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처럼 무른 실존 






2003년 8월 아침


어디 농촌이나 어촌에서 막 상경했을까난곡이나 봉천동 달동네에서 탔을까.

가난이 줄줄 흐르는 바싹 마른 중년 여자광대뼈가 병색 가득한 낯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기세다.

못지않게 가난 냄새 풀풀 풍기는 옆자리 청년에게 말을 건다.

신촌 세브란스 가는 버스 맞쥬?”

청년이 살갑게 대해주자 말이 길어진다. 목소리와 몸짓이 모두 너무 크다. 못지않게 큰 눈은 '사팔뜨기'라는 비칭을 소환한다.

 

버스가 남영동을 지날 즈음 라디오에서 정몽헌 회장의 자살 뉴스가 반복된다.

정주영 아들이 왜 죽었대유?”

대북송금이니 뭐니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혀 하나만은 찰지게 맛깔나게 찬다

에유쯧쯧!”


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동정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우리의 두부처럼 무른 실존은

칼로 써는 것보다 손으로 뭉개는 게 더 쉽다. 


705A 파란 버스는 계속 달린다. 

중년과 청년도 달린다. 문제는 자살이 아니다. 


















천정환. <자살론>. 문학동네, 2020, 6-10

"그렇게따라서죽음 앞에 인간은 평등해진다... 자본가나 왕자에게조차 무한정 연민 받아 마땅할 풀꽃 같이 여린 삶이또는 두부같이 무른 실존이 있는 것인가누구나 돈이나 권력이나그보다 더한 권위나 관계를 다 무로 만들어도 좋을지기 힘든 제 몫의 삶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것인가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혀를 차며 동정할 권리를 가진 것인가. "(10) -> 저자의 의도와는 명백히 다르게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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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그리움 




담배는  


배 고플 때 피우면 배가 부르고 

배 부를 때 피우면 소화가 잘 되고 

잠 안 올 때 피우면 잠이 잘 오고 

잠 깨고 피우면 정신이 돌아와요.  


혼자서는 고독과 함께 외롭지 않고 

둘이 피우면 너 하나 나 하나 호젓하고 

서넛은 정겹고 대여섯은 즐겁고  

다같이 피우면 퇴폐주의의 연대가 되지요. 


아플 때 피우면 덜 아프고 

괴로울 때 피우면 덜 괴롭고 

슬플 때 피우면 슬픔이 잦아들고 

화 날 때 피우면 화가 가라앉더라고요, 인생 뭐 있나요, 어디.   


담배를 피우면 

아무리 어려운 러시아어 영어 논문도 술술 읽히고 

영감이 몽글몽글 샘솟아 소설 한 편이 일필휘지로 써지고

논문의 논지도 청산유수, 논거도 설득력이 생긴다, 라는 환각에 빠져요. 


담배는 과연  

종교와 정치와 과학처럼 민중의 아편이란 말씀, 

그러니 절대로 피우면 안 되겠지요?

한때 우리 나라는 마약 청정국이었는데요!  






* 황인숙 <시간이 뭉게뭉게>(<내 삶의 예쁜 종아리>) / 조르주 무스타키, <Ma Solitude>(나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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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 







12월의 어느 날 밤

아이는 아팠고, 나는 어둠 속에서 

하얀색 무광택 직육면체가 출현했음을 발견했다. 

아이는 다음날, 또 다음날 연거푸 계속 아팠고 

다섯 번의 쉼표를 찍고 또 아팠고 아주 만신창이가 됐음에도

계속, 계속 또 아플 기세였다.


그렇다, 1968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2022년 관악구 율리시스로 모노리스가 강림했고, 

그것은 모기 시체 묻은 하얀 벽지를 보호색처럼 입은 채

광개토대왕릉비의 성물 모독적인 조잡한 패러디를 자처한다. 


저렴한 옷장 하나에 등골이 오싹하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나 자신에게 

간만에, 이반 일리치와 같은 자기 연민을 느꼈다. 

나와 아이가 너무 불쌍한 것이었다. 


거실에서는 피콜리니 거베라가 검은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향해 야멸찬 눈빛을 쏘아 댔다. 

식물 주제에 인광이라니! 어서 그 눈 감으시오!

하지만 눈꺼풀도 없으니 영원히 뜨고 있을 수밖에


식물의 사심 없는 생김새에 이렇게 겁을 먹다니, 허.


"엄마, 저 작은 해바라기는 뭐야?" 

아들아, 저 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거베라란다.

이런 대화가 오가던 시절이 정녕 있었던가. 


모노리스에서 거베라로

소설에서 시로, 시에서 논문으로

장르 횡단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 '비현실적': 김한솔, 세바시 강연. 인생이 막막한 당신, 제대로 보고계신가요? | 김한솔 유튜브 '원샷한솔' @OneshotHansol 크리에이터 | #동기부여 #성장 #행복 | 세바시 1596회 - YouTube

 / <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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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이 그리움 






1.


"엄마, 옛날에 우리 모비딕에서 공부했잖아?"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던 아이는 

웃음과 말을 잃어버리고 

모비딕은 간판을 떼버리고

오늘 저녁은 그래서,

과거의 모비딕에서 

내 집으로 주문한 

베이컨 햄버거다. 



2.


교미조차 귀찮은 저 코알라도 살 집을

차지하려고 나무 싸움도 불사하거늘 

죽을 집마저 있는 나의 꿈은 단 하나, 

그저 내일도 오늘처럼 하루 10시간 이상을 자는 것. 


고래 배 속이든 악어 배 속이든

지상의 모비딕이든 지하의 미네르바든

하나의 악몽이 다른 악몽을 덮어 씌우도록, 

물컹물컹하고 끈적끈적한 어둠만 촉지되도록,

그렇게 촉지되는 감각만 존재하도록, 

그렇게 고양이의 웃음만 존재하도록,

꿈 속의 꿈, 자각몽 인셉션의 대하소설을 쓰는 것이다. 


베이컨 햄버거의 핵심은 놀랍게도, 파인애플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소나무 사과다.

과거의 모비딕에 사과도 있었던가.

햄버거 속 파인애플은 도넛처럼 핵심이 뚫렸고 

신화 속의 고래와 악어는 속이 텅 비었고 

아시다시피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다. 



3. 


"엄마, 울지 마, 나 이제 안 아파."


한때는 이렇게 말해주던 아이의 머릿속이 싹 비워졌다.

텅 빈 해골 안에서 아이는 무한한 자유를 느낄까, 

아니면 쓰라린 그리움을 느낄까, 

아니면 오직 아무 느낌 없는 느낌만을 느낄까. 




* 멜빌 <모비딕>, 도스토옙스키 <악어>,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크리스토퍼 놀란 <인셉션>,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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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낭비 




칼바람 부는 겨울날, 손님 하나 없는 허름한 식당

중년의 주인 내외만 덩그러니  앉아 낮술을 마신다.

심드렁한 노년 남자가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아줌마가 유일한 손님의 술상을 차리는 동안 

아저씨는  혼자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인다.


샤시문이 옆으로 밀리면서 찬바람이 훅 들어온다. 

형님일 안 나오고 뭐하십니까!”


마치 사이렌이라도 울린 양 

일용직 노동자의 아내이자 식당 사장인 여자는  양 날개를 퍼덕이며 선혈을 토해낸다. 


"당장 안 나가, 엉! 내가 당신한테 일을 나가라는 건 자존심 구기면서 돈 몇 푼 벌어오라는 게 아니야. 그깟 돈, 백 만원 벌고 그 백 만원 다 술 퍼 마셔도 돼. 사내가 밥 숟가락 놓으면 냉큼 나가야지, 집구석에서 이러고 있는 게 뭔지 알아? 이건  영혼을 낭비하는 짓이야!" 


12색 크레파스로 마구 칠한 것 같은 화장은 촌티가 풀풀 나고

푸석푸석 라면 파마 머리는 추의 미학조차 느껴지지 않고

피로와 궁핍이 밴 주름과 기미는 남루와 비루를 시전하고

한파에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 틈새로 터져 나온 낱말은 바로, 


영혼,

그렇다, 영혼이다. 


중년은 못 이기는 척 '형님' 노릇을 하러 나가고 

샤시문이 밀리며 다시 찬바람이 훅 들어오고, 노년은  

안빈낙도 소주 한 모금에 얼큰한 선짓국 한 숟가락,

진리는 바로 술국에 있노라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 

영혼을 낭비하지 말고 

건전하게 소비하며

영혼의 형식을 만들어 갈 것.


















<영혼의 문제> 15-23.

형님일 안 나오고 뭐하십니까!”(16)

당장 일 나가내가 당신에게 일을 나가라고 하는 건 자존심 굽히고 돈 벌어 오라는 게 아냐일 안 나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뭐하는 짓인지 알아이건 영혼을 낭비하는 짓이야!” / 나는 밥을 뜨다 말고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마치 색색의 크레파스로 함부로 칠한 것 같은 촌티가 풀풀 나는 화장미용을 목적으로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싸구려 파마인생의 피로와 궁핍이 잔뜩 찌든 남루한 인상그런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영혼이라는 단어의 울림은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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