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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이 나올 것이다. 무척 행복하다.

 

교정지를 보다가(헐, 이것도 이제는 PDF로 보다니!) 한 소설 속에 묘사된 일본 여행의 경험이 상기되었다. 2009년 여름. 연구비를 받아(이런 좋은 시절이 있었구나!) 자의반 타의반, 원래 좋아하지 않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본어를 초급만 간신히 배운 터라 여동생과 같이 갈 계획이었는데 그 해 여름 동생이 임신이 되었고(그 조카는 다음해 2월에 태어났다) 그래서 나 혼자 떠났다. '혼자'를 소유, 전유할 수 있었던 시절이 그렇게 끝났음을 실감하는(그럴 여유가 있는!) 요즘이다.

 

어느덧 7년 전, 여름으로 돌아가 본다. 숙소는 <신오쿠보> 역 어디 허름하고 눅눅한 모텔이었고, 제일 가까운 번화가는 <신주쿠> 역이었다. (<기노쿠니야> 서점이 있는.)

 

 

타임스퀘어에서 맞은편(서든테라스인가?)을 내려다 보며 찍은 듯.  

 

 

내가 있었던 위치는 아마 여기, 화장실. 너무 더운 도쿄 거리에서 화장실과 백화점만큼 시원하고 또 군데군데 자주 있는 곳이 없더라. 44사이즈도 헐렁해 옷 입기 무척 힘들었는데, 출산의 이력과 마흔을 넘긴 나이는 어쩔 수 없다. 40킬로 훌쩍 넘기도록 들러붙은 살들, 절대 빠지지 않는다. 누구의 우스개소리대로 "헐 아직도 아이가 뱃속에 있는 건가?!"

 

 

동경 시내 어디 한복판.

 

 

마음에 들었던 도시, 요코하마. 저기 가서 이상의 권태의 첫 구절을, 그리고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을 떠올렸더랬다.

 

도쿄에 가면 제일 가보고 싶었던 곳, 좀 지루한가, 동경 대학이다.(홍고 캠퍼스) 의도한 건 아니고 길을 잘 몰라(?!) 뒷문으로 들어간 셈이 되어 의대, 도서관, 학교 정문, 이런 식으로 보게 되었다. 여기 의대(병원)는 이상이 죽기 직전 입원했던 바로 그곳인 걸로 안다.   

 

대학의 핵심은 역시 도서관. 내부도 구경했는데 의외로(?!) 고풍스러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든 명문대는 대부분 정문이 촌스럽다. 그 유명한 '아카몬'(붉은문, 이냐).  '극혐'할 만한 서울대 정문^^;

 

동경대학 가기 전에 들렀던 우에노 공원의 잉어들. 혼토니 코히가 잇빠이!

 

연못에 연꽃도 너무 예쁘오!

 

 

귀국하는 날(8월 초) 나리타 공항. 비가 많이 왔다.

 

등가방에 디지털카메라 하나만 들고 떠난 여행, 이런 자유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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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의 꿈을 접은 것은 좀 더 이후, 대학 다닐 때였다. 청년 모비딕은 대학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하루 종일 책을 나르고 꽂고 빼고 만지고 정리했다. 한마디로 책과 더불어 살았다. 책과 부대끼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작 책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책의 향기 보다 종이와 먼지와 곰팡이 냄새와 싸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적상이 웬만한 작가나 학자보다 더 박식한 다독가인 것은 정녕 딴 나라 얘기였다. 하루 종일 몇 십 권, 때론 백 권 이상의 책을 정리하고 나면 삭신이 쑤셨고 이라는 청각영상만 떠올려도 혐오감과 공포감이 밀려왔다. 급기야 책이 그의 악몽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꿈속의 그는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모로 누워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벽과 한 몸이 된 서가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빼곡히 들어차 있던 책이 그를 덮쳤다. 두툼한 <자본>의 모서리가 제일 먼저 떨어져 그의 척추 아랫부분을 툭 쳤다. 소프트카버여서 충격과 통증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잠이 확 달아났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는 찰나 <이방인>의 모서리가 그의 접힌 몸의 정중앙, 생식기에 떨어졌다. 짧고도 격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존재와 시간>이 직사각형의 자세 그대로 목젖이 보일 것 같은 그의 목 위로 고스란히 떨어졌다. 참수가 완료됨과 동시에 책들이 그의 머리통과 몸통 위로 와르르 쏟아져, 그는 그대로 책 밑에 매장되었다. 꿈속의 그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꿈의 후반부에서 그는 책의 칼날에 댕강 잘린 목을 천연덕스레 다시 붙인 채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짝(그것은 무한대로 넓고 두툼했다!)에는 니체 전집, 프로이트 전집, 카뮈 전집, 이상 전집을 비롯하여 각종 세계문학전집, 각종 한국문학전집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이 역시 무한대로 컸다!)에는 그가 사놓고, 혹은 빌려놓고 읽지 않은 각종 책들이 들려 있었다. 이 벌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는 책을 몸에 붙인 채 정작 읽지는 못하는 만성고통에 길들어져 갔다.

한없이 둔중한 와중에 갑자기 뭔가 저릿하고도 찌릿한 느낌. 요의와 변의를 동시에 느끼며 그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기도 전에 요란한 선풍기 소리가 귀를 때렸고 온 몸을 적셔놓은 끈적끈적한 땀의 촉감과 냄새가 감지되었다. 일순간 불쾌지수가 어마무지하게 치솟았다. 눈을 떴다. 사지와 몸통을 괴롭힌 묵직한 압통의 진앙은 한쪽 벽에 세워둔 서랍장 위에 얹어놓은 겨울 이불, 그리고 세간살이 몇 개였다. 괜찮아, 사장이 되면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공동욕실 겸 화장실로 달려갔다. 찬물에 땀이 씻겨 내려가면서 정신이 명료해졌다. 과연? 회의가 들었다. 사장이란 항상 하얀 목장갑을 끼고 책 상자를 나르거나 맨 손으로 주판을 튕기며 장부를 정리하는 자가 아닌가. 글쎄. 청년 모비딕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속에 열어두었던 서점 문도 영영 꼭 닫혔다.

(...)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무슨 사건이냐마는 이십대 때는 마구잡이로 하던 이 일이 이제는 정말 무슨 벼슬이 돼 버렸다. 왜 이리 안 써지는 것이냐, 하는 내적인 문제도 있다. 물론, 이게 제일 큰일, 제일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1월, 계획에 없던 소설창작 강의를 두 회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쓰는 글을, 그러니까 글 자체와 쓰이는 행위를 보고서 얻은 깨달음(!)이 크다. 뭐, 거의 에피퍼니(조이스냐 ^^;;) 수준이다.  한때는 나도 가졌었으나 이제는 없는 것, 그 젊음(=치기)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이냐. 결국은 성실이다. 이것은 농부인 아버지가  정한 우리 집 '가훈'이기도 하다.  정작 당신은 오히려 게으름-과에 가깝지만, 생각함에 있어서만은 '성실'하셨던 듯하고 거의 노동 불능 상태인 지금은 더 그러신 듯하다... 육신이 맛이 가니 정신은 더 맑아져...-_-;;

 

두 번째로 시간의 부족을 꼽을 수도 있겠으나, 이거야말로 염치 없는 핑계, 헛소리이다. 아니, 소설가가 소설 쓰느라 바빠야지, 딴 짓, 다른 일 한다고 바쁘면 그게 소설가냐. 특히 장편을 쓰기 위해서는 정녕 두루마리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 함은 그만큼 열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밖에 그럴 듯한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금 오직 내적인 이유여야 한다. 즉, 장편이 나의 '영혼의 형식'이 아니다, 이런 것. 간단한 예.

 

 

 

 

 

 

 

 

 

 

 

 

 

 

 

 

톨스토이와 살풋 동시대인이기도 한 체호프는 쟁쟁한 대가들의 제자-후배답게 장편에 대한 갈망이 컸지만, 본인의 재능은 아무래도 단편(기껏해야 중편)에 한정되었다. 적어도 그의 잘 쓴 소설은 모두 중단편이고, 지루한 소설은 다 (도-키, 톨-이에 비하면 엄청 짧지만!) (경)장편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도 단편이 걸작들이고, 그 다음, 이 경우 응당 얘기되어야 하는 보르헤스는 그 문학의 체질상, 또 원칙상 장편을 쓸 수 없는(쓸 필요도 없는) 작가이다.

 

 

 

 

 

 

 

 

 

 

 

 

 

 

75년 1월 생이고 93학번인 나는 굵직한 장편을 읽으며 문학의 세계로 들어섰다. 물론 중학교 때 필독 단편을 거쳤지만, 문학에 대한 꿈은 아무래도 장편을 통해 다져졌다.  굳이 전공인 도-키를 비롯한 러시아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 소설의 경우에도 박경리 [토지], 박완서 [나목]을 비롯한 많은 장편들 이 곧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항상 쪼가리(?!) 글 밖에 못 쓰는지. 그때  카프카가 나타나 위로를 해주었으나, 이것도 이십대 얘기이다. 서른 되기 전에 <이방인> 정도는 쓰겠지. 그 서른도 벌써 십여년 전에 내 몸을 뚫고 가버렸다. 그 흔적이  배와 허벅지의 군살로, 얼굴과 목, 손등의 주름으로 남았다. 

 

 

 

 

 

 

 

 

 

 

 

 

 

 

 

 

소설과는 무관하지만,  정초부터 집안에 '우환'이  크다. 아이의 염좌, 깁스에 이어, 서방이 죽을 뻔하다 살아나 나에게 이런 존재가 있(었)음을 아주 강하게 각인시켰다.  (초기 바흐친 말대로) 흡사  통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신체의 일부 같다. 다행히 얼굴 몇 군데 꿰매고 코뼈 수술을 하는 정도 마무리 되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삼, 내가 어린 놈, 늙어가는 놈 등 두 남자와 살고 있음을, 심지어 그 두 놈을 키우고(!) 있음을 환기하곤 화들짝 놀라버렸다. 뭐냐, 난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단 말이다, 이것들아!  사고 좀 그만 쳐라, 아웅~

 

 

 

 

 

 

 

 

 

 

 

 

 

 

 

 

아이 키우는 것이 무슨 유세는 아니지만, 이제는 이것이 소설을 읽는 하나의 잣대처럼 작용하는 듯도 싶다. 하루키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순정만화 같은, 2D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소설을 쓰고 있는 것도 그의 무한한 자유(그는 여전히 대학생이다!)와 무관하지 않을 터. 한편, 처음부터 우리에겐 '아줌마' 작가였던  그들의 필력과 ,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웅숭 깊은 시선 역시, 명실상부한 아줌마가 된 나를 자극한다. 

 

 

 

 

 

 

 

 

 

 

 

 

 

 

어느 문화권이나 '아줌마' 작가는 있다. 언젠가 <창비>에 서평도 썼던 작가.

 

 

 

 

 

 

 

 

 

 

 

 

 

 

집안의 우환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적잖이 줄었으나 그렇기에 그 틈새에 낀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툴툴대지 말고 쓰자. 쓰고 쓰고 또 쓰자.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사르트르, <말>, 267-268)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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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루종일 봤다. 학구적인 그대, 좋아 ㅎㅎㅎ

 

하지만 역시 육아는 힘들어 아침에 모셔다(!) 주고 하원 시간을 빨리 하는 중. 깁스를 하고도 눈 구경을 하고 싶냐,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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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글이 맛있다. / 밤에 글을 쓰는 일이 맛있다.

 

 

 

 

 

 

 

 

 

 

 

 

 

 

 

두 문장을 생각하곤 응당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산문집인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을 떠올렸다. 나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올빼미였지만, 어느 순간 보니 거의 나인식스 직장인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내가 쓴 모든 글은 논문, 소설, 산문, 리뷰를 막론하고 모두 해가 멀쩡하게 떠있을 때 커피숍에서 쓴 것이다. 읽는 글/책도 그렇다.

 

아이가 방학을 하여(연휴와 주말을 끼고 있어 한 열흘쯤 되는 듯하다ㅠ.ㅠ) 시간표가 와장창 무너졌다. 그 덕분에 이렇게 야심한(!) 시각, 아이가 잠들자마자 노트북을 켜 보았다. 이 황홀감이 너무 당혹스럽다. 뭘 해야 하나. 아, 옛날 같으면 지금 한창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텐데.

 

아까 읽고 있던 <백치> 연구서를 다시 볼까? 어림없다. 이 소중한 시각에 그 따위 지루한(-밥벌이용) 책을 보다니! 겸사겸사, 오늘 저녁의 풍경 중 하나. 연구비 받은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서를 읽는 나의 모습이, 얼핏, 한 2-30년쯤 내 모습과 겹쳐졌다. 사실상 단칸방, 중학생인 나는 공부방이 없어 항상 시끄러운 가운데 공부를 해야 했는데, 한날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고 애꿎은(그들은 놀 자격이 있다!) 두 동생이 아빠한테 종아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대략 그런 식의 학령기를 보냈기 때문에 늘 독방을 꿈꾸며 그 독방에서 늘 책을 보고 책을 쓰며 사는 삶을 꿈꾸었다. 한데, 옆에서 아이가 정신없이 오가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보채고 하는 와중에 식탁 위에  연구서를 펴놓고 있는 내 모습이 그 옛날의 모습과 어찌나 닮았는지. 피식 웃음이 났다.  돌고 돌아 제자리, 그리고 그 무덤은 내 손으로 파놓은 것. 반복은 불가피하고 어쩌면 그래서 변주가 유의미하고 또 소중하다. 그땐 울었는데 지금은 웃음.

 

<백치> 얘기를 해볼까. 이 소설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으나 소위 '심취'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심취하고 있다. 한자어로 점잖게 써서 '백치'이지 실상 이것은 어떤 검사 도구도 먹혀들지 않는 중증 발달장애나 지적장애를 일컬음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이런 소설을 썼고 또 (같은 얘기다만) 자신의 소설의 제목을 대놓고 '백치'라 했을까.

 

 

 

 

 

 

 

 

 

 

 

 

 

 

 

<백치>의 주인공 므이시킨은 간질병 환자인데, 작가 역시 그러했기에 여러 모로 문제적이긴 하다. 한데 아까 읽었던 연구서가 이 부분을 제법 집중 조명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이런 '병리학'의 문제(-간질, 즉 뇌전증)과 '성스러움'의 이율배반적 공존. 더 구체적으론, 소설적 그리스도의 형상화. 그리스도 자체가 이미 신성의 육화, 이긴 하지만, 이러한 존재에 살과 피를 입혀 소설 속 인물로 그리는 것은, 역시나 미션 임파서블, 도..키가 아니면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다. 여기서 대가는 스스로 고르는(골라지는) 싸움의 상대부터가 다름을 실감한다!

 

그 출발점으로 도..키는 백치, 간단히 병신(올해는 병신년이구나-_-;;)을 택한다. 그의 바보스러움이 곧 성스러움과 연결된다는 어찌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면서도 너무 모순적인 생각 속에, '우스꽝스러움'의 범주가 하나 더 개입된다. 이것도 마찬가지. 병신은 대부분 웃기니까 당연해보이지만 이것이 또 어찌 성스러움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도..키가 모델로 생각한 건 돈키호테이다.

 

 

 

 

 

 

 

 

 

 

 

 

 

 

그 다음 플롯. 이것이 문제는 연애소설이라는 것이다.  삼각관계를(심지어 사각, 오각 관계) 다룬 치정 소설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제. 바로 '아름다움'. 어쩌면 그러니까 아귀가 딱 맞는 것이다. '미'("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의 주제를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은 (가령 <악령>의 정치도 아니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등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백치>도 번안, 영화화했다. 볼만하다. 토시로 미후네는 여기서 로고진(일본 이름이 생각 안남) 역을 맡았고, 주로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많이 나온 하라 세츠코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역을 맡았다. 캐스팅과 연기가, 시쳇말로, 돋는다.

 

기말고사 서술형에서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세 작품 중 아이들이 마지막 작품을 제일 많이 고른 건 충분히 이해된다. 한데 <백치>와 <악령> 중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건 무엇 때문인지 좀 궁금했다. <악령> 수업을 더 부실하게 해서? 아니다. 나는 <악령> 매니아다. 마침 중간고사 끝난 직후 <백치> 수업이어서 읽을 시간이 많아서였나? 잠깐 생각을 해봤지만, 확실히 '정치소설'(<악령>) 보다는 '연애소설'(<백치>)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한데, 도..키가 쓰면 정치소설도 철학소설이 되듯, 그가 쓰면 연애소설도 종교(철학)소설이 된다. 그게 <백치>다.

 

<백치>뿐만 아니라 작가 전기 관련해서도 간질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다. 아이가 사실상 생후 1개월부터 (도중에 한 반 년은 걸렀지만) 항간질약을 복용해오고 있다. 통상 발달장애를 검색하면 연관어로 제일 먼저 뜨는 것이 뇌전증이다. 그만큼 간질은 뇌의 인지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도..키는 예외였다! 그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현대 의학이 판단-추정한 바로 그의 간질파는 측두엽(?), 주로 언어 활동을 관장하는 부분과 연결된다고 한다.) 요는 이것은 정말 질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뇌의 신경전달물질(혹은 과정?)에 어떤 이상이 생겨(혹은 한의학에서 말하듯, 오장육부에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이러저러한 간질발작이 반복되는 것에는, 좋은 것이든(가령 천재다~), 나쁜 것이든(악마가 씌었다~) 어떤 메타포도 있을 수 없다. 엄마는 수시로 내가 어릴 때 경기를 심하게 했다는 말을 했고 그 이유라 "속아지(성질)가 더러워서"라고 했다. (그때는 경기라는 것이 간질 발작인 줄 몰랐다 -_-;;) 그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가령 체했거나 열이 났거나 등등) 만 5세 이하의 아이가 간질성 발작을 하는 것은 의료적 조치(기다리는 것 포함!)를 요하는 응급 상황이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남들이 보면 우리 아이도 '환아'일 수 있겠다. 올망졸망 네 명의 조카들과 비교해봐도 운동발달 지연(=자조 활동)도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막 네살이 된 조카도 신발을 혼자 신는다..ㅠ.ㅠ) 그런데 주변에 아픈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뭐 성인도 그렇지만 아이의 경우 병이 정말 무서운 것은 (의외로 유전적으로 물려 받는 부분이 적으니) 그것이 지닌 '우연'의 테러이다. 하필 왜 내 아이한테 이런 병이?! 특히 장애와 소아암.

 

뭐든 더 쓰고 싶은데 졸음이 쏟아진다. 졸지에 2016년이 됐다. 언제부터 내 인생의 화두가 건강이 됐나. 아무튼 이렇게 되니 인생도 단순해진 것 같다. "엄마, 똥은 똥구멍에서 나와? (...) 하마는? 하마 똥은 하마 똥구멍에서 나와?" 다들 건!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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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음-분신과 아이

 

 

 

 

소설에서 닮음-분신 테마는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우선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에게서 닮음을 보거나(창조하거나) 그런 식으로 닮은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것. 고딕 소설이나 낭만주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몇몇 인물 쌍은 주인공-분신의 가장 심화된 버전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환상 문법의 진화와 맞물려 그 입지를 넓혀간 것인데, 정신분열증 같은 질환의 결과 있지도 않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호프만이나 포의 환상소설, 그리고 역시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한 챕터(이반 카라마조프와 악마’)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런 병리적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닮음-분신만큼 인간 욕망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주제도 없지 싶다. ‘변신의 경우 애초의 나의 존재를 깡그리 지워야 하는(, 한 번은 죽어야 하는) 희생이 요구되는 반면 분신은 그런 희생 없이 갱생과 부활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이 아이이다. ‘이되 아닌, ‘보다 크고 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 소설의 원형이 모험소설과 더불어 성장소설과 가족소설임을 고려한다면 아이는 소설 장르의 생존과 연결된 문제이다.

 

 

 

 

 

 

 

 

 

 

 

 

 

이십대 때 쓴 나의 중단편에는 분신이 곧잘 날것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워낙에는 넘어 섦을 표방하지만 실은 모방 욕망을 더 노정한 꼴이 된 젊은 작가 특유의 치기어린 만용의 산물이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쓴 박사논문은 숫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 분신과 분신 테마를 다각도에서 다루었고 비슷한 시기에 쓴 경장편(<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2003)은 큰 틀에 있어 /의 유체이탈과 같은 자아분열증적 대화의 기록이다. 첫 장편(<고양이의 이중생활>, 2009)에서는 주인공들의 내적 분열과 이중생활외에 아이(‘딸기’)의 형상에도 적잖이 공을 들였다. 한데 실제 삶 속에서 아이의 출현은 어떠했던가. “정녕 변증법대신에 -생명이 도래했다.”(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역자해설.) 이 당혹스러운 만남을 내 나름으로 파악한 삶의 큰 흐름 속에 위치시킨 단편이 우연론과 인과론(<문장웹진>, 2013)이다.

 

 

 

 

 

 

 

 

 

 

 

 

 

 

 

 

닮음다름의 역동성을 구현하기 위해 대놓고 여자아이를 바랐던 나의 기대를 무심히 배반하며 아이는 남자아이로 태어났으며, 이목구비와 함께 한 번씩 경기(驚氣)를 하는 불운한 체질(혹은 질환)은 나를 닮았다. 딱히 항간전제의 부작용은 아닌 것 같지만, 평균적인 성장 속도를 무던히 관망만 하더니 21개월을 넘긴 지금에야 간신히 한두 발짝을 떼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손을 잡아주어야만 걸음마 비슷한 모양이 된다. 역시나 그나마도 이내 피로감을 느끼고 주저앉기 일쑤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되는 과정이 이토록 험난할 줄이야!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만히 있어도 좋은데 굳이 왜 움직여야 하나, 기면 되는데 굳이 왜 걸어야 하나, 라는 식의 달관과 초월의 태도이다. 길쭉한 아이가 몸도 잘 못 가누고 비틀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딱한 표정을 감추기도 하고 더러는 어디가 아프냐, 병원은 가봤냐고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말하는 속도도 만만치 않다. 간혹 간단한 낱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대체로 표현하고 싶은 의사가 별로 없는 것 같고 굳이 그러고 싶은 의사는 손짓이나 표정이나 소리로 얼추 만족되는 모양이다. 이 도저한 느림과묵’, 심지어 침묵에 덧붙여 띵함을 두고서 외할머니는 제 어미를 일원어치도 안 닮았다라고 말한다.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 아이와 나의 관계는 또 어떻게 자라날까.

 

 

 

 

 

 

 

 

 

 

 

 

 

 

 

환경결정론과 에밀 졸라 식 자연주의는 많은 진실을 담고 있지만 유물론과 인과론을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한 온갖 학설을 동원해도 유전자’, 즉 닮음을 향한 인간의 끌림이 오롯이 설명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모성의 신화의 허위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나는 목표치가 낮아서인지 오히려 내 안의 모성에 놀란다. 아무도 아이에게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지를 묻지 않은 만큼 출생 자체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식의 칸트의 말도 수긍된다. 아이는 정녕 운명처럼 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흐름의 상징 같기도 하다. 그것에 맞서는 것 같지만, 그런 줄 믿지만 실은 그것에 휩쓸려가는 상황. 분신-아이를 만드는 순간 가 시작되고 가 곧 이다. 아이(동시에 아비-어미), 죄받을일을 두고 문학도 철학도 다 할 말이 많다. 어느 아버지아들을 향해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이성복, 꽃 피는 아버지)라는 참 시적인 말을 던지기도 했다. 소설의 말이 가닿을 수 있는 극점은 어디일까.

 

 

(대산문화. <글밭단상> 2013년 여름호.)

 

-- 리뷰 성격이 아닌 그냥 글(?)을 쓸 지면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차에, 저 청탁이 들어와서, '단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엄청나게(!) 많이 썼는데(특히, 분신 관련 얘기들, 레비나스를 비롯한 학자들의 '아이'에 관한 견해들) 결국 다 잘라내고 위의 모양새가 됐다. 겸사겸사, 아이 사진을 한 번 올려본다.

 

 

 

 

이랬던 아이가 이렇게 커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있었는데(이거야말로 나를 닮았다) 점점 힘이 빠지더니 이런 얼굴..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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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 2013-06-1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교수님 저 은정이에요!! 글은 늘 눈팅만 하다가 애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서 댓글을 남기네요. 찡그린 애기 사진이 웬지 정말로 선생님 이미지와 오버랩이 되는 이유는...^^;;
밑에 사진은 최근인가봐요. 많이 컸네요~ 얼굴도 뽀얗고 정말 예뻐요. 훈남이 될 조짐이!!^^
'느림'과 '침묵'이라... 애기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친해질까요? 하핫

푸른괭이 2013-06-24 09:07   좋아요 0 | URL
^^;;

이익훈 2014-09-1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돌아앉은 쉼표'라는 연극을 찾다가 네이버가 비슷한 곳 찾아준 대로 이 블로그에 왔습니다- 아 그런데 이 분이시구나, 반갑습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급성녹내장으로 실명위기 어쩌구까지 갈 때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들렸던 서점에서 샀던 책이 작가님의 책이었어요- 1998년도의 일이군요- 다행스럽게 저는 시력을 바로 찾았는데 잊고 있던 기억이 우연한 블로그 방문으로...- 강의도 하시는군요, 그사이 결혼도 하시고 번역도 하셨군요- 옛날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지는군요- 신림사거리, 음악학원... 그 정도가 기억나는데...요... 죄와벌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번역이 좋으면 아주 신나서 번역이 안 좋으면 때찌 하러 오겠습니다, 워낙 읽은 속도가 느려서 한참 후에 올거에요ㅋ- 작가님 소설 읽으러 가끔 들르겠습니다- 항상 좋은 작업 좋은 강의 많이 하십시오^^*

이익훈 2014-09-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가워 인사 먼저 하고... 윗글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의 분신이라... 생각도 안 해보고 직관력으로만 글을 읽던 사람이라 분석이 전혀 없는 맹한 사람인데... 분석적으로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이가 건강하게 잘 크고 늦은만큼 누구보다 더 '에렉투스'한 아이가 되리라 기도할게요ㅎ - 아주 잘 생겼어요 작가님보다ㅎ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1983, 미송 양은 여덟 살이었다. 미송 양의 아빠는 농산물공판장에서 일했다. 집과 공판장 사이에는 무척 넓은 시장과 무척 큰 공원이 있었다. 점심때마다 미송 양은 아빠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걸어갔다. 이 일이 미송 양은 참 좋았다. 동네 밖을 벗어날 수 있는,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미송 양의 가족은 마당이 넓은 집에 혹처럼 붙어 있는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주인집은 방이 세 칸이나 되었는데, 주인아줌마와 영신이 언니 단 둘만 살았다. 주인아저씨는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다고 했다. 미송 양은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덩치가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과 목에 수염이 잔뜩 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집채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일에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먼 바다를 가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빠의 도시락을 들고 살가운 봄바람을 맞으면서 시장을 가로질러, 또 공원을 에둘러 공판장에 가는 것과 비슷할까.

 

언니, 아빠 따라 바다에 나가본 적 있어?”

언니는 한 번도 없다고 말했고, 미송 양은 실망했다. 바다라는 곳은 공판장과는 전혀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에이, 언니 따라 멀리, 멀리 나가보고 싶었는데.”

이 말에 영신이 언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교회에 가볼래? 거기도 무척 멀거든.”

정말? 얼마나 먼데?”

버스 타고 한참 가서 또 한참 걸어야 되지.”

우아!”

미송 양은 어서 빨리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일요일 아침, 미송 양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예쁘게 묶어 올리고, 어깨 끈이 달린 주름치마를 입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양말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도 신었다. 영신이 언니와 함께 289종점까지 가는 내내 미송 양은 달떠 있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낯선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미송 양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울긋불긋한 간판들의 행렬도 끝이 없었고, 거리를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무리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미송 양은 커다란 눈 안에 집어넣겠다는 듯, 작은 머릿속에 아로새기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뜯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미송 양은 차들이 앞뒤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길 위에 섰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 저도 모르게 영신이 언니의 손을 꼭 잡게 됐다. 모든 것이 너무 크고 너무 넓고 또 너무 많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은 미송 양의 집 마당의 서너 배는 족히 돼 보였다. 건물도 무척 높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미송 양을 교회 안, 2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초등반 예배실 앞에서 미송 양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네가 더 빨리 끝날 거야. 어디 가지 말고 등나무 밑에 얌전히 앉아 있어. 알겠지?”

미송 양은 영신이 언니를 올려다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언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목사님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의 말은 길고도 길었다. 설교와 기도와 찬송가 사이로 아이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꾸지람을 했다. 아이들은 웃음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웃겨 더 많이 웃어댔다. 미송 양은 이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그랬기에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함께 떠들고 웃을 친구가 없는 미송 양은 심심하다 못해 외로워졌다. 미송 양에게 필요한 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3층에 있는 것이 확실한 영신이 언니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미송 양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등나무 아래, 벤치 주변은 낯선 사람들로 북적댔다. 당연히, 영신이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미송 양은 언니와 한 약속을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집에 가고 싶어졌고, 그 바람이 커지자 오줌이 마려웠다. 미송 양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1층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어둡고 길었다. 간신히 화장실을 찾아낸 뒤에는 줄이 길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미송 양은 3층으로 올라갔다. 중등반 예배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자, 말꼬리처럼 묶어 올린 머리채가 통째로 위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미송 양은 자기 옆에 서 있던 한 아줌마에게 물었다.

저어기요, 중학생 언니들 벌써 끝났어요?”

방금 끝났는데, ?”

미송 양은 황급히 고맙다는 말을 하고선 다시 등나무 벤치로 달려갔다.

 

등나무 주변의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이번에도 없었던 것이다. 언니가 자기를 버렸든, 길이 어긋났든 어쨌거나 이제는 혼자 힘으로 집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7년을 간신히 넘긴 미송 양의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다.

 

*

 

홀로 걷는 낯선 길은 어딘가 서늘했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쌀쌀해지고 세상의 색깔이 약간 흐릿해진 까닭인지도 몰랐다. 미송 양은 앞만 보고 걸었다. 오직 ‘289’라는 숫자만이 미송 양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교차로가 나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도 가도 길은 낯설기만 했고, 또 동시에, 가도 가도 제자리인 것 같았다. 바다 위를 헤매는 선원 아저씨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조그만 미송 양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여동생과 실잣기 놀이를 할 때처럼 그 생각들을 순서대로 붙잡아 예쁜 모양으로 엮어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 실잣기 놀이처럼 도무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미송 양의 눈앞에는 초록색 버스들로 뒤덮인 새카만 아스팔트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하지만 미송 양이 감당해야 할 인생은 실로 길고 험난한 것이었다. 아스팔트길은 찾았지만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른쪽 왼쪽 모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난감했다.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사정없이 아려왔다. 미송 양은 계속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달려오는 버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미송 양이 몇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버스는 이내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미송 양은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절로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미송 양의 맞은편에서 어떤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덩치가 무척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은 물론 목덜미까지 시커먼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꼭 상상 속의 선원 아저씨 같았다.

 

미송 양은 그에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289버스 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289? 아니, 어린애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영신이 언니 아빠가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는데요, 나도 멀리 나가보고 싶어서 영신이 언니 손잡고 교회에 왔는데요, 우리 집은 289종점이구요

다 좋은데, 그 영신이 언니는 어디 있어?”

 

오랜 고독과 불안에서 해방된 미송 양은 울먹이며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미송 양의 손을 잡았다. 엄마와 아빠가 늘 조심하라고 했던 모르는 사람과 함께 걷는 낯선 길은 뜻밖에도 어딘가 따사롭고 포근한 구석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나왔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저씨는 미송 양을 안아 올려 버스에 태워주었고 버스 운전수에게 동전 하나를 건넸다.

애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종점까지 좀 태워다 주세요.”

그러곤 미송 양을 쳐다보았다.

종점까지만 가면 혼자서 찾아갈 수 있겠지?”

!”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미송 양은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깼을 때 버스는 이미 종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미송 양은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달려갔다. 남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가 여동생과 함께 대문 밖을 초조하게 오가고 있었다. 영신이 언니는 그 옆에 힘없이 서 있었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 막 경찰서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하지! 그 먼 길을 혼자 어떻게 찾아왔을까!”

 

미송 양은 굶주린 배를 채운 뒤에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제야 중대한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어떡하지, 엄마?”

미송 양은 속이 상해, 양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옆에서 미송 양의 치마를 개고 있었는데, 호주머니에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절묘한 화음을 내며 앞을 다투어 떨어졌다.

! 차비도 있었구나! 그 아저씨 만나면 꼭 고마웠다고 말하고 오십 원, 아니 백 원 다 줘야지!”

 

하지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05/ <서울대동창회보> 20106월 제 387

 

 

--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

고전적인 형식의 성장소설-가족소설의 초고를 잡아놓은 터에, 정확히 그 초고를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터에 콩트 청탁이 들어왔고, 그 버리기로 결심한 초고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건져냈다. 분량을 맞추기 위해 말들을 많이 버려야 했다. 그 당시에는 좀 아까웠지만 지금 보니 지금의 크기가 딱 제격인 것 같다. '미송'이란 이름은 2010년 2월에 태어난 조카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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