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소설Scienc Fiction에 대한 흥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뒤져보니 러시아-소련의 SF도 제법 공부할 만한, 즉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이 많다. 적어도 있다. 의외로 국내 연구도 제법 되어 있다. 하, 나만 놀고 있었구나! 내가 노는 동안에도 적들은 졸지 않았다! ^^;

 

 

 

 

 

 

 

 

 

 

 

 

 

 

보그다노프는 레닌을 비롯한 혁명사 공부할 때 얼핏 본 듯한 이름인데, 이런 소설을 썼고 번역도 되어 있다. 음, 재미없다는 썰이 지배적이지만^^; 공부는 또한 반쯤 의무감으로(도) 하는 것이니까. 일종의 길잡이 중 하나는, 비교적 정독한 <유토피아 문학:...>(경희대)이다. 그다음 SF로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을 꼽아볼 수 있겠다. 번역이 적잖이 되어 있는데 이참에 읽어보려고 한다.

 

 

 

 

 

 

 

 

 

 

 

 

 

 

 

 

아시다시피 <노변의 피크닉>은 타르-키 <스토커>의 원작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솔라리스> 원작인 스타니스와프 램의 소설도 읽고 싶다. 그밖에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 꿈을 꾸는가>(리들리 스콧, <블레이드 러너> 원작),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그다음 이른바 심리-의학(정신과) SF 쪽에 들어가는 <앨저넌...>, <빌리...> 등. 이것에 대한 길잡이는 지난 학기에 열심히 읽고 강의 동영상도 찍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이제 더 이상 장르문학이 순문학과 엄격하게 나뉘는 것 같지도 않고, 국내 SF의 수준도 엄청나게 높아진 것 같다. 그 원조를 찾다 보니 뜻밖에도 이광수의 이름을 만나게 되고(제일 먼저 소개함) 김승옥도 SF를 썼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 찍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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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sf1 - YouTube

김승옥sf2 - YouTube

김승옥sf3 - YouTube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막 생겨날 때, 그 느낌이 참 좋다.

 

이른바 SF의 아버지라 불리는 허버트 조지 웰스, 지금 읽고 있는데, SF를 떠나 소설 자체를 너무 재미지게^^; 써서 깜짝 놀랐다. <타임머신>, <투명인간>보다 지금 저 단편선에 수록된 작품들을 더 신나게 읽고 있다. (소설 작법에서 써먹어도 될 법한 소설들이다!) 영국에 웰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쥘 베른이 있는데, 어째 요즘 인기는 전자 쪽에 더 있는 것 같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읽는 거다. 하, 그러나 방학도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남았구나 ㅠㅠ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의 모래시계일지도 모르거늘.

 

- 엄마, 나는 2011년 *월 *일에 태어났잖아? 그럼 나는 언제 죽어?

(...)

- 사람은 태어난 날짜는 알아도 죽는(-을) 날짜는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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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전기

(....)

 

 

 

 

 

 

 

 

 

 

 

 

 

 

 

 

 

 

 

도스토옙스키의 작가 인생을 조망할 때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가 변태와 탈각의 순간을 보여준다면 <죄와 벌>(1866)은 그 이후의 모습이 진면목을 드러낸 첫 소설이다. 차기작인 <백치>(1868)와 <악령>(1871)은 세기의 걸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로 가는 과도기적 작품이자 그 자체로 혼돈과 무질서로 점철된 묵시록이기도 하다. <백치>의 기본 서사가 열정-수난이라면 <악령>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시작된다.

 

 

2. 희화된 소설-비극<악령>

 

1) 정치소설로서의 <악령>: 허무주의 vs. ()허무주의

 

<악령> 극우-보수작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예술보다는 이데올로기라는 식의 기치를 내걸고 네차예프 사건을 소재로 쓴 정치소설, 심지어 정치팸플릿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급진사상을 일컫는 허무주의(니힐리즘), 나아가 혁명을 통한 유토피아 건설의 꿈은 또한 필연적으로 신과의 투쟁’(무신론)과 닿아 있다. 이 맥락에서 쓰이고 읽힌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이나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 같은 ()허무주의 소설은 <악령>에 비하면 오히려 온건한 소설이다. 젊은 날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력이 있는 사상범이었던 만큼,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허무주의는 단순히 젊은 급진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온한사상에 대한 과도한 불안은 사실 통렬한 자기반성의 산물이며, 임종을 앞둔 스테판 베르호벤스키의 말은 작가의 참회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작품의 제목과 제사를 제공한 게라사(가다라)의 마귀(besy)’을 거칠게 해석하면, <악령>의 거의 모든 인물, 심지어 러시아 전체가 악령(besy)’에 들린 돼지 떼. 그런데 악령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기에 살아있는 육체에 빙의(憑依)되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이 단어에 붙은 복수의 표식은 악령과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의 내밀한 근친 관계(지라르)를 암시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을 니힐리즘의 은유로 취하되 그 복잡다단한 양상을 크게 현실 층위와 관념 층위에서 형상화한다.

 

 

 

 

 

 

 

 

 

 

 

 

 

 

 

먼저 현실 층위의 정치-혁명에 관한 한, 시갈료프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혁명가의 두 양상(이론과 실제)을 보여준다. 시갈료프의 세계 체제론은 간단히 10분의 1(무한한 자유와 전제주의)10분의 9(절대복종)의 변증법에 근거한 지상낙원 건설 기획이다. ‘우리 편(nashi)’의 모임에서 시시껄렁한 소일거리로 소비되는 이 이론이 표트르의 칼과 결합하는 순간 거사-과업으로 바뀐다. 바쿠닌식 무정부주의를 구현하는 혁명가(‘열광자’)로서 그는 스타브로긴에게 이반 왕자-의 역할을 맡기고 동시에 공통의 피-죗값(샤토프 살해)으로 민중(5인조)을 올가미처럼 묶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속된 불협화음과 웃음’, 무엇보다도 표트르의 이기주의와 부도덕성 때문에 혁명은 야비한 정치 협잡으로 전락한다. 그가 하필 샤토프를 지목한 것에 개인적인 원한(샤토프가 제네바에서 그의 뺨에 침을 뱉었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는 어딜 가든 배신과 밀고를 일삼고 유령’ 5인조를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에(키릴로프에게 손가락을 깨물려 상처를 동여맨 게 전부이다!) 더더욱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텍스트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인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한편, 권력의 상징인 신임 도지사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폰 렘브케 역시 다분히 괴상한 인물로 그려진다. 자폐적인 성격이나 독특한 취미(종이접기, 소설 창작 등)는 차치하더라도 계속 마뜩잖은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좌익스테판의 집을 수색하고 물품을 차압한 것은 부하 직원(블룸)의 착오라고 쳐도 시피굴린 공장 사태는 질박한 민중과 얼빠진 권력의 우스꽝스러운 충돌 그 자체다. 율리야 렘브케의 파국도 그녀의 허영심과 공명심, 오랜 세월 미혼의 굴욕을 견뎌야 했던 보상심리의 산물인 양 묘사된다. 표트르의 혁명에 동참한 5인조(럄신, 리푸친, 비르긴스키, 톨카첸코, 에르켈)와 그 밖의 인물(레뱌드킨, 에르켈)도 혁명의 희화를 위해 창조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진보 진영의 감상적 퇴물 스테판과 중도 성향의 온건파 속물 작가 카르마지노프가 얼떨결에 합세한다. 저속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순간 스캔들을 갈망하는 대중의 존재(율리야 렘브케 패거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화자(안톤 라브렌치예비치 G-v) 역시 시피굴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사관처럼 주변을 수소문하고 현장답사까지 나간다. 여기서 연대기 작가의 성실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알 권리를 내세워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근대 저널리즘의 맹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악령>이 위대한 것은 정치적 층위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층위, 종교-신학적 층위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정치 혁명을 통한 지상낙원이, 참으로 역설인데, 지상에서 불가능하다면, 또 다른 가능성은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몽상 속에서 점쳐볼 수밖에 없다.

 

2) 샤토프의 토끼와 키릴로프 인신(人神)’

 

해방된 농노이자 대학생 혁명가였던 샤토프(빛나는 인물)는 소설 속에 메시아의 도래를 꿈꾸는 슬라브주의자로 등장한다. 이 전향에 스타브로긴이 개입된 것으로 얘기된다. ‘토끼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가 필요하다는 식의 대화에서 암시되듯, 샤토프에게는 믿음의 과제가 부여되었다.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고 외치는 그가 정작, 신은 믿느냐는 스타브로긴의 추궁에는 유보적인 답밖에 내놓지 못한다. “나는나는 신을 믿게 될 겁니다.”(상권, ??.) 그리고 샤토프의 사상 자체도 맹목적인 국수주의와 선민의식의 극단적인 표현에 가깝다. 실상 혁명의 관념을 신의 관념으로 대체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 관념의 대립 쌍인 속에서, 관념인이 아닌 그저 한 인간샤토프에게 일어난다.

 

대체로 샤토프는 스타브로긴에게 관념적 층위의 논의에 앞서 신분적, 물리적 주종 관계로 묶여 있다. 마리(마리야 샤토바)의 임신 및 출산은 분신이 원상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갖다 바치는 희생제의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적과 구원이란 그리스도가 러시아 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돌아와 (주인 나리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낳는 일일 것이다. 샤토프의 운명에서 핵심은 작가가 희극적으로 과장해놓은 외모(땅딸막한 몸집, 못 생긴 얼굴, 어설픈 행동거지)가 동정이라면 모를까 어떤 카리스마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덧붙여 작가는 그를 성스러움이 거세된 무의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애절한 휴먼드라마라면 모를까 숭고한 비극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말하자면 관념’(혁명, )도 죽고 인간도 죽은 것이다.

 

 

 

 

 

 

 

 

 

 

 

 

 

 

키릴로프에 관한 한 작가는 관념을 살리기 위해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속성을 최소화한다. 가령, 샤토프와 같은 스물예닐곱이라는 나이는 깡그리 잊힐 만큼 무의미하고 건축기사라는 직업은 스테판의 유쾌한 농담대로 그의 사상에 대한 아이러니일 뿐이다. 자살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고 하지만 소문만 무성하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차만 마시며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동틀 녘에야 잠자리에 든다. 이런 황폐한 무위 상태야말로 가히 관념인의 탄생을(그리고 뇌전증 발병을) 위한 질 좋은 토양인 셈이다. 간단히, 키릴로프는 도스토옙스키의 많은 백수 중 단연코 으뜸, 진정 종이로 만든 인간이다. 한편, 그의 인신(人神)’은 기독교의 근간인 신인(神人)’의 변형이며 그 자신은 과거의 샤토프보다 더 메시아에 가깝다. 자살을 통해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그로써 그 자신은 최초의 인신이 된다는 것이 인신 사상의 요지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양가적인 이 궤변이 논리적, 미학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이 인물의 도덕성과 믿음의 깊이다. , 표트르가 치사한 행동분자여야 하는 것처럼, 스타브로긴이 미남의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것처럼, 또 샤토프가 불쌍하고 못생긴 농노여야 하는 것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어야 한다.

 

키릴로프는 매순간 좋음을 느끼기에, 자살의 관념에 탐닉하는 만큼이나 삶을 사랑하고 즐긴다. 죽을 날을 세면서도 건강을 위해 공놀이와 맨손체조를 한다. 완전히 고립된 채 살지만 누구와도(샤토프, 페디카, 옆집 갓난아이) 조화로운 공존을 영위할 수 있다. 극도로 궁핍한 형편에 값비싼 권총을 수집하는 것도 굳이 자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듯싶다. 그가 관념을 먹어치웠든 관념이 그를 먹어치웠든, 어쨌든 진정한 니힐리스트는 니힐-()’를 꿈꾸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 순간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키릴로프가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미묘한 역설이야말로 훗날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를 매혹시킨 핵심적인 요소였으리라. 윤리적인 완성은, 비루한 현실과 각종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키릴로프의 형이상학적 욕망’(지라르)을 잔혹하게 단죄한다. 최후의 순간을 사도가 아니라 원숭이표트르와 함께하게 한 것은 오히려 사소한 장치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표트르와의 우스꽝스러운 드잡이에서 드러나는, 키릴로프의 목숨에 대한 집착이다. 그의 자살은 그가 평온한 오만함을 자랑하며 꿈꾼 것과는 달리, 또한 독자들이 속 편하게 환상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절대로 원칙의 실현이 아니었다. 지리멸렬한 유예 끝에 행해진 자살은 관념의 실현이 아니라 마지못해 끝낸 면피용 숙제에 가깝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통해 최초의 인신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시체가 됐다. 말하자면 얻은 것은 관념의 육화는커녕 아무것도 없고, 잃은 것은 삶 자체, ‘햇살과 잎사귀.

 

 

3) 스타브로긴: 인간의 가면 vs. -악마의 가면

 

<악령>의 모든 논의는 이 소설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스타브로긴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신화적인 도식을 따르면, 분신들의 희생은 주인공-영웅의 삶-부활을 담보하고 이를 통해서 성스러움이 확보된다. 하지만 분신들의 파국에 이어 주인공마저 자살함으로써 <악령>신성한 희극(Divine Comedy: 신곡)’, ‘소설-비극’(이바노프)도 아닌 희화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희비극이 된다. 스타브로긴은 신적인 존재임에도 희뿌옇고 신비스러운 아우라가 아니라 엄연히 살과 피를 가진 소설 속 인물로 창조되었다. 그의 유물론적 토대를 제거 혹은 은폐하는 방식은,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젊음과 미모, 체력, 부와 세속적 지위 등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로써 1860년대 러시아 귀족사회가 낳은 패륜적 돌연변이라는 사회적 동기화가 이루어진다.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어 부정(否定)’(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은 상태나 정황이라기보다는 무한한 운동성(‘’)을 말하며 부정의 순환은 곧 그를 부정(不定)’으로 몰아간다. 아마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어린 시절 가정 교사 스테판이 심어준 우수의 감각이었으리라. 그것을 채우기 위해 그는 신의 인간 창조를 변주하며 특정 대상에게 자신의 관념을 집어넣고 형상(obraz: 성상이라는 뜻도 있음)’을 고착시킨다. 그럴수록 정작 그 자신은 아예 형상이 없는(bezóraznyj), 고로 추한(bezoráznyj) 존재가 된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관념이 지상에 왕림할 때는 어쨌든 형상과 이름을 빌려야 하고, 그 때문에 그는 가면을 쓴 자, 요컨대 참칭자 드미트리’(마리야 레뱌드키나의 폭로)가 될 수밖에 없다. 스타브로긴의 다른 시험(리자 투시나 - 파괴적인 열정의 시험, 마리야 레뱌드키나 - 원시적 구원 가능성의 시험, 다리야 샤토바 - 영원한 안정의 시험 등)도 그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심연의 깊이를 확인시킬 따름이다. 자살이라는 결말 역시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라는 신비스러운 정체성을 보존하는 데 이바지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미 편집자의 강압이 없음에도) 그토록 공들여 쓴 한 장()을 <악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까지 묻혀있던 원고 티혼의 암자에서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스타브로긴은 고해를 들어주는 자(confesser-confessor)가 아니라 고해하는 자(confesser)이며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에서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으로 내려선다. 물론 그의 서류는 명백히 고해성사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지만, 여기에 그의 원죄이자 십자가(‘스타브로긴의 그리스어 어원은 십자가를 뜻함)가 들어 있기도 하다. ‘위대한(크나큰) ’(특히, 마트료샤를 상대로 한 범행)를 범한 자로서 악령에 들렸다 치유된 환자처럼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 동시에 악령의 수장으로서 돼지 떼와 더불어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둘 다 진실이며 또한 거짓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척력 사이의 충돌, 형식적으론 고백()고백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내적 분열이 밖으로 표출될 때는 자연스레 웃음이 발생한다. 티혼 앞에서 스타브로긴이 보이는 신경질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서류를 둘러싼 정황이 모두 우스꽝스럽다. 문건을 작성한 것은 일정 부분 자기 징벌이라고 쳐도 그것을 3백 부나 인쇄하고 번역해서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생각은 어처구니없다. 신실한 참회와 위악적인 노출증 사이의 경계는 실로 애매하다. 과연 그는 무위와 권태에 허덕이며 저질의 범죄나 저지르는 28세의 귀족 청년일 따름인가.

 

티혼의 예측대로 스타브로긴은 또다시 출구를 찾듯 새로운 죄악 속으로 뛰어든다. 그의 모든 범행은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하고 점잖게 행해진다.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하권, ??) 자살 이후 남겨진 유서는 강렬한 반면, 독자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진 그의 최후(다락방에서 목을 매달 비단 노끈에 열심히 비누칠하고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모습)는 희극적이다. 그것까지 포함하여 그는 나는 그를 나의 심장에서 꺼냈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고백에 충분히 부합하는 인물로, 작가 자신의 십자가로 남는다. 이는 <악령>의 숙명이기도 한데, 이 소설은 묵시록적 파토스의 균열과 희화를 고스란히 품은 채 새로운 신화의 영역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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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나의 첫 번역서이다. 1990년대 후반 석사과정생이었던 나는 모 출판사에서 기획한 도스토옙스키 전집 출간 작업에 원문 대조 교열 인력으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0년 초여름 <악령>의 번역가로 이름 석 자를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때 이미 나는 두 권의 소설집을 낸 소설가이기도 했다. 이십 대의 나는 물론 사십 대의 내가 번역가보다는 소설가로 더 성장해 있길 바랐지만, 보다시피 인생은 그렇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많은 독자가 내 번역으로써 도스토옙스키를 만나고 나 역시 인세 생활자로서 그 덕분에 먹고산다. 20년 만에 대대적인 개역 작업을 하며 제일 놀란 것은 분량이 줄어들어서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변함없지만 나의 번역본은 더 맛깔스러워졌다. 이 압축의 능력이 번역가-소설가 20년 인생의 성취랄 수 있겠다. 이만하면 존재의 알리바이로는 충분하다.

 

 

 

 

 

 

 

 

 

 

 

 

 

 

 

 

 <악령>하면 1993년부터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한 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는 당시 내 눈에는 세계문학 고전을 다 꿰고 한국문학도 최근 작품까지 안 읽은 것이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도 대표작뿐만 아니라 저 고릿적 <정음사>판 전집을 섭렵한 친구였다. 가진 밑천이라곤 문학책 좀 읽은 것밖에 없었던 나는 그 친구 앞에서 늘 주눅이 들곤 했다. 그 친구가 제일 좋아한 소설이 <백치>와 더불어 <악령>이었다. 특히 키릴로프를 참 좋아했다. 학업을 계속 이어갔더라면, 이 소설만은 그 친구가 나보다 잘 번역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악령>은 여러모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랭보) 같은 책이다. ‘자살-관념에 탐닉하느라 우리 자신이 저 햇살과 잎사귀같은 존재임을 그때는 몰랐다. 감히 모를 수 있었던 것도 청춘의 특권이다.

 

<악령>은 자살(키릴로프, 스타브로긴), 피살(샤토프, 레뱌드킨 남매, 페디카), 자연사, 병사와 사고사(스테판, 마리와 신생아) 39명 중 13명이 죽는, 그야말로 선혈이 낭자한 소설이다. 저들의 푸른 무덤 위에서 여러분 삶의 꽃을 피우시라. 여러분, 아니,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한 시절을 축복한다.

 

 

 

 

 

 

 

 

 

 

 

 

 

 

 

 

 

** 최근에 자료를 다시 좀 검색해보니 <악령>의 등장인물이 39명인 것으로 보인다. <열린책들>판 해설에는, 내가 직접 센 것인데, 몇명 빼먹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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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7-1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령은 백치 다음으로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었는데, 읽으면서 계속 내가 악몽도 아주 심한 악몽을 꾸나 싶을 정도의 소설이었습니다. 여름때 식중독으로 신림 고시원에서 혼자 죽을 지경으로 끙끙 앓을 때 꿨던 악몽같은 기분?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기도 하지요. 전 열린책들 판으로 읽었는데 번역이 가장 스타브로긴 스럽지 않았나 싶어요...^^ 민음사판도 읽어야 하겠습니다....

푸른괭이 2021-07-11 12:10   좋아요 1 | URL
2-3년 동안 작업했어요, 읽기가 더 편하실 겁니다^_^
<백치>도 빨리 시작하고 싶은데 밀린 번역이 좀 있네요 -_-;;

추풍오장원 2021-07-19 15:30   좋아요 0 | URL
멋진 번역이 더 멋져졌군요. 백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소설입니다.

푸른괭이 2021-07-19 18:11   좋아요 1 | URL
앗,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브로긴‘님!^_^
 

 

벌써부터 세일즈포인트가 올라가는 걸 보니 확실히 도-키답다. <악령>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손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여러분은 고급 독자다. 다른 한편, 이 소설이 접수가 안 된다고 해서 여러분이 저급^^; 독자인 건 아니다. 정말이지 어려운(난해하고도 난삽한) 책이다.

 

 

 

 

 

 

 

 

 

 

 

 

 

 

 

 

 

"표지만 바꿔서 냈나?"

오, 나이브한 질문이여! 여동생의 질문에, 일반 독자들도 그리 생각하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억울하지만, 그것도 세상의 이치, 일의 원리가 아니겠나 싶다...^^;; 모름지기 일이란 내가 좋아서 해야 하는 법, 나는 <악령>이 (어렵지만) 좋고 또 번역 일이 (힘들지만!) 좋다...^^;  

 

<닥터 지바고> 완고, 송고한 다음 열린책들판 <악령>을 스캔 뜨고 그 파일을 한글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부터 했다. 물론 다 깨진 파일을 멀쩡한(?) 파일로 일일이 만들고(알바라도 부탁할 조교가 없다 ㅠㅠ), 이른바 개역에 돌입했다. 원래는 한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책으로 볼 때는 이 정도 번역도 괜찮다 싶었던 것이, 막상 파일로 만들어 손대기 시작하니 아주 세상이 캄캄했다. 어휴, 내가 뭐하러 이 고생을 사서 하지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하면 할 수록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악령>이 뭔가 굉장히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번역 시작할 때 아이가 초등 입학했다. 원고 넘겼을 때 아이는 (코로나와 함께) 3학년이 되었고, 원고가 책이 되는 동안 아이의 4학년 여름방학이 멀지 않은 시점이 됐다.(4-2 우공비 전과목세트 주문해야 할 때다^^;;)

 

 

 

나의 첫 <악령>은 저것. 편집부를 통해 디자인 관련으로, 저 이미지를 보내면서,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종교성, 즉 퇴마의 느낌이 드는 것을 쓰지 말 것, 둘째, 살인이나 혁명의 느낌 없는 이미지를 쓰면서 은근하게 뭔가 음산한 분위기를 전할 것. 굳이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악령> 표지는 노골적으로 후덜덜한 이미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오래 전 대학 시절에 읽은 범우사 <악령>은 참 좋다. 상권은 초록색, 하권은 저런 갈색. (이철 번역, 두고 두고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받은 표지 시안은 이것.

 

 

표지 그림도 너무 좋고(거의 흙빛의 갈색도 좋고), 진홍색, 적자색의 띠(?) 색깔도 너무 좋았다. 다만, 실물을 받아보니 붉은 느낌보다 갈색 느낌이 강해서, 그게 다소 아쉬웠다. 저 표지의 원화는 에곤 실러.

 

(self-seer: man and death)

 

사실 표지 시안이 거의 확정되기 전, 내 나름으로 떠올린(<바니타스 정물화> 검색하다가 새로 알게 된)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것과 너무 결이(!) 비슷하여 놀랐다. 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내가 한 말. "앗, 덜 외롭고 좋네요." 정말이지 '인간'만 있지 않고 '죽음'도 있어서, 저렇게 해골만, 담배만 있는 것보다야 낫다. 한편으론, "나는 나의 고독과 함께 결코 혼자가 아니라네", 이런 조르주 무스타키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기도...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놀라워라. 밀밭과 평범한 얼굴들-초상화들과 아늑한 방과 해바라기와, 그리고, 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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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6-2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령> 표지 보면서 안 그래도 푸른괭이님 번역이구나, 진짜 대단하다, 생각했어요.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차후 반드시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푸른괭이 2021-06-27 13:19   좋아요 1 | URL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읽어볼 만한 소설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독자들이 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조지 오웰의 <1984>와 비교하게 됩니다.

초란공 2021-06-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네요^^ 표지까지 고민하시고~ 저도 고급 독자가 되고 십습니다~!^^

푸른괭이 2021-06-27 21:13   좋아요 1 | URL
예, 이 기회에 한 번 시도해보세요!
 

 

 

헉, PDF 파일이 올라가져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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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4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4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는 보잘것없고 주눅이 들고 소심한 가난뱅이였다. 활력이나 자신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자부심도 없었다. 그가 대체 무엇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체격이 작고 볼품없고 허약했다. (...) 그는 늘 가난했다. 그는 양순하고 존재감이 희박했으며, 자기를 전혀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남에게 봉사만 했다. 그렇다고 비겁하거나 비굴하지는 않았다.(<네 개의 이미지>, 226) 

 

 

부모형제도 없고 달리 의지할 데도 없고 집도 없는 어떤 아이가 세상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챙겨갈 것도 별로 없었고 짐을 꾸릴 필요도 없었다. 딱히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편이 되는 대로 아이는 길을 떠났다.(<세상의 끝> 299 )

 

<일자리 구합니다>를 비롯하여 '삶과 노동'에 관한 글은 고골이나 멜빌(<바틀비>), 카프카(<변신>) 등과 엮어서도 읽어볼 만하겠다. <주인고 피고용인>, <계급투쟁과 봄날의 꿈> 등도 좋았다.  

 

그는 나름대로 섬세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양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경로를 통해 독특한 교양을 쌓는다. /

그는 신분이 낮아서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좋았고 기뻤다./

그는 말하자면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즐겁게 사색에 잠겨 우아한 인생을 차분하게 조용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변변치 못한 처지를 예찬했다. (<노동자> 307)

 

사무원은 우리 생활에서 아주 친숙한 존재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사무원은 작가님들의 글쓰기 소재가 되기에는 어쩌면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순진하며, 그다지 창백하거나 타락하지도 않았고, 도무지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저 필기구와 계산기를 손에 들고 있는 소심한 청년일 뿐이다. (<사무원> 320)

 

한두 해가 더 흘러갔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성가신 목숨을 스스로 끊기로 했으며, 그가 아는 깊은 동굴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동굴 아래로 내려가려니 당연히 겁이 나서 흠칫 물러섰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서 기분이 짜릿했다. 그는 어두컴컴한 커다란 문을 통과하여 한 계단씩 아래로 점점 깊이 내려갔다. 그렇게 몇 걸음을 내려가자 벌써 하루 종일 걸어온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 으슥한 곳에 있는 조용하고 서늘한 지하 납골당에 다다랐다.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 브렌타노는 납골당 문에 노크를 했다. 불안을 견디고 버티면서 까마득히 오랜 시간을 기다리자 들어오라고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다. 어린 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겁을 먹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무뚝뚝하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너는 가톨릭교회를 섬기는 종자가 될 거지? 여기서는 그렇게 해야 해." 음침한 느낌을 주는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브렌타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브렌타노 2>, 437-438)

 

앗, 다 읽었다!^_^

겸사겸사, 괴테 전공자인 걸로 아는 독문학자이자 (한때??) 문학평론가 임홍배 선생님의 번역이 너무 좋다. 직접 편집하신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그런 것 같은데) 전반적인 구성도 좋다. 무엇보다도, 번역하는 텍스트에 대한 역자의 참된 애정, 학적인 지식, 공감능력^_^ 등이 느껴져 좋다. 그의 괴테 연구서를 사서 훑어보며 나도 이런 식으로 도스-키 연구서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검색해 보니 번역을 많이 하고 계시구나! 나도 부지런히 해야지^_^

 

 

 

 

 

 

 

 

 

 

 

 

 

 

 

 

*

 

카프카와 비슷한 구석이 굉장히 많지만(하급 관리, 회사원, 사무원, 외판원 등의 느낌도 그렇고), 뭔가 2프로 부족(혹은 넘침?^^;). 유럽(스위스)의 우아함, 느긋함, 세련됨, 이런 것도 생각한다. 20세기 전반기 이렇게 좋은 요양원이라. 정신질환으로 요양에서 생활(입원), 그런데 저렇게 성장하고(모자와 지팡이까지!) 항상 산책을 나갔다고 한다. 낮에는 정해진 분량의 노동을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봄여름가을겨울 항상. 너무 좋다, 그 루틴이. 그러던 어느 날.

 

 

 

 

엎드린 자세도 아니고 그냥 벌러덩, 기꺼이 드러누운 것 같은 자세. 언젠가 내가 어린 시절 거창 산골에 눈이 왔을 때 야트막한 언덕에서 눈썰매(->비료 포대로) 타다가 저렇게 드러누웠던 것 같다. 확실히 극과 극은 통한다. 그리하여 그가 꾸었던 꿈은...

 

"간밤에 얼마나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가. 나는 그 꿈 이야기를 가벼운 필치로 전하고자 한다. 나는 어디선가 편안한 지인들에 둘러싸여 아주 매력적인 공간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장면이 바뀌어서 나는 전망 좋은 널찍한 장소에 놓여 있는 소박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낯선 느낌을 주는 언덕들이 낭만적인 인상을 주어서 보기에 좋았다."(<꿈> 180-181) 

 

"하지만 그는 엄청나게 추운 겨울날 저녁에 유령 같은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엄청나게 키가 크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 이것이 단지 상상일 뿐이고, 내가 넋을 잃고 헛것을 보았을 뿐이라면 너무 슬프다. 우리는 어떤 일은 무조건 믿고 싶어진다. 자기도 모르게 믿지 않을 수 없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네개의 이미지 - 1. 예수> 223) 

 

음, 이십대(스무살?) 사진이라는데, 느낌은 젊어보이는 사십대 -_-; 그만큼 초월적으로 보인다. 드디어 사십대가 되었을 때는 이미 저쪽으로 넘어간 듯한 느낌. 저쪽,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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