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나의 존재 증명





매일 아침 죽다 살아난다

봄이여 서슴없이 오라, 야멸차게 맞아주겠노라!




스무 살도 되기 전 내 인생의 어느 봄에나 썼던 소설을 단 한 편도 못 쓰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가 범람했기 때문에 오히려

서사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졸렬한 변명이 아니며 

그 범람의 틈새로, 인간 숙주의 배를 찢고 터져 나온 에이리언처럼

시가 태어났다는 것은 결코, 수사법적 과장이 아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요, 물실호기랍니다

기회비용은 걱정하지 말아요, 면역 저하 숙주라면

시시한 바이러스도 살판 나지요, 기회감염이랍니다!


내 인생의 마흔 여덟번째 봄에 어김없이 출석하여 내 이름 석 자 새긴 동그란 도장을 찍는다

 

베란다 문 활짝 열고 봄맞이 대청소를 하노라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쓰노라 

꽃망울 터진 라일락 덤불 사이로 걸음마를 하노라

햇살꽃 피는 언덕에서 리코더를 부노라, 4월이여!


어김없는 나의 봄에 소설 부재 증명을 통해 나의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현존에 알리바이는 없어



_____ 


이상, <오감도 15> / 바흐틴... / 박목월 <4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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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나의 부재 증명 





1. 


사막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음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 있다 

나는 나의 봄에 결석했고, 극형을 선고받고 빚을 탕감 중이다

내가 결석한 나의 봄, 나의 존재에 알리바이가 생겼다 


2. 

내가 지각 중인 나의 사막을 나의 낙타가 걸어간다 

완연한 봄, 도금한 카멜색 낙타는 단봉 쌍봉 지방을 짊어지고

두 발가락으로 모래를 찍고 콧구멍을 막고 귓구멍 속 털을 일렁이며

서면지하상가를 걸어간다, 가게를 훑고, 분수를 지나,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가, 작은 의원과 약국을 스쳐, 아스팔트를 건너간다


어쩜, 낙타야, 너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 공간 속에 있을 수 있지? 


고답적인 희랍 신화 대신 적나라한 자연주의 소설 깊숙이 

아리아드네의 실도 없이 거울의 거울의 또 거울을 투과해

이카루스의 날개는 모형심장 속에 접어넣고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다이달로스가 새로 구상한 부전시장의 미궁까지, 나의 낙타는 타박타박 

잘도 걷고 나는 권총을 든 채 따라가는데, 자살을 권할 심산인 것이 분명하다


낙타야, 넌 절망이, 희망이 뭔지 아니까 나 대신 죽어줄 거지?  


서면지하상가 지나 부전시장의 미궁에는 발자크와 졸라가 싱싱하게 썩어가고, 돼지 배 속에서 탈출한 내장이 원래 모양 그대로 푹푹 삶기고, 늙은 마녀의 시뻘건 선짓국 솥에서는 콩나물과 우거지가 과자 뜯어먹는 아이들처럼 허우적대고, 연노랑 콩국과 투명한 면 사이로 얼음 큐브가 빙산의 일각처럼 뾰족 솟아 있건만  - 


어쩜, 낙타야, 너는 목도 마르지 않니? 배도 고프지 않니?


그렇다, 엄연한 나의 봄꿈에 나는 부재했고, 아, 일장춘몽이여!

그곳은 거울이 켜켜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거울 미궁의 극한,

미노타우로스는 없다, 있는 미노타우로스는 무한 제곱 거울이 복제해낸 

허허로운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특정하고 소명할 필요가 있다 

 

낙타야, 무서워할 것 없어, 모래 바람도 거울의 허전한 반사광일 뿐인걸, 걷고 걸어, 저리로 건너가서 너의 알리바이를 지우렴, 낙타야, 너는 그때 그곳에 없었어, 너는 지금 이곳에 있어, 너의 봄 속에

3. 

나와 나의 낙타,
한 마리의 잡식 동물과 한 마리의 초식 동물을 거울 속 사막의 봄꿈에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_____________________

* 이상, <오감도 15호>

* 황지우, <구반포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 바흐틴, "존재에 (나의)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는 없다." (мое) не-алиби в быт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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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바트 마테르 돌로로사

- 상실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냉장고 앞에서 

내 아이의 아내가 울고 있다 



"엄마, 여기는 너무 추워요. 바닥이 싸늘해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내 아이의 아들은 

구급차에 하얀 캔버스화를 실어주며 

그 신발 신고 집으로 돌아올 아빠를  

밤새도록 기다리다 아침 등굣길에 묻는다


- 할머니, 아빠 괜찮아요?


내 아이의 어린 아들과 딸이 

내 소박한 가을 정원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며 조잘댄다 


오빠, 아빠가 잘 때 사자 울음 소리를 냈다?


'화장중'과 영정 사진 밑에서 

내 아이의 아내가 울고 있다

내 아이의 아들은 말이 없다

내 아이의 딸은 동그랗게 종알댄다


엄마, 아빠 지금 화장하고 있어?



"엄마, 여기는 너무 뜨거워요. 눈도 부시고요. 아, 아플 틈도 없이 녹아내려요."



단풍이 세상 예쁘게 물들어가는 늦가을

내 아이의 늙은 아빠가 고흐의 푸른 바지 노인처럼

다리를 벌리고 주먹으로 두 눈을 가린 채 흐느낀다 흐느낀다

조만간, 먼저 간 아이 옆으로 가겠노라고 말한다 



"엄마, 어느덧 겨울이 오면 곧 봄이겠네요. 나의 시간은 41년으로 끝, 이제부터 있는 시간은 공기조차 빼낸 유골함 속 뼛가루가 썩는 시간이겠지요. 아니면, 그저 우리 기억 속의 시간일 뿐일까요, 엄마?"

  



____________


진은영, <스타바트 마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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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4-1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슬프네요...

푸른괭이 2022-04-13 16: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ㅠㅠ
 

간밤에도 착실하게 늙어갔다 







간밤에도 착실하게 늙어갔다 


*


덕분에

2022년 3월 21일 월요일

새로 태어난 살갗을 예쁘게 차려입고 

목도리도마뱀처럼 네 발로 기어 학교에 간다


큼직한 줌 화면 속에 아이들이 앉아 있다

나는 홀로그램처럼 엉거주춤 그들 앞에 선다

푸른 프로젝터 섬광에 장자와 나비가 번쩍!

나는 낯선 교탁 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웅성웅성 무언의 술렁임에,

젊은 킁킁거림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 virtual reality와 actual reality의 차이는

바로 후각, 냄새로구나! 

똥냄새야말로 이것이 매트릭스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증거다 

나는 내가 싼 싱싱한 똥을 주섬주섬 치운다, 그다음


앙상한 꽃뱀처럼 온 몸으로 기어 집에 돌아와 

하얀 거품 빚어 죽은 살갗의 장례를 치러주고 

밤 사이 새로 돋을 살갗에 손짓한다

와 줄 거지?


*


덕분에 

늘밤에도 최선을 다해 늙는 일만 남았다



***  



간밤에도 착실하게 늙어갔다. 얼굴에 비누 거품을 칠하고 세면대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거품에 대해 생각한다. 거품은 묘하구나. 내실이 없구나. 지속되지 않는구나. 터지기 쉽구나.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확고하게 존재하는 건 아니구나. 그러나 아름답구나.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구나. 그러나 천상에 닿기 전에 꺼져버리는구나. /.../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한, 인생은 거품이다. 그러나 거품은 저주나 축복이기 이전에 인간의 조건이다. ('거품을 좇는다'라는, 인간의 조건[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나는 쭈그리고 앉아 / 똥을 눈다(황지우, <심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최선을 다해 늙는 일(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게 눈 속의 연꽃>>) 



virtual reality, augmented reality, mixed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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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이빨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뼛가루 된 동생도 복직할 거구

아이도 다시 걸을 거구, 봄이 오면

나무도 겨울눈 열고 튀밥을 뱉을 거구

그렇게 모두모두 살아날 거구, 잘 살 거구  

 

프로포폴 10미리에 까무러쳤던 나는

죽음과 부활의 쾌감을 만끽했으나

몇 시간 마취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배 속 얼음에 제대로 까무러치셨다

 

급속 냉동한 간과 내장은 완속 해동 중 

 

이빨 없는 입은 삼키고 입 없는 이빨은 갉아먹는다

시간의 이빨은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을, 불멸의 가능성을 

죽은 상어의 우아한 균형을 좀 먹고, 예술가의 창고에서는

싱싱한 시체가 부패한 시체를 대체할 순간을 기다린다 

오, 호랑이 상어여, 포르말린 속에서 살아 있는 자로 부활하라!    

 

그러므로, 아이야

 

어느 날 죽음이 우리 방문을 노크 한다 해도

읽던 책장을 황급히 덮지는 말자

어느 날 시간의 이빨이 우리 목을 깨문다 해도

너무 큰 비명은 지르지 말자

 

황급한 비명은, 천기누설인즉,

어느 뼛가루가 흘린 것이었다

내가 죽었는데 세금고지서가 나오다니, 허허!

 

우리 인간이 죽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과 세금, 하느님 당신은 웃어주실 거죠?

우리는 정말이지 죽기 직전까지 내일 계획을 세우고

장래 희망을 논했단 말입니다, 흥!

 

 

*

 

 

-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기형도)  

- 어느 날 죽음이 내 방문을 노크 한다 해도 / 읽던 책장을 황급히 덮지는 말자 (최승자, 빈배... )

- 포르말린, 포름 알데히드

- 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데미안 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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