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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내적 풍경:

권태와 우울을 발명하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파리의 우울>은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이상한책이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51편에 이르는 이 ()산문시는 니체의 아포리즘이나 카프카의 장편(掌篇) 소설을 미리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은 어떠한가. ‘파리의 우울이라지만 이 책 속의 파리는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 도시를 향해 시인은 외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 더러운 수도여! / 창녀들, 그리고 강도들, 그대들은 대개 그처럼 자주 가져다준다. /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에필로그, 287)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파리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그것에 작가는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울과 권태는 모더니티의 수도, 19세기의 파리를 몸으로 살아냈던 보들레르의 발명품이다. 이 독특하고 새로운 정서의 진앙은 시간, 혹은 시간에 대한 의식이 아닐까 한다.

 

 

! 그렇다!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지배자로 군림한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경련,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시간의 악마 같은 수행원들이 모두 되돌아왔다. / 맹세코 초침 소리가 이제 더욱 힘차고 엄숙하게, 일 초 일 초 시계추에서 튀어나와 말한다. “나는 이다. 견디기 힘든, 냉혹한 삶!” / 인간의 삶에서 어떤 희소식을 알려주는 임무를 띤 것은 다만 일 에 지나지 않는다. 그 희소식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지만. / 그렇다! 시간이 군림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몰아세운다. “이러! 짐승 놈아! 땀을 흘려 일해. 노예 녀석! 살아라, 망할 녀석아!”(이중의 방, 41)

 

무지막지한 시간 앞에서 시인은 정녕 나태의 화신에 지나지 않을까. 거리를 빌빌대거나(산책자!) 정반대로 방바닥을 긁는 것(몽상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혁명의 시대에 이어 자본의 시대가 도래했건만 우울과 권태에 절어 있는 자가 시간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라. (중략)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취해라, 206-207)

 

이른바 취함의 미덕은 부르주아적인 절제와 중용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대체로 보들레르는 데카당스가 하나의 미학 체계로 확립되기 전부터 이미 퇴폐의 시인으로 자리매김 됐다. 놀라운 것은 그것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공존하는 민감한 윤리 의식이다.

 

 

(자화상, 이랍니다. 처음 봐요.)

 

 

가령 괘씸한 유리 장수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세상에 누구보다도 악의 없는 한 몽상가가 오직 과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쉽사리 불이 붙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서숲에 불을 지른다. 이어 화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유리 장수를 발견하는데 그에게 갑작스러운 포악한 증오를 느낀 나머지 괜히 그를 집까지(7층에 있다!) 불러들인 다음 온갖 생트집을 잡아 그를 밀치다시피 내려 보낸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다시 문 앞에 나타나자 화자는 발코니에서 조그만 화분 하나를 집어 그의 지게를 향해 수직으로 던진다. 유리 장수는 나뒹굴고 유리는 박살난다. 그러자 화자는 자신의 광기에 더욱더 도취되어 인생을 아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라고 외친다.

 

 

 

을 향한 끌림은 자주 을 향한 갈망을 동반한다. 마찬가지로 패륜적이고 패덕적인 무보상적 행위의 저변에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강박관념이 깔려 있는 일이 왕왕 있다. 실제로 으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단어(mal)에는 고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들레르에게 있어 문학 자체가 악덕에 빠진, 온갖 소외된 자들을 향한 고통과 연민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한데 그의 병적인 자학 속에 자기 연민은 없었던 것일까.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춤을 추지도 않는 늙은 광대를 보며 그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서 이 광경에 마음이 사로잡혀 나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분석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방금 본 것은 한 늙은 문학자의 이미지다. 그는 한 세대를 즐겁게 해준 훌륭한 광대였으나, 그 세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어린애도 없으며, 그의 빈곤과 몰이해한 대중으로 인해 망가진 늙은 시인의 이미지! 잊기 잘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막사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늙은 광대, 94)

 

-고통의 꽃을 응시하며 우울과 권태에 몸부림치다 고독과 연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간 시인, 그런 시인의 이미지! 보들레르는 시를 통해, 더 정확히 자신의 시보다도 더 시적이었던 그 삶 자체를 통해 자신의 동갑내기인 두 소설가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업적을 성취했다. 바로 근대의 내적 풍경을 발견, 아니 발명하고 창조한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악의 꽃>을 읽지 않고 보들레르를 말할 수 없지만 시를 읽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차선책(?)으로 택한 책이 <파리의 우울>이었는데, 십수년만에 다시 읽고 많이 놀랐더랬지요. 너무 '모던'(!)해서요.  언제부터인가 벤야민과 보들레르가 한 쌍이 됐어요 -_-;;   

 

 

 

 

 

 

 

 

 

 

 

 

-- 시를 읽는 일이 어려워진다 했는데, 최근에, 간만에, 그리고 얼른 시집 두 권을 샀습니다. "오다, 서럽더라"와 "사는 기쁨". 두 시인의 (잘은 모르나) 삶의 궤적만큼이나 시 세계도 (일단 표제작부터!) 너무 다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둘 다 좋습니다 ㅎㅎ  '정든 유곽'과 '즐거운 편지'가 세월이 흘러흘러 이런 모습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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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교실에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새벽부터 불려 나와 수업을 하느라 힘들었던 탓에, 낮잠을 자며 쉬는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곧바로 교장의 호출을 받았다. 담임교사 역시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도무지 이 교장은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학교 안을 순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야말로 이 위대한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세련된 시민이요 국민을 위해 무조건 봉사하는 공무원이요 덧붙여 아이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희생하는 뛰어난 교육자이자 타의 모범이 되는 귀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교장이 속편한 자기기만에 빠져 시대착오적인, 정말 촌스러운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을 때 특수교사가 중병에 걸렸다. 도르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교실은 무척이나 황량했다. 병가를 낸 특수교사의 자리는 특수보조교사가 지켰다. 드디어 그녀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코바늘뜨기, 대바늘뜨기에 이어 퀼트에 푹 빠져들었다. 교장은 그것을 근무태만이라 꾸중하며 연일 징계를 내리겠다고 협박했다. 보조교사는 억울했다. 특수교사가 없기 때문에 보조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윗사람에게 하소연하는 것은 비굴하고 누추한 일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혼자 속으로 억울함을 삭히면서 더 큰 사랑과 희생을 베풂으로써 교장을 감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명예욕에 눈이 먼, 불운한 가정생활로 인해 괴로워하는 불쌍한 교장에게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을 보여주자. 그러고는 저 괄괄한 교장 부인을 위해 벽걸이, 가방, 냄비 받침, 주방용 장갑 등을 만들어 갖다 바치기도 했다. 그것이 효과가 있어, 교장 부인은 교장을 갈구는 수위를 약화시켰다. 사실, 출근해서 식사 때를 제외하곤 절대 교실 밖을 나가지 않는 그녀의 무던함과 묵묵히 퀼트에 몰입하는 뚝심은 높이 사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수반은 여교사들의 사랑방이 됐고, 다들 여기 모여 너나할 것 없이 퀼트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반에 인턴교사가 배정되었다. 교장은 인턴교사를 감시하기 위해 아주 작정을 하고서 수시로 특수반을 찾았다. 그리고 항상 그녀의 근무태만을 꾸짖었다. 서른을 목전에 둔 인턴교사는 정말 억울했다. 일을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할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라고 이런 깍두기 인생이 달가울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완곡하나마 자기 처지를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는 셋밖에, 아니 둘밖에 안 되는데 선생님은 둘이나 되고.”

그럴수록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힘써야지!”

슬슬 노처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그녀는 목구멍 너머로 히스테리가 밀려오는 것을 꾹꾹 집어 삼켰다.

하다못해 일지라도 쓰면 될 거 아니요?”

물론 일지를 써야지요. 하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써야 될지.”

여기서 교장도 숨이 턱 막혀왔다. 퀼트 감을 옆에 둔 채, 다소곳이, 하지만 오만하게 서 있는 보조교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보다시피 우리 인턴교사가 모르는 게 많으니, 잘 지도하도록.”

 

보조교사는 정말로 성심성의껏 인턴교사를 지도했다. 보다 효율적으로 퀼트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전부 인턴교사 차지가 됐다. 물론 아이들은 정반대로, 자기들 쪽에서 이 불쌍한 왕따선생님을 거두어 준다고 생각했다. 숙제도 해왔다.

 

, 아름이가 먼저 읽어볼래?”

소영이 언니가 읽으면 안 될까?”

?”

소영이 언니가 나보다 더 잘 읽으니까.”

그러자 인턴교사는 소영이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제목은 요일!”

요일? 그래, 이제 작문해온 걸 읽어봐.”

어제는 화요일입니다.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내일은 목요일입니다. 일주일은 무엇일까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지요.”

? 그게 다야?”

인턴교사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요일이 더 없는 걸 그럼 어떡해?”

, 이제 아름이?”

에이, 나 글자 못 쓰는 거 알잖아? 그래서 내가 소영이 언니한테 불러준 거야, 헤헤.”

인턴교사는 오늘의 일지를 요일이라는 작문으로 채웠다. 방학 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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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의 기둥과 지붕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교장은 아침 조례로는 모자라 특수반 아이들과 담당 교사들을 교장실로 따로 불렀다. 아름이는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이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윤은학! 너는 최고참 학생으로서, 민주주의학습단지의 건설 요원으로서 후학들을, 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할망정 불장난이나 주동해서 쓰겠나?”

은학이는 스스로도 책임을 통감한다는 듯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그건 불장난이 아니라 소꿉장난이었다, 소꿉장난을 하려면 불을 붙여야했다, 이것도 놀이의 일종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크는 거다, 등의 말이 열심히 쓰였다.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아 왔건만, 도대체 지금껏 여기서 뭘 배운 거냐? 소꿉놀이는 또 뭐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거늘 도대체 정신을 어디 두고 사는 거냐?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는 말은 함께 잘 놀라는 뜻이 아니야!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건 또 무슨 뜻이냐? 그건 학생으로서 학업에 전념하라는 뜻이야, 알겠나?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이 이 모양 이 꼴이니 어떻게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겠나, ?”

 

그때 갑자기 아름이가 교장선생님의 말을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 은학이 오빠는 민주주의 학습단지에서 벽돌 놀이 하는 거 좋아한단 말이야. 하지만 모래 장난을 더 좋아해, 그치, 오빠?”

아니, 이런 꼴통이!”

꼴통? 꼴통이 뭐야? 할아버지도 꼴통이야? 꼴통, 꼴통, 꼴통, 꼬끼오, 꼬리, 꼴뚜기, 꼴통, 꼴통, 꼴통.”

아름이는 숫제 노래를 부르며 제자리에서 발을 꼼지락대더니 점점 더 발을 대담하게 뻗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의 꽃병을 들었다 내리고 거기에 꽂힌 장미꽃을 장검처럼 휘두르며 교장실 안을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기어코 교장이 고함을 질렀다.

, 지금 어른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

옆이 있던 담임교사가 이미 창턱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한 아이를 잡아왔다. 아름이는 신경질을 부렸다.

에이! 뭐야, 왜 귀찮게 해? 오빠, 나 목마 태워줘! 언니랑 만두 먹으러 가자, ?”

하지만 오빠언니는 벌벌 떨고 있고 쭈그렁바가지 할아버지는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나한테 원수 졌어? 왜 그렇게 째려봐?”

허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아니, 도대체 이런.(여기서 교장은 또 다시 꼴통이란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적시에 자제력을 발휘했다.) 되먹지 못한 녀석이 어떻게,”

에이, 시끄러워! 할아버지 입 좀 닫아!”

?! 이런 꼴통!”

악에 받힌 교장은 저도 모르게 아이보다 더 못한 아이가 되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름이의 조그만 머리통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말았다. 아름이는 죽어라고 비명을 질렀다.

 

왜 때려! 할아버지가 뭔데 나를 때리고 지랄이야! 에이, 이 대머리야! 할아버지는 병신 쪼다야!”

아름이는 눈 깜짝할 새에 책상 위로 올라가 할아버지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 귀 언저리에 애처롭게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교장은 그 간의 교직 생활 동안 처음 당하는 이 수난에 넋이 나갔다. 무엇보다도 머리카락의 수난에 분기탱천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아름이를 뜯어내려고 용을 썼다. 그럴수록 아름이는 더 찰싹 달라붙어 머리카락을 온통 다 뽑아버릴 기세였다.

아이고, 아야, 아야, 아이고, 이 놈! 나 죽네!”

 

마지막 말에 다들 얼음망치에서 풀린 듯 부산을 떨었다. 어른들의 손아귀에 붙잡힌 아름이의 몸은 허공중에서 버둥거렸지만, 양손은 여전히 교장의 머리카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 소영이가 책상 위로 기어 올라가 예의 그 토끼 이빨로 아름이의 양손을 힘껏 깨물었다. 아름이는 저도 모르게 교장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은학이가 아름이를 온 몸으로 움켜쥐다시피 껴안았다.

오빠 뭐야? 왜 말려? 나한테 죽어볼 테야?”

아름이는 씩씩댔다. 머리카락이 손에 와 닿는 감촉에 재미를 느꼈는지, 은학이의 품 안에서 폴짝 뛰어올라 대뜸 은학이의 머리카락부터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짧고 굵었기 때문에 바싹 붙어야 했다. 은학이는 아픈 걸 참아가면서, 아름이의 편의를 위해 일부러 몸을 숙여 주었다. 그러고는 이제 막 고삐를 단 불쌍한 송아지처럼 어린 깡패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마저 찔끔 나왔다. 결국 교사들이 달려들어 아름이를 떼 내지 않으면 안 됐다.

 

충격을 받은 교장은 모두 다 돌려보내고 혼자 교장실에 틀어박혔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길고 푸석푸석한,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 귀를 덮고 있었다. 최소한 열 가닥은 빠진 것이 분명했다. 믿거나 말거나, 교장은 책상에 엎드려, 소리 죽여 가며 엉엉 울었다. 한참 울고 난 교장은 원한에 사무친 전사가 됐다.

 

*

 

우물이 폐쇄됐다. 나아가 교장은 일련의 조치를 더 강구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수반에 있던 성냥, 그 성냥의 존재근거였던 낡은 난로와 장작이 모조리 사라졌다. 불쏘시개 구실을 하던 착화탄도 같은 운명이 됐다. 때문에 날씨가 선선해졌음에도 특수반 아이들은 더 이상 난로 구경을 못하게 됐다. 감자, 고구마, 말린 떡가래, 군밤 등도 모두 추억의 음식이 됐다. 이제 추운 겨울을 맡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제로 부실하게 나오는 스팀뿐이었다. 실내에서도 아이들의 옷차림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고 행동도 굼떴다. 그만큼 활기도 잃어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각종 도구를 갖고 방종하게 놀다가 무슨 사고가 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위험의 소지가 있는 물건(그러니까 모든 물건!)을 교실 밖에서 갖고 있는 것을 금지했다. 고무줄과 공깃돌도 한 순간에 흉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에 소지가 금지되었다. 도구가 없어도 아이들은 거칠게 놀 수 있고 그로 인해 서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적어도 그런 성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노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지우개 따먹기나 실 엮기, 쌀밥 보리밥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놀이에 흥미를 붙이기 위해 각자 물건들을 하나씩 내걸었다. 교장은 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머리띠를 두르고서 학업에 열중해도 뭣할 때 사행성을 조장하는 오락을 일삼는 것은 교육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모든 놀이가 당장에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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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그루의 자작나무(?). 레르몬토프가 그린 수채화.)

 

 

운명론자도 비슷하다. 주인공인 불리치는 건장한 체구에 용맹스러운 세르비아 전사로서 동료 병사들 사이에서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대신 그 모든 열정을 도박에 쏟는 것도 그의 매력의 한 요소가 된다. 불리치의 영웅주의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제안하는 유희(도박)에서 극에 달한다. ,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운명과의 이 한판 싸움에서 불리치는, 어쩐지 그가 오늘 죽을 것 같다며 운명 쪽에 패를 걸었던 페초린을 이긴다. 하지만 귀가 길에 비명횡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페초린의 예언을 실현시켜 준다. 이어, 페초린의 운명과의 한 판 승부가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불리치의 살해범이기도 한 카자크를 거의 혼자 힘으로 생포함으로써 운명에 맞선 인간의 의지의 승리를 확증해주는 것 같다.

 

(많은 페초린들 중 하나 ^^;)

 

 

하지만 의지-운명의 변증법보다 더 절대적인 진리는 다른 곳에 있다. 살해된 멧돼지를 발견했을 때 페초린은 형이상학을 집어던지고 발밑을 보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어떤 형이상학도 없으며 그가 발밑에서 발견한 것도 한낱 돼지 시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돼지가 불가해한 운명의 힘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진리는 정녕 형이상학이 아닌 발밑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막심의 심드렁하지만 동정이 흠뻑 배어 있는 한 마디와도 일맥상통한다. “무슨 귀신에 씌어서 한밤중에 술 취한 사람한테 말을 붙였는지······! 하긴 그럴 팔자였겠지.” 안타깝게도, 페초린 역시 막심의 투정 섞인 예언(막심 막시미치)대로 젊은 나이에 객사한다.

 

(이 페초린은 처음 보네요-_-;;)

 

 

주인공 페초린의 삶이 마감되는 순간(“Finita la comedia!”) 독자의 시선은 작가 레르몬토프에게로 향한다. 구체적인 양상이야 어떻든 인물과 작가의 운명 사이에 다분히 신비스러운 유비 관계가 성립되어, 모종의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페초린-레르몬토프는 데카브리스트 난 이후 이른바 환멸과 절망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청년의 전형으로서, 심지어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러시아문학사에 아로새겨진다.

 

 

(브루벨이 그린 페초린. / 브루벨은 민음사판 표지로 사용된 그림([악마])의 화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러시아소설의 정점으로 본다면, <우리시대의 영웅>은 이 작품을 영어로 옮기고 훌륭한 서문까지 단 나보코프의 냉혹한 지적대로 결함이 많은 작품이다. 작품의 많은 부분이 건방진 아포리즘과 진부한 비유로 가득 차 있고 베라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실제 삶이 아니라 서유럽의 낭만주의 소설에서 옮아온 것처럼 창백하다. 작가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사적 거리는 결단코 확보되지 못했으며 장편소설에 대한 야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어쨌거나 기나긴 이야기 사슬에 머물고 말았다. 여러 모로 젊은 시인이 쓴 미숙한소설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나보코프의 애정과 감탄 섞인 말을 빌자면, 러시아 소설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겨우 이십대 중반의 작가가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쓴 것이다. 레르몬토프의 젊음-어림은 당시 러시아문학의 연령이었던 셈이다.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도저한 낭만성과 소설적, 즉 리얼리즘적 형식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 사이의 긴장, 그리고 나의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서 떠나는근대적 주인공 페초린의 창조는 러시아문학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 * *

 

 

 

 

 

 

 

 

 

 

 

 

(이십대에 써서 출간한 소설책들.)

 

불혹의 나이가 되면 절로 대가가 될 줄 믿었던 대학 시절, 처음으로 레르몬토프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때론 열정적이고 강렬한 그의 시에 매료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은은 대학교 4학년 때 발표된 내 등단작의 제목의 일부이자 제사가 되기도 했다. 역시나 그 무렵에 처음 읽은 <우리시대의 영웅>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페초린-레르몬토프는 내 안의 몬스터처럼 무섭게 자라버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의 배아였던 것이다. 이 작품이 내 청춘의 비망록처럼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키 소설의 주인공들 중 레르몬토프-페초린의 직계는 아무래도 [악령]의 스타브로긴이죠.^^; 이른바 '지하인'은 페초린의 변태, 돌연변이랄까요. )

 

실상 <우리시대의 영웅>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처럼 우리 모두의 성장기, 우리 모두의 청춘에 대한 솔직한, 그래서 아름다운 기록이다. 고로, 이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대가적인 필치로 펼쳐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아니라, 즉 삶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한 풋풋한 기대와 애달픈 불안, 때로는 낯 뜨거운 엄살이다. 말하자면, 레르몬토프는 (그 시절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랑에 실패한 비극적인 연인의 역을 맡고자 했고,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그것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양 조로와 피로의 포즈를 취했으며, 꿈을 제대로 키워보기도 전에 그 실현 불가능성에 탐닉하는, 또 삶에 배반당할 겨를도 미처 없었건만 그 배반에 분노하는 환멸의 시인이고자 했다.

 

 

 

 

 

 

 

 

 

 

 

 

 

 

 

작가에게 있어 환멸의 유일한 형식이 침묵이라면, 레르몬토프는 차라리 가슴 속에 펄펄 끓는 마그마를 담고 있었던 영원한 낭만주의자, 즉 영원한 청춘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초상이 곧 우리시대의 초상이 되기를 갈망했다. ‘우리시대의 영웅(주인공)’이라니, 얼마나 당돌한 제목인가. 이 작품보다 조금 더 전에 쓰인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것에 비하면(샤토브리앙의 <르네>, 콩스탕의 <아돌프> ) 이 역시 러시아문학 특유의 대책 없는 오만함과 극단의 발현일 것이다.

 

 

 

 

 

 

 

 

 

 

 

 

 

 

 

오랫동안 소망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내 손으로 번역한 <우리시대의 영웅>을 내놓는다. 이로써 레르몬토프에게, 또 이 작품에 진 빚을 갚는 기분이다. 폭탄이라도 맞은 양 35세라는 나이테를 뒤집어쓰고 보니 27세라는 나이가 자살이라면 모를까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서러운 나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러니까 레르몬토프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훗날 성공적인 데뷔작을 내놓으며 작가 인생을 막 시작할 나이에 목숨을 날려 버린 것이다! 27이라는 숫자를 곱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정확히 그 나이에 동경의 썰렁한 병원에서 죽어간 우리 문학의 영원한 청춘이자 모던 보이’, 이상(李箱)이 떠오른다. 문학이 좋으면 요절도 작가에게는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한 인간으로서 레르몬토프의 비극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로서 그의 희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민음사판 <우리시대의 영웅>에 표지를 제공한 브루벨의 <악마>. 레르-프의 서사시 <악마>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레르몬토프-페초린의 문학적 자아. 몽환적이죠? ^^; 실제로 봤을 때 '악마'의 하체를 덮은 파란색이 무척 뇌쇄적이었던 것 같은데요...)

 

-- 오랜만에 내 소설책들을 (표지만^^;) 다시 보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실험적(??)이라고 생각하는(그래서 정말 너무 안 팔린 ㅠ.ㅠ) <그러니 어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에 제목을 제공한 소설(<얼음의 도가니>)의 저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어제 막 다 읽은 그의 최근 작품집,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두 권 짜리 <페스트>를 읽어내면서 고전한 기억도 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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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혹은 젊은 날의 초상

-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

 

 

 

1. 요절한 천재 시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는 1814103(현재력 15) 모스크바에서 태어나서 1841715(현재력 27) 퍄티고르스크에서 죽었다. 일부러 운을 맞춘 것 같은 이 생몰년도와 그의 전기에서 유달리 문제적인 것은 죽음이다 

(작품의 특성상, 뭐, 여러 정황상, 완전 미남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흑흑, 아무리 봐도 좀팽이(?) 같이 생겼다는...-_-;;)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은 그루시니츠키를 결투에서 죽였지만 소설의 저자인 레르몬토프에게는 다소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1841, 당국은 레르몬토프의 방종한 생활을 종식시키고자 48시간 이내에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캅카스로 가라고 명령한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음울한 예감에 젖어 414일 길을 떠나는데, 허약한 몸으로 긴 여행을 감당하다가 그만 열병에 걸린다. 완치될 때까지 퍄티고르스크에 머물러도 좋다는 당국의 허가가 떨어진다. 가뜩이나 그에 대한 반감과 질투가 만연한 가운데, 713일 어느 저녁 모임에서 레르몬토프는 동창생이기도 한 마르티노프 소령과 말다툼을 벌인다. 마르트이노프는 그가 던진 농담과 말장난을 공식적 이유로 내세워 결투를 신청한다. 이틀 뒤인 715일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 마슈크 산비탈에서 두 명의 젊은 장교가 소설 속 한 장면처럼 결투를 한다. 그리고 레르몬토프는 마르티노프의 총을 맞고 죽는다. 그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때문에 그의 전기와 연대기는 페테르부르크와 캅카스 사이의 이동을 비롯하여 온갖 소소한 사건을 다 동원해도 극도로 짧아질 수밖에 없다.

(중략)

 

 

18412, 아르세니예바의 집요한 청원 끝에 레르몬토프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만 퇴역하여 문학에만 전념하고 잡지를 간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곧 사교계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 당국의 명령에 의해 다시 캅카스로 떠난다. 여로에서 주옥같은 시(지루하고 서글퍼, 나 홀로 길을 나서네, 예언자)를 남긴 채, 앞서 언급했듯 퍄티고르스크에서 사망한다. 그의 유해는 타르하니로 옮겨져 1842423, 아르세니예프 가족묘에 이장된다. 벨린스키는 이 새로운, 막대한 손실로 인해 가뜩이나 빈한한 러시아 문학이 고아가 되었다.”라며 그의 죽음을, 또한 러시아문학을 애도했다.

 

 

 

 

 

 

 

 

 

 

 

 

 

 

 

(나보코프가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가 쓴 서문이 참 마음에 듭니다...^^;)

 

2. 청춘, 혹은 젊은 날의 초상: <우리 시대의 영웅>

 

<우리시대의 영웅>은 당시 유행하던 연작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덧붙여 두 겹, 세 겹으로 이루어진 액자소설이기도 한데, 이는 단순히 검열에 대한 두려움 탓만은 아니다. 일찍이 시인으로서 명성을 날리던 레르몬토프였지만 소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짐, 공작부인 리곱스카야등은 모두 수작의 징후를 보여주지만 어느 것 하나 완성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소설 습작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시대의 영웅>을 써가며 레르몬토프가 유달리 고민했던 것은 구성과 서사 구축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작가는 총 세 명의 화자(여행자 ’, 막심 막시미치, 페초린)를 등장시켜 에서 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편을 창작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작품 속의 시간과도 거의 어긋나게 배치한다. 두 개의 서문까지 포함하여 총 일곱 개의 텍스트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캅카스의 젊은 장교 페초린, 우리시대의 주인공(영웅)’이다. 말하자면 <우리시대의 영웅>은 제목과 구성이 보여주듯, ‘주인공(영웅)’을 찾아가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페초린, 그는 누구인가.

 

(벨라)

 

벨라속의 페초린은 우선, 비극적인 연애담의 다분히 신비화된 주인공이다.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 염증이 난 이 청년 귀족 장교는 캅카스의 자연을 상징하는 족장의 딸 벨라에게 반한다. 결국, 카즈비치의 말을 미끼로 벨라의 동생을 꼬드겨 벨라를 납치하도록 하고 벨라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이내 시들시들해지고, 그 틈에 애마를 빼앗긴 분노, 벨라를 향한 해묵은 열정, 페초린에 대한 질투 등에 사로잡힌 카즈비치가 벨라를 살해한다.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이자 순진한 막심의 눈에 한없이 이상하게만 보이는 페초린에게서 여행객 화자는 당시 러시아에 만연한 바이런주의의 한 전형을 본다. 실제로 그의 눈이 포착한 페초린의 초상화(막심 막시미치), 특히 웃을 때조차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즉 웃지 않는 그 눈은 낭만주의 문학에서 공식화된 바이런주의의 표식(환멸)처럼 읽힌다. 막심과 조우한 페초린의 배은망덕한 태도와 냉랭한 반응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페초린의 일지는 그의 치기어린 염세주의와 냉소주의의 실체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교계의 한 장면(?). 레르몬토프가 그린 그림.)

 

가령 공작 영애 메리에서 페초린은 스스로를 내부에 두 명의 인간이 들어 있는 이른바 분열된 인간으로 정의한다. , “한 명은 삶이라는 단어의 온전한 의미대로 삶을 살고, 다른 한 명은 그에 대해 사유하고 그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작 영애 메리속의 페초린은 일련의 사건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기록하는 작가로서 자기반성과 자기해부의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소설의 주된 골조인 연애와 결투도 그 나름대로 흥미진진하다. 페초린은 유희 차원에서, 말하자면 가짜 사랑을 진짜 사랑인 양 연기하며 메리를 유혹하지만, 뜻밖에도 오랜 연인이었던 베라가 나타남으로써 진짜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진짜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젠 유희가 아니라 거의 목숨을 건 연극판을 벌인다. 이렇게 몇 개의 기만이 축적되어 크나큰 비극으로 이어진다 

(바이런은 정작 시보다는 이 인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것 같아요 @__@)

 

실상 그루시니츠키와의 결투에서 페초린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땅히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 궁극적으로는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영웅이기 때문이다. 페초린은 그루시니츠키에 대해 그의 목적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 말은 그 누구보다 페초린에게 해당된다. 이른바 모방 욕망은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인물들을(심지어 바이런을 영어로 읽는 메리까지) 감염시킨 일종의 병이다. 물론 페초린은 자신의 이 모방 욕망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자신이 주인공-영웅인 양 굴지만 실은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애처로운 형리나 배신자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5막에 꼭 필요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바이런 경과 같은 천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타만운명론자천재의 조짐을 보여주는 수작이기도 하다.

 

(결투. 역시 레르몬토프의 그림.)

 

특히 타만은 훗날 체호프가 극찬한바, 길지 않은 분량에 흥미진진한 인물들, 긴장감 있는 이야기 전개,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체 등 단편소설 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시대의 영웅>에 수록된 작품 중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다. 타만의 전반부는 낭만적이다 못해 거의 신비스럽다. 부정한 기운이 감도는 외딴 집, 불길한 귀머거리노파, 우울한 장님소년, 비밀로 중무장한 아리따운 처녀, 바람을 타고 저 세계로 떠나는 배, 달밤의 바닷가 주위로 펼쳐지는 모험들, 엿듣기-엿보기-미행 등은 하나같이 고딕소설을 연상시키며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예고한다. 하지만 바로 그 이면에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카프카스 추억. 유화. / 역시 레르..프의 그림. 재주가 대단하지요?^^;)

 

가령, 귀머거리 노파는 귀가 멀었건만 자기에게 필요한 말은 잘만 알아듣고, 장님 소년은 이름 그대로 눈이 멀었건만 야밤의 바닷가도 거침없이 잘만 걸어 다닌다. 페초린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낭만적 코드에 매인 나머지, 또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나머지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루살카에게 속아 물에 빠져죽을 뻔했을 뿐더러 물건마저 모조리 도둑맞는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당한다.

 

대체로 타만의 페초린은 벨라공작 영애 메리에서 환멸과 악마주의의 화신처럼 신화화됐던 그 페초린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타만의 등장인물로서의 페초린이 바보-장님으로 전락하는 순간은 화자-관찰자로서의 페초린이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로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 스스로 주인공-영웅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오히려 그는 소설적 인물로서도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또한 작가로서도 더 뛰어난 지위를 확보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계속)

 

--- <우리 시대의 영웅> 역자해설

 

-- 비교적 절박한 필요에 의해,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의 언저리를 돌고 돌아, 다시 레르몬토프를 읽으려 합니다.  '도.톨이'와 비교할 수는 없으나, 모든 작가, 작품은 다 자기만의 자리가 있는 듯합니다. 레르-프와 그의 <우리 시대의 영웅>을 상당히 잘 읽어낸 사람 중 하나가 시인 심보선인데요(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 정녕 그의 말대로 레프-프는 소설을 일기처럼 쓴, 그게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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