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엄마랑 종로5가엘 갔다왔다.
종로5가는 대형 약국들이 모여 있는 곳. 약값이 동네보다 많이 저렴한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난 1년에 몇 번은 엄마에게 약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엄마는 기꺼이 종로5가로 가서
애들 눈영양제랑 아버지 드실 종합비타민등을 사오시곤 했다.
며칠전 문득 애들 눈영양제를 찾아보니 지금 먹고 있는 약 말고는 여분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날 풀리면 종로에 다녀오자고 했고 그래서 어제 엄마랑 오랜만에 나들이를 했다.
난 내가 생각하기에도 살가운 딸이 아니다.
차라리 무뚝뚝한 편에 속하는데 여지껏 엄마랑 다니면서 팔짱을 끼고 다닌다든지
엄마랑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재잘재잘 떠들어본 기억이 없다.
딸랑 할 말만 하고 끊는 재미 없는 딸이다.
(팔짱을 끼는 문제에 대해서는 엄마뿐만 아니고 친구들이랑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웃긴 이야기가 될지 모르는데, 난 여자들하곤 팔짱 안낀다.
남자하고만 팔짱을 낀다. 그렇다고 친구가 먼저 팔짱을 끼어 오는걸 풀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내게 팔짱을 끼어오면 꼬~옥 눌러주는 기본 예의는 지키는데
내가 먼저 여자에게 팔짱을 끼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건 남자에게만 국한된 일이다)
산본역은 지상에 있는 역이라서 지하철을 타려면 몇 층을 올라가야 한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올라가는 길을 나름대로 모색해 뒀는데
그게 산본역사 건물에 있는 뉴코아 아울렛 내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개찰구가 있는 3층까지
올라와서 거기서 표를 내고 들어가 한 층 더 올라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엄마가 이끄는대로 쫒아가 개찰구까지 왔는데 지하철이 오려면 아직 5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 쪽가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갈까 물으니 그냥 걸어 올라가시겠단다.
4호선을 타고 금정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금정역엘 내려보니 1호선쪽으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금방 갔나봐. 좀 있어야 오겠네..
5분 조금 더 기다리니 1호선이 왔고 1호선엘 타니 마침 두 자리가 있어서 엄마랑 나란히 앉았다.
우리집에서 종로5가엘 가자면 지하철만 1시간 가량을 타야 한다.
집을 나서기 전 난 당연히 가방에 책을 넣었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자리에 앉자
난 당연하다는듯 책을 펼쳐 읽었는데 옆에서 엄마는 그런 내게 자꾸 말을 걸어 왔다.
저 앞에 나이 든 여자는 내가 결혼전에 알던 여자랑 닮았어
재는 왜 저렇게 입고 다니니? 추워 보여
지하철에서 파는 물건들 다 중국제야. 좋은거 없어
아버지가 어제 밤에...
난 책을 읽으면서 성의 없이 건성건성 대답했고, 그러다 보니 책에 집중할수 없었다.
나중엔 책을 읽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기만 했고 더 나중엔 아예 책을 가방에 넣어 버렸다.
종로5가에 내려서 엄마는 계단으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저 쪽에 보니 엘리베이터가 있길래 저거 타지 그래? 하니 그냥 걷겠단다.
엄마는 올해 82세. 여느 노인네분들과 같이 무릎이 아프시다.
플렛홈에서 개찰구까지 한 층을 걸어 올라오시니 아무래도 힘드시지..
그래서 개찰구가 있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올땐 억지로 엘리베이터를 타게 했다.
그런데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들이 대부분 드렇듯이 속도도 느리고 크기도 작다.
난 걸어 올라갈테니 위에서 보자 했더니 엄마가 넌 여기 처음이라서 어딘지 모르잖아,
하시며 나까지 억지로 엘리베이터에 태워 타긴 했는데 다 노인분들만 타셔서 참 민망했다.
한 층 위, 지상으로 올라와 평소 엄마가 다니던 약국을 찾아서 내가 필요한 약들을 구입하고
엄마한테 점심 먹고 가자, 내가 사줄때 먹지? 하며 점심 먹길 권했는데
엄마는 이런데는 뜨내기 손님만 상대해서 맛이 없어,
광장시장에서 아버지 드릴 누른고기만 사서 집에 가서 먹자고 하신다.
수제비 반죽 해 뒀으니 그거 먹어야 한다며 극구 사양을 하셨다.
그래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종로5가를 떠난 시간이 1시 50분이었다.
아침을 안 먹은 난 배가 고팠지만 그냥 왔다.
엄마표 수제비를 먹으려고.
지하철을 타러 다시 지하로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노인분들이 많이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는 화장실에 갔다 가야 겠다고 하셨는데 엄마한테 난 지하에 내려가 있을테니 엄마는 타고 내려오라고, 엘리베이터 앞에 있겠다고 했다.
엄마가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난 엘리베이터 앞에 있겠다고 했다.
막 뛰어서 지하로 내려와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니 곧 엄마가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와서
문을 여는데 10여명이 내린다. 어휴.. 안 타길 잘 했네..
화장실 저깄어, 하고 내려오면서 봐 둔 화장실 이정표 방향으로 가는데
엄마가 가는 중간에 화장실 여기야 하며 멈추신다. 그런데 그 곳은 한참 공사중이었다.
공사중이네. 저기 화장실 표시 있으니까 저~기로 가야겠다,고 엄마를 데리고
100m정도를 가서 난 누른고기를 들고 화장실 밖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엘 타니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어서 엄마를 앉게하고 가방을 엄마한테 주고 그 앞에 서 있는데 두 정거장 지나니 옆옆 아저씨가 내렸고 엄마 바로 옆 아줌마가 옆으로 옮겨 주셔서 나란히 앉아서 금정까지 올 수 있었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선 아예 책을 꺼내지 않았다.
시청역을 지나면서는 여기 다시 리모델링 했나봐. 전엔 타일 벽에 침침한 분위기였는데..
남영역을 지나면서는 숙명여대 간판이 크네? 철길옆에 초중고가 다 있으니 저거 씨끄러워서 수업이 제대로 되기나 하겠어?
노량진역을 지나면서는 난 여기 노량진시장엔 한 번도 안 와봤어. 엄마는 저기서 30년전에 이모랑 이모부랑 셋이서 밥을 먹었는데 이모부가 밥을 사줘서 맛있게 먹었었어..
영등포역을 지나면서는 마포로 다닐땐 여기 참 징그럽게 다녔는데..
신도림역을 지나면서는 누구가 여기 살아. 신도림역이랑 구로역 사이 저기쯤 아파트에..
구로역을 지나면서는 인천 갈라면 여기서 갈라지지?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지나면서는 여기가 옛날 이름이 개봉이었나? 그러니 엄마가 아냐 가리봉역이야 하고 알려주셨다.
금천구청역을 지나면서 다음이 관악인가? 하니 엄마가 아냐 석수가 먼저야 하셔서 석수 다음에 안양인가 했더니 아냐 석수관악 다음에 안양이야 하셨다.
금정역에서 내려서 산본오는 차를 기다리는데 안내표지판을 보니 전역을 출발했다는 글이 보인다.
바로 오겠네, 했더니 엄마가 아유~ 착한것. 오래있지 않고 바로 와서 이쁘네 하신다.
금정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면 산본이 바로 다음 정류장이다.
앉을래? 했더니 한 정거장을 뭘 앉냐며 엄마는 출입문 앞으로 가서 서셨고 나도 그 옆에 가서 섰다.
집에 다 와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엄마가 몇 시니 물어봐서 핸드폰을 꺼내 보니 3시 3분이다.
엄마네 집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 돌리면서 밥 먹으러 와, 하시길래 알았어 대답하고 우리집으로
들어오니 벌써 지성이가 와 있었다.
가방을 내려 놓고 겉옷을 벗어 걸어 두고 핸드폰만 챙겨 바로 옆집으로 넘어가서 소파에 앉으니
엄마는 벌써 멸치국물을 데우고 김치랑 동치미랑 반찬 몇 가지만 꺼내놓고 수저까지 챙기고 계신다.
티비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으니 빨리 와서 먹으라 재촉하신다.
엄마가 끓여준 수제비를 한 숟갈 떠 먹으니 살짝 싱겁다.
싱거워, 하고 옆에있는 국간장을 반숟갈쯤 떠 넣고 휘휘 저어 먹어보니 그제야 간이 맞다.
천주교 신자인 엄마는 짧은 기도를 드리고 한 수저 떠 드셔보더니 마찬가지로 간장을 조금 넣고 드시기 시작하신다.
거 봐. 배고픈거 조금 참았다가 집에 와서 먹으면 편하잖아, 라고 엄마가 말하시곤
수제비가 조금 남았는데 너 더 먹어라, 하시는데 난 도저히 더 먹을수가 없었다.
못 먹어, 이따 정성이 오면 물어봐서 먹겠다고 하면 주지 뭐.
정성이는 수제비를 한 숟갈 먹어보더니 밀가루 덩어리 싫다고 해서 감자만 골라 먹이고
정성이 표현대로 밀가루 덩어리들은 결국 내가 먹어 치웠다.
작년즈음부터 부쩍 더 한 기분이다.
문득 엄마를 생각하면, 아니 엄마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진다.
꽃같이 고운 우리 엄마를 언제고 보내드려야 하는건 거스를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데,
아직 엄마가 돌아가신것도 아닌데 생각만으로도 난 슬퍼지고 눈물이 먼저 나려고 해서
아예 생각을 안하려고 하지만 문득문득 드는 생각은 어쩔수가 없다.
남들처럼 엄마랑 여행을 가본적도 없고 곰살맞게 굴어본적도 없는 딸인데
엄마는 종종 너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신다.
넌 딸이 없어서 불쌍해서 어쩌니, 하신다.
나야말로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살까...?
엄마가 80이 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프다.
엄마가 올해 환갑정도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가 앞으로도 몇 십년은 내 곁에 있을수 있다고 안심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