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아니 세계문학의 투톱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히는 두 작품인데, 받는 대접은 좀 다른 것 같다. <1984>는 번역도 다양하고 소위 일류 전집에 들어가는 반면 <...신세계>는 왜 약간 푸대접일까. 읽어보면 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신세계>는 SF, 사이언스 픽션의 요소가 강한데, 사이언스가 너무 강해서 픽션을 이긴다. 등장인물이 분량에 비해 그리 많은 편도 아님에도 성격화가 약하다.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 약하니 당연히 스토리, 플롯도 약하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살던 린다와 거기서 자란 아들 존이, 버나드 마르크스(+ 레니나)에 의해 런던, 즉 문명세계로 오면서 일어나는 갈등과 파국이 전부. 그밖에 요소는 거의 다 세팅. 존은 린다와 총통 무스~ 사이의 사생아이다. 흔한 스토리가 그나마 의미 있는 것은 이러저러한 과학적 세팅, 미래세계에 대한 놀라운 비전 때문이다. 그밖에, 스토리가 거의 전적으로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것도 무척 아쉽다. 이 모든 문제, 갈등을 해결하는 만병통치약 소마(SOMA)의 존재는 흥미롭지만, 역시나 세계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 있다. 말년에는 헉슬리가 그런 소마에 의존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설민석을 돌려주시오!!! ㅠㅠ

필요에 의해서 다시 비교적 정독했는데, 정말이지 (대학 때도!!!) 너무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등장인물과 줄거리 파악도 힘들 만큼  지루했다. 그런데, 설민석 <책 읽어드립니다>를 듣고서 '개안'하는 기분.  그는 학자가 아닌데, 왜 다들 그에게, 대부분의 학자조차 갖추지 못한 엄정함을 요구하는가. 게다가, 그에게 뭘 틀렸다고 지적하는 '그들'은 과연 다 옳은 얘기를 하는가. 아닌 경우도 더러 보인다! 사실 관계 상의 명백한(+중요한) 오류는 나중에 자막 달아서 교정해도 되는데. 두툼한 책 한권의 오역을 지적하긴 쉬워도 그런 책을 번역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고 그러는 건 파렴치한 일이다. 방송이라는 특수성도 명백히 고려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소설 <카라마조프> 강의도 나중에 방송 보면 오류에 가까워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역사든 교양서든 문학이든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렇게 멋지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 찾기 쉽지 않을 듯. 

 

 

 

 

 

 

 

 

 

 

 

 

 

 

 

한편 <1984>는 확실히 글쟁이, 전문 작가의 작품이다. 이걸 십대 때부터 주기적으로 읽어오는 것 같은데(<동물농장>과 헷깔려 하면서?^^;) 어쨌든 이건 소설이다. 이 점이 <...신세계>와 아주 다르다. 기술력을 갖춘 세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아니라, 곧장 주인공(윈스턴)과 그의 주변 인물(검은 머리 여자, 오브라이언, 무슨 부인 등등)이 나오고 사건이 나온다.(2분증오.) 그 과정에서 그가 속한 세계의 특성, 체제가 유기적으로, 생생하게 설명된다. 음, 어제 오전에 1부까지 다 읽을 생각이었는데 역시 정독은 힘들어, 겨우 몇 십쪽 읽은 것 같다 ㅠ 지금 읽어야지. 저 책에 수록된 원고 쓸 때 공부한^^ 내용이지만, 오웰의 소설은 그가 르포작가였다는 점, 그렇게 시작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

이번에 <...신세계> 다시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문장은 재판 서문에 나온 것.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죽었답니다”(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두 해가 더 흘러갔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성가신 목숨을 스스로 끊기로 했으며, 그가 아는 깊은 동굴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동굴 아래로 내려가려니 당연히 겁이 나서 흠칫 물러섰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서 기분이 짜릿했다. 그는 어두컴컴한 커다란 문을 통과하여 한 계단씩 아래로 점점 깊이 내려갔다. 그렇게 몇 걸음을 내려가자 벌써 하루 종일 걸어온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 으슥한 곳에 있는 조용하고 서늘한 지하 납골당에 다다랐다.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 브렌타노는 납골당 문에 노크를 했다. 불안을 견디고 버티면서 까마득히 오랜 시간을 기다리자 들어오라고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다. 어린 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겁을 먹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무뚝뚝하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너는 가톨릭교회를 섬기는 종자가 될 거지? 여기서는 그렇게 해야 해." 음침한 느낌을 주는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브렌타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브렌타노 2>, 437-438)

 

결국 <세상의 끝>을 주문했고 편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읽고 있다. 이렇게 읽어야 좋은 책인 것 같다. 이걸 몰랐기에 전에 읽은 <산책자>는 오히려 기대보다 더 적은 감흥을 얻은 것 같다.

 

 

 

 

 

 

 

 

 

 

 

 

 

 

 

 

<세상의 끝>에는 사진이 많은데, 특히 마음에 드는 사진은 이것. 스위스 사람답게 그는 산책을 많이 했는데 요양원에서 보낸 인생의 후반부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정신질환으로 인해 요양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거의 유랑 생활 수준으로 거처를 자주 옮겼던 모양이다, 차라리 요양원이 나았을 수도.) 어느 눈 오는 날, 눈 내린(쌓인) 거리로 산책 나갔다가 저렇게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하, 귀한 사진. 무척 부럽다.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나. 나도 저렇게 죽고 싶다. 남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바 아니지만, 니체 역시 토리노에서 얻어터지는 말 끌어안고 울다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발저의 글쓰기를 보면 장르나 형식이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모든 글이 다 구성적인 짜임새를 갖출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도 하게 만드는 글들 투성이다.  소설은 어떻게 썼을지 궁금하다.   

 

다시 위의 글. '그', 즉 발렌티노가 동굴에 간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동굴 속(아래) (지하?)납골당에 다다른 그는 자살에 성공한 것인가? '가면' 사내는 누구인가? 가톨릭 종자가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설마 문자 그대로, 죽지도 못하고, 종자?? 아니면 자살을 통한 영생?? 오묘한 텍스트다. 그런데 로-트 발저의 많은 글이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산책하듯 천천히 읽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에 자먀틴(-찐)의 <우리>(We)를 읽어보려고(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흐억, 벌써 겨울이 끝난 기분이다. 클리어런스^^; 세일차 연일 이월 겨울 상품을 주문하고 공부라곤 정말이지 조금씩, 야금야금 하고 있다. <우리>는 레퍼런스가 비교적 많은,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 자체도 어지간히 재미있고 분량도 만만하고, 아무래도 주제의 유의미성이 큰 이유인 것 같다. 위의 저 두 작품과 엮기도 좋다. 물론, 비교 연구를 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러기에는 저 두 작품이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특히 헉슬리 소설은 SF, 즉 사이언스 픽션의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뭐냐면, 사이언스가 너무 강해서 픽션을 이겨버렸다. 아마 그건 헉슬리가 H. G. 웰스의 과학소설(유토피아 비전의)을 너무 염두에 둔 탓, 그다음,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과학에 대한 강박이 좀 강해서가 아닐까 싶다. 허버트 조지 웰스(웰즈)는 자먀틴도 읽고 많이 배운(-것으로 얘기되는, 심지어 에세이도 하나 쓴) 작가이다.

 

 

 

 

 

 

 

 

 

 

 

 

 

 

국내 자료 중 홍성욱이 쓴 <크로스 사이언스>에 저 두 작품이 나온다.(자먀찐 소설은 아무래도 지명도가 낮아서 빠진 것이 아주 당연해 보인다.) 해당 부분만 찾아보려고 했는데, 정보량도 많고 재미도 있어서, 또 구성도 좋아서(한 학기 강의 커리큘럼) 다 읽어버렸다. 찾아보니, 하, 역시 저런 유의 책은 하루 아침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꽤나 내공이 많은, 기존에 저서가 많은 분. 내 주제와 관련해서는^^; 디스토피아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유토피아에 대한 얘기를 (비록 양은 적더라도) 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 챕터의 맨 마지막 부분에, 우리가 디스토피아(안티-유토피아)의 위협에 빠지지 않으려면, 간단히 총체적으로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위의 저 소설에서 예언하는 것들을 피하면,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밖에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 얘기, 이른바 프라이버시의 개념과 그 역사와 현재 그 정황 등에 대한 얘기도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최근 영화 버전

МЫ - официальный тизер - YouTube

독일 버전도 있는 모양.

Фильм-антиутопия "Мы" (1982 г.) - YouTube

 

 

 

 

 

 

 

 

 

 

 

 

 

 

 

<우리>를 다시 읽은지 오래 되었다. <1984>를 얘기하며 살짝 붙인 적은 있다. 이번에 여러 학자들의 선행연구 도움을 받아 다시 정독해보려고 한다. 다른 한편, 우리문학도 가히 SF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사회성과 환상성, 두 마리 토끼가 다 잡히는 것 같다. 적어도, 지난 학기 잠깐 훑어본 인상은 아주 좋았다. 김초엽, 정세랑. 박보영 신작이 나온 걸 읽지 못한 채 종강해서 아쉽다. 

 

 

 

 

 

 

 

 

 

 

 

 

 

 

 

덧붙여 최근 시간을 통해 김초엽 작가 청각장애 3급임을 알게 되었다. 장애 종류 상관 없이 통상 1-3급이면 정도가 심한 것, 우리가 손쉽게 장애라고 할 만한 정도이다.(한 번은 센터관에서 시각장애 6급인 분이 그걸 큰 불행, 비극인 양 얘기하는데, 다들(모두 그보다 위중한 상태이다 보니)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자폐 2급 아들을 둔, 거의 전맹인 분도 계셨다 -_-;;) 아무튼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지난 학기 읽고 또 강의 영상도 찍었던 소설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나도 1년이 넘도록 (새로 올라온) 뇌전증으로 고생 중인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이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기억이 맞다면,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던 것 같다. 고려원? 아무튼 헌 책방에서 그의 책을 사서 읽은 것 같은데 대표작인 <희랍인(그리스인) 조르바>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나는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고교 시절에 이어 도스토-키에 빠져 살던, 여기에 카프카와 카뮈를 덧붙이던 시절이라. 검색해보니 안정효 번역의 <최후의 유혹>이 뜨는데, 비교적 나이 들어 (다른 작품 번역으로) 다시 읽어도 안정효는 당대 최고의 번역가이다.

 

 

 

 

 

 

 

 

 

 

 

 

 

 

 

한편 나의 친구는 <...조르바>를 좋아했다. 특유의 약간 멍하면서도 사색에 잠긴 듯한, 굉장히 심오한(-하다고 느껴진, 당시에는) 눈빛으로 "조르바 같은 인간 있잖아, 그렇게 살면 좋겠는데..."라는 식의 말을 했다. 돌이켜보건대, 여기에는 낭만주의 이래 아주 케케묵은 이분법이 도사리고 있다. 천재 vs. 천중(대중), 지식인(인텔리겐치아, 엘리트) vs. 민중, 문화-문명(인) vs. 자연-야만(인) 등. 그 무렵 친구는 자기를 응당 '작가-카잔-스'와 동일시한 듯하고, 그 입장에서 조르바를 동경하는 식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역시나 대학생다운(!), 그것도(괜하 자의식, 열등감일 수 있지만!) 이제 막 명문대에 입학한 지방 출신 여학생다운 생각이다. 그 친구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인생을 보면, 이제는 그 이분법의 허상을 모르진 않겠지만 어쨌든 실천에, 실행에 있어 '작가-카잔-스'도 '조르바'도 아니게 돼 버렸다.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조르바라면 '자유'(자연)인지라 굳이 성취가 필요없지만(존재하면 된다!!!) 작가-카잔-스라면 반드시 성취가 있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흘러, <알릴레오3>을 들으며 게스트로 나오신 분과 유시민의 독법을 비교하게 되었다. 전자의 독법도 나쁘지 않았으나, 확실히 유시민은 독해력(?!)에 있어 독보적인 데가 있음을, 굉장히 폭넓으면서도 동시에 깊은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들었다. 앤소니 퀸이 나온 영화는 나도 어릴 때 보았는데, 유시민 말마따나, 조르바가 맨날 춤추는 것도 아니고^^;  영화는 영화일 뿐, 책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제법 오래 전, 모 기관지(소식지)에 매달 연재하던 독서에세이란에 마지막으로 다룰 책이 이것이었다. 책을 구입했는데 바로 짤려서 ㅠㅠ 쓰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덧붙여 이런 '자연인'의 삶에 대한 동경은 어느 문화권에나, 어느 시대에나 있어서 도스-키나 톨-이도 예외가 아니다. 그 실천에 있어서도, 시간과 돈과 건강(!!!)이 있어야 하므로, 결국 톨-이가 이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아이의 등교일이 너무 적어(자의반, 타의반 돌봄도 못 보낼 때가 많다) <알릴레오 3>를 제대로 못 듣는데, 그 와중에 스치는 유시민의 말을 듣고 다급하게 검색. 그의 명민함이야 다들 알지만, 환갑을 넘긴 시점에서 저 엄청난 학구열과 성실성에 감탄한다. 어떤 책에 대해 한 시간 안팎을 얘기하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는 유사 업종 종사만이 알 수 있을 터. 과학서(?) 같은 경우, 패널을 둘 초빙하던데, 그 역시 그의 정직함(?)과 배우려는^^;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상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논문은 아직 쓴 바 없지만) 톨-이의 <부활>에 헨리 조지 얘기가 나온다니, 이게 웬일이냐. 중년, 노년의 톨스토이가 저런 따끈한 신간까지 찾아 읽었다니, 톨-이가 놀랍고, 그와 동시에 (감동하기에도 너무 잘 몰라서 -_-;;) "세계는 계속 발전하는데(=진보) 왜 가난(빈곤)은 없어지지 않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너무 당연하지만, '땅-토지'에서 찾으려는 그 시도 역시 놀랍다. 물론, 현실화되기에는... 글쎄, 너무 많은, 어려운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헨리 조지는 워낙 모르고, 가령 톨-이의 경우.

 

저 <부활>에서 네흘류도프는 토지를 농노들에게 내주려는 시도를 감행하지만, 비웃음에 부닥친다. 이건 물론 톨-이의 시도이기도 하다. 그 시도가 성공한 것도 아니고, 나는 사실 톨-이의 그 시도에 얼마만한 진정성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한편으론, 자식이 1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죽을 때 다 된 자신의 공명심을 위해, 토지를 공공에 환원한다는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거야말로 '지상의 양식' 대신(이미 많이 먹었으니까) '천상의 양식'을 바란 것은 아닌지(카츄사의 대사와 비슷)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19세기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서  이런 제도의 모순을 깨달았고(군주제, 농노제, 토지 문제, 각종 사유재산, 종교-제도 문제, 남성의 성적 타락 등)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는 '거인'이었음이 분명하다. 토지에 관한 한, 그의 대표 민화-단편 <사람에게는 많은 땅이(땅이 많이) 필요한가>, 일정 부분 <바보 이반...>을 들춰볼 수 있겠다. 아, 이 역시 유토피아.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우리 같이 꾸는 꿈은 꿈이 아니니까(맞나? 존 레논, <이매진>)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볼 수도 있으리라. 음... 하지만 이 역시 꿈은 꿈.

 

선악에 대한 톨-이의 너무나도 단순한 이해(특히 도-키와 비교하면), 믿음-종교에 대한 역시나 너무나도 순진한 이해, 그런 이해의 저변에 깔린 부유한 귀족-백작의 낙관주의 등을 생각하는 요즘이다. 진정으로 굶주리고 진정으로 노동에 혹사당한 적이 없는 인간-남자이기에, 그는 범죄(선악, 폭력)의 문제, 빈부 격차 같은 것이 무한한 용서와 배려(비폭력 무저항주의^^;)를 통해 해결되리라고 진정 믿었던 것 같다. 그 믿음이 참 부럽다. 가령 <대자> 같은 민화에 표현된 것: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면(그것도 입안 가득 날라야 한다) 싹이 트고 사과나무가 자란다, 라는 식의 믿음. 타-키의 <희생>인데 아마 더 깊은(?) 원전은 이것일 터. 물론 민화 자체가 톨-이의 창작물은 아니기 때문에 더 깊은(?) 원전이 있을 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