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yes24.com/Article/View/40079

 

사람이 책을 내고 이렇게 반응을 얻다니. 

워낙에 처음(혹은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 당혹스럽지만, 아무튼 좋은 일이다.

 

어릴 때는 뭔가를 위해 살고 읽고 썼던 것 같다.

'뭔가', 즉 그만큼 야망-욕망이 컸던 시절이다.

요즘은 이게 다 동의어다. 살다=읽다=쓰다.

간만에 교보 들렀다가 전화한 동기의 말처럼

"어차피 우리는 살거나 읽거나 쓰고 있으니까"

제목 보고 집어 들었는데, 내 책이었다는.

(그러는 너는 왜 또 회사 나왔냐? -_-;;)

 

북토크에 와 계셨던 분들, 조금씩, 다를 거다.

젊은(특히 학생) 그룹은 아마 그 무렵의 나처럼 '뭔가'가 강할 터이다.

중장년을 넘긴 분들은 이 역시 삶의 한 양상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는 것이다.

 

이 책의 계약을 도와주었던 편집자가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한다.

그녀도, 잠시, 어쩌면 수시로 그리워했다.

아마 저 원고들에 대해 얘기하고

함께 도스토-키 책 만들고 하던 우리의 삼십대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주말 아침에 커피숍 앉아 담배 피우면서(그 커피숍 사라진 지 오래)

<카라마조프> 교정지 넘겨본 추억도 있다.

모두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다.

행사장 가보니 알겠더라.

내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편집자들이 다 나보고 열살은 족히 어리다는 -_-;

 

 

장미는 지고

장미의 이름만 남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돈키호테>에서 <장미의 이름>까지. 책에서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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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 연극 대본이었음은 이번에 알았다. 그런데 표현 매체가 달라지면 사실상 흔한 의미의 '베낌/표절'은 얼토당토 않고 소위 '개작' 역시 무의미해보인다. 요컨대 창작이다. 기록문학(다큐멘터리), 소설, 연극, 영화, 뮤지컬 등. 이런 문제를 창작의 관점에서(^^;) 고민해볼 수도 있겠다.

 

 

 

 

 

 

 

 

 

 

 

 

 

 

 

 

최종 텍스트, 이 경우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텍스트들이 대본에 해당한다. 영화 대본, 즉 시나리오는 실제 촬영 과정에서 적잖은 변주를 거치며 영화로 완성되는 것으로 안다. 많은 애드립, 또 즉흥적인 소품들(심지어 벌레 한마리, 이런 것). 이런 것을, 이번 학기에는 희곡을 한 편 다루는 김에, 생각해보면 좋겠다. 덧붙여, 어느 장르든 시대 의식 없는 작품이 살아남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만큼 작가는 명민해야, 예민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셰익스피어 시절은 물론 이후에도 소위 공연 대본이 이렇게 활자화된 책-고전으로 남으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혹은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 심판을 거쳐 살아남는 텍스트는 극소수. 이건 사실 어느 분야나 똑같으니 하나마나한 얘기. 아무튼 서양은 극 장르의 역사가 길지만 우리는 참 일천하다. 지금 <희곡선1>의 두 작품 읽었다 -_-; (편집이 아주 잘 되어 있다! 편집한 양승국 교수도 한때 등단한 극작가(?)인 것으로 안다.) 암튼,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서 놀랐는데, 시나리오-영화 역시 비슷한 속도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 크다.

 

 

 

 

 

 

 

 

 

 

 

 

 

 

 

 

*

 

소설을 비롯한 여러 책 텍스트와 달리 연극, 영화, 뮤지컬 등은 표현 수위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일 법하다. 봉준호 감독 영화는 보통 '청불'(미불^^;)이 많은데, <살인의 추억>은 뜻밖에도(?!) 15세였다. 참 잘한, 좋은 일인 것 같다. 제목만으로도, 사건의 얼개만으로도 후덜덜. 그래도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하려면 표현 수위를 낮추는 것이 옳을 법하다. 그렇게 낮추었다고 해도 폭력 장면도 많고(실제 취조실의 폭행, 고문은 우리의 상상의 초월할 터) 아이의 가방에서 소지품 꺼내서 나열하는 장면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포는 감당하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좋아하여 오래 전 그의 영화를 거의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 역시, 큰 줄거리와 주제를 드러내려고 하지, 잔혹한 장면에 변태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여기도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나름 '강간의 왕국'이기도 하다.) 그런 과는 또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춘 공포영화, 스릴러는 그 나름으로 매니아 층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편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라면, 표현 수위 문제는 신중한 고려의 대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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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체계가 필요하다

 

 

또 책을 낸다. 번역한 책이 아니라 쓴 책이지만 소설책이 아니다. 때로는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설레며, 때로는 관성의 법칙에 짓눌린 수험생처럼 억지로 읽고 나름대로 공들여 쓴 글들, 즉 공부의 기록이다. 거의 모든 글에는 작가의 전기가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쓰는 동안 나는 비단 소설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작가-글쟁이가 되었다. 작가는 아무 책이나 쓸 수 있다. 모든 책에는 그러나, 체계가 필요하다.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어릴 때부터 좋아한 <적과 흑>, <고리오 영감>, <보바리 부인>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읽기 위한 장이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을 염두에 두었다. 2장은 문학 이상의 문학, 소설 이상의 소설에 관한 장으로서 오늘날 철학서로 자리 잡은 에세이에 관한 글도 들어갔다.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탐구한 문학은 확실히 그 형식 역시 모순이다. 원래는 3장과 한 데 묶여 있었다. 4장은 주로 생활과 일상이 담긴 세태 소설을 다루었는데, 영미문학과 러시아문학의 -메이드소설이 포함되었다. 교과서 소설은 ()’의 기록임이 드러난다. 5장은 청소년기에 즐겨 읽은 성장소설과 예술가소설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다. 일본 근대 소설 역시 그 맥락에서 읽어보았다. 6, 7, 8, 9장은 각각 카프카, 카뮈(사르트르), 쿤데라(오웰), 보르헤스(나보코프, 에코)를 염두에 두고 구성하였다.

이 책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 작품이 모두 책에 관한 책이다. <돈 키호테>에서 <픽션들>과 <장미의 이름>까지 나의 읽기는 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공유할 만한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

 

*

 

나 역시 어느 시인처럼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중 하나로 (“모교의 정문과 더불어!) 주저 없이 인용과 각주를 꼽겠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그 무게에서 해방된 가뿐한 글쓰기를 꿈꾸었으나 책에 관한 책이라 인용이 불가피했다. 각주 역시 참고문헌 목록으로 흔적기관처럼 남았다. 천형이라면 웃기고 자업자득이다. 이참에 44년을 넘긴 내 인생을 요약해본다.

 

19751, 태어났으며

10, 공부했고, 자랐고, (부모) 집 떠났으며

20, 공부했고, 소설 썼고, 담배 피웠고, 연애했고, 번역했으며

30, 공부했고, 강의했고, 논문 썼고, 번역했고, 소설 썼고, 결혼했고, 담배 끊었고, 아이 낳았으며

40, 공부하고, 강의하고, 논문 쓰고, 번역하고, 소설 쓰고, 책 내고, 담배 안 피우고, 아이 키우고,

암과 치매와 실명 없는 노년을 꿈꾼다.

  

누군가에게는 하강일 수 있는 문학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으슥한 산골에서 의무 교육만 간신히 받은 농부의 장녀로 태어난 나에게는 시종일관 상승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여름, 부산 사는 삼촌의 결혼식에 가던 길에 아빠의 손을 잡고 조만간 내가 다닐 학교를 구경 갔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에서 5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그 야트막한 학교는 물론, 폐교된 지 오래이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은 거창을 떠나 부산의 산동네에 단칸방을 얻었다. 이듬해 봄,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한 반의 학생 수가 쉰 명도 넘던 시절, 오후반도 있던 시절이다. 그 역사적인 1981년에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책의 세계에 진입했다. 나쁜 종이에 조잡한 그림이 들어간 교과서가 전부였음에도 그것은 아주 처음부터 문학의 형식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너무 좋았다, 책이라는 것이.

 

나의 책읽기는 중학교 시절 값싼 문고판으로 시작되어, 장학금과 과외비 덕분에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대학 시절에 절정을 이루었다. 19933월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20042월까지 촘촘히, 빼곡히 들어찬 11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꿰차고 있던 학생증을 버리기가 얼마나 아까웠던가! 이후, 또 한 번의 시간 덩어리를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이지만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또 그것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학자로 살고 있다. 러시아문학에 한정된 좁은책읽기에 환멸을 느끼던 삼십대 중반쯤, 다시 넓은책읽기를 넘보았다. 2009<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세 학기 동안 진행한 세계문학 읽기 강좌가 시발점이 되었다. 그와 얼추 맞물려 2010년 가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네이버> 문학 캐스트에 세계문학을 소개했다. 맨 처음 다룬 책은 사르트르의 <말>이다. 2012년부터는 <책앤>(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귀한 지면을 얻어 2015년까지 썼다. 2016년부터는 소설 창작 강의를 맡아 세계문학의 전범과 전위의 소설을 두루 읽고 있다.

 

2010121, 정녕 마지못해, 하루 두 갑 진정한 골초에서 비흡연자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관한 글은 담배 없이 쓴 첫 번째 글이다. 솔직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2011년 한여름에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이후에는 흡연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담배를 안 피워도 나는 사람이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포유류의 일종, 한 마리의 암컷일 뿐이었다. 물론 이 역시 숭고한 실존이지만(동물-인간으로 회귀!) 그것을 배면으로 책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 실존인지(사람-인간으로 회귀!)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무릇, 책을 읽어야 사람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글을 몸 안에서, 그리고 몸 밖에서 아이를 키우며 썼다. 아직도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아이가, 물론 건강하고, 덧붙여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사족 한마디. 내가 가끔 아이보다 책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엄마가 아닌 건 아니다. 밤낮을 잊고 몇날며칠을 담배와 단둘이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 이전의 황금시대가 너무 그립다. 조금의 시건방과 비아냥도 없이 말하거니와, 공부는 내 인생의 거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모범생이어야 하니러시아 유학 시절 이런 따사로운 답장을 보내준 절친했던 라이벌이 작년에 암 수술을 받았다. 이 나이에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전히 모범생일 필요가 있다.

    

 

2019년 여름, 김연경

 

 

*

 

 

 

 

 

 

 

 

 

 

 

 

 

 

 

독서 에세이집은 처음인데, 편집 과정이 길었다. 처음에 초고를 넘길 때는 독자서비스(?) 차원에서 원문 인용을 많이 넣었다. 하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또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인용문을 대폭 줄이고 대신 내 말로 푸는 수고를 많이 해야했다. 몇 꼭지를 그냥 확, 덜어내기도 했다. 그 결과 책이 훨씬 깔끔하고 날씬해졌다.

 

표지에 담배를 피우는 3,40대 여성 사진을 쓰자고 제안한 건 나다. 저 얼굴은 프랑스와즈 사강이라, 한데 이 책은 사강에 대한 책이 아니라, 다른 것을 쓰고 싶었지만, 흥미롭게도(^^;;) 저것이 사강인 것을 알아본 사람이 나 말고는 별로 없었다. 한편, 내가 고른 것은 너무 퇴폐적(^^;;)이라, 저 책의 주요 독자층(자식들에게 고전을 읽히려는 나 같은 아줌마^^;)을 염두에 둔다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담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퇴폐적(^^;)인지라 , 현재의 시안으로 낙착되었다. 만들고 나니, 좋더라. 그리고 한 장 넘기면, 지난 겨울 <창비 까페>에서 찍은 내 사진이 나온다. 어릴 때는 나도 한 인물 했는데 -_-;

 

제목, 목차, 서문은 마지막까지 (편집자와 함께) 고민한 것이다. 제목은 결국 내가 제안한 것이 채택되었는데, 20여년 작가 인생에 참 드문 일이다^^; 서문은 지금 올린 것에서, 중간부분을 뭉텅 덜어냈다. 그 결과, 역시나 서문이 깔끔해졌다. 나보코프는 <롤리타> 후기에서 자신의 개인사는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으나, 라는 식의 말을 했지만, 나는 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서문에서 잠깐 언급한, 거창 고제면의 개명 국민(초등)학교는 올 여름에 탈고한 소설에서 좀 묘사를 해보았다. 

 

자, 그러니까...

이제는 소설이 나올 차례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_-;

아무튼 '삼재'가 끝났으니(나는 영원한 미신주의자!) 이제 당분간은 인생이 풀릴 것이다.

이런 믿음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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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왔다. 그동안 쓴 책, 번역한 책이 적지 않지만, 나오자마자 세일즈포인트가 천단위로 뜨는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의 원한을 설욕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오히려 무섭다. 그다음, 내숭 떨지 않고 말하자면, 참 열심히 공부하고 썼다. 쓴 것보다도 저 많은 걸 언제 읽었는지 그게 더 아뜩하다. 말마따나, "제가 속도 없고(좁고) 재능도 없지만 성실하긴 무척 성실하여~~~"

 

*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 나의 불행은 타인의 행복,,, 이던가.

굳이 이렇게 생각할 건 없으나 지난 수요일 아침 7시 20분에 남동생이 **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시작했다. 내가 한 일은 물론 아무것도 없고, 폐강된 강좌 시간표에 맞는 영작문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세부명으로 양성 뇌종양의 일종인 청신경초종 진단을 받은 남동생이 개두술을 받는 사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도 학교에 갔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고. 그리고 이제 이렇게 쓰지만, 5시간 남짓 걸린 수술 이후에 환자는 사실상 거의 곧장 의식도 회복하고, 어제오늘 상태도 나쁘지 않아 (평소 친하지도 않던!!!) 나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오고 있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 도스-키가 즐겨 쓴 성경 표현대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부활'했다고 생각하고 정신 차리시길^^;

 

*

 

장애 수준의 발달지체임이 명백한 아이가 2학기에는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자조를 비롯한 사회성숙도도 많이 좋아지고(물론 수치화 하면 굉장히 떨어졌을 수도 있다!!!) 첫 단원평가 나쁘지 않다.

 

 

 

소위 보통/일반 아이들도 60~70점대 점수가 많다는데, 실로 고마운 점수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운동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가 수학 점수를 통해 자존감을 좀 더 갖길 바란다.  

 

*

 

<살인의 추억>. 너무 무서울 것 같아 못/안 본 것 같은데 이제라도 시간을 내봐야겠다. 살인충동은 식욕이나 성욕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는 어쩌다 그런 생명으로 태어난(=자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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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19-09-21 09:38   좋아요 0 | URL
앗, 소설까지 읽으셨다니 정말 ‘팬‘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박균호 2019-09-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로쟈님 서재에서 봤는데 저도 읽어 보고 싶더라구요. 시간 내서 읽어 볼께요.

푸른괭이 2019-09-21 09:40   좋아요 0 | URL
예,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배도 고프고 내친 김에 계속 논다.

오늘부터 공부(!)를 해보려고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의 20여년만인데, 놀라워라, 한때 몰입하여 잊었던 번역이 지금은 서걱거린다. 왜지? 오디세우스를 논하는 첫 장, '손' '나그네' 이런 표현이 굉장히 옛스럽다. 그렇게 느껴진다. 역자가 누구?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던 김우창, 유종호. 과거 시제를 붙이기도 죄송한 것이 두 분은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고, 유종호의 최근 에세이는 내가 여기에 링크를 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들의 번역조차도!

 

 

 

 

 

 

 

 

 

 

 

 

 

 

(아시겠지만, 김민형은 김우창의 아들이다.)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맨 마지막 표지에 실린 글대로, 번역은 세대/시대가 바뀌면 새로 해야 한다, 라는 의견에 나는 전격 동의한다. 간혹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 아니, 원전은 그대로인데 번역은 바뀌어야 한다?

 

세상에!!! 번역은, 아무리 좋은 것도, 원전을 대신할 수 없다.

번역은 감히 원전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이 점을 모르는 번역가는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가로서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의 심판을 넘어 살아 남는 것은 원전이지 결코 번역이 아니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도-키의 <죄와 벌>은 불멸이라도 내 번역은 한시적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이 여러 편의상 내 번역을 읽을 뿐이다. 혹은 내 번역을 통해, 건너 도-키의 <죄와벌>로 간다. 요컨대, 다리 같은 것이다. 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마모되고 교체해야 한다. 번역의 명줄은 아무리 길어도 한 2-30년이 아닐까 한다. 내가 내 스승의 번역들을 먹고 자랐듯, 나의 후학 역시 내 번역을 먹고 자라 훗날에는, 미래의 독자의 언어 감수성에 맞는 번역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 신간의 초역이 아니라, 기존 번역이 있는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이전 번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후진(!) 것이라도 그것에 빚을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 후진 번역을 봤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빚이다. 이 점에서 <잃어버린...>의 옛 번역에 감사를, 사의를 표한 김희영 선생은, 그 태도에 있어서도 참 훌륭한 번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예전에 불문과 전공 수업에서(불문과 대학원을 갈 생각이 좀 있었다) 한 선생이 '거의 웬 듣보잡이 이런 소설을 번역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였다. 아무리 후진 수준이라도(이 번역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정도의 번역에 손을 댈 정도면 '듣보잡'은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 발가락 담그고 있는 많은 '박사-교수' 중에 이런 편견이 많아, 안쓰럽다.  

 

 

 

 

 

 

 

 

 

 

 

 

 

 

 

 

<미메시스>를 이제 막 읽기 시작하여 뒷부분을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오래 전 <이데아총서>에 들어 있던(우리가 이 시리즈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사라져서 슬펐다, 옛 애인의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것을 표지만 바꾼 모양이다. 앞에서 서문 하나 새로 단 정도? 덕분에, 서문-머리말이 세 편이고 내용이 겹친다, 슬프다. 이론서, 학술서는 엄정함이 생명인데. 편집자도 간과한 것인지, 혹은 (필경 젊은) 편집자의 조언을 우리의 스승- 대가들이 고사한 것인지. 이것과는 별개로,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나이가 들면 귀가 먼다, 참 슬픈 일이다. 귀가 '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다'. 순해지는 것이 머는 것인가? 눈도 먼다. 자연의 이치니 어쩔 수 없다.

 

나야 이미 중년이어서 이 번역이 여전히 읽히지만, 더 젊은 층에서 독자를 만들려면, 아이들 무식하다고 욕하지 말고(이거야말로 제 얼굴에 침 뱉기^^;) 새 번역이 슬슬 나와주면 좋겠다.  음, 그러는 너는 왜 니 번역을 안 하고 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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