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도스-키 전공자로서, 또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의 번역자로서, 우리 사회의 일련의 범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악령>의 마지막(별첨^^;), <스타브로긴의 고백>에서 티혼(치혼)은 스타브로긴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추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범죄 중에도 유독, 심히 추한 것이 있다는 것. 일반적인 표현으론 '죄질이 나쁘다/불량하다' 정도. 스타브로긴의 범죄 중  마트료샤 사건(미성년자 강간, 자살 방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면, 미적 등급이 높은(?), 정상 참작이 가능한 범죄는 어떤 것일까.

 

우선은 생계형 범죄 아닐까 싶다. 배가 고파 죽겠어서 빵 하나, 은촛대 하나 훔치는 식의 범죄. 요즘은 사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범죄다... 라고 생각하지만, '생리대' 광고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것이지, 지구촌의 누군가, 심지어 한반도의 누군가는 여전히 가난하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참 무심하다. 혹은,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담보해~' 이런 식이다. 이건 인간의 본성인지라(측은지심의 대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가, 사회의 제도적인 개입이 들어가야 마땅하다. 다만, 때 아닌 '감성팔이'를 하는 경우가 있어 속상하기도 하다. 가난한 자들, 괜히 더 비굴해지지 말라. 나와 나의 형제자매, 나의 부모 역시 그토록 가난했지만(지금도 그런가?) 그렇더라도 비굴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리고 내 가난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면 사회보장제도 꼼꼼이 따져서 인간으로서 최소치의 존엄은 지킬 수 있다. 

 

그 다음은 미필적 고의, 부작위의 죄 같은 것. sins of ommission. 즉, 뭘 해서(작위 commission)가 아니라 뭘 안 해서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게 형사적으로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 터이다. 저 사람 구하려다가 내가 죽을 것 같아 아무것도 안 하거나 도망친 사람을 잡아다가 족칠 수는 없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애매한 경우도 있을 법하다. 가령, 주차장에서 꼬맹이들 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교통사고 같은 것. 운전대를 잡아본(헐, 뜨끔! - 운전하지 않는, 운전면허소지자^^;) 사람으로서, 아무리 교통 법규를 잘 지켜도, 즉 서행하면서 전방주시 해도 코너에서 확 튀어나오는 서너살 꼬맹이를 안 칠 도리는 없다. 한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애는 한 순간이에요, 애기 엄마!" 이 말의 무서움 또한 잘 한다. 엄마의 방심이 큰 죄이긴 하지만, 24시간 일년 열두달 아이를 보다 보면 아차, 하는 일이 상당히 자주 있다. '십년감수'라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죄는 있고 죄인은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한밤중에 고추 광주리 머리에 이고 고속도로를 건너는 할머니, 인지 기능이 아이처럼 퇴화된 상태에서 차 몰고 나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할아버지, 대책 없이 집을 나갔거나 길을 잃은 발달장애 성인들(조은**양의 기적은, 비가 와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조용했기에, 운동능력이 낮은 저각성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등. 

 

그 다음은, 흉악, 극악 범죄라도 너무 양해, 이해되는 안타까운 경우. 가령 노모(노부)가 심한 장애를 앓는 성인 아들/딸을 죽인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 같은 것. 다들 혀를 내두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극히 공감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병이나 다름없는, 심지어 그보다 더 한 치매 관련 범죄도 비슷하다. 조금 '마일드'하게는 요즘 연예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빚투' 정도. 설마 가족이? 가족끼리 어떻게 저런 일이? 아니다, 가족이기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조금만 싸납게 했다가는, 니가 부모를 버려? 형제 자매를 버려? 이런 화살이 무서워 자꾸 퍼주다 보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도중에 터져 줘야 그나마 종기-고름 수준에서 멈춘다. 자꾸 가면, 더 극악한 양상의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카라마조프>의 소재-주제가  '아비 죽이기'라는 점은 그래서, 항상 의미심장하다. 스메르쟈코프를 용의선상에 넣고(정확히는 미끼로) 예심판사가 드미트리를 슬쩍 떠본다. 드미트리 왈: "에이, 설마요, 걔는 우리 아버지 아들일 수도 있는 걸요, 소문 들으셨죠?" 대략 이런 식의 말. '아들은 결코 아비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법칙은, 드미트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는 착하니까, 아비를 죽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반은 다르다. '아들은(도) 아비를 죽일 수 있다'라는 것.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가에 따르면, 드미트리가 아니라 이반이 죄인이다.

 

*

 

자, 다시 반대로, 정녕 '추한' 범죄는 뭐가 있을까. 거론하기도 싫은 각종 범죄들이 있다. 성범죄는 거의 항상 그리 취급되고 그래야 마땅하다. 특이 소아 상대, 또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등. 그런데 최근 들어 '미추'의 범주를 초월하는, 뭐랄까, 굉장히 선진화된, 선진국형 미학적 범죄랄까, 21세기, 심지어 22세기형 범죄랄까, 이런 것이 보인다. 2년전 인천초등생 사건이 그렇고, 얼마전 제주고 고유* 사건이 그렇다.

 

 현재 가장 핫/힙한 고유* 사건의 핵심은, 피의자가 넘나 평범, 평범 이상의 평범이라는 데 있다. 일단 예쁘다. 그것도 눈 돌아갈 미인도 아니고, 정녕 평범 수준의 예쁨이다. 자그마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애교부리기 좋아하고 아마 친구나 연인 관계도 원만했을 법하다. 평범-예쁨 수준의 짜증, 토라짐 등. 아이에게는 어떤 엄마였을까. 크게 차별되지 않았을 법하다. 모든 엄마처럼 아이 예뻐하고 잔소리도 하고 간혹 자기 히스테리도 부리고 그래도 아이 예뻐하고 등등. 그랬기에 소위 뒤통수 치기도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대학원 시절, '초롱초롱빛나리' 사건에 너무 놀란 적이 있다. 이 경우도 범인이 (아마 만삭의?) 임신부였다는 점이 우리를 경악케 했다. 소설에도 쓴 기억이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익히 알면서도 우리는 항상 뒤통수를 맞는다. 혹은 그런 척 으악~ 하고 경악한다. 혹은 경악하는 척 한다. 풀어헤친 머리를 걷어올린 후 나온 그녀의 얼굴은, 여자들이라면 어지간히들 동의하겠지만, 예쁘장한 편이었다. 이후 공개된 그녀의 평상시 사진은 그점을 확증해준다.  그녀는 이토록 '평범'(banal)한 존재인데, 그녀가 이룩한(!) 악은 좋다/나쁘다, 를 떠나 무척 기괴하다. 그로테스크, 라는 말이 딱 맞는다.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살인까지야 그렇다 쳐도 그 다음의 처리 장면은 과연 엽기지만, B급(^^;;) 장르 소설이나 영화에 능한 자라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특히 요리사, 혹은 요리를 담당하는 여자-아줌마의 경우에 죽은 동물 식재료 다듬기 만큼 일상적인 일은 없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하셔서, 시어머니는 살아있는 각종 물고기는 물론 심지어 살아 있는 닭도 능숙하게 '처리/처분'하신다. 쓰다 보니 왕룽 일가의 젊은 여자(오란??)가 막 자른 소의 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소설, 요즘 왜 안 읽지?)

 

시골의 여자아이로서 나는 여자어른들이 이렇게 살생하는 것을, 적어도 살생된 것을 처리하는 것을 곧잘 보아왔다. 내장을 상처 내지 않고 분리해내기, 살 별로(?) 가르기, 그거 정리하기, 생선의 경우 배 가르고 내장 빼고 토막 치기, 조개 산 채로 껍질 갈라 꺼내기 등등. 살육의 향연, 홀로코스트다. 말로만 들은 개잡기는, 정말이지. -_-;  "아빠도 내가 키운 돼지나 소는 못 먹겠더라." 그러는 님은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라) 농부?? 글쎄다.  쓰다 보니 이건 육식의 문제와도, 최근의 화두와 연결시키면 '개고기' 문제와도 연결되는 듯하니 패스.

 

다시 고유*로 가면, 이름도 참 예쁘고 참한 그녀에겐 또 다른 평범한 취미가 있다. 사진 찍기, 기록하기, 물건 보관하기. 이 역시 여자들이 넘나 즐기는 취미다. 남친과 주고받은 편지, 어릴 적 사진, 머리카락 등등. 사진 찍기, 블로그나 트윗,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나 같으면 이런 데다 글쓰기, 심지어 가공하고 소설로 쓰기 등. 그녀의 취미가 드러나는 방식이 넘나 평범하고 속돼서 또다시 banality라는 낱말을 떠올린다. 예쁘게 닫은 지퍼백에 속에 든 팥과 소금! 이 정겨움이란, 또한 전통적인 미신스러움이란! 그녀는 여러 모로, 친구 하고 싶고 (아마 남자라면) 한 번쯤 차라도, 산책이라도 같이 하고 싶은 그런 소녀/아가씨/아줌마(아이엄마)였을 법하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소꼬리뼈를 통째로 사와 다듬어 곰국 끓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돼지등뼈로 김치찜을 한 적이 있는데(나도 한 때는 엄청 노력했다오!!!) 뼈와 고기가 같이 들어가는 건 정말이지 넘나 힘들다. 핏물 빼고 삶고 물 버리고 장시간 고우(으?)고 곰국의 경우는 기름도 걷어내야 하고 여기에 채소나 다른 식재료도 함께 넣자면, 손은 두 배, 세 배 간다. 비슷하게 힘든 것이 육개장, 닭개장이다. 고기는 고기대로 삶아서 바르고 채소는 채소대로 준비한한 다음 끓여야하고, 소위 '깊은 맛'을 위해서는 각종 재료를 넣은 육수가 필요하다. 간은 반드시, 주로 국간장이 들어가야 한다. 역시나 '깊은 맛'을 위해서다.

 

 

 

 

 

 

 

 

 

 

 

 

 

(바흐틴/친이 그로테스크 얘기하면서 연구한 라블레의 소설.)  

 

이야기가 왜 이리로 왔나. 그만큼 그녀의 범죄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는 서로 다른, 반대되는 범주가 뒤섞일 때 발생하는 미적 충격이다. 여기서 섞인 범주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높은 것/낮은 것, 죽은 것/산 것 등등) 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어린 아이의 엄마라는 점이, (많은 경우 '엄마'이기에 저질러지는 살육, 살생도 많지만! 왜냐면 엄마는 못 할 짓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무엇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처음에는 사람을 저렇게 잔인하게(이 단어도 별로 들어맞지 않다고 생각될 만큼 그로테스크하다) '처리/처분'하도록 만든 분노의 근원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이 물음 자체도 성립될 것 같지 않은 것이, 다시금, 너무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분노, 증오, 이런 건 일반적인 단어다. 이런 것에 의한 범죄는 그래도, 상식(?)에 들어갈 법하다. 심지어 각종 혐오범죄도, 물론 아주 극악하지만, 또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건 뭐지. 너무 그로테스크하여 여전히 혼란스럽다. 도스-키라면, 해답은 못 내도 놀라운 걸작은 써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저런 소설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저 범죄의 미적 등급을 매기자면.... 아무래도 ...

등급외,

밖에 안 될 것 같다.

 

 

*

 

논문 수정하기가 싫어서 너무 놀았다. 이러고도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엄마, 내가 생각해도 토나온다. 아이의 할머니에게, 강남 8학군 최선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 변두리의 아이 셋 맘이었던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별로 안 보냈어, 별로 안 시켰어~" 하지만 들어보면 이런 학원 저런 학원 이런 과외 선생 저런 선생.  결론이즉.

 

- "다 소용 없고, 제일 중요한 건..."

 

아이들의 건강이야, 가족의 행복이야, 혹은 어차피 소용 없으니 아이의 뜻을 존중해야~

 

이럴 줄 알았는데....

 

- "수학과 영어다~!"

 

헐 ^^; 역시 님은 최고의 맘인 것이다... 내숭 떨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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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9-08-1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알라딘에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계신 줄 몰랐네요. 세상에 도끼 번역가님이라니... 선생님이 번역하신 까라마조프 제 서재에 잘 모셔져 있답니다. 도 선생을 워낙 좋아해서 각 출판사에서 나온 도 선생 저작들을 사 모았거든요.
정말 영광입니다. 자주 봬요. 좋은 글 참 잘 읽고 갑니다 ^^

푸른괭이 2019-08-12 13:49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는 업계종사자 많습니다. 저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오늘 너무 놀아서 이제부터 일하려고요^^; 아이한테는 한자 쓰라고 해놓고 엄마는 댓글 답니다 -_-;;

라스콜 2019-08-1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김연경 작가님!! 제가 이 책으로(때문에) 도끼님한테 빠져서 지금 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푸른괭이 2019-08-16 09:51   좋아요 1 | URL
흠, 올 여름에는 제 책도 나오는데요^^;; 제가 지금 호가호위하며 사네요 -_-;;

라스콜 2019-08-1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 작가님 책에 빠질 준비를 해야 되겠네요. 기대 하겠습니다.답글 감사드립니다.
 

 

주말즈음인가, 아주 흥미로운 블로그-서재를 발견해서 밤마다 들어간다. (자기 사진도 더러 올라오는데, 자신에 대한 미학화 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과도 비슷할까.) 옛날 글도 막 뒤져 읽다가, 어제도 아주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일일일식'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키가 148밖에 되지 않는 나는, 많이 먹지 않는다,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이 키에 52킬로 나갔던 이력이 있다. 중고 시절인데, 그건 정말 최악이고 대략 48킬로 정도 나갔다.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배가 불러 터질  때까지 먹고(특히 먹기 간편한 빵, 사발면, 과자 같은 거)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 읽고 공부하고(책 보면서 또 먹는다) 이동은 오직 학교 - 집(기숙사), 그러면 된다. 대학 4년인가를 기점으로 체중이 조금씩 줄었는데, 아마 연애와 담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보다 양질의 음식을 연인과 함께 먹고 사랑하고 산책 하고 그리고 담배를 배웠다. 학령기가 끝난 서른살, 나는 누가 봐도 말라깽이였다. 40킬로를 넘긴 적이 없다. 흡연, 특히 줄담배는 권장할 것이 아니지만, 소식은 무척 권장할 일이다. 고 박완서 역시, 위가 아픈 자, 약을 먹지 말고 음식을 줄이라, 라는 식의 충고를 한 바 있다.  

 

아, 그런데 일일일식이라. 말 그대로 하루에 한 끼만 먹나? 궁금해서 좀 찾아보니 '간헐적 단식' 비슷하게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다이어트의 한 방식인가 보다. 내 입장에서 소식은 그저 생활이다. 아이 낳고 살이 좀 불어 41-42킬로를 유지하는데(아프면 좀 더 빠지고), 여기에는 나잇살도 있겠지만 육아가 우리 아이엄마에게 요구하는 체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모유 수유 기간에는 젖을 만들기 위해(!) 곰국 같은 것도 퍼마신다. 나는 모유가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더 좋은 젖을 만들기 위해(써놓고 보니 왜 그랬지??) 반쯤 억지로 영양식을 먹는 것이다. 삶에서는 어떤가. 말마따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골고루'를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왔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밥상', 덧붙여 '시골밥상'에 익숙한 나는 물론, 그렇게 먹고 자랐다. 단백질(고기)이 턱 없이 부족했지만, 생선이나 두부가 많았던 밥상을 생각하면 그리 불균형은 아니었을 터. 그래도 절대적으로 각종 채소류, 과일(아버지는 과일 도매상이었다)을 많이 먹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처음 시댁의 밥상을 보고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상다리 부러진다'는 말의 실현이었다. 음식의 종류, 양이 너무 많았다. (시)아버지도 대식가, 아들만 셋. 이해 된다. (시)어머니도 어느 순간에는 대식가가 된다. 게다가 워낙에 요리를 잘 하시니, 그냥 먹다가도 과식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걸 먹고 나면, 후식 내지는 간식이 나온다. 옥수수 찌고 껍질콩 삶고 등등. 그러고 한 두시간이면 다음 끼니다. 헉. 뱃속에 음식이 덩그러니 들어있는데, 더 먹으라고?? 명절의 전부치기. 오죽하면, 부치는 건 할게요, 제발 다 먹으라곤 하지 마세요 ㅠㅠ 밥만 먹게 해주세요, 떡국까지는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식사만 할 게요, 간식은 정말 못 먹어요 ㅠㅠ 한번은 이상한 돌게(??)인가를 주문하셔서 먹으라고,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그랬더니 "니가 너무 불쌍해서 하는 소리다, 이 귀한 걸 왜 안 먹니!" 진정한 '식고문'이다.

 

나야 그들 입장에서 남이지만, 손자는 다르다. "니가(니들이) 조금 먹는다고 애(들) 그리 주면 안 된다!"  그렇다. 자라는 아이들은 골고루, 많이 먹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마다 소화력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몸에 맞고 안 맞는 음식이 다 다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 입안에 처넣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학교 급식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집에서만이라도 '안 먹을 자유'를 달라.

 

아이의 식성은 남다르다. 그렇다고 자폐성 기질의 아이처럼 편향적인 건 아니고, 이건 거의 전적으로 엄마 닮은 것 같은데, 나물류, 채소류, 과일류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먹인 탓에 고기도 먹을 줄 안다. '-줄 안다'라고 쓴 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라는 말을 절감하는 탓이다. 나는 지금도 소고기와 날생선(회, 스시)을 잘 못 먹는다. 반면, 아이는 이런 것도 어지간히 잘 먹는다. 사탕, 초콜릿, 젤리, 아이스크림 이런 유의 군거짓거리도 별로 즐기지 않는다. 놀라운 건 계란을 안 먹는다. 왜? 알레르기? 그것도 아니다. 계란의 형체를 없애고 요리하면 먹는데, 계란 모양이 살아 있으면 안 먹는다. 뭥미?

 

아마 내가 장어를 곧 죽어도 안 먹는 것과 같을 터. 왜 안먹냐고?? 장어는 너무 징그럽게 생겼다!!! 썰어놓으면 안 보인다고? 상상이 되어서 싫다. 그럼 문어, 낙지, 오징어는? 심지어 해삼, 멍게는? 그건 또 먹는다. 내 맘이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 주는 이런 유의 편식은 굳이 억압받을 게 아니다. 아, 보는 사람 눈에 재수 없다고? 그렇긴 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회식을 무척 싫어하고, 회식할 때는 아주 편한 자리가 아니면(그런 자리면 회식이 아니지) 밥을 잘 안/못 먹는다. 그때 많이 먹으면 백프로 집에 와서 토한다. 같은 이유로, 혼밥을 무척 즐긴다. 남의 눈에 처량해보일 테지만, 나는 지복의 순간. 젓가락질도 잘 못하고 많이 묻히고 흘리고(그래서 냅킨이 잔뜩 쌓이고) 무엇보다도 편식에 소식에, 먹는 속도도 무척 느리다. 이걸 맞춰 줄 사람은 애인-남편밖에 없다. 흠, 그런데, 아이는 지금 엄마보다 더 한 것이다 -_-;;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의 식생활에 반성 아닌 반성을 할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골고루 줘야 하는데, 꼬박꼬박 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간식까지 하루 다섯끼는 먹어야 한다는데 등등. 하지만 나는 사실상 1식 1찬, 그 다음 과일, 이렇게 먹인다, 넘 귀찮아서 -_-;; 1찬은 너무 하고 가끔 뭘 덧붙일 때도 있다. 밥과 빵을 같이 줄 때도 있다. 오직 식판의 칸을 채우기 위해서다.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와서 속만 삭 발라, '샐러드야~' 이러고 줄 때도 있다. 어쩌랴, 요리는 정말 넘 싫은 것을. 그런데 굳이 '다양'할 필요가 없음을, '골고루'가 능사가 아님을 주장하는 글을 보고서 나름의 희망을(?!) 얻는다. 비단 음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목을 매는 독서, 내 입장에서는 글쓰기도 그렇다. 출처 밝히고 한 번 긁어와본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https://blog.aladin.co.kr/myperu/10569752)

 

 

먹는 것,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것이 읽고 쓰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보다 더한 속물이지만, 게다가 아이 엄마로서도 결코 극성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높은 것'에 대한 지향(^^;)이 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읽고 쓰느냐, 방법론인데, 이제 와서 내가 나를 바꿀 수 없다.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기와 쓰기 역시 기존의 방식을 취하되 보다 더 현실적인 길을 찾아봐야 한다. 새로 나올 책에 다루는 책이 몇 십권이다. 이런 식의 읽기 대신, '덜-골고루'로 가려고 한다. 내 몸에, 마음에 맞는 음식-책을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으려고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이다, 한 권 읽는 데. 소위 '돌려막기' 독서를 하지 않으련다.  그 다음.

 

소설가로서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경험의 부족이다. 과연, 그럼, 경험 많은 니들은 나보다 잘 쓰냐?? 니들의 경험은 과연 그토록 유의미한 것이냐?? 많은 경험으로 더 잘 썼던 자들이 있다. 우리가 손쉽게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 개인의 경험이 사회, 국가의 보편적 경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 무엇보다도, 작품이 좋았던 덕분이리라. 이 점에서 '미메시스'는 우리가 여전히 숭상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미메시스'(모방, 재현)가 그 대상으로 삼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단답일 수 있다, 주관식, 서술형, 논술이어야 한다. 

 

 

 

 

 

 

 

 

 

 

 

 

 

 

 

 

조이스는 일찌감치 더블린(아일랜드)을 떠났으나, 그의 문학 속 공간은 항상(어쩌면 유일?) 그곳이다. 그가 문학화한 경험은 극히 '편식', 심지어 '일식'에 '일찬'이라고 할만하다. 모더니즘의 특징일까? 프루스트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만나나? 그래본들 가족과 몇몇 벗, 연인(레오니 할매, 프랑수와즈 하녀, 부모, / 첫사랑 질베르트, 그녀의 부모 스완과 오데트 / 그 다음 참사랑 알베르틴, 그 주변 사람들, 블로크, 예술가들 등등)에 한정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선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 그런 체험이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으로 거듭난다. 소설가는 오지를 떠도는 여행가가 아니다!!! 헤밍웨이 같은 소설도 있지만, 다 그런 모험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쓸 수도 없거니와.

 

 

 

 

 

 

 

 

 

 

 

 

 

 

 

이제 막 한숨 돌린 나의 장편을 보니, 사람도 많고 에피소드도 많다. 아주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자의식 충만한(그런가?) 내 소설과 아주 차별되나? 그런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웃기지만, 내가 뭘 쓰는지도 모르고 쓰는 거다. 뭘 쓰는지 알면 잘 안 써진다. 막 써놓고 다시 보면 뭘 썼는지 보여서 초난감하다. 어쩌지? 일단은 막간의 여유를 누리고 나중에 가서 생각하자. 이런 식으로, 논문 쓰는 자, 즉 학자-평론가 모드로 돌아가면, 나는 아주 오만하게 거들먹거릴 수 있다. 심지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씹고 있다. 썩 괜찮은 비평서-연구서를 내고 싶은 욕심이 여전히 있지만, 내 나이와 내 능력을 응시하면, 너무 아뜩하다. 

 

그래도 기죽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아, 내가 머리카락이 여기 좀 많이 안 났니? 내 생각에는 얼굴에 침을 맞고 잔대 달인 물을 꾸준히 먹고..." 님의 그 낙관주의와 신심이 님의 머리카락을 돋게 하리라...^^;; 또한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머리카락이 나든 말든, 배가 나오든 말든 거의 '달관'의 포즈다. 불충한 며느리(들)를 꾸짖지 않고 감싸안음으로써 덕/득 보는 건 며느리(들)이 아니라 결국 시어머니다. 그녀는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우월하다. 

 

*

 

다시, 아이의 식단. 일일일식, 일일일찬까지는 아니지만 더 '골고루' 해 줄 여력이 없다. 그래도 나는 편의점 표 도시락을 주는 엄마는 아니다 -_-;; 과거에도 '본죽'표 이유식 대신 엄마표 이유식을 만들었다. '마음의 양식'은 어떡할 것인가.

 

 

 

 

 

 

 

 

 

 

 

 

 

 

 

"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문어를 먹었으니까 <문어>책을 보자."

유치원생들 보는 수준이지만(프뢰벨 과학책 -_-;;) 초등에게도 그리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아이와 같이 읽는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문어는 '알'에서 '아기 문어'가 되는데 2개월이 걸린다. 많나, 적나? 오징어는 겨우 5일이 걸린다! 즉, 한 마리의 문어가 태어나는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함은, 응당, 개체수도 적다는 것이고, 살아남은 놈들의 수명도 길다는 거다. (인간이라는 종을 생각하면 된다.) '문어'의 '문'자는 '글월 문'이라고 한다. 헐, 똑똑한 물고기^^;; 저 비싼 연체류는 제사상에만 올라왔던 것인데, 그래서 나는 문어보다 오징어를 더 좋아하거나 더 쉽게 먹는다. 물론, 아이는 그 무렵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으니 문어, 주꾸미, 낙지(얘네들 다 문어과, 라고 한다), 오징어, 갑오징어, 한치 등 모든 연체류를 다 섭렵하고 있다. 아이도 문어와 오징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한다. 혹은 그런 척 한다. 그래야만, 아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강화제 없는 독서-공부가 가능한가.

남들의 눈에는 소위 '공신/책신'에 가까운 나에게 먼저 물어보자.

아니다. 단 5분을 쉴 지라도, 강화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지금도 '강화제' 맞고 있는 중?)

하물며 아이(들)의 경우에는, 물론.

 

*

 

- "엄마, 그런데 나는 장애인이야?"

(아마 어제 할아버지가 자기 어릴 적 친구 '장애인' 얘기를 한 탓인듯 한데, 그는 자신의 아내와는 참 정반대의 캐릭터라, 이 대조가 놀라울 따름이다.)

- "왜 물어? 니 생각은 어떤데? 니가 장애인인 것 같아?"

- "음, 엄마 생각은 어떤데? 엄마 생각에는 내가 장애인이야?"

아, '진격의 거인'이 아니라 '반격의 거인'!^^;;

엄마가 너를 감동시킬 멋진 (음식은 안 되겠고) 논리-답변을 만들어주마! 하고 다짐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엄마-나도 니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붙는 아이인지 어떤지 잘 모르니까. 요즘은 더더욱. 너는 그냥 나의 아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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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도 변함없이, 잠든 아이를 옆에 두고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다가 '석경징'이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렸다. 왜 갑자기? 정말 너무 뜬금없다. 아무래도 최근에 나온 나보코프 소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주지하다시피, 나보코프는 포스트모더니즘, 미국작가, 이런 맥락에서 영문학자들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 중 <어둠 속의 웃음소리>는 그의 유명작도, 대표작도, 애정작도(?) 아니다. 90년대 초중반 <롤리타>로 쬐금(^^;;) 유명하던 그를, 오직 러시아 출신 작가이기에, 찾아 읽었다. '찾아'라는 말도 맞지 않는 것이 번역된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주로 세계문학 전집에 끼여 있고, <창백한 불꽃>인지 <세바스찬...>은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와 같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무렵 학교 근처 서점에서 오직 그의 소설이라는 이유로, 활자가 아주 작은 문고판 책을 한 권 샀다. 박영사였나. 서점은 <그날> 아니면 <광장>이었을 터.

 

 

 

 

 

 

 

 

 

 

 

 

 

 

 

<어둠 속의 웃음 소리> 역자가 석경징이었다.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쉽게 외워졌다. 나중에도 곱씹었지만, 번역이 참 좋았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소설의 내용에 집중했는데, 중산층 멀쩡남의 몰락이 뭐랄까, 엄청 고소했던 것 같다. 마르고(?)던가, 작고 속된 여자도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화가(?) 남자의 귀여운 악랄함(?)에도 왠지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거듭 말하건대, 이 소설은 나보코프가 그리 아낀 것도, 또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그리 사랑 받는 것도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롤리타>보다도 더 나보코프다운 소설이다.

 

 

 

 

 

 

 

 

 

 

 

 

 

 

 

 

 

3학년때던가, 석경징 선생님의 <영산문강독>(??)인가 하는 수업을 들었다. 한학기 내내 조이스의 <더블린사람들>만, 그 중 두 어편만 읽었다. 그것도 곤혹이었다. 문제는... 중간고사 치는 날인가, 왠일지 대박, 속수무책,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제법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이상하게 한 번씩 이런 미친 일이 벌어지곤 했고, 열에 아홉 수면 탓이었다. 앗, 후다닥 일어나 셔틀 버스 타고 학교 갔더니 이미 끝. 부리나케 연구실로 갔다. 다행이 연구실에 계셨고, 뿔테인지 쇠테인지 아무튼 동그란 안경을 낀 선생님은 예의 그 느긋한 웃음을 웃으시면서 여기 앉아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그 다음. 학점이 B+인가, B0인가 나왔다. 1학년 1학기의 '방황' 이후 공부를 열심히 하던 터라, 사실 2학년부터는 B를 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A0, A-도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이었고 21학점 들으면서 소위 올A+을 받은 학기도 있었다. 헉, 그런데 B라니. 게다가 그때는 아무 말씀 없이 시험도 여기서 보면 된다고 하셨으면서. 이런 서운한 마음이, 배신감이 물론 들었지만, 그렇게 저렇게 묻혔다.  영어와 영문학에 관심이 별로 없어 재수강은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그 자리에 서 보니 이른바 '형평성'이라는 것이 교단에 선 자를 얼마나 옥죄는지 알겠다. 그리고 학점을 깎기에 가장 마음 편한 것이 바로 결석(혹은 심한 지각), 결시, 보고서 미제출 같은 것이다. 사실상 결시라고 봐도 될 상황인데, 그나마 답안을 써냈기에 저 정도라도 나온 것일 터. 그 학기에 조이스 소설인지 뭔지를 읽고 페이퍼를 쓰라 하셨던 것 같다. 그때 처음 조이스를 읽었다.

 

 

 

 

 

 

 

 

 

 

 

 

 

 

 

 

석경징 선생의 번역으로 저 이론서도 읽었으나, 저역서가 많은 것도 아니다. 당장 조이스를 좋아셨지만(아마 전공) 마땅히 번역을 제대로 내놓으신 것도 아니다.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의가 아주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럴 수 있는 성격의 강의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스승들 90프로(심지어 99프로?)에 해당하는 분. 그래도 나로서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저런 개인적 인연이 있어서 상위 몇 프로의 평가는 주고 싶은 분이다.  "우리가 이번 학기에 한 번도 안 쉬었나요? (예!) 그럼 다음 주 * 요일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한 번 쉬죠!" 씨-익 웃음. 하필 그맘때 영화 <파리넬리>가 나왔는데, 아주 불편한 심사를 완곡하게 표현하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꼰대려나?^^; 하지만 그때는 중년(노년?) 교수의 그런 발언에 날을 세우곤 하던 때가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은 저리 생각하시는구나, 끄덕끄덕. (단, 수업 준비 안 하는 선생님은 못 참아!!^^;;)

 

 

 

 

 

 

 

 

 

 

 

 

 

 

 

 

얘기가 길어졌다. 어제 검색해보니...

선생이 돌아가셨더라. 마지막 사진을 보니 내가 알았던 모습보다 체구가 좀 더 커보였다. 수필가 피천득의 애제자인 것, 영문과가 아니라 영교과 출신인 건 이번에 알았다. 출신이 왜 중요하냐고? 대학, 특히 국립대는 굉장히 보수적이다. 보수일 수록 출신을 따진다. (요즘에는 진보도 그런 것 같긴 하다^^;)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박제된 나의 저 시절 또한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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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워보일 수 있지만 성장소설(교양소설)은 모름지기, 장편의 (한) 원형이자 모범이다. 우리 문학에도 적잖이 있을 텐데, 생각나는 대로 꼽아본다.

 

 

 

 

 

 

 

 

 

 

 

 

 

 

<새의 선물>은 아직 고전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유학 가기 전 이십대 중반에 읽은 까닭인지, 계속 그 이전에 쓰인 교과서급(?) 소설과 함께 묶여서 연상된다. 새로 나온 표지보다 초록색이 압도적인 저 표지가 마음에 든다. 주인공 이름이 진희였던 것, 광진테라 아줌마, 정도만 기억날 정도로 가물가물하지만,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사 장면이 초반에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이 좀 거슬렀던 느낌도 있다. 저 소설이 너무 좋았던 탓인지, 이후 은희경의 소설은 다 실망이었다. 그럼에도, 이 문장 속에 이미 들어 있지만, <새의 선물>의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 여전히 궁금해서 사 읽게 된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아줌마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유학 갔다온 이후 읽은 장편 중 손꼽을 만한 것이었다. 소설 쓰기에 마땅한 작법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할 것이다. 이후 어린이 책도 좀 쓰고 장편도 꾸준히 써오는 것 같던데, <설이>는 제법 읽히는 모양이다. 챙겨볼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다. 언제 또 기회가 되길. 

 

*

 

아주 많은 작품을 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떠오르지 않아 놀랍다. 지금 놀라고 있다. 역시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하나?

 

 

 

 

 

 

 

 

 

 

 

 

 

 

 

 

얼마든지 더 꼽아볼 수 있다. 심지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서유럽문학은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는 장편이 무척 많다. 그들의 시간 감각, 세계 감각과 잘 맞는 장르여서 일 것이다. 러시아문학에 한정하면, 톨스토이가 그런 균형감각(시간과 성장)을 잘 갖추고 있어서, 그런 전통의 소설을 많이 쓰게 된다. 실상 <전.평.>도 나타샤의 성장 소설일 수 있다. 도스-키도 이 장르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에 한 편 시도하는데 바로 <네토치(츠)카 네즈바노바>. 결국 미완으로 끝났고(체포 됐음) 훗날 완성해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왜냐면... 그는 이른바 '성장'이 불가능한 시공간을 사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

 

소설을 아주 많이, 많이 쓰고 싶은데 체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소설을 쓸 수 있다면 굳이 다른 글을 쓸 이유가, 필요가 없다. 번역은 더더욱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다듬는 원고의 초고를 잡은 건 2007년 여름이다. 정확히 12년 전이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혹은 있어도 틀지 않는) 4평 남짓 원룸에서 하루 두 세 갑의 담배를 피우며 썼다. 밖에 나가서 밥 먹고(아마 한끼 정도) 동네 산책하고 담배 사오고 하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집에서 쓰기만 했을 터. 2천매 쓰는 데 두달쯤 걸렸을 것이다. 내 몸 사정을 내가 잘 알기에 무척 조심했음에도 이삼일은 아파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생리통도 너무 심해, 하지만 이 심하고 성가신 통증조차 겪을 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너무 소중하여,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곁들어, 대부분의 사상가와 작가가 남자였던 지라 월경/생리에 대한 사유가 적은데, 지금 떠오르는 걸로는 이 작품 정도다.

 

 

 

 

 

 

 

 

 

 

 

 

 

 

 

 

늙으면 입만 산다더니,그럴 수밖에. 수족이, 몸이 이렇게 부실해지니 뭘 할 수가 없다. 입의 힘을 모아 조금이라도 더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쓰는 데 무척 많은 힘이 소요된다. 한달 내내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살았는데 이삼일 누워 있었더니 그 통증은 싹 사라졌다. 하지만 몸에 너무 힘이 없고(당연하지만^^;) 여차하면 체중도 출산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하나도 반갑지 않다!) "살긴 살았는데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벚꽃 동산>의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말이다. 나도 요즘 비슷한 생각을 한다. 별로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죽을 생각을 해야 하다니. 주변의 많은 이들이 스위스를 꿈꾼다. 하지만 거기도 돈이 든단 말이지, 캬.  

 

*

 

어제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의 유치원 시절 담임샘을 만났다. 약간 의아스러웠는데 어떤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 디스크 때문에 더는 교사 생활을 못한다고. 한편, 그 아이는 내가 아는, 3학년 짜리 어떤 남자 아이의 여동생이다. "너 ** 오빠 동생이지? 할머니 계시잖아요? 매일 안고 다니셨는데 이제 유치원 다니니까" "올해 돌아가셨어요." "예?" 어쩐지 안 보이신다 했더니 세상을 아주 떠난 것이다. "하늘나라 갔어요, 할머니." 옆에서 손녀가 웃으면서 종알댄다. 건강하고 젊은, 그래서 오지랖 넓은(교회 다니라고^^;;) 할머니였는데... 그런 정겨운, 전근대적 오지랖도 이제는 듣기/보기 힘들겠다.

 

이런 분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시부모들에 비하면 나의 아버지는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인가. 칠순에도 술을 퍼마시는 퇴폐적 자유도 아무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거 아버지 니들 초등학교 때 죽을 줄 알았다, 하도 술을 퍼서." 어제 엄마가 한 말. 여기에 무슨 철학이 있겠는가. 그저 무한한 자기방기, 그리고 나태와 무력이라는 악덕일 뿐. 보들레르가 생각난다. 역자인 황현산 선생도 세상에 없다.

 

 

 

 

 

 

 

 

 

 

 

 

 

 

 

 

한편으론, '성장'이란 참 슬픈 말이다. 그 끝은 어쨌거나 결국 '죽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죽음(들)이 없는 성장(들), 성장소설은 없다.  이 죽음을 삶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국 아이-생산이다. 그런데 요즘은 참들, 아이를 낳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은 <되찾은 시간>인데, 소설의 맨 마지막 단어도 (내가 직접 읽지는 않았으나) '시간'(temps)이라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생각해본다. 구토가 가라앉아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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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과거는 우주보다 낯설고 또 멀다. 그렇지만 이렇게 써가는 동안에는 또 이만큼 익숙하고 가까운 것이 없다. 소설이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 시간 사용법.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서사의 방식을 결정한다.  미셸 뷔토르의 <시간의 사용>(시간 사용법)을 직접 읽지는 못했는데, 내가 무척 좋아했던 소설가이자 불문학자 최수철의 박사논문 주제여서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기억이 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또 절망을 낳고."(??) 이상의 말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교'(=적절한 화법, 문체)를 찾다가 '절망'하여 아무 '기교 없음'으로 가보기로 결정했고, 그러고 나니, 내가 써놓은 원고 더미와 마주할 용기가 생겼고, 2주째 씨름하고 있다. 총 5장에 에필로그 2천매인데, 절반 가까이(심지어 이상) 날리는 것이 목표이다. 1장만 해도 거의 절반을 날렸다. 좋아! 이렇게 뭉텅 뭉텅 잘라낼 때의 쾌감은, 정말이지,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다.

 

 

 

 

 

 

 

 

 

 

 

 

 

 

 

 

지금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소설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스완네 집쪽으로>가 나왔을 때 꼼꼼하게 정독, 재독하고 그 이후에는 손을 못 댔다. 그 사이 이렇게나 많이 나왔다. 역시 '적들'은 쉬지 않는다 ㅠㅠ 글쎄, 다시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안의 소문과 협박과는 달리(!!!) 이 소설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다만, 길 뿐이다 ㅠㅠ 혹은, 혹자에겐 지루할 뿐이다ㅠㅠ 나의 입장에서, 긴 건 사실이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그러니 읽을 만했고 더 읽고 싶다. 이쯤 되면 당위이기도 하다. 읽어야 한다!^^;; 

 

 

 

 

 

 

 

 

 

 

 

 

 

 

 

나아가, 이쯤되면 나의 스승들의 작품은 저 프루스트의 아류(^^;;)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런 인정에 조금의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닥치고(!!!) 써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저 소설을 쓰던 스승들 보다도 더 나이가 들었다. 할 말이 없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조동일 선생이 그러셨나, 나이 들고 나서 역작을 쓰겠다는 학자는 해 질 무렵 등산하는 거라고. 나의 나이 역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도, 절반을 넘었다.  안 쓰고 있으면 그냥 게을러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일단 쓴다. 기왕지사 쓰는 거 조금은 잘 썼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하루에 서너 시간 이상은 절대 쓰지 않기로 한다. 앗, 그럼 <악령>은 언제 고치지?

 

그러게, 다 할 수는 없단다, 얘야^^; 수학을 많이 했으면 국어 할 시간이 없고 국어 수학 다 많이 했으면 놀 시간이 없고, 대신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다 하고 왔기 때문에 집에서는 놀 수 있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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