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섬을 나와 P항 일대를 돌아다녔다. 수산물 시장을 지나자 약재상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왔다. 바싹 말린 지네 더미 옆에서 Y다리가 시작됐다. 그들은 다리 아래 계단으로 내려갔다. 앞으로 갈 길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지도를 방바닥에 깔아놓고 눈을 꼭 감은 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짚은 다음, 눈을 떴을 때 무작정 거기로 떠나는 심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다 새카맣게 말라버린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심정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들어간 점집은 인근 집들 중에서 제일 깔끔했다. 주인은 늙은 노인이었지만 혈색이 좋았다. 눈이 탁하지도 않았다. 입을 열자 색깔이 싯누렇기는 해도 상당히 바르고 촘촘한 치열이 드러났다.

어째 아침부터 삼계탕이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당혹스러워하며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와도 후텁지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티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등판은 벌써 땀에 절어 있었다.

찹쌀과 은행과 대추와 인삼은 당연하고 닭똥집이 들어가도 좋지. 날이 이렇게 푹푹 찌니 몸보신을 좀 해야겠는데. 어떻소, 보시겠소?”

 

떡붕어 아저씨는 자신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넣었다. 약국 영감은 돋보기안경을 끼더니 책을 뒤져가며 빠른 속도로 그의 사주팔자를 풀었다. 몇 행, 몇 열의 한자를 공책에 나열한 뒤 암호문을 풀 듯 우리말로도 꼼꼼히 썼다. 말을 하기 전에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남의 사주팔자를 풀어놓은 공책이 수십 권은 족히 됐다. 떡붕어 아저씨는 꽤 오래 기다렸다. 여로를 결정하기 전, 아무 양감도 없는 종이 지도를 손가락으로 더듬는 심정이었다.

불덩어리군요.”

드디어 약국 영감이 입을 열었다.

, . 제가 원래 몸에 열이 좀 많습니다.”

그 얘기가 아니라 사주에 불이 많다는 소리요.”

약국 영감의 기나긴 설명이 이어졌다. 제문을 낭독하듯 또박또박하고 무엇보다도 느렸다. 떡붕어 아저씨의 40여년의 인생사가 은유와 환유와 제유와 직유의 형식으로 읊어졌다. 말을 다 끝냈을 때 약국 영감의 얼굴과 목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심지어 숨까지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가 안쓰러웠지만 떡붕어 아저씨는 난감한 심사를 감출 수 없었다.

저어기,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어허! 내가 무슨 점쟁이요? 나라고 앞날을 어찌 알겠소?”

, 그럼, 아까 형제가 다섯이라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 좋은 얘기요. 선생 복으로 형제 다섯은 거뜬히 먹여 살릴 거요. , 거참, 당장 직장도 없어 보이는 양반이 이렇게 배가 부르고 등이 따시다니, . 놀고먹을 팔자구먼. 이 처자는?”

 

또 다시 고문의 시간이 흘렀다. 만년필을 쥔 앙상하지만 힘 있는 손이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집도 허름하고 옷가지도 별로 없는데도 만년필만은 최고급이었다. 펜촉이 종잇장을 긁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 동안에 소영이는 구덩이 오막살이의 양지바른 곳에 바싹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매일 계곡에서 물을 퍼다 주었다. 계곡은 제법 멀었다. 양쪽 어깨에 물통 두 개가 달린 막대를 메고 나르다 보면 어깨가 뻐근하고 날갯죽지가 시큰해왔다. 그래도 내일 또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그 긴 여정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나무는 여전히 싹을 틔우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가 왜 물을 주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이 소영이는 훌쩍 자랐다. 물통 두 개가 이제는 별로 무겁지 않았다. 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저 멀리서 나무 위에 뭔가 새파란 것이 돋아난 것을 멀리서 보았다. 그것이 정말 새싹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물통을 내팽개치고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약국 영감이 입을 열어 소영이의 묵념을 방해했다.

 

허어, 여자 사주에 경금이 이리 많다니.”

그는 땀을 닦으며 혀를 찼다. 여전히 압도되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라, 이렇게 뜸을 들이더니 고작 그거야? 다슬기 할매가 매일 해준 얘기인 걸.”

소영이가 소리쳤다. 약국 영감이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지나 얘기해줘. 아이, 배고파 죽겠네!”

소영이의 앙칼진 목소리에 약국 영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처자는 (약국 영감은 돋보기를 들어 올려 가며 자신의 공책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베풀어야 하오. 무조건 베풀어야 명줄도 길고 명예도 얻고 재물도 얻고 아들도 얻고,”

세상을 다 얻으면 뭐해? 배고프다니까!”

약국 영감은 너무 놀라서 기가 팍 죽어버렸다.

할아버지, 그 삼계탕 집이 어디야? 아저씨는 또 뭐해? 빨리 좀 일어나! 할아버지, 여기는 변소 없어? 아씨, 오줌보 터질 것 같은데, 정말!”

이제야 약국 영감은 이 말[]만 한 처자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그는 동정과 연민의 눈빛으로 소영이를, 또 떡붕어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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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귀를 기울이면

 

 

 

 

 

P항 근처, Y다리 밑에는 곧 쓰러져버릴 것 같은 판잣집, 슬레이트집이 많았다. 대개가 철학관, 점집이었다. 한문깨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사주팔자나 좀 봐달라고 통사정을 하던 시절은 지났다. 대개의 집이 버려진 것도 당연했다. 더러 문이 열린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것은 따뜻한 햇볕과 비릿한 바닷바람뿐이었다. 약국 영감은 이 흔적기관과 같은 점집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80년 남짓한 그의 생애도 한 줄로 요약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비루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문학적인 구석이 있었다.

 

약국 영감은 당시 한국 남성답지 않게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썩 미남이었다. 그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지어주는 감기약을 먹고 그가 파는 반창고를 붙였다. 덕택에 그는 누구 집 바깥양반이 장이 약하고 누구 집 아이가 치통이 심하고 또 누구 집 아이가 걸핏하면 무르팍을 깨는 장난꾸러기라는 것을 훤히 알았다. 언제부터인가는 약사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말벗 내지는 카운슬러가 됐다. 그 사이에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했다. 그들은 고등학교 윤리 교사, 7급 공무원, 모반도체연구소 연구원 등 한 단어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직업을 얻었다. 그 무렵 그는 겸사겸사 노년도 준비할 겸 지적인 호기심에서 주역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들과 수다를 떨 때 하나씩 둘씩 적용해 보았다. 말하자면 약국 영감은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 아니라 학습과 공부로 다져진 역술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점괘와 해석이 상당히 잘 맞아 떨어지는데도 겸손했다.

 

문제는 가장 똑똑한 막내아들이 사업에 손을 대면서 시작됐다. 사업이 꼬이면서 10년도 안 돼 약국은 문을 닫았고 약국 영감의 3층 양옥에도 딱지가 붙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부인이 죽었다. 자식들은 약국 영감을 위해 작은 방을 얻어주었다. 형편이 좀 어려운 중년 부부가 세놓은 방이었는데, 주인집 작은 방과 벽이 붙어 있었다. 셋방살이를 시작함과 동시에 양국 영감은 명실상부한 역술인으로 거듭났다. 그의 방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복채도 적게 받는데다가 굿을 하라거나 부적을 쓰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노환이라는 편리한 병명에 각종 약이 들러붙었다. 급기야 자리보전하고 눕는 일도 생겼다. 그때마다 그는 벽 너머에서 주인부부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아픈 사람을 또 어찌 내보내요?” “그래도 여기서 죽으면 골친데. 늙은 홀아비 죽어 나간 방에 누가 들어오겠어?” “아무리 그래도 이 엄동설한에. 그럼 날 풀릴 때까지라도 기다려요.” 그들은 조심하느라 일부러 목소리를 죽였다. 약국 영감은 날이 풀리기가 무섭게 그 방을 나왔다. 주인 내외는 고마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이후 약국 영감은 Y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다. 세 자식들은 남세스러운 일이라며 난리를 쳤다. 늙은 아비가 청승떠는 꼴이 싫어서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누구 하나 모시겠다는 소리는 선뜻 못해도 약국 영감의 생활비를 더 올려주었다. 덕택에 그는 사실상 복채를 받지 않는, 아주 특이한 역술인이 됐다. 그렇다고 복채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해야 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는 손님을 꽤나 가렸다. 그가 무척 굶주려 있을 때 어느 손님이 찾아왔다. 스물이 될까 싶은 처자와 사십대의 우람한 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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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베란다 바깥의 산기슭이 온통 녹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내와 나는 여느 때처럼 한가롭게 각자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 가졌어.”

처제? 잘 됐네.”

대충 대꾸를 하긴 했지만 블로깅을 하는 중에 자꾸만 에러가 나서 신경이 곤두섰다. 두어 번 화면이 멎더니 급기야 컴퓨터가 먹통이 됐다.

에잇, 병신! 새로 사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보니, 베란다 너머의 푸른 숲을 배경으로 아내의 자그마한 등이 비스듬히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꼬부랑 할머니 안 되려면 바른 자세로 앉아야 된다고 몇 번을 얘기했건만, 도무지 사람 말을 듣지 않고 꼭 저렇게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나는 아내를 뒤에서 살짝 껴안았다.

아이 가졌다니까.”

너 드디어 이모 되는 거야?”

아니,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아내는 특별히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묵직하고 단호한 강세를 넣어 또박또박 말했다.

?”

나는 아내의 의자를 획 돌렸다.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세워 놓았던 까닭에 아내의 몸도 획 돌아갔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낭패스러웠다. 갑자기 귓가로 -소리가 들려왔다. 15년쯤 전, 내 손을 거쳐 간 익명의 시체들의 시선이, 심지어 눈이 완전히 감겨져서 도저히 포착해낼 수도 없었던 시선 아닌 시선들까지도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일그러진, 아니 일그러질 것조차 없는 얼굴 아닌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나의 혼란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 되기 싫다는 소리는 하지 마. 벌써 5개월째야.”

혜민아, 너 설마? , 그때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 나름대로 노력했어. 병원 다니면서 배란일까지 체크했단 말이야.”

옛날에는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제는 왜 이래?”

그때는 정말로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단 말이야. 너도 그땐 학생이었잖아. 또 아이 같은 건 언제든지 원하면 생기는 건 줄 알았지, 젊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낼 모레면 서른여섯이야. 몸 나이는 마흔도 훌쩍 넘는단 말이야.”

나이는 너만 먹어? 왜 매사가 다 네 맘대로야? 나를 속여서까지 아이를 만드는 건 대체 무슨 횡포야? 의기양양하게 커가다가 비참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악취미 아니야? 대체 왜 기왕지사 죽을 생명을 만드는 거냐고?”

이봐, 이동훈씨, 그 문제라면 나도 할 말 많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냉소적일 필요는 없잖아. 인생이 별 거 없다는 건 일곱 살짜리도 다 알아. 하지만 냉소에서 시작하면 결국 냉소로 끝난단 말이야.”

냉소고 뭐고 사실이 그렇잖아. 왜 이렇게 사람을 비열한 놈을 만들어? 내가 무슨 정자은행이야?”

?!”

아내는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노려보더니 방으로 획 들어가 버렸다.

 

나는 혼자 거실에 남아 베란다 밖의 공기를 마셨다. 역정을 내긴 했지만 낭패스러운 느낌은 생각보다 빨리 잊혔다.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내가 시체한테 복수를 당하는 동안, 아내는 자신의 허기진 배를 응시하고 있었으리라. 내 귓전을 맴도는 꺼-억 소리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이런 허함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매일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아내의 달거리가 끊긴 줄도 몰랐다. 간혹 아내가 헛구역질을 하거나 속이 더부룩하다며 끼니를 거를 때도 그냥 논문 스트레스인 줄만 알았다. 틈만 나면 아내의 배를 간질이면서도 도톰해진 배가 그냥 나잇살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넉 달이 몇 장의 짧은 컷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동안, 뱃속에서는 꺼-억 소리가 요동쳤다.

 

갑자기 한여름의 초저녁, 선선한 바람이 거실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아내가 다시 거실로 왔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어린애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 이동훈, 너 뭐야? 잘못했으면 따라와서 용서를 빌어야 될 거 아니야?”

아내의 어조는 발랄했지만 시선은 애처롭기만 했다. 그 시선을 감추고 싶었는지 아내는 얼른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무조건 반사처럼 아내의 등을 토닥거렸다. 토닥거림이 잦아졌을 때 어디선가 뭐라고 묘사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

아내가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내 뱃속에서 기어 나오는 꺼-억 소리인 줄 알았을 거다.

네 배였어?”

나의 질문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잡아 자기 배에다가 갖다 댔다.

아직 활발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느껴지지? 꽤나 시끄러운 녀석이 나올 것 같아.”

아내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약간의 수줍음, 약간의 흐뭇함, 약간의 미안함, 약간의 경이로움, 약간의 기쁨 등이 복잡하게 뒤섞인 웃음이었다.

 

나는 대자리 위에 아내를 비스듬히 눕히고 아내의 아랫배에 귀를 갖다 댔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죽음 저편과 이편의 경계 어디에서 나오는 꺼-억 소리처럼 없음과 있음의 경계 어디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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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내는 역시나 대자리 위에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었다. 머리맡에는 읽다 만 책들이 엎어져있었다.

, 너 거기다가 침 안 흘렸냐?”

, 또 졸았나. 결혼식은 어땠어? 신부는 예쁘디? 웨딩드레스는? 요즘은 너나할 것 없이 죄다 탑을 입던데, 그쪽도 무슨 베라 왕이야? 밥은 잘 나왔어? 하긴 그래봐야 스테이크였을 거 아냐? 칼질할 때마다 핏물이 줄줄 흐르는 걸 다들 어쩜 그리 잘 먹는지. 차라리 국수나 갈비탕을 주지. 아참, 그 친구랑은 얘기해 봤어?”

 

나는 윤상원과 나눈 얘기를 전해주었다. 아내는 홍상수의 오 수정이 생각난다면서 킥킥거리더니 주섬주섬 책을 정리했다.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엔 갑자기 허리를 곧추 세우고 거나하게 트림을 했다. -.

, 동훈아, 나 왜 이래? 너한테 옮았나?”

하지만 아내의 표정은 장난스럽기만 했다. 순간, 베란다 너머 앞산에 진달래꽃이 만개했을 때 아내가 잠자리에서 모호하게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 너 혹시?”

? , 그거? 그거는 헛구역질이 나는 거고 이건 그냥 트림이잖아, 바보야.”

하긴. 넌 어차피 키우는 거 잘 못하잖아. 저 봉숭아도 지금이야 멀쩡하지만 조만간 또 죽일 거 아냐?”

내가 죽이는 거야? 제 수명이 다 해서 죽는 거지.”

 

아내의 얼굴에는 서글픈 기색이 감돌았다. 나는 아내가 그냥 가볍게 토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니까 저러다 말겠지, 라고. 사실 서글퍼진 건 나였다. 연애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결혼할 때도 우리는 아이를 원치 않았다. 이십대 때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름대로 원칙이 있어서였다. 그 어떤 아이도 자기를 낳아달라고 하지 않았건만 자기들이 원해서, 또 필요해서 아이를 만드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만행이라고 여겼다. 더 무서운 건 철저하게 객체 내지는 대상에 불과했던, 심지어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던 아이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어마어마한 주체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 공포를 달래기 위해, 우리가 너를 위해서 희생했다, 라는 식의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젊은 날의 우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만나서 결혼까지 했지만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이유로 아이를 갖는 것이 꺼려졌다. 말도 안 되는 원칙 따위는 사라져버렸지만 어쩌면 그 때문에 더 무서워졌다. 어차피 살아가면서 우리가 우리의 원칙이나 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아이조차도 자연스러운 부부생활을 거쳐 그런 식으로 태어난다는 게 무서웠다. 아마 이와는 무관하겠지만, 정사의 횟수가 줄어들수록 꿈을 더 많이 꾸게 됐다. 그리고 극히 산술적인 확률 원칙에 따라 그 꿈도 더 빈번해졌다.

 

아내가 어느새 명랑해져서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어쨌거나 꽃이 피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거야.”

아내 특유의 딱따구리 같은 웃음이 이어졌다. 내가 달려들자 아내는 얼른 방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아내를 따라갔다. 어린애들처럼 몸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아내의 몸 여기저기를 간질였고 아내의 방어가 약간이라도 허술해지면 곧장 배를 공략했다. 최근 들어 아내의 배에 도톰하게 살이 올라 간질이는 것이 더 재밌었다. 나의 커다란 손이 아내의 배꼽 주위의 살에 닿는 순간, 아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 변태야! 그만 좀 못해!” 그러곤 내 가슴팍을 향해 거세게 발길질을 해버렸다. -. 바로 그때 내 뱃속 깊은 곳에서 트림이 올라왔다. 환청인가.

 

아이, 술 냄새야. 안주는 치킨이었냐?”

나 트림한 거 맞지?”

당연하지. 방안에 느끼한 냄새가 가득하잖아. -. -. -.”

아내는 -을 몇 번씩 반복하면서 몸까지 힘껏 움츠렸다. 그러곤 또 딱따구리처럼 자지러졌다.

뭐가 그리 웃기냐? 숨 넘어 가겠다.”

나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습관적으로 아내의 도톰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아내도 역시나 습관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아내의 배를 처음엔 살금살금, 점차 더 무자비하게 간질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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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월이 중순을 넘겼을 때도 나는 여전히 그 꿈과 환청을 가벼운 감기처럼 달고 살았다. 동문회 게시판에서 그 친구의 청첩장을 보게 된 건 이 무렵이었다. 짙은 와인색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하얀 색 턱시도를 입은 친구가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한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윤상원. 그렇다, 바로 이 이름이었다. 그때 아내한테는 손사래를 쳤지만 나도 모르게 결혼식 날짜를 기다리게 됐다.

 

반팔을 입어도 후텁지근할 만큼 햇빛이 강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그 친구, 그러니까 윤상원은 작년에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모 법무법인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지금의 신부를 만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학과 동기들은 신랑신부를 본 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변호사 판사 부부의 탄생어쩌고 하며 의례적인, 심지어 의무적인 부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정된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내 머릿속에선 그 꿈 얘기가 곪을 대로 곪은 종기마냥 속을 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친구의 얼굴을 보란 말이다. 원래도 진취적이고 밝은 성격이긴 했지만, 오랜 노력의 결실로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됐고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십대 중반의 여성을 신부로 맞이한 그의 얼굴 어디서도 그날 저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억 소리와 토사물 때문에 그의 얼굴에 번진 경악과 공포, 어린애 같은 울음은 그의 기억 창고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 호텔 근처 호프집에서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나는 나를 다소 불편하게 여기는 친구들의 시선을 무릅쓰면서까지 자리를 지켰다. 윤상원은 바쁜 와중에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네 결혼식 못 가서 미안하다. 워낙 바쁜 때여서.”

뭘 그런 거 같고.”

이렇게 응수를 하면서도 내심 허탈했다. 한 시절엔 그래도 밥 한 끼 정도는 서걱거림 없이 먹을 수 있는 사이였건만 이제는 사교적이고 외교적인 말들, 훈련되고 다듬어진 표정들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윤상원도 사정은 비슷하여 허망한 말들만 내뱉었다.

공기업이라 좀 편하긴 하지?”

요즘은 딱히 그렇지도 않아. 연봉도 적고.”

사실 연봉이 적다는 생각은 딱히 안 해봤지만, 피로연에 참석한 동창들이 대부분 고등고시합격자라서 괜히 주눅이 들었는지 이런 말까지 무심결에 덧붙어버렸다.

그냥 밥 먹고 살면 되지, 사람 사는 거 별 거 있냐? 부자라고 하루 다섯 끼 먹는 것도 아닌데. 아이는?”

, 아직 없어.”

서둘러. 우리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뜻대로 잘 안 된대. 혜민이던가, 걔도 이제 중반이잖아.”

그러면서 윤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을 가는 것 같아 나도 따라 일어섰다. 그제야 비로소 용기를 좀 내볼 수 있었다. 기껏해야 한두 번 학교에서 마주친 것이 전부일 텐데도 친구의 여자친구, 아니, 아내의 이름까지 용케 기억해낸 녀석한테 갑자기 신뢰가 생긴 탓인지도 몰랐다.

 

나는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써서 그 때 일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윤상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휴, 동훈이 너도 웃긴 놈이다. 그 옛날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냐?”

그게 말이지, 네가 그 꿈 얘기를 해준 뒤에 내가 그 꿈을 꾸게 됐거든.”

?”

왜 감기를 산다는 말 있잖아? 그렇게 너한테 꿈을 산 것 같더라니까.”

나의 곤혹스러운 표정에 친구 역시 꽤 심각한 표정으로 화답하며 그 나름의 고백을 했다.

사실, 동훈아, 그때 나 병원에 좀 다녔어. 후유증이 꽤 오래 가더라고. 너한테는 왠지 말을 못 하겠더라. 네가 괜히 미안해할까 봐 신경도 쓰이고. 아니,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그때 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었냐?”

나는 윤상원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절절맸고, 윤상원은 잠깐 멋쩍은 웃음을 짓긴 했지만 쌓인 말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그때 네가 뭐더라, 기말 리포트를 대신 써준다고 했던가? 여하튼 뭔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런 델 따라 갔을 턱이 없잖아? , 그런데 그때 너 엄청나게 씩씩했었어. 그거그러니까 그거도 네가 거의 다 닦았잖아. 진짜 대단한 놈이야. 술이 안 먹혀서 완전히 맨 정신이었을 텐데, 그거저어기 그 얼굴을 닦은 것도 너였잖아.”

, 그랬었나.”

나는 이렇게 말을 얼버무렸다.

 

동일한 순간, 동일한 사건에 대해 친구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완전히 정면으로 대치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어느 한 쪽이 무심결에 오해를 한 것일까, 아니면 아주 작당을 하고서 심리적 부담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기 편할 대로 과거를 재구성해버린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먼저 나한테 권유를 해놓고선 꼭 내가 자기를 억지로 끌고 간 것처럼 얘기를 하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기억을 재구성함에 있어 오류를 범한 사람이 윤상원이 아니라 나일 수도 있다. 게다가 아무리 내 용건이 급했기로서니, 결혼식 날 친구한테 좋은 얘기는 못할망정 흉흉한 얘기나 상기시키다니. 헤어질 때 윤상원은 병원에 한 번 가보라는 충고를 제법 진지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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