미로 해보자였다. 이제 혁명은 재미에서 나와줘야 생명력이 길 수 있다. 붕가붕가는 재미사냥은 제대로 과녁을 맞춘 것이다. 출발에서도 그 기운은 완연했던 셈이다. “‘붕가붕가 중창단’이라는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 학내 공연의 게스트에 불과하건만 마치 무대를 강탈한 혁명단 같은 모습이었다,”(p.32)  

중요한 것은, 붕가붕가가 버티고 견뎠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 아닌가.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손, 단순히 딴따라로 치부할 건 없다. 무려 5년째, 그들은 버티고 있다.  “남들이 내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 잘나가지 못할 때,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지속가능을 위한 자질이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게 반드시 용기와 근성만은 아닌 것 같다. 제3의 재능이랄까.”(pp.73~74)  

망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이렇게 책까지 내서, 뭐든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증명해 줘서 고마웠다. 엄숙을 가장한 싼티가 판치고, 삽질만 할 줄 알고 놀 줄 모르는 이 엄한 시대에 붕가붕가도 숨통을 틔워주고 있으니까. 분별없는 열정이 판치는 시대에, 붕가붕가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키치가 아니다. 저렴한 것을 키치와 동일어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괴발개발에 엉성해서 저렴하게 보이는 것과 저렴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p.147) 이제 필요한 것은, 현금연대. 인디나 약자에게, 현금은 지속가능함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그들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지 않던가. 논다는 것은 노동하고 일 하는 것만큼이나 신성하다. 그것도 제대로 놀아야 한다.   

내게 책이 매혹적이었던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대신하거나 소멸한다”는 것을 붕가붕가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 ‘굳이 남의 똥꼬 빨 필요 없이 저렇게 살면 되겠구나’하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알려줬다. 스펙에 목매달지 않아도, 일보 전진을 위해 반보 후퇴를 하는 한이 있어도, 뭐라도 재미난 것을 해보면서도 살 수 있음을 들려줬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딴따라질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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