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단어만 놓고 볼 때 얼마나 우아한가. '현기증'. 검색해 보면 이런 저런 것이 뜨지만 아무래도 나한테는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제발트의 소설은 언제 읽어야지 하면서도 결국 못/ 안 읽는 책.  

 

 

 

 

 

 

 

 

 

 

 

 

 

 

반면 '구토'는 순전히 말만 들어도 '구토'스럽다. 그래도 토한다, 역하다, 멀미 난다, 우웩, 토사물 등등 비슷한 의미의 다른 단어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우아하다. 무엇 때문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릴 때부터 좋아한 책. La nausee(맞나?), 아무튼 원어도 어딘가 좋았던 듯. 아주 오래 전인데, 옛날 남자친구가 마침 교보에 간다기에 원서를 사다 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난다. 그러고 몇 장 뒤졌던가. 적어도 그런 야망도 있던 시절이다.  

 

 

 

 

 

 

 

 

 

 

 

 

 

 

지난 수요일,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두 단어의 조합을 떠올렸다. 현기증과 구토. 복지관이었고 아이가 작업치료를 끝내고 4시쯤, 그룹체육을 하러 들어갔다. 웬일인가. 항상 비교적 얌전해보이던 홍**씨가 웬일로 괴성을 지르고 난리다.(지난 금요일, 나 대신 아이를 데려간 남편이 얘기해준 대로다.) 자폐, 바로 이게 문제다. 무발화 중증, 이것도 문제지만, 아무리 훈련을 해도 이런 식의 돌발 행동이 제어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시즌'인 모양이다. 그가 '엄마'와 함께 떠났다.

 

얼마쯤 지났나, 갑자기(그야말로 '갑자기'여서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출력물의 글자열이 흔들흔들, 휘청휘청거리면서 시야가 급속도로 망가졌다. 이건 뭐지. 가끔, 한 2, 3초 시야가 흔들리거나 약간 노르스름해지다가 멈추는 일은 더러 있었지만(물론 많지는 않았고), 이건 질적으로, 양적으로 아주 다르다. 머리통이 뒤로 툭 젖혀지는데, 아, 사람이 이러다가 곧장 기절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종잇장들을 내려놓고 머리를 벽에 기대도 보고 의자(여러 개가 붙여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도 본다. 시야가 너무 흔들려 눈을 감는데, 몸이 화끈, 훅 달아오르는 느낌도 든다. 잠시 뒤 화장실. 나온 다음에도 편치 않아, 저쪽 복도 구석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또 화장실. 정녕 현기증과 구토.

 

아이가 나왔다. 너무 힘들어 아이와 함께 좀 앉아 있는다. 또 구토.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3층 대기실로 내려간다. '태양에 지친 자들'이라는 미할코프의 영화 제목이 생각나는 풍경. 여기서 '태양'은 스탈린인데, 내가 말하는 건, '희망'. 장애가 이른바 '극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래서 나날이 더 지쳐가는 듯한 엄마들. 사실 더 큰 절망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런 정황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지적 장애 2급에 최근에 뇌병변 4급까지 추가. 겉보기에는 그렇게 심해 보이지 않던데, 그래서 등급이 나오더라도 훨씬 더 낮게(좋게) 나올 줄았는데, 엄마가 아는 아이의 실제 상태는 그토록 심각했던 것이다.) 대기실에 좀 드러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난다. "엄마, 다른 엄마들은 다 가는데 엄마는 왜 이러고 있어?" 다시 화장실. 토하는 엄마 옆에서 "엄마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서 등이 아닌 엉덩이를 두드리는 내 아이라고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옆에서 수돗물 틀어보며(걸레 빠는 곳) 키득거리기까지. 아이고, 내 팔자야.

 

간난신고 끝에 택시 타고 귀가, 집에 오자마자 엄청 토하고 방으로 들어가 눕는다. 다시금 시야. 세상이 이렇게 흔들린 적이 없는데, 이 흔들림의 양상과 지속 시간이 무섭다. 거물거물 천정을 보다가 곧 잠들었다. 깨 보니 7시였다. 한 시간 넘도록 잔 것이다. 이후, 또 다시 구토와 현기증의 연속. "엄마가 아프니까 내가 위로해줄게." "엄마, 나 배고픈데?" 늘 그렇듯, 이런 날은 꼭 남편이 출장 중이다.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급체한 것 같다. ("엄마가 아까 배아프다고 했잖아?") 증상은 생각보다 빨리 호전되어 다음날 아침에는 일상 생활이 가능해졌고 오늘, 아이의 개학이 연기되어 나도 계속 '놀탱이' 모드다. 그런데, 활자열, 문자열과 마주하며 그저께와 비슷한 그 현기증이 미약하게 다시 재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유학 시절부터 시작되어 최근들어 잦아진 이명까지 합세. 나이가 우리에게 안겨준, 참 달갑지 않은 종합선물세트다. 아, 고맙지만 됐어요~ 그래도 자꾸 떠미는 것이다, 이 선물. 문제는 그런데 이게 아니다.

 

 

 

 

 

 

 

 

 

 

 

 

 

 

이 책이었지 싶다. 김현 선생의 일기 어딘가에, '매일 혈변을 본다, 무서운 건 혈변 자체가 아니라 그걸 무서워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하는 식의  문장이 나왔던 듯하다. 20여년 전에 읽은 문장이 새록새록 '재발', '재생'한다. 원래 위장이 약해 구토를 많이 하는 편이다. 한 번 꼬이면 이삼일은 족히 간다. 찬겨울이거나 다른 요소와 겹치면 일주일씩 앓기도 한다. 그래서 구토에 관한 소설도 한 편 썼다.

 

 

 

 

 

 

 

 

 

 

 

  

 

 

 무서운 건 이토록 상습적이고 하찮은(!) 증상 앞에서 의기소침해지는 나 자신이다. 그저께 그 현기증이 너무 아뜩하여, 한참을 뇌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아주 쫄아버렸다. 바로 직전에 오른쪽 어깨가 너무 아파 계속 파스 부치고 약을 먹던 중이라, 혹시 이 모든 것이 더 무서운 어떤 것의 일환이 아닐까 말이다. 죽을병에 걸릴(-렸을)까봐 너무 쫄다보니 자살 따위에 대한 생각이 아주 없어져, 이것 하나는 좀 좋다. 더 이상 많은 것을 의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그럴 힘이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하나만 해야 한다. 우리 말 번역 [구토]도 다시 읽기 힘들다, 원서는 고사하고.

 

*

 

- 엄마 좀 누워 있을 테니까 아까 읽은 책 제목만이라도 써봐.

 

 

다음 날 보니 진짜로 사실상 제목만 딱 써놨다. "이름을 이렇게 쓰면 어떡해? Carle 이렇게 써줘야지!" "어, 너무 길어서 짧게 줄였어." -_-;; 아이 방학 숙제의 마지막으로 고른 것은 다 음식, 먹는 것 관련 책이다.

 

 

 

 

 

 

 

 

 

 

 

 

 

 

작업 치료 들어가기 전에 대기실에서 아이와 함께 <투데이 이즈 먼데이>를 봤다. '읽었다'라고 하기에는 글자가 너무 적다. 아무래도 노래 책이니까.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에서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바로 왼쪽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 '사대주의'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나, 달리 선진국이 아니다. 어떤 아이도 저 아이의 장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다 같이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신나게 먹을 뿐이다. 이 책은 그냥 평범한(?) '노부영' 중 하나이지, 딱히 장애에 관한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배려가 있는 것이다. All you hungry children, come and eat it up!

 

 

보다시피 지체장애는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정신장애(지능장애와 정서장애)이다. 말 한마디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씨를 보면, 누구라도, 심지어 우리조차도 무서워할 만하다. 지난 주에 남편은 애 귀를 막았다고 한다. 참 어찌해야 할지.

 

*

 

오늘로 아이의 방학 중 돌봄교실 생활은 끝이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학기 중 스케줄로 간다. 어제, 활보 선생님이 아이 점심 먹는 걸 도와주러 오셨다가 그냥 가셨다.(-라고 한다.) "친구들하고 웃으면서 밥 잘 먹고 있어서요~" 제발 좀, 이렇게만 자라다오!

 

*

 

무엇보다도, 먹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식판이 엄청 크다. 많은 아이들이 싹싹 긁어먹는다. 아이가 적게 먹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내 식사량의 두 배는 되는 듯하다. 그런데도 체중 증가 속도는 내가 더 빠른 듯하다. 체형의 변화 역시 눈에 뜨인다. 역시 나이. '청년' 속도로 질주하던 태풍이 졸지에 '노인'이 되었다더니, 나는 계속 귀가 먹먹하다. 다시 현기증이 올까봐, 세상이 흔들릴까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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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를 다 읽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어 컴퓨터를 뒤졌다. 2천매에 육박하는 소설 초고가 나왔다. 원고는 불타지(사라지지) 않는다! 결론도 내놓았고 제법 다듬어 놓았던데, 아무래도 나 스스로 완성된 소설이라 여기지 않은 것 같다. '탈고/완고'하지 못한 것. 2007년 11월쯤. 누구나 다 쓰고 싶어 하는, 소설의 원형인 성장소설이자 가족소설이자, 물론, 밑천이 없다 보니, 자전소설이다. 이걸 옆으로, 앞뒤로 뻗어내면 대하소설(역사소설)이 된다. 이런 욕심이 계속 있어 다른 식으로도(내 주제 안 맞게 약간 추리소설? 스릴러?) 써봤는데, '폭망'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듯하다. 한 선배가 "쓰는 양은(-만 놓고 보면) 조정래 수준이다"라고 웃으며 격려(?!)해 줬던 기억이 얼핏 난다.

 

 

 

 

 

 

 

 

 

 

 

 

 

 

(요즘은 안 읽는 분위기지만, 어릴 때 빼곡한 세로 활자 책으로 탐독했던 책. 이런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듯하다. 최근에 그녀의 딸이 (아마 제법 중증의) 지적장애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그 무렵에 많았던 도서 대여점에서 빌려서 3부까지 완독했던 책인데, 내 머릿속에서는 인물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 버릴 것 없는 최고의 대하소설로 남아 있다. 최근 안희정-김지은 사건을 보면서도, 얼토당토 않은가, <토지>의 한 부분을 생각했다. 어떤 하녀가 최치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최참판댁 부인한테 얘기하고 바로 그 때문에 사형당하게 되던가, 하는가 이야기. 왜냐면 최치수(?)는 불임이었으니까. 그녀 뱃속의 아이는 평소 그녀를 사랑해온 강포수(?)가 거두어 키운다.)

 

그로부터 헐,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다시 들춰봐도 될 것 같아, 한 번 해봤다. 두루마리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읽는 데만도 사흘 걸렸다. 아, 애물단지롤세. 한 번 고쳐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 덩어리는 있으니까, 심지어 너무 많으니까 절반 가까이 덜어내면서 그것을 받쳐줄 어떤 화법, 문체가 필요하다. 갑자기 떠오른 이 소설.

 

 

 

 

 

 

 

 

 

 

 

넘사벽, 이라는 말이 딱 맞는 소설. 이렇게 점점 기대치만 높아지고 정작 자기 소설은 돌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펼친 것이 (뭣 때문에?) 밀쳐둔 <악령> 번역 고치기인데, 계속 투덜댔듯, 번역만큼 하기 싫은 일이 없다. 곧 개강이니 학교로 도망쳐야겠다. 그러기에는 강의가 워낙 가뿐, 조촐하다. 어디로 도주하나. 앗, 운전면허를 따야겠다. 11월 2일까지 안 따면 필기부터 다시 봐야 한다니, 헐, "자, 우리도 함께 가볼까요,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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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가을 전에는 나올 법한 소설책의 표지를 구상하며 몇 가지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 전에도 한 번 올렸나, 아무튼 한 후배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뒤로 계속 탐낸 사진.

 

 

*

<태양은 가득히> 속의 알랑 들롱

 

 

*

 

<몽상가들> 속의 에바 그린.

 

 

어딘지는 모르지만 '뇌쇄적'이라는 단어가 실감난다.  환생이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는 저런 포스를 갖고 싶다^^;;

 

*

 

전에도 올린 잔느 모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인가?? 거기서는 앞머리가 없었던 듯하고.  

 

위의 사진들의 공통점은 바로, 담배. 2010년 12월 1일부터 피우지 않고 있는데, 지금도, 이 순간도 피우고 싶다! 특히 비오는 날, 길 가다가 맡게 되는, 막 생성된 담배 연기의 맛, 너무 고소하다. 나도 모르게 그 흡연자 옆으로 한두발짝 다가가게 된다. 그런 것이다, 담배란. 그러게, 탐내지 마!^^;;   

 

*

 

공교롭게도, 내 소설 편집 작업과 내가 번역한 남의 소설 편집 작업이 엇갈리듯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백쪽 남짓한 책과 천 쪽에 육박하는(그래서 두 권이 될) 책. 하나는 무척 덥고 하나는 무척 춥다. (대박은 물론 어림없고), 하나는 잘해야 중박(심지어 소박?), 하나는 못해도 중박. 그러리라 추정된다. 그 중간에 아이들이 쓰는 소설, 죽어라 읽고 있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 아무리 개차반일지라도 죽을 때는 소설가로 죽으시라!  날이 더워서 비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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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미남의 대명사가 알랭 들롱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ㅋㅋ

아, 태양은 가득히...

푸른괭이 2018-07-15 11:30   좋아요 0 | URL
제가 늙어서인지, 여전히 최고의 미남배우^^;;
 

 

 

 

연휴라 우울하고 그 연휴가 너무 길어 더 우울하고 알고 보니 주변에 우울한 사람이 너무 많아 또 우울하다. 우울(증)의 연대, 를 구축해도 될 만큼 그렇다. 아, 이렇게 쓰고 보니 너무 웃긴다! 모두 다 정신과에서 만나야 할 판이라니. 썰렁한가, (교통사고로 몽땅 죽은 다음 저승에 만나서 얘기하는) "봉고 덕분에 다 모였네!"라는 고등학교(?) 시절 유행어가 떠오른다. 친구들과 봉고 한 대를 빌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가던 시절 얘기다.

 

명절이면 거의 모든 며느리들이 겪는 저 유명한 '공포의 전 부치기'('부치기'라고 쓰고 보니 '붙이기'가 아닌 게 새삼스럽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가만 보면 이건 그냥 내가 안 하면 되는 건데 어릴 적부터 몸 속에 새겨진 관습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공포의 전 부치기' 못지 않게 공포스러운 것이 봉지에 담아주(시)는 전 덩어리, 전 뭉치다. 아, 지난 설(추석) 때 것도 냉동실에 있는데, 라고 무슨 라디오 방송에 나오더만. 그 역시 그냥 안 가져 오면 되는 것을, 그 관습-습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데도 몇 년이 걸린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풍경을 봐 왔다. 전 부치고 조기 굽고 탕국 끓이고 잡채 만들고 등등 이런 냄새와 소리가 없으면 명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이 모였는지. 제사상(차례상) 차려놓고 지방(!) 펼쳐놓고 향 피우고 어른-남자들이 쭉 서서 절 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 다음에는 어린이-남자들이 들어가서 절했다. 어느 시점부터 "이제 너네들도(여자애들) 들어가서 절해라~~"라는 선언이 있었다. (경상도 치고는 그나마 깨인(?), 혹은 근본 없는(?) 집안이었나??) 하지만, 이제 정말 그만 해도 될 법하다, 어렵지 않다, 그만 하는 거, 그냥 안 하면 된다.

 

연휴 시작 되기 직전에 청탁이 들어와 소설 쓰고 있다. 워낙에 청탁도 잘 안 들어오지만, 대개는 써놓은 소설을 다듬어 보내는 쪽이었는데, 어째 이번에는 쓰고 있다. 아니, 쓰이고 있다. 이 정황 자체가 신통방통해서, 너무 고마워서 "내가 제일 예뻤을 때"를 검색해본다. 그래도 소설책 나오면 기사도  나가던 시절이다. 국민일보 인터뷰는 사당역 근처에서 했는데, 엄청 추웠던 기억이 있다! 인터뷰 가기 전에 머플러를 몇 번이나 다시 묶어봤던 기억도 난다, 사진 예쁘게 나오게 하려고.

 

(경향신문 2009년 ??)

 

(국민일보 2009년 ??)

 

(조선일보, 아마 2000년??)

 

정말 "내가 제일 예뻤을 때"라는 책이 생각나는 사진이다. (소설은 좀 지루하게 읽은 것 같은데, 요즘은 어떤 소설을 쓰시는지.) 누구에게나 '화양연화'가 있는데, 그것은 항상 좀 먼 과거가 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최근, 이미 사십대. 흠, 하지만 사십대도 다 같지 않다. 아이 시절도 그렇지만 늙어갈 수록 정녕 '한 살'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한 생명체가 40년 넘도록 살았다는 것은 정말 너무 하잖아.(지하생활자가 생각난다^^;;) 그 동안 심장이 단 일초도 쉬지 않고 계속 뛰어왔음을, 또 뛰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건 진짜 징그럽다.  

 

 

 쓰고 싶은 내용을, 쓰는 손(!)이, 몸이 따라가지 못해 원망스러운, 그런 나이다. 논문 초고도 잡고 있는 중이지만, 쓰는 것이 참 힘들다. 아, 내가 언제부터 백지를 두려워했던가. 스승(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정녕 백지를 두려워할 때가 올 줄 몰랐건만.  

---

 

(바닷가에서 놀다와서, 노트북 켜놓고 한글 파일 열어놓고 있는 걸 보더니 엄청 웃으면서 묻는다.)

"엄마, ** 아파트에서도['집에서도' 이런 표현을 써주면 더 좋겠다만] 일하는데 왜 또 여기서도 일하고 있어?"

 

--

 

"엄마, 오늘도 연휴야?"

"엄마, 오늘도 놀아? 왜 또 놀아?" 

"엄마, 오늘은 평범한(그냥) 목요일 아니야? 조**, 배** 선생님 안 만나?"

 

--

 

더러 특이한(?) 표현을 쓰긴 하지만 종알종알 말을 참 잘 하는 아이를 보면서, 음, 이제라도 등급 심사를 취소해달라고 할까, 고민이 든다. 사실 공단은 아쉬울 게 없으니, 등급이 나온 뒤라도 취소는 정말 쉽더라. 내가 그 혜택 안 받겠다는 것이니. 음, 그리고... 검사는 검사일 뿐, 숫자는 숫자일 뿐. 아니, 저렇게 멀쩡한데 진짜 검사가 이상했던 거 아니야? -_-;; 아니야, 그래도 해야 해. 장애아 엄마가 될 준비를 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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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3) - 푸르디 푸른

 

 

    

 

1. 낙조(落照)

 

물 위의 도시, 백야의 절정이 저문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땅거미가 진다. 대양과 맞닿은 푸른 만, 쌀쌀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입을 맞추는 귀여운 연인들, 예쁜 계집애를 목마 태운 젊은 아빠, 한 곁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우는 후줄근한 중년 남자, 왁자지껄 즐거운 금발 미녀들, 장바구니를 들고 터벅터벅 해변을 걷는 뚱보 아줌마, 해안가 풀숲에 몸을 포개고 있는 늙은 연인. 그리고 피()가 이 풍경 속에 묻혀 있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딱 멎는다. 푸르디푸른 물과 푸르디푸른 하늘, 이 두 공간 축이 시간 축과 만난다. 삼위일체의 접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빨강과 노랑을 부조리한 배율로 섞어놓은 듯 오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백야의 끝자락에 우연히 낙조의 절정을 목도한 그는 깨닫는다. 종말이 멀지 않다.

 

이후 그는 오직 낙조를 보기 위해 바닷가 산책에 나선다. 북국의 맞바람이 너무 거세서 라이터도 켤 수 없다. 점퍼와 목도리로 중무장하고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연이어 담배를 피워대며 자갈밭 한가운데 반석 위에 앉는다. 푸르디푸른 허공과 바다가 점차 어둠에 잠식된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느린 듯, 빠른 듯 변덕스럽게 수평선으로 내려온다. 전락의 움직임보다 더 전율스러운 것은 그 찬연한 큰 원이 물의 선과 맞닿는 지독히도 찰나적인 순간이다. 태양-원은 수면-선에 닿아 한 점이 되기가 무섭게 급속도로 침몰하다가 함몰한다. 둔탁한 울림도 없고, 아슬아슬한 출렁임도 없다. 그러게, 태양 구멍이다.

낙조의 절정이 끝나면 그의 눈앞으로 광활한 무정형의 공간이 펼쳐진다. 푸르디푸른 공간과 검디검은 선의 사차원적인 만남은 로바체프스키의 두 평행선처럼 영원하리라.

 

어느덧 8월말, 가을을 예고하는 찬비가 내린다. 바닷가의 축축한 반석 위에 앉아 담배 연기를 마시며 맥주 한 병을 딴다. 두어 모금 마실 무렵 후줄근한 장바구니를 든 노파 하나가 다가온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몸집인데, 그나마도 쭈글쭈글, 바싹 오그라들었다. 지하실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축축한 웃음을 흘리면 오싹 소름이 돋을 것 같은 형상이다. 입을 벌리자 헐렁한 잇새로 엉성한 말이 새나온다.

비도 오는데 뭐해? 등신 같은 놈, 젊은 놈이 그렇게 담배 피우면 못 써!”

이어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노파의 조그맣고 헐거운 몸이 저 바다의 잔물결처럼 일렁인다.

요새는 애들이 많아져서 이 짓도 못 해먹겠어. 애들은 발도 빠르지, 힘도 좋지. 늙은이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병 하나 팔아봤자 꼴랑 1루블이야. 빵 값은 또 얼마나 올랐는지. 치즈랑 버터는 엄두도 못 내. 자식새끼 키워봤자 말짱 도루묵이고아이고, 맥주 갖고 제사 지내냐! 빨리 좀 마셔, 이 등신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의 입가로 겸연쩍은 듯, 무안한 듯 어색한 미소가 일다가 그대로 새겨진다.

갑자기 노파 하나가 또 나타난다.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그의 곁을 슬그머니 맴도는 모양새가 익숙하다. 새 노파는 이미 터를 잡고 있던 헌 노파와 대놓고 싸움을 벌인다. 생의 한가운데서 생의 가두리로 밀려난 두 노파의 황혼녘의 전투는 시나브로 속살대는 밀담으로 바뀐다. 잇새로 뿜어져 나오는 늙은 숨결소리가 묘한 이중주를 이룬다. 거북살스러운 관객의 역할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그는 남은 맥주를 얼른 처리한 다음 새 맥주병을 따서 식은 숭늉 들이키듯 벌컥벌컥 마신다. 병 두 개를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주자 두 노파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자비로운 마음에서 쓰레기를 거둬주는 양 거들먹거리며 땅거미 지는 침침한 무대 너머로 사라진다.

 

두 노파가 사라진 자리, 비가 그친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무리지어 뻗어 있다. 수평선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둥근 태양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드디어 구멍처럼 뚫린 커다란 새빨갛고도 샛노란 원이 푸르디푸른 선과 맞닿는다. 종말이 코앞이다.

 

 

2. 변태(變態)

 

갑자기, 너무 비좁다.

방안, 컴퓨터 책상 앞에서 일어서는데 허벅지가 낀다. 걸음을 떼다가 의자 모서리에 무르팍을 부딪친다. 절름절름 침대 쪽으로 가는 길에 탁자용 작은 나무 상자에 복숭아뼈를 찧는다. 절로 구부러졌던 몸을 펴자 천장이 정수리까지 내려와 있다.

화장실, 원래 세면대도 없이 변기 하나만 달랑 있다. 오늘따라 더 비좁다. 안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문이 안 닫힌다. 두 손을 얌전히 모아 허벅지에 올리는데 팔꿈치가 양쪽 벽에 닿는다. 변기 뚜껑 위에 올려놓은 휴지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뒤치다꺼리는 더 힘들다. 고문 틀처럼 비좁아진 화장실을 간신히 빠져나온다.

야옹.”

의 눈앞에서 거의 이차원처럼 여겨지는 가늘고 납작한 검푸른 형상이, 하지만 고양이, 그것도 러시안 블루임이 분명한 어떤 형상이 어른거린다. ‘넌 대체 누구냐?’하고 묻고 싶지만 녀석이 먼저 입을 연다.

나는 영원히 악을 행하고 싶지만 영원히 선을 행하게 되는 힘의 일부야. 아니야. 나는 영원히 선만을 원하는 유일한 존재야. , 천만의 말씀.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해골 깨고 노는 것도 지루해, 지루해 죽겠어. 하지만 죽을 수가 있어야지! 고양이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졌다고 하잖아? 아홉 개가 뭐야? 9가 무한대로 이어지는 거야. 이런 불멸, 너무 싫어!”

녀석의 말은 다시 야옹으로 바뀌고 녀석의 형상도 사라진다. 공간의 협소화가 몸 곳곳에서 느껴진다. 집이 이차원으로 바뀌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는 종이인간처럼 짜부라질 것이다. 그는 황급히 집을 빠져나온다.

 

바닷가, 자갈밭 위의 나지막하고 야트막한 반석. 담배를 뿜어내고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들이켜고 트림을 뱉어내는 작업을 번갈아 해본다. 이 느린 박자에 맞추어 한 노파가 빈 맥주병을 받아 가고, 한참 뒤 또 한 노파가 두 번째의 빈 맥주병을 받아 간다. 글쎄, 어쩌면 같은 노파인가.

육지 쪽, 시커멓고 거대한 개 한 마리가 긴 꼬리를 허공에 날리며,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온다. 그는 맥주병을 노리는 노파들처럼 천천히, 그러나 집요한 투지를 보이며 개에게 다가간다. 우유팩과 유리조각이 즐비한 자갈밭을 지나고 해변의 풀밭을 가로질러 날렵하게 개의 등 위에 올라탄다. ! 지금껏 그 흔한 말 타기 놀이조차 해본 적 없는데 이렇게 잘 하다니! 하지만 역시나 이건 환각이다. ‘하는 순간, 온 몸에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어느덧 그는 두 손발(네 발)로 땅을 짚고 있으며, 개는 뒷발(다리)을 그의 등 좌우로 늘어뜨리고 앞발()을 그의 목덜미 근처에 가뿐하게 올려놓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개는 손으로 그를 몰아대고 그는 네 발로 달린다.

정말 개 같군.’

그리하여 그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직립보행 하는 인간의 위엄을 뽐낸다. 일순간 개는 땅바닥으로 나뒹굴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잡고서 뾰족하고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향해 돌진한다. 잇새로 끈적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는 개의 험악한 면상을 본 찰나, 송곳 같은 이빨이 그의 머리뼈를 우걱우걱 씹고 골수가 꿀꺽꿀꺽 삼켜진다. 한쪽 눈알이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아직은 먹히지 않은 한쪽 눈알로 섬광처럼 지나가는 낙조의 붉고도 노란 빛을 본다.

정말 아름답구나, 여기서 멈추어라!’

그 눈알마저 이내, 태양이 검푸른 바다 속으로 침몰하듯, 개의 컴컴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엉덩이쯤에 이른 개는 기왕지사 먹은 것도 다 게워내고 싶다는 듯 꾸역꾸역 무성의하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끝까지 씹어 먹는다. 마침내 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의 몸 어딘가에 붙어있던, 점처럼 새까만 사마귀 하나만 남았다.

한참 뒤 술 취한 유쾌한 청춘들이 나타난다. 누군가가 사마귀를 밟고 움찔하더니 그것을 집어 올려 휙 던진다. 허공을 날아 바닷물 속에 풍덩 빠지는 사이, ()는 있지도 않은 머리를 굴려보며 존재할 수도 없는 미소를 흘린다.

나쁘지 않은 종말이군.’

 

*

<문학나무> 2017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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