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이는 오후 내내 정은이의 오빠 타령을 들어 주어야 했다. 호청을 빨랫줄에 너는 동안에도 계속 징징댔다. 목욕탕 청소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행히 저녁밥을 보자 정은이의 눈물과 하소연은 잦아들었다. 밥상을 물릴 무렵 또 다른 보모 아줌마가 왔다. 소영이는 퇴근할 준비를 했다.

아줌마, 또 빛나만 예뻐해 주면 안 돼!”

내가 뭘 어쩐다고.”

아줌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잇! 약속해! 다 똑같이 예뻐해 준다고!”

이렇게 일침을 가한 뒤 소영이는 재활원을 나왔다.

 

재활원 앞. 마침 폐지를 가득 실은 수레 두 대가 길의 양쪽에서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두 대의 수레 모두 노인이 끌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운동장을 돌던 그 폐지 할아버지였다. 그 둘은 이제 비좁은 길을 서로 교차로 지나가야 했다. 그 사이를 재활원 노파가 뚫고 지나갔다. 두 노인은 신호등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보행자처럼 서서 세상만사를 잊은 듯 담담한 걸음을 옮기는 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파가 길을 다 건너자 두 노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방향을 잘 잡지 못해, 그들의 수레가 서로 부딪쳤다. 그 바람에 한 쪽 수레 위에 얹혀 있던 종이 박스 하나가 툭 떨어졌다. 서정적으로 쓸쓸한 장면에, 순간 불쾌한 소음이 일었다.

아니, 이 영감이! 그거 하나 제대로 운전도 못해?”

피해를 입은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상대방을 닦아 세웠다. 그쪽도 지지 않았다.

애당초 잘 묶어놨어야지! 어디서 뺨 맞고 어디서 화풀이야?”

두 노인은 기세등등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곧장 드잡이라도 할 기세였다. 실제로 주먹이 날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실하게 서로의 어깨를 치고 몸을 조금 흔들어놓는 것으로 끝났다. 소영이는 바닥에 떨어진 박스를 들어 다시 수레에 올렸다. 서로 다투는 것도 흥겹지 않았는지, 두 노인도 서로 엇갈린 채로 제 갈 길을 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굵은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영이는 파카 모자를 뒤집어쓰며 달리기 시작했다.

 

*

 

소영이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잤다. 떡붕어 아저씨는 아침 일찍 선글라스 아저씨와 함께 일을 나가고 없었다. 소영이는 고무줄로 머리를 대충 묶고 점퍼를 걸친 뒤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날렸다. 누리는 자기 집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안 했다. 선글라스 아줌마는 웬일로 대낮부터 부산을 떨었다. 소영이는 아줌마가 막 끓여 놓은 보리차 한 잔을 들고 마당으로 갔다. 그러고는 누리의 밥그릇에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 누리가 어슬렁거리며 집에서 나왔다.

너도 춥지? 은학이 오빠는 겨울마다 보리차를 마셨는데. 정말 옛날 일이야.”

하지만 누리는 물에 혀 한 번 대지 않고 소영이의 뺨만 핥아댔다.

따뜻한 물을 마시면 몸도 따뜻해지거든.”

소영이의 정성이 갸륵했는지 누리는 물그릇 곁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하지만 뜨거운 김에 질려 곧장 몸을 뒤로 빼며 시큰둥하게 깨갱거렸다.

어머나, 뭐 하는 짓이야?”

선글라스 아줌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소영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날이 너무 춥잖아.”

잘 한다! 개가 뜨거운 물을 어떻게 먹어?”

, ?”

왜는 왜야? 그냥 못 먹어. 갑자기 보리차는 왜 들고 나가나 했네. 그 정신으로 애들은 어떻게 돌보는지, .”

에이, 애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모도 같이 가자, ? 요즘 매일 집에만 있잖아. 텃밭도 꽁꽁 얼었고.”

소영아, 이모는 그렇게 험한 일은 못해. 게다가 얼마나 바쁜데. 너야말로 할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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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에 자원 봉사자가 도착했다. 젊은 대학생 둘이었고 연인이었다. 정은이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눈알을 동동 굴렸다. 젊고 건강한 남자를 보자 왠지 마음이 달떴다. 그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며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역시나 젊고 건강한 여자의 모습도 뭔가를 자극했다. 정은이는 소영이의 품안으로 안겨들며 얼굴을 붉혔다.

언니, 예뻐!”

저 여자애?”

아니, 저 쪽.”

정은이는 남학생을 가리켰다.

, 남자보고는 예쁘다고 하지 않아.”

그럼 뭐라 그래?”

소영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몰라. 하지만 예쁘다고 하지는 않아. 저어기, 너희들, 우선 이거 좀 치워 봐.”

소영이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도시락 찌꺼기를 가리켰다.

 

젊은 연인은 거의 자동적으로 청소를 후다닥 해치웠다. 그러다 문제의 홑청을 발견했다. 왜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는지도 알겠다는 투였다. 남학생은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명분을 발견한 양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분이 묻은 홑청이 저렇게 방에서 뒹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위생 상태가 이래서야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할 수가 없군요.”

재활원 건물을 본 순간부터, 아니, 재활원에 자원봉사를 신청한 순간부터 이 혈기 방창한 청년은 울분에 차 있었다. 소외되다 못해 완전히 버려진 특정 집단에 대한 의협심 가득한 분노로 똘똘 무장을 했던 것이다. 얇은 시멘트 벽, 장판 곳곳이 뜯기고 눌러 붙어 버린 누추한 방, 일부러 병균을 배양하는 것 같은 불결한 공기. 이 모든 것이 청년의 피를 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빠, 저것 좀 봐. 쟤는 철봉에 묶여 있어.”

여학생은 얼굴에 동정심을 가득 담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남학생은 더욱더 발끈했다.

세상에! 멀쩡한 아이를 이렇게 묶어두다니, 이게 뭡니까! 고도로 발전된 민주사회의 계몽된 시민에게 어떻게 저런 혈거 시절에나 가능할 법한 야만 행위를!”

남학생이 언성을 높이자 소영이도 열을 올렸다.

에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람이는 묶어 놔야 돼. 안 그러면 밖에 나간단 말이야. , 이름이 뭐야?”

소영이의 호통에 여학생은 겁을 집어먹었다. 자기 또래로 보이는 소영이가 마냥 이상했다. 팔뚝 힘이 무척 셀 것 같은 아줌마들이 하는 일을 호리호리한 처녀가 하고 있다니.

수정인데요, 이수정.”

수정이 너, 저기 가서 빨래 좀 해.”

 

괴상한 명령이었지만 수정은 곧 세탁실로, , 욕실로 갔다. 가건물처럼 얇은 건 물론이고, 방과는 달리 난방도 안 돼 바깥의 찬바람이 벽과 창문으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세탁기는 너무 낡은 것이어서 사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세탁실에서 오들오들 떨며 그냥 앉아 있었다. 소영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빨래는 안 하고 뭐해?”

소영이는 툴툴대며 이불호청과 겉옷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문 너머에서 뭔가가 쾅 넘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소영이는 얼른 세탁실 문을 열었다.

 

세탁실과 방문 사이의 비좁은 마루, 신발장 바로 곁에 정은이가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그 위에 남학생이 엎어져 있었다. 역시나 비좁은 현관 바닥에는 정리하다 만 신발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오빠! 뭐하는 거야?”

신발장을 정리하고 있는데 얘가 와서 자꾸.”

남학생은 일어나 구겨진 옷을 바로 잡았다. 정은이도 어기적대며 몸을 일으키더니 남학생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오빠! 뽀뽀!”

그러곤 정말로 그의 볼에 뽀뽀를 쪽 했다. 무거운 체중에 그는 비틀대기까지 했다.

뭐야, 정은이는 뽀뽀 놀이 하고 있었던 거야? 얘한테도 해봐, ?”

소영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여학생을 가리켰다. 하지만 정은이는 멈칫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 ? 얘한테는 하기 싫어?”

에잇, 정말 이게 뭐야!”

여학생은 방안에 걸어둔 코트를 걸친 뒤 그 길로 재활원을 나가버렸다. ‘뜻 깊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로 따라나섰지만 처음부터 영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남학생 역시 잠깐 머뭇거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어라, 벌써 가? 신발장 정리는? 목욕탕도 청소해야 되는데?”

오빠, 뽀뽀! 뽀뽀하고 놀자, ?”

당황한 남학생이 정은이를 떼 내자 숫제 울음까지 터뜨렸다.

아까는 잘 놀아줬잖아? 찌찌도 만지고 배도 간질이고.”

울먹거리며 정은이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남학생은 간이 쪼그라든 채 쏜살같이 내빼버렸다. 재활원 밖을 나와 싸늘한 아스팔트길을 한참 뛰어 내려간 다음에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돌렸다. 자기 몸으로 감겨드는 푸근한 몸뚱어리의 온기와 묵직하면서 유쾌한 중량감, 옷 속으로 파고드는 포동포동하고 따뜻한 손놀림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평생 처음 경험한 그 감각을 그는 스스로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바들바들 떨며 서있는 여자 친구를 보았을 때도 그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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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소영이는 빨랫감을 챙겼다. 속옷과 겉옷을 구분하여 차례로 세탁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그 와중에 선반 위의 빵 더미에서 단팥빵을 꺼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어느새 학교 갈 시간이 됐다. 진영이는 제 손으로 분홍색 잠바를 걸쳤다. 소영이는 나머지 아이들에게 겉옷을 입혔다. 빛나는 부축을 하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교실은 한 층 아래 지하에 있었다. 계단 앞에 이르러 소영이는 빛나를 등에 업었다. 골반 뼈가 뒤틀려 서로 방향이 완전히 어긋난 빛나의 두 다리가 계단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내려갔다. 빛나를 등에 업은, 아니 짊어진 소영이는 숨이 헉헉 차올랐다.

지하 교실은 공기가 썩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수시로 재채기를 해댔다. 특수교사가 나타났다. 아직 군대도 가지 않은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스웨터에 분필 가루가 묻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칠판에 1부터 5까지 숫자를 썼다. 가람이는 의자에 꽁꽁 묶인 채 몸을 뒤틀었다. 진영이는 속이 더부룩해서 자꾸 트림을 했다. 빛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은 죄다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정은이는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자동인형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뭐라고 계속 혼잣말을 했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온 소영이는 빨래를 걷어 하나하나 갰다. 어제 빨아 넌 이불 홑청 때문에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렸다. 표백제까지 사용했음에도 진영이가 싸놓은 싯누런 설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탁기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동안에 방청소를 했다. 빗자루로 방을 한 번 쓸고 나자 또 허기가 밀려왔다. 이번에는 카스텔라를 꺼내 먹었다. 방을 다 닦고 걸레를 빨아놓은 뒤에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냈다. 그러곤 힘을 주어 탈탈 턴 다음 작고 짧은 것은 밑에, 크고 긴 것은 위에 순서대로 널었다. 장난감 정리까지 다 끝날 무렵 점심시간이 됐다. 소영이는 다시 방을 나갔다.

지하 계단 밑에서 특수교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진영이가 기저귀에 똥을 싼 다음 바지 속에 손 넣어 주물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이는 얼른 진영이를 목욕탕으로 데려왔다. 타일의 표면이 다 닳은 욕실 한 가운데에 직사각형 모양의 욕조가 있었는데, 들어가서 씻으라는 곳이 아니라 그냥 물을 받는 곳이었다. 소영이가 뜨거운 물을 받아 진영이를 씻기는 사이에 아이들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소영이는 지하 교실로 달려갔다. 빛나는 여전히 의자 위에서 몸을 뒤틀며 울부짖고 있었다. 빛나의 불룩한 스웨터 밑으로 종이뭉치, 풀 뚜껑, 몽당연필, 형광펜, 머리카락과 먼지뭉치 등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런, 뭘 또 이렇게 많이 모았어, ?”

소영이는 빛나의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까 소영이가 먹은 단팥빵 봉지며 오래 전에 잃어버린 더러운 양말짝이며 코를 푼 휴지뭉치가 나왔다. 팬티 속에서는 진영이의 머리를 묶어놓았던 고무줄과 머리핀이 나왔다.

설마 이걸 깔고 앉아 있었단 말이야? 아휴, 얼마나 아팠을까. , 정말 짜증 나!”

엉덩이 부분을 헤적인 손가락에 피가 살짝 묻어나왔다. 소영이는 씩씩대며 빛나를 들춰 맸다. 물론 내리막길보다 오르막길이 더 힘들었다. 옆에 있던 특수교사가 나섰다.

제가 좀 도와드리죠.”

그는 소영이 옆에 바투 붙어 빛나를 업으려 했다. 그러자 빛나는 괴물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다.

우리 빛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려.”

소영이가 낑낑대며 힘겹게 대답했다. 특수교사는 소영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벌써 반 년째 봐오고 있지만 아무래도 특이한 여자애였다. 어딜 보나 한창 물이 오른 나이에 동그란 두상과 작은 얼굴, 큰 키와 긴 팔다리를 보면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법했다. 하지만 어린애 같은 표정과 몸짓, 말투는 누구에게나 혐오감 내지는 동정, 적어도 의아스러움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방안에는 구린내가 진동했다. 아까 개놓은 이불 홑청 위에 희주가 푸짐한 똥을 싸놓은 것이었다. 소영이는 금방 울상이 됐다. 희주도 그 표정을 읽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힘겹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언니, 화장실이 너무 멀어.”

차라리 옷을 입은 채로 눴으면 좋았을 것을 희주는 그 습관이 안 돼 있었다. , 이 방 아이들 중 드물게 제 발로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볼 줄 알고 소화력도 좋은 편이었다. 웬일로 오늘은 똥이 좀 질었다. 그것이 화장실까지 달려가지 못한 이유였다. 똥은 걷어냈지만 하얀 홑청은 또다시 싯누런 물이 들어버렸다. 희주도 진영이만큼은 아니지만 약을 많이 먹기 때문에 똥냄새가 무척 지독했다. 소영이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맞은편 도시락 집 점원이 나타났다.

점심요! 도시락 왔어요!”

점원은 일곱 개의 도시락을 방안까지 갖다 주었다.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를 맡고 잠깐 주위를 둘러보기는 했지만 서둘러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우르르 도시락 쪽으로 몰려들었다. 빛나는 뒤틀린 팔을 꺾어 바닥을 짚고 뒤틀린 두 다리를 질질 끌며 포복을 하다시피 기었다. 배가 고프기는 소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소영이는 얼른 도시락 뚜껑을 다 열어놓고 빛나를 껴안았다. 수저도 따로 필요 없이 음식물이 빛나의 입과 소영이 입으로 번갈아 들어갔다. 정은이도 순서를 기다리다 못해 제 손으로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제 뜻을 따라주지 않으니까 아예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도시락 통에 코를 처박고 손으로 밥을 거머쥐고 바로 입안으로 가져갔다. 반찬을 먹기에도 손이 훨씬 더 편했다. 제 배를 어느 정도 채운 소영이가 정은이 곁으로 왔다. 정은이의 손은 밥알, 김치 국물, 고등어 등껍질, 불고기 양념과 쇠고기 부스러기 등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언니, 나 혼자서도 잘 먹었지, ?”

소영이는 걸레를 가져다가 정은이의 손을 닦아주었다. 정은이는 소영이의 품안으로 손을 뻗어 소영이의 배와 젖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아이, 뭐 하는 짓이야! 간지러워!”

나는 좋은데 언니는 싫어? ?”

정은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에이, 또 왜 울어? , 고등어랑 밥이랑 한 숟가락만 더 먹자, ?”

정은이는 밥보다도 소영이의 웃음 가득한 다정한 시선과 손길에 또 금방,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소영이는 가람이의 한 쪽 팔을 철봉에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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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크게 두 개였다. 오른쪽에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이 생활공간이었고 사무실은 정면에 보이는 건물에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재활원 원장을 만났다.

그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작고 살이 별로 찌지 않은 중년 남자였다. 얼굴에 구릿빛이 도는 것이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정반대로 중증 장애아들이었고, 그렇기에 대개가 건강 상태도 좋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은 주로 재활원에서 지어준 것이었고 생년월일은 그들이 발견된 날짜였다. 출생지도 그들이 처음 발견된 곳, 가령 ‘X공원 시계탑 근처’, ‘T문화관 입구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짜인 시간표에 따라 정기적으로 출장을 오는 특수교사에게 수업도 받았고 견학을 나가기도 했다. 삼시세끼도 꼬박꼬박 먹었고 하루에 몇 번에 걸쳐 대소변을 봤고 주기적으로 목욕을 했으며 9시면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다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중 어느 것 하나 제 손으로, 제 발로 제대로 하지 못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보모, 즉 생활재활교사였다. 재활원에는 일감은 늘 넘쳐났고 일손은 늘 부족했다. 그나마 있던 생활재활교사도 수시로 바뀌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더러 오긴 했지만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한 무더기의 아이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활원을 찾아온 신체 건강한 남성과 용모 단정한 여성은 달가운 존재였다. 떡붕어 아저씨는 자기가 아니라 소영이를 위해서 이력서까지 준비했다. 단절이 무척 심한 이력에 재활원 원장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소영이와 5분 정도 얘기를 나눠 보고 흔쾌히 고용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재활원에서 당직근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자야 된다는 조건에도 소영이는 얼른 동의했다.

 

 

이른 아침이라 바람이 무척 매서웠다. 운동화를 신은 채 내리막길을 타는 소영이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30분쯤 뒤 재활원에 도착했을 때는 온 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시멘트벽이 무척 얇았지만 방 안은 따뜻했다.

소영이는 아이들 아침부터 챙겼다. 벌써 반년이 넘도록 반복돼 온 일이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로 밥상이 올라왔다. 식당 아줌마가 전날 밤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을 가져온 덕분에 아침 식탁이 푸짐했다. 특히 프라이팬에 살짝 데운 부침개와 튀김들, 동그랑땡을 보자 절로 군침을 돌았다. 일단 하나 집어 먹고 아이들에게 밥을 먹였다. 진영이는 이 방에 사는 일곱 명의 아이들 중에서 힘들게나마 제 손으로 밥을 떠먹을 수는 축에 들었다. 소영이는 다른 아이들을 붙잡고 차례로 밥을 떠먹였다. 정은이는 밥숟가락이 입 앞에 올 때마다 늘 소영이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고 아양을 떨었다. 입안에 음식물을 넣은 뒤에는 꼭 한두 마디를 덧붙였다.

언니, 맛있어, 헤헤.”

그래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해.”

, , 꼭꼭!”

그 때마다 정은이의 입에서는 음식물이 툭툭 튀어나와 소영이의 뺨에 떨어졌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금방 울상이 됐다. 소영이가 빛나를 껴안고 밥을 먹이기 때문이다.

언니 미워! 빛나만 예뻐해.”

삐죽거리는 정은이를 달래며 소영이는 빛나의 힘겹게 벌어진 입 사이로 음식물을 집어넣었다. 뒤틀린 안면근육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열심히 지켜보았다. 드디어 어어어에 가까운 소리가 나왔다. 발버둥을 치거나 몸을 뒤틀지도 않았다. 오늘 식사가 꽤 만족스러웠다는 뜻이다. 열여섯 살이나 된, 아이 아닌 아이를 붙잡고 씨름하다 보니 소영이의 얼굴에서는 땀이 삐질 흘렀다.

그 사이에 튀김과 전유어, 동그랑땡이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화들짝 놀란 소영이는 곧장 진영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란 오징어튀김이 진영이의 이빨에 붙들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소영이는 오징어튀김을 진영이의 이빨 사이에서 잡아 빼기 시작했고, 진영이는 금방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 동그랑땡 한 옴큼을 집어 입안에다가 무지막지하게 틀어넣었다.

으악! 빨리 뱉어, 뱉으란 말이야! 또 설사할 거지, ? 너는 기름하고 밀가루는 안 돼!”

소영이는 소리를 지르며 진영이의 입을 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진영이는 음식물이 삐져나온 채로 앙다문 입을 절대 벌리려고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자 성질을 내며 팔다리를 마구 놀려댔다. 다른 아이들은 신이 났다. 정은이는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대고, 빛나는 방안을 기어 다니고 머리를 벽에다 콩콩 박으며 좋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소영이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간신히 진영이의 입을 벌렸는데, 그 짧은 순간 진영이가 소영이의 손가락을 깨물어버렸다. 소영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 힘으로는 손가락을 빼낼 수 없었던 탓에 소영이는 무조건반사로 긴 다리로 있는 힘껏 진영이의 배를 차버렸다. 진영이는 뒤로 나자빠졌다. 진영이의 커다란 머리가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닿는 소리가 쿵, 하고 울려 퍼졌다. 소영이는 얼른 달려가 진영이를 안아 일으켰다. 진영이는 너무 놀라 울지도 않고 멍한 눈을 굴리다가 입안에 들어있던 몇 개의 동그랑땡을 뱉어내는가 싶더니 반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아이, 나 몰라! 이제 어떡해!”

울상이 된 소영이는 얼른 물을 가져왔다. 진영이는 동그랑땡을 삼키듯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입가로 줄줄 흘러내리는 물을 소영이가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한숨 돌리고 나니 가람이가 벽 앞의 철봉에 손이 묶인 채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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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붕어 아저씨는 족구를 하다 말고 잠깐 쉬고 있었다. 소영이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폐지 할아버지는 늙었고, 축구공 갖고 노는 꼬마는 어려. 족발 집 아들은 젊고 아줌마는 늙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털갈이했으니까 누리도 한 살 더 먹었어. 아저씨, 나 좀 있으면 열아홉 살이지? 아니다, 스무 살인가? 아무 데도 안 가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나이도 못 세겠어.”

나이는 세지 않고 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야 나이를 안 먹을 수 있다면 그렇지.”

그럼, 우리 소영이는 뭘 해야 될까?”

점쟁이 할아버지가 베풀고 살라고 했는데, 그지?”

 

그때 선글라스 부부가 다가왔다.

이제 슬슬 내려갑시다. 족발 사셔야죠, 헤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닷없이 소영이가 선글라스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안 갑갑해?”

이래도 세상은 다 잘 보인다.”

한 번 벗어봐. 아저씨 눈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

밉게 생겼는데 봐서 뭐하려고?”

선글라스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에이, 뭐 그리 숨기고 그래요? 한 번 보여줘요. 보고 싶다는데.”

선글라스 아줌마가 부추겼다. 선글라스 아저씨는 잠깐 망설이다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는 눈이 작은 편이었다. 그 작은 눈마저 한쪽이 완전히 감겨 있었다. 그것을 소영이는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영원히 닫힌 눈꺼풀 위로 깊은 상흔이 난잡한 화살표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멀쩡히 뜨인 다른 쪽 눈은 감긴 눈의 역할마저 자기가 다 해주겠다는 듯 야무지게 번득였다.

눈이 하나라도 세상을 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구나. , 그 할머니다! 할머니!”

 

그것은 한 달쯤 전 쓰레기봉투를 남의 집 대문 앞에 버리려 했던 덩치가 조막만한 노파였다.

어휴, 결국 여기다 버리기로 하셨어요?”

선글라스 아줌마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번에도 아무 말 않고 쓰레기봉지를 툭 내려놓고는 돌아섰다. 소영이는 할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머니, 할머니 재활원에 산다면서? 할머니, 나 거기 보여줘.”

노파는 신체의 감각 기관 중 어디가 완전히 마비된 사람처럼 무디고 멍한 표정을 지었을 뿐, 그냥 제 갈 길을 갔다. 등이 전혀 굽지 않은 작은 몸이 고른 보폭을 뽐내며 리듬을 타듯 조용히 움직였다. 누리네 집 사람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형국이 됐다.

 

*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다. 새파랗던 나뭇잎들이 순식간에 샛노랗게 변해 애처롭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나마도 거센 바람이 불어와 사정없이 날려 버렸다. 재활원은 대문이랄 것도 없이 곧장 마당이 나왔다. 마당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대문이요 문패였다. 나무 아래 벤치에 재활원 원장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가뜩이나 조막만한 몸뚱어리에 다리를 위로 올린 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얗게 샌 머리와 노르께한 얼굴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늦가을의 찬바람에 흰머리가 마구잡이로 날렸지만 노파는 멍한 눈을 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벤치 밑에서는 지렁이 한 마리가 온 몸에 튀김가루처럼 흙을 묻힌 채 괴로운 듯 몸을 비틀고 있었다. 이것이 떡붕어 아저씨와 함께 재활원을 찾아간 소영이가 맨 처음 본 풍경이었다. 노파는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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