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미루어둔 봉준호 감독의 2003년 작 <살인의 추억>을 보았다. 러시아 갔다가 귀국한 것이 2004년 2월인데, 이 영화를 꽤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봤다는 후배한테 줄거리를 물어보며 '스포일'을 강요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범인이 잡혀?" 어제 좀 찾아보니 감독은 범인을 소위 '특정하지' 않았다고 한다.(나는 '특정하다', '특정되다'의 동사적 사용이 상당히 불편한데, 자꾸 들으니 편리해보이긴 한다.) 즉, 어쩌면 박해일도 범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99프로 범인으로 보이지만, 맨처음 취조당할 때 그가 하는 말에 힌트가 있을 수도. "죄없는 놈들 잡아다가 족치고~~" 등등. 어쩌면 그보다는...

 

"(가라) 밥은 먹고 다니냐? (가라)"

 

흑, 이 명대사 드디어 들었다. 정말 명불허전, 배우들의 탄복할 만한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그리 잘 재현했는지, 80년대 후반 농촌-도시의 중간쯤 되는 시공간의 모습에 정녕 나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천고마비라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노랗게 익은 벼들, 터덜터덜 신작로를 달리는 경운기, 철 없이 뛰놀며 메뚜기 잡는 아이(들), 경운기에 거꾸로 탄 송강호가 시신을 보러가는 줄은 몰랐다. 아, 물론 영화를 처음 봤으니. 이런 아름다운 대조의 미학은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를 지배한다. 첫 장면 남자꼬맹이가 잡던 메뚜기, 그런 메뚜기가 가득 담긴 병, 굳이 그것을 어른들한테 감추려는 제스처, 이건 또 뭘까. 다시 돌아가서 보고 싶었는데,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그래서 지금 머리가 무거움.)

 

누구나 느끼겠지만, 전두환/노태우(우리는 이 이름 자체를 발음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나뿐놈들!) 저 80년대가 영화 속에 만연하고 그 코드가 속속들이 박혀 있다. 무엇보다도, 말하자면 '우리 편'인 형사들, 특히 송강호와 김뢰하, 두 사람은 우리가 정녕 '폭력과 야만'을 살아왔음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아버지 변희봉은 급기야 퇴물로 사라지고 만다. 그 다음은 좀 달라지나. 송재호, 김상경 등은 보다 더 선진화되고 문명화된 버전이다. 패는 대신 말로 하려고 한다. '~깜'이나 '발바닥'이 아니라 '서류'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다음 전대미문의 흉악한 범죄(자) 앞에서 누구보다 더 '야만화'되는 것은 또한 김상경이다. 아마 그의 분노와 폭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중생 희생자와 앞선 장면(상처에 밴드 붙여주는 것)을 넣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역사가 퇴보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역사는 진보한다.

 

*

 

사실 <기생충>은 뒷북이지만 <살인의 추억>은 오히려 뒷북이 아니게 돼버렸다. "참 시의적적하다." '연쇄살인'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선진적인' 범죄유형이다.(라고 한다.) 아주 오래 전, 겁 없던 대학 시절에 본 데이빗 핀처 <세븐>에서,, (첫) 사건을 접한 노회한 형사 모건 프리먼의 대사. "It's just  beginning." 이걸 자막에 "연쇄살인"이라고 번역했다. 초짜 형사인 브래드 피트인가 누가 묻는다, 왜냐고. 답: 이유가 없거든. (이건 영어가 기억 안남 -_-;)

 

아마 화성 사건은 이 점에서 참 놀랍지 싶다. 영화와 달리, 실제 범인은 체모, 담배꽁초 등 꽤나 흔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순정만화스러운, 기품 있고 지적인 박해일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을 법하다. 손이 부드러웠다, 라는 디테일은 여러 모로 참 중요하다. 그럼에도 유재하, <우울한 편지> 관련 스토리는 거의 전적으로 소설적, 아니, 영화적 설정이라니, 여기서 감독의 미감이 엿보인다. 통상 악마적인 인물을 고급스럽게(?) 묘사한 여러 텍스트들이 엿보이기도 한다.(당장 떠오르는 건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다. 우선은 잘 생겨야 한다!) 형사들, 심지어 기자(박기자?^^;), 희생자들, 심지어 여타 '디테일'(봉테일!)에 대한 애정까지, 영화든 소설이든 무릇 예술은 자신이 담아내고자, 창조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 무한한 공부의 산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세상에 들판에서 링거를 맞다니! 영화를 본 뒤에야 어떤 장면인지 알았다.)

 

다른 한편, 시대에 대한 심판(?)도 물론 보인다. 결국 범인을 못 잡은 것이 결국 그것. 다 잡고 놓친 것이든, 아예 수사권에 포착도 못한 것이든 어쨌거나 이것은 '실패한 미션'에 관한 영화다. 즉 비극이다. 송강호가 형사를 그만둔 것도 그 상징일 터.(그런데 형사 안 하고 딴 일, 사업? 하면서 더 잘산다^^; 전미선과 알콩달콩, 아파트 좋고, 애도 아들 딸 둘이고^^; 과거의 이력은 아들을 취조^^; 할 때 빛난다!)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백광호가 죽게 되는 것, 쌩 하고 기차 지나가면서 송강호 손에 묻은 피가 그 표현. 그리고, 자신의 열등감과 분을 못 이겨 고깃집(술집)에서 폭행을 휘두르던 김뢰하가, 무심코(?!) 내두른 백광호의 나무토막(실은 못!)에 다리를 얻어맞는 것. 파상풍 때문에 급기야 그 다리를(그나마 무릎 이하라고^^;) 절단해야 하는 것도 그렇다. 송강호의 눈으로, 덧신(?) 신긴 그의 군화 한쪽을 살짝 클로즈업한다.

 

여러 말 필요 없다. 군홧발. 이걸로 80년대가 다 설명되는 것 같다.

흑, 그럼 나의, 우리의 학령기가 그렇게 참혹했단 말인가.

 

 

 

 

 

 

 

 

 

 

 

 

 

 

 

 

불과 10년만 뒤로 가도 엄청나게 옛날 같다. 유학 갔다가 돌아온 공항, 남자친구의 형(현 아주버니)이 마중을 나왔다. "이거 **가 주래요." 그러고 처음 받게 된다, 슬라이드 형 휴대폰. 그 당시에는 아주 기능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폰을 몇 번 갈고, 스마트폰으로 넘어온 것이 언제던가. 기계에 별로 예민하지 않아, 아마 아이가 두세 돌쯤 되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10년도 안 되었건만, 그 시절도 무척 옛날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80년대, 말해서 뭣하랴. 형사들이 모두 담배를 피운다. 실제 사건의 용의자를 보았다는 버스기사의 증언. 버스에 타서 옆자리에 앉았고 라이터를 빌려달라고 했다고. 헉, 버스 안에서 담배를? 그랬던 시절이다. 시골 버스는 더 했다. 할배들 다 담배 피웠고 아이 엄마들, 아이 업고 걸리고 그랬다. 기차안의 풍경도 그랬다. 심지어 객실 안에서 술판도 벌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말이 되는 것이었다. 'make sense'라는 표현 있지 않나^^; 비슷하게, 범인을 못 잡은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전경들이 모조리 데모 진압하러 서울 갔다고^^; 브리핑 하는 데 종이 걸어 놓고 하고 ㅋㅋ

 

*

 

아마 감독은 2003년쯤 이 살인마가 화성 일대는 어슬렁거리며 '살인의 추억'을 곱씹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미학적, 예술적 출발점. 송강호는 사업차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농수로를 들여다 본다. 첫 장면처럼 이 장면도 너무 예쁘고(!) 앞서 나온 남자아이의 대응처럼 여자아이가 또 나온다. "... 뻔한 얼굴... " "... 옛날에 자기가 여기서 한 일이 생각나서..." 정녕 악의 평범성이랄까. 아무튼 봉 감독의 추측은 틀린 셈이 되었는데, 역시나 그가 살인마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살인마는 살인을 멈출 수 없다, 아마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는 상황(죽었거나 다른 범죄로 감옥에 있거나)에 처했을 것이라는 유영철의 말이 결국 맞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진짜가 맞다는 그놈은 정녕 진짜인 거냐. 나도 너무 보고 싶다, 그놈.

 

(그리고 배우들, 왜 이리 젊냐..ㅠ 감독도 볼살이 통통한 것이 넘나 젊더라는 ㅠ)

 

 

가을의 논이 너무 예뻐서...

 

 

저 아이들도 다 컸다! 송강호는 넘나 큰 얼굴, 넘나 서민적, 평민적 얼굴, 이런 스크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인데, 바로 그것이 그의 무기였던 것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연기력은 물론 노력의 산물이겠지. 청장년을 거쳐 이제 중년. 노년의 그도 보고 싶다.   

 

*

 

막간에, 라고 썼는데 지난 2주 동안 정신이 없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서류(준비)'라는 것이 그 본질상 얼마나 G-R-인지, 얼마나 'ㅈ '같은지, 정말 입에서 'ㅆㅅㄲ' 이런 육두문자를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인의 추억> 속 형사들이 내가 할 욕 다 해준 기분. 욕의 카타르시스랄까. 나도 '미국'(실제는 일본으로 보냈다던데)에서 올 서류-결과를 기다리는 신세가 될 테니 이거야말로 정말 'ㅈ' 같다. 나도 주먹질, 발길질 이런 것도 마구 하고 싶은 심정인데, 역시나 대신 다 해주었다 -_-;; 심지어 교훈까지! 폭력은 안 돼, 안 돼^^;;  김뢰하의 종아리에 박혔다가 빠진 녹슨 못처럼, 폭력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를 죽인다.   

 

이제 슬슬 <악령>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전작주의까지는 엄두를 못내더라도, 그의 사실상 입봉작도 보고 싶다. <플란더스의 개>가 연애소설(^^;;)인 줄 알았는데, 이 역시 연쇄- 사건을 다룬 모양이다. 봉 감독은 어릴 때부터 처음부터 이런 '연쇄-'에 상당히 끌린 모양이다. (사실 <기생충>도 어쩌면 연쇄 사기극^^;) 스릴러와 블랙코미디의 결합. 그러게, 사람 참 안 변한다. 아, 나 잘 쓰고 싶다, 흑 ㅠ 나도 어릴 때는 싹이 없지 않았을 텐데... 아닌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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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작한 것이 박사학위 받은 직후인 2004년 3월이다. 이후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한학기에 주로 6학점 정도를 강의해왔다. 즉 두 강좌. 외부 강의는 별로 하지 않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고전읽기 강좌를 세 학기(?) 맡았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너무 멀어, 소위 가성비 때문에 계속 하지 못하게 되었다.

 

2019년 2학기. 몇년째인가. 15년인가, 16년인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2004년 3월 '갓박사'인 나에게 이런 미래를 보여주면서 이 길을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분명한 건 그 무렵 만 29세였던, 한국나이로도 갓 서른이었던 나는, 또한 내 주변의 많은 삼십대 박사들은 이런 참담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참담이 더이상 참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 이보다 더 참담한 참담이 우리앞에 바로 지금, 이 순간 놓여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참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러시아명작의이해>는 내가 2004년 3월에 (대학원강좌와 함께) 맡았던 강좌다. 내 인생의 첫 강좌인데, 스무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했으나, 다음 학기에는 거의 배로 수강생수가 불어났다. 이 강좌, 나는 무척 좋아했다. 첫 학기에 수업 들은 학생들은 지금도 이름이 제법 많이 기억날 만큼 각별했다. 이후의 수강생들과의 관계도 비슷하여, 혹자는 나의 다른 강의를 듣고 심지어 결혼식에도 와주고 그랬다. 학교 행정에 따라 맡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널뛰며 꾸준히 해온 강의다. 강의노트가 두툼해지고 논문도 많이 쓰고, 그것을 또 엮어 책으로 꾸렸다. 올해 내 책(번역서, 저서)이 두 종이나 나와(나올 것이라) 출간 작업은 내년으로 미루어졌다. 

 

한창 배불러오던 2011년 1학기, 출산 직후인 2011년 2학기에도 했다. 생후 1개월 남짓 아이에게 젖을 먹인 직후임에도 젖가슴이 커다랗게 분 채로 수업 들어간 기억이 난다. 아이가 갑자기 경련하여 한 번 휴강한 적도 있다. 이 강좌를 마지막으로 맡은 것이 2014년 1학기다. 아이가 시설(놀이학교)에 처음 간 학기다. 월수 1교시라는 극악한 시간표임에도 30명 안팎은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폐강 정원 20명은 넘었다. 그러니 개설이 되었겠지만, 여느 학기보다 많은 학생이 나갔다. 아이를 셔틀 태워보냈는데, 여러 모로 힘든 학기였고, 강의에 성실히 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후 정확히 5년 동안 이 강의를 받지 못했다.

'받지 못했다'라고 쓴 건,,, 받기를 무척 원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썼지만 많은 추억들이 들어 있고, 강의 준비하면서 표현이 웃기지만, 학생 공부도(?!) 많이 해왔다. 지난 5년 동안 소위 '입에 맞는 떡'을 먹지 못했다. 그 어떤 강의도, 첫 정이 무섭다!, 이 강좌만큼의 맛은 없었다. 그 사이 2016년 1학기부터 <창작의세계>를 맡아왔다. 러시아어문학쪽으로 마뜩지 않은 강의를 하던 중 솔직히 '웬 떡이냐' 하며 달려 들었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왔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노력이 항상 그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우리가 간사해서^^;) 때론 많이들 오고 때론 적게들 오고 많이들 와서 많이 나가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면 순항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되는 것 같다.

 

 

5년, 10학기만에 <러시아명작의이해>를 다시 맡아 기대가 무척 컸다. 20세기러시아문학 연구서도 쓰고 번역한 <지바고>도 다루고 나보코프도 싹 새로 읽고 등등. 허걱, 그런데 수강신청 인원이 한 자리ㅠ 그 사이 세월이 흘러, 폐강 정원이 20명에서 1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세상에. 그만큼 인기 없는 강좌가 된 것. 문제는 그 숫자마저도 못 채운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가령 행정 담당 교수들의 문제나 강의의 질이나 등) 보다 근본적으론, 세월 참 무상타! 우리가 이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수요가 없는데, 소위 '니즈'가 없는데, 공급이 무슨 의미 있나. 여기서 공자왈 맹자왈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른 강좌에서 아이들을 좀 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밝혀진^^;) 희망을 가져보았다. 다른 쪽은 강의실이 미어터진다. 항상 이렇게 차진 않는데, 시간표가 구미에 맞았는지, 동일 시간대 다른 강의가 보다 재미 없어 보였는지 아무튼 그렇다. 사실 이 강좌야말로 조금만 와도 되는 것인데.

...

초면에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여러분, 저리로 좀 가주시면 안 될까요?^^;; 그 여러분의 해맑고 천진한 표정. 러시아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저리로 좀, 하긴 관심이 있으면 벌써 가셨겠지만, 나도 해맑고 천진한 표정이 될 수밖에.^^;

 

*

 

결국, 폐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빈익빈부익부. 이 말이 딱 떠올랐다.

넘치는 강좌의 20프로만 떼가도 텅 빈 강좌를 살릴 수 있건만. 

정녕 '자유와 평등'을 양립시키기 얼마나 힘든가!

 

원래 시간표 대로라면, 왕년처럼(^^; - 이 말 참 초라하지 않나?^^;) 60명을 거의 다 채운 채 넓은 강의실에서 푸쉬킨 <스페이드 여왕> 강의를 하고 있어야 옳지만....

텅 빈 강의실을 뒤로 하고, 지금 이렇게 커피숍에 앉아 이런 낙서를 하고 있다.

 

 

텅 빈 강의실에 앉아 뒷모습을 한 번 찍어보았다.

하필 이럴 때는, 더 엿 먹으라고, 강의실이 넘나 넓은 것이다, 흑.  

 

 

*

 

이런 작은 불행은,,, 그러나 더 큰 불행 앞에서 참 초라해진다.

작은 참담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참담의 발생, 혹은 인지뿐인가? 

 

며칠 전 마흔살 남동생이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듣자마자 울고 불고 난리가 났는데, 그것도 잠시.

뇌종양이 일상이 되었다.

이런 문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정밀검사 나오고, 악성인지 양성인지, 양성 중에서도 종류가 많고

그에 따른 치료법(개두술 혹은 개두 없이 수술, 감마나이프, 항암 등등)을 분석하고

수술 날짜를 언제로 할지(추석 지나서 할 듯)

그 사이 병원비, 간호는 누가 할지, 입원이 길어질 시 간병인 여부 등등

 

위대한 비극은

졸지에

지리멸렬한 사실주의 소설,

심지어 질 낮은 TV드라마가 된다

 

그뿐이랴. 남동생에 대한 걱정은 금방,

나와 나의 아이에 대한 걱정이 커진다.

나도 어릴 때 경련 많이 했다던데,

더군다나 내 아이는 지금도 극 소량이지만 항경련제를 복용중이고

더군다나 소뇌(운동, 균형 담당) 이상이 여실히 보일 만큼 운동실조가 심각하고

다섯살 MRI에서는 아무 이상 없었지만

혹시 종양이 생긴 건 아닐까

지금은 아니라도 앞으라도 그 가능성이 높은 건 아닐까 등등

 

*

 

사랑했던 강좌가 폐강되는 것을 보면서 정녕 한 시절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벗이나 옆집 누구도 아닌 혈육이 암에, 그것도 뇌종양에 걸리는 것을 보면서 더 참담하게 깨닫는다. 잔치는 끝났다. 문제는 이게 진짜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가 더 문제다. 파티장도 치워야 할 테고 한숨 자고 나면 쓰린 속, 아픈 머리도 달래야 할 테고... 할 일이 오히려 더 태산이다.  문득 에로틱한 비유를 들자면, 섹스도 오르가슴도 우리 삶의 일부지만 그 이후에 찾아오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각종 너저분하고 역겨운 것도 삶의 일부이다.  전자보다 후자를 공유하는 것이, 그럴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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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만 더 쓰려고 한다.

 

과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진 자'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큰가.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가난한가.

정말 70, 80년대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우리 개개인, 그만큼의 자존감도 없는가.

흥, 그래 니 팔뚝(똥) 굵다, 이렇게 한 번 쏘아주고

나만의 삶을 살아갈, 개천의 미꾸라지라면 그렇게 살아갈

자존심이 그토록 없는가.

 

현재 '조국 뜯기'는 우리 안에 있는 치졸함과 불쌍함을 드러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드러나는 건 조국의 민낯이 아니라 우리의 민낯이다.

 

영어, 프랑스어처럼 러시아어 '가난한'도 '불쌍한'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사람이 돈은 없을 지언정, 가난할지언정 불쌍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그럼에도 왜 한 단어에 이 두 가지 뜻이 같이 있는가.

마흔다섯살도 얼마 안 남고 보니, 왜 그런지 알겠다.

 

그럼에도,

가난하긴 해도 불쌍하지는 말자.

다들 왜 이리 초라한가.

 

멋지게 차려 입고 고급한 하이힐 신고 인물까지 출중한 여자-대학생이 캠퍼스를 지나간다.

"확 발을 걸어주지 그랬어요? ㅎㅎㅎ"

내 보기엔 지금 그런 꼬락서니다.  

 

*

 

자식 입시 관련, 장학금 관련 조국 선생에 대한 실망감을 쓰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소위 '-감'이 아님을 말하지는 결코 않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식을 최대한 좋은 데 보내려는 건 모든 부모의 욕심이다. 정보력, 재력, 인적 자원 등 쓸 수 있는 건 다 쓴다. 이걸 왜 나무라나. 이건 흡사 그가 위인이, 성인군자가 아님을 나무라는 것과 같다. 애초에 그를 그리 높이 평가했던가?^^;;  

 

장학금 관련, 장학금이라는 말 자체가 '학습 능력은 있으되(공부 잘 하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 주는 돈이다. 그러나 학교마다 심지어 학과마다, 심지어 같은 학과도 학기마다 사정이 다~ 다르다. 과로 할당되는 이런저런 장학금을 꼭 써야 한다, 안 그러면 다음 학기에는 그 돈이 안 나올 수도 있다. 강의 조교가 정말 필요할 때는 못 받을 때도 있고(전임 강의에 배치되거나 과에 할당 인원-금액이 적거나) 반면, 나는 정말 필요없는데도 그 학생이 장학금을 받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강의 조교를 신청해야 할 때도 있다. 또 일단 신청하면, 그 학생이 받는 장학금만큼 최소한의 일을 맡겨야 하는 의무가 나에게 있다. 이건 그야말로 내부행정이고 그때그때 다 다를 수 있는 사안인데, 이걸 후벼파서 어쩌자는 건지.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 수는 있으나(지난 번에 썼다!) 그냥 그뿐인 것이다.

 

*

 

 

서해 바닷가, 해수욕장에서 더 빛을 발하는 나의 '핫핑크' 텀블러!

그가 (그것도 깔깔이 바꿔서^^;;) 들면 텀블러도 (긴 앞머리와 함께) 패션 아이템이다.

그러니 더 밉다고??^^;;  

그러게 자존감, 이라는 말을 한 번 더 곱씹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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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심지어 90년대 초반까지 사람들의 옷차림을 떠올려보니, 지금과 무척 유사하다. '배바지'라고 불린 허리 선이 높은 바지, 나팔바지, 혹은 폭이 넓고 심지어 허리가 고무줄로 된 바지, 일명 '몸빼'라고 했나. 단색도 많지만 화려한 꽃무늬나 기하학 무늬가 들어간 촌티 작렬 바지가 많았다. 치마도 폭이 넓고 주름 진 것(자연스러운 주름의 플레어, 좁고 규칙적인 기계 주름의 플리츠 등)이 많았는데 지금 유행하는 것들이다. 플로럴(꽃무늬) 플레어, 혹은 핏 앤 플레어(위쪽은 붙고 아래쪽은 퍼지는)는,, 어제 웬일로 갑자기 찾아본 '최수종 - 최진실' <질투> 노래 동영상 속 패션과 꽤 일치한다. 여기서 최진실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이렇다, 단색이라도 화사한 파스텔 톤이나 강렬한 원색이 유행한다. 장식도 비슷하여, 프릴, 레이스, 리본(끈) 등이 옷에 많이 사용된다. 잘못하면 무척 촌스러운데, 다들 이렇게 하니 이게 세련되어 보인다. 이게 유행.

 

엄마 꺼내 입는다, 라고 하지 않나.

만약 내가 20대 중후반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면 지금쯤 아이가 스무살 전후 나이가 되었을 터. 옆집 '엄친아' 아가씨 패션을 보니 그런 생각이 스쳤다. 펑덩한 연두색 몸빼 바지(혹은 월남 치마), 길고 풍성한 파마머리(사자머리), 조금씩 짙어지는 화장 등.

 

역사는 반복되고 유행은 돌고 돈다.

상상력의 빈곤?

하지만 똑같지 않다. 옷장에서 꺼내입은 엄마 옷은 어딘가 몹시 이상하다.

상상력은 조금씩 발전한다. 

 

처음부터 칸트가 이유 없이 좋았다. 

그 이름도, 얼굴도 좋다.

무엇보다도 세 비판서 이름이 좋다.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앎, 윤리, 상상력.

머리-행동, 마음.

앞의 두 개는 현재, 현실이고,

두의 한 개는 미래, 희망을 다룬다.

우리의 마음(취향)-상상력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다 줄 것인가.  

 

*

 

내가 자랄 때는 '식모'가 많았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부잣집으로 보였던 우리 큰집에도 식모 언니가 있었다. 입양도, 그렇다고 고용도 아닌 애매한 형태의 양육/교육, 같이 사는 것도 얹혀 사는 것도 아닌 역시나 애매한 동거 형식. 나도 친척집(외갓집, 나중에는 삼촌집)에 얹혀 산 경험이 더러 있다. 잠시 체류가 아니라 '살았다'라고 하려면 최소한 반년, 일년 이상은 되어야할 터. 그래도 이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다.

 

지금은 이사 갔지만 내 근처에 남자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는 아마 한동안 입양 사실을 모르고 클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입양하면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들 하고 나 역시 그런 편견이 컸는데, 사실 그 아이들이야말로 '선택된 아이'이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어떻든 산모는 그 아이를 지우지/죽이지 않고 낳는 쪽을 택했거나, 그런 택함을 당했다. 세상에 나온 아이는 어떻든, 잘 자라야 한다. 그 아이를 위해서도, 우리를, 우리 사회의 평안을 위해서도 그렇다.

 

1975년생 여배우가 한국에 왔다.

생김새부터가 남다르지만 사는 모습이 나이들수록 그녀의 내적 수준이 아주 높음을 보여준다. 아이를 낳아보니 알겠다,  안젤리나 졸리라고 남의 몸으로 애 낳는 거 아니다. 그런데 무려 셋이나 낳았다. 덧붙여 몇 명을 입양한 것인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피부색도 다른 아이를, 그것도 입양할 때 더 꺼린다고 하는 남아를 자기 돈과 노력으로 키우는 저런 일은, 범인의 정서로는 가능할 법하지 않다. 돈? 물론 많이 필요하다. 돈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긴 하되, 돈 있어도 저렇게 안 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

 

배운 자들, 똑똑한 자들의 자기합리화는 참.

그 좋은 머리를 자기 합리화에 쓴다.

그러기 위해 그  공부를 하나 보다.  

잘난 자들, 있는 자들은 좀처럼 화를 내지도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게, 점잖게, 귀족적으로 응수한다.

"'안이한'"(안'일'이 아니라!) 태도 역시, 잘나고 있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잘나고 있는 자들은 더 잘나고 더 있기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노력한다는 것을, 새삼 알겠다.

결단코 (내 스펙에 - 인생에) 빈곳이 있으면 안 돼!  

 

못난 자들, 없는 자들은 지금처럼 요러고(^^;;) 있느라고

계속 못나고 계속 없는 것이다.

 

*

 

 

 

 

 

 

 

 

 

 

 

 

 

 

 

 

엄하게, 칸트.

칸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 연배의 많은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윤리>(도덕?? -_-;;) 교과서에 언급된 그의 이름을 통해서다. 이른바 정언명령(-명법). 대학 온 다음 비판서 세 권을 샀고, 심지어 읽었다. 아, 너무 어려웠다. 지금은 출판사도, 번역자도 잊었지만, 한자가 무척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세대는 조금 더 부드러운(?) 버전으로 읽기 바란다. 칸트가 좋아, 장편 소설의 한 챕터 제목으로도 넣어보았다.

 

 

 

 

 

 

 

 

 

 

 

 

 

 

 

친해지고 싶었던 칸트와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면을 튼 것은 미학을 공부하면서였다. <미학개론> 수업 듣고 이런 저런 책을 읽는 중에 <판단력 비판>을 들여다 보았다. '판단력'이라는 단어는 '순수이성', '실천이성'과 운율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미에 대한 취미 판단, 취향에 박자와 음정과 운율이 어디 있겠나. 흥, 내 맘이야~ 그것을 철학(사유함)의 영역으로 끌여들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리라. 이건 내가 할 얘기는 아니고, 좋은 철학서, 미학서를 더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미학은 말 그대로 '미'에 대한 학문.

패션은 아무래도 '남'보다는 '여'와 더 연결될 수밖에 없다.

대학 초년 시절, 친구 따라 (강남 아니고^^;;) 남대문인지 동대문이지 어디 큰 시장 가서 반바지, 치마 하나 산 기억이 있다. 몽땅 꽃무늬에 리본에, 돌이켜 보면, 그 친구도 나도 다 '촌놈(년)'이었던 지라,  더더욱 촌티 작렬/작살이었던 것이다...

그런 꽃무늬, 프릴, 리본, 어깨 뻥(퍼프 소매) 등이 '꽃피는 처녀들'의 몸에 걸쳐져 다시 거리를 활보한다. 참, 이것이 어찌 그리 예쁜지. 동영상 속의 소녀-처녀 최진실, 김희애, (좀 더 오래 전) 민해경, 김완선, 이지연 등의 환생을 보는 느낌이다.

 

겸사겸사, 최수종과 최진실이 <질투> 주제곡 부르는 동영상은 눈물이 나서 끝까지 못 보았다.

그게 인생이다, 흑...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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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는 종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장학금이었다. 대학 입학할 때부터, 유학하여 박사학위까지 학창 시절 내내 장학금 인생이었고, 그 다음에는 각종 기금에 눈을 부릅 떴다.(지금은 공모전에??) 어쩌랴. 원래 작가는 '후원'('패트로니지')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오면서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안 팔리는 작가는 수가 없다. 다른 직업이 있으나, 비인기학과의 시간강사라는 자리 아닌 자리 역시 영원토도록 '장학금'을 필요로 한다. 한동안은 그렇게 학진(연구재단)에 목을 매곤 했다. 이제는 번역 인세 덕분에, 정녕 우아~하게 사는 셈이다.

 

정치와 정치인에 무관심하다고 썼다. 조국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짧은 동영상을 본다. 아, 정말 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귀족이구나, 싶다. 워낙에 무식하여 디테일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다 내놓겠다니, 그 '다'가 진짜 '다'는 아니겠지만 대단하구나 싶긴 하다. 소위 '필드'로 가면 부산 유지라고 할 수도 없을 동생의 시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디 커피숍 하나, 패스트푸드점 매장 하나 팔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 주차장 건물 하나 없애도 비슷할 터. 그럼에도, 있는 놈이 더한다고, 그마저도 지키려고 할 터. 무엇보다도, 담담한 어조와 자태가 참 인상적이다. 

(한편, 이런 논란과,, 조국의 사퇴가 꼭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유감스럽게도, 덧붙여둔다. 딴 놈들은 더할 듯 -_-;;)

 

그런데....

님아, 왜 자식 얘기는 하지 않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으나(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제일 분노스러운 것은 자식 부분이다.

참고 참다가 장학금 부분에서 터져서, 바쁜 와중에(!) 쓴다.  

 

남들과 똑같이 학력고사 쳐서 당당히 서울대 들어와도 장학금이 마냥 기쁜 건 아니다. 왜냐면 내가 가난함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자면, 원래 '장학금'이라는 말 자체가 '공부는 잘 하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성적이, 학점이 올라 장학금의 등급이 높아질 수록 항상 들었던 생각은, 내가 누군가의 시혜를 입는다는 것, 내가 그만큼 가난한 집 학생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불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더, 더,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나는 가난해서 이 돈 받는 거 아니야, 나는 니네들보다(이때 '니네들'은 누구??)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받는 거야.

 

장기적으로, 또 큰 그림을 놓고 보면 이런 독기(!)는 인간을 망친다. 인성이 비뚤어진다. 그럼에도, 그 인성이 최대한 덜 비뚤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장학금은 반드시, 조금이라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가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서와 심리를 다스리는 것은 그 학생의 몫이다. 그 시절의 나처럼 심리 상담이라도 꾸준히 받아라, 그런 혜택을 찾아서 누리는 것도 약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 그나마 '시스템'이라고 할 만한 학교 안에서도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면 사회생활 못한다. 꽤 지난 일이지만 '전두엽' 어쩌고 자살한 인문대생을 보며 그 무렵의 내가 떠올라 통탄했다. '전두엽 색깔'이라도 감사해야지, 그것도 없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수저'를 탓하나! 

 

서울대생들(다른 명문대도 비슷하리라), 요즘 잘 사는 애들 많다고? 그렇기 때문에, 계층의 레벨이 생기고 그 안에 끼지 못하는 아이들의 소외감은 크다는 점, 명심해야 한다. 과기고, 특목고 아이들은 자연스레 그들만의 컴퍼니, 소사이어티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걸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국가의 큰 그림 속에서 차이는 불가피하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여갈 생각을 해야지, <악령>의 한 대사대로 '금덩어리에 금가루를 뿌리는 격'(내가 좀 고쳤다^^;;)이다.

 

누군가에게는 1년 생활비(800만원 ㅠㅠ)인 것이 그 학생에게는 겨우 손바닥만한 샤넬 핸드백 값 정도일 것이다 ㅠㅠ

 

정말 있는 놈이 더한다니,

더럽고 치사해서, 이 말이 딱 나오는 가운데,

이것들아, 가난한 자들의 가난까지 빼앗으려 드냐?!

 

 

 

 

 

 

 

 

 

 

 

 

 

 

 

불똥이 엄~한 데로 튀였는데, 간만에 멋진 글을 한 편 읽는다. 나도 몇 구절 가져와서 귀감으로 삼는다. 다른 한편, '글쓰기'는 모든 분야의 기본임을 새삼, 실감한다. 의사도 각종 진단서 쓰려면 글쓰기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하물며 교수가 오죽하랴. 하지만 의외로 기본적인 글쓰기도 안 되는 사람이 많아, 심지어 그 중요성도 몰라, 개탄스럽다.

 

접속사도 별로 없고 힘 있는 단문으로 이루어진 명쾌한 글, 좋다. 사실 관계도 명확하고 소위 '음해'하지 않으면서 감정적 잉여 없이 관련자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한다. "이것은 합법과 불법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훨씬 큰 가치가 있다. 윤리, 배려, 책임성 같은 가치 말이다." 이 말은 나도 이참에 새겨둔다. 나한테 너무 부족한 자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 팔할, 심지어 구할의 장학금으로 살아온,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ㅠㅠ) 나로서도, "열심히 공부"라는 진부한 말을 다시 되새긴다.  "스스로 이 분야의 전문성을 증진하여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라는 말도 귀에 쏙 들어온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이게 직업의 기본이다. 나도 그 일을, 지금 해야 한다.^^;  지금 나한테 약속한다.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탈고한다, 장편!^^:

 

*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글 전문

 

(...)

 내 마음이 불편한 건 다른 데 있다. 이 일이 우리 환경대학원 재학생과 그리고 졸업생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상황을 목도하며 이들이 느낄 자괴감과 박탈감 때문에 괴롭고 미안하다. 이들에게는 환경대학원이 인생의 전부다. (...)

그런데 누구에게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이 너무 쉽고 가벼운 곳이다. 의학전문대학원이라는 목표 앞에 잠시 쉬어 가는 정거장이다. 자신의 학력 커리어에 빈 기간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

 이것은 합법과 불법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훨씬 큰 가치가 있다. 윤리, 배려, 책임성 같은 가치 말이다.

​(...) 

사랑하는 환경대학원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번 일로 자괴감 느낄 필요 없다. 박탈감 가질 필요 없다. 더 당당히 열심히 수업 듣고 공부해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여러분의 꿈을 실현하기 바란다. 우리 교수들도 더 열심히 가르치고 연구해서 여러분이 정말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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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8-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학금 얘기에 동의합니다. 성적이 우수하고(적어도 공부할 의욕과 근면성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우선권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 장학금이 없으면 학업을 지속해갈 수 없는 형편의 학생들이 분명이 있으니까요.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실제 장학금은 성적이 아주 우수하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공정하게 갔다고 생각해요. 다른 이슈는 차치하고 전 지금의 장학금 수여에 관련한 부문은 잘 이해도 안 가고 그렇게 외부 장학금이 남아돈다면 분명 그 돈의 운용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른괭이 2019-08-24 18:39   좋아요 0 | URL
지금도 형편 어려운 아이들 많고 이른바 상대적 빈곤, 박탈감은 예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외부 장학금, 예전에도 많았어요. 그렇다고 한들 저런 핵금수저 자식이, 더군다나, 저 전공을 계속 공부할 열의도 없는데 받으면 안 되지요 -_-;;
법전원도 장학금 많은데, 제 후배-제자는 아버지가 아예 신청하지 말라고 했다더라고요. 그게 소위 돈 있는 사람들이 가진 최소한의 예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