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은 14일로 찍혀 있는데 실물을 받은 건 지난 주, 서점에는 오늘에야 떴다. 아무렴, 요즘 같은 시국에 책이 나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20세기 부분을 쓰지 못해(않아) 분량이 적은데, 막상 책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니 그리 얇다는(가볍다는)  느낌도 없다. 요즘 책들이 워낙 얇기 때문인 것도 같고, 19세기러시아문학 교과서, 이 정도만 읽으셔도 됩니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는 작품을 읽는 데 쓰시는 걸로 - 나는 20세기 작가, 작품에 대한 논문을 순차적으로 쓰고 '후일담'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

 

서문:

근대, 인간, 소설, 속악

 

 

이 책은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19세기 러시아문학의 대표 작가, 대표 작품을 다룬다. 이들을 아우르는 핵심어로 근대, 인간(개인), 소설, 속악(俗惡: 속물성)을 꼽겠다. 앞의 세 요소는 르네상스, 특히 세르반테스-돈키호테와 셰익스피어-햄릿 이래 형성된 서유럽의 19세기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네 번째 항목이다. 러시아어 poshlost’속물성으로 번역된다. 영어의 banality보다는 더 평범-진부하고 vulgarity보다는 덜 저속한 개념인 것 같다. 근대와 함께 탄생한 인간-개인은 주인공-영웅이든(푸시킨, 레르몬토프) ‘대중-단역이든(고골) 이 속물성-속악을 피해갈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에 자리 잡은 러시아는 대체로 아시아에 등을 돌린 채 유럽을 지향하는 식의 입장을 취해왔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본격화된 이런 모방 욕망이 그들의 속물성의 기저에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러시아문학이 묘파한 속물성은 훨씬 더 다층적이다. 그것은 특정 정체(政體)와 같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인간과 세계의 대립 구도는 더 복잡한 희비극이 되고, 여기에는 또 다른 개념인 신-구원이 요청된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예이다. 등단할 때부터 생활 밀착형 소설을 썼던 톨스토이는 중년과 노년에 이르러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더 몰입한다. ‘침체기’(bezvremen’e: 직역하면 시간-시대 없음이라는 뜻이다), 즉 세기말의 작가로서 체호프의 문학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그는 우리가 모두 작은 인간이며 이 작음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른바 인텔리겐치아의 소명도 투르게네프를 비롯한 저 삼두마차선배-스승 작가들과는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비단 희곡 덕분이 아닐지라도 체호프는 19세기를 마감함과 동시에 20세기를 여는 작가로 평가될 만하다.

 

이 책의 토대는 지난 15여 년 동안 모교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며 학술지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이다. 그러나, 연구서이면서도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적 성격을 갖도록, 또 러시아문학을 사랑하는 지적인 독자도 흥미를 갖도록 작가의 전기를 소개하고 전체 형식과 문체를 대폭 수정했다. 각주를 최대한 줄이고 외국어, 특히 러시아어로 된 개념어와 서지를 거의 다 뺐다. 학술정보와 전문자료가 필요한 독자는 이 책의 끝에 붙은, 대폭 간추린 참고문헌을 보기 바란다. 책 제목에 연구강의처럼 정형화된 단어 대신 가뿐한 느낌의 산책을 넣은 것은 빠진 주제(낭만주의 시인들, 벨린스키를 비롯한 사상가-비평가, 레스코프·레스코프·살트이코프-셰드린· 곤차로프 등 사실주의 소설가들, 극작가 오스트롭스키 등)가 많기 때문이다.

 

*

 

김연경앞에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93학번이라는 명찰이 붙은 이래 나는 항상 노문학도이자 노문학자로 살았다. 20043월 초, <러시아 명작의 이해> 시간, 인문대 61층의 한 강의실로 처음 들어설 때 입었던 10만 원짜리 감색 트렌치코트를 아직도 좋아한다. 그때부터 러시아문학 연구서를 쓰는 것은 당연지사, 하늘이 두 쪽 나도 끝내야 하는 숙제였다. 박상순 시인이 민음사에 있던 2007년에 기금을 받은 것이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애초에는 20세기 문학이 3부로 예정되었으나, 작업 중에 현재의 목차가 되었다. 원래는 부제도 문학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였다. 30대 초중반의 미혼이었고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이상 피우던 시절이었다. 거의 10년 차 비흡연자에 만 45세를 넘긴 지금의 생각인즉, 문학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한없이 치사해질 때 그나마 문학이 있기에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구나, 라는 위안을 받기는 한다. 이 책이 러시아문학은 속된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어느 정도 답하지 않나 싶다.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은 야무진 꿈이 물론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학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죽기 전까지 최소한의 소임이나 다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첫 연구서를 낸다.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이기에 학적 성취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열망은 더 크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한 학자의 충고대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 2020, 여름을 앞두고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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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8-3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시원한 저녁시간되십시요!ㅎ

푸른괭이 2020-09-01 09:16   좋아요 0 | URL
주문도 좀 같이...^^;;

박균호 2020-08-3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저도 사서 꼭 읽어볼께요. !!!

푸른괭이 2020-09-01 09:16   좋아요 0 | URL
예, 꼭 사주세요!^^; 하루 사이 아무도 안 산 책은 처음입니다 -_-;;

박균호 2020-09-01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주문했습니다 !!! 페이퍼도 남길 께요...ㅎㅎㅎ 홧팅하세요.

푸른괭이 2020-09-01 10:05   좋아요 1 | URL
흠, 아무리 안 팔리는 소설책도 첫날, 첫주에는 그래도 조금의 숫자 변동은 있는데, 연구서라 그런지 확실히 놀라운 정적인데요?^^;; 0, 이라니...

박균호 2020-09-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출판사가 민음사였네요 !! 아무래도 일반인들이 편하게 접근하기 어려운 제목과 주제 때문인 것 같은데 주말에 기사도 좀 나오고 그러면 나아지겠지요. 그래도 민음사 아닙니까.

푸른괭이 2020-09-01 11:06   좋아요 1 | URL
여기다 공개적으로 쓸 내용은 아닌 것 같지만^^; - 이 책이 팔려야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도 내줄 것 같네요, 이후 20세기 문학 연구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아니면, 제가 팔리는^^;; 러시아문학책을 후다닥 번역하든가 ㅋ

박균호 2020-09-0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는 판매량도 신경쓰지만 그 책을 냄으로서 얻게 되는 출판사의 위상도 고려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아는 인문학자는 일년에 서너권씩 책이 나오는데 매번 판패포인트가 500이하였습니다. 판매가 부진하더라도 좋은 내용의 원고는 출판사에서 좋아하더라구요. 우리 출판사는 이런 좋은 양서를 냈다...뭐 이런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도끼형님의 책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ㅎ

2020-09-01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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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1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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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 상반기에 (하기 싫은 숙제 하듯 휘리릭~) 쓴 논문은 그래도 무사 통과되어(즉, 작년에 쓴 논문은 '수정후재심'(사실상 게재불가)였다는ㅠ 정말 (개)고생하고 애쓴 논문이었는데ㅋ) 다음 논문을 고민해 보던 차, 메모를 남겨본다. SF의 고전, 그 다음은 생명창조(로봇, AI 등). 결국 두 개가 한 뿌리에 나온 것.

 

 

 

 

 

 

 

 

 

 

 

 

 

 

이 분야의 고전은, 몇 번 언급한 것 같은데, <프-인>. 나의 저 책에서는 말미에 불가코프의 소설과 같이 얘기한다. 메리 셸리 입장에서 저 소설의 가치는, 깜짝 놀랐는데, 현재에도 열심히 양산되는 어마어마한 레퍼런스가 말해준다. 한편, 불가코프의 입장에서는 <개의 심장>이 그가 20년대에 쓴 <운명의 알>(개구리? 파충류? 알 만드는 듯), <디아볼리아다>(악마의 서사시) 등과 함께 묶여서 연구되는 듯하다. 아직 공부가 부족함 -_-; 일단, <... 알>은 작품을 안/못 읽었는데, 불가코프 식 SF의 거친 시작인 듯하다. 번역도 없는데 작품은 길고, 흠, 원래 공부란 그런 걸 읽는 것이긴 하다. 아무튼 유럽의 SF 계보를 뒤지다 보니 이런 것이 있다.19세기. <프-인>은 아시다시피 대략 18세기 문학으로 엮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읽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름조차 거의 금시초문.(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데도 내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라니, 이런 부조리가!) 이 참에 읽으려고 사두었다. 허버트 조지 웰스. 뭔 내용일지? 혹시 AI, 그러니까 생명 창조 얘기가 나오는지? 아니면, (제목을 봐서는) 다른 소재를 다룬 SF일지? 어떻든 -  

 

 

 

 

 

 

 

 

 

 

 

 

 

 

 

SF쪽으로 더 뻗으면 장르문학과 만난다. 불가코프는 물론 엄연한 순문학이지만, 그나저나, 과연 이런 경계가 지금 유의미한지! 그렇다고 또한,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경계가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가령,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은 잘 썼지만, 훌륭하지만, 그래도 세계문학전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못한다.) 비슷하게, 코난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를 떠올릴 수 있겠다. 지금 쓰이는, 써지는 문학에 대해서는 판단 유보, 판단 정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걸 전제로 -

 

 

 

 

 

 

 

 

 

 

 

 

 

 

 

소비에트판 SF를 읽어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학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요즘 많이 뜨는 우리 작가들을 읽어볼 수도 있겠다.

 

 

 

 

 

 

 

 

 

 

 

 

 

 

이 중 정세랑의 신작 장편은 학교 도서관 대출 목록의 엄청난(?) 상위권에 들어가 있다. 부럽...^^;; 오래 전 <고양이의 이중생활> 담당 편집자였는데, 정말 이렇게 뜰 줄이야! 맥락 없이(-어 보이게) 가져온 유현준의 책 역시 도서관 대출 목록 상위권. 역시나 부럽..^^; 건축자의 책이 이렇게 팔리다니, 대체 어떻게 썼기에!!!^^;

 

 

 

 

 

 

 

 

 

 

 

 

 

 

 

 

 

 

 

 

 

 

 

 

 

 

 

 

 수학책이 저렇게 팔리는 것, 정치학자의 (아마도) 칼럼집이 아직 출간도 안 됐는데 세일즈포인트가 - 할 말이 없다^^;; 다 좋은 일이다!

 

샛길로 새버렸는데, 핵심인즉, 가독성과 작품성은 어느 장르에서든(연구서, 인문서도 예외가 아니다!!!) 결코 이율배반적인, 상반되고 모순된 개념이 아니다. 어지간히 읽을 만하고  내용 있는 책, 즉 우리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킬 만한 재미있는,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신나는 책이 필요하다. 나도 앞으로 책을 쓸 시간이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슬프다, 쬐금은) 논문을 구상할 때도 책의 틀을 염두에 두게 된다.(그러다 보니, 논문 심사에서 항상(!!!) 문체와 형식에 대한 지적을 받는다, 흑.) 한 편씩 쓰되 한 권을 그려본다. 자 그래서 -

 

1) 1920년대 불가코프 소설, NEP(신경제정책), 생명창조(회춘), SF, 종교와 과학 등

2) 제대로(?) 소련, 소비에트 소설, SF, 스트루가츠키, <노변의 피크닉>, <스토커>(타르-키), 비슷한 시기 혹은 앞선 시기 서방(+미국)의 SF 등   

 

이제는 공부를 해야지,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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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미노 수(스)조우오 타베타이> 일본 애니-션 좋아한다. 이제는 좋아한다는 말도 하기 머쓱할 정도로 거의 못 보고 있지만, 어제 힘들게(즉 쪼개서 ㅠㅠ) 다 보았다. 일본인들은, 참, 이런 걸 어찌 이리도 잘 만드는지. "이런 걸" 어떤 걸? 우선, 정치나 사회나 이데올로기가 하나도 없는(것 처럼 보이는) 미시사를 그려내는 솜씨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 사회에서 지진만큼 무섭다는 '묻지마 살인'에, 17세 (아마) 췌장암 환자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일본 애니-션의 트레이드마크인 달착지근한 로맨스까지. 단, <췌장...>은 이른바 베드신이 뭐랄까,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었으나, 너무 노골적으로, 이른바 야애니의 양화 버전처럼 보여, 그 부분이 조금 걸렸다. 아마 이 역시 여주가 이른바 시한부 인생이니까(요즘은 이런 표현 잘 안 쓰는 것 같다). 그녀의 다소 오바스러운, 격한 명랑함과 밝음, 까불까불함도 그런 맥락에서. 마지막, <어린 왕자> 재해석 부분도 너무 오글거리지만, 역시 만화인지라. 만화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아줌마, 가슴 설렌다. 도키도키시타?^^;

 

다들 아는 그런 영화지만, 나는 '적자 생존'에 대해 생각했다. 적는 자가 산다!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썼지만, 원균을 아무것도 안 썼기 때문에, 우리는 원균이 뭔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알쓸신잡>) 원균 말도 들어보아야 하지만 당최 들을 수가 있어야지. 한데, <췌장>에서 사쿠라는 <공병문고>라는 제목의 일기, 유서를 남긴다. 여주가 죽은 다음에도 만화가 꽤 지속되는데, 그 내용은 모두 이 기록을 토대로 한다. 살아 남은 자(들)인 남주 하루키(이름!), 쿄쿄 등.  <어린 왕자>는 남주 여주 모두 읽지 않은 책. 남주가 여주 집에서 빌려온, 그러나 돌려주지 못한 책. 어떤 의미에서 <췌장>은 책 읽기와 책 쓰기에 대한 영화로도 볼 수 있겠다. 우리의 기억은 부실하니까, 우리의 존재는 언제든 사라지니까 아쉬운 ㅠㅠ 마음에 뭔가를 쓰는(그리는/ 만드는) 건지도. 그 역시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만드는'(작/쓰꾸루) 우리의 행위는 어쩌면 오로지, 이 시간을 존재하기 위한 한 방식인지도.

 

 

 

 

 

 

 

 

 

 

 

 

 

 

 

 

 

남주 하루키(봄+나무)는 책만 읽는데, 그가 쿄쿄한데 잔소리^^; 들을 때 읽고 있던, 그만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코코로, 다. 그 분위기에 아주 잘 맞는다. 작가 이름만으로도, 책 제목만으로도, 내용으로도. 언제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 내가 맨처음 읽은 나쓰메 소세키 소설이기도 하다.

 

이제는 만화를, 만화영화를 얕잡아 보지는 않는 분위기인 것 같다. 적어도, 일본의 경우 잘 만든 만화가 어지간한 소설, 영화보다 낫다. 이 애니-션도 실사 영화 버전이 있지만, 나는 그래도 이 2D애니-션이 좋다. 포근하고 투명하고 영롱한 수채화 느낌. 작화에 많은 한국인이 투입된다던데, 한 편의 애니-션을 보면 역시 문제는 단순히 손재주만이 아님을 절감한다. 일본식 탐미주의, 퇴폐주의에 대해(다른 더 좋은 개념어가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내 췌장은 안녕하신지. 아프지 않을 때, 혹은 약발 잔존할 때 공부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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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기독교)적 의미의 '고백'(참회)이 문학 장르, 즉 고백체(서간체) 소설로 발전, 이월하는 데 이정표가 된 작품으로 루소의 <고백>을 꼽는다.  위의 세 책이 세계문학 삼대 고백록이다.(-라고 한다.) 내가 읽은 루소의 <고백>은 아주 오래전, 김붕구 선생님 번역본인데, 그 사이 새 판본이 또 나온 모양이다. 아무튼, 명불허전!이라, 이 책에 무척 감동했다.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많이 시간이 흐른 후에,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실 이 역시 '자전적 소설'이라 이름해도 되었을 법하지만, 루소는 그러지 않았다. 즉,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내놓은 것. 그럼에도 몇 십년의 강을 거슬러, 과거를 기록함에 있어 '픽션'이 전혀 없을까. 게다가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다 좋지 않은 일(혹은 대놓고 가해자, 소극적 가해자, 그것의 목격자, 방관자, 아니라면 희생자, 피해자)로 언급된다. 루소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이해하는 자료'(?)로 이해한 것 같고, 그러길 바라서, 서문에 비슷한 언급을 해놓았다.(지금 책을 뒤져볼 시간이 없어서 -_-;;) 아무튼, 장르 불문, 세계문학의 고전이며, 개인적으론, 읽어본 루소의 몇 권의 책 중 가장 애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뒤에(말년?) 쓴 것으로 아는, 또 다른 에세이('고백')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보다 더 좋아한다. 아마 일본 가서 읽었기 때문인지도^^; 

 

 

 

 

 

 

 

 

 

 

 

 

 

 

 

서양문학은 이런 고백록, 자서전, 자전적 소설의 전통이 유구하다. 위에 가져온 톨스토이의 <참회록>(고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많은 소설이 자전 소설이다. 데뷔작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과 평화>도 사실상, 자기 이야기의 확장판인 자기 가정, 가족, 가문의 이야기다. 물론 이런 개인사를 보편사로 확장하는 그 능력은, 과연 대가의 그것이라 할 만하다.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사회적 이슈를 소설화한 것인데, 개인적 경험을 활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분신을 소설화하는 능력과,,, 타인의 이야기를 반대로 자기화하여 개연성 있게 써내는 능력,,, 두 능력의 조합 역시, 그러하다. 겸사겸사, <부활> 번역의 역자가 바뀌었다, 허걱. 표지 그림, 카튜샤, 어쩔 겨 -_-;;

 

 

 

 

 

 

 

 

 

 

 

 

 

 

 

 

 

동양문학은 아무래도 고백의 전통의 약하고, 대신 '-전'의 전통이 강하다.(-라고 한다. by 조동일) 양반전, 전우치전, 허생전 등등. 3인칭적 서사, 전지적 화자가 남 얘기를 들려주는 식. 내가 내 얘기하는 게 쉽지 않다. 그걸 처음으로 소설에 도입한 자는 누구??? - 아는 사람 가르쳐주세요!^^;

 

분명한 건, 일본문학은 동아시아에서 제일 빠른 근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러려고 엄청나게 열을 올리면서 이 부분에서도 서양 것을 더 빨리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영향이 이런 작품들에 배어 있다. 개천용지개의 서고에 있었던(<어느 바보의 일기>?) 많은 책들 보라. 그런 갈망이 여실히 보인다. 아무튼 이건 순전히 주관적이고 인상적인 얘기라, 전거를 좀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셔도 좋겠다^^;

 

 

   

 

 

 

 

 

 

 

 

 

 

 

 

 

일본식 사소설의 전통을 이상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식 탐미소설은 김동인의 각종 예술가 소설에 반영되지 않았나 싶다마는, 김동인을 읽은지 넘나 오래되었다 -_-;

 

 

 

 

 

 

 

 

 

 

 

 

 

 

 

 

사소설은 내 경험의 극단이다. 이게 싫으면, 그 반대의 극단이 있는데, 철저하게 남의 얘기를 가져오는 것. 개천용지개 식으로, 고사, 전설, 다른 고전(가령 <카라마조프)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쿠다가와의 소설의 많은 부분이 이것. 그다음, 루쉰 역시, 말년에(?) <고사신편>을 쓴 것으로 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우려먹을^^; 자신의 경험이 없어지고(바닥나고) 동시에 상상력을 먹여 살릴 정신의, 마음의 힘이 없어졌다는 뜻이리라.

 

 

 

 

 

 

 

 

 

 

 

 

 

 

 

한국 현대 문학에서 최고의 자전 소설을 꼽으라면 박완서의 <그많던싱아는...>이 아닐까 한다. 이 역시 명불허전!, 나이 들고 나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실상 그녀의 많은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고, 자연스레 자신과 가족과 주변 이웃, 지인 들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공지영, 신경숙 등 굵직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많은 소설이 그런 것으로 안다. 워낙 안 팔려서^^; 문제가 안 돼서 그렇지,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경험과 상상의 비중이 다를 뿐, 두 가지가 섞인다는 건 동일하다. 그리고 앞서 강조한대로, 순수 고백(수기, 일기 등)을 표방한 글도 '픽션화'는 불가피하다는 점, 꼭 염두에 둬야 한다. 대표적인 걸작이 이것.

 

 

 

 

 

 

 

 

 

 

 

 

 

 

 

 

헉, 내가 읽기를 쉬는 동안에도 계속 나오고 있구나. 이 소설 속 '나'는 결국 '마르셀(프-트)인데, 이든 아니든, 기든 말든 사실 아~무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읽을 만한, 후손에게 길이 남겨줄 가치가^^ 있는 예술텍스트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

 

이번 김봉곤 사태(-라고 불러야 하나)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 굳이 절판까지 ㅠㅠ 가뜩이나 독자가 없는 한국문학에, 출판계에, 작가들에게, 이런 악재까지 ㅠ(강조하건대, 나는 김봉곤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다른 한편,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요상한 말이 시사하듯, 각종 모럴이(가령 저작권 포함) 많이 달라졌음을 우리가 예민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재작년에 나온 나의 (경)장편 역시 많은 모델들이 있다. 주로 물리적 짜집기에 덧붙여 화학적 변용이 있었지만, 틀거리를 제공한 커피숍 사장은 상당히 대놓고 가져온 인물이다. 내 소설 읽고 그가 소송냈으면 클~ 날 뻔 했다^^;(실은 굉장히 좋아했음 ㅋ)  역시나 아무도 읽지도 않고 관심도 없겠지만^^; '벙거지 문청' 김건우의 모델은,,, 저 커피숍에 아침마다 나타나던(나를 전혀 모르는) 시인 오은과, 간헐적으로 출몰한 (역시나 나를 전혀 모르는) 사회학자 김홍중(곧잘 벙거지를 쓰고 다님), 대학 시절의 '나', 영문과 선배(의 외모) 등이다. 이런 걸 다 일일이 문제 삼자면,  결국 작가가 쓸 수 있는 글이란 저런 식의 독서 에세이 뿐이다.

 

 

 

 

 

 

 

 

 

 

 

 

 

 

 

소설이 백프로 창작이다, 라고 쉽게 생각하신 분들은, 그런 식의 소설을 쓰시는 분들이고, 소설에는 정녕 많은 소장르가 있다.  앞서 쓴, 톨스토이, 프루스트, 박완서 등은 말하자면 자전 소설 계열이다. 얼핏 떠오르기로, 도스-키, 나보코프, 이런 작가들은, 자기 얘기를, 정보를, 디테일을 가끔 이용은 해도, 자전 소설 자체는 잘 쓰지 않는다. 나보코프는 아예 자서전을 따로 썼다. 즉, 그는 보르헤스처럼 픽션적 글쓰기=소설적 글쓰기, 라고 생각하고 이른바 자기 얘기를 구질구질^^; 청승 떨며 쓸 때는 아예 '자서전'을 쓰기로 한 것이다. 이건 성향의 문제지, 작품 품질의 문제는 아니고, 윤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도중에 넣었어야 했는데-_-;; 낭만주의기에는 이 구분이 정말로 애매했던 것 같다. 이른바 자전 소설, 고백체 소설의 전성기랄까.

 

 

 

 

 

 

 

 

 

 

 

 

 

 

 

 

 베르테르는 곧 젊은 괴테(질풍이야, 노도야~), 세기아는 곧 뮈세(그 연인인 무슨 부인은 조르주 상드), 우리 시대의 영웅 페초린은 곧 레르몬토프. 아무도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델이 된 본인이라면 모르겠다^^; 가령, <베르테르>의 알프레드나 로테, <세기아...>의 그 부인(즉, 상드), <...영웅>의 그루시니츠키, 메리 등등. 그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할까. 글쎄다. 나도 예민한 부분은 물어보긴 하는데 - 사회성(!), 역시나 쉽지 않다!  

 

요즘 우리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나한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도 맛나는 것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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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1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셨어요 푸른 괭이님_ 근데 안 읽은 책 정말 많네요. 다 읽고 싶다... 김봉곤은 가슴 아파요. 저도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간만에 나타난 혜성인데 얼마나 상처 받았을까 싶고... 하지만 피해자들 생각하면 또 그들의 상처도 만만치 않고...... 아이구야.

푸른괭이 2020-07-19 14:35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 나쁜 소설은 나중에 문학사가 알아서 다 판단해줄 거고요, 현 시점에서는 각자의 판단, 취향이 많이 작용하는데, 아무튼 뭐라도 읽히는 건 좋은 거죠. 아무도 안 쓰고 아무도 안 읽는 것 보다야^^;

어떻든 몇 안 되는 저런 작가, 저런 책이 팔려야 출판사가 안 팔리는, 그러나 유의미한 책들을 많이 낼 수가 있는데, 정말 올해는망했다, 라고 할 밖에요 ㅠ 표절이나 명백한 성폭력 같은 것도 아니고 - 게다가 그가 문동편집자라고 해서 무슨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처음에는 출간을 못했다고 어디서 읽은 것 같네요) -

작가와 피해자분들 사이에 사전에 미리 얘기가 잘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척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예민한 소재(성, 게다가 퀴어)를 다루다 보니, 그 부분이 서로 쉽지 않았나 봐요 ㅠㅠ

추풍오장원 2020-07-2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 말씀에 너무나도 공감합니다.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푸른괭이 2020-07-21 18:23   좋아요 1 | URL
김봉곤 소설 정말 안 좋아하지만(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취향이니까요), 이번 일로 그 작가가 너무 큰 타격을 받을까봐 걱정되네요 ㅠ 다소 불성실하고 부주의했던 건 맞지만(청탁도 많이 들어왔을 테고요) 이렇게까지 ㅠㅠ

공지영의 경우에는 전 남편이 패소(?)한 걸로,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결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9시 27분이지만 '늦은밤'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아파서 일찍 잠든 아이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저 말에 머물렀다. 도-키가 떠올랐다. 인간의 다면성이란. 인간이란 넓다, 너무 넓어서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좋겠다, 소돔의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도(그때야 말로!) 더더욱 마돈나의 이상을 불태운다, 신과 악마가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등등. <카라마조프...>의 드미트리의 말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인생의 소설이 있지만, '그럴 사람 아니다'라는 말을 보며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나의 은사님의 번역이 내 번역보다는 업그레이드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오역도 아마 잡아주셨을 테고. - 내 번역엔 오역이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번역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은 해석과 판단의 문제인 경우도 있어 더더욱 그렇다.)

 

드미트리가 인간의 '넓음'(모순)을 논할 때는 '공시성'에 집중했던 것 같다. 자, 여기에 '시간'을, 그 무서운 괴물을 덧붙여 보자. 통시성. 그 관점에서 (한) 인간을 본다면, '그럴 사람 아니다'라는 말 자체가 모순형용임을 알 수 있다. 한 살 아기, 열살 소년소녀, 스무살 청년, 서른살 처녀총각, 마흔살 아줌마 아저씨 등등. 말쑥한 변호사에 청와대 **가 된 선배의 모습에서, 오래 전 줄 담배 피우던 문학청년의 모습을 찾기 힘들듯(전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 '비에 젖은 단발 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는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 시절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이려나. 혹은 그 가치(-를 담보한 사람)를 공유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려나.

 

아마 다 진실이리라. 수더분한 인권 변호사, 착한 청장년, 노회한 정치인 등등. 하지만 그 반대도 또한 진실이리라. 연애 감정이 있었든 어쨌든 그것을 '폭력'이라 느낀 사람이 있다면 일정 부분 폭력이 있었다는 것 또한 진실이리라, 라는 얘기다. 아마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일 수록, 충격과 고통은 더 크리라 생각된다. 동시에, '그럼에도 - ' 이런 반동 역시 동반되지 않을지. 이건 '픽션'(=신화)을 만들려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우리 인간의 본원적 속성이므로, 그의 자리에 박근혜를 갖다 놓아도 비슷할 법하다.  (저 불쌍한 것, 엄마 아빠 다 사고로 잃고 시집도 못 가고 나를 위해서 운운...) 

 

 

 

 

 

 

 

 

 

 

 

 

 

 

 

여러 정황상, 서로 짝패처럼 여겨지는 박상영과 김봉곤 중, 나는 이상하게도, 전자는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인 데 반해 후자는 너무 안 읽혀 돈만 낭비한 셈이 되어 버렸다. 수업에서 다루기도 했지만, 너무 날 것의 느낌이 불편했다. 20여년 전, 누군가에게 내 소설이 그랬을 수도. 하지만 나는 워낙에 6천부 팔린 작가라^^; '물의'와 '추문'의 대상이 될 만한 영광도^^; 누리지 못했다. 센세이션, 스캔들. 아, 요즘은 이런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지난 봄/여름에 문제의 그 소설을 읽었으나, 그냥 독자일 뿐인 나는 그 'C누나'도 그냥 저냥 읽고 넘겼다. 현실 속의 그가 '폭력'을 느낀다면 그 역시도 폭력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두 사람 사이에서 적절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원고를 보여줄 때) 이렇게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사회성은 발달의 시작과 끝.

우리의 성장과 발달은 사회성(눈맞춤, 호명 반응, 감정 교류, 의사소통)에서 시작하여 사회성으로 끝난다. 두 번째 사회성의 경우, 상상력, 추상력, 이런 것도 들어가겠다. 일면식도 없는 장하준, 유시민, 유현준, 김영하 등등의 책이나 방송, 강의, 토론 등을 자주, 그러나 짬짬이 찾아 듣고(보고) 교감한다. 이런 건 일방향 사회성이라 편하다. 하지만 쌍방향(오, ZOOM!) 사회성은 다르다. 과연, 접촉과 오류는 불가피하다.

 

다시 <카라마조프.> 드미트리의 떠들썩한 모크로예 술판에 동참했던 젊은 지주. 그는 완전히 엑스트라인데, 드미트리가 체포되었을 때 절규한다. 아, 정말 사람이란! 사람을 알 수가, 믿을 수가 없구나! 화자는 덧붙인다. 그는 드미트리가 진범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라고. 아주 사소한 디테일이지만, 역시 대가답게, 살면서 자주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는 (아마 이름이 막시모프??) 드미트리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드미트리가 표도르를 죽였다고 믿었고, 동시에, 자기가 믿은 그 사실(실은 그런데 이것이 거짓이다!) 때문에 통탄한다.

 

다시, 그럴 사람 아니다.

항암 중인 아비를 보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또 이런 말을 생각한다. 하, 저런 양반이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 특히 과거의 나, 미래의 나와 비교해 보면.

 

생각할 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노년의 톨스토이는 이 문제에 굉장히 심플!하게 접근한다. 체급별로 다 잘 싸우는 당신은 정녕 천재.

 

 

 

 

 

 

 

 

 

 

 

 

 

 

한 자 한 자 원어로 읽어가면서 (주로 아이에 의해, 또 일정 부분 아빠와 두 동생에 의해 유발되는) 내 안의 불안과 공포와 우울에 '항-'을 넣는 중이다. 항암, 항생, 항바이러스, 항우울, 항전간 등. antibiotics, 抗生劑. 하나만  찾아보니 이렇다. 아, 부작용이 있어도 좋다, 제발 작용이라도 멀쩡하게, 어엿하게 좀 있어다오, 이 말이다. 작용이 작용하면 '싸이드' 작용 쯤이냐 기꺼이 감수하겠다. 어떤 질환이든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역시 조만간 체념하게 되겠지만 -.

 

 

 

 

 

 

 

 

 

 

 

 

 

 

 

과학, 의학에 거는 기대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의 절박함이랄까,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사실 저출산이 그렇게 비극인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지구상에 호모 사피엔스가 너무 많지 않은가.(by 유시민) 여사여사 책을 좀 정치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라는 생각에 논문을 쓰자. 더불어, 이번 학기에 급증한, 하지만 전혀 해소하지 못한 SF에 관한 관심을 내년 쯤에는 어떻게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모아보고(-만) 있다.

 

 

 

 

 

 

 

 

 

 

 

 

 

 

 

 

 

 

 

 

 

 

 

 

 

 

 

 

 

 

자료가 너무 많아 이미지를 긁어오기 힘들 정도. 차분한 호흡으로 가자. 오늘은 아주 질 좋은 삼계탕을 먹었다. 내일도 살아 있어야 - 그럴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사람일 수도 있고 - 아무튼, 좌우지간 살아 있어야...

 

cf. 백낙청 선생님 이름 오랜만에 들어본다(... 스무 살이나 많은 내가 당신의 장례를... 이럴 줄 몰랐다, 라는 식의 말씀), 겸사겸사 그의 장남 블로그도, 이웃 동네 마실 가듯, 구경간다, 너무 다른 삶의 양상, 그 대조가 거의 미학 수준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주저리주저리 썼는데, 쓰는 행위가 지닌 '항-'의 효과를 실감한다. 오토픽션, 이라고? 글쎄, 사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지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읽을 만한, 훌륭한 언어적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다.(가령 위에서 가져온 책들.) 이제 자야지. - 모두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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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07-1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김봉곤의 날것 ! 맞습니다. 저도 김봉곤 읽으면서 ˝ 날것 ˝ 이란 생각이 들어 거부감이 들더군요. 문학이란 게 날것을 요리를 해서 익힌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저에게는 그냥 날것만 덜렁 내놓고는 먹어라, 라고 하니 거부감이 들더군요..

푸른괭이 2020-07-16 10:42   좋아요 1 | URL
하지만 그걸 돈주고 살 만큼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의 글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_-;; 저렇게 마구 쓰는데도 인기가 있다니ㅠㅠ 그래서 이번 소설집은 아예 안 샀어요.

아무리 그래도 창비, 문동 보이콧까지 ㅠㅠ 가뜩이나 파리 날리는 게 문학판인데,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ㅠㅠ 모두 너무 에너지가 넘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