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카프카 - 카프카와 브로트의 위대한 우정
막스 브로트 지음, 편영수 옮김 / 솔출판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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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평 활동을 시작하면서 받아본 책 중에 본인을 가장 행복하게 한 책입니다. 사실 그동안 마음에도 없는 서평을 쓰면서 자괴감이 드는 순간도 많았는데 이번만큼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게 될 것 같고요. 동시에 제가 이러쿵, 함부로 떠들기에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해악이 될까 싶기도 하므로…어디까지나 책의 바깥에서 혀만 낼름대보려고 합니다.

  우선 카프카 전집의 경우 솔 출판사에서 최초로 번역본을 낸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카프카의 소설집이나 다른 문건들은 브로트 편집본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일종의 편집본이거든요. 편집은 확실히 돌출된 부위를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으므로..분명히 필요한 작업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시작점에서부터 한계를 간직하고 출발한다고 보는 편입니다. <나의 카프카>의 경우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번역판이 나왔다고 하고요. 
 

 2.  책의 두께가 두께인만큼, 본격적으로 책을 펼치기 전에 구성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텐데요. 위에 사진에 첨부를 해 놓았듯이 카프카의 전기로 시작해서 카프카의 삶과 학설에 대해 파고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어느정도 둘레를 만들고서는 아예 작정하고서 아래로 굴을 파는 모양새랄까요. 때문에, 어지간한 평전이나 전기를 능가하는 컨텐츠를 페이지로 차근차근 누적해갑니다. 대체적으로 연대기별로 구성되어 있고 따로 줄거리가 있는 서사집이 아니므로….

3.  프란츠 전집이지만 <나의 카프카>의 경우 저자가 프란츠 카프카가 아닙니다. 막스 브로트, 라고 해요. 국내에 소개된 프란츠 카프카의 저서들과 산문집은 '브로트판'이라고 해서 일종의 편집본입니다. 위에 첨부하였듯, 카프카의 후원자이자 편집자였기도 하고요. 카프카가 작품 내용을 가장 먼저 나눈 좋은 친구였다고 하지요. 비틀즈가 비틀즈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작은 동네에 4명의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카프카는 물론,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막스 브로트의 존재와 행적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4.   흔히 카프카적이다라고 한다면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카프카의 경우는 그의 전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근대의 대공황이라던가 혼란한 사건들을 겪기 전부터, 저작활동을 해왔거든요. 그럼에도 근대의 대공황이랄지, 그 침울한 분위기를 먼저 읽어낸 부분이 작품 속에 선명합니다. 즉, 카프카적이다, 라고 얘기한다면 문학이란 것이 미래의 분위기나 뉘앙스를 적확한 방향으로 읽어내는 독법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거지요.  혹은 내러티브보다, 그러니까 사건의 흐름이라기보다 의식의 흐름으로 무언가를 짚어나가는 형식이랄까요. 그러니까 결과보다는 흐름자체가 중요한 작품들을 의미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해석도 판이하고 애초에 추상적으로밖에 구연되지 않는 부분이라 어딘가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지지만 굳이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고, 감각하려고 하면 탁월한 구석도 있고요.  뭐랄까, 소설이나 문학이 당대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서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무언가 대비로서의 문학, 예언이자 경고로서의 문학은 또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것일까

5.   그러니까 카프카의 작품들은 결말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발산하는 형태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통렬함을 느끼기도 하고, 초월감을 맛볼 수 있기도 하고요. 실은 애초에 미완의 글이기도 하니까요. '프란츠 카프카'라고 하면 작금에 와서는 일종의 고유명사로 작용하는 것이므로…교양처럼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전집을 읽어본다면 소설은 물론 많은 장르와 매체들을 독해하는 데 있어서 지평을 큰 폭으로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은 대담한 용기를 내어 거의 완전한 원문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책들을 펴내고 있고요. 많은 책들이  편집자의 시선으로 잘려나가고, 텍스트는 조각이 난 채로 독자들에게 예쁘게 주어지는데 그런 부분이 확실히 잘 팔리기도 하고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 당연스런 한계에 맞게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면에서 다시 한번 응원과 감사를 드리며 프리뷰를 마칩니다. 주기적으로 찾아보고 사전처럼 들춰내며 탈탈 털고 또 털어도 계속 무언가를 털어낼 책입니다. 사전처럼 구비해두시길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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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시리즈 세트 - 전2권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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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비치는 조승연의 모습에 반해 책까지 덜컥 구매했다. 1페이지부터 설득력이 떨어지는 책이라는 점이 우선 놀라웠고 방송에서 시종일관 유려한 화술과 교양을 선보인 조승연의 글을 쓰는 능력이 갓 등단한 작가에게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만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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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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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저자 올리버 색스

출판 알마

발매 2018.03.07.




올리버 색스의 다윈과 프로이트 분석기



1.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로 유명한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출간물입니다. <의식의 강>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짧게 주어진 시간의 향이 진하게 풍겨오지만, 그 탓인지 깔끔하게 마감된 결말로는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주제적인 측면에서 잘 어우러지는 느낌도 있고요. 와중에 올리버 색스 특유의 통찰이랄지, 저자만의 집요한 연구 결과 분석이랄지, 등등의 요소들을 시종일관 흥미롭게 저술하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걸친 '문학'이라는 외투는 확실히 태가 예쁜 것 같아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저자 올리버 색스

출판 알마

발매 2016.08.17.





 
▲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2. 그러니까 초반부는 식물학자로서의 다윈을 지면의 상당량을 할애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윈 본인은 물론이고,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놓치곤 했던 다윈의 부분들을 흥미롭게 짚어내고 있고요. 과정에서 과학사의 여러 이면을 이곳저곳에서 들춰보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뇌신경절(cerebral ganglia)등등의 적확한 용어를 사용해가며, 관련 내용을 깊숙이 파고들기도 하는데요.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밀도 높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전작들이 흥미로운 사례와 조금은 편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을 유려하게 이용하는 저자의 내공이 좋았다면, <의식의 강>은 어떤 면에선 조금 더 디테일하고 사적인 서술을 통해 독자들의 지적 갈증을 만족시켜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3. 책은 다윈과 프로이트를 지나, 최종적으로 <의식의 강>이라는 장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분히 확률적인 요소로서의 과학을 설명하면서, 책을 결말 짓고 있는데 이러한 결이 제목과 멋지게 어우러지며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게 됩니다. 오히려 뒷부분이 직각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마무리가 아니어서, 의식과 확률로서의 이야기들을 잘 담아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신분석과 관련의학계에서 그간 올리버 색스가 유려한 통찰을 보여준 삶 전체와, 의식의 강이라는 장중한 마무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멀리서 사모의 마음 바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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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후예 - 황순원 작품선 한국현대문학전집 (현대문학) 11
황순원 지음, 김수이 엮음 / 현대문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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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순원의 '링반데룽'과 나선의 계단.


   링반데룽은 (ringwanderung) 흔히는 산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현상을 말한다. 작품 속 주인공은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에서 링반데룽을 떠올려 내는데, 작품의 결에 이르러 이 환상방황을 자신과 설희의 관계로 확장한다. 설희와 자신 역시 길을 잃어, 저마다의 환상방황 (環狀彷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곤 그 둘은 적절한 반경 범위에서 한번 내지 두 번, 접점을 이룰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다만, 이제껏 그 타이밍을 놓쳐왔다고 얘기한다. 작가가 얘기하려던 골자는 이 스토리에 있겠지만, 나는 도리어 이 에피소드를 위해 끌어온, 친구의 환상방황(環狀彷徨)에서 전율하고 만 것이다.



   주인공의 친구는 동공마저 다 풀어진 상태로 묘사되는데, 그 와중에도 광채를 발하며 줄곧 한 곳을 바라보는 장면을 서술하며 작품은 시작된다.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인다. 초점을 잡으려고 애쓰면서도, 이내 놓쳐버리게 되는 그 시선의 의미가 내 유년기의 신념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친구는 고시에 합격하여 서게 된 교단에서, 그리고 여러 여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헛된 원을 그리는 자신을 봤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혼탁해진 시야에도, 실은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려 했던 것이다.



   나 또한 사회적인 요구에 이리저리 치여서 넝마가 되어서는, 기어이 눈을 내리깐 채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를 굴리며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나선의 계단이다. 나는 나선계단을 타고 오르는 중인 것이다. 원형을 돌고 돌아, 다시금 같은 자리에 떨어진 듯 보이지만 실은 한 층의 진일보를 일궈낸 것이다.



   나는 링반데룽을 겪으며 그저 같은 자리를 맴맴 돌고 있는 것일까. 혹은 정말 나선계단을 빙빙 타고 한 층씩 올라가, 시선이 머물던 그곳에 마침내 닿을 수 있을까. 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작품 속의 인물들이 나와 함께 이 시기를 겪고 있다는 텍스트는, 묘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나와 우리 친구들은 이 터널같이 어두운 시기 속에서도, 터널은 목적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어떻게든 떠올려 내어서, 기어이 접점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어본다. 다짐해 본다.























2. 황순원의 '곡예사'로 돌아본 나의 무대.



  작품의 시대배경은 ‘피난민’ 이나 ‘6.25 사변’ 같은 직접적인 단어들로 1950년대의 혼란스러움을 제시한다. 주인공의 가족들에게는 정해진 거처가 없다. 의, 식, 주 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하는 것이다. 작품에선 단적으로 ‘구공탄이나 들일 헛간’ 에서조차 쫓겨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는 먹던 치즈케잌을 조심스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순원의 작품들은 시종일관 간결한 문체를 보여주는데 그런 식의 담담한 묘사에서 오히려 울림이 큰 아픔이 느껴진다. 예컨대, 주인공이 집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전전하다가 들린 부둣가에서 “야, 바다란 아무 때 봐도 좋다. 가까운 눈앞에 갈매기가 껑충인다. 야, 멋들어졌다.” 라는 독백을 하는데 이 의미 없는 독백마저 작품 속에서 맥을 같이하면, 여유보다는 당대의 아픔이 저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몇 안되는 페이지 내내 ‘변호사 영감댁’에 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벼랑 끝에 몰린 한 가족의 가장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영감댁과 담판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늦은 나이의 군 복무라는 나름의 ‘변호사 영감 댁’이 있는데 아마 누구에게나 이런 ‘영감 댁’ 하나쯤은 마음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품은 정작, 변호사 댁이 있는 골목에 다다르는 장면으로 끝이 나지만 저마다의 ‘영감댁’을 품은 독자로써 우리는, 이 주인공을 온 힘을 다해 응원하며 페이지를 덮은 것이다.



  황순원의 많은 단편 중 단연 걸작으로 다가온 ‘곡예사’의 백미는 역시 이 결말에서 드러난다. 변호사 영감 댁으로 가는 그 최후의 길에, 주인공의 아이들은 그 간 속으로만 수천 번 외쳐온 노래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댄다. 이에 주인공은 ‘놀음패’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극이자 곡예요, 주인공은 이들의 단장이 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오늘의 이 곡예를 돌이켜보고, 슬퍼할지 웃을지는 몰라도 주인공은 이 모든 게 좋은 것이라며 아픔을 깨끗하게 승화시킨다. 단장님은 씩씩하게 굿바이!를 외치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방점을 쾅, 찍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쾌한 끝인사가 어떤 낱말보다도 슬프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우리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게 저마다의 배경 가운데서 존재하는, 필연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이 ‘아픔’은 문학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을 목격하는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그 수혜를 받은 2014년의 한 독자이자 곡예단장으로써 나는, 선임 단장님에게 경례를 드린다. 그리고는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놀음이었다고. 유예된 의무와 숱한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자꾸만 위태롭고 약해지는 내 허리에 팔을 둘러 준 선임 ‘곡예사’를, 언제라도 응원하겠노라고.





'카인의 후예' 

-아스팔트를 뚫고 피워낼 우리들의 꽃.





  서두부터 굉장히 아름다운 표현들로 눈길을 휘어잡는다. 지금껏 읽어온 황순원의 소설들은 대개 해방 전후를 기점으로 6.25 직후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 중에서도, ‘카인의 후예’는 1946년 초 평양 근교의 한 농촌에서 일어나는 해방 직후의 토지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선, 줄거리의 가장 큰 맥은 지주계급의 몰락과 인민위원회의 성립, 인민재판의 살벌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지주의 아들이 월남을 결심하는 마무리다.



   장편인 만큼, 여러 가지 모티프가 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크게는 제목부터 드러나는 구약의 ‘창세기’와, ‘견우 직녀의 설화’가 그것이다. 나는 이 자극적인 제목이 주는 의미에 우선 주목할 수밖에 없었는데, 카인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장자이자, 아우인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원죄’의 개념은 황순원의 작품에서의 ‘소유욕’과 대응된다. 등장인물들은 땅 몇 덩이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함께 해 온 이웃을 죽이고, 6.25라는 동족산장의 전쟁도 모자라 눈에 불을 켜고 서로의 사상을 지적하며 너 죽고 나 죽자,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 인’ 자와 ‘사이 간’ 자를 써서 ‘인간 (人間)’ 이라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야 인간이라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사람 대신 조금이라도 가지려는 욕망만 들이차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인의 후예’ 라는 수식어보다 적절한 설명이 있을까. 사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저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들과 오작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세상적인 덧없음과 대비되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저분한 상황 속에서 주목할 만 한 건, 주인공인 지주의 자식 ‘박훈’과 마름의 딸인 ‘오작녀’ 간의 순수한 사랑이다. 진흙 속에서 피는 꽃처럼, 세상을 둘러싼 것들이 변하고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어도, 오작녀와 그의 남동생 삼득이는 관계의 소중함을 지킨다. 그 소중함을 알아내고 만다. 칠월 칠석 하루를 기다리며 베를 잣는 ‘직녀’의 상징은 현실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 내는 ‘오작녀’라는 인물을 통해 뚜렷이 제시되는 것이다. 작품은 그들이 기어이 이어지는지, 에 대한 결말은 열어두고 있지만 그건 사실 의미가 없다. 이미 오작녀의 세월 속에서 피어난 ‘사랑’은, 그 과정은, 작품 속 지저분함을 말끔하게 해소한다. 그리고 그걸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이 아이러니를 짚어낸다. 우리가 정말 낫을 들고 멱살을 잡아야 할 상대는 서로가 아니라 ‘속세를 향한 욕망’ 인 것임을.




   이러한 시점에서는 더 이상 ‘토지개혁’ 이라는 당대의 문제는 인간이라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작금에 와서 ‘토지개혁’은 당장 현실의 ‘공무원 연금 제도’부터 ‘야스쿠니 참배’로 대표되는 옆 나라 일본의 역사의식까지, 수도 셀 수 없게 불어나 있다. 우리도 언젠간 이 뚜거운 아스팔트를 뚫고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작품 속 오작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그 씨앗이 되어 독자들에게 심어진다. 남/여와 인종을 떠나, 나아가 종족과 시대를 떠나서, 진정한 의미의 ‘배려’로 그러한 위대함을 되찾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인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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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철학 노트 - 철학이 난감한 이들에게
곽영직 지음 / Mid(엠아이디)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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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철학 노트

저자 곽영직

출판 MID

발매 2018.02.22.




들어가며…


  우선 저부터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과학과 철학은, 문과와 이과처럼 경계가 선명한 두 학문이라고 생각했었죠.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철학자이자 동시에 조각가, 화가, 과학자 등등의 직업을 겸비했던 위인인걸요. 어쩌면 그러한 구획은 현대의 기준에 불과하고… 다빈치는 그저 진리를 추구했을 따름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시작부터 웬 다빈치를 꺼낸 이유는…이처럼 학제 간의 구획을 지우는 시도가 오늘 소개할 책의 특별한 점이기 때문입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습니다. 일반 입문서에서는 대표적인 사상만 가볍게 소개하는 식인데 다분히 과학사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유려한 사고를 보여주는 책이랄까요. 칸막이 없이 지식들이 자연스레 뒤섞이는 모양새가 신선한 책입니다.







 
▲ 과학자의 철학노트



 
 
▲ 과학자의 철학노트




과학자의 철학노트


  철학사와 철학자를 연대기별로 나열하는 수준이라면 서평을 쓰지 않았겠지요. <과학자의 철학노트>의 서술구조는 어느 정도 전형적인 철학 입문서를 따르는 듯 보이지만, 내용은 역시 조금 특이합니다. 이를 테면 피타고라스 학파라던지, 상당히 과학사적인 양념들이 묵직하게 곁들여집니다. 그렇다고 그 농도를 진하게 타진 않아요. 독자 입장에서 가독성을 지킬 수 있는 선에서 중요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바탕으로 철학사가 전개됩니다. 


  물론, 학문이란 게 현대에 이르기까지 분기도를 다양하게 확장해왔고, 각자의 자리에서 점차 깊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쨌든 철학이란 테마를 구심력으로 가지고 있고, 구성적인 면에서 연대기별로 조직된 책이기 때문에,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철학과 과학을 어느 정도 양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다소 전형적인 얘기들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과학사적인 내용들을 담아내는 노력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철학사를 과학자의 체로 걸러낸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촘촘하게 내용물을 건져낸 부분도 있구요. (철학이라는 것이 앞과 뒤만 있는 게 아니라 양 옆은 물론 위도 있고, 밑도 있는 것일 테니까요. 과학자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면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에서 흔히 교양으로서의 철학이, 과학사와 잘 버무려진 점이 탁월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상당히 균형잡힌 철학 입문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주요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밀도 높게 다뤄내고 있어요…. 관련 부분 입문서가 필요하신 분들께 권유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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